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실학자 안정복 기독교 비판론
한강수2017
2017. 12. 28.
인터넷에서 본 글중 인상깊어서 가져왔다.
안정복이 진짜 이렇게 정리했는지 아니면 할일없는 고시생이 올린 인터넷 짜깁기한 글인지 모르겠으나
위키를 찾아보니 연관성은 있는듯하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C%A0%95%EB%B3%B5
안정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정복 안정복 (安鼎福, 1712년 ~ 1791년 7월 20일 )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 성리학자 , 작가, 역사가, 수필가이다. 본관은 광주 (廣州)이며,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이다. 성호 이익 (李瀷)의 문인으로서 스승의 문하에서 나온 뒤에도 계속 이익 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의 지도를 받았다. 《 성호사설 》을 해석, 일부 수정한 《 성호사설유선 》을 편찬하였다. 여러가지 지식을 담은 《잡동산이 雜同散異》는 잡동사니 라는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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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기독교 뿐만 아니라 구원,기복을 추구하는 한국의 각종 종교세태와 일맥상통한다.
한국의 종교(불교도 마찬가지만 특히 메인권력축인 기독교)는 유교적 무속신앙과 지극히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복신앙 그리고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종교지도자 우상시스템이 전형적이다.
종교의 역할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한국에서 종교는 폐쇄커뮤니티와 자기만족 그것이 전부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기독교에 복종하는 사람은 자기교회를 바꾸지 못한다.
종교가 아니라서 피라미드시스템 조직탈퇴가 불가하다.
나도 지난시절 종교활동을 경험해봤지만 도시화된 지금의 한국종교시스템은 사적부조클럽 그것외에 의미가 없다.
관혼상제의 부조, 가벼운 인적교류 오직 그목적외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포스트는 종교를 가진 사람은 불편할수도 있겠다.
이런 시선도 있다는것으로 이해하길 바란다.
안정복의 기독교 비판
1. 사람의 육체를 죄악의 근원으로 보아 원수로 간주한다. 하지만 육체는 부모로부터 받은 고귀한 것으로 이 것은 모든 도덕의 근본인 효를 모독하는 것이다.
2.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묵자의 겸애설보다 더 과격하고 현실성없는 이야기다.
3. 천국, 지옥, 영혼불멸 등 불확실한 것들을 교리의 중심으로 삼는 것은 불합리하다.
살아있을 때의 일도 모르는데, 죽은 후의 일은 어찌알까? 초월적 환상에 빠지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4. 인간을 도덕적으로 하기 위해 마귀의 기만과 유혹을 주의하라고 한다.
하지만 본적이 없는 마귀에 대한 언급은 오히려 인간의 도덕적 노력을 소홀하게 만든다. 이는 현세의 책임을 경시하도록 할 뿐이다.
5. 창조설 역시 비합리적이다. 천지개벽에 인격체 조물주가 끼어질 여지가 전혀 없다.
6. 신이 인간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것도 틀리다. 신은 우주를 구성하는 원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7. 사후세계를 강조하기 때문에 반사회적이다. 인간이 전력을 기울여야할 일은 현세에 있다.
8. 구원을 도적적 의무보다 상위에 둠으로써 인간공동체에서의 근본을 거부한다.
9. 예수가 아담의 자손인 이상 예수는 인간이다.
10. 아담과 이브의 원죄도 모순이다. 어떻게 신은 죄악에 빠지도록 유도해놓고, 그들에게 가혹한 벌을 내리는가?
그 것은 스승의 태도가 아니다. 가난, 질병, 죽음이 원죄때문이라고 가르치리는 것은 가소로운 모순이다.
11. 왜 인간은 죽은 후 보상을 받기 위해서 행동해야하는가? 사람이 선을 행해야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한 도리일뿐이다.
죽은 후 처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은 현세의 고뇌에서 해탈하기 위한 인간으로서의 당면한 사회적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며, 근원적으로 보면 이기적인 행위이다.
