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와 영성
목창균
서론
영성은 성장 산업(growth industry)의 하나로 취급될 만큼,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영성 훈련 및 세미나가 인기를 끌고 있으며, 기독교 출판사들은 영성에 관련된 원고가 아니면, 단행본으로 출판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심지어 영성이란 이름 아래 점술, 요가, 신비주의, 심리학, 과학적 픽션 등에 관한 책들이 출현하고 있다. 이제 영성에 대한 관심은 교단과 지역을 초월하여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반적 현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들어 영성의 의미가 재발견되고, 영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나게 된 것은 현대 사회, 즉 "대중적이며 도시 중심이요 기술 중심적인 사회에서 형성된 가치관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된다. 많은 사람들이 양적이며 물질적 기준 혹은 기능에 의해 삶을 평가하는 것에 회의적인 반면, 질적이며 정신적 가치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들은 무미 건조한 삶에 대한 반작용으로 종교적 경험을 갈망하게 된 것이다. 영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인식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체험의 갈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영성은 기독교 고유의 용어도, 기독교가 독점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용어도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사용하고 있는 초종교적 용어다. 불교의 영성, 힌두교의 영성, 이슬람교의 영성, 동양의 영성이 있다. 일반적 의미의 영성은 자기 훈련이나 수양을 통해 어떤 정신이나 삶을 본받으려는 인간적 노력, 인간의 자기 초월의 능력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의미를 규정하지도 않고, 사람마다 제 각기 편리한대로 영성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영성 개념에 대한 오해도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영성을 어떤 종교적 제한을 초월하여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종교나 학문간의 대화를 위해 필요하고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서 논의하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영성이다. 기독교 관점에서 영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영성이란 말은 항상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 형태가 다양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문자적으로 육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과 대비되는 내적, 정신적 본질을 뜻하지만, 시대와 정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경건, 기도, 금욕주의, 신비주의 등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어떤 종교 정신 혹은 어떤 인물의 사상이나 삶을 가리키기도 한다. 또한 신학의 한 분야, 즉 영성신학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성신학은 영성의 본질을 밝히며, 그 다양한 형태들을 묘사하고 분류하며 영적 성장의 원리와 방법을 설명하는 신학의 한 영역이다.
영성(spirituality)이란 말은 본래 로마 카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며, 18-19세기에 수덕신학(ascetical theology)과 신비신학(mystical theology) 또는 수덕적 영성과 신비적 영성으로 구분되었다. 따라서 수덕과 신비라는 두 별개의 초점을 가진 영성신학이 형성되었다. 수덕신학은 일상적인 기독교인의 영성 훈련에 대한 것이라면, 신비신학은 신비가들의 가르침을 다룬 것이다.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의 구분은 영성에 이르는 두 가지 접근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금욕주의라는 저차원의 길과 신비경험이라는 고차원의 길이다. 20세기에 이르러 이 두 학문이 통합되어 영성신학 혹은 영성이 되었다.
한편, 현대 복음주의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요, 복음주의의 밝은 미래를 위협하는 위험스런 요소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독특한 영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현대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영적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고 신비주의, 금욕주의, 세속주의와 같은 다른 전통으로부터 영성 추구 방법을 빌려오거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들은 영성에 대해 논하고는 있으나, 그들 자신의 영성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가 영성을 어떻게 이해해왔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고대와 중세교회, 특히 수도원운동과 신비주의운동에 대한 논의로부터 출발해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영성에 관한 본격적 관심은 수도원운동과 신비주의운동에서 시작되었으며, 기독교에서 영성이란 말은 전통적으로 수덕신학이나 신비신학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수도원운동과 신비주의운동을 중심으로 영성의 전통적 의미를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복음주의적 영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해명하고자 한다.
I. 수도원적 영성
신약성서에는 세상과의 분리와 세상 속에의 참여를 교훈하는 두 다른 경향이 있다. 전자는 자기 부정, 금욕적 삶, 이 세상보다 저 세상,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강조하며, 바울서신이 이를 대변한다. 후자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긍정적 태도, 창조 질서 내의 하나님의 활동, 행동하는 영성을 강조하며, 이를 대변하는 것이 마태복음, 특히 산상수훈이다. 이 중에서 세상과의 분리를 강조하는 부정적 영성은 수도원운동과 신비주의운동을 통해 고대 및 중세교회에 널리 확산되었다.
