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4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 대한 아래의 답변

설교 기도 묵상 토론 -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 대한 아래의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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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3 13:07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 대한 아래의 답변
최경식
조회 수 1019 추천 수 55 댓글 21

제가 수련회이후 어디 피정 나와서 이제사 글을 봅니다. 한 목사님과 그리고 그때 더 많은 논의가 필요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발제상 구조문제도 지적하신대로 있었던 것 같구요. 첫 번 째 지적대로 통전적 선교를 말하며 에큐메니칼 진영의 문제가 있는것 처럼 말하는데 그 문제가 발제에 없었다는 지적은 정당하며 아마 제가 보안하여 답변을 넣어야 될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을 합니다. 그리고 다음의 문제 에큐메니칼 선교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저와 질문자가 다르게 알고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 부분은 계속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질문자는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 어떤 한계나 문제가 없다고 본 것이고, 저는 한계가 있었다고 본 것이죠. 저는 이 문제에 대한 이해가 최병천 목사님께서 사회하면서 어느정도 제가 할말을 하신것 같아 서로 이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제가 책을 읽고 제 나름대로 이해한 것은 분명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의 갈등 내지 대립이 존재했던건 확실합니다. 에큐메니칼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 자체가 복음주의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죠. 그런 측면에선 분명 복음주의와 대척점에 있다는 건 확실하지요. 여기까진 서로 동의를 하는것 같은데---문제는 그럼 에큐메니칼이 무슨 문제가 있느냐 개인구원을 포기했느냐 그렇게 보는건 잘못이다--이런 주장을 하는것 같아요. 맞아요. 에큐메니칼 입장에서 개인구원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진 않았지요.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만큼 개인구원에 대한 강조점을 많이 두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원치않게 개인전도에 대한 열정이 약화되는 측면이 있자 에큐메니칼 자체에서 반성이 일어나게 되고 여기서 복음주의 진영이 주장한 것에 대한 이해를 폭 넓게 하게되고, 그리하여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통전적 선교를 들고 나옵니다. 바로 로잔대회에서죠. 여기서 복음주의자들도 자기들의 한계를 인정 하여 에큐메니칼 입장의 복음을 다시 정립하게 되고,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도 개인구원에 대한 부분도 다른 측면과 동일한 관점에서 바라보게 됩니다(물론 개인구원을 포기한적은 없지만 약화될수 있었음을 인정한 것으로 보이죠) 위의 질문에서 보면 발제자가가 에큐메니칼 입장에 대해 개인복음을 부정적으로 말을 했다고 여기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제가 주장하는 것은 에큐메니칼측이 개인구원에 대해 약화된 부분을 다시 재정립했다고 보아집니다. 사실 이제껏 복음주의적 진영에서는 복음을 수직적 차원에서 이해하였고, 에큐메니칼은 원하든 원치않든 수평적 차원이 많이 강조된건 사실이지요.(그런다 해서 수직적 차원을 버린건 물론 아니지요, 그러나 복음을 수평적차원에서 보는 것이 강조됨으로 수직적차원이 약화될 여지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통전적 선교론을 들고 나옵니다.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왜 통전적이란 용어를 사용했을까요? 그렇게 말한 이유와 배경을 잘 이해하면 그동안 에큐메니칼 선교신학 진영에서도 뭔가 미진한 부분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선교를 보다 더 복음주의자들이 주창하는 것을 다 포함하여 선교신학을 더 확립하려는 시도라 볼수 있지요? 그렇지 않으면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통전적 선교라는 용어를 구태여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통전적 선교란 이 용어를 사용하여 선교의 개념을 보다 넓게 이해한 곳이 다름 아닌 에큐메니칼 진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해가 좀 되시리라 여겨집니다.