12. 인간이 구원을 바라는 이기심으로써 도덕을 행하게 하는 것은 도저히 바른 세상의 도덕적 토대를 이룰 수 없다.
13. 세례, 죄의 고백, 공개 기도 등의 행위는 고대 신앙에 불과하다.
안정복 기독교 비판
실학과 성리학 사이를 오가던 그는 천주교에 적대적이었다. 그는 천주교가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고, 성호학파나 그밖의 남인실학, 성리학자들 중 천주교를 신봉하는 자들에게 공격을 취하였다. 그에 의하면 현실에서의 삶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사후 세계를 말하며 사람들을 혹세무민한다는 것이다. 1785년의 《천학고 (天學考)》와 《천학문답 (天學問答)》의 저술은 천주교의 배척을 위한 논리적인 무장이었다. 그리고 이기양·권철신 등에게 양명학에도 깊은 관심을 갖자 이들에게 서찰을 보내 양명학의 이단성과 불확실성을 경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문인들의 천주교 입교를 막는 한편, 천주교 교리의 이단성과 반사회성을 서찰로서 간곡히 설득, 이해시키려고 하였다. 《천학고 (天學考)》·《천학문답 (天學問答)》에서 그는 그의 주변을 위협하였던 천주교의 박해를 당연한 것으로 인식했다. 이는 남인
안정복
안정복 安鼎福 | |
조선국 중추원 통정대부 겸 첨지중추부사 | |
임기 | 1772년 2월 1일 ~ 1773년 3월 31일 |
---|---|
군주 | 조선 영조 이금 |
조선국 중추원 가선대부 겸 동지중추부사 | |
임기 | 1773년 3월 31일 ~ 1778년 9월 30일 |
군주 | 조선 영조 이금 조선 정조 이산 |
섭정 | 왕세손 이산 도승지 홍국영 |
신상정보 | |
출생일 | 1712년 |
출생지 | 조선 충청도 제천 |
사망일 | 1791년 7월 20일 (향년 80세)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덕곡리에서 노환으로 병사 |
본관 | 광주(廣州) |
학력 | 한학 수학 |
경력 | 문신, 정치인, 실학자, 성리학자, 철학자 |
정당 | 남인 후예 세력 |
자녀 | 아들 안경증 딸 안씨 부인(권일신의 부인) |
친인척 | 권일신(사위) |
별명 |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 |
종교 | 유교 |
안정복(安鼎福, 1712년 ~ 1791년 7월 20일)은 조선국 중추원 가선대부 겸 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낸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리학자, 작가, 역사가, 수필가이다. 본관은 경기도 광주(廣州)이며,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이다.
주요 이력[편집]
성호 이익(李瀷)의 문인으로서 스승의 문하에서 나온 뒤에도 계속 이익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의 지도를 받았다. 《성호사설》을 해석, 일부 수정한 《성호사설유선》을 편찬하였다. 여러가지 지식을 담은 《잡동산이 雜同散異》는 잡동사니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역사가이고 실학자이지만 성리학자이기도 하여 1767년(영조 43년)에는 왕명으로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어려운 구문을 해석, 번역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1775년 세손익위사 익찬으로 세손(정조)를 보도할 때는 퇴계이황과 율곡이이를 비교하는 질문에 이이는 스스로 자득하였고, 이황이 선현의 뜻을 계승하였으니 이황을 정통으로 본다고 평하기도 했다.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받았고, 정조 즉위 후 남인을 중용하였으나 스스로 관직을 사양하였다. 그 뒤 특명으로 광성군(廣成君)에 봉작되었다. 1790년 이후 천주교가 보급되면서 남인내에서도 천주교도가 퍼지자, 이를 경계하고 비판하였다. 《동사강목》과 계갑일록의 저자이자 발해사를 한국사 일부로 보았다. 사후 천주교 비판의 공로로 자헌대부 광성군(廣成君)에 추증되었다. 정조의 세손 시절 스승 중의 한 사람이다. 제천 태생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1712년 예조참의 안서우(安瑞雨)의 손자이고,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안극(安極)과 어머니는 효령대군의 후손 이익령(李益齡)의 딸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717년(숙종 43) 외할머니상을 당하여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전라남도 영광군 월산(月山)의 농장에 내려가 생활하다가 1719년 할아버지 안서우가 한성부에서 벼슬을 하게 됨에 따라, 남대문 밖 남정동(藍井洞)으로 귀경하였다.
