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1

중국 유학의 변천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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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유학의 변천
1. 중국 유학의 변천
시대 학풍 특징 / 대표적 학자
한 훈고학
유교 경전의 자구 해석에 치중하는 학풍
정현, 마융
당 훈고학 공영달- 오경정의
송 주자학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원리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학풍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 주희
명 양명학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주장
왕수인
청 고증학
경전에 대한 실증적 연구에 치중하는 학풍. 정치 현실 외면
고염무, 황종희, 염약거, 호위, 혜동, 대진, 왕명성, 전대흔
청말 공양학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 역사에 대한 진보적 해석
유봉록, 공자진, 강유위, 양계초
2. 선진 시대의 유학
선진( 先 秦 ) 시대의 유학을 한대 이후의 유학과 비교하여 원시 유가 사상( 原 始 儒 家 思 想 )이라고도 한다. 춘추 전국 시대의
유가 사상가로는 공자, 맹자, 순자 등을 들 수 있다.
① 공자(孔子):덕치주의, 명분론, 중용 사상
② 맹자(孟子):왕도 정치 사상, 민본주의, 혁명 사상, 성선설
③ 순자(荀子):예치, 성악설
3. 훈고학(訓考學)
유교 경전의 자구 해석(字句解釋)에 치중하는 학풍. 진 시황제 때의 분서 갱유(奔書坑儒) 이후 한대에 와서 선진 시대와 글
자체가 달라져 경전의 해석에 치중하게 되면서 발달하였다. 한 무제 이후 유교의 국교화로 원시 유가 사상은 많이 변질되
었다. 원시 유가 사상은 당시의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덕치와 왕도 정치를 주장하였으나, 한대의 유학은 전제화
된 황제 권력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송학(宋學)의 싹은 당 중기에 불교를 배척하면서 유교 윤리를 강조했던 한유(韓愈)와 불교 교리를 흡수하여 유학의 새로운
연구 방향을 모색했던 이고( 李翶)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송학의 우주론적 이론 체계는 북송의 주돈이( 朱敦頤, 자
는 염계 濂溪, 1017~1073)에 의해 기초가 잡히고, 장재( 張載, 자는 횡거 橫渠, 1020~1077)․정호( 鄭顥, 자는 명도 明道,
1032~1058)․정이( 鄭頤, 자는 이천 伊川, 1033~1107)에 계승 발전되어 남송 시대의 주희( 朱憙, 자는 회암 晦庵, 1130~
1200)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주돈이는 태극도설( 太極道說) 에서 우주의 본체를 태극( 太極) 또는 무극( 無極)이라 하고, 그 동( 動)․정( 靜)에 의하여
음( 陰)․양( 陽)의 2기( 氣)가 생기며, 여기에서 5행( 行)의 5기( 氣)와 만물이 생긴다고 설명하였다. 장재는 기체( 氣體)와 유
사한 기(氣)의 집산(集散)에 의하여 만물이 형성․소멸된다는 기일원론(氣一元論)적 우주론을 전개하였다. 송대의 우주론은
정호․정이 형제에 의해 더욱 심화되고 발전하였다. 그들은 우주의 현상을 이루고 질서와 조화를 가져다주는 근본 원리를
인식하여 이를 리(理)라 불렀다. 그리고 리와 기의 상관(相關)으로 우주를 설명하는 이기론(理氣論)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송학宋學)에 있어 우주론(宇宙論)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인성론(人性論)과 이에 결부된 수양론(修養論)이다. 특
히 정이는 수양법으로 대학( 大學) 에 나오는 치지( 致知)를 강조하였다. 이는 송학의 합리주의적 정신을 표한한 것이라
고 하겠다.
주희는 송대 유학자들의 학설을 종합하고 체계화하여 송학을 대성하였다. 그는 태극․무극을 리( 理)에, 음양․오행을 기( 氣)
에 해당시키고, 리( 理)를 ‘형이상( 形而上)의 도( 道)’, 기를 ‘형이하( 形而下)의 기( 器)’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인성론( 人性論)에 있어 그는 인간의 본성은 리( 理)를 타고난 선한 것으로 보고,
리를 닦아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기에 유래하는 본능적인 불손한 기질( 氣 質 )의 성( 性 )을 억제하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수양 방법으로는 특히 성찰( 省察)과 독서( 讀書)를 통한 덕성( 德性)의 함양[존양( 存養) ]과 궁리( 窮理)를 중요시하
였다.
