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3

- 3.1운동 정신의 통합학문적 이해와 기독교 신앙의 미래 3

'3.1운동백주년종교개혁연대'가 결성되어 지난 12월까지 5개 종교그룹(천주교, 불교, 유교, 천도교, 개신교)이 진행시켜온 종교개혁 포럼의 기독교측 발제이다. 세번째 연재글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개혁과 독립을 위해서 3.1운동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우리 시대의 독립은 무엇이고, 그것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과 어떻게 연관되지는지를 묻고자 한다. 2019년 한반도 독립선언서와 함께 포럼의 결과물들이 곧 한 권의 책으로 묶여져 나올 것이다.

에큐메니안 모바일 사이트, 기독교(개신교) 3.1운동 정신의 세 가지 (1)


기독교(개신교) 3.1운동 정신의 세 가지 (1)

기사승인 2019.01.26 22:09:26


- 3.1운동 정신의 통합학문적 이해와 기독교 신앙의 미래 3


이제까지 본 것처럼 3.1운동은 대한민국이 당시 일제의 무단정치로 인해서 더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빠져있던 중 의지할 곳이 종교밖에 없다는 상황에서 여러 종교 그룹들의 협력과 하나 됨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1920년 3.1운동 직후 ‘광복사’가 아닌 ‘독립운동사’를 쓰게 되었다고 통탄해하는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3.1운동이 일어나기까지의 일본의 압제와 만행, 그들이 말과 신의를 어긴 것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낱낱이 밝힌다.

사망자가 30여만 명이나 있었다는 ‘동학당’ 이야기, 명성황후 시해의 잔혹성과 무법성, 을사늑약을 맺을 때의 무력과 공포 분위기,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맺게 하며 군대 해산 때 저항하는 군인들을 수백 명 살해한 이야기, 이후 더욱 가열 차게 일어난 전국의 의병들을 무참히 진압한 일, 초대총독과 경무총감은 “사람 죽이기를 즐겼다”는 지적과 함께 이들이 안창호에 의해서 발기된 신민회(新民會)를 독립운동 하는 곳이라 하여 120여 명을 잡아들여 “다섯 가지 고문 방법과 구타로 반죽음에 이르고 거의 목숨이 끊어지게” 될 정도로 횡포를 부린 이야기, 이어진 총독의 “탐욕 포악한 행정”은 “5천 년 문화의 나라를 토번 미개의 땅으로 인정하고, 통치방법을 모두 대만에 시행하던 것으로 시행”했다고 하면서 그들이 중일·노일의 두 전쟁을 치러서 국채가 이미 십수 억에 달해 “한국에 대한 시설의 부담은 실로 곤란한 일이었다”고 밝힌다.

그래서 행정기관을 감축하고 한인들을 내i고 일본 관리들로만 채우고, 그 관리의 봉급액은 한인 관리보다 3배 이상이 많았고, 헌병과 경찰을 모두 법률 지식이 모자라는 자들로 세워 함부로 사법재판을 행해서 인민에게 끼치는 해독이 그보다 더할 수 없었다고 한다. 총독부는 한국인 교육령을 발표하여 전통 교육기관은 다 없애버리고 한국에는 대학을 두지 않았으며, 각국의 혁명사, 독립사, 위인역사는 모두 엄하게 금지하였고, 소위 ‘수신’ 교과서는 순전히 일문(日文)으로 만들어서 일본인 교사가 가르쳤기 때문에 한국인 아동들은 절대로 그 조상의 위업이나 선행을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종족의 계통에 대해서도 감히 거짓말로 속여 우리 민족의 시조가 저희들 시종의 아우”라 일컬었고, 이러한 일에 대해서 박은식은 “우리나라의 부녀․아동들도 냉소하여 마지않는다”라고 지적했다. 심지어 일제는 수학교육에도 차별을 두어서 대수학의 인수분해 이상과 입체기하학, 삼각법은 한국인들에게 가르치지 못하게 했고, 체육교육에는 더욱 제한이 많아서 일본인은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에 매주 세 시간의 체조가 있었지만, 한국인에게는 고등보통학교에 국한해서 약간의 유연체조가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1)

이상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차별과 억압 앞에서 종교인들이 주축이 되어서 3.1운동이 일어났고, 그 중에서도 당시 2천만 인구 중 1-1.5% 정도의 신도수(20-30만)에 불과했던 개신교가 그 한 주축을 담당했다. 그때 또 다른 축을 이루었던 천도교는 교인 수 3백만을 헤아리는 핵심 종교 그룹이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개신교는 1885년 일본을 거쳐 한국에 입국한 두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6-1902)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1세기 오늘의 한국 개신교와 비교해 보면 참으로 미약하고 겨우 신생 종교의 위치를 막 벗어난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당시의 개신교가 그러한 일을 담당할 수 있었는지, 그 신앙적 신념과 이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보다 주의 깊게 살펴보고자 한다. 바로 오늘 한국 사회와 개신교가 처한 어려운 상황을 해쳐나가고 새롭게 변할 수 있는 근거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1. 민족을 껴안은 3.1운동 개신교

