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06

井筒俊彦は力道山と木村政彦の試合を見たか?: 王様の耳そうじ

井筒俊彦は力道山と木村政彦の試合を見たか?: 王様の耳そう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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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筒俊彦は力道山と木村政彦の試合を見たか?

今年2013年は井筒俊彦の没後20年にあたるとのことで、慶應義塾大学出版会から全集が刊行されはじめた。刊行記念に慶應の言語文化研究所では井筒さんの業績をめぐるシンポジウムなども行われた。

井筒俊彦といえば、生前から半ば伝説と化していた知の巨人だった。 言語学、西洋哲学、中世ユダヤ哲学、禅や老荘思想、イスラム哲学など東西の宗教・思想・哲学についてこれほど幅広く、しかも深い洞察を展開し、それが世界的に評価されている日本人学者はほかにいない。トルコでは井筒さんのコーラン解釈をイスラーム神学部の教科書として採用しているところもあるほどだ。







井筒さんの非凡な天才性をしめすエピソードは多いが、なによりもまず語学の天才だった。井筒さんに「外国語はなにができますか?」と聞かれて、「英語とドイツ語なら・・」と答えると、「英独仏は外国語ではありません」といわれたという伝説も聞いたことがある。実際、ヨーロッパのほとんどの言語の他、古代ギリシア、アラビア語、ペルシャ語、トルコ語、ヘブライ語、中国語、ロシア語、タミール語など30を超える言語を自在に使えたと聞く。岩波文庫の「コーラン」の翻訳も井筒さんである。


それはさておいても、井筒俊彦の著作には、他をよせつけない超然とした魅力があった。80年代初めころから知の大衆化がすすみ、それまでの権威的で、重く、いかめしいアカデミズムに代わって、若手の学者たちによる軽やかで如才ない言説が流行しはじめていた。その中にあって、旧世代の学者であったはずの井筒俊彦が、革命に揺れるイランから帰国後、立て続けに発表した著作群には、他を寄せつけない、重厚で、圧倒的な迫力があった。とくにスーフィズムの存在論を論じた『イスラーム哲学の原像』と代表作『意識の本質』は衝撃的だった。『意識の本質』はわからないなりに、なんども読んだが、やっぱりよくわからなかった。でも、わからないのだけど、おもしろいのだ。


井筒さんの著作は難解だ。だが、書かれ方はけっして難解ではない。書かれ方は難解だけれど、じつはたいしたことをいっていない本というのもよくあるが、そういうのとはまったく逆だ。いかに内容を薄めず、イスラーム哲学や東洋思想のもっとも深い部分を伝えられるか、ということに徹しているという意味では、これほど親切で、ていねいに、平易に、わかりやすく書かれた本はない。

そのわかりやすさは、テキストを厳密に分析したからというだけでなく、井筒さん自身がその内容を客観的な知識ではなく、生きるための哲学として身体的にとらえようとしていることから生まれているのだと思う。だからこそ、そこには生半可な理解を拒む迫力や歯ごたえがあるし、それを理解するには、読む側に相当の知的体力や想像力、観察力が必要とされる。イスラームとはどんなものか、禅や密教のような東洋的思惟とはどんなものか、かいつまんで、かんたんに知りたいという人には、井筒さんの本はまったく向いていない。だから、ここで井筒さんの思想や哲学をかんたんに紹介することはしない、というか、できない。
 




古典的な哲学を、現代を生きるための血の通ったものとして、みずからの体の中に甦らせたいと思うひとにとっては、井筒さんの本は汲みつくせない知の水源となるはずだ。わからないなりにもなんども読むうちに、概念ではなく、一種のイメージができあがってきて、そのイメージをよすがに、イスラームなり東洋思想なりについて、たんなる知識ではない身体的な理解が深まっていくという感じだろうか。そういう本というのは、とても珍しい。


慶應のシンポジウムも聞きにいった。古代哲学研究者の納富信留さんが30代半ばの井筒さんが発表した『神秘哲学』(1949)をとりあげて論じた。これはプラトンやプロティノスなどのギリシア哲学に見られる神秘主義の展開を追った本だ。幼い頃から漢学をたたき込まれ、座禅を組まされるような東洋的無の雰囲気が濃厚な家庭に育った井筒さんにとって、西洋のルーツとされる古代ギリシア哲学を研究することは、みずからの東洋を相対化し、解放の可能性をさがすものであった。ところが、東洋と対比する対象であったギリシア哲学が、じつはその本質において東洋的なものにつながっていたことに気づく。つまり、かつては自明とされていた東洋と西洋という枠組みそのものを見直すことへと、井筒さんの研究がシフトしていくことになる。それが井筒さんのその後の研究の方向性を決めていくことになる。

