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4

교토 학파 - 위키백과, 京都学派 Kyoto School

교토 학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교토 학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교토 학파(京都学派)는 서양의 철학과 종교적 사상을 완전히 이해하여 그것을 동아시아 문화 전통에 특화된 종교적, 도덕적 내면을 창조하기 위하여 이용한 교토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한 철학 운동에 붙여진 이름이다.[1] 그러나 이는 또한 교토 대학에서 교수하고, 교토 학파를 창립한 사상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의 고유성에 대한 독특한 이론을 발달시킨 몇 명의 전후 학자들을 이르기 위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두 번째 뜻에 포함되는 사상가와 작가는 교토 대학 인문과학 연구소(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대략 1913년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에서 시작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심각한 논쟁에서 살아남아 유명하고 활동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교토 학파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나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와 같이 전통적인 학파의 의미에서 철학 "학파"는 아니다. 대신 교토 대학을 중심으로 모인 학자 그룹은 독자적인 사상을 장려하였다.

제임스 하이직(James Heisig)에 따르면 교토 학파라는 이름은 1932년 니시다의 제자와 다나베 하지메(田辺元)가 처음 사용하였다.[2] 도사카 준(戸坂潤)은 그 자신을 학파의 막시스트 좌파의 한 명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후 일본 밖의 미디어와 다른 학술 기관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1970년대에 널리 받아들여진 용어가 되었다.

각주[편집]

  1.  D.S. Clarke, Jr. "Introduction" in Nishida Kitaro by Nishitani Keiji, 1991.
  2.  Heisig 2001, p.4

===

京都学派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京都学派の人々が思想を育んだ哲学の道

京都学派(きょうとがくは、英語: Kyoto School)とは、一般に西田幾多郎田邊元および彼らに師事した哲学者たちが形成した哲学の学派のことを指すが、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を中心とした学際的な研究を特色とした一派も、京都学派、あるいは哲学の京都学派と区別するために、新京都学派とも称する。その他にも様々な学問分野において「京都学派」と呼ばれるグループが存在している。

京都学派(哲学)[編集]

その詳細な定義は国や研究者によって異なり、未だに世界各国で盛んな研究の対象となっている。主なメンバーとして、西田幾多郎田邊元波多野精一朝永三十郎和辻哲郎三木清西谷啓治久松真一武内義範土井虎賀壽下村寅太郎上田閑照大橋良介らが挙げられ、また左派としては三木清以外に戸坂潤中井正一久野収らが挙げられる。とりわけ中井は後述する京都学派(人文研)の桑原武夫や、京都学派(近代経済学)の青山秀夫とも懇意であった。また桑原は父親が京大文学部教授であったこともあって西田とも若い頃から接していたという。

京都学派は西洋哲学東洋思想の融合を目指した『善の研究』などで表される西田哲学の立場に立ち、東洋でありながら西洋化した日本で、ただ西洋哲学を受け入れるだけではなくそれといかに内面で折り合うことができるかを模索した。しかしながら東洋の再評価の立場や独自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模索することは次第に「西洋は行き詰まり東洋こそが中心たるべき」との大東亜思想に近づくことになった。特に京都学派四天王(西谷啓治・高坂正顕高山岩男鈴木成高)らは、「世界史の哲学」や「近代の超克」を提唱し、海軍に接近した。このため太平洋戦争の敗戦により、戦前の京都学派はいったん没落した。だが戦後も高坂、高山らは自民党などの保守政治に接近し、京都学派と政治とのかかわりは今日に至るまで脈々と続いている。なお、陸軍が海軍に較べて圧倒的な力をもっていた時代において、海軍への接近は軍部政権への翼賛というよりは、軍部の方針を是正しようとする体制批判の行動であったと、大橋良介は評している。また、大島康正メモによると、この海軍のブレーントラストとしての京都学派の集まりに、京都学派(東洋史学)の宮崎市定も常連として参加していたと大橋は指摘する。

なお、大橋の著書では梯明秀の分類に依拠しながら、京都学派と京都哲学とを分けて捉えることを提案する。要するに、「何らかのかたちで<無>の思想を継承・展開した思想家のネットワーク」を京都学派と捉え、西田や田辺に学び、単に彼らの知的ネットワークの下にいるものを京都哲学に分類する。その場合、三木は微妙な立ち位置になるとされるが、多くの左派の弟子たちは京都学派に含まれない。また弟子として西田の著作の編集や解説を書きつつ、自分自身の研究は歴史的な方向へと向かった下村寅太郎もたぶん含まれないであろう。また京都大学とは縁はないので一般に京都学派に含めないし、大橋も言及していないが、鈴木大拙は西田の親友で、「<無>の思想を継承・展開」するという点でも相互に影響を与え合っているし、京都の大学(大谷大学)に務めてはいるので、大橋の定義に従えば鈴木も京都学派ということにもなる。他方、中村雄二郎は『共通感覚論』 (1979) において、三木や戸坂や中井(それに京大卒ではないが戸坂と親しい三枝博音の名が挙げられる)の共通感覚への言及を追っていくと、西田哲学の「場所の論理」の批判的乗り越えが可能となると示唆する。その点からも京都学派(哲学)を狭く捉えすぎない方が、生産的であるとも考えられる。