다음의 말을 우리가 같이 들었으면 합니다.
흔히 ‘통전적’이란 형용사는 선교를 수직적 차원이나 혹은 수평적 차원 중 한 방향만 이해하는 흐름을 수정하려 할 때 사용된다. 비셔트 후프트는 1968년 세계선교협의회(WCC) 웁살라 총회 개막연설에서 이러한 두 차원을 성서적으로 종합하여 함께 끌어 안으려는 열망을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삶과 연관된다는 복음의 수직적인 해석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 관계에 주로 관심을 갖는 복음의 수평적 해석 사이에 커다란 긴장이 여전히 상존함을 보면서, 이제는 이러한 양극단 사이를 왕복하는 유치한 운동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 쪽으로 치우친 모습은 본질적인 면에서 복음의 진리를 충만하게 포용하려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직적 차원을 상실한 기독교는 소금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여, 스스로 맛을 잃고 세상에서도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류 공동체를 향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책임을 회피하려는 수단으로 수직적 차원에 우선순위를 두는 기독교는 성육신을 거부하고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세상을 행한 하나님의 사람을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선포하는 구원은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 안에서 우리를 총체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행위를 동반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이다.

위의 말은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한 말입니다. 이 말은 그동안 수직적이냐, 수평적이냐 하는 것으로 선교의 지엽적인 문제가 양자에 다 있었다는 것을 반성하는 차원엥서 나온 말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에큐메니칼 진영의 선교관을 이전보다 더 통전적으로 그리고 발전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입니다.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통전적 선교관을 들고 나온 배경은 이제는 복음을 수직적이냐, 수평적이냐 이렇게 나누어 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에큐메니칼이 수직적 차원을 거부한적은 없었죠, 그러나 복음주의와 달리하다 보니 그 부분이 그들이 의도한것은 아니지만 약화를 불러올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통전적선교를 주창한 것입니다. 통전적 선교론을 주장한 곳은 다름 아닌 에큐메니칼 진영임을 우리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큐메니칼은 확실히 건강하다고 저는 보는것이죠. 어떤 한계나 부족이 있으면 그것을 인정하고 다시 새롭게 정립하는것이야 말로 진정 에큐메니칼이죠, 에큐메니칼이라 해서 전혀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식으로 보는것이야말로 에큐메니칼에 대한 오해며 맹신입니다, 에큐메니칼이 건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껏 주창한 것에 어떤 한계가 보일 때 그동안 대척점에 서 있었던 복음주의자들과도 대화하고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여 더 나은 선교신학을 주창하는 것이야 말로 에큐메니즘에 합당한 것이죠. 그에 대한 응답이 바로 통전적 선교론이었죠! 저는 그런 의미에서 에큐메니칼 선교신학 진영이 아주 건강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혹 이 부분을 더 쉽게 더 깊게 알기 원하는 분은 다음의 책을 참고하면 될것 같습니다. 아마 이 책을 보시면 에큐메니칼 진영이 왜 통전적 선교를 들고 나왔는지를 알게 될것입니다.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김동선, 대한기독교서회 출간


더 좋은 논의를 위해 계속된 질문과 응답을 기대합니다.
감사를 드리며
연화리 피정의 집에서 최경식드림

#답이 길어서 따로 올렸습니다.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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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1'
2012.02.23 15:09
좋은 답변입니다. 대화는 언제나 활기를 줍니다. 이렇게 신학적인 토론을 통해 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누구나 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글을 대화방으로 옮깁니다.
댓글