 

納富さんの話はおもしろかったのだが、三田まで行く電車の行き帰りで、たまたま増田俊也さんの『木村政彦はなぜ力道山を殺さなかったのか』を読んでいたせいで、話を聞いているうちに、井筒俊彦は学問の世界における柔道の木村政彦のような存在なのではないかという考えがなんとなく浮かんできた(ここから先は世迷言です)。

 












井筒俊彦全集のパンフレットに文芸評論家の安藤礼二氏が「井筒俊彦は20世紀の日本が生み落とすことができた最大かつ最高の思想家である。思索の対象としたジャンルと地域の多様性においても、その理解の深みにおいても他の追随を許さない」と書いていた。だが、この評価はそのまま木村政彦にもあてはまる。こんなふうにーー。


 
「木村政彦は20世紀の日本が生み落とすことができた最大かつ最高の柔道家である。研究の対象とした格闘技ジャンルと技の多様性においても、その理解の深みにおいても他の追随を許さない」




井筒俊彦は既存のアカデミズムや学問のジャンルといった枠を超え、さらに若いときから外国へ出て、膨大な学問分野を渉猟し、それをアカデミズムという枠を超えて、現代を生きるための、いいかえれば現代を戦うための実践的な哲学としてまとめあげようとしてきた。日本のアカデミズムとは距離を置き、イラン王立アカデミーの教授となり、ユングやエリアーデとともに「エラノス会議」という知の異種格闘技戦に、鈴木大拙に次ぐふたりめの日本人正式レクチャラーとして15年にわたって参加し、東洋哲学について講演を行ってきた。その桁外れの学識の広さと深さは、日本はもちろん、むしろ世界でこそ知れ渡っているし、あまりにもすごすぎて、他の追随をゆるさない。




一方、木村政彦は、全日本柔道選士権3連覇を達成し、全日本選手権13年連続保持、天覧試合優勝も含め、15年間不敗の不世出の天才だった。柔道のほかに、空手やボクシングなど、さまざまな格闘技を積極的に研究し、講道館のスポーツ柔道の枠を超えて、実践的な武道としての柔道を追求しつづけた。講道館からはにらまれ、プロ柔道、さらにプロレスに足を染めて海外にわたり、ブラジルで柔術家のエリオ・グレイシーを倒し、ほぼ半世紀後のグレイシー柔術発展の種をまき、今日の総合格闘技のスタイルの先駆となった。力道山との試合で謎のKO負けを喫するが、いまなお技術的にも、その技の幅の広さにおいても「木村の前に木村なく、木村の後に木村なし」と讃えられ、いまなお史上最強の柔道家とされている。




こう書くと、井筒俊彦のどこが木村政彦なのかとつっこまれそうだし、たしかにまったくちがった人生、とくに木村の後半生は悲劇的なものがあったし、対比したからなんだというものではないのだけれど、ひとつ一致する点があるとすれば、木村政彦もまた今年、没後20年だということだ。つまり、井筒俊彦(1914-1993)と木村政彦(1917-1993)は、ほとんど同世代なのである。




もちろん、都会の裕福な家に生まれ、幼い頃から禅や書に親しんで育ち、好きな学問に集中することのできた井筒俊彦と、熊本の貧しい田舎で川で父の砂利拾いの仕事を手伝いながら育ち、食うためにはなんでもやらなくてはならなかった木村政彦の人生はあまりにもちがう。若き日の井筒俊彦が街頭テレビで力道山と木村の一戦を夢中になって見ていたとも想像しにくい。けれども、境遇はことなれど、同じ時代の空気を吸って生き、それぞれに孤高の道を歩んでいったことはまちがいない。




ともに「道」という東洋的伝統の中から出発し、やがて、そこに息苦しさをおぼえ、異なる分野を渉猟することで、おのれのなかの東洋をいっそう身体的に深め、より強靱なものへと鍛え上げていき、ついにはだれも到達しえない境地へと達したという点では共通するものもあるのではないか(もっとも、木村は思想性というものには無縁だったようだが)。世迷言は承知で、井筒俊彦は知らないけれど格闘技のことは知っているというひとに、「井筒俊彦は学問の世界における木村政彦のような存在だ」といって紹介することは、半分くらいは当たっているという気がしなくもない。







2013年10月21日 (月) 雑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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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키 슌히코는 역도산과 기무라 마사히코의 경기를 보았습니까?
올해 2013년은 이츠쓰 슌히코의 몰후 20년에 해당하는 것으로, 게이오 기주쿠 대학 출판회로부터 전집이 간행되기 시작했다. 간행기념에 게이오의 언어문화연구소에서는 이통씨의 실적을 둘러싼 심포지엄 등도 열렸다.