京都学派四天王は戦時中の自分たちの言動について一切総括や弁護の類いをしなかった。1965年に、粕谷一希が高山に対し「私の戦争責任」を論じるよう懇願したこともあったが、高山はそれを断った[1]。下村寅太郎は4人の沈黙に関して「京都学派の人々が自己弁護をしなかったのは、批評を甘受したのでなく無視したという方が正確である。批判は「勝てば官軍」の立場であって、自力によるものでもなく、思想そのものの実力によるものではない」と述べている[2]。 

京都学派(哲学)の人物[編集]

京都学派(近代経済学)[編集]

戦前の日本で「国際的に評価された最初の経済学者」[3]である柴田敬を中心に、その一般均衡理論の師であり「日本のマーシャル」とも呼ばれた高田保馬、高田門下で戦後多くの俊秀を育てた青山秀夫の3人の京大教授を挙げて、「近代経済学の京都学派」と名付けたのは、東大の根岸隆[4]である。

また、森嶋通夫も、「戦前日本の代表的経済学者は、高田保馬、園正造、そして柴田敬の3人の京大教授」[5]だと言っている。

柴田敬は、京大で河上肇のゼミ生としてマルクス経済学を河上に、一般均衡論を高田保馬に、国民主義経済学を作田荘一に学んだ後、黄金時代のハーバード大やケインズ革命勃興期のロンドンに留学し、シュンペーターケインズからも日本人経済学者として最も高い評価[注釈 1]を受けた理論経済学者であったが、留学から帰国後、京都学派(哲学)や近衛文麿等の新体制運動の経済理論上の指導者となり、戦後、公職追放となった。しかしながら、近年、根岸隆、福岡正夫等から、柴田経済学の再評価が行われている[注釈 2]。また柴田の代表的な弟子の一人が杉原四郎である。杉原は柴田の師匠である河上を研究し、また書誌学・図書館学と経済思想史を結びつけた研究を展開した[6]。また、柴田の恩師の河上は山口高等商業にて西田幾多郎からドイツ語を学び、その縁で京大時代も西田と交流をもち、近衛も西田と河上に学ぶために東大から京大に転学しており、柴田ならびにその周辺は京都学派(哲学)と縁が深く、さらに西田ら京都学派(哲学)が蓑田胸喜の執拗な攻撃の対象となったのも、昭和研究会、近衛の延長上に彼らがいたからであるとの説も紹介されている[7]

京都学派(京大人文研)[編集]

また、上記とは別に戦後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京大人文研)にて頻繁に共同研究会を開き、活発な討論を行っていた一派も、京都学派と呼ばれるが、上記の京都学派とは直接の関係はない。こちらは東洋史学の貝塚茂樹塚本善隆藤枝晃中国文学吉川幸次郎フランス文学桑原武夫植物学中尾佐助生態学から人類学にまたがる成果を挙げた今西錦司らが特に著名である。この顔ぶれからも推察されるように、この京大人文研の活動範囲は狭義の人文科学から自然科学の領域にまでまたがった学際的なもので、今西は自らの学問領域を自然学とも称した。今西の弟子筋にあたる個体群生態学のパイオニアである森下正明は、自然科学の研究であった。大興安嶺探検に今西を隊長とし、森下が副団長として、隊員として参加し国立民族学博物館へと活躍の場を移した梅棹忠夫(生態学→民族学人類学)や、国際日本文化研究センターの設立に尽力した梅原猛(哲学)らも、この京大人文研の京都学派に含める。また桑原によって京大人文研助教授に迎えられた鶴見俊輔、同助手でのちに教育学部助教授に配置換えとなった加藤秀俊らは一般に京都学派に含めないが、桑原武夫をはじめ多くの人文研スタッフとともに思想の科学研究会の主要メンバーでもあった(鶴見はメンバーというよりも会の創設者)。鶴見らは京都学派(哲学)の中井正一、久野収らとも懇意で、中井、久野と一緒に運動を行った世界文化同人の多くが思想の科学研究会に加わっていて(例えば武谷三男。なお武谷は上記人文研の貝塚茂樹の弟湯川秀樹の共同研究者としても名高い)、その点で、京都学派(哲学)の左派と京都学派(人文研)二つをつなぐ媒介項に、鶴見、桑原、思想の科学研究会があったともいえよう。なお京都学派(哲学)の主流には思想の科学研究会は批判的で、例えば同研究会『共同研究 転向』第2篇第2章第6節「総力戦理論の哲学―田辺元・柳田謙十郎」(後藤宏行)では田辺に代表される京都学派の主流が戦争協力した点を断罪し、中井正一らの着想によってそれが乗り越えられるとしているし(その点で先述の中村雄二郎『共通感覚論』での指摘の先駆でもある)、また鶴見も「哲学の言語」(『思想』1950年)で西田が「即というコプラ」を多用することを批判的に捉える。

評価[編集]

西田門下の下村寅太郎は、京大人文研の活動に対し、「桑原武夫などの音頭とりで形成された集団であって、何ら思想もなく中心となる思想家もいなかった」「桑原武夫自身、「大学教授」ではあるが、学者でなく、何にでも一言をもつだけのジャーナリスト、せいぜいで啓蒙家であるにすぎない。二、三年前、文化勲章を貰ったが、どのような文化的功労があったのか自他共にわからない」という辛辣な評価を下している[8]

京都学派(東洋史学)[編集]

東洋史学分野における京都学派は、京都帝国大学教授だった内藤湖南桑原隲蔵(人文研の桑原武夫の父)、羽田亨を創始者とし、他に狩野直喜矢野仁一等がいる。弟子に宮﨑市定田村実造三田村泰助谷川道雄、ほか多数の東洋学者たちがおり、京大人文研の一角をなした島田虔次川勝義雄吉川忠夫(吉川幸次郎の子)等もいる。

