이신(李信) 목사의 강론: “깨달음이 있는 신앙”
노종해
업데이트 2023.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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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李信) 목사의 강론: “깨달음이 있는 신앙”
이신(李信) 목사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서 깨닫는 자나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 13:23)
1. “깨달음”이란 말에 대해서
구역성경에 보면 원래 “깨달음”이란 말은 인간의 자연적인 기능이 아니라 일종의 하나님의 선물로서(왕상 3:9. 단 2:12)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구하여 주시는 카리스마적인 것이다.
왕상 3:9, 단2:12그래서 시편에는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면 진심으로 지키리이다”(시 119:34, 27, 73, 125, 144, 169)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셨다가 또 마땅치 않을 때 도로 회수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사 29:14)
이사야 29:14그러므로 “깨달음”은 인간이 교육적으로 배워서 습득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고 천래적(天來的)으로 위에서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것이다. 특히 하나님에게 속한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 데는 자연적인 기능이나 방법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천래적인 깨달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기도하는 가운데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노라” 하면서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 총명이 어두워진 것을 통회하고 자복할 때에 이상(異像)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단 9:13-27)
신약성경에는 “깨달음”이란 말( )이 사십 회나 나오는데 주로 복음서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는 데 관련되어 말씀하고 있다.
신악성경에 40회나 나오는 "깨달음"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주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아직도 알지 못하여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라고 하시면서 당신의 하신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촉구하신 것을 복음서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막 7:14, 8:17, 21, 마 13:13, 51, 15:17, 16:9, 11:24-25) 특히 예수께서는 비유로 당신의 메시아 되심과 그 나라의 임재를 말씀하셨을 때 그 청중의 “깨달음”을 강력히 촉구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마 13:13-15, 19, 23, 51) 그것은 인간적인 지혜나 단순한 이지적인 것으로는 오히려 깨닫기 힘든 위에서부터 주신 통찰력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바울의 표현대로 말한다면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官員: 잘난 사람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고전 2:6-7)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전 역사(全歷史)를 구원하실 수 있는 눈과 이해력은 단순한 지적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천래적 깨달음이 필요하다.
2. 깨달음과 믿음

이신 목사(좌측, 앞줄 첫번째-제1회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1959년)
깨달음이 있는 믿음은 예수께서 항상 그 제자들에게 바라시던 믿음이었다. 달란트 비유 가운데서도 보면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지식했던 자였다. 그래서 주인이 돌아왔을 때 자기가 받았던 한 달란트를 땅속에 파묻었다가 고스란히 그대로 잘 보존했다는 자부심마저 가지고 내놓았으나 주인이 그 돈을 맡길 때의 심정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자들은 주인의 돈 맡기는 심정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증식하여 내놓았을 때 주인은 매우 기뻐하였다.(마 25:14-30)
어떤 명령과 강요라든지 그런 관계에서가 아니라 그분과의 인격적 교류가 생기고 그렇게 해서 그분의 말씀은 참으로 옳은 말씀이요 천지가 없어져도 믿음직한 말씀임을 깨닫고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자발의식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꼭 지적(知的)으로 알아야만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신앙을 고조하자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예수께서 인격과 통하는 영적(靈的) 혜안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은 세상의 지혜와 대립되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였다.(고전 1:20-21)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의 능력은 이런 “깨달음이 있는 믿음”에서 생긴다. 그것은 누가 강요해서 나오는 것도 아니요 어떤 의무감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요 또는 어떤 권리에 좌우돼서도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무한한 영력(靈力)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이 있는 믿음” 가운데서 바울이 그렇게 고조했던 노예 종교의 자리에서 해방된 참 자유인의 신앙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이제는 노예와 상전과의 관계에서 주인의 눈치나 보면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깨닫고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곧 내 일을 하는 것이라는 자발의식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갈 5:1)고 하였던 것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神)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除)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행하게 하리니”라고 하였다. 성령은 “지혜와 깨달음의 영”(사 11:2)이시다.
이사야 11:2
성령이 임할 때 과거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오의(奧義)를 속에서 깨닫고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따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 에스겔은 새 영(靈)을 줄 것인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除)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 신약에서 사도 요한은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요 16:13)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신앙과 신약적인 신앙의 다른 점은 참으로 “깨달음이 있는 믿음”이냐 하는 이 차이인 것이다. 과거의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구속하나 이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끄는(强勸) 도다”(고후 5:14) 하였는데,
고후 5:14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는 자가 속에서 부토 솟구쳐 올라오은 강함으로 그 예수를 자랑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 앞 절에서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의 그처럼 강력한 영력(靈力)은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깨닫는 데서부터 용출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당신에게 봉사하기를 원하신다. 구약시대에도 사람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재물을 드리고 예물을 원하셨다.( free will offering, willingly, voluntarily: 출 5:19, 레 22:18, 21, 23, 38, 민 15:3, 신 12:6, 17, 에스랴3:5, 8:28, 시 119:119)
출애급기 5:19 등 구약성경에서
사실 가인과 아벨의 제물의 차이점은 그것이 자원하는 제물이냐 아니냐 하는 것일 것이다. 신약에는 바울의 표현대로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하였다”라고 한 자발적인 그것이다.(choosing of one’s self, 고후 8:3-4; forwardneness, willing mind, readiness, willing mind: 고후 8:11, 19, 9:2, 행 17:11)
고도 후서 8:3-4
고린도 후서 8:11, 19, 9:2, 행 17:11
참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낳을 때부터 자원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하나임께 드려야지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당신에게 섬기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그런 자발의식은 “깨달음” 없이는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마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마음,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마음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발의식이 솟구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이 있는 믿음 가운데서 바울이 그렇게 강조했던 노예적인 종교의 자리에서 해방된 참 자유의 신앙을 가질 수 있다. 이제는 우리들의 신앙이 상전과 노예와의 관계처럼 주인의 눈치나 보면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곧 나의 일이요 가장 귀하고 생명이 넘치는 것임을 깨닫고 자발의식에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갈 5:1)고 하였던 것이다.
3. 성령과 깨달음
신학 강의와 개척교회 현장에서:(좌로부터)-심영진 목사, 이신 목사, 고광석 목사)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사형을 받았을 때 그의 제자들은 실의에 차서 다 자기 갈 속으로 흩어져 버렸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같이 모여서 기도하다가 그들에게 번갯불처럼 “깨달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을 가졌었다. 그 후부터 그들은 담대해졌고 솟구쳐 오르는 영력을 이기지 못하여 사방으로 나가서 복음을 힘차게 전하기에 이르렀다. 진정한 의미에서 “깨달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야말로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 순간인 것이다. 예수께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고 하신 대로 성령은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장차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싻 곧 메시아가 받을 영을 “깨달음의 영”(사 11:2)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깨달음이 있는 믿음은 예수께서 항상 그 제자들에게 바라시던 믿음이었다. 달란트 비유 가운데서도 보면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지식했던 자였다. 그래서 주인이 돌아왔을 때 자기가 받았던 한 달란트를 땅속에 파묻었다가 고스란히 그대로 잘 보존했다는 자부심마저 가지고 내놓았으나 주인이 그 돈을 맡길 때의 심정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자들은 주인의 돈 맡기는 심정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증식하여 내놓았을 때 주인은 매우 기뻐하였다.(마 25:14-30)
어떤 명령과 강요라든지 그런 관계에서가 아니라 그분과의 인격적 교류가 생기고 그렇게 해서 그분의 말씀은 참으로 옳은 말씀이요 천지가 없어져도 믿음직한 말씀임을 깨닫고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자발의식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꼭 지적(知的)으로 알아야만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신앙을 고조하자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예수께서 인격과 통하는 영적(靈的) 혜안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은 세상의 지혜와 대립되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였다.(고전 1:20-21)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의 능력은 이런 “깨달음이 있는 믿음”에서 생긴다. 그것은 누가 강요해서 나오는 것도 아니요 어떤 의무감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요 또는 어떤 권리에 좌우돼서도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무한한 영력(靈力)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이 있는 믿음” 가운데서 바울이 그렇게 고조했던 노예 종교의 자리에서 해방된 참 자유인의 신앙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이제는 노예와 상전과의 관계에서 주인의 눈치나 보면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깨닫고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곧 내 일을 하는 것이라는 자발의식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갈 5:1)고 하였던 것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神)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除)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행하게 하리니”라고 하였다. 성령은 “지혜와 깨달음의 영”(사 11:2)이시다.
