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열 선생님의 <개발 없는 개발>은, 제가 평상시에 자주 참고하는 책입니다. 사실 식민지 시대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가장 균형 잡힌 분석이죠. 수탈과 자본주의적 개발이 병진됐다는 점도, 그 개발의 과실들이 일본 자본가와 극소수의 조선인 엘리트에게만 갔다는 것도 통계적으로, 정확히 밝혀낸 명작이죠. 허 선생님의 말씀이라면 제가 귀담아 듣는 편인데, 여기에서 몇 가지 중요한 요점이 있습니다:
- 서울대 학벌의 "맑스주의자"들은, 상당수가 그저 '힘'을 쫓아가는 기회주의적 성향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영훈 등이 1970년대에 맑시즘에 매료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만 해도 꽤나 커 보이는 중국, 쏘련의 현실적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1년에 쏘련은 없어지고 중국은 '전향'하니 그들도 유일하게 남은 '힘' (미국/일본)이 요구하는 방향대로 전향한 셈입니다. 그들이 정말 계급투쟁을 통해 맑시즘에 접근했다면 달랐을 것입니다. 쏘련이 있고 없고를 떠나 남한에서의 계급투쟁은 계속 치열하게 이루어지니까요. 그런데 그들의 맑시즘은 매우 관념적이고, 그 관념은 그들이 바랐던 "출세"의 방향과도 엮여 있었습니다. 혁명을 통해 출세할 가능성이 제로라는 사실이 입증되는 순간, 그들이 바로 반동 진영으로 넘어간 거죠. 혁명이든 반동이든 명문대 학벌을 땄으면 출세를 일단 해야 하니까요.
- 한국의 경제사학은 "마피아적" 구조입니다. 출세의 관문은 오로지 서울대이고 서울대의 해당 학과를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통제하고 있으니 학문 후속 세대들도 어쩔 수 없이 같은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몰리는" 것입니다. 지도 "교수님"에게 감히 반대할 수 없으니까요. 지도 "교수님"은 통계를 엉터리로 잡아도 안보는 척을 해야죠. 그러니 이영훈 등이 이렇게 겁없이 엉터리 통계를 내놓는 겁니다. 무슨 가당치 않은 소리를 해도 학문적 시장에서의 독점적 위치와 꼬봉들의 충성 (?)은 어차피 보장돼 있으니까요.
[경향신문] 이영훈 이사장의 낙성대경제연구소가 펴낸 책 <반일종족주의>가 논란이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구역질 나는 책”이라고 비난하자 저자 6명이 모욕죄로 고소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에 힘입어 <반일종족주의>는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르는 기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 책에 논란은 많지만 ‘학계’에서 정식으로 비평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언론도 분명하게 비평·보도하지 못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충남대 허수열 명예교수(69)는 식민지근대화론을 ‘학술적’으로 비판하는 몇 안 되는 학자다. 그러나 그는 언론 인터뷰를 꺼린다. 학회에서 논쟁은 하지만 언론에 직접 얼굴을 내밀기는 아마 처음일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와 이 이사장은 고교(경북고)·대학(서울대 경제학과) 동기동창이고 그 역시 식민지근대화론 창립자인 안병직 교수 제자이기 때문이다.
이영훈과 고교 대학 동기동창
-이영훈의 책 <반일종족주의>는 소설가 조정래의 <아리랑>에 대한 비난으로 시작된다. 뉴라이트 기관지 격인 <시대정신> 2007년 여름호에 만경평야가 일본인에게 수탈당하는 것으로 묘사한 <아리랑>은 ‘허구’라고 주장한다.
“이영훈의 글을 선입관을 빼고 읽어보면 틀림없이 ‘혹’한다. 그러나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두 거짓말이다. 나는 국가기록원에 있는 일제하 수리조합·토지 개량사업 자료 해제작업을 많이 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수리조합 설립신청서는 낙성대경제연구소도 보지 못한 자료다. 이 자료를 보면 만경강 북쪽 옥구·익산·군산은 1909년 이미 빈틈 없이 수리조합이 있고, 만경강 남쪽 동진강 호남평야도 수리조합이 설립신청서는 냈지만 허가 나지 않은 상태였다. 수리조합 설립을 신청했다는 것은 이미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다.”예약하기
-<아리랑>의 배경을 놓고 벌인 이른바 ‘벽골제 논쟁’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영훈은 벽골제가 바닷물 유입을 막는 방조제로 그 하류 <아리랑>의 주인공이 살던 지역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바다·갯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리조합 신청서에 첨부된 당시 ‘동진강 수리조합 구역도’를 보면 이 지역에 마을과 수로 표시가 있다. 갯벌에 수로 표시를 할 이유가 있을까.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1872년 지도에는 전북 김제군에 5개 장시(5일장)가 있는데 그 중 2개가 벽골재 하류에 있다. 갯벌 위에 5일장이 열릴 수 없다.”