その特色は、内藤が提唱し、宮﨑らが発展させた時代区分の唐宋変革論である。時代までを上古(古代)、魏晋南北朝時代を中世以降を近世アヘン戦争以降を近代とする四時代区分法を中心に中国史の研究を展開した[9][10]大戦後には、前田直典唯物史観を基にした[注釈 3]時代区分法(唐中期までを古代とし、宋以降を中世とする)を唱える学者たち(東京学派東大派・歴研派と呼ばれる)との間で激しい史学論争が行われた(時代区分論争)[11]

京都学派(憲法学)[編集]

佐々木惣一大石義雄阿部照哉佐藤幸治らを中心とした憲法学の学派。東京大学を中心とする東京学派の政治学的解釈に対する法律学的解釈を志向するなどを特色とする。

京都学派(精神医学)[編集]

今村新吉初代教授により京都大学医学部精神医学教室には哲学的精神病理学の方向性が示された。その後三代目村上仁教授によって精神病理学の伝統は受け継がれ、後に加藤清笠原嘉木村敏藤縄昭など時代を代表する精神医学者を多数輩出した[12]。なお木村敏は西田哲学会で「西田哲学と私の精神病理学」という演題の講演を行っており[13]、京都学派(哲学)と京都学派(精神医学)との関係は深い。

関連人物[編集]

哲学[編集]

近代経済学[編集]

憲法学[編集]

精神医学[編集]

参考文献[編集]

東洋史学[編集]

評伝[編集]

関連項目[編集]

脚注[編集]

注釈[編集]

  1. ^ 「日本の経済学者でシュンペーターのもとを訪れた者のうち、シュンペーター自身が、来る前から異常に高く評価したのは柴田敬であり、来た後に高く評価したのが都留重人であって、これ以外の人についてはほとんど評価していない」、「ケインズの日本人嫌いの理由の一つには、日本の経済学者でケインズのところへ来た人間にろくなやつがいなかったということがあります。論争らしい論争をやったのは柴田さん一人ですか」宮崎義一、伊東光晴「忘れられた経済学者・柴田敬」経済評論53/8月号
  2. ^ 国際的な経済学大辞典 (The New Palgrave1987) の独立項目にその名を記す日本人経済学者は僅か5人を数えるのみであるが、その一人として、柴田敬が選ばれている
  3. ^ ただし、元々の唯物史観での東アジアはアジア的生産様式での停滞を前提としており、宋以降中世説は日本独自の発展と言える。

出典[編集]

  1. ^ 粕谷一希『反時代的思索者 唐木順三とその周辺』,57頁
  2. ^ 下村寅太郎「汀の散歩Ⅰ」,524頁
  3. ^ 根岸隆:「経済思想10日本の経済思想2」鈴木信雄編 第4章 柴田敬 国際的に評価された最初の経済学者
  4. ^ 根岸隆:「現代経済思想の散歩道」倉林義正ほか編2004年7月15日 日本評論社 第8章 近代経済学の京都学派
  5. ^ 宮崎義一伊東光晴「忘れられた経済学者・柴田敬」経済評論S53/8月号
  6. ^ 後藤嘉宏 「社会科学における書誌作成の意義と根拠:杉原四郎における経済思想史の方法論と図書館学的関心の関わり」『図書館学会年報』44巻2号(1998年9月)、pp.49-64
  7. ^ 小林敏明『西田幾多郎の憂鬱』岩波現代文庫,2011年
  8. ^ 下村寅太郎「汀の散歩Ⅰ」- 「著作集13 エッセ・ビオグラフィック」、524頁(みすず書房、1999年)
  9. ^ 内藤、1944。
  10. ^ 宮﨑、1999。
  11. ^ 谷川編、1993。
  12. ^ 藤縄昭『私家本 仏像遍歴』ナカニシヤ出版、2002年2月、94頁。ISBN 9784888486729
  13. ^ 西田哲学会 第10回年次大会プログラム”. 2014年4月閲覧。
  14. ^ 新文明学:New Philosophies of Japanese Civilization”. 2017年7月4日閲覧。
  15. ^ 「新文明学」シリーズ創刊”. 2017年7月4日閲覧。

外部リンク[編集]


===

교토학파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교토학파 사람들이 사상을 키운 철학의 길

교토 학파 (쿄토가쿠는, 영어: Kyoto School)란, 일반적으로 니시다 기타로와 타나베모토 및 그들에게 사사한 철학자들이 형성한 철학 의 학파 를 가리 키지  , 교토 대학 인문과학 연구소 를 중심으로 한 학제적인 연구를 특색으로 한 일파도, 교토 학파, 혹은 철학의 교토 학파와 구별하기 위해, 신교토 학파라고도 칭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교토 학파'라고 불리는 그룹이 존재하고 있다.

