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4

'태교신기' 그늘에 가려진 이사주당의 놀라운 흔적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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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교신기' 그늘에 가려진 이사주당의 놀라운 흔적

미모지기

2017. 5. 29.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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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교신기라는 것이 오히려 이사주당의 큰 모습을 가리는 장애물일 수도 있습니다. 이사주당은 태교신기로 국한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큰 인물입니다.”



지난 26일 오후 용인시청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태교신기 이사주당의 생애와 학문세계 학술대회’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용만 책임연구원의 발언인데요.



그는 세계 최초의 태교 관련 저술서 ‘태교신기’를 쓴 것으로 알려진 조선시대 여성학자 이사주당(1739-1821)에 대해 “태교신기만 가지고 이사주당을 접근하는 것은 그녀의 진면목을 위축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태교신기’의 높은 위상이 오히려 이사주당이란 인물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인데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날 ‘이사주당의 생애와 학문세계’를 주제로 약 30분간 마이크를 잡은 박용만 연구원은 이사주당의 삶의 궤적을 정리하며 그녀에 대한 놀라운 흔적을 소개했습니다.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는지 지금부터 하나하나 살펴보죠.







‘왕의 핏줄’ 이어받은 평범한 선비의 딸



전주이씨인 이사주당은 태종의 4번째 왕자이자 첫 번째 서자인 경녕군의 11대손입니다. 경녕군(1395-1458)은 세종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사주당의 직계 선대에는 정치적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 이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다만, 고조할아버지 이천배(1621-1695)가 유력 가문인 한산이씨의 사위가 되면서 노론의 유명한 성리학자였던 송시열과 동서지간으로 지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사주당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벼슬이 없는 선비였지만, 고조할아버지로부터 이어져온 가문의 특성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겁니다. 박 연구원은 “이천배가 명문가와 혼인했다는 건 이사주당의 학문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여성의 한계를 거부한 천재소녀, 스스로 학문을 익히다



1793년(영조 15) 청주에서 태어난 이사주당은 어릴 때부터 실을 내어 옷감을 짜는 ‘길쌈’과 바느질에 능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 노릇하는 것이 어찌 여기에 있겠는가”라며 책을 읽기 시작했고, 1년 만에 ‘가례’, ‘소학언해’ 등의 서책을 익혔다는데요. 10대 중반에는 이미 남성 사대부들보다 뛰어난 경지에 올랐다고 전해집니다.



당시가 남녀의 역할이 엄격하게 구분돼 있던 남성 중심 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조선후기 여성지식인들이 대개 남편에 의해 학문을 배우는 경우인데, 이사주당은 스스로 깨우치는 과정을 통해 출가 전 이미 완성의 단계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녀가 여성의 한계를 넘어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던 건 형제의 반대에도 딸의 공부를 보호해준 아버지 이창식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청주에서 용인으로’ 현명했던 삶의 자취



이사주당은 25살 때 용인에 살고 있던 유한규에게 시집을 갑니다. 19살이던 1757년 아버지 유창식의 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른 데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탓에 당시로썬 다소 늦은 나이에 혼인을 한 건데요.



남편 유한규의 나이는 이사주당보다 21살이 많았습니다. 이미 3명의 부인을 잃고 더 이상 혼인할 뜻이 없던 그였지만, 이사주당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우리 어머니를 잘 모실 것”이라는 확신에 청혼을 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1773년 아들 유희를 낳고, 이후로 세 딸을 더 두었습니다. 정조시대에 이르러 소론 인사를 등용하자 잠시 목천현감으로 부임했던 유한규는 1783년 세상을 떠났는데요. 이사주당은 남편의 3년상이 끝나자 3번째 부인 사이에서 낳은 아들 유흔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자 어린 네 자녀를 이끌고 분가합니다.



이때부터 홀로 농사를 짓고 길쌈을 하며 자녀를 교육시킨 그녀. 세 딸을 출가시키고 아들 유희 내외와 함께 지금의 모현 지역에서 학문을 닦았습니다.







현모양처 넘어 '대학자' 꿈꾼 이사주당



박용만 연구원은 이사주당의 학문이 주자학을 따른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당호를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사주당’이 주자를 스승 삼는다는 뜻이라는 겁니다. 당초 현자를 희구한다는 의미의 ‘희현당’이라 했다가 ‘사주당’으로 바꿔 자신의 학문적 특색을 분명하게 나타냈다는 거죠.



“송전이 아니면 익히지 말라.”



아들 유희가 사주당의 의미에 대해 전한 말인데요. ‘송전’은 송나라 때의 경전에 대한 주석을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소론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던 양명학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남편의 가문이 소론계였던 점을 생각하면 이사주당의 꿋꿋한 학문자세 또한 엿볼 수 있습니다.



박 연구원은 “신사임당이 어진 어머니로 성현을 기르는 현모양처에 의미를 두었다면, 이사주당은 자신 스스로 주자와 같은 대학자를 꿈꾸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는데요.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성취한 학문으로 현모양처라는 굴레를 뛰어넘고, 남녀 구분을 따질 필요 없이 공부하는 선비로서의 삶을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한편, 2000년대 초반 유희의 ‘문통’이란 문집이 후손에 의해 발견돼 조선후기 국어학자로 알려진 유희에 대한 연구가 한층 진전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사주당에 대한 연구는 그에 비해 아직 걸음마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문집에 이사주당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는 자료가 함께 수록돼 있는데도 말이죠.



용인시는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이사주당의 생애와 학문세계를 조명하는 새로운 성과를 냈다고 자평했는데요. 이를 계기로 그녀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용인시 향토문화재의 전문성을 한 단계 높이는데 기여하게 되길 기대해봅니다.



이사주당기념사업회 박숙현 회장의 기조발제로 시작된 이날 학술대회는 국내 유명 대학과 국책연구기관에서 나온 6명의 학자들이 참여해 이사주당과 유희의 생애와 학문, 태교신기의 위상 등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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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모지기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에 자리한 '지역 밀착형 로컬미디어'입니다. 2015년 시작한 블로그와 함께 별도 인터넷 신문 사이트를 운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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