-식민지근대화론의 핵심은 조선후기 산업의 핵심인 농업이 몰락했고, 이를 일본 기술과 자본이 일으켜 결국 근대화를 이룩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허 교수는 조선후기 농업 몰락을 수치로 반박했다.
“낙성대경제연구소 문건을 보면 ‘두락당 지대량의 장기 추세’ 그래프가 있다. 1685년부터 1945년까지 논 한 마지기에 지대를 얼마 받았느냐를 회귀분석을 통해 그래프로 그린 것이다. 지대가 떨어진 것을 생산량 하락으로 봤다. 그래프는 1910년 거의 바닥으로 농업이라는 산업기반이 무너진 것을 표시한다. 이 그래프에는 1685년 지대로 22말을 받았는데, 1935년에는 14말 받은 것으로 돼 있다. 1935년은 일제강점하 농업생산성이 가장 높았던 시기로, 1685년보다 토지생산성이 낮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조선 농업의 몰락 사실은 이영훈 교수의 학문적 근거이자 바탕이다. 이런 허술한 그래프가 이론적 바탕인 것이 놀랍다.
“이 그래프는 30여개 지주 장부를 근거로 회귀분석한 것인데 회귀분석에서 유의성과 사실은 별개다. 이 지주 장부도 일관성이 없고, 연도별로 드문드문 있다. 그 중 전라도 영암 남평 문씨 문중 논에 대한 지대장부만 이런 추세를 보이고, 나머지는 대체로 일정하다. 이 1개 장부가 전체 통계를 왜곡시킨 것이다. 한 개의 데이터가 매우 특이할 때 통계에서 그것을 제외해야 하는데 이영훈은 그리하지 않았다. 또 하나 문제는 조선후기로 들어와 소작제도가 변화하면서 지대를 받는 방법이 달라졌다. 그걸 감안하지 않고 장부상 수치만 보다 오류가 생겼다.”
사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실증적 연구와 수학을 동원한 수량경제학을 강조한다. 조선후기 농업을 전공한 이영훈을 비롯한 낙성대경제연구진이 전국 수리조합 창고를 뒤져 장부를 발굴해 쓴 <근대조선 수리조합 연구>는 조선후기·일제하 농업연구의 기반이 되는 연구서로 식민지근대화론의 이론적 바탕이 되는 책이다. 그런데 일제하 공업·노동을 전공한 허 교수가 이 책의 기반을 흔들었다. 2005년 <개발 없는 개발>이라는 책으로 식민지 시대 개발을 비판한 그는 2011년 <일제 초기 조선의 농업>이라는 책으로 아예 식민지근대화론자의 이론적 근거인 농업부문 허구를 폭로했다.
경제학자로서 치밀하게 수치로 반박
낙성대경제연구소(김낙년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370쪽)가 추계한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실질농업생산액은 빠르게 증가한 것으로 돼 있다. 이후 1930년까지 평탄한 수준을 유지하다 다시 1940년까지 급속히 상승한다. 그리고 1942년까지 평탄하게 유지되다 끝난다. 결국 1910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의 농업생산량이 급속히 성장한 것은 일본의 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허 교수는 이 통계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때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한 기간으로 생산량이 증가할 합리적 이유가 없고, 토지조사사업으로 경지면적을 정확히 파악한 결과일 것이라는 것이다. 허 교수는 “일제가 산미증식운동을 벌인 1930년대 이후 농업생산량이 비슷한 것도 오류”라고 말했다. 특히 이 그래프는 1942년 일제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급격히 악화한 경제를 반영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허 교수는 “1943년 이후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수준까지 떨어졌다”면서 “이것을 빼고 일제가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개발이 조선인 생활을 향상시켰다는 주장도 “일제의 하천개수사업은 철저히 일본인과 일본군을 위한 사업”이라고 말했다. 그는 농업생산량은 해방 후 급격히 늘었고, 한국 경제는 일본에 의해 성장한 건 아니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허 교수가 이렇게 치밀하게 수치로 반박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학자라서 가능했다. 숫자와 통계를 들이밀며 얘기하면 국사학계 학자들은 반박을 못한다. 허 교수는 “이영훈의 특징은 숫자를 들이밀며 얘기해 반박하기 어려운데, 문제는 그 숫자가 모두 엉터리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영훈 이사장과 고등학교 동기동창에 대학도 같은 과를 다녔으니 매우 친하다. 학회에서 치열하게 논쟁을 하다가도 점심 때 같이 웃으며 식사하는 사이다. 허 교수도 “이영훈은 학생운동을 하다 군대에 끌려간 운동권으로 나를 ‘의식화 교육의 대상’으로 삼았다”면서 “나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그들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뭐가 달라졌을까. 이영훈 이사장은 1970년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간 서울대생이며 대학생 시절 위장취업을 한 노동운동가다. 이 이사장은 학생운동으로 제적돼 군대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제대 후 겨우 복학했을 정도다.