교토 학파 (철학) 편집 ]

그 상세한 정의는 국가나 연구자 에 따라 다르며, 아직도 세계 각국에서 활발한 연구 의 대상이 되고 있다. 주요 멤버로서, 니시다 기타로 , 타나베 모토 , 하타노 세이이치 , 아사나가 산쥬로, 와쓰지 테츠로, 미키 키요시, 니시 타니 케이지  마츠 신이치 , 다케우치 요시노부 , 도이 토라 가가단 , 시모무라 토시로 우에다 한스케 , 오하 시 요스케 등 또, 좌파로서는 미키 키요 이외에 토사카 준 나카이 마사 이치 , 쿠노 수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나카이는 후술하는 교토 학파(인문연)의 쿠와 하라 타케오 와 교토 학파(근대 경제학)의 아오야마 히데오 와도 간호했다. 또 쿠와하라는 아버지가 교대문학부 교수였던 적도 있어 니시다와도 어렸을 때부터 접하고 있었다고 한다.

교토 학파는 서양 철학과 동양 사상 의 융합을 목표로 한 「선의 연구 」등으로 표현되는 니시다 철학의 입장에 서서 동양 이면서 서양화 한 일본에서, 단지 서양 철학을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내면에서 접을 수 있는지를 모색했다. 그러나 동양의 재평가의 입장과 독자적인 정체성을 모색하는 것은 점차 “서양은 막혀 동양이야말로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대동아 사상에 접근하게 되었다 . 특히 교토학파 시텐노 (니시타니 케이지· 타카 사카 마사히 토· 타카야마 이와오 · 스즈키 나리타카 ) 등은 ' 세계사의 철학 '과 ' 근대의 초극 '을 제창해 해군 에 접근했다. 이 때문에 태평양 전쟁의 패전으로 전쟁 전 교토 학파는 일단 몰락했다. 하지만 전후에도 타카사카, 타카야마 등은 자민당 등의 보수 정치에 접근해, 교토 학파와 정치와의 관계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맥박하게 계속되고 있다. 또한, 육군이 해군에 비해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던 시대에 있어서, 해군에의 접근은 군부 정권에의 익찬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방침을 시정하려고 하는 체제 비판의 행동이었다고, 오하시 료스케는 평가하고 있다. 또한, 오시마 야스 마사 메모에 따르면,이 해군의 브레인 트러스트로서의 교토 학파의 모임에, 교토 학파 (토요 사학)의 미야자키 시정도 단골로서 참가하고 있었다고 오하시는 지적한다.

또한 오하시의 저서에서는 사메이 히데의 분류에 의거하면서 교토 학파와 교토철학을 나누어 파악할 것을 제안한다. 요컨대, 「어떠한 형태로 <무>의 사상을 계승·전개한 사상가의 네트워크」를 교토 학파라고 파악해, 니시다나 타나베에 배워, 단순히 그들의 지적 네트워크 아래에 있는 것을 교토 철학으로 분류한다. 그 경우, 미키는 미묘한 서 위치가 된다고 여겨지지만, 많은 좌파의 제자들은 교토 학파에 포함되지 않는다.  제자로서 니시다의 저작의 편집이나 해설을 쓰면서, 자신의 연구는 역사적인 방향으로 향한 시모무라 토모타로도 아마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또 교토 대학과는 인연이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교토 학파에 포함하지 않고, 오하시도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스즈키 오오츠키는 니시다의 친구로, 「<무>의 사상을 계승・전개」한다는 점에서도 상호 영향 교토의 대학 ( 오타니 대학)에 맡고 있기 때문에, 오하시의 정의에 따르면 스즈키도 교토 학파라고도 된다. 한편, 나카무라 유지 로는 「공통 감각론」(1979)에 있어서, 미키나 토자카나 나카이(게다가 교대졸은 아니지만 토사카와 친한 미에에히로의 이름을 들 수 있다)의 공통 감각에의 언급을 쫓아 가면 , 니시다 철학의 「장소의 논리」의 비판적 극복이 가능하다고 시사한다. 그 점에서도 교토학파(철학)를 좁게 파악하지 않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생각된다.

교토 학파 시텐노는 전시 중 자신들의 언동에 대해 일체 총괄이나 변호의 종류를 하지 않았다. 1965년 에, 유키타니 카즈키가 타카야마에 대해 "나의 전쟁 책임"을 논할 것을 간청한 적도 있었지만, 타카야마는 그것을 거절했다 [1] . 시모무라 토요로는 4명의 침묵에 대해 “교토 학파의 사람들이 자기 변호를 하지 않은 것은, 비평을 감수한 것이 아니라 무시했다는 것이 정확하다.비판은 “이기면 관군”의 입장이어서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상 자체의 실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 

교토학파(철학)의 인물 편집 ]

교토 학파 (근대 경제학) 편집 ]

전쟁 전 일본에서 「국제적으로 평가받은 최초의 경제학자」[3] 인 시바타 케이 를 중심으로, 그 일반 균형 이론 의 스승이며 「일본의 마샬」이라고도 불린 타카다 호마 , 타카다몬시타 에서 전후 많은 슌히데를 키운 아오야마 히데오 의 3명의 쿄다이 교수를 들고, 「근대 경제학의 교토 학파」라고 명명한 것은, 동대의 네기시 타카시[4 이다 .

또, 모리시마 츠오오도 , 「전전 일본의 대표적 경제학자는, 타카다 호마, 소노마사조 , 그리고 시바타 케이의 3명의 경대 교수」[5] 라고 말하고 있다.