이사야 11:2성령이 임할 때 과거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오의(奧義)를 속에서 깨닫고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따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 에스겔은 새 영(靈)을 줄 것인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除)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 신약에서 사도 요한은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요 16:13)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신앙과 신약적인 신앙의 다른 점은 참으로 “깨달음이 있는 믿음”이냐 하는 이 차이인 것이다. 과거의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구속하나 이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끄는(强勸) 도다”(고후 5:14) 하였는데,
고후 5:14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는 자가 속에서 부토 솟구쳐 올라오은 강함으로 그 예수를 자랑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 앞 절에서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의 그처럼 강력한 영력(靈力)은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깨닫는 데서부터 용출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당신에게 봉사하기를 원하신다. 구약시대에도 사람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재물을 드리고 예물을 원하셨다.( free will offering, willingly, voluntarily: 출 5:19, 레 22:18, 21, 23, 38, 민 15:3, 신 12:6, 17, 에스랴3:5, 8:28, 시 119:119)
출애급기 5:19 등 구약성경에서사실 가인과 아벨의 제물의 차이점은 그것이 자원하는 제물이냐 아니냐 하는 것일 것이다. 신약에는 바울의 표현대로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하였다”라고 한 자발적인 그것이다.(choosing of one’s self, 고후 8:3-4; forwardneness, willing mind, readiness, willing mind: 고후 8:11, 19, 9:2, 행 17:11)
고도 후서 8:3-4
고린도 후서 8:11, 19, 9:2, 행 17:11참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낳을 때부터 자원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하나임께 드려야지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당신에게 섬기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그런 자발의식은 “깨달음” 없이는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마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마음,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마음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발의식이 솟구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이 있는 믿음 가운데서 바울이 그렇게 강조했던 노예적인 종교의 자리에서 해방된 참 자유의 신앙을 가질 수 있다. 이제는 우리들의 신앙이 상전과 노예와의 관계처럼 주인의 눈치나 보면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곧 나의 일이요 가장 귀하고 생명이 넘치는 것임을 깨닫고 자발의식에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갈 5:1)고 하였던 것이다.
3. 성령과 깨달음
신학 강의와 개척교회 현장에서:(좌로부터)-심영진 목사, 이신 목사, 고광석 목사)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사형을 받았을 때 그의 제자들은 실의에 차서 다 자기 갈 속으로 흩어져 버렸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같이 모여서 기도하다가 그들에게 번갯불처럼 “깨달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을 가졌었다. 그 후부터 그들은 담대해졌고 솟구쳐 오르는 영력을 이기지 못하여 사방으로 나가서 복음을 힘차게 전하기에 이르렀다. 진정한 의미에서 “깨달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야말로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 순간인 것이다. 예수께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고 하신 대로 성령은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장차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싻 곧 메시아가 받을 영을 “깨달음의 영”(사 11:2)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사야 11:2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고(고전 3:17), 또 진정한 의미에서 “깨달음”이 있다. 여러 가지 깨달음 가운데서도 성령은 예수가 누구인가를 바로 깨닫도록 하신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의 진정한 모습을 간파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가 이렇게 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인가 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는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主) 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밖에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2:13) 그러므로 “깨달음이 있는 믿음”은 성령의 선물이요 인간적인 지혜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신 목사님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도 구사하시어, 글자를 사진으로 표기하였다. (강론:李信/문자정리:노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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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이신(李信, 1927-1981) 목사는 감신 졸업 후(1950년) 전도사로 목회 시작하셨으나, 한국전쟁 때 고향인 여수 돌산으로 피신 중 환원운동으로 전환하여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사안수받았다.(1951년) 성서연구회 등 강의와 교회개척, 신학교 교수로 활동하시다가 도미유학(1966년)으로, 밴더벨트 신학대학의 석, 박사(1971년)로 귀국하여 이대 등에서 강의하시었다.
최근 ”슐리어리즘과 영의 신학“, ”돌의 소리“ 등 유고를 후손 이정배 교수/ 이은선 교수, 이경 교수들에 의해 출판하여”성령신학“, ”영성신학”으로 토착신학, 한국적 K-기독교를 이어가고 있다. 이 강론은 “돌의 소리”, PP167-176의 글을 문서정리 하였다.(정리:노종해-2023. 11. 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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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목사는 슐리어리즘 영의 신학자요 화가이시다!
이신 저: 돌의 소리(동연, 2012)

이신 저: 돌의 소리(동연, 2012)
이신:"돌의 소리", 뒷 표지의 책 소개 글!
이신 저: 슐리어리즘과 영의 신학(종로서적, 1992)
이신 그림: 새 그리스도로지(1980년)
이신 그림: 엄마와 아이들(1960년)
이신의 "한국 쉬르리얼리즘 연구소"(1979년)
이신 목사 저서와 영의신학, 토착 K-기독교 연구 서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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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해
1개의 댓글
김경○ (비회원)2023-11-08 18:46:43IP
삭제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기독교인을 구닥다리 취급하고 있는 교인들이 제법 된다.
李信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자유의지’보다 우위에 두었다.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는 한 인간이 자유의지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말짱 도루묵이란 거다.
나의 경우 처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위에 두다가 중간에 몇 몇 서적이나 종교선동가들의 감언이설에 선동당하여 뭣 모르고 섣부르게 ‘인간의 자유의지’로 넘어갔다가 주체성을 확립하고부터는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로 回歸했다.
성경을 ‘하나님의 은혜’로 설명하여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인간의 자유의지’로 설명하여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을 훨씬 능가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설명 불가능한 부분을 하나님의 은혜로 설명하면 납득되는 경우가 차고도 넘친다.
이스라엘-하마스전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비교 설명하고자 한다.
최근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을 예로 들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여 평화, 휴전을 부르짖는 사람들(주로 진보적인 지식, 종교인)이 인도주의니 인류애니 뭐라고 떠든다고 해서 전쟁이 멈추어지지 않는다. 이런 전쟁은 러시아-우크라이나, 남예멘-북예멘-사우디아라비아, 로힝야族과 미얀마族, 아프리카 종족분쟁... 지금 현재도 무수히 많다. 입에 평화를 달고 사는 진보지식인이나 진보종교인들 역시 막상 전쟁이 일어나니 그들도 별수 없이 총 들고 적을 무찌른다고 난리다. 상대에 대한 양보가 일절 없다. 웃기는 건 다른 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도덕군자가 된다. 대표적인 예가 키릴 모스크바大주교다. 러-우전쟁은 불쌍한 러시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서 정당하고, 이-하전쟁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벌이는 전쟁이라서 즉시 휴전해야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어야한다고 한다. 편리한대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다. 이런 사람들이 진보지식인(진보종교인) 중 유난히 많다. 전두환 타도하자는 사람이 김일성에겐 고개 숙인다.
러-우전쟁, 이-하전쟁을 구약에 나오는 무수한 전쟁과 연결시키면 이러쿵저러쿵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누가 전쟁하고 싶어서 하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랑과 보복’을 동시에 부여했다. 예수님이 평화를 좀 더 강조한 것만 가지고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러면 하나님이 구약에 나오는 대로 무수하게 전쟁한 것은 무엇이냐? 기독교인은 ‘三位一體’ 아니냐? 하나님의 전쟁 불사를 무시하고 예수님의 평화 강조만을 偏食하는 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볼 수 없다. 인간의 부조리가 쌓이고 쌓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사랑의 다른 측면 보복심리가 쌓이게 되면 폭발(전쟁, 싸움, 살인)하게끔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천당’도 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전쟁’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에게 무조건 단 ‘설탕’만 주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 인간에게 쓰라린 ‘사망(전쟁)’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어떤 사건을 설명하면 일관성 있게 조리 있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로 어떤 사건을 설명하면 그때그때 편리한 대로 耳懸鈴鼻懸鈴되고 만다. 이 부분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떠받들고 있는 종교인들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9.11테러 보복은 정당하고, 對하마스 보복은 부당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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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해
1개의 댓글
김경○ (비회원)2023-11-08 18:46:43IP
삭제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기독교인을 구닥다리 취급하고 있는 교인들이 제법 된다.
李信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자유의지’보다 우위에 두었다.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는 한 인간이 자유의지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말짱 도루묵이란 거다.
나의 경우 처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위에 두다가 중간에 몇 몇 서적이나 종교선동가들의 감언이설에 선동당하여 뭣 모르고 섣부르게 ‘인간의 자유의지’로 넘어갔다가 주체성을 확립하고부터는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로 回歸했다.
성경을 ‘하나님의 은혜’로 설명하여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인간의 자유의지’로 설명하여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을 훨씬 능가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설명 불가능한 부분을 하나님의 은혜로 설명하면 납득되는 경우가 차고도 넘친다.
이스라엘-하마스전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비교 설명하고자 한다.