기독교의 영적 훈련 가운데 하나는 덕을 닦고 악을 피하는 것, 육체의 욕망을 제압하여 정결을 지키는 것이다. 이런 훈련들을 금욕 또는 수덕이라 부른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에 방해되는 장애물을 제거하거나 그 반대되는 것과 투쟁하는 것이다. 수덕신학은 기독교인의 훈련, 즉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목격하고자 사용하는 수단과 관련되어 있다. 금식, 규칙적 기도, 묵주 사용, 성경 읽기, 자선 행위 등이 그것이다.
초대 교회는 금욕 훈련을 중요시했으며, 교인 중에는 수덕사 또는 금욕주의자들이 많았다. 세상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분리하고, 육과 영, 현실과 내세를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세상을 부인하는 것이 초대 교회의 일반적 전통이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인간의 노력으로 세속적, 육적 상태와 행위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고대 교부들 역시 초대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세상과 영의 분리에 근거하여, 영성을 세상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서방신학의 기초를 세운 터툴리안은 그 자신 세상과 기독교 신앙은 서로 대립적이라는 것을 체험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세상과 분리해서 살라고 권했다. 특히 [순교자들에게], [스펙타클즈](Spectacles), [여인들의 복장] 등의 저서에서 이교 세계로부터의 분리를 강조하고, "세상에 있는 것보다 감옥에 있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한편, 터툴리안은 영성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할뿐만 아니라 영성을 성령의 은사로 간주한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과 헬라철학 사상 사이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양자 모두 영과 육을 대조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동일하다. 헬라 철인들은 육적이며 세속적 욕구에 따라 사는 삶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의 영에 이끌려 사는 삶을 추구했다. 그러나 터툴리안은 헬라 철인들이 인간의 영으로 이해한 것을 세상의 육체성과 동일시하였으며, 성령의 은사로서의 영성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취급했다. 영성은 세상 물론 자연적 인간의 영과도 다른 것이다.
동방 교회 최대의 신학자 오리겐은 후대 신학뿐만 아니라 동, 서방의 수도원 운동과 신비주의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헌신적 학문연구, 엄격한 생활방식, 성적 쾌락의 회피 등은 기독교 금욕주의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기독교인의 삶을 세 단계로 나눈다. 도덕적, 본성적, 관조적 단계다. 도덕적 단계는 행위, 본성적 단계는 지적이며 관찰 가능한 행위, 그리고 관조적 단계는 하나님과의 영적 합일에 관련된 것이다. 그는 영성 생활을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그의 사상은 영적 성장을 정화, 조명, 합일의 단계로 구분하는 후대 신학에 반영되었다. 그가 금욕적 생활방식과 육체적 순결을 권장한 것, 성경의 문자적 의미보다 영적 의미를 강조한 것, 영적인 것을 계발한 것 등은 초기 기독교 영성으로부터 수도원적 영성으로의 전환을 예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방교회의 영성의 특징은 묵상과 침묵이다. 특히 해치키아(hesychia), 즉 침묵은 홀로 거하기 위해 사막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 세상을 피하여 은거하는 것을 영성 훈련과 연관시키는 사상이다. 3세기 후반, 일부 금욕주의자들은 엄격한 금단을 통해 기독교적 완전을 이루려 했으며, 금욕과 고해의 표시로 은둔생활을 했다. 특히 그들은 세상을 완전히 피하여 마귀가 살고 있는 곳으로 여겼던 사막으로 들어가 영적 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의 훈련에는 침묵, 기도, 금식 및 복종 등이 포함되며, 훈련과정은 은둔, 정화, 변화로 이어진다. 한편, 사람들이 사막으로 그들을 찾아가 교훈을 받게 됨에 따라, 이들 사막교부들의 영성 이해가 고대 교회에 널리 수용되었다. 그들의 금욕생활 형태는 점진적으로 발전되었으며, 4세기에 출현한 수도원 제도와 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금욕생활을 위해 최초로 사막에 들어간 자 중 한 사람이 이집트의 안토니(Anthony, 250-353)였다. 그는 마을 근처에서 고립하여 살면서 자신을 연단하는 생활을 하다, 모든 소유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사막에 들어가 철저한 금욕훈련을 시작했다. 그의 훈련은 마귀 세력과 싸우는 것이었다. 그는 버려진 성채에 들어가 20년 동안 홀로 살면서 죽음의 권세를 극복하려 했다.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는 한편, 암송한 성경말씀을 묵상했다. 그의 생애는 자신을 연단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삶이었다. 이런 그의 개별적이며 은둔적 수도로부터 수도원 운동이 시작되었다.
