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the Theological Straitjacket
신학적 구속복을 벗고: 기존 신학에 대한 비판적 견해
존 캅
존 캅
“기독교인의 생각을 교회 신학의 구속복으로 묶어두는 것은 심각한 실수다. 기독교인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봉사와 복음에 대한 깊은 도전과 관련해 생각해야 한다.”
1960년대는 많은 사람들에게 파열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흑인, 인디언, 남미인들로부터 미국 역사를 새로운 방식으로 읽는 걸 배웠다. 베트남전은 국제문제에서 미국이 해온 역할을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강요했다. 이것은 미국 백인인 내 정체성의 범위를 인정하도록 강요하고 이 정체성의 극단적 모호성을 인식하게 만드는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10년이 신학적으로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급진 신학과 신의 죽음이란 신학이 많은 이들에게 위협적이었던 반면, 시카고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나에게는 이 운동들이 내가 멀어지던 기독교 신앙의 공격적 형식으로 보였기에 훨씬 수월했다. 물론 나는 내 신앙의 형식 역시 도전 받는다는 걸 알았으나, 내가 느낀 중요한 영향은 신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이 맹렬하고 정당하게 공격받는 관념들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걸 명확히 해야 한다는 높은 책임감이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는 성숙했지만, 내면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1960년대 초반을 풍미한 신정통주의로부터 의심과 조롱을 받은 내 스타일의 신학은 결국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무슨 일이 생기다
내 만족감이 산산조각 나고 회심의 경험을 하게 된 건 1969년 여름이다. 대개의 회심이 그러하듯이 회고보다 당시에는 변화가 훨씬 극적으로 보였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고, 1970년대의 내 작업은 그것 때문에 달라졌다.
그때까지는 글로벌 사회에서의 수많은 불의와 그것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고통스럽게 의식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가들의 독립을 가능케 하는 글로벌 운동이 그들의 경제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고 여겼다. 선진국 입장에서는 세계 어디서든지 발전의 과정을 가속화하도록 관대하게 독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18살이던 내 아들 클리프는 일찍이 글로벌화의 문제에 대해 깊은 인식을 가졌고, 나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1969년 여름까지는 여전히 그가 제공한 새로운 자료를 과거의 세계관으로 동화시켰다.
그 해 여름, 나는 갑작스럽게 내가 당연시했던 사회 구조와 개발 패턴이 인류를 전 세계적인 자기파괴로 이끌고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됐다. 그때까지 나는 세계의 모든 악- 억압, 전쟁, 고문, 기아-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이를 해결할 시간이 있다고 여겼다. 그 여름에 나는 “진보”가 이뤄지는 바로 그 방식-산업화된 세계의 경제적 프로그램과 발전 정책-이 모두 지구에서 인간의 삶의 토대를 파괴하는 전체 과정의 부분임을 알았다. 인류 생존이란 이슈는 압도적으로 중요해서 내 우선순위를 즉시 재조정해야 한다고 느꼈다.
첫 번째 실천적 대응은 신학을 이 이슈와 연관시키기 위해 1970년 4월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에서 학술회의를 조직한 것이었다. 주제는 “생존의 신학”이었다. 내 책 은 그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논문을 그 무렵의 다른 연설들과 묶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문제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거기에 필요한 신학적 변화를 끌어내기에는 명백히 부족했다. 행동에 대한 제안도 필요했으나 적절한 제안을 찾지 못해 실망스러웠다.
많은 저자들은 실제의 변화가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고수한 반면, 세계가 재앙을 향해 가고 있다는 나의 견해를 공유한 소수의 저자들은 건설적인 제안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종말의 예언자, 그리고 우리 말을 듣는 사람들을 절망에 빠트리는 이들로 격하됐다. 만족과 절망, 둘 다 필요한 회개에는 도움이 못됐다.
우리가 희망적 미래를 그려야 한다는 건 그때도, 지금도 맞다. 어떤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열심히 공격했다. 그래서인지 그런 사람들은 충격적이리 만치 적다. 극소수의 외로운 경제학자들만이 성정사회에 대한 대안을 토론했다. 캘리포니아 그룹은 2000년에 이 주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신중한 계획을 내놓았다. 그리고 애리조나의 예견적 건축가는 도시생활을 염두에 두면서도 지구 자원을 검소하게 사용하는 건축적 생태학(아르콜로지)에 착수했다. 우리는 1972년 “파국에 대한 대안”이란 제목의 두 번째 학술회의를 열어 경제학자 허먼 데일리, 건축가 파올로 솔레리의 희망적 비전을 공유했다.