‘종교민족주의”라는 말로 한국 대종교(大倧敎)에 대해서 연구한 논문이 있는데,(2) 나는 이 말을 좋게 생각했고, 그것을 3.1운동을 추동했던 당시의 한국 개신교에 대해서도 함께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함석헌은 자신에게 있어서 버리지 못하는 것이 셋이 있는데 그것이란 ‘민족’과 ‘신앙’ 그리고 ‘과학’이라고 밝혔다.(3) 그러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도 “내겐 3.1운동이 없으면 오늘은 없다”라고 하면서 3.1운동이 자신의 삶에서 어떻게 “큰 돌아서는 점”이 되어서 당시 다니고 있던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그만두고 민족사학 오산학교로 오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삶이 진행되었는지를 밝힌다.(4)

▲ 3.1운동 민족대표 기념 사진 ⓒGetty Image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도 “한국에 기독교가 빨리 번져나간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으나, 그 중에서 잊을 수 없는 하나는 그것이 민족주의를 타고 왔다는 사실”이라고 진술했고,(5) 그렇게 당시 한국인들은 함석헌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된 것이 일본의 압박을 물리치고 나라를 독립시키려면 서양 선진 강국들이 믿는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학자 이만열 교수는 3.1운동과 기독교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 기독교가 거기서 아무리 주동세력으로 역할을 했다 하더라도 3.1운동은 “교회운동이라기보다는 민족운동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때 거기서의 기독교계와 기독인의 위상을 바르게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6) 즉 그에 따르면 3.1운동이 마치 기독교 세력에 의해서 수행된 것처럼 여기는 폐쇄적인 기독교 중심적인 시각이나 그 반대로 기독교회가 교단적으로 크게 참석하지 않고 단지 몇몇 개별적 참여만 있었다고 한정시키는 것은 두 가지 모두 잘못된 왜곡이라는 것이다.

당시 일제는 대종교 다음으로 기독교를 미워했는데, 왜냐하면 ‘예수교회’가 서양문명을 수입해 와서 한국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사조를 북돋우게 하고, 신도들은 정세에 밝고 애국심이 강하며, 특히 서양 선교사들과 함께 하면서 자신들의 학정이 서양인들에게 잘 관찰되고 비판받게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7) 그리하여 기독교를 “배일파”(排日派)라고 지적하며 온갖 방식으로 기독교의 종교 활동과 사립학교 활동들을 방해했다고 한다.(8)

이러한 정황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한국 개신교는 그 출발에서부터 민족의 처지와 더불어 씨름하는 일을 핵심으로 삼았다. 1885년 두 미국선교사의 입국에 이어서 1888년 한국에 도착한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게일(James S. Gale, 1863-1937)은 1909년 『전환기의 한국 Korea in Transion』이라는 한국 입문서를 쓰면서 “한때 무식한 섬나라의 야만인들이라고 생각했던 일본인들” 수중에 나라가 떨어지고, 황제가 축출되고 왕비도 무참히 살해되는 것 등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하늘을 쳐다보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9)

또한 한국인들은 기독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라든가 “神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라고 응답했지만,(10) 그러면서도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하늘(天)을 직접적인 ‘부모’(아버지)와 ‘당신’, ‘구세주’ 등의 구체적인 개별성의 인격으로 만나면서 한국인의 자주와 독립, 평등 의식이 크게 신장된 것을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이 그대로 3.1운동을 촉발시킨 영적 근거가 될 수 있었음을 말하는 근거이다.

북한의 평양에도 1893년 장대현(章臺峴)교회와 남산현(南山峴) 교회가 시작되면서 특히 6-7만이었던 평양 인구가 청일전쟁(1894-1895)으로 1만 5천으로 줄 정도로 비참했던 상황에서 고통 속의 민중들과 함께 했던 기독교 교회에 대한 주민들의 생각이 긍정적으로 변하여(11)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도 일어났고, 이승훈(李承薰, 1864-1930), 길선주(吉善宙, 1869-1935), 손정도(孫貞道, 1872-1931), 안창호(安昌浩, 1878-1938), 김마리아(金瑪利亞, 1891-1944) 등 수많은 기독교 독립운동 사상가들을 배출한 것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러시아 혁명,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천명 등 ‘세계개조’의 새로운 국제질서가 전개될 것을 감지한 기독인들과 천교도인들은 비슷한 시기에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기독교 측에서는 이승훈을 중심으로 주로 장로교 계의 서북지역 그룹과 감리교 목회자 박희도(朴熙道, 1889-1951)를 중심으로 서울지역에서 움직임이 있었고, 이승훈이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을 통해서 천도교 측과 연결되어서 손병희 선생이 제시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을 받아들여 단일화한 것이다.

