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2

가미야 미에코 - Wikipedia 神谷美恵子

가미야 미에코 - Wikipedia

카미야 미에코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카미야 미에코
(카미야 미에코)
탄생마에다 미에코
(마에다 미에코)
​​1914년 ( 타이쇼 3년) 1월 12일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일본의 국기
사망1979년 10월 22일 (65세)
직업정신과 의사
작가
번역가
국적일본의 국기 일본
최종 학력도쿄 여자 의학 전문 학교 졸업
대표작생활에 대해」( 1966년 )
배우자가미야 선로
어린이카미야 리츠 (장남)
카미야 토오루 (차남)
친족마에다 다몬 (아버지)
보코(어머니)
마에다 요이치 (형)
템플릿 보기

카미야 미에코 (카미야 미에코, 1914년 ( 다이쇼 3년) 1월 12일 - 1979년 (  와 54년) 10월 22일 )는 일본의 정신과 의사 . 철학서·문학서의 번역이나 에세이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전시 중 동대병원 정신과를 지지한 3명의 의사 중 한 명, 전후에 GHQ와 문부성의 절충을 한  에 맡고 있었다 .

평생·인물 편집 ]

탄생부터 한센병 환자와의 만남까지 편집 ]

가미야 미에코(결혼전은 마에다 미에코)는 1914년 ( 다이쇼 3년) 1월 12일에 내무성 직원인 아버지 마에다 다몬 과 그 처방자의 장녀로서 오카야마시 에 태어났다 [1] . 형제에게는 형의 요이치 외에, 나중에 1남2녀가 태어났다 [1] . 아버지의 다문은 그 해의 4월에 나가사키현 의 이사관으로 전임해, 일가는 나가사키로 전이, 다음해에는 내무성 본성 근무가 되어 도쿄에 전거하고 있다 [1] . 다문은 내무성의 엘리트 관료 로서 외국과의 절충을 시작으로 한 직책을 역임했기 때문에 일가는 빈번히 전거하고 있다. 부모가 외국에 출장하고 있을 때에는 형제는 떠나야 되어 친척의 집에 맡겨지는 경우도 있었다. 1920년 (다이쇼 9년)에 다문은 내무성을 퇴직, 도쿄시 조역이 되어, 1921년 (다이쇼 10년)에 일 가는 오쿠보 백인초 에 전거했다 [2] . 미에코는 성심 여자학원 초등학교 2년으로 편입했지만 [3] , 가톨릭 에 의해 운영되어 귀족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던 이 학교에서의 생활에는 위화감을 기억하고 있었다.

1923년 (다이쇼 12년) 7월, 다문은 국제노동기구 의 일본 정부 대표로 임명되어 일가는 스위스 의 제네바 로 향했다 [3] . 미에코는 시내에 있는 쟌·잭·루소 교육 연구소 부속 초등학교에 편입학했다 [3] . 1학년부터 6학년까지 20여명의 학생이 하나의 교실에 모여 각자의 능력에 따른 지도를 받고 있던 이 학교에서 미에코는 “갑자기 밝아지고 성장했다”. 요즘 부모님은 두 사람의 결혼식 매주인이었고 당시 국제연맹 사무 차장을 맡고 있던 니타토 이나조와 친밀하게 교제하고 있어, 그를 존경하고 있던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미에코도 니와토도로부터 큰 영향 을 받았다 . 그러나 함께 가난한 처지에서 노력으로 몸을 세워 온 부모 사이는 불화라고는 말할 때까지 다툼이 끊이지 않은 것 같고, 미에코는 장녀로서 어릴 때부터 가정에 신경을 쓰고 아버지의 사교에 참가했지만, 나중에 이것은 큰 부담이었다고 적고 있다.

1925년(타이쇼 14년)에는 새롭게 설립된 제네바 국제학교 의 중학부에 입학했다 [4] . 스위스 생활이 길어지는 가운데, 동생은 프랑스어를 일상 대화에서도 사용하게 되었다 [4] . 나중에 미에코는 「프랑스어로의 것을 생각하는 것, 읽는 것, 쓰는 것이 가장 좋다」라고 말하고 있다[4 ] .

1926년 (다이쇼 15년)에 12월 말에 일가는 일본으로 귀국하고, 다음 해의 8월에 다문은 도쿄 시정 조사회 전무 이사로서 근무했다 [ 5 ] . 미에코는 일단 자유학원 에 편입학했지만 거기에서의 교육에 익숙하지 않고, 1927년(쇼와 2년) 9월에는 성성 고등여학교 로 전학하고 있다 [5] . 학교 외에 아테네 프란세 에서 어학을 무교회주의 에 속하는 전도사였던 삼촌 가나자와 죠오가 주최하는 연구회에서는 성서를 배우고 있었다. 종교 에 관해서는 나중에 퀘이커에게, 또 만년에는 불교 에도 관심을 보였지만, 기독교 에 대한 관심은 평생 잃지 않았다. 1932년 (쇼와 7년)에 성성 고등여학교를 졸업 후, 형의 권유로 쓰다 히데가 키학원 본과에 입학했다 [5] .

1934년 (  와 9년) [주석 1] 에 미에코는 가나자와로부터 오르간 의 반주역으로서 한센병 요양소 시설 의 방문에 동행하도록 요구되었다. 삼촌과 함께 다마 전생원을 방문한 그녀는 한센병 환자의 병리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나중에 그녀는 어떤 종류의 '소명감'과 함께 자신이 몸을 바치는 평생의 목적이 분명했다고 말했다.