기본적 연속성
1969년 이후 나에게 찾아온 새로운 인식의 중요성과 관련해 내 마음의 변화를 일으킬 만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회심으로 인해 그 이전에 쓴 역사에 대한 원고는 90퍼센트 완성된 채 아직도 서가에 놓여있다. 나는 내 관심사를 나누기 위해 말하고 쓰고 학술회의에 참가했다.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은 글로벌 위기에 대한 감각을 커리큘럼과 공동체의 삶에 통합시키고자 노력해왔다. 몇 년간 나는 지츠오 모리카와와 함께 일하는 귀한 기회를 가졌는데, 그는 미국 침례교에서 글로벌 위기를 진지하고 현실적으로 수용한 “복음적 라이프 스타일”을 이끌었다. 지난 여름(????년) MIT에서 열린 ‘신앙, 과학, 그리고 미래’ 학술회의에도 참여했는데 그것은 공정하고 참여적이며 지속가능한 사회를 지향했다.
지금 돌아보면 내 회심은 갑작스럽지만 어떤 연속선상에 놓여있었다. 첫째 지구 생존문제로의 회심은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나를 단절시키지 않았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역사적인 신앙의 형태에 대해 더 비판적으로 보도록 만들었는데 기독교 교리가 이제 인간세계마저 파괴할 만큼 위협적인 자연세계에 대한 무감각에 기여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환경주의자들이 따르는 고대와 동양의 교리를 탐색하면서 나는 그것들이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과거에도 지금도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지만, 풍부하고 변형된 기독교는 우리의 위기를 통과하는데 최상의 길잡이라고 여겨진다.
두 번째로 대학원 시절 이후 나의 기독교 신앙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알프레드 노드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새로운 상황이 요구하는 감수성을 이미 갖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과거에 이해하지 못한 채 넘겼던 화이트헤드와 내 스승 찰스 하츠혼의 문장들이 내게로 다가왔다. 회심 이후 나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곳을 헤맬 필요 없이, 같은 근원으로 돌아감으로써 신선한 감흥을 느꼈다. 나는 전보다 더 화이트헤디언이 됐다.
통합적으로 생각하기
세 번째로 회심의 즉각적 반응이 많은 신학적, 철학적 질문을 한쪽으로 밀어놓은 채 글로벌 이슈에 집중했음에도, 나는 이슈와 토픽을 서로 분리시키는 게 지구적 고통의 깊은 원인이란 점을 바로 인식했다. 우리는 분과 사이의 장벽을 깨트리고 통합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가장 추상적인 생각은 제대로 이해되고 적용됐을 때 가장 견고하게 현실과 연관되며, 즉흥적으로 연관시키려는 노력은 종종 이익보다 손실이 많다.
이렇게 해서 회심 이전에 나의 관심을 지배했던 기획들은 다시 내게 맞는 것이 되었다. 지금 기독교 사상가들이 직면한 과제는 광범위하다고 확신한다. 기독교 신학자들의 많은 에너지가 기술적, 역사적, 방법론적 문제들에 투여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것들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몰두할 때 그 중요성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흑인과 여성,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인들이 지난 10년간 인간해방을 요구하고 진전시키는데 필요한 신학을 요구했다는 것이 기쁘다. 나는 어떤 형식의 해방신학과도 일체감을 느끼지 않으며, 그들이 “제도권”에서 다루는 기술적, 역사적, 방법론적 문제로부터 분리되는 한, 이런 신학들은 불완전함으로 고통 받는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형태의 신학만이 진정성과 활기를 갖는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미래의 희망적 이미지 없이는 지구의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없으며, 모든 집단이 자신들의 운명을 만든다는 그림 없이는 어떤 이미지도 희망적이지 않다. 우리가 다양한 그룹의 상충되는 목표를 넘어서 그들의 이해가 조화되는 세계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면, 공동의 투쟁에서 동지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 사이의 언쟁에 너무 많은 에너지가 낭비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희망적 이미지를 포착할 수 있을지 여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심지어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우리를 궁지에서 끌어내려면 사회적 목표뿐 아니라 모든 분야의 과학과 관련한 통합적 사고가 필요하다. 많은 과학 분야가 서로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분리된 작업에 맞는 새로운 모델을 요구한다. 너무 많은 경우에 과학은 연구자들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탈인간화로 이끈다. 그 결과 과학 종사자들은 그들의 기술과 발견을 너무나 기꺼이 지구적 억압을 강화하는데 사용한다. 양자물리학의 개선된 모델 혹은 양자와 중력 이론의 통일을 향한 추구는 흥미로운 이론적 발전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창조적 반응을 가로막는 무력한 파편화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인간 정신의 재형성의 한 단계여야 한다. 간단히 말해 기독교인은 데이비드 봄 같은 이론물리학자의 상상적 비전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도 찾기
기독교 사상을 과학과 연관시키는 것과 더불어 인류의 위대한 종교적 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의 도가 수많은 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도의 궁극성과 보편성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것이 내게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이며, 나의 책 는 이 문제를 다룬 시도다.