주희는 경전 연구에 있어서는 문헌학적 연구를 하였으며 4서( 四書) [논어( 論語), 맹자( 孟子), 대학( 大學), 중용( 中庸) ]에
대한 치밀한 주석을 가하였다. 4서( 四書)는 송유( 宋儒)들에게 중요시 되어, 5경( 五經)과 더불어 유교의 기본 경전이 되었
다.
송학은 현세를 경시하는 불교 사상이나 도교의 반정치적 관념을 거부하고, 유학 본래의 실천 윤리를 본질적인 요소로 고수
해 나갔다. 그리고 불교와 도교를 배척해 중국의 사상계에 있어 지도적인 위치를 다시 확립하게 되었다. 송학은 기본적으
로 송대 사대부 계층, 지주층의 유심주의( 唯心主義)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으며 주지주의( 主知主義)적 경향을 보이고 있
다. 송학은 삼강 오륜을 기본으로 하는 유교 윤리 사상을 고취하여 봉건적 사회 질서 유지와 군주 독재 체제 정당화에 공헌
하였다.
주자학은 남송 시대부터 중국 학문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으며, 청대까지 지속적으로 중국의 학문 사상계를 지배하
였다. 또 한국, 일본, 베트남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출전 : 개관동양사 pp.176~177)
주자학은 자연과 인간의 세계를 일관하는 철학으로 기초지워진 유학사상 가장 체계적인 이론으로, 그 핵심은 이기론( 理氣
論)에 있다고 한다. 주자학에서는 자연․인간계의 여러 존재의 근원이 되는것은 절대 불변의 초월적인 리(理, 天理)이고, 이
리가 개별적인 존재에 내재화한 것이 성(性, 天性)이라고 한다.
이러한 성 = 리에 기초지워진 인간은 본래 긍정적인 존재이지만, 구체적인 개인은 인욕( 人 欲 )과 정( 情 )의 기( 氣 , 氣 質 의

주자학은 자연과 인간의 세계를 일관하는 철학으로 기초지워진 유학사상 가장 체계적인 이론으로, 그 핵심은 이기론( 理氣
論)에 있다고 한다. 주자학에서는 자연․인간계의 여러 존재의 근원이 되는것은 절대 불변의 초월적인 리(理, 天理)이고, 이
리가 개별적인 존재에 내재화한 것이 성(性, 天性)이라고 한다.
이러한 성 = 리에 기초지워진 인간은 본래 긍정적인 존재이지만, 구체적인 개인은 인욕( 人 欲 )과 정( 情 )의 기( 氣 , 氣 質 의
性 )에 의해 혼탁한 상태로 나타나는데, 이 기를 없애 천연의 성으로 돌아가는 것[격물궁리( 格 物 窮 理 ) ]이 인간의 길이다.
천연의 성이라는 것은 윤리적으로는 공자 이래의 유학에 의해 전해진 도통( 道統)이었는데, 군신․부자․부부․형제․붕우의 오
상( 五常), 전호․노비와 지주․주가( 主家)와의 관계를 포함한 상하 신분 질서가 천리( 天理)에 기초하는 절대 규범으로 되고,
개인의 지위에 따라 이 규범의 엄격한 준수가 요구되었다.
이 주자학은 당시 새로운 지배 계층으로 등장했던 형세호( 形 勢 戶 )층의 이념이었으며 송대 왕조 하에서 재편된 전제 왕조
국가의 지배 질서를 지탱하는 교학( 敎學)으로서 생겨났다. 남송기의 정쟁으로 한 때는 위학( 僞學)으로 탄압받았지만 이후
명․청 시대까지 체제 교학의 지위를 차지했다. 또 조선 시대의 한국, 에도 막부 시대의 일본에서도 공인된 국가 교학으로서
의 역할을 하였다.