미에코는 의사로서 한센병 환자에게 봉사하겠다고 결의해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 의 수험공부를 시작했다. 그녀의 의지를 알게 된 부모와 쓰다 히데가쿠학원의 호시노 학원장은 이를 가르쳐 1935년(쇼와 10년)에 본과를 졸업하자 학장의 추천에 따라 대학부로 진학 했다 . 당시의 쓰다의 대학부에서는, 수명의 학생에 대해서 니시와키 준사부로가 영어를, 타마가와 나오시게가 라틴어를 가르치는 등 귀중한 교육 체제 가 갖추어져 있었지만, 미에코는 「한센병 치료에 기여하고 싶다」라고 하는 생각 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당시 사병이었던 결핵 에 감염되었기 때문에 가루이자와 로 전지 요양에 보내졌지만, 조직적인 공부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녀는 그 훈련을 하지 않고 가을에는 구제 고등학교 의 교수 자격 이다 영어과 고등 교원 검정 시험에 수험해, 이것에 합격하고 있다. 일단은 병상이 들어갔지만, 이듬해에 재발해 다시 요양생활로 들어갔다. 죽을 때까지 '고전문학을 읽어두고 싶다'고 침대 위에서 독학에 힘쓰고 이탈리아어로 단테를, 독일어로 힐티를 , 한층  고대 그리스어 로 신약 성경  읽어 나갔다 . 그 중에서도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의 ' 자성록 '( 그리스어 )은 그녀의 생애를 통한 좌우의 책이 되었다. 결핵은 의사의 추천으로 받은 인공기흉술에 의해 완치되고 있다.

의학으로의 전환 편집 ]

1937년 (쇼와 12년)에 발생한 노조교 사건을 계기로 대일본 제국 육군 은 중국 대륙 에 일본군을 진주시켜 일중 전쟁이 발발했다. 이를 침략 이라고 비난하는 미국 과의 외교관계의 악화를 우려한 대 일본제국정부 는 1938년 (쇼와 13년) 뉴욕시 에 새롭게 일본문화회관을 마련해 여론 개선을 도모하자 했다. 당시 아사히신문 에서 논설위원을 맡고 있던 다문은, 2·26사건 때부터 군부 및 특고의 주의를 끌게 되어, 이를 우려한 친구들의 알선에 의해, 이 시설의 초대 관장에 임명 했다. 예전부터 미국의 이야기를 들고 있던 미에코도 포함한 일가는 갖추어져 뉴욕시 근교의 스커스데일  이주 했다 . 미에코는 이 무렵에도 의학에의 전향을 재삼부에게 제기하고 있다. 아버지는 이것을 용서하지 않고 그녀는 콜롬비아 대학 대학원 고전 문학과에서 고전 그리스 문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필라델피아 교외에 존재하는 퀘이커 운영의 학 기숙사 펜들 힐 영어판 ) 에서 기숙 생활을 보내, 평생의 친구가 되는 우라구치 마사키를 만나고 있다. 의학부 진학에 대한 아버지의 용서를 얻은 미에코는, 1940년 (쇼와 15년) 2월부터 콜롬비아 대학 의학 진학 과정에 입학했다. 이듬해 태평양전쟁 의 발발을 우려한 일가는 아버지를 남기고 귀국해 미에코는 도쿄 여자의학전문학교 본과에 편입학했다. 요즘 콜롬비아에서 만난 인물과 약혼한 것으로 보이지만, 곧바로 이것은 해소되었다. 다음 1941년 (쇼와 16년) 12월에는 대 일본 제국 해군 의 진주만 공격 에 의해 일미는 개전해, 다문은 엘리스 섬 에서 잠시 억류 생활을 보낸 후, 제1차 교환선 으로 대일본 제국 에 라고 귀국했다.

결혼 편집 ]

1942년 (쇼와 17년)의 10월에는 당시 한센병의 권위였던 오타 마사오(키노시타 아츠타로)의 연구실을 방문해, 한층 더 졸업전의 1943년(쇼와 18년)에는 오카야마  의 나가시마 아이 생원 그래서 12일간을 보내 일본의 한센병 치료사 에서 중요한 인물인 미츠다 켄스케 와 지기가 되는 등 한센병 치료에 대한 관심은 요즘이 되어도 변하지 않았다.

친구가 정신 분열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 의학 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어, 1944년 (쇼와 19년) 가을에 여자 의전을 졸업하면, 도쿄 제국 대학 정신과 의국에 입국해, 우치무라 유노 교수 아래에서 정신과 의사 로서의 교육을 시작했다. 1945년 (쇼와 20년) 3월 11일 의 도쿄 대공습 에 의해, 히가시나카노의 친가는 전소하고, 가족이 모두 소개하는 가운데, 혼자 정신과 병동에 옮겨 살아 환자의 치료에 임되었다.

8월에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 다문은 히가시쿠나미야 내각에서 문부 대신에게 발탁되어 미에코는 그 일을 돕기 위해 아버지의 비서로서 GHQ와의 절충 및 문서의 번역 작업 등에 종사 하는 것 되었다. 전시 중의 니가타현 지사 로서의 근무를 다이세이 익찬회 에 관계하고 있었다고 훼손된 다문은, 다음해 1월에 사직했지만, 미에코는 그 후도 후임의 아베 노세이 대신의 요청으로 문부성에서의 일  계속 , 사무촉탁의 신분으로 GHQ 교육 정보부와의 절충에 해당했다.

미에코의 어학 재능이 그 밖으로 대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국무대신 보다 고액의 봉급을 받고 있었다고도 한다. 5월에 도쿄대학으로 돌아와 도쿄 재판 에서 도죠에이키 의 머리를 두드리는 등 정신과에 수용된 오카와 슈아키 의 정신감정을 도와주고 있다. 도쿄대학 의학부에서는, 한 동료의 젊은 정신과 의사로부터, 「스토커」적 집착을 나타내어, 매우 곤혹하고 있던 것 같다 [주석 2] .

7월에 도쿄제국대학 이학부 강사를 맡고 있던 식물학자 카미야 선로 와 결혼했다. 가미야는 미에코와 동시기에 미국 동해안에서 연구생활을 보내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식물학을 고치고 있던 우라구치 바로 왼쪽의 펜실베니아 대학 사이프리츠 연구실에서의 동료이기도 했다 [ 주석 3] .