1960년대에는 다양한 도 가운데 궁극적 선택이었던 반면, 1970년대에는 그런 결정을 넘어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우리가 상속받은 편협한 기독교의 도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과 다른 도의 진리를 포함하는 방식 안에서 어떻게 변형될 수 있는지 알고 싶었고, “도”가 아닌 것에 이를 수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는 주로 대승불교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 전통의 위대한 사상가들과의 만남이 앞서 언급한 글로벌 위기와 함께 내 생각의 큰 변화를 이끌었다. 불교의 진리는 우리의 상속받은 신학을 비판적으로 보게 함으로써 두 번째 시각을 제공했으나, 그때까지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신앙과 우리 시대의 중요한 이슈에 응답하는 화이트헤드 철학의 지속적 유용함에 대한 확신을 확인시켜 주었다.
1970년대의 신학생은 누구나 급증하는 여성 사역과 그들이 제기한 신학적 이슈로부터 영향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상속된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도전은 글로벌 위기나 다른 종교적 도에 비해 더욱 근본적이었다. 나는 이 도전에 대해서는 다른 두 가지에 비해 관심을 덜 기울였는데, 부분적으로는 여성 신학자들이 이런 과제를 유능하게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으로부터의 반복적인 충격에 노출되지 않았더라면 내 정신이 1970년대에 어떻게 변했을지 말하기 어렵다. 조금씩 나는 우리의 전통이 언어보다 더 깊은 수준에서 얼마나 가부장적이며, 나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많이 남성적 편견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형성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변형된 기독교가 새로운 페미니스트 종교보다 우리를 잘 인도할 수 있으며,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남성적 편견을 극복하는데 유익하다고 결론지었다.
화이트헤드 철학의 결실에 대한 나의 확신은 기독교 사상에 직면한 과제가 어느 한 사람의 능력을 훨씬 넘어선다는 인식과 함께 심화되었다. 광범위한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데이비드 그리핀과 나는 과정사상연구소를 설립했다. 1973년 이래 연구소는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다. 연구소는 보다 포괄적인 사고를 위해 종교간, 문화간, 분과학문간의 상호반영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기독교 윤리학자, 신학자, 성경학자뿐만 아니라 불교도, 힌두교도, 중국철학자, 생물학자, 신경생리학자, 물리학자, 정치철학자, 페미니스트의 학술회의를 후원해왔다. 미학, 홀로코스트, 교육에 대한 학술회의도 계획하고 있다. 몇 가지 파생물도 있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사고방식은 특정인에 의해 연출될 수 없다.
기독교 사상을 교회 신학의 구속복에 가두는 것은 심각한 실수다. 기독교인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봉사와 복음에 대한 깊은 도전과 관련해 생각해야 한다. 물론 그런 생각이 “교회 신학”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그런 강조는 너무 제한적 방식으로 교회의 전통과 현재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은 교회, 특별히 자신들이 참여하는 종파와 개별교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는 교회가 글로벌 리더십의 기회를 갖는 시대에 교회의 병에 대해 우려해 왔다. 오늘날 미국 교회들은 활력과 헌신을 끌어내기 위해 우상숭배를 설교해야 한다. 즉 그들은 파편적 진리와 목표를 위해 전심전력을 요구한다.