(출전 : 松丸道雄외저, 조성을역, 중국사개설 , 한울, 1990, pp.248~249)


5. 양명학
양명학의 선구자 육구연
육구연( 陸九淵, 자는 상산象山, 1139~1192)은 주자학에 대립되는 학설을 내세워 남송 사상계에 한 조류를 이루었다. 그
는 우주의 본체는 성( 聖)이고 리( 理)는 심( 心)이라 하였다. 그는 리를 외계의 현상에서 찾을 것이아니라 각자의 마음 속에
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수양론(修養論)은 내성(內省)에 의한 직관(直觀)을 강조하였으며, 여기에서 불교 특히
선종의 영향이 짙게 나타나 보인다. 그의 학설은 리일원론(理一元論)을 근본으로 하는 주관적 유심론(唯心論)에 입각한 것
으로, 명대의 왕수인에 이어져 더욱 성하게 되었으며, 주자학에 대립하는 주요 학파를 이루게 되었다. (출전 : 개관동양
사 , p.177)


명대의 유학
명대의 유학은 원대에 이어 주자학의 유행으로 전개되었다. 명대에 과거 제도가 실시되면서 주자학이 관학이 되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주자학의 관학화는 사상의 자유로운 발전을 막게 되었고, 주자학의 관학화에 반대하는 새로운 학풍이 형성되
었다.
주자학에서 중시하던 주지( 主知)적인 궁리( 窮理)보다는 실천적인 행동에 중점을 두는 새로운 풍조가 일어났다. 이러한 풍
조는 먼저 설선( 薛瑄), 오여필( 吳與弼)에서 시작되어 호거인( 胡居仁), 누량( 婁諒), 진백사( 陳白沙)에 이르러 고조되었으
며, 그 뒤를 이은 왕수인(王守仁, 1472~1528 자는 양명 陽明)에 의해 주자학의 구투(舊套)를 벗어난 새로운 실천 철학 양
명학(陽明學)이 형성되었다.


왕수인의 양명학
왕수인의 교설은 그의 전습록( 傳習錄) 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송대 육구연( 陸九淵)의 주장을 이어 심즉리( 心卽理)라
는 절대적 유심론( 唯心論)에 기본을 두고, 인간의 마음( 心)에 같추어진 양지( 良知)의 절대 지선( 絶對至善)과 자율성을 강
조함으로써, 학문의 목적을 실천에 의한 양지의 실현[치양지(致良知) ]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진지(眞知)는 실천을 통하
여 완성된다고 하여 지행 합일[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 ]을 역설하였다.


양명학의 변천
이리하여 양명학의 자율적인 실행 정신은 당시 학자들의 지지를 받아 주자학을 대신하여 명대 후반기에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양명학은 한동안 침체되었던 중국 사상계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으며, 한국과 일본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후 왕수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각자 스승의 학설을 발전시켰으나, 그중 이른바 양명학 좌파라고 불리는 일
파에 오면 왕수인의 양지설( 良知說)을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인심의 자유와 자율을 강조한 나머지, 수양을 위한 공부와 경
서의 학습을 경시하고 방자해지는 폐단을 낳기도 하였다. 특히 이지( 李贄, 1527~1602, 탁오卓吾)는 “양지만 갖추면 주색
광태를 부려도 성인 군자가 되는 데 무방하다”고 극언( 極言)하며, 전통적 가치관에 반기를 들고 명교 윤리( 名敎倫理)에 반
항하는 태도를 보이니, 이른바 명말 심학(心學)의 횡류(橫流)를 이루었다.
그러나 양명학 우파에서는 전덕홍( 錢德洪), 나홍선( 羅洪先) 등이 좌파의 과격한 태도를 비판하고 왕수인의 양지설을 바탕
으로 하면서도 수양과 학문의 필요를 역설하니, 오히려 주자학 쪽으로 접근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출전 : 개관동양사 , p.236~237)

송대에 성립된 주자학은 원대에는 공인 관학이 되었고, 명대가 되면 국가 교학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명대 후기에
송대 이래의 사회에 사회 체제가 전환기를 맞게 되자 지배 질서의 근거를 초월적, 절대적인 성리( 性理)에서 구하는 주자학
이 흔들리게 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주자학에 의해 구축되 유교적 명교주의(明敎主義)를 새롭게 보완하려 한 것이 왕수인
(王守仁, 1472~1528)에 의해 성립된 양명학이었다.