최근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을 예로 들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여 평화, 휴전을 부르짖는 사람들(주로 진보적인 지식, 종교인)이 인도주의니 인류애니 뭐라고 떠든다고 해서 전쟁이 멈추어지지 않는다. 이런 전쟁은 러시아-우크라이나, 남예멘-북예멘-사우디아라비아, 로힝야族과 미얀마族, 아프리카 종족분쟁... 지금 현재도 무수히 많다. 입에 평화를 달고 사는 진보지식인이나 진보종교인들 역시 막상 전쟁이 일어나니 그들도 별수 없이 총 들고 적을 무찌른다고 난리다. 상대에 대한 양보가 일절 없다. 웃기는 건 다른 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도덕군자가 된다. 대표적인 예가 키릴 모스크바大주교다. 러-우전쟁은 불쌍한 러시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서 정당하고, 이-하전쟁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벌이는 전쟁이라서 즉시 휴전해야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어야한다고 한다. 편리한대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다. 이런 사람들이 진보지식인(진보종교인) 중 유난히 많다. 전두환 타도하자는 사람이 김일성에겐 고개 숙인다.
러-우전쟁, 이-하전쟁을 구약에 나오는 무수한 전쟁과 연결시키면 이러쿵저러쿵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누가 전쟁하고 싶어서 하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랑과 보복’을 동시에 부여했다. 예수님이 평화를 좀 더 강조한 것만 가지고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러면 하나님이 구약에 나오는 대로 무수하게 전쟁한 것은 무엇이냐? 기독교인은 ‘三位一體’ 아니냐? 하나님의 전쟁 불사를 무시하고 예수님의 평화 강조만을 偏食하는 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볼 수 없다. 인간의 부조리가 쌓이고 쌓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사랑의 다른 측면 보복심리가 쌓이게 되면 폭발(전쟁, 싸움, 살인)하게끔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천당’도 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전쟁’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에게 무조건 단 ‘설탕’만 주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 인간에게 쓰라린 ‘사망(전쟁)’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어떤 사건을 설명하면 일관성 있게 조리 있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로 어떤 사건을 설명하면 그때그때 편리한 대로 耳懸鈴鼻懸鈴되고 만다. 이 부분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떠받들고 있는 종교인들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9.11테러 보복은 정당하고, 對하마스 보복은 부당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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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소리
이신 (지은이),이경 (엮은이)
평사리2024-09-12
<돌의 소리>의 개정판입니다.
책소개
현장 목회자로서, 어렵게 유학해 신학이론 연구에 몰두한 신학자로서, 독특한 화풍을 펼친 화가로서 ‘이신(李信)’의 범상치 않은 생애와 치열한 사유가 투영된 시들을 읽는다. 한국전쟁 이후 시대의 통속적인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나름의 길을 걸으며, 진실한 의미에서의 예술 창조를 추구했던 슐리얼리즘 문학이론과 신학이론이 바로 이 시들에서 발견된다. 2012년 처음 출간된 이후, 새로운 작품 2편과 박정규 교수의 문학평론이 추가된 재출간본이다.
목차
이신 시집 『돌의 소리』를 다시 펴내며
시집을 펴내며 (초판 서문)
1부_ 유랑자의 수기
침묵
어느 시집에 기록된 서문
상념
출발
새 풍토
그대 떠난 뒤
시간에의 항거
눈, 달빛
소묘
가을과 당신
피로에서 오는 감각
가난한 족속
‘과거’의 역설
이국의 가을
딸 ‘은혜’ 상
신과 주체적 해후
사실 I
사실 II
어느 그림의 인간상
영원에의 전진
나사렛의 한 목수상 — 새 그리스도로지
사진
자유의 노래
2부_ 슐리얼리스트의 노래
계시Ⅰ
계시Ⅱ
계시Ⅲ
너와 너 나와 나
‘이것’과 ‘그것’
‘피—스’의 죽음
기도
진리가 어디 있습니까
날아라 날아라
길을 걸어라
불이 어디 있습니까
초상화 IV
초상화 V
전위적 역사의식
3부_ 돌의 소리
병든 영원
인격
부활이 의미하는 것
객체적인 것의 환각
사도들의 오해
주시는 자
자유로운 선
돌의 소리
복음은 “예수가 우리와 함께하심”이다
소리, 언어, 목소리
예수님은 죽기까지
누구나 할 것 없이 착하게
깨달음이 있는 신앙
영원에 관한 논리
Eros의 비극
제 나름대로
해제_ 시집 『돌의 소리』
이신의 삶
접기
책속에서
P. 7 이번에 다시 펴내는 시집에는 초판과 비교해 몇 가지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이번 재판 시집은, “돌의 소리”라는 동일한 제목이 명시돼 있고 원본이 남아 있는 111×144cm 크기의 캔버스 유화 작품을 표지화로 삼았습니다. 초판 표지화의 추상적 도안이 인상 깊게 뇌리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제 재간행되는 시집은 명실상부하게 제 ... 더보기
P. 231 이신의 시는 대부분 성령의 계시를 통해 인격적으로 소통하는 영의 신학적 신념을 노래하고 있다. … 또 이신의 문학과 그림의 세계에서 보이는 ‘슐리얼리즘’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소위 ‘공개된 비밀an open secret’의 범주에 속하여 해석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침묵」 같은 시는 신학적 접근을 생략하더라도 풍부한 ...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신 (지은이)
목사이자 신학자. 전라남도 돌산에서 태어나 부산 초량상업학교, 감리교신학교를 다녔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을 접하고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부여교회와 영암 상월리교회 목회, 서울에서 신학교 교육, 괴산 소수교회 목회, 부산에서 방송 선교, 서울 돈암동교회에서 목회했다. 1966년 마흔 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네브라스카 기독대학, 드레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을 거쳐 밴더빌트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전위 묵시문학 현상: 묵시문학의 현상학적 고찰」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산동네 빈민 목회 활동에 헌신하고 서울기독교회를 개척했으며 ‘포이에티스트’ 학술모임을 결성하고 운영했다.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문화신학), 중앙신학교(윤리학), 그리스도신학대학(히브리어 및 신학), 대한기독교신학교(조직신학, 현대신학), 순복음신학교(현대신학, 해석학) 등에서 가르쳤다. 1973년 한국그리스도의교회 연합회 회장에 취임했다. 1981년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노예냐 자유냐』(1979; 2015 재출간)를 번역했고, 『산다는 것, 믿는다는 것』(1980)을 썼다. 사후에 『인간의 운명』(1984), 『슐리얼리즘과 영의 신학』(1992; 2011 재출간), 시집 『돌의 소리』(2012), 『환상과 저항의 신학: 이신의 슐리얼리즘 연구』(2017), 『李信의 묵시의식과 토착화의 새 차원』(2021)이 발간되었다. 2021년 유고전시회 〈이신, SR@XR: 초현실이 확장된 현실을 만나다〉가 열렸다. 접기
최근작 : <돌의 소리>,<슐리얼리즘과 영의 신학> … 총 4종 (모두보기)
이경 (엮은이)
미국 그리스도의교회 제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2011년 귀국 후 청주 소재 이주민노동인권센터 상담실장, 충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했고, 세월호충북대책위, 충북평화의소녀상건립위원회에서 활동했다. 한국 녹색당 국제위원회 초대 공동위원장으로서 녹색당 세계대회 한국유치를 위해 일했고, 2018년 지방선거에서 녹색당 시의원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이신 목사의 막내아들이며, ‘한국信연구소/이신 아카이브’에서 실무를 맡고 있다.
최근작 : <돌의 소리> … 총 2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목회자, 신학자, 화가, 시인이었던
슐리얼리스트의 노래
이신(李信) 목사의 시집 재출간
현장 목회자로서, 어렵게 유학해 신학이론 연구에 몰두한 신학자로서, 독특한 화풍을 펼친 화가로서 ‘이신(李信)’의 범상치 않은 생애와 치열한 사유가 투영된 시들을 읽는다. 한국전쟁 이후 시대의 통속적인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나름의 길을 걸으며, 진실한 의미에서의 예술 창조를 추구했던 슐리얼리즘 문학이론과 신학이론이 바로 이 시들에서 발견된다. 2012년 처음 출간된 이후, 새로운 작품 2편과 박정규 교수의 문학평론이 추가된 재출간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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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얼리즘과 영의 신학
이신 (지은이)
동연출판사2011-05-16
책소개
기독교 영성가 이신 박사 유고집. 창조적인 영성가로, 한국 초유의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목사 화가로 삶을 일구어 간 그가 죽은 지 30년이 넘은 이 시대에도 독창적이고 새로운 글들이다. 초판이 출간된 지 20년이 넘은 책이지만 이 책에는 이신 박사의 신학사상 정수를 고스란히 담았다. 특별히 이번 복간에서는 그의 삶을 다시 정리하여 실었으며, 미술 작품도 몇몇 담았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 편의 부록이 첨가되었다. 제1부는 그의 학위 논문, 「전위 묵시문학 현상 - 묵시문학 해석을 위한 현상학적 고찰」을 이경 박사가 완역한 것이다. 제목이 잘 말하여 주듯 이 논문은 일종의 비전문학적인 신구약 중간기의 ‘묵시 또는 계시문학’(The Apocalyptic)의 의식 세계를 현상학적으로 탐구한 것이다.