그의 가계는 당시 세력을 잃은 남인으로 기호(畿湖) 간에 전전하면서 가난하게 생활하던 광주 안씨였다. 고조부 안시성(安時聖)은 현감을 지냈고, 증조부 안신행(安信行)은 종8품의 빙고별검(氷庫別檢)이었으며 할아버지 안서우의 대에 예조참의까지 역임했으나 경신대출척과 갑술옥사로 몰락하고 말았다. 아버지 안극은 종2품의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이르렀지만 이는 명예직이었다.
어머니 전주이씨는 학문적 소양이 있는 여성이었는데, 후일 안정복은 어머니 증 정부인(贈貞夫人) 이씨가 역사에 대한 식견이 깊었다는 회고를 남겼다.
유년기와 소년기[편집]
유년 시절에는 하급 관리이던 조부를 따라서 여러 곳에서 보냈고, 1726년(영조 2)부터 무주에 복거하던 그의 일가는 1735년 할아버지 안서우가 사망하자 1736년(영조 12) 25세 때 선영이 있는 광주군 경안면(慶安面) 덕곡리(德谷里)에 정착하였다. 그 뒤 중년 이후에는 경기도 광주 덕곡(德谷)에 정착하여 순암(順菴)이라는 서실을 짓고 일생을 마쳤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 암기력이 뛰어났는데 할아버지의 잦은 관직 이동과 아버지 안극의 입지에 따라 오랜 동안 정주지가 일정하지도 않은 환경이었다. 10세 때 ≪ 소학 ≫ 에 입문할 수 있었다. 그 뒤 일정한 스승이나 사문(師門)도 없이 학문을 시작했다. 그러나 경학(經學)은 물론, 역사·천문·지리·의약 등에 걸쳐 폭넓고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였다. 그러나 갑술환국과 1701년 장희빈의 옥사로 남인은 몰락하였으며, 청소년기 시절이던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남인 대다수가 중앙정계에서 숙청되었으므로, 그는 일찍이 관직을 단념하고 과거에는 단 한번도 응시하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았는데 이는 그의 활동에 제약을 주었다. 또한 관직 욕심이 없던 아버지 덕에 가세는 빈한하여 한때 종답(宗沓)을 팔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팔아버린 종답을 다시 사기 위해 노비와 함께 숯을 굽기까지 하였고, 결국 종중의 종답을 되찾게 된다.
학문연구와 저술, 연구 활동[편집]
실학, 성리학 수학[편집]
남인 성리학의 종통을 이은 인물이며 실학의 대가이기도 한 성호 이익을 찾아가 글과 학문을 배웠다. 이익은 실학자이면서도 성리학지식도 해박하였는데, 허목으로부터 이어지는 남인 학통의 종주로 평가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남인계 성리학을 수학한다. 이익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신후담, 윤동규 (尹東奎), 이병휴(李秉休) 등을 만나 교분을 쌓기도 했다.