한상복 2012.02.23 17:47
이 논의를 계속 발전시켜 나가려면, 우리가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해 다시 더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더 공부하며 토론에 임하겠습니다.
우선 몇가지 질문으로 다시 토론에 들어가겠습니다.
1. 1974년에 있었던 로잔 세계복음화 국제회의는 분명 복음주의진영의 대회입니다.
1968년 제4차 에큐메니칼 총회가 웁살라에서 열렸고, 이 총회에서 WCC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 더욱 강하게 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속 활동으로 1973년 '오늘날의 구원'이란 주제로 모인 방콕대회에서 구원을 다음과 같이 '통전적'으로 정의내립니다. "우리는 구원을 삶의 새로움으로, 하나님의 충만함 속에서 진정한 인간성의 전개로서, 또 하나님의 정의로움이 죄인을 의롭게 하심과 사회적,정치적 정의 속에서 드러나는 과정으로서 이해한다"(세계교회협의회 40년사,120쪽)
이러한 구원에 대한 WCC의 정의는 복음주의 교회들을 우려케 하였고, 이듬해인 1974년 "땅이여 주의 음성을 듣자"라는 주제 하에 복음주의 계열 교회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존 스토트가 중심이 된 로잔대회입니다. 물론 여기서 작성된 로잔언약에는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을 등한시 한 교회의 과거 모습을 참회하고 사회참여의 중요성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련의 움직임은 통전적 선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에큐메니칼에 대한 우려와 대응으로서 양진영을 갈라지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회참여를 말하고 있으나 전도의 우위성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변화가 없습니다. 즉 이들은 여전히 전도와 사회참여를 이원적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진영은 이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원과 순간, 개인과 공동체, 종교와 문화, 복음화와 사회참여, 수직적인 것과 수평적인 것, 구원과 해방, 세계와 교회 등, 이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이원론을 없애는 것을 선교와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선교,김동선,41쪽)

로잔대회는 중립적인 대회가 아니라 복음주의 진영의 대회임을 볼 때, 그 결과물로 통전적 선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 심방이 갑자기..... 다음에 계속 의견을 밝히겠습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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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4 09:59
계속 대화를 하다 보면 의견이 조금씩 좁혀 지리라 여겼습니다
74년 로잔대회는 복음주의 대회가 맞습니다(이건 제가 잘못알았음) 그러나 이 대회는 복음주의가 회개하고 각성하는 계기를 만들어 에큐메니칼 선교운동에 대한 이해를 폭넓게 수용한 대회였지 분리된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 75년 나이로비 에큐메니칼 총회에서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도 복음주의적 관점을 수용하면서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통전적 선교방향으로 나아가는 물꼬를 트게 한 대회였지요, 따라서 74년 로잔복음대회와 75년 에큐메니칼 총회는 자신의 입장만이 아닌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여 선교를 이해와 합일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한 선교대회였습니다.
지금 한목사님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한목사님이 주장하는 것은 에큐메니칼 진영 초기에 나타난 것들입니다. 지금의 에큐메니칼은 한목사님이 주장한 것을 그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선교신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이 별 갈등없이 공동의 유산아래 선교를 하던 시대가 있었고, 그 이후에 갈등과 대립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해와 일치로 나아가는 선교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따라서 한목사님이 주장하는 근거는 갈등과 대립할 시기에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주장한 내용을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그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복음주의적 요소를 반영하여 통전적 선교를 주창하고 있습니다. 칼 바르트의 초기신학과 후기신학에 조금의 차이가 있듯이 에큐메니칼의 선교역사도 많은 변천과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이 에큐메니칼의 장점이면서 특징입니다. 다음의 자료를 자료실에 올려 드릴테니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의 선교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시면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한국신학계에도 복음주의 입장에 선 교수님도 계시고, 에큐메니칼 입장에 선 분들도 계시는데(호신에 김동선, 장신에 한국일), 한국일 교수님이 발제한 소논문이 바로 지금 우리가 논의한 것을 다루고 있으며, 앞전에 소개한 김동선 교수님의 책도 이 오늘날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 어디 까지 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논의가 단지 개인을 넘어 팩트에 근거한다면 더 발전적인 논의가 가능하리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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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4 10:24
그리고 추가적으로 김동선 교수의 책 하나님의 선교(2000출간) 보다는 더 최근에 나오는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2007년 출간)을 참고하시면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역사와 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한목사님은 ‘하나님의 선교’ 라는 책을 통해 에큐메니칼진영의 선교신학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 다음에 나오는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을 보시면 선교역사를 지금은 어떻게 보는지를 알수 있을것 같습니다. 책을 가지고 계시겠지만 이 책은 그동안의 복음주의 진영과의 문제 그리고 화해와 일치까지 나아가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서술한 좋은 책입니다. 1장;선교와 전도, 2장;공동의 증언을 위한 소명, 3장;일치를 통한 오늘날의 선교와 전도 4장;화해의 사역인 선교, 5장;교회의 치유선교---이 큰 목차의 흐름에서도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 어떻게 변천되고 발전되었는지 알수 있습니다. 아무튼 서로 좋은 공부의 기회입니다. 심방중 바쁠텐데 건강유의 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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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수 2012.02.24 12:28
목사님들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토론 내용을 읽으면서 다시 정리도 하지만, 다시 책을 펴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함께 공부하면서 공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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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영 2012.02.24 12:55
이번토론을 보면서 느낀것은 '통전적 선교'라는 용어가 어느 진영에서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해를 가져다 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이 용어를 사용할때는 자신들의 제한된 구원론에 대한 반성으로 받아들이지만 여전히 한목사님이 지적한데로 개인영혼 구원(일차적)도 중요하고 사회구원(이차적)도 중요하다는 식의 개념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고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이 용어를 사용할때는 주로 급진적인 구원의 확장으로 나아간 진영에 대한 경계로서 이 용어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종교적 에큐메니칼' 진영을 포함한 인간 구원이해를 단지 '인간화'만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경계로서 '통전적인 선교'를 말라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볼때 이 용어는 두 진영의 선교관의 한계를 바로 직시하면서 곧 구원이해를 '값싼 은혜'의 차원으로 보기 쉬운 복음주의의 문제점과 또 구원사가 세계사안에 흡수되어 버리는 급진적인 에큐메니칼 진영을 극복하는 차원에서 우리가 이 용어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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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4 13:12
강목사님 이번에 뵙지못해 아쉬웠습니다. 잘 계시죠 그리고 명목사님 먼데서 와서 깊은 얘기도 못나누고 여러모로 미안합니다. 그래요 통전적 선교는 복음주의진영과 에큐메니칼 양 진영에서 지금은 다 사용하고 있는 선교용어입니다. 이 말은 명목사님이 지적한 대로 양진영이 서로 부족한 부분을 인식했다는 의미이며 선교의 이해를 넓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좋은 지적입니다. 어떻든 이렇게 하여 선교에 대한 일치와 화해로 나아가려는 시도는 매우 바람직하다고 볼수 있지요. 아뭏든 좋을 지적과 문제 제기들 감사하며, 자료실에 있는 한국일 교수의 소논문과 김동선 교수의 책을 보면 제가 설명하는 것 보다 훨씬 명쾌하게 선교신학에 지금 어디 까지 와 있는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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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복 2012.02.24 13:54
답변 감사합니다.
이로써 에큐메니칼에 대한 보다 사실적 접근이 된듯 합니다.
그러나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다시 질문드리자면,