공동체로서의 수도원운동 역시 이집트에서 파코미우스(Pachomius)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수도원을 세우고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최초로 수도원 규칙을 만들었다. 4세기에 수도원 운동은 로마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공동체적 수도원을 만든 가장 유력한 인물로는 가이사랴의 바실과 루니시아의 베네딕트 등이 있다. 바실은 두 개의 수도원 규율집을 저술했으며, 감사의 생활, 영적 은사, 순종의 중요성 등을 강조했다. 그는 영적 성장 혹은 성화의 전 과정을 아담의 타락으로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생각했다.
서방의 수도원 운동은 동방과 같은 형태로 발전된 것은 아니었다. 서방은 은둔적 형태보다 공동체적 수도원이 발전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서방의 기후 조건이 홀로 은둔생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동방의 수도원은 마을주민들이 사막에 들어가 금욕생활을 한데서 시작되었으나, 서방의 수도원은 감독들이나 유식한 엘리트 계층 기독교인들이 자신들과 성직자들을 위한 고상한 형태의 삶을 장려한 데서 시작되었다.
베네딕트는 이탈리아에서 베네딕트 수도회를 세웠으며, 그것은 지금도 가장 큰 가톨릭 종교 공동체이다. 그는 홀로 독거 생활을 한 후에, 상호토론과 충고를 주장하면서도 수도원장에게 많은 권위를 부여하는 수도원 조직법, [규율]을 만들었다. 그 기본적 영성 원리 중 하나는 기도와 육체적 노동을 결합한 것이다. 그 표어는 "노동은 기도다"이다. 수도사들은 매일 4시간씩 성경과 초대 기독교 작가들의 저서를 읽고 조용히 그리고 일을 하면서 그것을 묵상해야 했다. 육체 노동, 절도 있는 식사와 수면, 하루 일곱 차례의 기도는 오늘날까지 서방 수도사들의 기준이 되고 있으며, 수도사와 수녀들의 수도 서원에도 그의 영향이 반영되고 있다.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 전역에 수도원을 세우고 대단히 엄격한 금욕주의를 실시했다. 날마다 150편의 시편을 낭송하며, 개인적 죄 고백을 실천하며 특정의 죄에 대한 보속 행위가 정해져 있다는 것 등이다.
13세기에 탁발교단의 출현은 수도원 운동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탁발교단은 교회와 사회의 욕구를 충족시킬 목적으로 이루어진 교단이다. 그것은 한 수도원 안에 머물면서 공동 기도와 개인 기도를 하는 제한된 생활 대신, 우선적으로 세상에서의 봉사를 요구했다. 도미니크 수도회, 프란치스코 수도회, 갈멜회 등이 여기에 속하며, 토마스 아퀴나스,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 등이 탁발교단이 배출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한편, 이그나티우스 료욜라(1491-1556)가 세운 제수잇 교단은 새로운 형태의 수도원 운동이이다. 그것은 탁발교단들보다 더 사회봉사를 강조했다. 제수잇 회원들은 자기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는 것을 의무로 여겼다. 이그나티우스는 묵상을 지도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범으로 [영적 훈련]을 저술했다. 그것은 대단히 합리적이면서도,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감정에 호소한다. 예를 들어, 묵상자가 성경에 등장하는 광경을 재구성하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한다.
요약하면, 세상과 영을 분리시켰던 초대 교회 전통이 고대 교부들을 거쳐 사막교부들과 수도원운동을 통해 세상을 부인하거나 세상으로부터 은둔하는 영성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수도원적 영성이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영성이 되었다. 그것은 수도자가 그리스도의 정신을 이어받는 수덕 또는 완덕의 생활을 의미한다. 수도원적 영성은 기독교적 완전에 이르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의 도피, 성적 금욕 및 금욕주의와 더불어, 명상, 묵상, 기도, 성경 읽기, 노동 등 영적 실천의 종교생활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수도원 운동은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참회와 기도, 성경연구,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체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데 그 큰 의의가 있다. 또한 그것은 서방교회의 신비주의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초기 기독교의 수덕적이고 신비적 경향을 신비주의를 전달하기에 적합한 생활방식과 교리 전통으로 전환시켰다.
한편, 금욕주의가 기독교 영성의 일면인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와 피조물사이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극단적 금욕주의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무시하는 태도로 이어지며, 율법적 금욕주의는 개인의 공로를 중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시하기 쉽다.
II. 신비주의적 영성
신비주의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과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영성의 형태다. 신비신학은 기독교 신비가들의 교훈, 그들의 하나님 임재 경험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신비주의적 영성은 직접적 하나님 임재의 경험을 목표로 하며,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세계로부터 격리되는 경험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준비 과정으로는 금욕적 관습, 성례전 예식, 여러 형태의 기도 등이 있다.