두 사람은 세타가야 에 신거를 세운 후 카미키타자와 로 이사했고, 여기서 장남의 율이 탄생했다. 결혼 후 10년 정도의 생활은 전후의 물자 부족이나 차남의 굴상 결핵 등도 있어, 매우 괴로운 것이었다. 영양실조에 의해 율의 컨디션이 악화되었을 때에는 라라 물자 에 의한 분유 의 지급을 받아 어떻게든 코야스를 되찾았다.

문필생활 편집 ]

1949년 (쇼와 24년)에 남편의 선랑은 오사카 대학 교수에 초빙되어 일가는 오사카로 옮겼다. 12월에는 차남의 철도도 태어나, 주부로서 바쁜 생활을 보내는 한편, 이전에 애독한 마르크스·아우렐리우스의 「자성록」의 번역서를 창원사로 부터 출판 했다 . 1950년 (쇼와 25년)에 선로는 펜실베니아 대학에 초청되었지만 미에코는 어린이 2명과 함께 오사카에 머물며 아테네 프란세와 아메리칸 스쿨에서 어학을 가르쳤다 . 1951년 (쇼와 26년)에 선로는 귀국해 일가는 아시야 에 옮겨 살았다. 결핵에 감염된 차남의 치료약을 어둠시에서 손에 넣기 위해서, 집에서의 사학원이나 카나디안 아카데미에서 프랑스어를, 1956년(쇼와 31년)부터는 고베 여학원 대학에서 비상근 강사 로서 문학 을 가르쳤다 . 1954년 (쇼와 29년)에 초기  이 발견되어 라듐 치료를 받았다.

1957년 (쇼와 32년)에, 나가시마 아이생원 에 있어서의 한센병 환자의 정신의학 조사를 개시했다. 이 업적을 바탕으로 1960년 (쇼와 35년)에 오사카대학에서 학위를 취득, 고베여학원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고, 1963년(쇼와 38년)부터는 모교의 쓰다학원대학교수  취임 했다 . 정신의학 및 프랑스 문학 등의 강의를 담당하고 있으며, 아시야의 집에서 오카야마현과 도쿄를 왕복하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아이생원에서의 연구나 1958년 (쇼와 33년)에 교토에서 행해진 고흐전을 본 것이 계기가 되어, 후에 '생활에 대해'를 구성하는 문장을 써 나갔다. 1963년(쇼와 38년)에는 미국에서 연구생활을 보내고 있던 선로의 근원을 방문해, 그 귀도에 동지에 있어서의 한센병 시설 및 영불의 정신병 시설을 견학하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유네스코 정부 대표가 된 형의 요이치에서 미셸 푸코 를 소개받았다.

1965년 (쇼와 40년)부터는, 나가시마 아이생원의 정신과 의장에 취임해, 집에서 요양소로 다니고 치료에 임했다. 이듬해 1966년 (쇼와 41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자살한 버지니아 울프 의 병적을 조사하기 위해 도영해, 남편의 레너드 울프 와 면회했다. 두 사람은 레나드의 죽음까지 문통을 계속하고 있다. 이 해에 미스즈 서방 에서 ' 생활에 대해 '가 출판되었다.

만년 편집 ]

그 후는 애생원에서의 의료에 종사하는 곳에서 푸코 [주석 4] , 질보그의 번역, 자신의 저서의 집필, 울프의 병적학 연구 등을 실시했다. 1972년 (쇼와 47년)에 심장을 나쁘게 하고 이후는, 심신에 큰 부담을 강하고 있던 애생원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가정과 집필을 중심으로 생활했지만, 만년의 수년은 십수회에 걸친 입퇴원 를 반복해, 1979년(쇼와 54년) 10월, 심부전 때문에, 65세로 사망했다.

가족과 친구 편집 ]

부모는 함께 그 아버지의 대에 집이 몰락한 부유한 상가의 출신이다.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오사카의 신사이바시 에 거주하고 있던 인물로, 재능을 원수로 대상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그 후 사업에 실패해 다문의 결혼 당시에는 다문이 급료의 절반을 먹여야 한다 정도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의 방자는 군마현 토미오카 의 생사 상금 사와 치만 타로의 제3녀로서 태어났다. 가나자와 가문은 ‘장이 7개나 있다’ 정도의 부자였지만, 자유민권운동 에 참가한 아버지가 경찰에 쫓기고, 빚을 지고 있던 인물에 의해 가옥에 방화되어 일가는 무일문이 되었다 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중개한 것은 어머니가 급비생으로 다녔던 퀘이커가 운영하는 보통 토학원 의 고문이었던 신도토이다. 보코는 일찍부터 퀘이커의 가르침을 믿고 다문도 보코의 사후와 마찬가지로 퀘이커로서 생활했다. 두 사람의 성격에 대해서는 1940년대 에 미에코가 에른스트 클레치머 의 유형론 에 따라 아버지를 분열 기질, 어머니를 순환 기질로 분석했다.

오빠 마에다 요이치 는 대학을 졸업한 뒤 프랑스 에 오랫동안 유학했고 나중에 프랑스 문학자 로서 도쿄대학 교수로 취임했다. 문학에 나아가는 계기가 된 것은 스위스의 인터내셔널 스쿨 에서의 교육이었다. 판세」 의 초고를 상세하게 해석한 연구에 의해 저명하다. 오에 켄사부로 의 프랑스어 교사였다. 여동생의 미에코에 대해서, 「여성 싫어지고 싶다면, 잘 생긴 여동생을 가지는 것이 제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두 여동생은 각각 소니 창업자 이후 카다이 , 이토 다다사의 부사장을 맡은 인물과 결혼했다. 아버지 다문은 후술의 노무라 후 도와 함께 소니의 전신인 도쿄 통신 공업 에 출자하고 있어 명예직이지만 초대 사장을 맡았다.