안정복이 광주에 정착하게 된 것은 그의 학문에 한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다시 경세치용학파의 대종(大宗)인 성호 이익이 광주에 살고 있어서 안정복은 성호의 문하에 갈 수 있었고, 따라서 일생 동안 성호에게 사사하면서 그의 학풍을 계승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본래 주자의 학설을 신봉하면서 그것에 의한 실천궁행에 힘쓸 뿐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를 즐기지 않아 학문적 태도에 있어서 사제간에 대비를 보여준다. 그러나 사관 및 사론은 성호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전반적으로 계승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역사의 독자성에 입각한 역사 발전 주류의 계통화는 조선 역사의 체계적 파악 가능성을 높였다.[1]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하면서부터는 학문의 목표를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두고 이를 위해서 진력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현장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변복하고 민심의 동태를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광주 덕안에 순암(順菴)이라는 서실을 짓고 문하생들을 양성한다. 그러나 많이 양성하지 못했고, 이기양(李基讓), 이가환(李家煥), 황덕일 (黃德壹), 황덕길 (黃德吉) 등이 배출되었다. 그 중 이가환[2]과 권철신(權哲身)과 권일신 형제가 그의 문하에서 이름이 있었는데 권일신은 후에 그의 사위가 된다.
저술 활동[편집]
1737년 요,순,우 삼대 문화의 정통설을 기본으로 한 ≪치통도 治統圖≫ 를 저술하였고, 그해 사서 육경(四書六經)의 학문을 진리로 하는 ≪도통도 道統圖≫ 를 저술, 출간하였다. 1738년에는 ≪치현보 治縣譜≫ 를 저술했으며, 이어 향약인 ≪향사법 鄕社法≫ 을 지었다.
1740년 초기 학문적 완성인 ≪하학지남 下學持南≫ 상 · 하권을 저술하였다. 한편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해설한 ≪정전설 井田說≫ 을 내 놓았고, 1741년에는 주자의 사상을 모방한 ≪내범 內範≫ 을 짓기도 하였다. 1744년에는 유형원(柳馨遠)의 저서 ≪반계수록 磻溪隨錄≫ 을 입수하였다. 이는 유형원의 사상을 계승하는 학자들과 두루 교류하여 1775년에는 그들과 함께 유형원의 연보와 행장인 〈반계연보 磻溪年譜〉를 찬하였다.
동사강목 집필[편집]
그는 오랫동안 《동사강목》을 편찬하며 스승인 성호 이익의 지도와 감수를 받았다. 스승인 이익은 거침없이 조언하는 한편으로 청나라로 파견되는 사절단이 있으면 지인들을 통해 자료를 구하기도 했고, 주변의 지인과 측근, 다른 문인들을 통해서도 자료들을 입수하여 그에게 내주곤 하였다.
그는 가학(家學)을 기본으로 경사(經史) 이외에도 다양한 독서를 탐독하였는데, 음양(陰陽), 성력(星曆), 의약(醫藥), 복서 (卜筮), 무속 등에도 두루 지식이 있었고, 손자(孫子), 오자(吳子) 등의 병서, 한비자, 이사, 상앙 등의 법가, 불교, 노자(老子) 등의 노장 사상, 그리고 패승(稗乘), 소설 등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책을 탐독하였다. 그는 또 역학에도 조예가 깊어 사주나 관상도 더러 봐주었는데, 이 때문에 방술가(方術家)라는 비칭을 듣자 스승 이익(李瀷)으로부터 중단하라는 경고와 이름을 바꾸라는 조언을 듣기도 하였다.
《동사강목》 등을 저술하여 과거의 역사와 지리학을 비판하고, 신라 역사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강조했다. 또한 천주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여 당시 학자들이 천주교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경고하였다. 성호의 대표적 저서인 《성호사설》을 수정 가필 하고 요령 있게 정선한 《성호사설유선》이라는 대작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와 사료 연구, 후학 양성과 집필에 몰두하였다.
관료 생활[편집]
그는 이익의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연구를 계속했고, 후학 양성에도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구에 전력하였으므로 문하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뒤 계속 출사하라는 주변의 권고를 무시하던 중 1749년 결국 문음(門蔭)으로 출사하여 만령전참봉(萬寧殿參奉)에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다.