어떤 교회들은 이를 거부한다. 그들은 더 넓은 진리에 열려있고 보다 포괄적 목표를 세운다. 그러나 이 교회들은 파편적 헌신 이상을 끌어내기 위해 신앙이 무엇인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 교회들의 경향-내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몇몇 가치 있는 목표를 제시하고 그것들을 진전시키기 위한 느슨한 프로그램과 전략을 고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교회들이 요구하는 기술과 자신들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들은 기독교 신앙과 모호한 관계에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완전이 헌신할 가치가 있는 일, 즉 모든 것에 관련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헌신이 필요하다. 교회는 이런 헌신을 불러일으킬 만한 비전과 이해가 부족하다. 많은 잘못은 기독교 신학자들이 우리 시대의 지적, 문화적 이슈를 적절히 다루지 못한데 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나의 관심은 보다 통일된 방식으로 생각하고 그런 맥락에서 기독교 교리의 의미와 씨름하는데 노력을 배가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관심은 또한 일상적인 교회 운영에 필요한 통합적 신앙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영성에 대해 말하고 썼으며, 신학과 목회적 돌봄에 대한 책도 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너무 방대해서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전문적 사역과 교회 운영에 대한 연구는 언어보다 깊은 수준에서 기독교의 통합성을 추구해야 할 긴급한 필요에 대한 새로운 감각의 표현이었다는 데 만족한다. 다른 이들의 리더십을 기대하지만, 나 자신의 기여도 희망한다.
생태 모델
나는 지난 10년간 호주 생물학자 찰스 버치와 행복하게 공동작업을 해온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선구적인 생물학자, 물리학자와 과정사상연구소의 협업은 시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자연의 정신”이란 책으로 나온 학술회의를 조직했다. 버치는 현재의 지배적 추세인 세계적 재앙에 대한 예리한 관심과 함께, 기독교 신앙과 화이트헤드 철학의 영향에 대해서도 나와 의견을 함께했다.
우리는 “생명의 해방: 세포에서 공동체까지”라는 가제의 공저를 완성했다. 우리는 철학자가 생태모델을 발전시키는 생물학자의 작업을 도울 수 있으며 그것이 과학적으로 유익한 동시에 윤리학과 사회정책에 절절한 지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우리는 또한 이 책이 기독교 신앙을 되살리는데 필요한 신에 대한 사고방식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너무 많은 분야를 다루는 것은 전문화의 시대에 위험한 일이지만,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보다 통합적 비전을 얻으려는 노력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도 그런 노력을 기울이기를 희망한다.
1960년대는 많은 사람들에게 파열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흑인, 인디언, 남미인들로부터 미국 역사를 새로운 방식으로 읽는 걸 배웠다. 베트남전은 국제문제에서 미국이 해온 역할을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강요했다. 이것은 미국 백인인 내 정체성의 범위를 인정하도록 강요하고 이 정체성의 극단적 모호성을 인식하게 만드는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10년이 신학적으로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급진 신학과 신의 죽음이란 신학이 많은 이들에게 위협적이었던 반면, 시카고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나에게는 이 운동들이 내가 멀어지던 기독교 신앙의 공격적 형식으로 보였기에 훨씬 수월했다. 물론 나는 내 신앙의 형식 역시 도전 받는다는 걸 알았으나, 내가 느낀 중요한 영향은 신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이 맹렬하고 정당하게 공격받는 관념들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걸 명확히 해야 한다는 높은 책임감이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는 성숙했지만, 내면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1960년대 초반을 풍미한 신정통주의로부터 의심과 조롱을 받은 내 스타일의 신학은 결국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무슨 일이 생기다
내 만족감이 산산조각 나고 회심의 경험을 하게 된 건 1969년 여름이다. 대개의 회심이 그러하듯이 회고보다 당시에는 변화가 훨씬 극적으로 보였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고, 1970년대의 내 작업은 그것 때문에 달라졌다.
그때까지는 글로벌 사회에서의 수많은 불의와 그것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고통스럽게 의식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가들의 독립을 가능케 하는 글로벌 운동이 그들의 경제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고 여겼다. 선진국 입장에서는 세계 어디서든지 발전의 과정을 가속화하도록 관대하게 독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18살이던 내 아들 클리프는 일찍이 글로벌화의 문제에 대해 깊은 인식을 가졌고, 나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1969년 여름까지는 여전히 그가 제공한 새로운 자료를 과거의 세계관으로 동화시켰다.