이들은 “불교 단과 유교 측의 참가 없이는 완전한 민족적 통일체라 볼 수 없”다고 생각하여 다시 최린(崔麟, 1878-1958)이 불교 측의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을 접촉해서 함께 하게 되었고, 유교 측은 “전래조직이 분명치 못하였고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인물이 없는 바는 아니나” 촉박한 시기와 보안상 이유로 더 넓히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12) 또한 운동 날짜의 선택과 “三․一운동”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독살당했다고 회자되는 고종 황제의 국장을 앞둔 날이기도 하지만 ‘三․一’이라는 말이 “삼위일체의 철학적 용어”이고, “삼교단이 일체가 되어서 일으킨 운동”이라는 의미도 되며, “영토, 인민, 주권의 삼요건으로서 일국가(一國家)가 형성된다는 의미”가 되므로 3월 1일에서 그냥 ‘三一’을 가져와서 거기에 ‘운동’을 붙여서 부르기로 해서 “三․一운동”이 되었다고 설명한다.(13) 날짜가 그렇게 정해지고 그와 같은 이름으로 불린 것이 큰 민족적 뜻이 있다는 것이다.

▲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Getty Image


“조선민족대표” 33인 중에서 16명이 기독인이었고, 그 외 비서명자 핵심인사 48인 중 24명이 기독인이었던 3.1운동은 그 대중적 전개과정에도 많은 기독인들이 참여했고, 특히 지방마다 기독교계 학교의 학생들이 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경의선, 경원선을 따라서 교회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기독교 인사들이 거주하는 곳이 주된 시위 장소가 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전국 개신교의 3분의 2가 집중되어 있던 서북 5도에서 만세운동이 가장 격렬했으며, 이승훈의 고향인 평북 선천에서 3.1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무차별한 사격이 시작되었다고 한다.(14) 이 만세시위는 전국 각지로 퍼져서 5월까지 3개월 동안 세차게 이어졌으며, 3월에서 4월 사이에 일어난 시위 수가 1,214회였고, 거기서 기독인들이 주동한 것이 거의 25%였고 검거된 사람의 약 17%가 기독인이었다고 한다.(15)

당시 김병조, 손정도 등의 증언에 따르면 “동양의 선진국이라고 자처하는 일본이”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고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민중들을 “총검으로 참혹하게 무찔러서, 사상자가 10만이 넘고 투옥자가 30만을 헤아리는” 잔혹상을 저질렀고, 또한 “독립운동은 교회가 주도한 것이라고 하여”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서 각 군을 다니면서 거리낌 없이 학살을 자행했는데, “그 박해는 참으로 옛날 로마 시대의 네로황제를 능가하였다”고 한다.(16) 1919년 3월 1일(토) 오후 1시 서울과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평양에서도 고종황제 봉도식(奉禱式)을 가장한 독립선언식이 있었고, 이어진 만세운동 과정에서 검거되고 투옥되고 옥사까지 나와서 그해 가을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미 감리회 연회에 한국 감리교회 목회자 가운데 3분의 2가 투옥과 망명, 피신으로 참석하지 못했고,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평양 지방 한국인 감리교 목회자가 28명이었는데 그해 11월 남은 목회자가 2인에 불과하게 되었다고 한다.(17)

그러면 어떻게 이와 같은 정도로 당시의 교회가 민족을 껴안을 수 있었고, 나라의 독립이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뜻이고 반드시 독립한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었을까? 앞에서 지적한 대로 기독교 신앙의 인격주의적 특성으로 인해서 자신이 처한 삶의 정황에 대한 구체적 의식과 자각이 더욱 가능해졌고, 기독교 성서의 고난 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해방과 구원의 이야기가 교회 설교 등에서 반복적으로 선포됨으로써 그것을 한민족의 경우와 쉽게 유비해 볼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18)

하지만 이러한 기독교 신앙으로부터의 자각 이전에 사적 자아를 넘어서 ‘公’을 우선시하는 오랜 조선 문화적 뿌리와 긴 시간 동안 축적된 한일간의 불화에 더해서 합병 이후 10여 년간 받아왔던 차별과 잘못된 ‘동화’정책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발이 함께 중첩적으로 역할하였고 본다. 박은식은 그의『한국독립운동지혈사』하편을 먼저 “빙탄(氷炭)같은 한일민족성”이라는 제목 아래 일본과 한국의 반목이 얼마나 오래되었고 뿌리 깊은지를 밝힌다.