고대 기독교는 신학을 항상 지성적 훈련 이상으로, 그리고 신학자는 성육신의 신비를 묵상하고 반성할 수 있는 경험의 소유자로 간주했다. 기독교인은 신비의 친교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알게 된 자를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삶의 일부가 신비주의였다. 또한 교부들은 지식과 영성 혹은 신비신학을 별개의 영역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이런 통찰이 6세기에 디오니시우스의 저술과 신플라톤적 요소와 융합하여 신비신학을 형성하게 되었다.
플라톤과 플라톤 전통이 기독교 신비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신플라톤주의(neo- platonism)의 창시자,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는 서양 신비주의에 근원을 간주되기도 한다. 그의 사상은 이원론을 배격하고 일원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로 대립된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존재물로 계급 구조를 이룬 하나의 거대한 존재 계열만이 실재한다. 이 존재 계열이 의존하는 것, 즉 존재의 근원이 일자(一者)다. 일자 아래 단계에 정신, 그 다음에 영혼이 위치한다. 모든 존재자는 더 높은 단계의 존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일자 자체와 연합하기를 열망한다. 인간 영혼의 임무는 육체의 속박을 견디며, 높은 단계로 상승하여 일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 영혼은 정화의 과정을 통해 정신의 단계로, 그리고 황홀경에 의해 일자와 연합하는 단계로 상승한다. 이 상승운동의 수단이 신비주의적 도취와 금욕주의적 윤리다. 플로티누스의 사상은 고대 동, 서방의 기독교 신비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세속적 교회에 대항하여 일어난 운동으로 자기와 세상에 대한 포기, 죄로부터의 정화, 초월적 경험을 강조하는 부정적 영성의 전통에 토대를 두고 있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어거스틴과 아레오파고 사람 디오니시우스와 더불어 시작된다.
어거스틴은 신학자요, 교회 지도자요, 설교가였으나, 기독교의 신비적 요소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의 신비사상은 고백록], [시편 설교집], [삼위일체론] 등의 저서에서 발견된다. 특히 [고백록]은 그의 내면 생활이 고백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개인적으로 육욕을 버리고 영혼이 상승하여 하나님을 보는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플로티누스가 제시한 상승 모델을 사용하여 영혼의 상승 단계를 설명한다. 육체적인 것으로부터의 분리, 영혼 내부에서의 진행, 그리고 신적 단계를 향한 상승이 그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플로티누스의 단순한 추종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기독교적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서방 기독교 신비주의에 공헌한 것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영혼이 상승하여 하나님을 보는 경험에 대한 설명이다. 둘째, 이 경험의 근거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본성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셋째, 이 경험을 위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한편, 디오니시우스는 500년경 시리아의 수도사로 사도행전 17:34에 언급된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시우스라는 이름으로 글 쓴 익명의 작가였다. 그는 흔히 슈도 디오니시우스(the pseudo-Dionysius) 또는 위 디오니시우스로 불리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천상의 계층구조](The Celestial Hierarchy), [교회의 계층 구조](The Eccliasstical Hierarchy), [신의 명칭들](The Divine Names), [신비신학](The Mystical Theology)등 4권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그것은 사도적 권위에 준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자신은 사변적 신비주의의 근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디오니시우스의 주요한 공적 중 하나는 영혼의 상승을 정화, 조명, 합일, 세 단계로 공식화한 것이다. 이 형식은 그 후 서방 신비주의의 표준이 되었다. 정화의 단계는 영혼을 정결케 하는 것을, 조명의 단계는 하나님의 빛이 영혼을 비추어주는 것을, 그리고 합일의 단계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말한다. 정화의 단계는 유한한 본성과 관련된 것으로부터 영혼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조명의 단계에 속하는 것이 관상이다. 그것은 창조의 계층 구조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능력이다. 합일은 신화와 동일한 것이다. 영혼은 에로스에 의해 하나님과 연합되고 신화(神化)된다.