“슐리얼리즘의 신학”(Theology of Surrealism)이라는 제목 하에 엮은 제2부는 저자의 기독교 신앙 이해가 구체적으로 적용되고 또한 확장되어서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기록의 모음이다. 3부에서는 제목에서도 밝혔듯이 그가 진정으로 평생을 거쳐 추구한 작업은 새로운 ‘영의 신학’, ‘카리스마적 신학’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목차
책을 새로 펴내며 04
머리말 12
제Ⅰ부 전위 묵시문학의 신학
서문
서론
제1장 묵시문학의 모호성
제2장 역사상의 묵시문학
제3장 묵시문학적 의식
제4장 전위 묵시문학
제5장 미래를 향한 묵시문학적 환상
제Ⅱ부 슐리얼리즘의 신학
제1장 환상의 신학- 계시문학을 중심으로
제2장 고독과 저항의 신학 - 키에르케고르와 본회퍼 신학의 비교 연구
제3장 전위 예술과 신학
제4장 슐리얼리즘의 신학(Ⅰ)
제5장 슐리얼리즘의 신학(Ⅱ)
제Ⅲ부 성령의 신학
제1장 현대신학과 성령론
제2장 카리스마적 신학
제3장 하나님의 영(靈)과 적그리스도의 영
제4장 이단이란 무엇인가
부록
제1장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전개
제2장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언 -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
주註
참고문헌
접기
책속에서
P. 204 인간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병은 마르크시스트들이 말하는 것처럼 부르주아들의 착취‘ 도 아니고 자본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가난‘ 도 아니며, 실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절망‘ 도 아니다. 인간에게 ‘죽음에 이르는 병‘은 이매지네이션imagenation의 부패다.
어떤 악한 일도 이매지네이션의 산물 아닌 것이 없고, 어떤 선한 일도이매지네이션의 산물 아닌 것이 없다. 어떤 파괴적인 일도 이매지네이션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고, 어떤 창조적인 것도 이매지네이션의 솜씨를 거치지 아니한 것이 없다. 이렇게 이매지네이션이라는 것이 굉장한것이지만 실상 이매지네이션의 세계는 있다면 있는 것이요 없다면 없다.
고 말할 수 있는 허공과 같은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다. 거기에는 되는 일도 없고 또 안 되는 일도 없다. 이렇게 이매지네이션의 세계는 역설적이다. 접기 - 물무늬
P. 230 셋째 위험성(현대 성령 운동의)은 성령을, 인간이 성령을 받는 방법으로써 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령받는 방법˝ 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성령을 받는 Method‘, 하나의 방법 이것은 대단히 모순된 말이다. 성령은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이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에 의해서 주실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는 늘 이렇게 믿어야 하고, 기본적으로 이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무슨 방법을 써가지고 우리의 무슨 방법이 좋다고 해서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교회를 성령 만들어 내는 공장처럼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다. 성령 받는 방법을 운운하는데 이는 성령을 모독하는, 성령의 주권을 모독하는 소리인 것이다. 심지어 기도까지도, 심지어 우리의회개까지도 방법이 아니다. 기도야말로 나 자신을 무無로 돌리는 태도이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다만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만 맡 접기 - 물무늬
P. 250 셋째 위험성(현대 성령 운동 의)은 성령을, 인간이 성령을 받는 방법으로써 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령받는 방법˝ 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성령을 받는 ‘Method‘, 하나의 방법-이것은 대단히 모순된 말이다. 성령은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이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에 의해서 주실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는 늘 이렇게 믿어야 하고, 기본적으로 이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무슨 방법을 써가지고 우리의 무슨 방법이 좋다고 해서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교회를 성령 만들어 내는 공장처럼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다. 성령 받는 방법을 운운하는데 이는 성령을 모독하는, 성령의 주권을 모독하는 소리인 것이다. 심지어 기도까지도, 심지어 우리의회개까지도 방법이 아니다. 기도야말로 나 자신을 무無로 돌리는 태도이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다만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만 맡깁니다.‘ 하는 것이 기도의 자세다.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다만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겸손한자세, 이것이 기도이다. 또한 회개는 무엇인가? 회개는 자기 포기이며, 그것이 방법이 될 리가 없다. 성령 받는 방법을 운운하는 것은 마치 사도행전 8장 18절에 기록되어 있는 사마리아 성의 시몬처럼, 사도들이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게 되니까 자기도 그러한 방법을 얻으려고 돈을 주고 사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느냐˝고 책망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령을 하나님의 선물로서, 카리스마로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그 오순절 운동에서 한 단계 더 올라서서 이러한 카리스마적 운동으로 지향해야 한다. 접기 - 물무늬
저자 및 역자소개
이신 (지은이)
목사이자 신학자. 전라남도 돌산에서 태어나 부산 초량상업학교, 감리교신학교를 다녔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을 접하고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부여교회와 영암 상월리교회 목회, 서울에서 신학교 교육, 괴산 소수교회 목회, 부산에서 방송 선교, 서울 돈암동교회에서 목회했다. 1966년 마흔 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네브라스카 기독대학, 드레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을 거쳐 밴더빌트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전위 묵시문학 현상: 묵시문학의 현상학적 고찰」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산동네 빈민 목회 활동에 헌신하고 서울기독교회를 개척했으며 ‘포이에티스트’ 학술모임을 결성하고 운영했다.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문화신학), 중앙신학교(윤리학), 그리스도신학대학(히브리어 및 신학), 대한기독교신학교(조직신학, 현대신학), 순복음신학교(현대신학, 해석학) 등에서 가르쳤다. 1973년 한국그리스도의교회 연합회 회장에 취임했다. 1981년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노예냐 자유냐』(1979; 2015 재출간)를 번역했고, 『산다는 것, 믿는다는 것』(1980)을 썼다. 사후에 『인간의 운명』(1984), 『슐리얼리즘과 영의 신학』(1992; 2011 재출간), 시집 『돌의 소리』(2012), 『환상과 저항의 신학: 이신의 슐리얼리즘 연구』(2017), 『李信의 묵시의식과 토착화의 새 차원』(2021)이 발간되었다. 2021년 유고전시회 〈이신, SR@XR: 초현실이 확장된 현실을 만나다〉가 열렸다. 접기
최근작 : <돌의 소리>,<슐리얼리즘과 영의 신학> … 총 4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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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고독과 저항의 창조적 삶을 살다 간
기독교 영성가 이신 박사 유고집
이신 박사의 유고집이었던 『李信의 슐리어리즘과 靈의 신학』(1992, 종로서적)을 복간한 책이다. 지은이는 우리 시대를 살다 간 창조적인 기독교 영성가로 평가를 받으며 최근 그의 삶과 신앙이 재조명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의 일일뿐 그는 한국의 신학계와 사상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창조적인 영성가로, 한국 초유의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목사 화가로 삶을 일구어 간 그가 죽은 지 30년이 넘은 이 시대에도 독창적이고 새로운 글들이다. 하지만 몇몇의 글들은 그가 살던 시대에 조명을 받지 못하고 세인의 관심을 크게 받지 못하던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초판이 출간된 지 20년이 넘은 책이지만 이 책에는 이신 박사의 신학사상 정수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특별히 이번 복간에서는 그의 삶을 다시 정리하여 실었으며, 미술 작품도 몇몇 담았다.