1.로잔언약이 선교의 개념에 있어서 포괄적이고 개방적인 선언인가?
로잔대회는 보편적 교회회의도 아니며 선교를 폭넓게 수용한 대회가 아닙니다.
저는 호켄다이크의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과 웁살라와 방콕대회의 선교에 대한 지평의 확장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성경적이고 바른 선교적 관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이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여 에큐메니칼에 대항하는 '로잔 세계복음화 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따라서 로잔대회는 복음주의 진영이 선교를 폭넓게 수용한 대회가 아닙니다. 로잔언약은 더욱 선교와 복음화의 이원화를 확고하게 주장하면서 교회의 에큐메니칼적 흐름을 저지하기 위한 대회였습니다. 그 언약 내용은 상당히 개방적인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주의 진영은 로잔언약에서 성서의 절대성(성서의 무오류성보다 더 강한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복음전도의 긴급성, 국내교회의 자립을 위한 선교의 일시적 중단촉구 등이 표명되었습니다. 위의 표제들이 문제될 것은 전혀 없어보입니다. 아니 가장 기독교적인 용어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장 기독교적인 용어를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는 에큐메니칼이 이런 중요한 것들을 흐트리고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로잔대회 이후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 간의 갈등이 첨예화 되었습니다. 이 로잔언약이 과연 과거 자신의 문제에 대한 회개에서 나왔으며, 선교의 개념을 폭넓게 수용한 것일까요?