디오니시우스의 신적 합일의 개념은 모든 관념과 지식을 초월하여 몰아적 상태에 이르는 것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의 신학의 특징은 무정념(apatheia), 즉 정욕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로 형용하거나 설명할 수 없으며, 이성적 추론으로 도달할 수도 없는 신비한 분이다. 인간의 관념들은 하나님에게 적합치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제한하고 멀리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려면 그것들을 마음에서 제거해 버려야 한다. 디오니시우스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는 긍정보다는 부정의 방식이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정념은 우리의 상상력과 감정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그려보려고 시도하는 긍정적 방법이며, 영성의 길을 처음 시작한 사람에게 유익하다. 무정념은 하나님에게 합당치 못한 모든 관념들을 제거하는 부정적 방법이다. 무지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며, 무지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 하나님과 합일에 접근하고 있는 사람은 무정념의 방법이 필요하며, 지적 능력을 완전히 부인하는 수동적 상태가 요구된다. 이 수동성은 인간적인 것이 하나님과 융합되는 사랑의 엑스타시(ecstasy)로 이어진다. 디오니시우스의 신학방법은 하나님과 합일을 위해 하나님에 대한 긍정적 논의와 부정적 논의를 결합하고, 마지막에는 긍정과 부정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 특징이다.
중세에는 기도와 묵상생활에 전념한 사람들을 흔히 신비가라 불렀으며, 신비주의는 두 흐름으로 나뉘게 되었다. 감정적 신비주의와 지적 신비주의다. 전자에 속한 대표적 인물이 버나드(St. Bernard)라면, 후자에 속한 대표적 인물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였다. 한편, 이 두 흐름을 통합한 인물이 루이스브렉이다. 특히 루이스브렉은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온 신비적 성장 단계를 활동적 생활, 내면생활, 관상생활로 수정했다. 그리고 각 단계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순서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에 다음 단계가 추가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기독교 신비주의와 신비적 경험은 단지 한 두 사람이나 운동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상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신과의 교제를 목표로 한다. 그것은 여러 성장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며, 세상을 피하여 순결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가능하다. 신비주의 운동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강조한 반면, 세상에서의 교회의 의미와 사명을 소홀히 한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금욕주의와 신비주의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영혼과 육체, 명상 혹은 내면적 삶과 일상생활을 이분법적으로 분리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영성을 인간 내면적인 것, 완전히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한편, 세상을 부인하거나 세상에서 도피하는 삶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훈련과 규칙들을 통해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실천을 강조한다. 따라서 영성은 수도사나 독신자, 종교적 엘리트에게만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다. 수도원 운동은 육체와 세상을 피하거나 부정하는 영성을 산출했다고 할 수 있다.
금욕주의와 신비주의는 완전히 서로 분리된 별개의 것도 서로 배타적도 아니다. 금욕적 훈련의 위대한 실천자들이 또한 위대한 신비가들이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은 그러하다. 자아 부정과 극기를 목표로 하는 수덕생활은 신비주의자들에게 신적 합일을 위한 예비 단계다. 신비주의자들이 흔히 영혼 상승의 첫 단계로 간주하는 정화의 단계는 세상의 염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금욕적 훈련을 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영성은 전통적으로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과 대조를 이루는 영적이며 신비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그것은 중세의 수도원적 경건, 금욕생활이나 개인의 내면적 신비체험 등을 포괄하는 인간의 영적 활동을 총칭하는 용어였다. 즉 그것은 일상생활과 구별되는 금욕주의나 신비주의를 의미했다. 수덕신학은 자아 부정이나 극기가, 그리고 신비신학은 신과의 합일, 혹은 교제를 통한 궁극적 자아실현이 목표였다. 따라서 그것은 수도사나 신비주의자 같은 특정인 또는 소수의 집단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III. 복음주의적 영성
기독교는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도원운동과 신비주의운동을 통해 풍부한 영적 자원을 마련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 교회가 마리아, 성자 및 유물숭배, 성체(聖體) 예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등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못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수도원 운동과 신비주의 운동의 영성 대부분을 상실하고 영적 생활이나 영성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하거나 논의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특히 복음주의자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영성을 가톨릭 교회적인 것으로 간주했으며, 가톨릭적 영성추구 방법은 복음주의에 심각한 해악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영성과 복음주의적 신앙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최근 몇십 년 복음주의 신학자들 역시 영성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제임스 패커(James Packer)는 "의학도들에게 생리학의 연구가 필요한 것처럼, 복음적 목회를 바라는 우리에게 영성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필요하다. 우리는 영성에 대한 연구 없이 참으로 목회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렌츠(Stanley Grenz)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복음주의 신학은 영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신학은 신자의 지적 신념의 변화뿐만 아니라 인격과 삶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맥그라스(Alister McGrath)는 복음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인의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룰 수 있는 복음주의적 영성을 개발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하였다.