그는 한국 신학계에서 몇 되지 않는 ‘유학파’교수였다. 그러나 주류 종파가 아닌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한 뒤, 그는 고난의 삶을 살았다. 스스로 고독한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글에서 말하듯 예수의 영혼에 사로잡혔기에 자신의 삶을 십자가의 삶에 맞춰간 것이리라. 1970년대 칼바람 일던 군부독재시절에 주류에 투항하지 않고, 달동네 빈민촌에서 지체장애아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문맹의 부녀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민중의 삶을 체화하며 저항의 삶을 살았다. 고독과 저항의 선각자, 창조적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다 간 그의 사상을 이 책을 통해 깊게 재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내용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 편의 부록이 첨가되었다. 제1부는 그의 학위 논문, 「전위 묵시문학 현상 - 묵시문학 해석을 위한 현상학적 고찰」을 이경 박사가 완역한 것이다. 제목이 잘 말하여 주듯 이 논문은 일종의 비전문학적인 신구약 중간기의 ‘묵시 또는 계시문학’(The Apocalyptic)의 의식 세계를 현상학적으로 탐구한 것이다. 저자는 서론에서 “묵시문학은 모든 기독교 신학의 모체였다”라고 한 독일 포스트 불트마니언 신약학자 케제만(E. K?semann)의 말을 인용하면서 후세에는 거의 전해지지 않았거나 단지 ‘외경’으로 분류되어 비의적인 문서로서 전달된 ‘묵시문학’ 속에 기독교 등장의 열쇠가 담겨져 있으며, 따라서 기독교의 본질적 역동성이 여기에서 근원되었다는 것을 밝혀 주고 있다. 즉 유대 묵시문학이란 바빌론 유수 이후 세계사적인 대변동의 시기였던 BC 2세기경부터 형성된 것인데, 당시 정치적, 문화 · 종교적으로 더 이상의 희망을 포기한 소수의 히브리인들이 ‘에세네 공동체’나 ‘열심당’ 등의 모습으로 섹트화되고 ‘하시드 운동’이나 ‘마카비 전쟁’ 등에서 자신들의 현실 부정을 강하게 나타내면서 그들의 절망적인 역사관을 표현한 것이고, 또한 그 역사를 뛰어넘어 도래할 ‘전혀 새로운 것’, ‘초역사적인 것’, ‘메시아적인 것’에 대한 초의식적 환상을 그려낸 것이다. 이러한 창조적 소수들의 전위 의식과 저항의식 속에 후일 예수의 ‘인자’(人子) 의식, ‘메시아 왕국’ 의식 등에서 표현된 기독교 신앙의 원형과 ‘원초적인 상’(premodial type)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묵시[계시]문학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져 있지 않은 한국 신학계 풍토를 생각할 때 이 논문의 의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오늘날 특히 종교다원주의의 상황에서 기독교 토착화 논쟁이 다시 불붙고 있는 때에 기독교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유대 묵시문학이 당시 유대의 유일신론, 바빌로니아의 우주론, 인도의 이원론과 헬레니즘, 그리고 특히 영지주의와의 상호 관련성 속에서 배태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가르침은 오늘날 여전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인 기독교 이해에 대해 좋은 반증이 된다고 하겠다. 또한 예수의 의식도 그 독특성과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묵시문학적 환경에서 영근 것이라는 사실은 좀 더 열려진 기독교 이해를 위해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와 더불어 또 다른 중요한 의의는 저자가 이 논문의 목적으로 밝혔듯이 오늘날 세속화와 신의 죽음의 시대에 모두 퇴색해 버린 것 같은 “기독교의 역동성”을 그 모체의 탐색을 통해 재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시대의 권위와 가치를 의문시하고 ‘메시아’와 ‘메시아 왕국’이라는 인간과 사회의 원형에 대한 초월적 환상으로 표현된 묵시문학의 저항정신에서 기독교 예수의 원초적 메시지를 보고, 그 지적을 통해 오늘날의 상황에서 기독교의 동질성 회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슐리얼리즘의 신학”(Theology of Surrealism)이라는 제목 하에 엮은 제2부는 이러한 저자의 기독교 신앙 이해가 구체적으로 적용되고 또한 확장되어서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기록의 모음이다. 위에서 소개한 학위 논문의 후반부가 어떻게 현대의 신학과 문화 현상과 관계되는지에 대한 그 직접적인 연관성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다시 묵시문학의 원형적 모습을 읽을 수 있을까를 탐구한 것인데, 「고독과 저항의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키에르케고르와 본회퍼 연구는 바로 그들을 현대의 묵시문학자로 보려는 시도였다. 「전위 예술과 신학」은 원래 〈기독교사상〉지에 1972년 10월부터 5회에 걸쳐 「그림이 있는 에세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인데, 현대 전위회화(한국의 이중섭, 서양의 미래파, 초현실주의 등)와 기독교의 전위 의식을 접목시킨 매우 독특한 작업이다. 1장의 「환상의 신학」은 1973년 9월의 〈기독교사상〉 특집 ‘묵시와 상징’을 위해서 정리한 그의 학위 논문을 발췌한 것이다.
2부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글은 그가 「슐리얼리즘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써내려 간 마지막 두 편이다. 첫 번째 것은 저자가 미국에서 귀국하고 2년쯤 지난 1974년에 1월 14일의 날짜 표시와 함께 기록된 것이다. 그의 독특한 필체로 두툼한 백지의 노트에 쓰기 시작한 것을 보면 저자는 이 글을 계속 전개할 의도였음이 분명하나 애석하게도 시작에 불과한 “의식의 둔화”에 관한 몇 장의 글만을 남겼다. 이 당시 그의 상황은 ‘서울 그리스도의 교회’와의 갈등으로 심한 고통의 시간이었으므로 그 전개가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저자는 그 몇 년 후 또 한 번 다른 노트에 같은 제목의 글을 시도했다.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지만 좀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분량도 많았고 내용도 훨씬 더 전개되었다.
그렇다면 그가 전개하고자 한 “슐리얼리즘 신학”(Theology of Surrealism)이란 어떤 것일까? 이신 박사는 그것을 한 마디로 “영의 신학”이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새 술에 취한 사람들의 말”이고, “영(靈)의 목소리”라는 것이다. 초현실주의 신학이 이렇게 종전의 신학에서처럼 논리나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언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영의 목소리를 붙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에 전통의 합리적 신학방법으로는 안 되고 먼저 회화나 문학에서 그 초현실과 초의식을 표현하려는 ‘초현실주의’의 방법론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엄밀히 말하면 여기서 신학의 방법론으로 사용하는 ‘초현실주의’를 결코 한 ‘―주의(主義, 이즘)’나 ‘방법론’(methode)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끊어 버리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오히려 일찍이 동양의 현자들이 깨달은 “무위불언무위무성”(無爲不言無爲無聲)의 가르침 “불언지교”(不言之敎)의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는, 그것은 동양과 서양, 무(無)와 유(有)의 구별도 초월하자는 것이고, 그보다는 오히려 더욱더 초월적이며 또는 보다 더 본질적인 세계, 즉 무의식의 세계라고 할까, 상상력의 영역이라고 할까, 또는 ‘계시’의 영역인 영(靈)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부의 두 번째 글 “카리스마적 신학”은 1980년 6월부터 그분이 돌아가신 1981년 12월까지 당시 ‘순복음신학교’를 통해 관계를 맺게 된 순복음교회 청년 선교지 〈카리스마〉지에 연재한 글들이다. 이제까지 신학계에서 유례가 없었던 독창적이고 전위적인 글이 당시 세인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하던 한 이름 없는 잡지에 실릴 수밖에 없었다는 아이러니는, 어쩌면 오늘날에는 그 글의 의미를 더해 주는 것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들이야말로 이신 박사가 시도했던 ‘초현실주의 신학’의 통일된 결정체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전통적인 의미의 조직신학이 아닌 ‘영의 신학’으로서의 ‘카리스마적 신학’은 그러나 그 안에 4단계의 구별을 보이는데, 즉 전통 신학에서의 인식론에 해당되는 “카리스마적 해석학”의 3편, 그 다음 신론에 해당되는 “하나님은 영이시다”의 3편, 이어서 기독론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신뢰의 그루터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말론과 교회론을 읽을 수 있는 “삶과 죽음”의 두 편이다. 이 글들은 또한 당시 의도적으로 띄어쓰기 문법을 거부한 형태로 쓰였는데, 이러한 파격에 대한 단순한 몰이해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3부의 세 번째 글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은 이 비슷한 시기에 쓴 것으로 그분의 평생 작업인 ‘영의 신학’을 향한 추구가 잘 드러나는 글이다.
3부의 제목에서도 밝혔듯이 그가 진정으로 평생을 거쳐 추구한 작업은 새로운 ‘영의 신학’, ‘카리스마적 신학’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새롭게 영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는 이 새 술의 의미를 담기 위해서 새 부대인 ‘카리스마적 해석학’, 즉 그가 “원래 오랜 옛날 동양에서 싹 뜨고 후일에 서양 예술인들에 의해서 재인식되었다.”고 파악한 ‘초현실주의’의 방법론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그의 신학이 추구한 ‘초현실’과 ‘영’의 세계가 결코 단순히 이 세상 너머의 저 세상이 아니고, 역사를 부정하고 모든 현실의 갈등과 분리를 없는 것으로 해 버리는 유아적이고 퇴폐적인 의식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유대 묵시문학 등에서 원형적으로 나타난 것처럼 초월의 선재적(先在的) 성취를 확연히 본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초월과 현실, 초월과 역사의 구분을 문제 삼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그 신학이란 바로 그 초월의 현재적 실현, 곧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언어 사건의 더욱더 지극한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서 초월이 있기는 있으나 그 전(前) 모양으로 먼데 있는 초월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데 있는 초월이고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없는 세계에의 초월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면서도 우리가 의식 못하고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먼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가 아니라 내 눈 앞에 보고 있는 사물 가운데서 그 절대의 세계를 의식하는 것이고 또 다른 말로는 ‘너희 안에 천국이 있느니라.’ 하는 그런 경지인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과 실천의 주(主)이신 예수는 그러므로 우리에게 신뢰의 그루터기가 되신다는 것이다.
