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20230911
소비자주의: 누구도 참지 않는 사회
대전에서 사망한 초등교사가 4년 동안 학부모 민원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지면서, '악성 민원'을 넣은 학부모 중 한 명이 운영한다고 알려진 김밥집에 시민들의 분노가 집중되고 있다. "살인자"라는 포스트잇이 붙었고, 입구에는 피처럼 보이는 케첩이 뿌려져있다. 해당 김밥집의 프랜차이즈 본사인 '바르다김선생'측은 해당 지점의 영업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최근 불거진 교사들에 대한 갑질과 민원들이 '소비자주의'의 발현이라면, 그것에 대한 복수 역시 너무나 '소비자주의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비자'가 되는 시대가 만들어 낸 참상이다.
사회비평가 박권일은 <토론의 즐거움>에 쓴 글에서 '소비자주의'에 대해 "'소비자가 왕'이라는 마인드이고, '구매자가 응당 지니는 메리트'라는 점에서 이는 '자격적합성의 정치'인 능력주의(meritocracy)의 친족이념"이라고 규정한다 .
올바른 태도나 가치관을 배우는 '교육'의 측면보다는 그저 '무사히 아이를 돌보는 서비스' 정도로 공교육이 여겨짐으로써, 소비자주의가 발동된다.
교사의 훈육은 진상 부모들에겐 자식을 '정서적으로 고통을 준 것'으로서 서비스 제공자로서의 의무 위반이라고 여긴다.
여기서 진상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네가 뭔데 '내 소유'인 자식을 훼손하느냐는 이야기를 한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낸 세금으로 네가 월급을 받는데, 왜 학부모의 말을 듣지 않느냐는 황당한 논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입시 중심 교육' 시스템에서 공교육 교사는 '스승' 혹은 '교육 전문가'라는 지위를 서서히 잃어갔고, 이는 훈육을 위임하는 구조까지 위협했다. 교사가 전문성과 권위를 바탕으로 '더 나은 가르침'을 줄 거라는 믿음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음에도, 우리 사회는 교사의 권한이 부모를 '대리'하는 수준으로 축소되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다. 그것이 결국 공교육에서의 소비자주의 발현으로 나타난 셈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선 교사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안 된다. 평소에는 규정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부모나 학생의 요청이 있을 때는, 배달 앱에서 덜 맵게 해달라거나 오이를 빼달라는 요청을 들어주듯이 뜻하는대로 해주면 그만이다 ('우리 가게 음식은 레시피대로 먹어야 맛있어요 해봤자 악플만 달리는 걸 본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한 인간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될리 만무하지 않은가.
소비자주의는 갑과 을을 명확히 구분한다. 돈을 주는 자가, 무엇인가를 소유한 (혹은 사회적으로 소유한 것으로 간주되는) 자가 '갑'이다. 반면 돈을 받거나 소유하지 못한 자는 을이다. 소비자주의는 내가 쓴만큼, 내가 가지고 있는만큼 대접받길 원한다. 그리고 그 욕망이 당연하다고 정당화한다. 배달시킨 음식이 조금 늦게 와서, 돈이 아깝게 느껴지면 별점 1점과 악평을 날려도 괜찮다고 한다. 자주 쓰던 앱이 오류가 나면 콜센터에 전화를 해 막말을 해도 괜찮다고 한다. 노동과 노동자를 이해하기보다는 '내가 쓴 돈'이나 소유권을 먼저 생각해도 괜찮다고 한다.
수많은 언론과 커뮤니티에서 진상 갑질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이러한 현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왜냐햐면 너나할 것 없이 소비자주의를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들 '나는 아니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럴까.
이를테면 배달시킨 음식이 엉망으로 왔을 때, 짜증이 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음식점이 바빠서 조리에서 약간의 실수가 있었든, 배달 기사가 초보라서 집을 잘 못 찾았든, 이런 것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내가 돈을 쓴 것과, 기다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먼저 들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전화를 해서 교환을 요구하거나 혹은 참았겠지만, 더 '강한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구조 속에서 소비자주의는 기승을 부리고 있다. 배달 앱에, 지도 앱에 악플을 달 수 있고, 동네 커뮤니티에 글을 쓸수도 있다. 그것이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라고 믿는다. 내가 돈을 쓴 것에 상응하는 상품이 오지 않았거나, 자신이 소유한 상품(물건이나 아파트 혹은 '자식'이 될 수도 있다)에 문제가 생겼을 때의 '부당함'이 모든 감정을 압도한다. 서로의 노동에 대한 이해, 도덕과 규범은 뒷전이 되고 타인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권리만 남는다. '내가 돈을 썼으니까'
자본을 초월하는 가치,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공동체의 윤리가 깨진 공간에서 소비자주의는 더욱 강해진다. 나를 보호해 줄 안전망이 없기 때문이다. 소비자 정체성만이 오로지 나를 '갑'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소비자 노릇을 하게 된다. 공공의 영역이 자본에 침식당하면서 더 이상 소비자주의가 손을 뻗치지 못하는 곳은 없으니, 그렇게 '누구도 참지 않는 사회'가 온다.