미에코의 장남 카미야 리츠 는 아버지의 선랑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자가 되었다. 동대 대학원 이학계 연구과 교수, 학습원 대학 이학부 객원 교수 등을 맡아 조류가 가진 편모의 구조 및 운동 기구에 관한 연구를 다루고 있다. 차남 카미야 토오루 는 교토대학 이학부에서 우주 물리학을 수료한 (1973년 졸업) 이후 고악기 연주가가 되어, 리코더와 독특한 빨대 피리 연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미야하라 안 춘저 『가미야 미에코 거룩한 목소리』에는, 미에코가 쓰다 히데가쿠학 시대에 결핵에 감염되어 죽음의 바닥에 있던 노무라 카즈히코와 약혼했다는 소문의 기술이 있다[7 ] . 두 사람이 매우 플라토닉한 연애 관계에 있던 것은 형의 요이치를 포함한 관계자의 증언으로부터 뒷받침되고 있지만, 두 사람의 약혼에 대해서는 의심스럽고, 문고판에 있어서는 정정되고 있다[8 ] . 이치히코는 ' 전형 헤이지 포물공 '의 작자로 알려진 노무라 후도의 장남이며, 노무라가와 마에다가는 일가 구루미에서 교제를 하고 있었다.

미에코의 친구이기도 한 이치히코의 여동생인 마츠다 료코 는, 경제사학자 마츠다 토모오(나중에 동대 교수)와 결혼했지만, 23세의 젊음으로 형과 같이 결핵에 의해 사망했다. 사후 남편의 손에 의해 瓊子가 집필한 아동문학에 관한 연구서가 출판되었다.

한센병 환자의 비판 편집 ]

스즈키 료이치 [주석 5] 는 카미야가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로부터 존경받고 있던 사실을 고려한 후, 카미야가 강제 종신 격리 정책을 환자에게 혜택이라고 입장에 놓여 있으며, 미츠다 켄스케  영향 을 넘을 수 없었던 것, 관리자 측의 입장으로부터 환자의 상태, 처우를 보는 것이 많았던 것 등을 비판하고 있다[9 ] .

문헌 편집 ]

저작 편집 ]

저작권집(미스즈 서방, 1980-1985년)
  1. 생활에 대해 "
  2. 『인간을 응시해 부・케베이스의 에마』
  3. 『마음의 여행 첨부・책과의 만남』
  4. "버지니아 울프 연구" [주석 6]
  5. 『여행의 수첩에서 에세이집 1』
  6. 『존재의 무게 에세이집 2』
  7. 『정신의학 연구 1』
  8. 『정신의학 연구 2』
  9. 『편력』
  10. 『일기・서간집』
보권 1.『젊은 날의 일기』 신판 2014년
보권 2.『가미야 미에코・우라구치 마사토 왕복서 간집』 신판 1999년
[가미야 미에코 컬렉션] 미스즈 서방 [주석 7] , 2004-05
  1. "생활에 대해" ISBN 4622081814
  2. 『인간을 응시해』ISBN 4622081822
  3. 『마음의 여행』ISBN 4622081830
  4. 『편력』ISBN 4622081849
  5. 『책, 그리고 사람』ISBN 4622081857
생전 간행
  • 『생활에 대해』 미스즈 서방, 1966년
  • 「인간을 응시해」아사히 신문사 , 1971년, 아사히 선서 (신판), 1974년, 이후 신장판
  • 『극한의 사람 병든 사람과 함께』 루걸사, 1973년
  • 「마음의 여행」일본 평론사 , 1974년, ISBN 4535981035
  • 『가미야 미에코 에세이집』 루가르사(전 2권), 1977년. “교육·인물편”, “생명·라이·정신 의료”
  • 『정신의학과 인간 정신의학논문집』 루걸사, 1978년
신판

학위 논문 데이터베이스 편집 ]

오사카 대학에 의해 1960년 2월 3일, 수리. 의학 박사.

번역 편집 ]

Pubmed에서 편집 ]

  • Virginia Woolf. An outline of a study on her personality, illness and work. Kamiya M . Confin Psychiatr. 1965;8(3):189-205.
  • The existence of a man placed in a limitsituation. An anthropological analysis of a paranoid case in a leprosarium. KAMIYA M. Confin Psychiatr. 1963;6:15-52.
  • Psychiatric studies on leprosy. KAMIYA M. Folia Psychiatr Neurol Jpn. 1959 Jul;13:143-73.

평론·전기 편집 ]

각주 편집 ]

주석 편집 ]

  1. ^ 오오타 유조 「상실로부터의 출발」 p.79에 의하면, 이것은 저작집별권 연보에 나타나고 있는 1933년이 아니고, 1934년 봄이다. 오오타는 이것이 같은 해 1월 27일의 히코의 죽음으로부터 수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것에 주목하고 있다.
  2. ^ 가미야는, 「무서운 것은 모르고 모르고 사람을 유혹해 버리는 나라고 하는 인간의, 구성이다.남성에 대한 낯선 자신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지 모른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죽을 때까지, 붙잡아 준다」라고 말해져, 대학을 일주일 정도 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6]
  3. ^ 펜들 힐 시대에 미에코는 카미야와 우라구치 마사키가 결혼하는 것이 아닐까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카미야와의 결혼 시에는 우라구치에게 경위를 편지로 전하고, 두 사람을 축복하는 대답을 받은 뒤 약혼하고 있다.
  4. ^ 번역 후 푸코와 면회했을 때 저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에 대해 물었더니, 푸코는 그건 젊어서 운운하고 말하며 미에코는 그 말에 놀랐다. 미에코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소양을 가진 정신과 의사인 나카이 히사오는 푸코 의 사상은 카미야 미에코가 임할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고 있다.
  5. ^ 기사의 스즈키 요이치 와는 다른 사람.
  6. ^ 울프를 병적학 에서 다룬 연구서이지만, 내 1장 『V·울프의 자서전 시작』은 울프의 일기 및 전기로부터 1인칭으로 ​​쓰여진 자서전을 재구축한다는 극히 이례적인 기술을 가고있다. 문학 및 정신의학에 통하고 있던 그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방법이며, 다른 사람이 행하면 강하게 비판되거나 무시되는 듯한 「이탈업」이었다.
  7.  일련의 저작에 있어서, 카미야 자신이 기록한 자신의 과거의 사건에는, 기억 차이 혹은 고의에 의한다고 생각되는 실수가 있어, 「평론」・「전기」로 지적되고 있다.
  8.  『자성록』 초간은, 창원사(철학총서), 1949년.
  9.  "어느 작가의 일기", 초판은 "늑대 저작집 8" 1976년. 「늑대 컬렉션」1999년, 단행판・2015년에 재간.
  10.  저자는 쓰다학원대학 세미나에서 지도를 받았다.
  11. ^ 저자는 노무라 후도 장남으로 여동생이 마츠다 류코 , 소녀기의 카미야 미에코와의 창백한 연애 일기.