복음주의는 성서 메시지로부터 유래한 신학체계인 동시에 신앙운동이다. 그것은 종교개혁, 청교도 운동, 경건주의, 부훙 운동을 그 역사적 유산으로 하고 있다. 복음주의적 영성은 성경과 복음주의 유산에서 발견되는 풍부한 자원에 근거하여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주의적 영성이란 무엇이며, 영성에 대한 복음주의적 접근방법은 무엇인가? 수도원적 영성과 신비주의적 영성과 비교하여, 복음주의적 영성을 정리해 보자.
1. 전인적 삶
영성은 영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로, 그리고 영을 육체와 독립된 것으로 간주한다면, 영성은 이 세상적인 것으로부터의 도피를 의미하게 된다. 영성을 신비적인 것과 금욕적인 것으로 이해한 가톨릭 전통적 견해가 이를 대변한다. 금욕주의나 신비주의는 영성을 인간 삶의 내면적 혹은 개인적 부분에 관련된 것으로 취급한다. 반면, 인간을 육체와 영혼의 통일체로 간주한다면, 영성은 인간의 삶 전체를 포괄하게 된다. 영성은 기독교인의 삶 일부가 아닌,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구성의 한 요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에, 그리고 인간의 활동 영역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 삶의 근본적 방향성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의 복음주의 학자들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거나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 영적인 것은 선하고 물질적인 것은 악하다는 견해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을 포함하는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은 영적인 것의 장애물이 아니다. 따라서 영성을 인간 존재나 삶의 일부가 아닌, 육체를 포함한 인간 전체에 관련된 것으로 취급한다. 영성은 완전히 영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도 물질 세계와 전적으로 단절되는 것도 아니다. 신령한 사람은 마음이나 영만이 아니라 전인적으로 초월적인 것, 거룩한 것 그리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뱅크스(Robert Banks)는 영성을 "하나님과 함께, 동료 기독교인 중에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의 성격과 성질"로 설명한다. 영성은 우리의 영이 분명히 "성령의 사역 속에 빠져드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영만 아니라 지성, 의지, 상상력, 감정, 몸과 관련된 것이다. 블로쉬(Donald Bloesch)는 영성을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삶의 스타일 또는 양태로 정의한다. 영성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하는 것이다.
라이스(Howard L. Rice)는 [개혁주의 영성]에서 영성을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 따라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양식"으로 정의한다. 영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의 모든 일에 중심이 되도록 살아가는 것"이다. 웨인라이트(Geofrrey Wainwright)는 영성을 기도와 삶의 결합으로 이해한다. 그것은“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하며 사는 것이다. 인간 심령이 성령에 의해 사로잡히고 유지되고 변화되는 것이다. 윌리암즈(Rowan Williams)는 영성을 인간 내부적인 것, 즉 영적이며 개인적 경험에 제한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것을 인간 경험의 모든 영역에 관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영성이 기독교인의 전인적 삶에 관련된 것이라는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 변화에 의해서도 반증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를 계기로 가톨릭 신앙을 재정립했으며, 영성을 기독교인들의 모든 삶을 포함하는 것으로 그 폭을 확대했다. 영성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이해하고 느끼며 깨닫고 결단을 내리는 완전한 삶"을 의미하며 영성신학은 "성숙한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필요한 온갖 노력과 더불어 신앙적인 체험과 이를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분야"다.
이상의 견해를 종합하면, 복음주의의 영성 이해는 전인적이며 통전적인 것이 특징이다. 영성은 인간 존재의 일부, 즉 영적 혹은 내면적 영역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에 관련된 것이다.
2. 인격적 관계성
영성은 흔히 지성, 도덕성 등과 나란히 하는 인간의 경건한 성품이나 품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영성은 인간의 성품에 대한 추상적 개념보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심원한 관계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가리킨다. 신령한 사람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영적 훈련과 실천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인간의 활동이 아닌,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강조하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기도한다는 표현보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표현을, 고해한다는 말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다는 말은 선호한다. 왜냐하면 전자는 인간의 활동에 초점이 있다면, 후자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초점이 있기 때문이다.
영성에 대한 현대적 이해의 특징은 영성을 관계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물론 인간,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이는 현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의 영성 이해에서 증거된다.
보이어(Louis Bouyer)는 프로테스탄트 교회 영성을 "복음서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인격과 신자의 개별적 인격 사이의 공존과 상호관계로부터 전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설명한다.
홈즈(U. T. Holmes)는 [목회와 영성]에서 영성을 총괄적이며 경험적인 면에서 정의한다. 영성은 인간의 관계성 형성능력, 즉 전인을 포함한 우주적 인간 능력을 말하며, 감각 현상을 초월하는 존재가 그 관계 대상이다. 그것은 고양된 의식으로서 인간주체에 의해 인식되며 역사적 상황 속에서 본질을 받고, 세계 속에서 창조적 행위를 통해 그 자신을 드러낸다. 홈즈는 영성을 하나님과 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으로 이해하고, 그것은 단지 인간의 내면적이거나 신비적 경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 역사 상황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사는 인간의 삶을 말한다.