시바타 타카시는 경대에서 가와카미  의 세미나로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河上로, 일반 균형론을 타카다 호마에, 국민주의 경제학을 작다 소이치에 배운 후, 황금 시대  하버드 대나 케인즈 혁명 발흥기의 런던에 유학해, 슌페터 나 케인즈 로부터도 일본인 경제학자로서 가장 높은 평가 [주석 1]를 받은 이론 경제학자였지만, 유학으로부터 귀국 후, 교토 학파(철학)나 근위 문면  신체제 운동 의 경제이론상의 지도자가 되어 전후 공직추방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 네기시 타카시, 후쿠오카 마사오 등에서 시바타 경제학의 재평가가 진행되고있다 [주석 2] . 또 시바타의 대표적인 제자 중 한 명이 스기하라 시로 이다. 스기하라는 시바타의 스승인 카와카미를 연구하고, 또한 서지학·도서관학과 경제사상사를 연계한 연구를 전개했다[6 ] . 또한 시바타의 은사 가와카미는 야마구치 고등 상업 에서 니시다 기타로로부터 독일어를 배우고, 그 인연으로 쿄다이 시대도 니시다와 교류를 갖고, 긴에도 니시다와 가와카미에 배우기 위해 토다이에서 쿄다이로 전학 시바타 및 그 주변은 교토 학파 (철학)와 인연이 깊고, 니시다 등 교토 학파 (철학)가 혼다 유키의 집요한 공격의 대상이 된 것도, 쇼와 연구회, 근위의 연장상에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의 설도 소개되고 있다[7 ] .

교토 학파 (경대인 분연) 편집 ]

또, 상기와는 별도로 전후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교대인문연)에서 자주 공동연구회를 열고 활발한 토론을 하고 있던 일파도 교토학파라고 불리지만, 상기 교토학파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이곳은 동양 사학 의 가이즈카 시게키 , 츠카모토 요시타카 , 후지에 아키라 중국 문학 의 요시카와 유키지로 , 프랑스 문학 의 쿠와하라 타케오 , 식물학  나 카오 사스케 , 생태학 으로부터 인류학 에 걸치는 성과를 든 이마니시 니시키사 등이 특히 저명 이다. 이 얼굴 흔들림으로부터도 추찰되는 바와 같이, 이 교토 인문연의 활동 범위는 협의의 인문 과학으로부터 자연 과학의 영역에 이르는 학제적인 것으로, 이마니시는 스스로의 학문 영역을 자연학 이라고도 칭했다 . 지금 서쪽의 제자근에 해당하는 개체군 생태학의 개척자인 모리시타 마사아키 는 자연과학의 연구였다. 대흥 안령 탐험에 이마니시를 대장으로 삼아, 모리시타가 부단장으로서 대원으로서 참가해 국립 민족학 박물관으로 활약의 장소를 옮긴 우메사다 타다오 ( 생태학 → 민족학인류학 )이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의 설립에 노력한 우메하라 맹 (철학) 등도 이 교대인문연의 교토학파에 포함한다. 또한 쿠와하라에 의해 교토 인문 연조 교수로 맞이한 츠루미 토스케, 동 조수 이후 교육 학부 조교수로 재배치된 카토 히데토시 등  일반적으로 교토 학파에 포함하지 않지만, 쿠와하라 타케오를 비롯한 많은 인문연 스탭 와 함께 사상의 과학연구회 의 주요 멤버이기도 했다(쓰루미는 멤버라기보다는 회의 창설자). 쓰루미 등은 교토학파(철학)의 나카이 마사이치, 쿠노수 등 모두 간의로, 나카이, 히사노와 함께 운동을 실시한 세계문화 동인의 대부분이 사상의 과학연구회에 참가하고 있어(예를 들면 다케 야 삼남 . 또한 타케야는 상기 인문연의 조카즈카 시게키의 동생 유가와 히데키  공동 연구자로서도 유명하다), 그 점에서, 교토 학파(철학)의 좌파와 교토 학파(인문연) 2개를 잇는 매개항에, 쓰루미, 쿠와하라, 사상의 과학연구회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덧붙여 교토학파(철학)의 주류에는 사상의 과학연구회는 비판적이며, 예를 들면 동연구회 『공동연구전향』 제2편 제2장 제6절 쥬로」( 고토 히로유키 )에서는 타나베로 대표되는 교토 학파의 주류가 전쟁 협력한 점을 단죄하고, 나카이 마사이치 등의 착상에 의해 그것이 극복된다고 하고 있고(그 점에서 앞서 설명한 나카무라 유지로 “공통 감각 논」에서의 지적의 선구이기도 하다), 또 츠루미도 「철학의 언어」(「사상」1950년)에서 니시다가 「즉이라는 코프라'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파악한다.

평가 편집 ]

니시다몬시타의 시모무라 토모타로는 , 쿄대인 분연의 활동에 대해, 「쿠와하라 타케오 등의 소리로 형성된 집단으로서, 아무런 사상도 없고 중심이 되는 사상가도 없었다」 「쿠와하라 타케오 자신, 「 「대학교수」이지만, 학자는 아니고, 무엇이든 한마디를 가질 뿐의 저널리스트, 기껏해야 계몽가일 뿐이다. 둘째, 삼년 전 문화훈장을 받았지만 어떤 문화적 공로가 있었는지 자타 모두 모르겠다”는 신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8 ] .

교토 학파 (동양 사학) 편집 ]

동양사학 분야에서의 교토학파는 교토제국대학교수였던 나이토 코난, 쿠와하라 타쿠 조 ( 인문연의 쿠와하라 타케오의 아버지), 하네다  를 창시자로 하고, 그 밖에 가노 나오키 야노 히데이치 등이 있다. 제자에 미야자키 시정 , 타무라 미즈조 , 미타무라 야스스케 , 타니 가와 미치오 , 다수의 동양 학자 들이 있어, 교대 인문연의 일각을 이룬 시마다 효지, 카와카츠 요시오, 요시카와 타다오 ( 요시카와 코지로 의 아이 ) 등도 있다.