왕수인은 주자학에 의해 주창된 리(理)의 외재성(外在性)을 부정하고, 규범으로서의 리(里)와 성(性)의 가장 지순(至純)한
것, 즉 다름아닌 양지(良知)라 하여, 리의 내재화, 내면화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심즉리(心卽理)라 한다. 사회 질서
를 규제하는 윤리도 주자학에서와 같이 밖으로부터 주어진 규범의 준수가 아니라 인간 본래의 본성인 양지(良知)의 자연적
발로이며 그것은 정( 靜)적인 인식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실천에 의해 검증되어야 한다고 하여, 지행
( 知行)의 합일[지행합일설( 知行合一說) ]과 주체적 능동성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주자학에서 초월적, 절대적 규범이었

던 천리( 天理)는 양명학에서는 개인 마음( 心)의 본체로서의 양지( 良知)로 되었는데, 거기서 가치 규준( 規準)의 전환이 이
루어졌다. 다만 왕수인의 경우 양지(良知)와 주자학적 천리(天理)와의 정합성(整合性)은 끝까지 유지되었는데 여기에서 왕
수인의 명교(明敎) 획득의 입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왕수인에 의해 미묘한 균형으로 유지되었던 가치 규준은 명말에 사회 모순의 심화와 함께 그 평형을 잃게 되었다.
이미 왕수인 자신이 “마음에서 구하여 옳지 않을 때에는 공자의 말이라도 옳지 않다”라고 하여 자아( 自我, 양지良知)의 자
립과 그에 의해 기성의 권위를 비판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양명학 좌파( 左派)는 왕수인의 이러한 경향을 한층 발전시켜, 이탁오( 李卓吾, 1527-1602, 본명은 지贄)는 양지설을 더욱
철저히 하여 기성의 지식과 인습․도리에 물들기 이전의 지순한 마음을 동심( 童心)이라 부르고 이 동심 앞에서는 공자도 유
교의 경전도 절대적 권위일 수 없다고 하여, 인위적 명교에 속박되지 않는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긍정하였다.
이로부터 주자학에 의해 강하게 부정된 인욕( 人欲)과 정( 情)을 인간 본래의 마음에서 나오는 요구로서 적극적으로 긍정하
고 공리( 功利)를 천히 여기는 것은 위선( 僞善)이라 하여 기성의 통념이나 명교에 맹종하는 도학자를 가인( 假人)이라 불러
통렬히 매도하였다. 또 고대 이래의 역사상 인물을 논하여 명분론적 해석을 비판하고 사대부적 교양에서는 정통적 가치가
주어지지 않았던 문학 작품에 오히려 인간지정(人間至情)의 발로를 인정하여 적극적으로 평가한 것도 모두 동심설(童心說)
로부터 도출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탁오를 정점으로 하는 양명학 좌파의 출현에 의해 주자학의 기초가 흔들렸지만, 청조의 지배가 확립되고 향신
사회가 안정되자 다시 주자학이 국가의 교학으로서 강조되어 학문의 주류는 고증학으로 전환되었다.
(출전 : 중국사개설 pp.315~316)


6. 실학과 고증학
청초의 학풍(경세적 학풍과 고증적 학풍)
청초의 학풍은 이른바 경세 치용( 經世致用)의 학으로 대표되다. 이는 명대에 싹튼 새로운 경향과 명의 멸망이 가져다준 반
성의 기운 속에서 출발하였다. 원래 명말 학문의 주류는 양명학이었지만, 양명학의 발전과 더불어 새로운 학문 경향이 싹
트기 시작했으니, 식물학․지리학․농학․군사학 등의 실용적 분야의 연구, 양명학에 대한 반성, 문헌 고증학의 태동이 바로
그것이다.

(王夫之, 1619~1692)․고염무(顧炎武, 1613~1682)․안원(顔元, 1635~1704) 등을 들 수 있다.
