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13

조현 이남곡 인터뷰 4 20251206

조현 이남곡 인터뷰 4 20251206

공자의 한글자 비법. 자기를 살리는 방법, 타인을 살리는 방법 #이남곡 #공자 #논어를 연찬하다

조현TV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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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증자는 공자의 어떤 개 정신적인 아주
개승자죠. 증자는 공자의 돈은 충과
서일 뿐이라고 했고
공자는 평생 실천할 만한 것을 하나만
든다면 그것은 서라고 했는데서 용서할
때 서
왜 그랬을까요?어서
[웃음]
서라고 하는 거는 사실은 이제
한문으로 용서할 서자인데
용서하고는 다르죠. 그 용서는 뭔가
아 상대가 잘못이 있지만 내가 그걸
좀 용서한다 하는 느낌인데 선은
그렇죠.
어 그런 거 아니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받아들인 상태가 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아 아집에서 자유로울 때 가능하죠.
그렇죠. 내가 틀림 없다든지 하고
또는 내 중심으로 생각하면
상대를 받아들이기가 어렵죠.
그 서가 돼야 이게 화위 부동이에요.
그렇죠.
화위부동이라는게 사실은 이게 사람
사이 관계에서 일종에 평화인데 이렇게
화합하는 거 평화인 상태인데
그 하나가 부동이거든요. 상대를
나에게 동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죠. 상대를 나에게 동화시키로
한다는 건 내가 틀림 없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 방향으로 상대를
끌어뜨리려 하잖아.
그렇죠.
그러면 그건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그래서 대표적으로 이제
소위는 어 동이 불화해. 근데
어 군자는 화위 부동이에요.
예.
이게 사실은 서죠. 서. 그게 서을
아마
좌우명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을
만하다고 이제 저를 이야기하는데
충에 대해서는
선은 공자가 이야기를 해요.
기소 불욕 불시어의 네가 원하지 않는
바을
어 남에게도 시키지 마라 이렇게 이제
이야기를 하는데
충에 대해서는 어이 별로 말한게
없어요. 예.
뭐 공자 일반적인 그 말하는 방식인데
뭘게 자세히 설명하거나 정의하듯이
말하는게 거의 없습니다. 사람에
물어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대답하기도
하고. 근데
내가 우연히 그 어떤 걸 보다가 충에
해당하는게 뭐 보통 충하면
어 뭐 나라에 대해서 충성하는 거 뭐
이런 걸 왜냐하면 그 예전에 군주에
대한게 충이죠. 예. 어, 부모는
효고 근데
그런게 이렇게 선입관처럼 있어 가지고
현대인들이 충이란 말을 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게 젊은 세대일수록 어 그런데
사실은 충의 개념이 그런게 아니다
하는게 내가 논을 보면서 느끼는
거예요. 뭐냐면이
천이 뭘까 하고 나도 나 내름대로
이렇게 그 하다 보니까
14세기 15세기의 그 에르트 기독교
신비주의자
거룩함에 대한 정의를 해 놓은게
있어요. 그 세 가지를 정의했더라고.
하나는
해야 할 일에 다음을 하는 거예요.
그 거룩함의 조건이
해야 할 당위에 다음을 하는 거예요.
아. 두 번째는 아 그 일에 집중하는
거지. 전념 전념하는 거고
세 번째가 아주 중요하더라고.
기쁨이요.
네.
앞에 해야 할 일을 하는 거는 의무나
뭐 이렇게 그런데 사는 거지만 해야
할 일에 다음을 하는 거는
자발성이
아하
진짜 마음에 하고 싶어서 자발 이게
자발성 전념 기쁨 에카로트는 거룩함에
대한 걸 이야기했는데 내가 쭉 그
논를 보면서 나오는 충이라고 하는
단어의 어떤 개념을 생각할 때
이게 이게 비교적 잘 들어맞는 말
같아.
예. 자발적이고 전념하는 거예.
전이라는 건 그에 몰두하는 거니까
소위 그 자기를 잃을 정도로 마
모라적인 어떤 그런 전념 상태가
충이야. 예.