그 해 여름, 나는 갑작스럽게 내가 당연시했던 사회 구조와 개발 패턴이 인류를 전 세계적인 자기파괴로 이끌고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됐다. 그때까지 나는 세계의 모든 악- 억압, 전쟁, 고문, 기아-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이를 해결할 시간이 있다고 여겼다. 그 여름에 나는 “진보”가 이뤄지는 바로 그 방식-산업화된 세계의 경제적 프로그램과 발전 정책-이 모두 지구에서 인간의 삶의 토대를 파괴하는 전체 과정의 부분임을 알았다. 인류 생존이란 이슈는 압도적으로 중요해서 내 우선순위를 즉시 재조정해야 한다고 느꼈다.
첫 번째 실천적 대응은 신학을 이 이슈와 연관시키기 위해 1970년 4월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에서 학술회의를 조직한 것이었다. 주제는 “생존의 신학”이었다. 내 책 은 그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논문을 그 무렵의 다른 연설들과 묶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문제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거기에 필요한 신학적 변화를 끌어내기에는 명백히 부족했다. 행동에 대한 제안도 필요했으나 적절한 제안을 찾지 못해 실망스러웠다.
많은 저자들은 실제의 변화가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고수한 반면, 세계가 재앙을 향해 가고 있다는 나의 견해를 공유한 소수의 저자들은 건설적인 제안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종말의 예언자, 그리고 우리 말을 듣는 사람들을 절망에 빠트리는 이들로 격하됐다. 만족과 절망, 둘 다 필요한 회개에는 도움이 못됐다.
우리가 희망적 미래를 그려야 한다는 건 그때도, 지금도 맞다. 어떤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열심히 공격했다. 그래서인지 그런 사람들은 충격적이리 만치 적다. 극소수의 외로운 경제학자들만이 성정사회에 대한 대안을 토론했다. 캘리포니아 그룹은 2000년에 이 주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신중한 계획을 내놓았다. 그리고 애리조나의 예견적 건축가는 도시생활을 염두에 두면서도 지구 자원을 검소하게 사용하는 건축적 생태학(아르콜로지)에 착수했다. 우리는 1972년 “파국에 대한 대안”이란 제목의 두 번째 학술회의를 열어 경제학자 허먼 데일리, 건축가 파올로 솔레리의 희망적 비전을 공유했다.
기본적 연속성
1969년 이후 나에게 찾아온 새로운 인식의 중요성과 관련해 내 마음의 변화를 일으킬 만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회심으로 인해 그 이전에 쓴 역사에 대한 원고는 90퍼센트 완성된 채 아직도 서가에 놓여있다. 나는 내 관심사를 나누기 위해 말하고 쓰고 학술회의에 참가했다.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은 글로벌 위기에 대한 감각을 커리큘럼과 공동체의 삶에 통합시키고자 노력해왔다. 몇 년간 나는 지츠오 모리카와와 함께 일하는 귀한 기회를 가졌는데, 그는 미국 침례교에서 글로벌 위기를 진지하고 현실적으로 수용한 “복음적 라이프 스타일”을 이끌었다. 지난 여름(????년) MIT에서 열린 ‘신앙, 과학, 그리고 미래’ 학술회의에도 참여했는데 그것은 공정하고 참여적이며 지속가능한 사회를 지향했다.
지금 돌아보면 내 회심은 갑작스럽지만 어떤 연속선상에 놓여있었다. 첫째 지구 생존문제로의 회심은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나를 단절시키지 않았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역사적인 신앙의 형태에 대해 더 비판적으로 보도록 만들었는데 기독교 교리가 이제 인간세계마저 파괴할 만큼 위협적인 자연세계에 대한 무감각에 기여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환경주의자들이 따르는 고대와 동양의 교리를 탐색하면서 나는 그것들이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과거에도 지금도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지만, 풍부하고 변형된 기독교는 우리의 위기를 통과하는데 최상의 길잡이라고 여겨진다.
두 번째로 대학원 시절 이후 나의 기독교 신앙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알프레드 노드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새로운 상황이 요구하는 감수성을 이미 갖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과거에 이해하지 못한 채 넘겼던 화이트헤드와 내 스승 찰스 하츠혼의 문장들이 내게로 다가왔다. 회심 이후 나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곳을 헤맬 필요 없이, 같은 근원으로 돌아감으로써 신선한 감흥을 느꼈다. 나는 전보다 더 화이트헤디언이 됐다.