황종희의 주장은 그의 명이대방록( 明夷待訪錄) 에 보이는데, 전제 체제를 통렬히 비판하고, 삼대( 三代: 하, 은, 주 시
대)를 이상 사회로 설정하였으며 현실적인 정치 개혁론과 구체적인 제도론을 전개하였다. 특히 사대부의 여론을 학교를 통
해서 정치에 반영시켜야 한다는 견해는 전제 정치 비판과 표리가 되어, 사대부 계층의 역할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왕부지는 황종희처럼 본격적인 정치론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경세(經世)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만주족에 대항하여 싸운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비한족( 非漢族)적인 모든 것에 대해 경멸했으며 한족 문화의 우월성을 크게 강조했다. 또 그는 과거
를 이상화하는 경향에 반대했는데, 중국의 옛 선조들도 야만인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문화는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제도는 변하는 상황에 따라서 알맞게 바꿔져야 한다고 보았다.
고염무는 명대 학자들의 학문 태도에 반대하여, 학문의 본래 목적은 구세( 救世)에 있다고 보고 학술 추구의 방법으로는 이
른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제창했다. 그 자신은 이러한 원칙아래 추상적인 사색을 배격하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사회의 구
제라는 목적을 바탕에 깔고 경사(經史)의 연구에 몰두했다.
안원은 이들 세 학자보다는 다소 뒤의 인물이지만 청초의 학풍 성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일체의 관념적인 학풍
을 배격하고, 실학( 實 學 )에 역점을 두었으며 실천을 중요시하였다. 유교의 경전을 실천의 반영이라고 보고, 옛 성인의 제
도를 따라 일상 생활 속에서 그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실학( 實學)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론( 理論)․강학( 講學)․사색( 思索)
등을 배격하여, 송명(宋明)의 이학(理學)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하고 오직 실학을 통해서만 요순(堯舜)의 황금기로 돌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 학자들의 연구 경향에는 이러한 경세적 측면과 아울러 치밀한 연구를 중요시 하는 실증적인 태도가 공존하고
있었다. 황종희는 특히 역사학의 연구에 주력하여, 명유학안( 明儒學案) 등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그의 제자인 만사동
( 萬斯同)과 전조망( 全祖望)을 거쳐 장학성( 章學誠)에 이르는 맥을 형성하였다. 왕부지는 경전 연구에 주력하여 자신의 독
자적인 주석을 가했으며, 춘추세론( 春秋世論) 등을 지어 춘추 의 의의를 독자적으로 구명해 갔다. 그밖에 노자연
(老子衍) 등을 통해 노장 사상 등에도 관심을 보였고, 독통감론(讀通鑑論) 송론(宋論) 과 같은 사론(史論)을 쓰
기도 했다. 이들 사론과 춘추 의 연구에서 보이는 철저한 화이관( 華 夷 觀 )은 별개로 하더라도, 그의 깊이 있고 다양한
학문 영역은 학문적인 후계자를 같지 못했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청대 학문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고염무는 경학( 經學)
과 소학( 小學)의 연구에 힘써 일지록( 日知錄) 천하군국이병서( 天下郡國利病書) 음학오서( 音學五書) 등을
남겼다. 특히 음학오서 는 고증학( 考證學)의 중심적인 분야인 음운학( 音韻學)의 선구적 업적이라는 것 외에도, 16세기
매작(梅鷟)의 상서고이(尙書考異) , 진제(陳弟)의 상서소연( 尙書蔬衍) 에서 보였던 방법론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주
목할 만하다. ( 개관동양사 , pp.263~265)

청대 고증학의 선구자들
이러한 경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본격적인 고증학(考證學)은 염약거(閻若璩, 1636~1704)와 호위(胡渭, 1633~1714)를
그 선구로 한다.
염약거는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蔬證) 을 지어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위작(僞作)을 밝혀 내
었고, 호위는 역도명변(易圖明辨) 을 통해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본래 역경(易經) 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도
가( 道家)의 설임을 증명했다. 이들의 저작은 주자학의 근거를 완전히 뒤엎은 실증적인 저작으로서, 경전 자체에 대한 문헌
학적 연구의 문을 열었다.