이신 박사의 ‘초현실주의적 영의 신학’은 오늘날 전위 작가들의 ‘이벤트’(event)로서의 예술 활동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평범성, 일상성, 실천성으로의 방향 전환과도 맥을 같이 한다. 그러므로 성령 중심적인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 순복음교회 등에서 일어났던 성령 운동의 오해와 위험성을 뚜렷이 지적하였고, 그 방향을 올바로 제시하려는 신학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3부의 첫 번째 글로 실린 「현대신학과 성령론」은 1979년 5월 ‘순복음신학교 제27회 개교기념 초청강연회’에서 행한 연설의 기록인데, 여기서 그는 현대 신학의 역사적 탐구를 통해 이제 신학이 과거 서구의 이론적이고 분석적이고 차갑고 정적인 ‘로고스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성령 중심의 신학’(Spirit-oriented Theology)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오늘의 성령 운동이 마치 성령을 한 방법론으로 이용하려 하고, 자기의 세속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소유물 내지는 얄팍한 감정의 자극쯤으로 생각하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3부의 마지막 글 「이단이란 무엇인가」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두 주 전 고통의 상황에서 쓰인 것인데, 여기서야말로 바로 그의 이와 같은 ‘정론’(orthodoxy)의 이론으로서가 아닌 ‘정행’(orthopraxis)의 가르침으로서 ‘영의 신학’의 지향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이단의 문제는 바로 ‘실천의 문제’이며 오늘의 이단이란 예수의 화해 정신과 화해의 사건을 떠나서 분열과 분당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오늘날 우리가 전 지구촌의 화합을 얘기하고 기독교회에서의 에큐메니즘을 이야기하는데, 모든 기존의 갈등과 분리, 교리적인 싸움과 구분 등을 지양하고 우리를 진정으로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교회를 소망한다면, 우리는 그 교회를 무엇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단순하게 ‘그리스도의 교회’(The Church of Christ)가 되지 않겠는가? 단순히 기존의 교단들 중 한 교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가 진정으로 지향해야 할 원형적 모습으로서의 한국 기독교회, 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그분의 비전이 바로 부록으로 엮은 두 편의 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전개」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언문」에 표현되어 있다. 접기
믿음의 새길을 찾아서
2024년 한국信연구소 출판기념회 및 李信 상 시상식에 붙여서
이은선(한국信연구소)업데이트 2024.12.22
https://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25503#:~:text=%EC%9D%98%20%EC%96%B4%EB%A6%B0%20%EB%94%B8%EC%9D%84%20%EB%B6%99%EB%93%A4%EA%B3%A0%20%EC%96%B4%EB%A8%B8%EB%8B%88%EB%8A%94%20%EC%9A%B8%EB%B6%80%EC%A7%96%EC%97%88%EA%B3%A0%2C%20%EA%B0%80%EA%B9%8C%EC%8A%A4%EB%A1%9C,%EB%8F%8C%EC%9D%98%20%EC%86%8C%EB%A6%AC%E3%80%8F%EC%97%90%20%EB%8B%A4%EC%9D%8C%EA%B3%BC%20%EA%B0%99%EC%9D%B4%20%EB%82%A8%EC%95%84%EC%9E%88%EC%8A%B5%EB%8B%88%EB%8B%A4:%20%E3%80%8C%EB%94%B8%20'%EC%9D%80%ED%98%9C
1.

한국信연구소 이은선 소장은 神學이 아니라 信學을 주창하며 새로운 지평을 열였다. ⓒ장성호
올가을 들어서 여러 가지 글쓰기와 모임 참석 등으로 무척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두 가지 직격탄을 맞은 것이, 먼저 한강의 노벨상 수상과 더불어 그녀의 글과 생각, 몸짓과 목소리들이 온 나라와 세계로 퍼져나가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윤석열 쿠데타 소식입니다. 저는 지난 토요일 온 국민이 여의도에 모여서 탄핵을 외치던 날, 지방에서 열린 다른 학회 일로 서울에 없었습니다.
돌아와서 현장에 함께 있지 못했다는 안타까움과 죄송한 마음으로 다음날을 보내면서 오늘 이 순서를 준비하는 가운데, 한강의 노벨상 수상기념 강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큰 충격을 받았고, 깊은 감동으로 그녀의 언어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동네 <청운문학도서관>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원래 다시 읽고 싶었던 책은 『소년이 온다, 2014』 였지만 그곳 서가에 꽂혀있던 유일한 책은 『흰』이었습니다. 『흰』은 그녀가 『소년이 온다, 2014』 다음에 쓴 책이고, 이번 수상기념 강연에서도 밝히듯이, 그녀가 지금 더디게 진행하고 있는 또 다른 책의 물음이 그로부터 나와서 이어지는 책이라고 합니다. 맨 뒤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다음처럼 말합니다:
“고독과 고요, 그리고 용기, 이 책이 나에게 숨처럼 불어 넣어준 것은 그것들이었다. 나의 삶을 감히 언니-아기-그녀에게 빌려주고 싶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생명에 대해 계속해 생각해야 했다. 그녀에게 더운 피가 흐르는 몸을 주고 싶었기 때문에, 우리가 따뜻한 몸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매 순간 어루만져야만 했다-어루만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안에 깨어지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는, 어떻게도 훼손되지 않는 부분을 믿어야 했다-믿고자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아직도 나는 이 책과 연결되어 있다. 흔들리거나, 금이 가거나, 부서지려는 순간에 당신을, 내가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흰 것들을 생각한다. 나는 신을 믿어본 적이 없으므로, 다만 이런 순간들이 간절한 기도가 된다. 2018년 봄날에.”(한강 소설, 『흰』, 문학동네, 2019, 2판 6쇄, 188-189쪽)
2.
소설 『흰』에 따르면, 1966년 초겨울, 한강의 어머니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아버지와 함께 외딴 교사 사택에 살고 있던 스물세 살의 아내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이미 출근한 남편이 닿을 수도 없는 곳에서 혼자, 출산 예정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첫 아이를 낳고 두 시간 만에 떠나보내는 일을 겪습니다.
그 가운데서 어머니가 할 수 있던 일은 혼자 엉금엉금 기어 물을 끓이고 가위를 소독해서 탯줄을 자르고, 가까스로 조그만 흰 천을 찾아 배내옷을 만들어 입히고, 그러나 태어나서 가느다란 소리로 울던 손바닥만 한 아기가 서서히 죽어가자 그 까만 눈을 맞추며 “죽지마, 제발 죽지 마”를 중얼거리며 두려움에 떠는 일뿐이었습니다. 두 시간 만에 그녀의 첫아기, 한강의 언니는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사랑’(愛)이라는 이름을 부모로부터 받은 제 어머니 정애(鄭愛, 1929-2015) 여사도 그녀의 큰 딸을 잃은 해가 같은 1966년이었다는 것을 위 한강의 글을 읽으면서 상기했습니다. 그해 봄, 아버지 이신은 아팠던 언니를 포함해 저희 4남매와 어머니를 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신 상태였고, 그 난감하고 혹독했던 시절 어느 날 새벽에 숨이 끊어져 가는 중학교 3학년의 어린 딸을 붙들고 어머니는 울부짖었고, 가까스로 누군가의 등에 업혀 산동네의 집으로부터 아랫마을의 병원으로 옮기던 중 언니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미국 유학 중에 그 소식을 들은 아버지 이신이 쓴 시가 오늘 재간되어 여러분에게 다가가는 책 『李信 詩集 돌의 소리』에 다음과 같이 남아있습니다:
「딸 ‘은혜(恩惠)’ 상(像)」
하얀 박꽃처럼
초가집 지붕 위에 피었다가
둥글디 둥근 것을
남겨 둔 채
사라졌다.
한 번도 부모 말을
어기지 않던 그 애
속일 줄도 모르고
그저 고분고분
따르던 그 애
은혜야! 부르면
녜!하고
아버지!하고
핼쭉핼쭉 웃으며
다가오던 그 애
올가을 들어서 여러 가지 글쓰기와 모임 참석 등으로 무척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두 가지 직격탄을 맞은 것이, 먼저 한강의 노벨상 수상과 더불어 그녀의 글과 생각, 몸짓과 목소리들이 온 나라와 세계로 퍼져나가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윤석열 쿠데타 소식입니다. 저는 지난 토요일 온 국민이 여의도에 모여서 탄핵을 외치던 날, 지방에서 열린 다른 학회 일로 서울에 없었습니다.