홀트(Bradley P. Holt)는 [기독교 영성사]에서 성서적 영성의 특성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교회라는 공동체의 중요성, 세상에서 개인의 생활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관계와 통합하는 것 그리고 온갖 종류의 기도를 통해서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다라서 기독교 영성은 "심리학적 건강을 구하는 내성적(內省的) 추구 이상의 것"이며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연합하는 것"이다.
샤우척(Norman Schaawchuck)은 기독교 영성을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교제 가운데 경험하는 삶의 변화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영성이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교제며, 그것은 삶의 변화를 가져오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프랭크 신(Frank C. Senn)은 [프로테스탄트 영적 전통]에서 영성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성, 즉 그 관계성이 고려되고 표현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쉘드레이크(Philip Sheldrake)는 [영성과 신학]에서 영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내주를 통하여, 신자의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과의 의식적 관계에서 본 인간 삶의 전체"로 정의한다.
복음주의 신학자들 역시 영성을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면에서 이해한다. 휴스톤(James Houston)은 [복음주의 신학사전]에서 영성을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성의 상태"로 기술하고 있으며, 웨이크필드(Gordon Wakefield) 역시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복음주의는 일반적으로 영성을 기독교인의 전인적 삶과 하나님과의 관계성,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삶과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는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삶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의 삶이다.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의미한다. 이는 최근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는 현대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영성 정의에서도 발견된다.
그렌츠는 영성을 "성령의 지도 아래, 그러나 신자의 협력과 더불어 거룩함을 탐구하는 것,"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성령에게 순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맥그라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에 대한 고백에 우리의 마음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을 기독교 영성의 시금석을 간주한다. 따라서 영성은 신령한 사람과 관련된다. 그것은 신령한 사람을 만들고, 그에게 능력을 주며, 그를 성숙시키는 것이다. 그는 신령한 사람을 "세상 속에 살면서도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영적인 것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삶"으로 정의하고 있다.
오든(Thomas Oden)에 따르면, 신약 성경적 의미에서 영성은 도덕적 프로그램도, 일련의 규칙들도, 윤리적 성취의 단계도, 철학이나 웅변도, 개념이나 전략도, 명상의 이론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다. 영성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즉 성령의 능력을 통해 성육하시고 부활하신 주와의 관계성 안에서의 인격적 삶을 뜻한다.
복음주의적 영성의 기본 전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기독교인의 영성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며, 그의 삶과 정신을 따르는 것이 영성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와 사귐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복음주의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영성을 이해하는 것은 복음주의의 정체성과 조화를 이루는 접근방법으로 평가된다. 복음주의의 주요 특징은 회심주의, 성서주의, 활동주의, 십자가 중심주의로 요약된다. 특히 회심은 기독교적 삶의 시작에 절대 필요한 개인적 체험이요, 세상으로 향하던 삶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근본적 변화다. 복음주의가 개인적 회심의 필요성과 거룩한 삶에 대한 열망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기독교인의 삶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오늘의 상황과 현실 속에서 구현해 가는 기독자의 삶 전반을 의미한다.
3. 말씀과 은총
복음주의의 표준 가운데 하나는 종교개혁 신앙이다. 종교개혁의 표어, 오직, 성경,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의 원리가 복음주의 정체성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복음주의는 신자의 영적 성장과 성숙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은총을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복음주의적 영성은 거의 전적으로 성경에 의존한다.
한편, 복음주의는 수도원적 영성을 영적 실천과 같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 하나님에게 도달하려는 시도로 취급하며, 수덕신학과 신비주의 신학은 인간의 업적을 통한 구원론으로 오염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영성은 금욕적 훈련이나 신비적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 말씀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내려오는 신앙 전통이다.