근데 그것이 그다음 세 번째가 중요한
기쁨이야 돼.
요게 충이지 않을까? 그래서
적어도 이거는 충이라 하는 건 자기를
자기를 가장 잘 살리는게
충이고
네.
선은
상대
다른 사람을 살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충과 서가 어울려야 자기도 살고 다른
사람 살게 되는
가장 중요한 등목이지 않을까? 아,
그 실제로 나는 협동조합의
어떤 어 가능성이라든지 중요성 같은
거를이 좀 많이 생각했기 때문에
협동하는 사람들하고 많이 만났습니다.
그동안에 주로 만나면서
그 이제 임문 운동가로서 만났을 때
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는 춤과서가
바로 협동 운동이 성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등목으로 충과 서를
이야기해요. 그래서 아마 저는 그렇게
봅니다. 충과서를. 예. 그 예.
충과서에서
이제 충은 한자로 가운데 중에
마음심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이 제가
보기에는 이제 굉장히 중요한 거
같아. 그러니까 마음의 중심을
잡는다는게 자칫하면은
어떤 주체적인 어떤 고정관념, 자기의
주대 이런게 아니고 우리는 어떤
상처에 사로잡히거나 편견에
사로잡히거나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우울에
사로잡히거나 어떤 그런 것에 어떤
감정적인 것 하나의 편벽된 생각에
사로잡혀 가지고 완전히 거기에 푹
빠져 버리면은 마음의 중심을
잃어버리는데 어떤 사로잡히는 상태
사로잡히는게 이제 결국 그게 아집이
돼 버리는데 뭐 그게 사상이 됐든
철학이 됐든 감정이 됐든 그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는게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이
아닌가 저는 이제 그 그리고 마음의
중심을 그렇게 사로잡히면서 일단
벗어나면은 이제 서가 좀 쉽게 되는
서라는 것은 이렇게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그 말을 받아들이고 또
듣는 건데 자기가 뭔가의 편견에
사로잡 잡혀 있으면 상대방의 말이
쉽게 곡회가 되고 오해가 되고
그러는데 이렇게 자기가 어떤
사로잡히면서 벗어나면은 어가 이렇게
자기가 어떤 옳다는 것에 딱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서
좀 벗어나 있으면은 자유로운 상태
평안한 상태가 되면은 상대방이 있는
마을을 있는 그대로 그 말을 이렇게
수용하는 입장받고 생각하는 이런 서의
자세가 좀 더 쉽게 되지 않을까 이제
이런 어 생각이 듭니다. 우리 이남욱
선생님은
그 삶에서서 늘 삶의 태도 자체가
서가 잘 되시는 분이에요.
아 그거는 잘 모르는게
이제 그렇게 하려고 부담히 노력하는
사람이죠. 예. 사람인데
그 이야기하다 보니까
아 사실은 공자의 제자 가운데 내
기억에 이렇게 첫도 오르는 사람이
셋이에요.
이제 하나가 공자가 가장
어 자기 지위로 생각했던 유일한
제자가 안회죠. 예.
그다음에
아연은 굉장히 가난한 사람이뭐 공자의
제자 가운데서
쌍벽이라고 생각하는데 자공입니다.
자공. 음. 청자나 이런 사람들은
나중에 이제 논창 과정에 뭐 이렇게
해서 그 사람들이 마이 상당히 좀
하는 거 같지만 실제 공자 시대 논을
보면은
예.