1750년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가 되고, 1752년에는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를 역임하였다. 1753년 사헌부감찰에 이르렀으나 부친의 사망과 건강 악화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그 동안 준비해온 저술들을 정리하여 1753년 퇴계 이황의 학문적 치적을 설명한 스승 이익의 저술인 ≪도동록 道東錄≫ 을 ≪이자수어 李子粹語≫ 로 개칭해 편집하였다. 1756년 향약인 〈이리동약 二里洞約〉 을 짓고, 1757년 향약을 바탕으로 ≪임관정요 臨官政要≫ 를 저술하였다. 이후 복직하여 사헌부감찰, 세자익위사익찬(世自翊衛司翊贊) 등을 역임하고 세자시강원에 배치되었다.
1767년에는 ≪열조통기 列朝通紀≫ 를 간행하였다. 세자시강원에 재직 중인 1767년(영조 43년)에는 왕명으로 이관(李灌)·한용화(韓用和)·박사형(朴師亨)·이겸진(李謙鎭)·심정진(沈定鎭)·임정주(任靖周) 등과 함께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장구(章句)를 정하고 의심스런 뜻을 해석하여 풀이하였다.
생애 후반[편집]
세손 사부와 지방관[편집]
1772년 세손익위사익찬(翊贊), 위솔(衛率)이 되어 세손(뒷날의 정조)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1775년 세손익위사 위솔로 세손(정조)를 보도할 때는 퇴계이황과 율곡이이를 비교하는 질문에 이이는 스스로 자득하였고, 이황이 선현의 뜻을 계승하였으니 이황을 정통으로 본다고 평하기도 했다.
율곡 이이(李珥)의 학설은 참신하기는 하지만 자득(自得)이 많고, 퇴계 이황(李滉)은 전현(前賢)의 학설을 존중해주는 근본이 있으므로 당연히 이황의 학설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해 65세 때에 외직인 목천현감(木川縣監)으로 나갔다. 3년 뒤 지방관의 임기를 마친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다시 부름을 받아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 의빈부도사(義貧府都事),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을 역임하였다. 그 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덕곡리에 선영이 있는 영장산(靈長山) 아래 여택재(麗澤齋)라는 청사(廳舍)를 지어 춘추로 제사를 지내고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 뒤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가 제수되었고, 이듬해 다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로 승진하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80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학문연구와 할 수신과 제가, 치인 등 선비로서 갖추어야 몸가짐을 게을리하지 않고 늘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천주교에 대한 공격[편집]
성리학이나 실학 외에도 도교와 노장 사상까지도 두루 수용하였다. 그러나 천주교만큼은 이단사상(異端思想)으로 간주하여 배척에 앞장섰다. 양반과 상민의 존재를 부정하고, 천당과 지옥이라고 하는 것을 들먹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인다는 것이 그가 천주교를 비난하는 이유였다. 천주교의 전파가 평민과 노비 외에도 사대부가의 여성들에게까지 전파되는 등 사회문제가 되자 그는 1785년(정조 9) 《천학고 天學考》와 《천학문답 天學問答》 을 저술하여 정조에게 바쳤다. 《천학고》와 《천학문답》에서 그는 천주교의 내세관(來世觀)이 지닌 현실부정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 비판하였다.
제자이면서 사돈인 권철신과 사위이자 권철신의 동생인 권일신(權日身)이 천주교에 호의를 보이자 이들에게 수많은 서찰을 보내 천주교에 빠지지 말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에게 천국과 지옥의 존재와 양반 상민의 계급을 부정하는 것은 곧 일체의 반질서적인 사상으로 간주되었다. 실학사상은 인정되지 않았으나 천주교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것만큼은 정주학으로 재무장한 노론 벽파 정권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만년[편집]
1776년 정조 즉위 후 남인을 중용하던 정책을 펴던 정조의 배려로 입궐하여 세상을 태평하게 하는 것은 경세에 있다고 한 뒤 물러났다. 이후 정조는 그에게 출사의 뜻을 전했으나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겠다며 모두 사양하였다. 1784년 정조의 명령으로 서용의 령이 내려졌고[3], 그 뒤 특별 명령으로 광성군(廣成君)에 봉작되었다.