고증학의 발전
이들의 뒤를 이어 18세기에 들어와 많은 학자들이 나왔는데, 그 가운데 특히 역경( 易 經 ) 의 연구에 정통했던 혜동( 惠
棟, 1697~1785)과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蔬證) 을 지은 대진(戴震, 1723~1777)이 주목된다.
혜동은 조부(祖父)인 혜주척(惠周惕)과 부(父)인 혜사기(惠士奇)의 뒤를 이어 이른바 한학(漢學)의 기틀을 완성했는데, 한
대( 漢代) 학자의 설을 기초로 한 주역술( 周易述) 은 왕필( 王弼) 이후의 현학적( 玄學的)인 해석을 전혀 채택치 않고 있
다. 그밖에 고문상서고( 古 文 尙 書 考 ) 를 지어 염약거의 설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의 문하( 門 下 )에서 강성( 江 聲 ), 왕창
( 王昶), 여소객( 余簫客) 등의 경학자( 經學子)가 배출되었는데, 주목되는 겄은 고증학의 방법론을 역사학에 도입한 십칠
사상각(十七史商榷) 을 지은 왕명성(王鳴盛, 1720~1797)과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異) 를 낸 전대흔(錢大昕, 1728
~1804)이 나와서 고증학 연구의 폭을 넓혔다는 점이다.
대진( 戴震)은 경전 연구에 있어 문자와 언어의 분석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는데, 이런 의미에서 그가 중요시한 언어
학은 경전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이처럼 경전 연구에 있어 과학성을 중요시 하는 그의 방법론은 그의 제자
단옥재( 段玉裁, 1735~1815)와 왕념손( 王念孫, 1744~1832), 왕인지( 王引之, 1760~1834)로 이어져서 고증학은 그 전성
기에 이르게 된다.
단옥재는 육서음운표(六書音韻表)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 등을 지어서 대진의 뒤를 이었는데, 특히 설문해자
주(說文解字注) 는 한자(漢字)의 어원 사전(語源辭典)이라 할 후한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 에 대한 치밀한
고증을 한 것으로, 고증학의 본령(本嶺)을 보여주는 성과로 지목된다.
왕념손( 王念孫)은 광아소증( 廣雅蔬證) 과 독서잡지( 讀書雜志) 를 남기고 있는데, 그는 고전의 연구에 있어서 귀납
적(歸納的)인 방법을 적용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리고 그는 이전의 학자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제자(諸子)
에 대해 치밀한 고증을 하였다. 그의 독서잡지( 讀 書 雜 志 ) 가 바로 그 성과인데, 관자( 管 子 ) 와 묵자( 墨 子 ) 등
약 10종에 걸치는 제자서(諸子書)에 대한 고증을 하였다.
이렇게 본격화한 고증학 연구에 의하여 수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는데, 그 가운데 크게 주목되는 학자는 청말에 일어난 공양
학( 公羊學)의 선구자인 장존여( 莊存與, 1719~1788), 청정( 淸廷)의 사고전서( 四庫全書) 편찬을 주관했던 기물( 紀昒,
1724~1805), 독특한 역사 이론을 편 장학성( 章學誠, 1738~1801), 그리고 고전 비판의 전형인 최술( 崔述, 1740~1816)
등이 있다. 문사통의( 文史通義) 를 지은 장학성( 章學誠)은 이른바 「육경개사( 六經皆史) 」의 관점을 발전시킨 비판적인
사론( 史論)을 전개한 것으로 유명하거니와, 특히 주목되는 인물은 최술( 崔述)이다. 그는 경전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를 했
는데, 공자( 孔子)의 전기에 대한 연구인 수사고신록( 洙泗考信錄) 이 대표적인 업적이다. 여기에서 그는 과장된 전설적
요소를 제거하고 한 인간으로서의 성인(聖人)이라는 공자의 상을 재구성했던 것이다.