돌아와서 현장에 함께 있지 못했다는 안타까움과 죄송한 마음으로 다음날을 보내면서 오늘 이 순서를 준비하는 가운데, 한강의 노벨상 수상기념 강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큰 충격을 받았고, 깊은 감동으로 그녀의 언어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동네 <청운문학도서관>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원래 다시 읽고 싶었던 책은 『소년이 온다, 2014』 였지만 그곳 서가에 꽂혀있던 유일한 책은 『흰』이었습니다. 『흰』은 그녀가 『소년이 온다, 2014』 다음에 쓴 책이고, 이번 수상기념 강연에서도 밝히듯이, 그녀가 지금 더디게 진행하고 있는 또 다른 책의 물음이 그로부터 나와서 이어지는 책이라고 합니다. 맨 뒤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다음처럼 말합니다:
“고독과 고요, 그리고 용기, 이 책이 나에게 숨처럼 불어 넣어준 것은 그것들이었다. 나의 삶을 감히 언니-아기-그녀에게 빌려주고 싶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생명에 대해 계속해 생각해야 했다. 그녀에게 더운 피가 흐르는 몸을 주고 싶었기 때문에, 우리가 따뜻한 몸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매 순간 어루만져야만 했다-어루만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안에 깨어지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는, 어떻게도 훼손되지 않는 부분을 믿어야 했다-믿고자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아직도 나는 이 책과 연결되어 있다. 흔들리거나, 금이 가거나, 부서지려는 순간에 당신을, 내가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흰 것들을 생각한다. 나는 신을 믿어본 적이 없으므로, 다만 이런 순간들이 간절한 기도가 된다. 2018년 봄날에.”(한강 소설, 『흰』, 문학동네, 2019, 2판 6쇄, 188-189쪽)
2.
소설 『흰』에 따르면, 1966년 초겨울, 한강의 어머니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아버지와 함께 외딴 교사 사택에 살고 있던 스물세 살의 아내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이미 출근한 남편이 닿을 수도 없는 곳에서 혼자, 출산 예정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첫 아이를 낳고 두 시간 만에 떠나보내는 일을 겪습니다.
그 가운데서 어머니가 할 수 있던 일은 혼자 엉금엉금 기어 물을 끓이고 가위를 소독해서 탯줄을 자르고, 가까스로 조그만 흰 천을 찾아 배내옷을 만들어 입히고, 그러나 태어나서 가느다란 소리로 울던 손바닥만 한 아기가 서서히 죽어가자 그 까만 눈을 맞추며 “죽지마, 제발 죽지 마”를 중얼거리며 두려움에 떠는 일뿐이었습니다. 두 시간 만에 그녀의 첫아기, 한강의 언니는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사랑’(愛)이라는 이름을 부모로부터 받은 제 어머니 정애(鄭愛, 1929-2015) 여사도 그녀의 큰 딸을 잃은 해가 같은 1966년이었다는 것을 위 한강의 글을 읽으면서 상기했습니다. 그해 봄, 아버지 이신은 아팠던 언니를 포함해 저희 4남매와 어머니를 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신 상태였고, 그 난감하고 혹독했던 시절 어느 날 새벽에 숨이 끊어져 가는 중학교 3학년의 어린 딸을 붙들고 어머니는 울부짖었고, 가까스로 누군가의 등에 업혀 산동네의 집으로부터 아랫마을의 병원으로 옮기던 중 언니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미국 유학 중에 그 소식을 들은 아버지 이신이 쓴 시가 오늘 재간되어 여러분에게 다가가는 책 『李信 詩集 돌의 소리』에 다음과 같이 남아있습니다:
「딸 ‘은혜(恩惠)’ 상(像)」
하얀 박꽃처럼
초가집 지붕 위에 피었다가
둥글디 둥근 것을
남겨 둔 채
사라졌다.
한 번도 부모 말을
어기지 않던 그 애
속일 줄도 모르고
그저 고분고분
따르던 그 애
은혜야! 부르면
녜!하고
아버지!하고
핼쭉핼쭉 웃으며
다가오던 그 애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 문학의 위상을 높였다는 것 이전에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를 강조한 것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연합뉴스3.
한강은 그렇게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스러져간 언니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어 그를 살게하고 싶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세 번째 장편 소설이었다고 밝히는 『채식주의자』로부터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을 넘어 광주의 이야기에 이르러 『소년이 온다』를 쓰기 위해 극심하게 고투하는 가운데 도달한 질문은, 예전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에서, 그 반대로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로 도치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저희 信연구소가 4권의 책을 들고 또 이신 상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모시고자 한 것도, 어쩌면 바로 한강이 어떠한 다른 말로보다도 더 잘 표현한 것 같은 그 마음,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다’라는 고백과 유사한 심정이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역사 유비’라는 말이 그 말이고, 저의 믿을 ‘信’자의 ‘신학’(信學)이 그러하다고 말씀드립니다. '사람’의 ‘인(人)’ 자와 ‘말’의 ‘언(言)’ 자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信’ 자는, 바로 그 과거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은총의 집결’이고, 그것이 우리 ‘언어’의 일이며, 信學은 바로 그 언어의 일과 그에 대한 믿음의 일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강이 태어나서 두 시간 만에 죽은 언니를 자신의 몸으로 대신하고 싶었던 것처럼 어쩌면 저도 유사하게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중학교 3학년의 나이로 떠나간 언니에게 제 몸을 빌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1960년대 온갖 고통에 찬 시간을 보내고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버지가 귀국해서 10년만에 돌아가시자 그에게 제 목소리를 빌려드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信’이라는 언어를 남기고 가신 그는 1927년생으로서 우리의 20세기를 온몸으로 큰바람과 회오리로 겪으면서 자신의 그 믿음을 깊은 영(靈)의 신학으로, 슐리얼리스트 그림으로, 소박하지만 진한 감동을 주는 시들로 남기고 가셨습니다. 그런 그로부터 나온 저희의 오늘 시간이 과거가 현재를 도운 것이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구원한 일이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한강은 자신 수상기념의 마지막 말로 “어쩌면 내 모든 질문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이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토로했습니다(한강 노벨상 수상기념 강연, 2024.12.07.).
4.
저도 信學의 일을 제가 사랑하는 또 다른 여성 사유가 한나 아렌트-그 아렌트도 자신의 삶과 사유를 한 마디로 ‘세계 사랑(Amor Mundi)’이었다고 말하곤 했는데-의 언어로 다시 말해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2023년 한국信연구소 송년 모임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난간 없는 사유’에서 ‘사유하는 신앙’으로 물음을 전회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이신에게도 매 순간의 삶이 아마 유사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곧 난간 없는 낭떠러지 앞에서의 삶과 같은 처지에서도 다시 언어를 잡고, 사유를 밀고 나가서 마지막, 믿음과 삶과 생명, 사랑을 잡은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그 일을 할 수 있는 ‘언어’를 스스로 만들어 쓰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우리는 모두 과거로부터 그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선험적 능력을 얻어서 태어납니다. 그래서 그 인간의 언어, 다른 말로 하면 ‘信’은 모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남겨진, 우리가 세계와 타자와 이웃과 연결할 수 있는 근저의 그루터기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오늘 우리는 그 언어가 얼마나 강력하게 정치와 공(公/共)의 힘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계엄사태의 정국에서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계엄 무장군들의 사유가 불의한 대통령의 언어를 믿지 않았고, 따르지 않았으며, <서울의 봄>이라는 언어를 최근에 읽은 많은 젊은이들이 다시 정치로 돌아오며 이 탄핵정국의 주역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감사한 일은 우리는 모두, 그리고 세계는 이 여러 중첩의 인류세의 위기의 때에 한강이라는 한국 민족의 오랜 고통에 찬 삶으로부터 얻어진 언어를 받고서 놀라고 있으며, 다시 그 인간 언어의 진상 앞에서 스스로 사유를 시작하고, 새롭게 인간적으로 살고자 결단하며, 그래서 다시 모이고, 오늘 이 시간이, 이 인류의 역사와 시간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어디로 향하게 해야 하는지를, 그녀의 언어대로, 다시 “벼락처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제4회 이신상 시상식에서 견미리 박사와 <열 손가락 서로돌봄 사회협동조합>에게 상을 수여하며 학문과 실천의 조화를 보여주었다. ⓒ장성호
5.