통합적으로 생각하기
세 번째로 회심의 즉각적 반응이 많은 신학적, 철학적 질문을 한쪽으로 밀어놓은 채 글로벌 이슈에 집중했음에도, 나는 이슈와 토픽을 서로 분리시키는 게 지구적 고통의 깊은 원인이란 점을 바로 인식했다. 우리는 분과 사이의 장벽을 깨트리고 통합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가장 추상적인 생각은 제대로 이해되고 적용됐을 때 가장 견고하게 현실과 연관되며, 즉흥적으로 연관시키려는 노력은 종종 이익보다 손실이 많다.
이렇게 해서 회심 이전에 나의 관심을 지배했던 기획들은 다시 내게 맞는 것이 되었다. 지금 기독교 사상가들이 직면한 과제는 광범위하다고 확신한다. 기독교 신학자들의 많은 에너지가 기술적, 역사적, 방법론적 문제들에 투여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것들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몰두할 때 그 중요성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흑인과 여성,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인들이 지난 10년간 인간해방을 요구하고 진전시키는데 필요한 신학을 요구했다는 것이 기쁘다. 나는 어떤 형식의 해방신학과도 일체감을 느끼지 않으며, 그들이 “제도권”에서 다루는 기술적, 역사적, 방법론적 문제로부터 분리되는 한, 이런 신학들은 불완전함으로 고통 받는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형태의 신학만이 진정성과 활기를 갖는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미래의 희망적 이미지 없이는 지구의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없으며, 모든 집단이 자신들의 운명을 만든다는 그림 없이는 어떤 이미지도 희망적이지 않다. 우리가 다양한 그룹의 상충되는 목표를 넘어서 그들의 이해가 조화되는 세계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면, 공동의 투쟁에서 동지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 사이의 언쟁에 너무 많은 에너지가 낭비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희망적 이미지를 포착할 수 있을지 여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심지어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우리를 궁지에서 끌어내려면 사회적 목표뿐 아니라 모든 분야의 과학과 관련한 통합적 사고가 필요하다. 많은 과학 분야가 서로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분리된 작업에 맞는 새로운 모델을 요구한다. 너무 많은 경우에 과학은 연구자들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탈인간화로 이끈다. 그 결과 과학 종사자들은 그들의 기술과 발견을 너무나 기꺼이 지구적 억압을 강화하는데 사용한다. 양자물리학의 개선된 모델 혹은 양자와 중력 이론의 통일을 향한 추구는 흥미로운 이론적 발전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창조적 반응을 가로막는 무력한 파편화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인간 정신의 재형성의 한 단계여야 한다. 간단히 말해 기독교인은 데이비드 봄 같은 이론물리학자의 상상적 비전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도 찾기
기독교 사상을 과학과 연관시키는 것과 더불어 인류의 위대한 종교적 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의 도가 수많은 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도의 궁극성과 보편성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것이 내게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이며, 나의 책 는 이 문제를 다룬 시도다.
1960년대에는 다양한 도 가운데 궁극적 선택이었던 반면, 1970년대에는 그런 결정을 넘어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우리가 상속받은 편협한 기독교의 도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과 다른 도의 진리를 포함하는 방식 안에서 어떻게 변형될 수 있는지 알고 싶었고, “도”가 아닌 것에 이를 수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는 주로 대승불교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 전통의 위대한 사상가들과의 만남이 앞서 언급한 글로벌 위기와 함께 내 생각의 큰 변화를 이끌었다. 불교의 진리는 우리의 상속받은 신학을 비판적으로 보게 함으로써 두 번째 시각을 제공했으나, 그때까지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신앙과 우리 시대의 중요한 이슈에 응답하는 화이트헤드 철학의 지속적 유용함에 대한 확신을 확인시켜 주었다.
1970년대의 신학생은 누구나 급증하는 여성 사역과 그들이 제기한 신학적 이슈로부터 영향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상속된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도전은 글로벌 위기나 다른 종교적 도에 비해 더욱 근본적이었다. 나는 이 도전에 대해서는 다른 두 가지에 비해 관심을 덜 기울였는데, 부분적으로는 여성 신학자들이 이런 과제를 유능하게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으로부터의 반복적인 충격에 노출되지 않았더라면 내 정신이 1970년대에 어떻게 변했을지 말하기 어렵다. 조금씩 나는 우리의 전통이 언어보다 더 깊은 수준에서 얼마나 가부장적이며, 나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많이 남성적 편견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형성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변형된 기독교가 새로운 페미니스트 종교보다 우리를 잘 인도할 수 있으며,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남성적 편견을 극복하는데 유익하다고 결론지었다.