청대의 고증학은 원래 명말 청초에 나타난 여러 가지 경향이 구체화된 것이지만, 그 발전에는 이민족 지배에서 오는 요소
의 영향도 있었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한족을 통치함에 있어 항상 지식인들의 반항에 주의하게 되었고, 강희( 康 熙 )․옹정
(雍正)․건륭(乾隆) 연간에 많은 필화 사건, 이른바 문자의 옥(文字獄)이 있었던 것은 지식인 통제라는 면에서 설명된다. 이
런 분위기는 지식인들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관심보다는 문헌 중심의 연구에 몰두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더구나 고금도
서집성(古今圖書集成) 사고전서(四庫全書) 황청경해(皇淸經解) 등 거대한 편찬 사업이 청정(淸廷)에 의해 주
도되면서 그러한 경향은 한층 심화되었다. 특히 사고전서(四庫全書) 는 학문적인 목적 이외에 반만주적(反滿洲的)인 요
소를 문헌에서 제거하려는 의도로 편찬된 것으로서, 학문의 위축 내지 고증학의 발달에 미친 정치적 요인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 개관동양사 , pp.265~266)
7. 공양학
고증학의 전성기에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장존여( 章存與, 1719~1788)를 선구로 하는 공양학파( 公羊
學派)이다.
장존여는 고증학자로서 춘추정사( 春秋正辭) 등 춘추( 春秋) 에 대한 저술을 남기고 있는데, 춘추( 春秋) 를 해석
함에 있어서 공양전(公羊傳) 에 의거하여 자유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이는 전성기의 고증학이 후한(後漢)의 경학(經學)
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으나, 보다 오랜 전거( 典據)를 구하게 되어 자연히 전한( 前漢)의 금문학( 今文學)에 눈을 돌리게 됨
에 따라 나온 결과였다. 이는 새로운 사상을 낳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나온 유봉록( 劉逢祿, 1776~1829)은 좌씨춘추고증( 左氏春秋考證) 을 지어서 좌전( 左傳) 이 경전과
는 관계가 없는 것임과 고문( 古文)의 좌씨전( 左氏傳) 이 한 유흠( 劉欽)의 위작( 僞作)임을 논증했다. 뿐만 아니라 논
어술하(論語述何) 를 통해 논어(論語) 의 해석에 하휴(何休)의 공양설(公羊說)을 적용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전개된 공양학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현실 사회의 문제에 적용되었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위기에서 오는
현실 타개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기도 한데, 대표적인 학자는 위원( 魏源, 1794~1857)과 공자진( 龔自珍, 1792~1841) 이
다.
위원은 모든 학문을 현실의 이해 내지 현실 개조의 도구로 보았고, 경전의 해석도 시대의 현실에 맞추어 자유롭게 이루어
져야 한다고 했다. 그가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을 편집하고 성무기(聖武記) 와 해국도지(海國圖志) 를 지
은 것은 모두 그러한 경세적(經世的) 관심에서였다.
공자진은 거란( 據亂)․승평( 升平)․태평( 太平)이라는 하휴( 何休)의 삼세설( 三世說)을 모든 경전 해석에 적용시켰고, 나아가
서 사회 문제의 이해에까지 하나의 법칙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는 위원과 마찬가지로 현실 문제에 관심을 두어 여러
가지 개혁안을 내놓기도 했는데, 그러한 자세의 밑바탕에는 공양전( 公羊傳)의 삼세설( 三世說)과 만물은 궁극에 달하면 변
한다는 주역( 周易) 의 이른바 변통설( 變通說)이 깔려 있었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변법 사상( 變法思想)의 기초가 되어
실천 사상으로 연결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공양학( 公羊學)의 전개 과정에서 보인 여러 가지 측면은 모두 강유위( 康有爲, 1858~1927)의 사상에서 종
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신학위경고( 新學僞經考) 에서 모든 고문 경전( 古文經典)이 위작( 僞作)이라고 주장하고,
공자개제고( 孔子改制考) 에서 정치 개혁의 근거를 찾아냈으며, 삼세설( 三世說)을 통해서 스스로 개혁의 구체상을 확립했
다. 그의 사상은 곧 무술 변법( 戊述變法, 변법 자강 운동, 1898)을 통해 구체화가 시도되지만, 현실의 개혁을 위한 사상으
로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 개관동양사 , pp.266~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