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7

"나는 무엇인가… 물어도 답은 없다" | 세계일보 2009 정채현,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나는 무엇인가… 물어도 답은 없다" | 세계일보

"나는 무엇인가… 물어도 답은 없다"
기사입력 2009-02-20
 
인도 출신 성인 크리슈나무르티
그가 남긴 영화·일대기를 엄선
13세가지 주제로 엮어낸 시리즈물



정채현·김기호 옮김/고요아침/각 1만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테마 에세이/정채현·김기호 옮김/고요아침/각 1만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범으로 구속된 아이흐만에게 해나 아렌트가 물었다. 수많은 유태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일이 힘들지 않았느냐고.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힘들지 않았다. 사실은 쉬웠다. 우리가 쓰는 언어가 그걸 쉽게 해줬다. 우린 그 언어를 암트스프라헤라고 불렀다.” 암트스프라헤는 우리 말로 ‘공직 용어’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왜 그랬냐고 물으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체제 순응의 참혹한 결과다. 우리의 애국심과 인종주의가 갈등을 낳고, 그 갈등은 폭력을 부르며 폭력을 정당화한다. 나치에 의해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태인들이 지금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똑같은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 간의 이익과 이런저런 이유들로 묵인되고 있는 것을 본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고 자신이 뭘 하는지, 자신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의식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때마침 도서출판 고요아침에서 기획한 ‘크리슈나무르티 테마 에세이’ 시리즈(전13권)가 완간되었다. 이 시리즈는 크리슈나무르티 신탁재단에서 13가지 주제를 선정해 그가 남긴 수많은 강연과 대화, 일기를 포함한 저작물 가운데에서 가려 뽑은 내용을 모아 놓은 것이다. 
  1. 삶과 죽음, 
  2. 사랑과 외로움, 
  3. 관계, 
  4. 두려움, 
  5. 갈등, 
  6. 마음과 생각, 
  7. 배움과 지식, 
  8. 진리, 
  9. 교육, 
  10. 신, 
  11. 자유, 
  12. 자연과 환경, 
  13. 올바른 생계수단 등이다. 

이 13가지 주제는 우리 시대뿐만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어 인간의 영원한 키워드다.

우리는 삶을 무수한 조각으로 나눠 놓고는 그 파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삶은 하나이며 삶과 죽음도 하나다. 죽음이란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그때에 찾아오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매순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는 걸 말한다. 세상에 관계가 없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관계란 곧 삶이며 존재한다는 뜻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말할 수 없다. 사랑이란 신과 마찬가지로 화두로 삼을 수 없는 것, 묘사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오직 그 자체일 뿐.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참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의식하고 관찰해야 하는데 두려움의 뿌리는 바로 생각이다. 마음과 생각이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일으키는 장본인이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그 생각에서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배움이란 지식을 쌓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며, 한순간에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지만 그건 자유가 아니다. 완전한 자유란 자유 그 자체이며, 가장 중요한 자유는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다.

정채현 비폭력평화센터 활동가·번역가


크리슈나무르티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삶이란 무엇이며 죽음이란 무엇인가. 두려움이란 무엇이며, 신이란, 자유란, 진리란…. 그러나 답은 제시하지 않는다. 답은 우리 각자가 혼자 힘으로 알아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자신을 살펴보라, 자신을 조사하라고 한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내고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넘어서라는 것이다.

어떤 종교나 교리에도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자신을 이해하라는 것, 되고 싶은 것이나 되어야 하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것을 한순간에 보라는 것이다. 생각에서 나오는 판단이나 분석·비판·비난 따위는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도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나는 무엇인가?” 답은 없다. 오직 모를 뿐….


정채현 비폭력평화센터 활동가·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