그 특색은 나이토가 제창하고 미야﨑 등이 발전시킨 시대 구분의 당송 변혁론 이다. 진한 시대까지를 상고( 고대 ),魏晋南北朝隋唐時代를 중세 ,  이후를 근세 , 아편 전쟁 이후를 근대로 하는 4시대 구분법을 중심으로 중국사 의 연구를 전개했다 [9] [10 ] ] . 대전 후에 는, 마에다 나오토리 등 유물사관을 바탕으로 한 [주석 3] 시대 구분법(당중기까지를 고대로 해, 송 이후를 중세로 한다)를 주창하는 학자들(도쿄 학파 · 동 대파 · 역연 파라고 불린다)와의 사이에서 격렬한 사학 논쟁이 행해졌다(시대 구분 논쟁) [11] .

교토 학파 (헌법학) 편집 ]

사사키 소이치 , 오이시 요시오 , 아베 테루야 , 사토 코지 등을 중심으로 한 헌법학 의 학파. 도쿄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도쿄학파 의 정치학적 해석에 대한 법률학적 해석을 지향하는 등을 특색으로 한다.

교토 학파 (정신 의학) 편집 ]

이마무라 신요시 초대 교수에 의해 교토대학 의학부 정신의학 교실에는 철학적 정신병리학 의 방향성이 나타났다. 그 후 3대째 무라카미 히토시 교수에 의해 정신병리학의 전통은 계승되어 나중에 가토 키요시 , 가사와라 카 , 기무라 토시 , 후지나와 아키라 등 시대를 대표하는 정신의학자 를 다수 배출했다 [12] . 덧붙여 기무라 토시는 니시다 철학회에서 「니시다 철학과 나의 정신 병리학」이라고 하는 연제의 강연을 실시하고 있어[13], 교토 학파(철학)와 교토 학파(정신 의학)의 관계는 깊다 .

관련 인물 편집 ]

철학 편집 ]

현대경제학 편집 ]

헌법학 편집 ]

정신의학 편집 ]

참고 문헌 편집 ]

동양사학 편집 ]

평전 편집 ]

관련 항목 편집 ]

각주 편집 ]

주석 편집 ]

  1. ^ "일본의 경제학자로 슌페터를 방문한 자 중 슌페터 자신이 오기 전부터 비정상적 으로 높이 평가한 것은 시바타 존경이며, 온 후에 높게 평가한 것이 미쓰히데이다 .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의 평가하지 않았다." 있습니다. 논쟁 같은 논쟁을 한 것은 시바타 씨 혼자입니까? "미야자키 요시이치, 이토 코 하루"
  2.  국제적인 경제학대사전(The New Palgrave 1987)의 독립항목에 그 이름을 적는 일본인 경제학자는 겨우 5명을 세는 것 뿐이지만, 그 1명으로서, 시바타 케이가 선택되고 있다
  3. ^ 단, 원래의 유물사관에서의 동아시아는 아시아적 생산양식 에서의 정체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송 이후 중세설은 일본 독자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편집 ]

  1. ^ 粕谷一希『반시대적 사색자 가라키 준조와 그 주변』, 57쪽
  2.  시모무라 토요로 「뱃의 산책Ⅰ」,524페이지
  3. ^ 네기시 타카시:「경제사상10 일본의 경제사상2」스즈키 노부오 편 제4장 시바타 케이 국제적으로 평가받은 최초의 경제학자
  4. ^ 네기시 타카시:「현대 경제 사상의 산책길」쿠라바야시 요시마사 외편 2004년 7월 15일 일본 평론사 제8장 근대 경제학의 교토 학파
  5. ↑ 미야자키 요이치 _ _
  6. ^ 고토 카히로 「사회과학에 있어서의 서지 작성의 의의와 근거:스기하라 시로에 있어서의 경제 사상사의 방법론과 도서관 학적적 관심의 관계」 「도서관 학회 연보」44권 2호(1998년 9월), pp.49- 64
  7.  고바야시 토시아키 “니시다 기타로의 우울” 이와나미 현대 문고, 2011년
  8. ^ 시모무라 토요로 “뱃의 산책Ⅰ”- “저작집 13 에세 비오그래픽”, 524페이지(미스즈 서방, 1999년)
  9.  나이토, 1944.
  10.  미야﨑, 1999.
  11.  타니가와 편, 1993.
  12. ↑ 후지나와 아키『사가본 불상 편력』나카니시야 출판, 2002년 2월, 94쪽. ISBN  9784888486729 .
  13. ↑ “ 니시다 철학회 제10회 연차 대회 프로그램 ”. 2014년 4월 열람.
  14. 일본 문명의 새로운 철학 ". 2017년 7월 4일 액세스 .
  15. ↑ “ “신문명학” 시리즈 창간 ”. 2017년 7월 4일 열람.

외부 링크 편집 ]


===

Kyoto School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Kitaro Nishida, considered the founder of the Kyoto School of philosophical thought, c. 1943

The Kyoto School (京都学派Kyōto-gakuha) is the name given to the Japanese philosophical movement centered at Kyoto University that assimilated Western philosophy and religious ideas and used them to reformulate religious and moral insights unique to the East Asian philosophical tradition.[1] However, it is also used to describe postwar scholars who have taught at the same university, been influenced by the foundational thinkers of Kyoto school philosophy, and who have developed distinctive theories of Japanese uniqueness. To disambiguate the term, therefore, thinkers and writers covered by this second sense appear under The Kyoto University Research Centre for the Cultural Sciences.