이츠쓰 슌히코라고 하면, 생전부터 중반 전설로 되어 있던 지의 거인이었다. 언어학, 서양철학, 중세유대철학, 선과 노장사상, 이슬람 철학 등 동서의 종교·사상·철학에 대해 이렇게 폭넓고 깊은 통찰을 전개하고 그것이 세계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일본인 학자 별로 없다. 터키에서는 이통씨의 꾸란 해석을 이슬람 신학부의 교과서로 채용하고 있는 곳도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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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통 씨의 비범한 천재성을 시사하는 에피소드는 많지만, 무엇보다도 우선 어학의 천재였다. 이츠키 씨에게 「외국어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일이 있다. 실제로 유럽의 대부분의 언어 외에 고대 그리스, 아랍어, 페르시아어, 터키어, 히브리어, 중국어, 러시아어, 타밀어 등 30개가 넘는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고 들었다. 이와나미 문고의 「코란」의 번역도 이통씨이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이츠키 슌히코의 저작에는, 그 밖을 설레지 않는 초연한 매력이 있었다. 1980년대 초부터 지의 대중화가 스스미, 그때까지의 권위적이고, 무겁고, 미묘한 아카데미즘을 대신해, 젊은이의 학자들에 의한 경쾌하고 여재없는 언설이 유행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안에 있어, 구세대의 학자였을 것이다 이통 토시히코가, 혁명에 흔들리는 이란으로부터 귀국 후, 세워 계속해서 발표한 저작군에는, 다른 것을 들르지 않는, 중후하고, 압도적인 박력이 있다 했다. 특히 수피즘의 존재론을 논한 '이슬람 철학의 원상'과 대표작 '의식의 본질'은 충격적이었다. '의식의 본질'은 모르겠지만, 다들 읽었지만 역시 잘 몰랐다. 그렇지만,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것이다.



이통씨의 저작은 난해하다. 하지만 쓰는 방법은 꽤 난해가 아니다. 쓰는 방법은 난해이지만, 실은 뭔가를 말하지 않은 책이라고 하는 것도 자주 있는데, 그러한 것과는 전혀 반대이다. 어떻게 내용을 얇게 하지 않고, 이슬람 철학이나 동양 사상의 가장 깊은 부분을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철저히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는, 이렇게 친절하고, 정중하게, 평이하게, 알기 쉽게 쓰여진 책은 없다.



그 알기 쉬움은, 텍스트를 엄밀하게 분석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이통씨 자신이 그 내용을 객관적인 지식이 아니라, 살기 위한 철학으로서 신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것으로부터 태어나고 있다고 생각해. 그러므로 거기에는 생반가능한 이해를 거부하는 박력과 잇몸이 있고, 그것을 이해하려면 읽는 측에 상당한 지적 체력이나 상상력, 관찰력이 필요하다. 이슬람이란 어떤 것인지, 선이나 밀교와 같은 동양적 사유와는 어떤 것인지, 언제든지, 간단하게 알고 싶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이통씨의 책은 전혀 적합하지 않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통씨의 사상이나 철학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것은 하지 않는다, 라고 할까,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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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인 철학을, 현대를 살기 위한 피가 다니는 것으로, 미즈로부터의 몸속에 되살아나게 하고 싶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통씨의 책은 펌핑하지 않는 지의 수원이 될 것이다.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읽는 동안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이미지가 완성되어 그 이미지를 좋게 하지만 이슬람이 되어 동양사상에 대해서는 지식이 아닌 신체적인 이해가 깊어진다고 한다. 느낌일까. 그러한 책이라는 것은 매우 드물다.



게이오 심포지엄도 들으러 갔다. 고대 철학연구자인 납부신류씨가 30대 중반의 이통씨가 발표한 '신비철학'(1949)을 논의했다. 이는 플라톤과 프로티노스 등 그리스 철학에서 볼 수 있는 신비주의의 전개를 쫓은 책이다. 어린 시절부터 한학을 박아 좌선을 짜는 것 같은 동양적 무의 분위기가 농후한 가정으로 자란 이통씨에게 있어서, 서양의 뿌리로 여겨지는 고대 그리스 철학을 연구하는 것은, 미즈로부터의 동양 를 상대화하고 해방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양과 대비하는 대상이었던 그리스 철학이, 실은 그 본질에서 동양적인 것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한때는 자명하게 되어 있던 동양과 서양이라는 틀 자체를 재검토하는 것으로, 이통씨의 연구가 시프트해 가게 된다. 그것이 이통씨의 그 후의 연구의 방향성을 결정해 가게 된다.