출처 편집 ]

  1. ↑ c 가미야 미에코의 세계 2004 , p. 200.
  2. ↑ 가미야 미에코의 세계 2004 , p. 200-201.
  3. ↑ c 가미야 미에코의 세계 2004 , p. 201.
  4. ↑ c 가미야 미에코의 세계 2004 , p. 202.
  5. ↑ c 가미야 미에코의 세계 2004 , p. 203.
  6. ↑ 미야하라 2001 , p. 164-167.
  7. ↑ 미야하라 1997 , p. 71.
  8. ↑ 미야하라 2001 , p. 82.
  9. ^ 스즈키 요이치 「한센병-인간 회복에의 따뜻함:가미야 미에코씨의 인식에 취해」 이와나미 출판 서비스 센터, 2003년 10월. 첫출은 「다마」1996년 8월 - 2000년 7월호.

참고 문헌 편집 ]

  • 미스즈 서방 편집부 “가미야 미에코의 세계” 미스즈 서방, 2004년 10월 4일. ISBN 4-622-08186-5 . 
  • 미야하라 안춘『가미야 미에코 거룩한 목소리』 코단샤, 1997년. ISBN 4062087154 . 
  • 미야하라 안춘 『가미야 미에코 거룩한 목소리』 문예춘추 <분춘문고>, 2001년. ISBN 4167656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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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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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谷美恵子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神谷 美恵子
(かみや みえこ)
誕生前田 美恵子
(まえだ みえこ)
1914年大正3年)1月12日
日本の旗 岡山県岡山市
死没1979年10月22日(65歳没)
職業精神科医
作家
翻訳家
国籍日本の旗 日本
最終学歴東京女子医学専門学校卒業
代表作生きがいについて』(1966年
配偶者神谷宣郎
子供神谷律(長男)
神谷徹(次男)
親族前田多門(父)
房子(母)
前田陽一(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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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谷 美恵子(かみや みえこ、1914年大正3年)1月12日 - 1979年昭和54年)10月22日)は、日本の精神科医。哲学書・文学書の翻訳やエッセイの著者としても知られる。

「戦時中の東大病院精神科を支えた3人の医師の内の一人」、「戦後にGHQ文部省の折衝を一手に引き受けていた」、「美智子皇后の相談役」などの逸話でも知られる。

生涯・人物[編集]

誕生からハンセン病患者との出会いまで[編集]

神谷美恵子(結婚前は前田美恵子)は1914年大正3年)1月12日に内務省職員である父前田多門とその妻房子の長女として岡山市に生まれた[1]。兄弟には兄の陽一の他、後に一男二女が生まれている[1]。父の多門はその年の4月に長崎県の理事官へと転任し、一家は長崎へと転居、翌年には内務省本省勤務となり東京へ転居している[1]。多門は内務省におけるエリート官僚として、外国との折衝を始めとした役職を歴任したため、一家は頻繁に転居している。両親が外国へ出張している際には、兄弟は離ればなれになって親類の家に預けられることもあった。1920年(大正9年)に多門は内務省を退職、東京市助役となり、1921年(大正10年)に一家は大久保百人町に転居した[2]。美恵子は聖心女子学院小学部二年へと編入したが[3]カトリックにより運営され貴族的な雰囲気を有していたこの学校での生活には違和感を覚えていた。

1923年(大正12年)7月、多門は国際労働機関の日本政府代表に任命され、一家はスイスジュネーヴへと向かった[3]。美恵子は市内にあるジャン=ジャック・ルソー教育研究所付属小学校へ編入学した[3]。1年生から6年生までの20人あまりの生徒が一つの教室に集められ、各自の能力に応じた指導を受けていたこの学校で、美恵子は「急に明るくなり、成長した」。この頃両親は二人の結婚式の媒酌人であり当時国際連盟事務次長を務めていた新渡戸稲造と親密に交際しており、彼を尊敬していた両親と同様に美恵子も新渡戸から大きな影響を受けた。しかし、共に貧しい境遇から努力によって身を立ててきた両親の間は不和とは言わないまでも争いが絶えなかったようで、美恵子は長女として幼い頃から家庭に気を配り、父の社交に加わっていたが、後にこのことは大きな負担であったと記している。

1925年(大正14年)には新たに設立されたジュネーヴ国際学校の中学部に入学した[4]スイス生活が長引く中で、兄妹はフランス語を日常会話においても用いるようになった[4]。後になっても美恵子は「フランス語でものを考えること、読むこと、書くことがいちばんらく」であると語っている[4]