그 뒤 천주교가 보급되면서 남인 내에 천주교 신봉자들이 나타나자 이를 경계하고, 비판하였다. 1790년 이후 천주교가 확산되자 사후 세계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혹세무민한다며 비판한다. 1791년 7월 20일 광주 덕곡 자택에서 조용히 사망하니 향년 80세였다.
저서로는 《순암집》, 《성호사설유선》, 《상헌수필》, 《홍범연의》, 《가례집해》, 《천학고》, 《천학문답》, 《희현록》, 소설 《여용국전》(女容國傳) 등이 있다.
사후[편집]
정조는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특별히 부의를 추가하고 사람을 보내 조문하였다.[4] 그는 천주교에 비판적이었던 까닭에 1791년의 윤지충, 권상연의 위패 소각 사건 때와 1801년 남인 천주교신봉자들을 처형할 때 화를 면했다.
1791년에는 이승훈의 사건에 연루되어 사위 권일신(權日身)이 공초를 받기도 했다.[5]
시골에서 올라올 때 동생이 중도에 마중 나와서 대략 홍낙안과 목만중 두 사람의 일을 알려주어 이로써 알았습니다만, 저와 저의 장인인 고 동지중추부사 안정복(安鼎福)이 서로 사이가 어긋났다는 말은 모두 시속의 부박한 자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천주문답(天主問答)》 한 가지 일로 말하더라도 장인이 분명히 이 책을 지었으나, 그와 더불어 강론할 때 입론(立論)이 준엄하지 못해 인심을 격려하고 경계시킬 수 없다고 말을 주고 받은 일이 있으니, 제가 이 학술을 위하지 않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제 자식이 외조부의 상을 당했을 때 장례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그때 마침 제가 중병에 걸려 사경(死境)에 처했기 때문에, 힘을 다해 구호하느라 다른 것을 돌볼 겨를이 없어 가서 참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초상 때에는 두 아들이 모두 가서 호상(護喪)하였고, 또 장사지낸 뒤에도 계속 왕래를 하였으니, 이로써 애초부터 서로 어긋난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5]
권일신은 이승훈에 관련되어 일곱 번의 공초, 형문을 당했다. 그 뒤 사형은 면하고 위리 안치(圍籬安置)된다. 그의 장례식에 사위 권일신(權日身)과 외손자들이 방문하지 않아 시중의 논란거리가 되었다.
1801년(순조 1년) 천주교 탄압에 앞장선 노론 벽파(僻派)로부터 천주교 비판의 공을 인정받고 자헌대부(資憲大夫) 광성군에 추증되었다.
저서 및 작품[편집]
저서[편집]
- 《순암집》, 《상헌수필》, 《홍범연의》, 《희현록》, 《하학지남 (下學指南)》,《임관정요 (臨官政要)》, 《잡동산이 (雜同散異》, 《성호사설유선 (星湖僿說類選)》 등
- 역사서 : 《동사강목 (東史綱目)》, 《열조통기 (列朝通紀)》, 《계갑일록 (癸甲日錄)》
- 예론서 : 《가례집해 (家禮集解)》
- 천주교 비판서 : 《천학고》, 《천학문답 (天學問答)》
소설[편집]
- 《여용국전》(女容國傳)
작품[편집]
- 반계유형원행장
가족 관계[편집]
사상, 학문적 치적[편집]
경종 1년(1721)에 학문의 길에 들어섰고, 35세 때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학문의 목표를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두고 이를 위해 진력하였다. 영조 25년(1749)에 만령전(萬寧殿) 참봉(參奉)에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내직으로는 감찰·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65세 때에 목천현감(木川縣監)을 지냈다. 그의 학문은 이익의 가르침을 받는 한편, 성호학파의 여러 학자들과 어울려서 경세치용의 구체적인 모색을 위한 사상적인 정립을 모색하여 갔다. 이러한 사상적 성과는 ≪순암선생문집(順庵先生文集)≫ 30권 15책을 비롯한 많은 저술로서 집대성되었다.