Beginning roughly in 1913 with Kitarō Nishida, it survived the serious controversy it garnered after World War II to develop into a well-known and active movement. However, it is not a "school" of philosophy in the traditional sense of the phrase, such as with the Frankfurt School or Plato's Academy. Instead, the group of academics gathered around Kyoto University as a de facto meeting place. Its founder, Nishida, steadfastly encouraged independent thinking.

According to James Heisig, the name "Kyoto School" was first used in 1932 by a student of Nishida and Hajime TanabeJun Tosaka considered himself to be part of the 'Marxist left-wing' of the school.[2] Afterwards, the media and academic institutions outside Japan began to use the term. By the 1970s it had become a universally accepted term.

History[edit]

Masao Abe writes in his introduction to a new English translation of Nishida's magnum opus that if one thinks of philosophy in terms of Kant or Hegel, then there is no philosophy taking place in Japan. But if it is instead thought of in the tradition carried out by Augustine and Kierkegaard, then Japan has a rich philosophical history, composed of the great thinkers KūkaiShinranDōgen, and others.[3]

The group of philosophers involved with the Kyoto School in its nearly 100-year history is a diverse one. Members often come from very different social backgrounds. At the same time, in the heat of intellectual debate they did not hesitate to criticise each other's work.

The following criteria roughly characterize the features of this school:

  1. Teaching at Kyoto University or at a nearby affiliated school.
  2. Sharing some basic assumptions about using Asian thought in the framework of Western philosophical tradition.
  3. Introducing and rationally investigating the meaning of "nothingness" and its importance in the history of philosophical debate.
  4. Expanding on the philosophical vocabulary introduced by Nishida.

Generally, most were strongly influenced by the German philosophical tradition, especially the thought of KantHegelNietzsche, and Heidegger. In addition, many employed their cultural resources in formulating their philosophy and bringing it to play to add to the philosophical enterprise.

While their work was not expressly religious it was informed significantly by it. For example, Tanabe and Keiji Nishitani wrote on Christianity and Buddhism and identified common elements between the religions.[4] For this reason, some scholars classify the intellectual products of the school as "religious philosophy."

Although the group was fluid and largely informal, traditionally whoever occupied the Chair of the Department of Modern Philosophy at the University of Kyoto was considered its leader. Nishida was the first, from 1913 to 1928. Hajime Tanabe succeeded him until the mid-1930s. By this time, Nishitani had graduated from Kyoto University, studied with Martin Heidegger for two years in Germany, and returned to a teaching post since 1928. From 1955 to 1963, Nishitani officially occupied the Chair. Since his departure, leadership of the school crumbled — turning the movement into a very decentralized group of philosophers with common beliefs and interests.

Significance of its notable members[edit]

The significance of the group continues to grow, especially in American departments of religion and philosophy. Since the mid-1980s, there has been a growing interest in East/West dialogue, especially inter-faith scholarship. Masao Abe traveled to both coasts of the United States on professorships and lectured to many groups on Buddhist-Christian relations.

Although Daisetz Teitaro Suzuki was closely connected to the Kyoto School and in some ways critical to the development of thought that occurred there — he personally knew Nishida, Tanabe, and Nishitani — he is not considered a true member of the group.[5]

Kitaro Nishida[edit]

Nishida, the school's founder, is most known for his groundbreaking work An Inquiry into the Good and later for his elucidation of the "logic of basho" (Japanese: 場所; usually translated as "place," or the Greek τόπος topos). This brought him fame outside Japan and contributed largely to the attention later paid to philosophers from the Kyoto School.

Nishida's work is notable for a few reasons. Chief among them is how much they are related to the German tradition of philosophy since Schopenhauer. The logic of basho is a non-dualistic 'concrete' logic, meant to overcome the inadequacy of the subject-object distinction essential to the subject logic of Aristotle and the predicate logic of Kant, through the affirmation of what he calls the 'absolutely contradictory self-identity' — a dynamic tension of opposites that, unlike the dialectical logic of Hegel, does not resolve in a synthesis. Rather, it defines its proper subject by maintaining the tension between affirmation and negation as opposite poles or perspectives.

Nishitani describes East Asian philosophy as something very different from what the Western tradition of DescartesLeibniz or Hume would indicate.

It is 'intuitive and practical,' with its emphasis on religious aspects of experience not lending themselves readily to theoretical description. True wisdom is to be distinguished from intellectual understanding of the kind appropriate to the sciences. The 'appropriation' of Nishida's thought,...'embraces difficulties entirely different from those of intellectual understanding'...and those who 'pretend to understand much but do not really understand, no matter how much they intellectually understand' are the object of his scorn.[1]

Nishida wrote The Logic of Place and the Religious Worldview, developing more fully the religious implications of his work and philosophy through "Absolute Nothingness," which "contains its own absolute self-negation within itself."[6] By this Nishida means that while the divine is dynamically paradoxical, it should not be construed as pantheism or transcendent theism.