2. 하나님의 선교를 주창하는 에큐메니칼의 선교개념이 통전적인 것이 아닌가? 반쪽짜리인가?
*복음전도 이 용어는 참으로 모호합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이 이 용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는 한 개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이 결여되거나 소홀히 취급되면 교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우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큐메니칼은 복음전도를 선교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했습니다. 이 둘은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야기는 다시 반복되는 이야기 이므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비록 지금은 이러한 통전적인 선교에 대한 이해가 에큐메니칼 진영 안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에큐메니칼 신학자는 복음주의자들의 이원론을 받아들여 다시 교회가 복음전도에 힘을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논리를 최경식 목사님께서는 '통전적 선교신학'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 용어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저는 다시 반복해서 질문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과연 에큐메니칼에서 말하는 선교개념이 통전적이지 못하고 치우친 것이었는가?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복음주의자들의 논리대로 이 둘(복음전도와 사회참여, 혹은 복음화와 인간화) 사이를 갈라내게 되면, 우리는 또 다시 저 이원론으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고, 개인을 사회로부터 분리하고, 복음을 문화로 부터 분리해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언제나 복음의 절대성을 부르짖게 될 것이고, 복음의 우월성을 주창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개인의 회심 없는 사회참여의 중요성은 간과될 것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이 로잔언약에서 말한 것처럼 다시 긴급성, 절대성, 유일성과 같은 표어들만 득실거리는 배타적이고 편협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화 사회참여 등은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언제나 구원과 상관없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해봐야 그런 일들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니까요. 제가 과한 염려를 하는 것일까요?

애초에 에큐메니칼이 주장했던 구원의 개념과 선교의 개념들을 우리는 유심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개인의 구원이 그가 속한 사회,정치,경제,문화,환경 등을 떠나서 논의될 수 있는것인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하는 선교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이라는 그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무관한 것이었는지. 왜 우리는 이러한 구원을 선포하고 선교를 하는 일을 주저하는 것일까요?
교회는 세상과 구분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타종교인과 무종교인들과는 구분되어야 하는데 이런 통전적 개념들이 그 틀을 무너뜨리기 때문일까요?
우리가 지금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처럼 할례를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우리가 지금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듯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우리가 지금 성전을 짓고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했던 솔로몬처럼, 교회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우리가 지금 무엇을 염려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교회는 마치 유대교의 위치에서 새로운 그리스도신앙의 탄생을 두려워하는 자의 심정이지 않은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제가 다시 반복되게 함을 용서하십시오.
여기서 접근되지 않으면 더이상의 토론의 진보는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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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4 17:16
심방 잘 다녀 오셨습니까? 바쁜중에 긴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짧게 답변을 드릴께요

1, 로잔대회는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이 더욱 첨예한 갈등을 가져온 대회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로잔복음주의 대회는 복음주의 안에 선교의 개념에 있어 에큐메니칼 입장을 많이 수용한 대회였으며 향후에 복음주의 안에 선교의 틀을 확장시킨 대회였습니다. (참고서적,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세계교회협의회 지음, 김동선 옮김,대한기독교서회, 2007년. 259쪽)

2.하나님의 선교를 주창하는 에큐메니칼의 선교개념이 통전적인 것이 아닌가? 반쪽짜리인가?
에큐메니칼 입장에서 처음부터 얘기한 선교개념에 복음주의 요소를 받아들임으로 비로소 통전적 선교라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선교라는 관점을 주장한데서 한발자국 더 진일보한 선교이론입니다.
“1972/1973년에 걸쳐 방콕에서 오늘날의 구원이라는 주제로 열린 세계선교대회는 선교에 대해 통전적으로 접근했다고 평가된다. 방콕대회는 영적인 면과 사회 정치적인면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둘 중 어느 하나에 우선 순위를 두지도 않았다 (참고서적 위의 책, 250쪽)
심지어 2005년 아테네 대회에서는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선교을 연결하려는 접촉점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고 세계교회 협의회 문서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위의 책, 254쪽)
따라서 위에서 주장한 한 목사님의 말; 에큐메니칼 선교가 처음부터 통전적이 아니었나 라고 묻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그렇지 않았다고 세계교회협의회 문서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진영의 특징은 선교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발전시켜 왔다는 점입니다. 이게 그들의 큰 장점입니다.