1926年(大正15年)に12月末に一家は日本に帰国し、翌年の8月に多門は東京市政調査会専務理事として勤務した[5]。美恵子はいったん自由学園に編入学したがそこでの教育になじめず、1927年(昭和2年)9月には成城高等女学校へと転学している[5]。学校の他にアテネ・フランセにおいて語学を、無教会主義に属する伝道師であった叔父の金澤常雄の主催する研究会では聖書を学んでいた。宗教に関しては後にクエーカーへ、さらに晩年には仏教へも興味を示したが、キリスト教に対する関心は生涯失うことはなかった。1932年(昭和7年)に成城高等女学校を卒業後は、兄のすすめで津田英学塾本科に入学した[5]

1934年昭和9年)[注釈 1]に美恵子は金澤からオルガンの伴奏役としてハンセン病療養所施設の訪問に同行するよう求められた。叔父とともに多磨全生園を訪れた彼女は、ハンセン病患者の病状に強い衝撃を受けた。後に彼女は、ある種の「召命感」と伴に、自分が身を捧げる生涯の目的がはっきりとした、と語っている。

美恵子は、医師としてハンセン病患者に奉仕しようと決意し、東京女子医学専門学校の受験勉強を開始した。彼女の意志を知った両親や津田英学塾の星野塾長はこれを諌め、1935年(昭和10年)に本科を卒業すると塾長の薦めに従い大学部へと進学した。当時の津田の大学部では、数名の生徒に対して西脇順三郎が英語を、玉川直重ラテン語を教えるなど貴重な教育体制が整っていたが、美恵子は「ハンセン病治療に寄与したい」という思いを捨てきれなかった。

彼女は、当時死病であった結核に感染したため、軽井沢へと転地療養に送られたが、組織的な勉強の重要性に気付いた彼女は、その訓練をかねて秋には旧制高校の教授資格である英語科高等教員検定試験に受験し、これに合格している。一旦は病状が収まったものの、翌年に再発し再び療養生活へと入った。死ぬまでに「古典文学を読んでおきたい」とベッドの上で独学に励み、イタリア語ダンテを、ドイツ語ヒルティを、さらに古代ギリシア語新約聖書を読み進めていった。その中でもマルクス・アウレリウスの『自省録』(ギリシア語)は、彼女の生涯を通しての座右の書となった。結核は医師の薦めで受けた人工気胸術によって完治している。

医学への転向[編集]

1937年(昭和12年)に発生した盧溝橋事件をきっかけに、大日本帝国陸軍中国大陸日本軍を進駐させ、日中戦争が勃発した。これを侵略であると非難する、アメリカ合衆国との外交関係の悪化を懸念した大日本帝国政府は、1938年(昭和13年)ニューヨーク市に、新たに日本文化会館を設けて世論の改善を図ろうとした。当時朝日新聞で論説委員を務めていた多門は、二・二六事件の頃から軍部および特高の注意を引くようになり、これを危惧した友人らの斡旋によって、この施設の初代館長に任命された。以前から渡米の話を持ちかけられていた美恵子も含めた一家は、揃ってニューヨーク市近郊のスカースデール移住した。美恵子はこの頃にも医学への転向を再三父に申し出ている。父はこれを許さず、彼女はコロンビア大学大学院古典文学科で古典ギリシア文学を学び始めた。

翌年には、フィラデルフィア郊外に存在するクエーカー運営の学寮ペンドル・ヒル英語版で寄宿生活を送り、生涯の友人となる浦口真左と出会っている。医学部進学に対する父の許しを得た美恵子は、1940年(昭和15年)2月からコロンビア大学医学進学課程に入学した。翌年太平洋戦争の勃発を危惧した一家は、父を残して帰国し、美恵子は東京女子医学専門学校本科に編入学した。この頃コロンビアにおいて出会った人物と婚約したと見られるが、すぐにこれは解消された。翌1941年(昭和16年)12月には大日本帝国海軍真珠湾攻撃によって日米は開戦し、多門はエリス島でしばらく抑留生活を送った後に、第一次交換船大日本帝国へと帰国した。

結婚[編集]

1942年(昭和17年)の10月には当時ハンセン病の権威であった太田正雄(木下杢太郎)の研究室を訪問し、さらに卒業前の1943年(昭和18年)には岡山県の長島愛生園で、12日間を過ごして日本のハンセン病治療史における重要人物である、光田健輔と知己となるなど、ハンセン病治療に対する関心はこの頃になっても変わっていない。

友人が精神分裂病を病んでいたことから、精神医学にも興味を持つようになり、1944年(昭和19年)秋に女子医専を卒業すると、東京帝国大学精神科医局へ入局して、内村祐之教授のもとで、精神科医としての教育を開始した。1945年(昭和20年)3月11日東京大空襲によって、東中野の実家は全焼し、家族がみな疎開するなか、一人で精神科病棟に移り住んで患者の治療に当たった。

8月に日本がポツダム宣言を受諾、多門は東久邇宮内閣において文部大臣に抜擢され、美恵子はその仕事を手伝うために、父の秘書としてGHQとの折衝および文書の翻訳作業などに従事することになった。戦時中の新潟県知事としての勤務を大政翼賛会に関係していたとして咎められた多門は、翌年1月に辞職したが、美恵子はその後も後任の安倍能成大臣の要請で文部省における仕事を続け、事務嘱託の身分でGHQ教育情報部との折衝にあたった。

美恵子の語学の才能が他に代え難かったことから、国務大臣よりも高額の俸給を受け取っていたともいわれる。5月に東京大学へと戻り、東京裁判において東條英機の頭を叩くなどして精神科に収容された大川周明の精神鑑定を手伝っている。東京大学医学部では、ある同僚の若い精神科医から、「ストーカー」的執着を示され、大変困惑していたようである[注釈 2]

7月に、東京帝国大学理学部の講師を務めていた植物学者の神谷宣郎と結婚した。神谷は美恵子と同時期にアメリカ東海岸で研究生活を送っており、同じく植物学を修めていた浦口真左のペンシルベニア大学サイフリッツ研究室における同僚でもあった[注釈 3]