화이트헤드 철학의 결실에 대한 나의 확신은 기독교 사상에 직면한 과제가 어느 한 사람의 능력을 훨씬 넘어선다는 인식과 함께 심화되었다. 광범위한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데이비드 그리핀과 나는 과정사상연구소를 설립했다. 1973년 이래 연구소는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다. 연구소는 보다 포괄적인 사고를 위해 종교간, 문화간, 분과학문간의 상호반영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기독교 윤리학자, 신학자, 성경학자뿐만 아니라 불교도, 힌두교도, 중국철학자, 생물학자, 신경생리학자, 물리학자, 정치철학자, 페미니스트의 학술회의를 후원해왔다. 미학, 홀로코스트, 교육에 대한 학술회의도 계획하고 있다. 몇 가지 파생물도 있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사고방식은 특정인에 의해 연출될 수 없다.
기독교 사상을 교회 신학의 구속복에 가두는 것은 심각한 실수다. 기독교인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봉사와 복음에 대한 깊은 도전과 관련해 생각해야 한다. 물론 그런 생각이 “교회 신학”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그런 강조는 너무 제한적 방식으로 교회의 전통과 현재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은 교회, 특별히 자신들이 참여하는 종파와 개별교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는 교회가 글로벌 리더십의 기회를 갖는 시대에 교회의 병에 대해 우려해 왔다. 오늘날 미국 교회들은 활력과 헌신을 끌어내기 위해 우상숭배를 설교해야 한다. 즉 그들은 파편적 진리와 목표를 위해 전심전력을 요구한다.
어떤 교회들은 이를 거부한다. 그들은 더 넓은 진리에 열려있고 보다 포괄적 목표를 세운다. 그러나 이 교회들은 파편적 헌신 이상을 끌어내기 위해 신앙이 무엇인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 교회들의 경향-내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몇몇 가치 있는 목표를 제시하고 그것들을 진전시키기 위한 느슨한 프로그램과 전략을 고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교회들이 요구하는 기술과 자신들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들은 기독교 신앙과 모호한 관계에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완전이 헌신할 가치가 있는 일, 즉 모든 것에 관련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헌신이 필요하다. 교회는 이런 헌신을 불러일으킬 만한 비전과 이해가 부족하다. 많은 잘못은 기독교 신학자들이 우리 시대의 지적, 문화적 이슈를 적절히 다루지 못한데 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나의 관심은 보다 통일된 방식으로 생각하고 그런 맥락에서 기독교 교리의 의미와 씨름하는데 노력을 배가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관심은 또한 일상적인 교회 운영에 필요한 통합적 신앙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영성에 대해 말하고 썼으며, 신학과 목회적 돌봄에 대한 책도 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너무 방대해서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전문적 사역과 교회 운영에 대한 연구는 언어보다 깊은 수준에서 기독교의 통합성을 추구해야 할 긴급한 필요에 대한 새로운 감각의 표현이었다는 데 만족한다. 다른 이들의 리더십을 기대하지만, 나 자신의 기여도 희망한다.
생태 모델
나는 지난 10년간 호주 생물학자 찰스 버치와 행복하게 공동작업을 해온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선구적인 생물학자, 물리학자와 과정사상연구소의 협업은 시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자연의 정신”이란 책으로 나온 학술회의를 조직했다. 버치는 현재의 지배적 추세인 세계적 재앙에 대한 예리한 관심과 함께, 기독교 신앙과 화이트헤드 철학의 영향에 대해서도 나와 의견을 함께했다.
우리는 “생명의 해방: 세포에서 공동체까지”라는 가제의 공저를 완성했다. 우리는 철학자가 생태모델을 발전시키는 생물학자의 작업을 도울 수 있으며 그것이 과학적으로 유익한 동시에 윤리학과 사회정책에 절절한 지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우리는 또한 이 책이 기독교 신앙을 되살리는데 필요한 신에 대한 사고방식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너무 많은 분야를 다루는 것은 전문화의 시대에 위험한 일이지만,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보다 통합적 비전을 얻으려는 노력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도 그런 노력을 기울이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