3.우리 모두는 어떤 신학적 관점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목사님의 신학적 관점도 존중합니다

4.그러나 우리의 신학적 토론이 어떤 사실 관계에 대해 토론한다면 그건 역사적 팩트위에서 진행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위에서 한목사님이 주장하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말할수 있다고 보나 그것이 에큐메니칼 입장에서는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5.만약 한 목사님이 주장하는 것이 에큐메니칼 입장이었다고 말씀하신다면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말한 그 근거를 밝혀 주시면 보다 나은 대화가 계속 되리라 여겨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한 개인이 주장하는 개인적 견해일 뿐이며, 이런 논의는 더 이상 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6.제가 주장하는 것은 앞에서 여러번 주장했듯이 세계교회 협의회에서 내어 놓은 자료위에서 한 이야기 들입니다.

댓글

한상복 2012.02.24 19:22
여기서 의견차이가 더이상 좁혀지지는 않을듯 합니다.
1.역사적 팩트는 IMC와 WCC의 통합이 복음주의진영에 경각심을 갖게 만들었고 로잔대회로 모이게 했으며 LCWE(로잔세게복음화위원회)를 탄생케 했다는 것입니다.
이형기 교수가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에 대한 오해가 많음을 인식하고 번역한 WCC자료들이 있습니다. <기원과 형성>, <40년사>, <역대총회 종합보고서>, , <하나의 신앙고백>, <에큐메니칼 신학의 발전사1,2>, 등. 이들 책들에서 보면 로잔대회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조금씩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중 <40년사>를 인용하자면, 102쪽에 제가 위에서 인용한 방콕대회의 구원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인용한 후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세계선교의 미래에 대한 위대한 희망의 한 징표로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통전적'(holistic) 접근은 다른 사람들을 우려케 하였다. 특히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그들 나름의 세계 복음전도 회의를 계획하고 있었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을 우려케 하였다. 그들은 말씀선포가 그 같은 비전의 포괄성 속에서 사회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뒷전으로 밀려나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또한 김동선 교수 역시 그의 책 <하나님의 선교> 46쪽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사회,정치상황에 대한 개입은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심한 반발을 받았다. 제네바대회가 열린 1966년에 독일의 베를린에서는 "세계복음대회"가 열렸고, 1969년 미국의 미니애폴리스에서는 빌리그레함이 주축이 되어 "미국전도대회"가 열렸다. 이는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복음화를 위한 국제대회로 이어졌다"

이 로잔대회가 통전적이라는 것은 최경식 목사님에 따르면 김동선 교수님의 해석입니다.(사실인지 책이 없어 파악은 불가합니다.)
최경식 목사님 말씀대로 김동선 교수 역시 통전적 선교신학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의 인간화가 인간의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회심을 과소평가하며 눈에 보이는 교회에 무관심하다고 비판하며 따라서 통전적 선교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실입니다.(그의 책 하나님의 선교에서도 이렇게 주장합니다.)

로잔대회는 분명 에큐메니칼에 대한 반동적 성격을 지닌 복음주의진영의 대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로잔세계복음화위원회는 WCC의 대척점으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WCC를 교회대표기구로 받아들일 수 없는 복음주의 진영의 새로운 교회협력기구가 생긴 것이죠(WCC와는 다른 느슨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저 이러한 역시 자료 위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로잔대회가 자신의 과오에 대한 회개와 에큐메니칼의 의견을 겸허히 받아들이기 위해 조직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며, 그 결과로 파생된 로잔언약의 신학이 통전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구분이며, 분열이고, 과거로의 회귀입니다.