스승 이익의 문하를 나선 뒤에도 오래도록 이익의 가르침을 받는 한편, 성호학파(星湖學派)와 성호학파 이외의 남인실학자, 남인 성리학자들과도 두루 교류하고 어울리면서 토론하고 서신을 주고받는 등 학문적 교환을 하며 자신의 사상적 영역을 넓혀나갔으며, 교육, 학문연구 외에도 경세치용의 구체적인 모색을 위한 사상적 정립을 해나가게 된다. ≪하학지남≫ 은 주자의 ≪소학≫ 을 모방한 것으로 저술의 기본이념은 ‘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 ’ 이라고 밝히면서 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즉, 학행일치(學行一致)를 통해 조선 후기 양반사회의 공리공담의 이기논쟁을 직 · 간접으로 반박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순암선생문집(順庵先生文集)≫ 30권 15책 외에도 《하학지남 (下學指南)》,《임관정요 (臨官政要)》, 《가례집해 (家禮集解)》, 《잡동산이 (雜同散異》, 《성호사설유선 (星湖僿說類選)》, 역사서인 《동사강목 (東史綱目)》, 《열조통기 (列朝通紀)》, 《계갑일록 (癸甲日錄)》 등을 남겼다. 동사강목, 계갑일록 외에도 《잡동산이 (雜同散異》, 《성호사설유선 (星湖僿說類選)》 등도 안정복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책들로 간주된다.
기독교 비판[편집]
실학과 성리학 사이를 오가던 그는 천주교에 적대적이었다. 그는 천주교가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고, 성호학파나 그밖의 남인실학, 성리학자들 중 천주교를 신봉하는 자들에게 공격을 취하였다. 그에 의하면 현실에서의 삶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사후 세계를 말하며 사람들을 혹세무민한다는 것이다. 1785년의 《천학고 (天學考)》와 《천학문답 (天學問答)》의 저술은 천주교의 배척을 위한 논리적인 무장이었다. 그리고 이기양·권철신 등에게 양명학에도 깊은 관심을 갖자 이들에게 서찰을 보내 양명학의 이단성과 불확실성을 경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문인들의 천주교 입교를 막는 한편, 천주교 교리의 이단성과 반사회성을 서찰로서 간곡히 설득, 이해시키려고 하였다. 《천학고 (天學考)》·《천학문답 (天學問答)》에서 그는 그의 주변을 위협하였던 천주교의 박해를 당연한 것으로 인식했다. 이는 남인을 떠나 안정복과 같은 전통적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서학(西學)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저술이기도 하다.
성리학적 지식[편집]
그는 원시 유교와 주자학의 지식도 많이 알고 있었고, 해석, 번역에도 능하였다. 1767년(영조 43년)에는 세자시강원의 궁료로 있으면서 이관(李灌)·한용화·박사형·이겸진·심정진·임정주 등과 함께 영조의 명으로 《주자대전》과 《주자어류》를 받아 그 장구(章句)를 정하고 의심스런 뜻을 해석하며 그 언독(諺讀)을 기록하고 내용을 해석하는데 참여하였다.[6]
기타[편집]
그는 발해사를 최초로 한국의 역사로 보았다. 이러한 그의 경향은 유득공의 발해고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고구려-발해-고려만을 정통으로 보지 않고 신라 역시 정통으로 보는 등의 균형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저작 중 《잡동산이 雜同散異》는 훗날의 잡동사니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저서 중 《임관정요》는 후학인 정약용(丁若鏞)의 저서 《목민심서 (牧民心書)》의 저술에 영향을 주었다.