Nishitani and Abe spent much of their academic lives dedicated to this development of nothingness and the Absolute, leading on occasion to panentheism.[citation needed]

Hajime Tanabe[edit]

Keiji Nishitani[edit]

Nishitani, one of Nishida's main disciples, became the doyen in the post-war period. Nishitani's works, such as his Religion and Nothingness, primarily dealt with the Western notion of nihilism, inherited from Nietzsche, and religious interpretation of nothingness, as found in the Buddhist idea of sunyata and the specifically Zen Buddhist concept of mu.

Masao Abe[edit]

Shizuteru Ueda[edit]

A disciple of Keiji Nishitani.

Eshin Nishimura[edit]

Criticism[edit]

Today, there is a great deal of critical research into the school's role before and during the Second World War.

Hajime Tanabe bears the greatest brunt of the criticism for bringing his work on the "Logic of Species" into Japanese politics, which was used to buttress the militarist project to formulate imperialist ideology and propaganda. Tanabe's notion is that the logical category of "species" and nation are equivalent, and each nation or "species" provides a fundamental set of characteristics which define and determine the lives and outlooks of those who participate in it.

Members[edit]

References[edit]

  1. Jump up to:a b D.S. Clarke, Jr. "Introduction" in Nishida Kitaro by Nishitani Keiji, 1991.
  2. ^ Heisig 2001, p.4
  3. ^ Masao Abe, "Introduction" in An Inquiry into the Good, 1987 (1921).
  4. ^ Tanabe in Philosophy as Metanoetics and Demonstratio of Christianity, and Nishitani in Religion and Nothingness and On Buddhism.
  5. ^ Robert Lee, "Review of The Buddha Eye: An Anthology of the Kyoto School," in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42, No.4 (Aug.,1983).
  6. ^ The Kyoto Schoo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7. ^ Jannel, Romaric (26 July 2022). "Nāgārjuna's Tetralemma in Yamauchi Tokuryū's Philosophy"The Eastern Buddhist. Third Series. 2 (1): 55–68. doi:10.15070/00011240. Retrieved 14 February 2023.

Bibliography[edit]

Scholarly books
  • The Buddha Eye: An Anthology of the Kyoto School. Edited by Frederick Franck. New York: Crossroad Publishing, 1982.
Seventeen essays, most from The Eastern Buddhist, on Zen and Pure Land Buddhism.
Anthology of texts by Kyoto scholars themselves, with additional biographical essays.
  • The Thought of the Kyoto School, edited by Ohashi Ryosuke. 2004.
Collection of essays dealing with the history of its name, and its members contributions to philosophy.
Excellent introduction to the School's history and content; includes rich multilingual bibliography.
  • Absolute Nothingness: Foundations for a Buddhist-Christian Dialogue, Hans Waldenfels. New York: Paulist Press, 1980.
Good early work, focuses mostly on Nishitani's relevance for the perspective of Buddhist-Christian dialogue.
  • James W. Heisig, John C. Maraldo (Ed.): "Rude Awakenings. Zen, the Kyoto School, & the Question of Nationalism",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4.
Journal articles
  • "The Religious Philosophy of the Kyoto School: An Overview," by James Heisig. Japanese Journal of Religious Studies Vol.17, No.1 (1990), p51-81.
  • "Heidegger and Buddhism," by T. Umehara. Philosophy East and West, Vol.20 (1970), p271-281.
  • "Nishida's Philosophy of 'Place'," by Masao Abe, International Philosophical Quarterly Vol.28, No.4 (Winter 1988), p. 355-371.
  • "In Memoriam: Keiji Nishitani (1900-1990)," by E. Kawamura-Hanoka. Buddhist-Christian Studies, Vol.12 (1992), p241-245.

Readings by members[edit]

  • For further information, see the Nanzan Institute's Bibliography for all Kyoto School members
  • Kitaro Nishida, An Inquiry into the Good, translated by Masao Abe and Christopher Ive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7 (1921).
  • ——, Art and Morality, translated by D. Dilworth and Valdo Viglielmo.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73.
  • ——, Intelligibility and the Philosophy of Nothingness, translated by Robert Schinzinger. Westport: 1958.
  • Tanabe, Hajime, "Demonstratio of Christianity", i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Tanabe: According to the English translation of the seventh chapter of the demonstration of Christianity, translated by Makoto Ozaki, Rodopi Bv Editions, January 1990, ISBN 90-5183-205-2,ISBN 978-90-5183-205-1ASIN B0006F1CBU.
  • --, "The Logic of The Species as Dialectics," trns. David Dilworth; Taira Sato, in Monumenta Nipponica, Vol. 24, No. 3, 1969, pp. 273–288. [Available as pdf through JSTOR]
  • --, Philosophy as Metanoetics (Nanzan studies in religion and culture), Yoshinori Takeuchi, Valdo Viglielmo, and James W. Heisig (Translator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April 1987, ISBN 0-520-05490-3.
  • Keiji Nishitani, Religion and Nothingnes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2. ISBN 0-520-04946-2
  • ——, The Self-overcoming of Nihilism, translated by Graham Parkes and Setsuko Aihara.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0.
  • Yoshinori Takeuchi, The Heart of Buddhism, translated by James Heisig. New York: 1983.

Secondary sources on members[edit]

  • Nishida Kitaro, by Nishitani Keiji, translated by Yamamoto Sesaku and James Heisig.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1.
  • The Religious Philosophy of Tanabe Hajime, edited by Taitetsu Unno and James Heisig.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 The Religious Philosophy of Nishitani Keiji, edited by Taitetsu Unno.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External links[edit]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