2.로잔대회와 그 결과물인 로잔언약이 결코 통전적이지 않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에 입각한 것이고, 그 결과물에 대한 해석은 저의 견해입니다.
이미 밝혔듯이 에큐메니칼 안에도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구분하여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두가지가 병행될 때, 통전적 선교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은 말 그대로 병행(우선순위가 있는)이지 통전이 아닙니다. 이러한 생각은 옳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발전이 아니라 퇴보입니다. 다시 이원론으로 돌아가서 둘 다를 잡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이 둘을 이분화함과 동시에 둘다를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에큐메니칼 안에서 이러한 퇴보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에큐메니칼이 더 철저하지 못하다고 이미 지적했습니다.

3.우리가 만약 다시 이 둘을 구분하고 복음을 문화 위에 두며, 우월성과 절대성과 우선성 등을 피력하기 시작한다면 선교뿐만 아니라 다양성속의 일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칼의 정신이 벽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지금 현재 하나님의 선교를 외치는 에큐메니칼은 쇠퇴하고 있습니다. 다시 교회주의가 우리시대에 득세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안위를 걱정하여 교회주의자가 된다면 에큐메니즘은 우리의 것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통전적? 복음화와 인간화의 조화?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선교의 조화? 글쎄요.
제가 보기엔 그들이 표상하는 것은 비록 복음일지는 모르지만 실상은 자신의 개교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심이 교회의 선교가 하나님의 선교를 삼킬 것입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이것이 제가 바라보는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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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4 21:05
로잔대회의 성격에 대한 해석은 김동선 교수의 개인 견해가 아니고 세계교회 협의회에서 발간한 선교역사 문서입니다. 세계교회 협의회에서 펴낸 자료집 '세계선교대회의 역사(1910-2005)-참고 김동선교수 번역, 세계교회협의회 지음,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246-255//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한목사님이 무얼 주장하고 싶어하는지는 제가 압니다. 그게 나쁘다고 말하려는게 아닙니다. 그런 에큐메니칼 선교가 저도 여전히 필요하다고 보며, 또 한목사님이 주장하는 그것을 에큐메니칼 진영이 포기한적도 없고 그대로 지금도 이어가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발제나 지금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에큐메니칼 진영이 그것만 고집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복음주의 진영의 선교이론도 상당히 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건 저의 견해가 아니고 세계교회 협의회에서 스스로 발간한 내용입니다. 역사적 사실이 있는데 왜 그걸 구지 부정하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자료실에 한국일 교수님이 쓴 논문을 좀 읽어보면 오늘날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 어디까지 왔는지 금방 알수 있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어디까지 선교신학을 발전시켰는가 하면 그들 스스로의 자료집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선교를 어떻게 접촉할 수 있는가 하는 것 까지 선교신학이 나아갔어요, 그게 2005년문서에 나와 있어요. 다만 예를 들면 이럴수는 있어요. 저나 한목사님이 저는 이런 에큐메니칼의 선교신학은 옳지 않다고 본다, 이렇게 개인의 신학적 주장을 펼수는 있다고 봐요, 저는 그런 것에 한목사님이 잘못되었다 이렇게 말하진 않아요. 다만 제가 강조하여 말씀드리는 것은 현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 주장하는 것이 뭔가를 정확히 알자는 거예요, 이건 개인 신학이나 개인이 이해하는 차원이 아닌 역사적 팩트가 있는데 이게 다르다고 하니---참 난감하네요. 저의 답변은 이제 이정도 해야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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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4 21:17
한목사님이 위에서 역사적 팩트라며 이렇게 로잔대회에 대해서 인용을 했지요. "특히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그들 나름의 세계 복음전도 회의를 계획하고 있었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을 우려케 하였다. 그들은 말씀선포가 그 같은 비전의 포괄성 속에서 사회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뒷전으로 밀려나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잔대회가 에큐메니칼 진영의 사회적 책임을 선교정책으로 입안하려 하자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 그렇게 될 경우 복음이 사회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뒷전으로 밀려난다고 오히려 우려하는 목소리입니다. 따라서 이 인용문은 오히려 로잔복음대회가 그만큼 에큐메니칼 진영의 많은 부분을 취하려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위에서 언급한 세계교회협의회 자료와도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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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4 21:37
위의 논의를 통해 이 글을 읽는 자들이 선교신학의 현 주소를 좀 더 잘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최목사님과 한목사님, 두 분의 입장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합니다. 어떤 부분은 서로 다른 시각 때문에 좁혀지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시각이 있다는 것을 나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시각을 통해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신학회의 장점이지요.