그러나 '누구도 참지 않는 사회'에서 결과적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대부분 더 약한 사람들이다. 교장이 아닌 일선 교사가, 기업 간부가 아닌 콜센터 노동자가, 고위 공무원이 아닌 말단 공무원이, 돈과 권력으로 사건을 무마할 수 있는 이가 아닌 힘없고 가난한 사람이. 소비자 정체성을 통해 권력 관계를 뒤엎는 통쾌한 순간도 있지만, 그건 잠시일 뿐이다. 앞서 박권일 비평가가 '누구도 참지 않는 사회'가 일종의 능력주의라고 일컬었던것처럼, 누구도 참지 않는 사회의 승리자는 '더 많은 능력을 입증하는' 사람이다. 참지 않았을 때 더 많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자가 이긴다. 그게 우리가 원하는 사회였던가.
대전의 한 김밥집에 쏟아지는 포스트잇과 케첩, 밀가루, 계란 등을 보며 '소비자주의'의 복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비자로서 과도한 권한을 행사해서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가, 역설적으로 소비자들에게 당하는 모습. 하지만 악성 민원 학부모로 추정되는 그의 직업이 고위 공무원이었거나, 대기업 간부였거나, 검사였다면 애초에 이렇게 쉽게 신상이 공개됐을까? 알려졌더라고 하더라도 그가 일하는 직장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이런 식의 '정의 구현'이 괜찮은지, 자꾸 되묻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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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 Eunha
국민끼리 싸울일이 아니고, 프레임을 정리하면 될 일입니다.
정치가 그래서 중요한거고,
교권을 좌우할수 있는 정책이 그래서 중요한거죠.
학생들이 달걀을 투척하든 말든.... 그것은 사전에 그 학부모가 그런짓을 못하도록 교육자가 단지 돈받고 강의팔이하는 학원강사와 다른 처우를 받을 수 있도록 환경을 설정해주면 될 일이었던겁니다.
이미 권력을 가진사람들이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그 권력조차 가지지 못한사람들에게 탓을 돌리면 안되는 거라 생각하는겁니다.
사람은요, 자신이 직접 당해야 정신을 차립니다.
저 선생님이 가르쳤던 제자들의 충격은 한번 헤아려보신적이 있을까요?
내 일이 아니니 잘 모르시겠지요. 가늠도 안되시겠지요.
그러니 소비자라는 단어로 교체가 가능하신거겠지요.
정작 중요한건 저 상황에 관여된 사람이 저 가게를 이용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만해서 저러는게 아닙니다. 모 대기업의 근로자 사망을 똑바로 처리하지 못한것을 보고 한 고등학생은 그 회사의 제품을 이용하지 말자고 학교에 건의하였고, 그 건의는 받아들여져서 윤리경영을 하는 회사의 제품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생각이 있으면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알게됩니다.
물론 저 방식이 잘했다는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최소한 목소리를 내야 그 부당함이 그제서야 드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교사는 어떤학생들에게는 아버지같고 어머니같은 존재들입니다.
집에서의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함께 해주는사람들인데,
그런사람이 정서적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그게 실제 죽음으로 이어졌고, 그걸 옆에서 겪은 학생들이 최소 수십명, 재학생 졸업생까지 하면 수백명 이상입니다.
저는 저 현상이 단지 소비자운운할 그런 정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소시민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것.... 그게 방향은 잘못되었을지라도 그걸 소비자의 복수라고 폄하할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적어도 사람에게 직접적인 상해가 가지 않는다면 말이죠.
참아라, 참아라, 참아라, ....글쎄요.
어떤이의 지나가는 개념이었다고도 하지만 선진국의 시민의식중 하나가 불의에 공분할수 있는가......라고 하죠.
영국은 민주사회를 이루기위해 200년이 걸렸다 합니다.
한국은 고작 100년이 안되었습니다.
수많은 선진국들에서는 여러 운동이 있었습니다. 한국도 동학농민운동도 있었습니다.
어떤 방식이든... 그것이 누구에게든... 그것이 잘못되어 보일지라도 저는 가해자들이 본인들에게는 정당한 방식으로 복수당하는(?말씀하신 논리에 의하면) 게 옳다고만 보지는 않는 편입니다.
참고로 전 대전출신이고 대전에서 오래살아왔습니다.
연예인들이 공연한번 힘들어할 정도로 감정동요 잘 없고, 자기표현 잘 안하기로 이름난 지역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하는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죠.
피해자를 두번 상처준다... 라는 말은 올리신 글 같은걸로 인해 나오는 말 같습니다.
어차피 다 사필귀정이 될테니 저는 여기서 줄일게요.