루터는 금욕적 훈련과 신비주의 전통을 존중했다. 그는 수도원을 떠난 뒤에도, 금욕 훈련을 생활화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에서 영혼이 그리스도와 결혼한다는 신비적 상징을 중시하고, 인간의 수동성을 강조했다. 루터는 슈도 디오니시우스로부터 시작하여 엑크하르트로 이어지는 지적 신비주의 전통을 거부한 반면, 버나드, 보나벤추라(St. Bonaventura)로 이어지는 감성적 신비주의를 높게 평가했다. 쯔빙글리는 오직 말씀의 영성을 강조한 반면, 가톨릭 교회의 금욕적, 성례적, 신비적 관습들을 거부했다. 칼빈의 영성의 출발점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신비적 합일이었으나, 그 의미는 가톨릭 교회와 달랐다. 신비적 합일은 믿음에 의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요, 여러 성장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복음주의는 영성 훈련의 일반적 체계를 개발하거나 발전시키지 않았다. 그것은 훈련이나 발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초점을 두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성을 위한 일체의 수단이나 방법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적 영성 추구방법이 초래할 수 있는 심각한 해악, 즉 하나님의 은총보다 인간의 노력이나 공적을 중시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영성,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위해 다양한 수단들을 활용한다. 파커(David Parker)에 따르면, 복음주의적 영성 훈련은 큐티(QT), 친교, 봉사, 훈육으로 요약된다. 특히 큐티는 말씀 묵상과 개인 기도로 이루어진다. 복음주의는 신자의 영적 성장과 성숙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말씀에 대한 묵상을 강조한다. 말씀 묵상은 하나님의 은총에 이르는 통로와 같은 것이다. 한편, 기독교 삶의 성숙 조건 가운데 하나가 친교와 봉사다. 기독교인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세상으로 확대된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 자기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사는 것이 복음주의적 영성의 징표다. 운동하지 않는 사람은 육체적 힘을 유지할 수 없는 것처럼, 영적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 즉 주를 위해 활동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 힘을 유지할 수 없다. 영성이 깊은 사람은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는 사람이요, 봉사하는 기독교인이다.
결론
영성이란 말은 애매하고 모호하다. 그것은 항상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 않고,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영성에 대한 오해를 경계해야 하는 한편, 영성에 대한 개념 정리가 필요하다.
기독교적 영성은 역사적으로 수도원 운동과 신비주의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영성을 기독교인의 내면 생활, 즉 신비적인 것이나, 금욕적인 것 또는 영적인 것으로 이해했으며, 영적 훈련과 실천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가톨릭 전통적 영성 이해는 영성을 기독교인의 삶의 일부분으로, 기독교인의 본질이나 경건한 성품으로, 그리고 수도사나 신비가와 같은 소수의 집단에게만 개방된 것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내면적이며, 세상에 대해 부정적인 것이 특징이다.
현대 들어, 영성의 의미가 재발견되고 있다. 영성은 기독교인의 삶의 일 부분이 아닌,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된 것이다. 또한 기독교인의 본질이나 경건한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기독교인과 하나님, 이웃, 사회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의 핵심은 신자들의 경건한 성품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와 그리스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 교제를 개발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그의 삶을 닮아가는 삶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도피하는 삶이 아닌,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삶,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는 삶이다.
복음주의자들 역시 영성에 대한 현대적 이해와 맥을 같이한다. 복음주의는 영성을 기독교인과 하나님의 관계성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전인적 인간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그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실천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세상과의 분리와 세상 속의 참여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균형을 유지하는 것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즉 복음주의적 영성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저 세상적인 것도, 단지 개인적, 내면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로부터 삶의 현장으로, 그리고 이웃과 사회로 역동적으로 뻗어나가야 한다.
복음주의는 신학적 신념인 동시에, 영적 갱신과 부흥운동이다. 따라서 영적 풍요를 누려야 할 역사적 위치에 있다. 그럼에도 복음주의는 영적 활력을 상실하고, 영적 빈곤을 겪고 있다. 독특한 영성이 부족한 것이 복음주의의 위기라고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영적 활력을 회복하는 것이 복음주의가 당면한 긴급한 과제다. 복음주의는 성서는 물론, 종교개혁, 청교도 운동, 경건주의 및 부흥 운동을 비롯한 그 역사적 근원들로부터 영성에 대한 풍부한 자원들을 발견하여 특유의 영성을 개발해야 될 것이다.
한편, 복음주의는 가톨릭적 영성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취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하나는 가톨릭적 영성 추구방법이 복음주의 신앙에 심각한 해악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서 논의한 가톨릭적 영성의 문제점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가톨릭적 영성에 대한 공정한 평가다. 종교 개혁자들은 중세 가톨릭 교회가 성서적 진리를 왜곡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톨릭의 전통적 유업들 가운데 지속적 가치를 지닌 것들도 폐기했다. 종교적 질서, 퇴수, 묵상, 침묵 등에 대한 강조도 그에 속한다. 복음주의는 복음주의적 영성 실천들을 개발하는 과정을 통해 고대 교회의 유산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