사실 운동권에서 역사문제는 매우 치열한 ‘주제’였다. 특히 원시 공동사회-고대 노예제 사회-중세 봉건사회-산업혁명 이후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거쳐 공산주의로 가는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은 1930년대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 이후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마르크스 이론을 우리에게 맞추려면 조선에서 농업의 몰락과 자본주의 시작을 어디로 볼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경제사학자 중에 운동권·진보 성향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이사장 역시 백남운 이론에 심취하다 1980년대 17세기 조선의 노비 인구가 오히려 줄고 19세기 조선 농업이 몰락하는 것을 발견, 백남운 이론에서 탈피했다. 이 이사장의 스승인 안병직 교수 역시 진보적 학자로 일제강점기를 ‘식민지반봉건사회론’으로 설명했다. 이는 해방 후 미국 식민지로 이어져 80년대까지 운동권의 주요 이론이 됐다. 그러나 지금은 식민지근대화론의 ‘시조’로 평가받는다.
“학문의 세계도 정치판과 비슷”
식민지근대화론은 1980년대 중반 ‘사회 구성체 논쟁’ 때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진보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한말·일제침략하 자본주의 근대화론’ 논쟁이 일었다. 1922년 반식민지 민족해방 투쟁을 포기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혔다. 허 교수는 “1970~80년대 고도성장의 부작용이 드러나던 시기에 중국 사회주의가 평등사회 모델로 많이 언급됐다”면서 “그러나 1991년 사회주의 환상이 무너지자 운동권이 대거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옮겨갔다”고 말했다. 이것이 ‘뉴라이트’의 탄생이다. 그는 “극좌에서 중간까지만 갔으면 좋았는데, 극우로 간 것이 문제였다”면서 “비극은 거기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반일종족주의>를 쓴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일제 강제징용과 종군위안부의 정부 강제성이 없다고 주장한다.(연세대 류석춘 교수의 위안부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일제하 공업·자본·노동이 내 전공이다. 1930년대 주로 북한지역에서 공업화가 빠르게 이뤄지면서 노동수요가 증가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는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노동규제를 실시한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패배로 일본·조선 경제가 급속히 악화되면서 강제징용이 시작된다. 조선총독부는 알선이라 하지만 실제는 강제다.”
-일본이 계속 주장하고, 우리나라 학자상당수도 종군 위안부 모집에 정부의 강제성 문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정말 없는 것인가, 학자들이 찾지 못한 것인가.
“그런 문건을 조선총독부가 남겨 두겠는가. 8월 15일 일왕이 항복을 선언하고 9월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조선총독부는 계속 서류를 소각했다. 더 중요한 자료는 일본 방위성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개하지 않는다.”
-스스로 경제사학계의 ‘소수파’라고 했다. 식민지근대화론을 논박하는 교수들이 별로 없어 보인다. 혼자 고군분투하는 것 같다.
“학문의 세계가 합리적이고 논리적 질서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치판과 비슷하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신봉하는 교수 아래서 반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나. 경제사학을 전공해 밥먹고 살려면 서울대 이외에는 힘들다. 충남대의 내 밑에서 경제사학을 전공해 어느 대학 교수로 갈 수 있을까. 현실이 그렇다. 다수가 그러니 그냥 침묵하고, 나와 같이 엉덩이에 뿔난 사람만 소리치는 것이다.”
허 교수는 195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북고, 서울대 경제학과 70학번이다. 이영훈·김문수 전 경기지사 등과 동기동창으로 친하게 지냈다. 대학 때 이영훈만큼 운동권은 아니었다. 조교를 거쳐 안병직 교수로부터 1985년 박사학위도 받았다. 1978년부터 충남대에서 강의를 하면서 일본 교토대 초빙교수, 미국 하버드대 방문교수 등을 지내고 정년퇴직했다. 지금은 명예교수로 저술과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가만히 허 교수를 보고 있으면 ‘점잖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카메라 앞에서 기자의 뺨을 때린 친구 이 이사장과 180도 달라 보였다. 우정보다 진실이 더 중요했겠지만 그래도 친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원 기자가 임종국상 수상자이지 않았으면 인터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하기 전 2006년 임종국상 수상소감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그 수상소감에는 13척으로 330척과 맞선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의 말이 인용돼 있다. ‘一夫當逕 足懼千夫(일부당경 족구천부)’. ‘한 명의 병사가 길목을 막으니 족히 천 명의 사내가 두려워한다’는 의미다. 식민지근대화론이 횡행하는 지금 그의 심경을 정확히 대변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