김민준
저는 하고 싶은 말이 이것밖에 없네요. 그래서 저기다 테러 한 당신들이 악성민원인들보다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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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현
소비자주의와 관련된 칼럼 하나 남겨봅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620436?sid=110
N.NEWS.NAVER.COM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사회를 뒤덮은 소비자 프레임[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사회를 뒤덮은 소비자 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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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사회를 뒤덮은 소비자 프레임
입력2022.12.22. 오후 6:43
크리스토퍼 마틴은 1990년대 이후의 대형 파업이나 시위 보도에서 가장 자주 등장한 프레임이 ‘소비자 지향’이라고 설명한다. 절대다수의 언론이 노사관계나 생산 현장의 문제를 ‘소비자의 관점’에서 다룸으로써 공통의 내러티브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의 한 대학교 축제 현장. 연합뉴스
박권일 | 사회비평가·<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지난가을, 코비드19로 중단됐던 대학 축제들이 열리면서 캠퍼스가 활기로 가득 찼다. 그 무렵 강연을 갔다가 서로 다른 대학 관계자들에게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축제 공연장에 대형 장벽이 세워졌는데, 이게 학생회비 납부자와 미납자를 구분해서 미납한 학생들이 공연을 못 보게 하는 용도라는 것이다. 장벽을 세운 주체는 학교본부가 아니라 총학생회였다.
검색해보니 실제 여러 대학에서 일어난 일이고 기사화된 적도 있었다. 이 에피소드를 강연 자리에서 언급하며 의견을 물어봤다. 많은 분이 충격에 사로잡혔는데 특히 진보적 성향의 중장년층에서 반응이 세게 나왔다. 그들은 “진짜 대학은 끝났구나” “절망스럽다” 한탄했다. 반면, 적지 않은 청년 세대는 “돈을 안 낸 사람이 낸 사람과 똑같이 공연을 보면 그거야말로 불공정이고 무임승차”라고 했다.
이건 ‘순수했던 대학이 상업화되었다’는 한탄이나 불공정 담론으로 끝내버릴 이야기는 아니다. 1980년대든 1990년대든 대학이 ‘순수한 학문의 공간’이거나 ‘진보와 해방의 자치구’였던 적은 없다. 대학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와 자본이 통제하던 공간이다. 다만 소수의 학생이 맹렬히 저항했고 스스로의 힘으로 대학 안에 조금 자율적인 공간을 겨우 만들어낼 수 있었을 뿐이다. 과거의 대학교는 순수했다기보다 이질적 가치들이 충돌하며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적어도 학생운동의 자장 안에서는 수익성이나 소비자 권리보다 공공성과 연대의 가치가 중시됐다.
예전에 대학 축제는 ‘대동제’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글자 그대로 모두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행사였다. 다른 학교 학생들만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까지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장이었다. 한편 지금은 축제를 포함해 캠퍼스 전체가 상업화됐을 뿐 아니라, 학생들 역시 학교 구성원이기보다 (학교 명성이나 시설 등의) 구매자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으면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과거의 대학이 더 나은 것일까? 적어도 지금보다 예전 대학생들이 공공 영역으로서 대학의 의미를 더 깊이 인식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과거를 본보기로 삼기는 어렵다. 과거 대학생 운동은 자본의 논리가 일방적으로 관철되지 못하게 하는 방어선이긴 했으나, 그 내부는 권위주의, 엘리트주의, 군사주의, 가부장주의에 찌들어 있었다. 1984년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사건’처럼, 숭고한 가치를 앞세운 확증편향은 종종 타인을 향한 끔찍한 폭력으로 발현됐다.
적어도 개인들 사이의 폭력에 요즘의 우리는 꽤 엄격해졌다. 이는 뚜렷한 사회 진보다. 반면 자본주의의 구조적 폭력에는 더 순종적이게 됐다. 대학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렇게 변했다. 유권자는 노동자나 시민보다 정치 소비자 혹은 팬덤으로 분석되며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노동자 파업 보도를 봐도 온통 소비자의 불편을 얘기할 뿐 좀처럼 노동자의 삶과 생산 현장의 문제를 조명하지 않는다.
미국의 커뮤니케이션학자인 크리스토퍼 마틴은 1990년대 이후의 대형 파업이나 시위 보도에서 가장 자주 등장한 프레임이 ‘소비자 지향’이라고 설명한다. 절대다수의 언론이 노사관계나 생산 현장의 문제를 ‘소비자의 관점’에서 다룸으로써 공통의 내러티브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틴은 언론의 이러한 프레임이 노동자, 시민, 마을 주민이자 연방의 구성원으로서 개인 정체성을 소비자로 환원함으로써, 상품이 실제로 생산되는 작업장이나 공적 시민의 관심사는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미국도 예전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1940년대 문헌을 보면 미국 노동자의 근황이 신문 머리기사로 오르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미국 언론이 점점 노동계급 독자들을 자신의 비즈니스 모델에 쓸모가 없는 집단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노동 역시 “더는 뉴스 가치가 없어지게”(no longer newsworthy) 됐다. 마틴에 따르면, 미국 노동계급 상당수는 오늘날 트럼프의 열광적 지지자가 되거나 극우 대안 미디어의 독자가 됐다.
한국 언론도 미국 언론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한국의 주류 매체들은 소비자와 투자자에게 공손히 귀를 기울이지만, 노동자와 시민은 지워버리거나 사회 불만 세력으로 묘사한다. 언론에 비친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기보다 종종 거대한 공동구매 장터처럼 보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