二人は世田谷に新居を構えた後上北沢へと転居し、ここで長男の律が誕生した。結婚後十年ほどの間の暮らしは戦後の物資不足や次男の粟状結核などもあり、極めて苦しいものであった。栄養失調により律の体調が悪化した際にはララ物資による粉ミルクの支給を受けなんとか小康を取り戻した。

文筆生活[編集]

1949年(昭和24年)に夫の宣郎は大阪大学教授に招聘され一家は大阪へと移った。12月には次男の徹も生まれ、主婦として多忙な生活を送る一方で、以前愛読したマルクス・アウレリウスの『自省録』の翻訳書を創元社から出版した。1950年(昭和25年)に宣郎はペンシルベニア大学に招かれたが美恵子は子供二人とともに大阪にとどまりアテネ・フランセやアメリカン・スクールで語学を教えた。1951年(昭和26年)に宣郎は帰国し一家は芦屋に移り住んだ。結核に感染した次男の治療薬を闇市で手に入れるために、自宅での私塾やカナディアン・アカデミーでフランス語を、1956年(昭和31年)からは神戸女学院大学で非常勤講師として文学を教えた。1954年(昭和29年)に初期のガンが発見されラジウム治療を受けた。

1957年(昭和32年)に、長島愛生園におけるハンセン病患者の精神医学調査を開始した。この業績をもとに1960年(昭和35年)に大阪大学で学位を取得、神戸女学院大学の教授に任命され、さらに1963年(昭和38年)からは母校の津田塾大学教授に就任した。精神医学およびフランス文学などの講義を担当しており、芦屋の家から岡山県と東京を往復する生活を続けている。愛生園での研究や1958年(昭和33年)に京都でおこなわれたゴッホ展を見たことがきっかけとなって、後に『生きがいについて』を構成する文章を書き進めていった。1963年(昭和38年)にはアメリカで研究生活を送っていた宣郎のもとを訪れ、その帰途に同地におけるハンセン病施設および英仏の精神病施設を見学している。スイスではユネスコの政府代表となっていた兄の陽一からミシェル・フーコーを紹介された。

1965年(昭和40年)からは、長島愛生園の精神科医長に就任し、自宅から療養所へと通って治療にあたった。翌1966年(昭和41年)には、第二次世界大戦中に自殺したヴァージニア・ウルフの病跡を調べるため渡英し、夫のレナード・ウルフと面会した。二人はレナードの死まで文通を続けている。この年にみすず書房から『生きがいについて』が出版された。

晩年[編集]

その後は愛生園での医療に携わる傍らでフーコー[注釈 4]、ジルボーグの翻訳、自身の著書の執筆、ウルフの病跡学研究などをおこなった。1972年(昭和47年)に心臓を悪くして以降は、心身に大きな負担を強いていた愛生園での仕事を辞め家庭と執筆を中心として生活したが、晩年の数年は十数回にわたる入退院を繰り返し、1979年(昭和54年)10月、心不全のため、65歳で死去した。

家族と友人[編集]

両親は共に、その父の代に家が没落した裕福な商家の出身である。父方の祖父は大阪の心斎橋に居を構えていた人物で、才能を元手に大商いを繰り返していたが、その後事業に失敗し多門の結婚当時には多門が給料の半分を仕送りし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になっていた。母の房子は群馬県富岡生糸商金澤知満太郎の第三女として生まれた。金澤家は「蔵が7つもある」ほどの金持ちであったが、自由民権運動に参加した父が警察に追われ、さらに借金をしていた人物によって家屋に放火されて一家は無一文となっている。二人の結婚を仲立ちしたのは、母が給費生として通ったクエーカーの運営する普連土学園の顧問であった新渡戸である。房子は早くからクエーカーの教えを信じ、多門も房子の死後同様にクエーカーとして生活した。二人の性格については、1940年代に美恵子がエルンスト・クレッチマー類型論に沿って、父を分裂気質、母を循環気質と分析した。

兄の前田陽一は大学を卒業した後にフランスに長く留学し、後にフランス文学者として東京大学教授に就任した。文学に進むきっかけとなったのはスイスのインターナショナル・スクールでの教育であった。『パンセ』の草稿を詳細に解析した研究により著名である。大江健三郎のフランス語の教師であった。妹の美恵子について、「女性嫌いになりたいのなら、良くできた妹を持つのが一番である」と語っている。

二人の妹はそれぞれソニー創業者井深大、伊藤忠商事の副社長を務めた人物と結婚した。父 多門は後述の野村胡堂と共にソニーの前身である東京通信工業に出資しており、名誉職であるが初代社長を務めた。

美恵子の長男神谷律は父の宣郎と同様に生物学者となった。東大大学院理学系研究科教授、学習院大学理学部客員教授などを務め、藻類がもつ鞭毛の構造および運動機構に関する研究を手掛けている。次男神谷徹は、京都大学理学部で宇宙物理学を修めた(1973年卒業)のち古楽器演奏家となり、リコーダーとユニークなストロー笛の演奏で人気を博している。

宮原安春著『神谷美恵子 聖なる声』には、美恵子が津田英学塾時代に、結核に感染し死の床にあった野村一彦と婚約したとの噂話の記述がある[7]。二人が極めてプラトニックな恋愛関係にあったことは兄の陽一を含めた関係者の証言から裏付けられているが、二人の婚約については疑わしく、文庫版においては訂正されている[8]。一彦は『銭形平次捕物控』の作者として知られる野村胡堂の長男であり、野村家と前田家は一家ぐるみで交際をしていた。

美恵子の友人でもあった一彦の妹である松田瓊子は、経済史学者松田智雄(のちに東大教授)と結婚したが、23歳の若さで兄と同様に結核によって死去した。死後夫の手によって瓊子が執筆した児童文学に関する研究書が出版された。

ハンセン病患者からの批判[編集]