예전 퇴계 선생은 당시 글을 읽고 쓸 줄 몰라 그 언어의 세계에서 많이 소외되어 있던 민중들에게 사람이 어떠한 존재이고 어떠한 삶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도산십이곡’(1565년)이라는 한글 가사를 지으셨습니다. 거기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저는 오늘 저희가 말하고자 하는 ‘역사 유비’와 한국 信學의 일을 참으로 잘 표현해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곧, “옛사람도 날 못 보고 나도 옛사람 뵙지 못해. 옛사람 뵙지 못해도 가시던 길 앞에 있네. 가시던 길 앞에 있으니 아니 가고 어찌하고.” 그 옛사람의 존재를 생각하는 나의 관념도, 그의 존재를 믿고자 하는 나의 신념이나 의지도 흔들릴 수 있지만, 그보다 더욱 확실하게 우리를 이끄는 것은 그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그에 대한 ‘언어’가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을 아니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노래를 지으신 퇴계 선생을 또 새롭게, ‘다시 개벽’의 마음으로 읽으신 강화의 유학자 하곡 정제두(1649-1736) 선생의 언어에 “존언”(存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참으로 좋아하는데, 그는 ‘존언’, 즉 ‘언어에 머문다’라는 말을 가슴에 담고 17세기 억센 바닷바람이 부는 강화도 오지에서 누구나의 몸과 마음 안에 담겨있는 선한 힘, ‘양지’(良知)와 ‘생리’(生理)에 대한 믿음을 그의 정신적 스승 양명처럼 ‘백사천난’(百死千難)의 고통을 겪으면서 다음 세대에 전하고자 했습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언어를 세상에 내놓은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정인보(1893-1950) 선생을 포함해서 20세기 한국 근대와 기독교가 그 강화도 믿음의 언어로부터 얻은 은혜가 큽니다.
6.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이신 상을 수상하신 두 분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 자신이 그랬듯이 몹시 어려운 상황에서 여성신학자로서, 여성조직신학자의 길을 묵묵히 계신 진미리 박사님을 모셨습니다. 미국의 여성신학자 중에서 거의 1세대에 속하는, 성서신학자이면서 역사학자, 조직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엘리자베스 피오렌자의 신학에 대해서 끊임없이 연구하면서 그녀의 인식론과 역사이해, 기독론을 깊이 있게 탐구하며 한국 여성신학의 길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더욱 어려워진 한국 여성신학계의 상황에서 심지어는 같은 분야 여성 동료들까지 무심한 가운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시는 이분에게 조그마한 격려와 지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와 더불어 오늘 모신 다른 분은 <열 손가락 서로돌봄 사회협동조합>을 이끄시는 홍경숙 상임이사이십니다. 오늘 우리 믿음의 학, 信學을 위해서 그 언어와 신학의 일이 어떻게 또 새로운 지경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 계속 확장되어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증명하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언어장애를 포함해서 중증 장애 아이들을 돌보는 어머니들 모임을 결성하고, 그 일을 사회협동조합의 일로 확장해서 10년 넘게 해오고 있는 그룹입니다. 저희가 그분들의 어려움과 고통, 아픔과 인내 앞에서는 감히 말도 꺼내기 어렵습니다.
7.
한강의 글쓰기 작업이 이어온 물음들의 길을 밝히는 평론가 권희철은 “물음들은 대답에 이르는 길들이다. 대답이 언젠가 주어지게 될 경우, 그 대답은 사태 실상에 대한 진술 속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어떤 변화 속에 존립할 것이다.”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가져옵니다. 곧 우리 물음에 대한 진정한 답은 그 물음이 계속 변화해 온 것 자체 안에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겠습니다.
그렇게 저희 信學과 역사 유비라는 질문도 그것이 답이라기보다는 계속되는 저희 질문 속의 한 과정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며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다시 한강의 언어로 ,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연결되어줄 모든 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라는 인사를 저희 인사로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언어에 머무는 한, 우리는 인간이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고, 믿음에 서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며, 함께 있다는 것, 그리고 오늘의 시간을 넘어서 비록 우리 몸의 마지막이 온다고 해도, 그것을 넘어서 생명과 삶은 계속 이어져 간다는 것을 밝혀주는 귀한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어려울 때 저희 책을 출판해주신 출판사의 노고와 오늘 책에 대해 귀한 말씀을 해주신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 이 자리에 친히 와서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 드립니다.
관련기사“한국 信연구소” 송년 및 출판기념회, 신학과 실천의 새 지평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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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퇴계 선생은 당시 글을 읽고 쓸 줄 몰라 그 언어의 세계에서 많이 소외되어 있던 민중들에게 사람이 어떠한 존재이고 어떠한 삶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도산십이곡’(1565년)이라는 한글 가사를 지으셨습니다. 거기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저는 오늘 저희가 말하고자 하는 ‘역사 유비’와 한국 信學의 일을 참으로 잘 표현해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곧, “옛사람도 날 못 보고 나도 옛사람 뵙지 못해. 옛사람 뵙지 못해도 가시던 길 앞에 있네. 가시던 길 앞에 있으니 아니 가고 어찌하고.” 그 옛사람의 존재를 생각하는 나의 관념도, 그의 존재를 믿고자 하는 나의 신념이나 의지도 흔들릴 수 있지만, 그보다 더욱 확실하게 우리를 이끄는 것은 그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그에 대한 ‘언어’가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을 아니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노래를 지으신 퇴계 선생을 또 새롭게, ‘다시 개벽’의 마음으로 읽으신 강화의 유학자 하곡 정제두(1649-1736) 선생의 언어에 “존언”(存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참으로 좋아하는데, 그는 ‘존언’, 즉 ‘언어에 머문다’라는 말을 가슴에 담고 17세기 억센 바닷바람이 부는 강화도 오지에서 누구나의 몸과 마음 안에 담겨있는 선한 힘, ‘양지’(良知)와 ‘생리’(生理)에 대한 믿음을 그의 정신적 스승 양명처럼 ‘백사천난’(百死千難)의 고통을 겪으면서 다음 세대에 전하고자 했습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언어를 세상에 내놓은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정인보(1893-1950) 선생을 포함해서 20세기 한국 근대와 기독교가 그 강화도 믿음의 언어로부터 얻은 은혜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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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이신 상을 수상하신 두 분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 자신이 그랬듯이 몹시 어려운 상황에서 여성신학자로서, 여성조직신학자의 길을 묵묵히 계신 진미리 박사님을 모셨습니다. 미국의 여성신학자 중에서 거의 1세대에 속하는, 성서신학자이면서 역사학자, 조직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엘리자베스 피오렌자의 신학에 대해서 끊임없이 연구하면서 그녀의 인식론과 역사이해, 기독론을 깊이 있게 탐구하며 한국 여성신학의 길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더욱 어려워진 한국 여성신학계의 상황에서 심지어는 같은 분야 여성 동료들까지 무심한 가운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시는 이분에게 조그마한 격려와 지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와 더불어 오늘 모신 다른 분은 <열 손가락 서로돌봄 사회협동조합>을 이끄시는 홍경숙 상임이사이십니다. 오늘 우리 믿음의 학, 信學을 위해서 그 언어와 신학의 일이 어떻게 또 새로운 지경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 계속 확장되어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증명하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언어장애를 포함해서 중증 장애 아이들을 돌보는 어머니들 모임을 결성하고, 그 일을 사회협동조합의 일로 확장해서 10년 넘게 해오고 있는 그룹입니다. 저희가 그분들의 어려움과 고통, 아픔과 인내 앞에서는 감히 말도 꺼내기 어렵습니다.
7.
한강의 글쓰기 작업이 이어온 물음들의 길을 밝히는 평론가 권희철은 “물음들은 대답에 이르는 길들이다. 대답이 언젠가 주어지게 될 경우, 그 대답은 사태 실상에 대한 진술 속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어떤 변화 속에 존립할 것이다.”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가져옵니다. 곧 우리 물음에 대한 진정한 답은 그 물음이 계속 변화해 온 것 자체 안에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겠습니다.
그렇게 저희 信學과 역사 유비라는 질문도 그것이 답이라기보다는 계속되는 저희 질문 속의 한 과정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며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다시 한강의 언어로 ,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연결되어줄 모든 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라는 인사를 저희 인사로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언어에 머무는 한, 우리는 인간이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고, 믿음에 서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며, 함께 있다는 것, 그리고 오늘의 시간을 넘어서 비록 우리 몸의 마지막이 온다고 해도, 그것을 넘어서 생명과 삶은 계속 이어져 간다는 것을 밝혀주는 귀한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어려울 때 저희 책을 출판해주신 출판사의 노고와 오늘 책에 대해 귀한 말씀을 해주신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 이 자리에 친히 와서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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