공자 시대는 자공 아 이제 안회하고
자공이 쌍벽을 잃어요. 어 자공은
부자야. 상당한 부자로서
공자 학단의 그 물질적인 그 기초
규척을 제공하는 사람인데이
사람도 대단한 사람이죠. 대단한
사람인데 어 자공이 한번 자공일
거야. 그 공장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야 기소 무시어인
내가 원하지 않는 걸 다른 사람
시키지 않겠다 했더니 공자 말이
너는 아직 그럴 만한 저게 못된다라고
얘기해. 그래서 예 사실은
공공자님도 굉장히 정론 집필이 찍는
소리를 하시 그 아 그럼 아 그 저
무색깔 정도로 해 버린다고 이럴테면
뭐 저 자로가 아이 어 삼 뭐삼군을
뭐할 때는 뭐 누가고 하겠습니까 너는
아니야
그렇죠 너처럼 맨손으로 호랑이나
때려잡으려는 만용이나 부르는
인간하고는 같이 위태로 같이 하면 그
하여튼간에 그런 식인데
그 이야기들 들어서 내 이야기 하기
나도 그렇게 알고 노력할 뿐이지 그
참 쉽지 않습니다. 아 쉽지 않아요?
아니이 선생님은 잘하시고 또이
선생님도 공자님 못지 않게 찍는
말씀을 해 놓으셨더라고이 대목에서
뭐라고 하냐면 협동조합하는 사람들이
제일 협동적이지 못하고 민주화를
부르짖는 인간이 독재적인 인간이 많고
또 경천 공감 프로그램을 이렇게
한다는 인간들이 경천 공감이 안 되고
그래서 속이 엄청 찔리더라고. 저도
이제 경천을 그 강조하는 나차람
프로그램 하는데 그래서 이제 저하고
집에서 모시고 사는 분이 아니 경감
그렇게 강조하면서 경청 공감 안 되고
있잖아 지금. 저도 이제 집에서
이렇게 당하고 사는데이 책에서도
이렇게 탁 또 아픈 대목을 확세 놓고
아이 또 예리하게 내가 많이 경험을
해 봐서 알아요. 내가 경험하는게
뭐냐면
공동체 운동이나 협동 운동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보니까
그것이 좋은 거거든.
네. 그게 좋은 방향이니까 하는데
그 좋은 것이니까 하는데 그 대신에
그게 뭐라면 거기에 대한 아집이
강해집이 강하다고 하는 거는
소통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지
않습니까? 왜냐면 자기 성경에 틀림
없거든. 실제로 협동 운동을 하건
공동체 운동을 하건 마을 운동을 하건
여기 가장 중요한 거는 소통인데
그러니까 그 그 좋은 가치들이
머릿속에 있는데 실제 자기
성격상으로는 아집이 강한 거예요.
근데 처음에 내가 그게 좀 꽤 아 꽤
심하다 보여튼간에 좀 어 좀 난처
거야 실제 왜냐면 많이 내가 그거 좀
봤으니까 그 많이 봤찬데 앞뒤가 다른
모습
예 근데 그거를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다라고 하는 생각이 있어 왜냐하면
머릿속에서라도 아 이게 좋은거다 하는
것만 해도 사실은 좋은 거예요.
근데 다만 그것이 체득이 안 돼
있어. 안 있고 그걸 달성하려고
나가는 그 실천을 하는 데는 장애가
돼 버려요. 성격적으로. 그 성격이
뭐냐면 내가 생각하는게 틀림이 없이
옳다.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게
있기 때문에 사실 이게 소통의 장애가
되지. 그래서
어 나는 좀 그걸 아주 비난만한 쪽에
사고는 내가 버렸어요. 아 저렇게
생각하는 거 말도 훌륭해. 음.
아, 진짜이
선생님 말씀하시니까 그게 그 진짜
옳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저도
이제 경청 공감을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내전에 그런 것이 안 됐을 때
내가 옳다는 이렇게 생각 속에 빠져서
살 때에 나의 그 심리적 공함과 그
피곤함, 피폐함을 너무 절실히 깨닫기
때문에 아직도 잘 안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강조하는 거지. 네가
하지도 못한 것을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이제 비난을 물론 받을 수는
있지만은 내가 스스로 안 돼서
힘들었던 삶을 성찰한 결과 아 그게
절실하고 필요하고 조금이라도 그래도
조금 그걸 열고 보니까 더 편안해지고
그런 걸 이제 깨닫는 것이지 그걸 또
완전히 정론 직필로 또 너도 안 되는
것을 그렇게 그럴 그럴 그럴 일을
예 감사합니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