 
 

나토미씨의 이야기는 재미있었지만, 미타까지 가는 전철의 행운으로, 우연히 마스다 토시야씨의 「키무라 마사히코는 왜 역도산을 죽이지 않았는지」를 읽고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이츠쓰 슌히코는 학문의 세계에 있어서의 유도의 기무라 마사히코와 같은 존재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어딘지 모르게 떠올랐다(여기서부터는 세미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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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키 슌히코 전집의 팜플렛에 문예 평론가의 안도 레지씨가 “이츠키 슌히코는 20세기의 일본이 낳을 수 있었던 최대이고 최고의 사상가이다.사색의 대상으로 한 장르와 지역의 다양성에 있어서도 , 그 이해의 깊이에 있어서도 다른 추종을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 평가는 그대로 기무라 마사히코에도 적용된다. 이런 식으로.


 
“키무라 마사히코는 20세기 일본이 태어날 수 있었던 최대이고 최고의 유도가이다. 아니"


이츠키 슌히코는 기존의 아카데미즘이나 학문의 장르와 같은 테두리를 넘어 더욱 젊은 때부터 외국으로 나와 방대한 학문 분야를 섭렵하고 그것을 아카데미즘이라는 테두리를 넘어 현대를 살기 위한, 아니면 현대 을 싸우기 위한 실천적인 철학으로 정리해 왔다. 일본의 아카데미즘과는 거리를 두고, 이란 왕립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어, 융이나 엘리아데와 함께 「에라노스 회의」라고 하는 지의 이종 격투기전에, 스즈키 대졸에 이은 두 번째 일본인 정식 렉처러로서 15년에 걸쳐 참가해, 동양철학에 대해 강연을 해왔다. 그 거대한 학식의 넓이와 깊이는, 일본은 물론, 오히려 세계에서야말로 널리 알려져 있고, 너무나 너무 대단해, ​​다른 추종을 풀지 않는다.


한편 기무라 마사히코는 전일본 유도 선사권 3연패를 달성해 전일본 선수권 13년 연속 유지, 천람 경기 우승을 포함해 15년간 불패한 불세출의 천재였다. 유도 외에 가라데와 권투 등 다양한 격투기를 적극적으로 연구해 강도관의 스포츠 유도의 틀을 넘어 실천적인 무술로서의 유도를 계속 추구했다. 강도관에서 벗어나 프로 유도, 또한 프로레슬링에 발을 물들여 해외에 걸쳐 브라질에서 주술가의 엘리오 그레이시를 쓰러뜨리고 거의 반세기 후의 그레이시 주술 발전의 씨앗을 뿌려 오늘의 종합 격투기 스타일 의 선구가 되었다. 역도산과의 시합으로 수수께끼의 KO 패배를 피우지만, 지금도 기술적으로도, 그 기술의 폭의 넓이에 있어서도 「키무라 앞에 키무라 없고, 키무라 뒤에 키무라 없음」이라고 칭찬받아 지금도 사상 최강의 유도가로 여겨진다.


이렇게 쓰면 이츠키 슌히코의 어디가 기무라 마사히코인지 붙잡힐 것 같고, 분명히 완전히 틀린 인생, 특히 키무라의 후반생은 비극적인 것이 있었고, 대비했기 때문에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 하나 일치하는 점이 있다면 기무라 마사히코도 올해 몰후 20년이라는 것이다. 즉, 이통 슌히코(1914-1993)와 기무라 마사히코(1917-1993)는 거의 같은 세대이다.


물론, 도시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선이나 책에 친숙해져 자라, 좋아하는 학문에 집중할 수 있었던 이통 토시히코와, 구마모토의 가난한 시골에서 강에서 아버지의 자갈 픽업의 일을 돕면서 키우고 먹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야 했던 기무라 마사히코의 인생은 너무나 다르다. 젊은 날의 이츠키 슌히코가 거리 TV에서 역도산과 기무라의 일전을 열중해 보고 있었다고도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처지는 일이지만 같은 시대의 공기를 빨아 살아 각각 고고의 길을 걸어간 것은 틀림없다.


함께 「길」이라고 하는 동양적 전통 속에서 출발해, 이윽고, 거기에 숨결을 느끼고, 다른 분야를 섭렵하는 것으로, 누구의 동양을 한층 신체적으로 깊게 해, 보다 강인한 것으로 단련 드디어, 마침내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점에서는 공통되는 것도 있는 것이 아닌가(가장 기무라는 사상성이라고 하는 것에는 무연이었던 것 같지만). 세미언은 알고 있고, 이츠키 슌히코는 모르지만 격투기는 알고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 「이츠츠리 슌히코는 학문의 세계에 있어서의 기무라 마사히코와 같은 존재이다」라고 소개하는 것은, 반 정도는 맞았다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