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7

"피임 권리는 여성의 자유를 향한 첫걸음" 100년 만에 소개되는 마거릿 생어

"피임 권리는 여성의 자유를 향한 첫걸음" 100년 만에 소개되는 마거릿 생어

"피임 권리는 여성의 자유를 향한 첫걸음" 100년 만에 소개되는 마거릿 생어
입력2023.01.13 04:30 12면
이혜미 기자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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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마거릿 생어의 여성과 새로운 인류'

편집자주

책, 소설, 영화, 드라마, 가요, 연극, 미술 등 문화 속에서 드러나는 젠더 이슈를 문화부 기자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 봅니다.



'산아제한 운동'과 '피임'의 선구자, 마거릿 생어의 저서가 출간 103년 만에 한국에서 '마거릿 생어의 여성과 새로운 인류'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산아제한 운동 이전 여성들은 결혼 이후 평생에 걸쳐 임신과 출산을 반복해야 했다. 책의 첫 페이지에 생어는 "1920년 뉴욕, 열한 명의 아이를 낳은 내 어머니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썼다. 동아시아 제공

'마거릿 생어(1879~1966)'. 국내에선 꽤 낯선 이름이다. 이름 앞에 '피임의 선구자'라는 수식어를 붙여보면 어떨까. 단숨에 거리감이 좁혀진다. 성생활을 하는 이라면 누구도 미국의 간호사이자 사회활동가 그리고 페미니스트인 이 여성의 업적인 '피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평생 노벨평화상 후보로 31번이나 추천받았고 미 주간 타임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꼽혔던 생어. 국내에 왜 이리 알려지지 않았던 걸까. 그럴 만도 한 것이 그의 저서가 이제서야 번역돼 소개됐다. 최근 동아시아가 1920년 초판을 완역한 '마거릿 생어의 여성과 새로운 인류'를 내놓았다. 지난 연말 인터넷서점 알라딘 북펀드에서 200명의 후원자를 모은 화제작이다.



보스턴에서 피임에 관해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것에 항의하는 표시로 마거릿 생어가 입을 가리고 있다. 동아시아 제공


콘돔을 사용하거나 피임 방법을 알려주면 처벌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100여 년 전 얘기. 여성들은 결혼 후 가축처럼 임신과 출산을 반복했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종교는 임신, 출산, 임신중지를 결정하는 '재생산 통제'를 여성의 권리로 생각하지 않았다. 사회는 공산품을 대량 생산하는 것처럼, 인구도 기하급수로 늘어야 한다고 봤다.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고 출산은 여성의 족쇄가 됐다.

간호사였던 생어는 여성들의 고통을 묵과할 수 없었다. '비교적' 안전한 임신중지를 할 수 있었던 상류층 여성에 비해 가난한 가정의 건강하지 못한 여성들에겐 의도치 않은 출산은 더 큰 비극이었다. 그가 받은 편지 수천 통에 담긴 절규는, 임신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여성이 놓인 절박한 처지를 보여준다. "결혼한 지 11개월 만에 첫 출산을 하고, 11개월 뒤, 23개월 뒤, 10개월 뒤, 11개월 뒤, 17개월 뒤, 11개월 뒤, 12개월 뒤, 그리고 3년 6개월 뒤 아이를 낳았어요."

그는 여성이 스스로 어머니가 될지 말지, 아이를 몇 명 가질지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 '자발적인 모성'으로 개념화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산아제한 운동'을 벌였다. 1916년 뉴욕 브루클린에 피임클리닉을 열어 피임법을 가르쳤는데, 여성들이 다른 주에서도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뤘다. 생어는 '피임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이유로 체포됐고 징역형을 살았다. 허나 꺾이지 않은 운동의 열기는 1960년 그레고리 핀커스의 경구피임약 발명으로 이어졌다.

"피임은 여성이 자유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중요한 첫걸음이자 인간 평등을 위한 첫걸음이다." 산아제한을 통해 생어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여성 해방'이었다. 다만, 산아제한은 1920년대 힘을 얻은 우생학과 교차하는 지점이 있었다. '열등한 인구를 줄여 유전 형질을 개선하자'는 우생학의 목적을 실현하는 도구의 하나가 피임이었다. 생어는 저서에서 그 근본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태도를 보여 시대적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는 종교계가 지속적으로 우생학을 고리로 임신중지를 비판하는 단초였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우생학적 관점을 분리하는 것은 후대 여성운동가의 몫이 됐지만, 피임에 대한 그의 선구자적 성취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구 소멸로 법석인 2023년 한국에 그의 이야기가 소환된 것도 여전히 현재적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기획한 이는 공교롭게도 생어처럼 '간호사 출신'인 김선형 동아시아 편집팀장. 간호학을 전공하고 산부인과 병동 간호사로도 일했던 그는 여성의 건강권과 재생산권 측면에서 피임에 주목했다.

"피임약이 상용화되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마치 여성의 권리가 완성된 것처럼 여기죠. 하지만 제가 의료 현장에서 만난 여성들은 여전히 안팎의 여러 압박으로 출산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취약한 위치였습니다."

편집자의 말처럼 임신과 출산을 둘러싼 여성들의 자기결정권은 지금도 위태롭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지난해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엎었다. 한국은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고도 대체 입법이 되지 않아 여성들은 안전하고 능동적인 임신중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100년 전 생어의 투쟁은 도처에서 '현재진행형'이다.



마거릿 생어 지음ㆍ김용준 옮김ㆍ동아시아 발행ㆍ280쪽ㆍ1만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