지금까지의 논의로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두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1)다음에 책으로 낼 때, 여기서 행해진 논의도 요약해서 추가하면 좋겠습니다.
2)아마 선교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으로 인해, 같은 자료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주제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위 논의는 이 정도로 하기를 권합니다. 수고했고, 좋은 대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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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복 2012.02.25 16:23
이번 토론으로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1974년 로잔대회에 대해 더 바르게 공부할 수 있어서 최경식 목사님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조금 더 연구하고 생각해 보니 최경식 목사님의 말씀에 동의가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따라서그 부분에 대해서만 첨가하고자 합니다.

1974년 로잔대회는 방콕CWME대회의 구원이해에 대해 도전하기 위해 복음주의 진영이 계획한 대회였습니다. 그들은 이 대회를 통해 구원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죄의 용서와 성령을 통한 거듭남이며, 따라서 영혼구원이 가장 우선되며 사회정의와 억압과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은 그 이후에 자연적으로 따라와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명예회장인 빌리 그레이엄도 로잔대회의 목적중의 하나가 방콕대회에 대한 도전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의도와는 다르게 대회가 진행되어갈수록 존 스토트의 영향력으로 방콕대회에서 강조된 복음의 사회적 성격과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이 대폭 반영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이는 복음주의의 진일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결과 로잔언약은 이 두가지(반에큐메니칼적 의도와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새로운시각)가 혼재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가 이 대회를 통해 사회적 책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점은 큰 발전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의도에 집중하였기에 제가 오해한 부분도 있습니다. 이런 반에큐메니칼적 의도라는 관점으로 로잔언약을 읽어보면 한계성이 분명 보입니다.
사실 그동안 복음주의계열의 책들은 깊이있게 읽지는 못했습니다. 폭넓은 독서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복음전도의 우선성에 대한 강박이 구원과 선교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방콕대회의 구원개념의 정당성, 복음전도와 사회적 참여를 구분하기 보다 하나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토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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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2012.02.25 19:11
두 분의 토론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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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5 21:58
잘 차려 놓은 밥상에 밥 숱가락 하나 더 얹어서 잘 얻어 먹고 갑니다.
최경식목사님과 한상복목사님,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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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경 2012.02.26 20:51
잘 읽고 갑니다. 잘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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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8 10:49
토요일 주일준비하고, 주일-종일 예배드리고 월요일 심방갔다오다보니,---- 오늘 화요일 정상 출근해서야 여기 들어옵니다. 정신이 없다보니 답글이 늦어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위에 한목사님 좋은 대화와 토론 감사합니다. 저의 발제에 대한 한계를 잘 지적해 주어서 감사를 드리고요, 다양한 토론으로 제가 공부를 더하게 되어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늘 건승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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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생 2012.03.01 20:18
두분 목사님을 통해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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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신출신 2012.04.02 13:10
글 잘 읽었습니다. 김동선 교수님한테 선교신학을 배운 사람입니다. '에큐메니컬'이라는 말은 17세기 칼빈주의의 문서에도 나옵니다. 복음주의 진영의 교리도 매우 사회참여적입니다. 아래의 글에도 대글이 달려 있습니다. 참고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 복음주의 진영인지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이해를 달리 할 수 있겠지만 보수 진영의 언어도 알고 보면 매우 사회참여적입니다.

김동선 교수님의 도식에 대해서는 동의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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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4.06 07:07
감사합니다. 참고 하겠습니다. 늦게 들어와서 이제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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