鈴木禎一[注釈 5]は、神谷が精神科医として患者から慕われていた事実を考慮した上で、神谷が強制終身隔離政策を患者にとって恩恵であるとの立場にたっており、光田健輔の影響を超えられなかったこと、管理者側の立場から患者の状態、処遇を見ることが多かったことなどを批判している[9]

文献[編集]

著作[編集]

著作集(みすず書房、1980-1985年)
  1. 生きがいについて
  2. 『人間をみつめて 付・ケベースの絵馬』
  3. 『こころの旅 付・本との出会い』
  4. 『ヴァジニア・ウルフ研究』[注釈 6]
  5. 『旅の手帖より エッセイ集 1』
  6. 『存在の重み エッセイ集 2』
  7. 『精神医学研究 1』
  8. 『精神医学研究 2』
  9. 『遍歴』
  10. 『日記・書簡集』
補巻 1.『若き日の日記』 新版2014年
補巻 2.『神谷美恵子・浦口真左 往復書簡集』 新版1999年
【神谷美恵子コレクション】 みすず書房[注釈 7]、2004-05年
  1. 『生きがいについて』 ISBN 4622081814
  2. 『人間をみつめて』 ISBN 4622081822
  3. 『こころの旅』 ISBN 4622081830
  4. 『遍歴』 ISBN 4622081849
  5. 『本、そして人』 ISBN 4622081857
生前刊行
  • 『生きがいについて』 みすず書房、1966年
  • 『人間をみつめて』 朝日新聞社、1971年、朝日選書(新版)、1974年、のち新装版
  • 『極限のひと 病める人とともに』 ルガール社、1973年
  • 『こころの旅』 日本評論社、1974年、ISBN 4535981035
  • 『神谷美恵子 エッセイ集』 ルガール社(全2冊)、1977年。「教育・人物篇」、「いのち・らい・精神医療」
  • 『精神医学と人間 精神医学論文集』 ルガール社、1978年
新版

学位論文データベース[編集]

大阪大学により1960年2月3日、受理。医学博士。

翻訳[編集]

Pubmedより[編集]

  • Virginia Woolf. An outline of a study on her personality, illness and work. Kamiya M. Confin Psychiatr. 1965;8(3):189-205.
  • The existence of a man placed in a limitsituation. An anthropological analysis of a paranoid case in a leprosarium. KAMIYA M. Confin Psychiatr. 1963;6:15-52.
  • Psychiatric studies on leprosy. KAMIYA M. Folia Psychiatr Neurol Jpn. 1959 Jul;13:143-73.

評論・伝記[編集]

脚注[編集]

注釈[編集]

  1. ^ 太田雄三『喪失からの出発』p.79によると、これは著作集別巻年譜に示されている1933年ではなく、1934年春のことである。太田はこれが同年1月27日の一彦の死から数ヶ月しかたっていないことに注目している。
  2. ^ 神谷は、「恐ろしいのは知らず知らず人を誘惑してしまう私という人間の、構成である。男性に対するわなたる自分である」「どうしたらよいのかわからない」と述懐している。「死ぬまで、つきまとってやる」と言われ、大学を一週間ほど休む事もあったという[6]
  3. ^ ペンドル・ヒル時代に美恵子は、神谷と浦口真左が結婚するのではないかと日記に記している。神谷との結婚に際しては浦口に経緯を手紙で伝え、二人を祝福する返事を受け取った上で婚約している。
  4. ^ 翻訳後にフーコーと面会した際に著書で理解しがたかった箇所について尋ねたところ、フーコーはあれは若書きであり云々と語り、美恵子はその言葉に驚いている。美恵子と同じく文学の素養を有する精神科医である中井久夫は、フーコーの思想は神谷美恵子が取り組むほどの価値を有していなかったのではないかと記している。
  5. ^ 棋士の鈴木禎一とは別人。
  6. ^ ウルフを病跡学から取り上げた研究書であるが、内の一章『V・ウルフの自叙伝試作』はウルフの日記および伝記から一人称で書かれた自叙伝を再構築するという極めて異例な記述を行っている。文学および精神医学に通じていた彼女であったから可能であった方法であり、他の者がおこなえば強く批判されるか無視されるような「離れ業」であった。
  7. ^ 一連の著作において、神谷自身が記した自らの過去のできごとには、記憶違いあるいは故意によると思われる間違いがあり、「評論」・「伝記」で指摘されている。
  8. ^ 『自省録』初刊は、創元社(哲学叢書)、1949年。
  9. ^ 「ある作家の日記」、初版は「ウルフ著作集8」1976年。「ウルフコレクション」1999年、単行版・2015年で再刊。
  10. ^ 著者は、津田塾大学ゼミで指導を受けた。
  11. ^ 著者は野村胡堂長男で妹が松田瓊子、少女期の神谷美恵子との淡い恋愛日記。

出典[編集]

  1. a b c 神谷美恵子の世界 2004, p. 200.
  2. ^ 神谷美恵子の世界 2004, p. 200-201.
  3. a b c 神谷美恵子の世界 2004, p. 201.
  4. a b c 神谷美恵子の世界 2004, p. 202.
  5. a b c 神谷美恵子の世界 2004, p. 203.
  6. ^ 宮原 2001, p. 164-167.
  7. ^ 宮原 1997, p. 71.
  8. ^ 宮原 2001, p. 82.
  9. ^ 鈴木禎一 「ハンセン病-人間回復へのたたかい:神谷美恵子氏の認識に就いて」 岩波出版サービスセンター、2003年10月。初出は「多磨」1996年8月 - 2000年7月号。

参考文献[編集]

  • みすず書房編集部『神谷美恵子の世界』みすず書房、2004年10月4日。ISBN 4-622-08186-5
  • 宮原安春『神谷美恵子 聖なる声』講談社、1997年。ISBN 4062087154
  • 宮原安春『神谷美恵子 聖なる声』文藝春秋〈文春文庫〉、2001年。ISBN 4167656116

関連項目[編集]

外部リンク[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