각주[편집]
- ↑ 다음 글로벌 세계대백과. 근대사회의 태동-문화의 새 기운
- ↑ 채제공 사후 남인붕당에서 재상감으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 ↑ 정조실록 18권, 정조 8년(1784 갑진 / 청 건륭(乾隆) 49년) 8월 2일(을유) 4번째기사 "상전에 대한 하교"
- ↑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1791 신해 / 청 건륭(乾隆) 56년) 7월 23일(병신) 2번째기사 "광성군 안정복에게 부의를 추가할 것을 명하다"
- ↑ 가나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1791 신해 / 청 건륭(乾隆) 56년) 11월 8일(기묘) 6번째기사 "이승훈을 삭직하고 권일신을 위리 안치시키도록 하다"
- ↑ 정조실록 46권, 정조 21년(1797 정사 / 청 가경(嘉慶) 2년) 5월 3일(임인) 5번째기사 "《주자대전》 등의 언독에 참여했던 이술원·한용화를 의망해들이게 하다"
안정복의 천주교 비판
이 사료는 조선 후기 학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시문집 『순암집(順菴集)』권17에 수록되어 있는 「천학문답(天學問答)」이다. 『순암집』은 27권 연보 합 15책의 목활자본으로 제자 황덕길(黃德吉, 1750~1827)이 편집하고 뒤에 안경위(安景褘)가 잡저의 편목을 수정했으며, 5세손 안종엽(安鍾曄)이 1900년(대한제국 광무 4년)에 간행하였다.
안정복은 남인 계열로 이익(李瀷, 1681~1763)을 스승으로 삼고 여러 학문을 섭렵했다. 그중 특히 경학과 사학에 뛰어났으며,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주자학적인 경학설에 따라 만사를 판단하면서도 경학(經學)은 경세적이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또 경학 해석에서는 이황(李滉, 1501~1570), 이익은 물론 주자(朱子, 1130~1200)의 해석까지 바로잡는 데 주저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이 있었다. 이익이 죽은 뒤부터 그는 자신이 이익의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동료와 후학들의 행동에 관심을 표방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정치권은 정적인 노론의 전권 시대로 접어들었고, 이익의 문인들 사이에서도 천주교의 만연과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전통적인 성리학적 가치관의 쇠퇴를 드러내면서 사상적 갈등을 보였다.
이에 그는 이단 사상의 배척을 표면화하고 이론적인 무장과 정치 참여를 통해 행동으로 실천하려 하였다. 1785년(정조 9년)의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의 저술은 천주교 배척을 위한 논리적인 무장이었다. 안정복은 이벽(李檗, 1754~1785)⋅권철신(權哲身, 1736~1801)⋅정약전(丁若銓, 1758~1816)⋅정약종(丁若鍾, 1760~1801) 등 당시의 남인 소장학자들이 유교의 정학을 하였으면서도 사학(邪學)인 서학서의 한역본을 가까이하여 사교에 빠져듦을 안타까이 여기고, 그들의 미혹을 깨우치고자 『천학고』와 함께 『천학문답』을 편술한다고 하였다.
총 31항에 걸쳐 문답 형식으로 천주학이 사학임을 주장하는 척사론을 전개하고 있다. 즉 천주교는 현실을 문제 삼지 않고 오로지 내세의 천당 지옥설을 믿어 사람을 황당한 지경에 빠뜨리린다고 하였다. 아침저녁으로 지옥의 고통을 면하고자 자기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함이 무당이나 불가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면서 천주교의 망발됨을 가려 배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한편 천학의 근본설인 당옥설, 현세론, 삼구설, 원조론, 야소 구속론, 영혼론 등에 대해 유교의 세계관⋅인생관에 입각해 일일이 논박하였다. 그리고 천학을 하는 자들이 조상 제사를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은 천주상을 걸어 놓고 기축(祈祝)하고 있음은 결국 천학이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학인 까닭이라고 결론지음과 동시에, 유학만이 정학임을 재삼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벽위사상(闢衛思想)은 그 뒤에 쏟아져 나오는 유가적 척사론의 배경으로 작용하였을 뿐 아니라, 천주교 박해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