신라 때부터의 1,500년을 말하면서 3백 년 전의 임진왜란의 피해를 여전히 기억하고, 가까이는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일본이 무고한 인민들을 살해하고 군병의 노동자로 끌고 가고, 부녀자를 강간하고 재산에 손해를 입힌 것들의 규모를 조목조목 들면서 의병의 피살자가 10여만 이었고, 무고한 촌민으로 학살당한 자는 “독립 후가 아니고서는 그 통계를 구할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19) 그래서 “원통함은 이미 골수에 사무쳐” 있는데, 다시 1876년의 병자수호조약 이래로 10여 차에 걸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믿지 못하게 만들고 병합을 시켜 “동화”를 주장하니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일반 백성의 뜻을 말하자면, ... 밭매는 사람은 호미를 휘두르면서, “어느 때 저 왜놈 제거하기를 잡초 없애 버리듯 할꼬.” 하고, 나무꾼은 도끼를 휘두르면서 「언제 저 왜놈들 베기를 땔나무 베듯할꼬」한다. 빨래하는 부녀자들은 “나는 어느 날에 왜놈들을 방망이로 때려 칠꼬.”하고, 새를 쏘는 아이들은 ”나는 어느 때 왜놈을 쏴서 잡을꼬“하며, 기도하고 제사지내는 무당과 점쟁이도 ”신이여, 어느 날에 무도한 왜놈들에게 벌을 내리시겠습니까?“한다. 이것은 다 백성들의 독립정신이 뇌수에 맺히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분수없이 ‘同化’라는 쓸데없는 말을 한단 말인가.”(20)


붙잡힌 민족대표 33인과 그 중 기독교 측 16인에 대한 일본 판사의 취조서를 살펴보면 거기서 가장 빈번히 듣는 이야기는 비록 기독교 측에서는 당시 ‘(독립)선언서’보다는 보다 온건한 ‘청원서’를 내자는 의견이 강했고, 한일병합 자체에 대해서도 당시 나라 상황에 대한 인식 차이에 따라서 그 판단의 강약이 서로 달랐지만 한결같이 4천 년이 넘는 한민족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그들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조선 정신과 일본 정신을 말하면서 두 민족이 결코 ‘동화’되지 않는다는 것, 당시 총독정치의 차별성과 불의가 얼마나 심한지에 대한 지적이었다.(21)

이렇게 당시 일반인뿐 아니라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민족’에 대한 의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한민족의 민족주의가 단지 근대 서구의 ‘상상의 공동체’의 모방이라거나 특히 오늘날은 그 가치와 의미를 다했다고 하면서 간단히 탈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한국 민족의식의 역사적 뿌리를 간과한 단견임을 말하고자 한다. 3.1운동은 그렇게 기독교 운동이었으면서도 동시에 민족운동이었던 것이다.

미주
(미주 1)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상)』, 84-125.
(미주 2) 정영훈, “홍암 나철의 종교민족주의”, 『정신문화연구』2002 가을 호 제25권 제3호(통권 88호), 229-256.
(미주 3)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노명식, 같은 책, 151.
(미주 4)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노명식, 같은 책, 115.
(미주 5)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노명식, 같은 책, 139.
(미주 6) 이만열, “3.1운동에 대한 기독교사적 이해”, 3.1운동 70주년 특별기고, <기독교사상> 33(3), 1989.3, 18.
(미주 7) 박은식, 같은 책, 219-220.
(미주 8) 박은식, 같은 책, 128-136.
(미주 9) J. S. 게일, 『전환기의 조선』, 신복룡 역주, 집문당, 1999, 40; 이은선, “21세기 한국 여성 리더십에 있어서의 유교와 기독교”, 『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1, 235.
(미주 10) J. S. 게일, 같은 책, 70; 이은선, 같은 글, 236.
(미주 11) 이덕주, 『남산재사람들-독립운동의 요람』, 그물, 2015, 45.
(미주 12) 이병헌, “최린선생 자서전중”, 『三․一運動秘史』, 52.
(미주 13) 같은 글, 53-54.
(미주 14) 최재건, “3.1정신과 대한민국의 건국정신”, 한국기독교학회 제47차 정기학술대회, 한국기독교학회, 2018.10.12-10.13, 자료집제2권, 36.
(미주 15) 양현혜, “그리스도와 민족주의 문제-3.1운동과 조선, 미국, 일본 그리스도교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신학사상』 74집, 1991 가을, 821.
(미주 16)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하)』, 78-79.
(미주 17) 이덕주, 같은 책, 175-176.
(미주 18) 양현혜, 같은 글, 822.
(미주 19)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하)』, 143-149.
(미주 20)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상)』, 82.
(미주 21) 이병헌, 같은 책, 284, 497, 721, 735 등.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세종대 명예교수) leeus@sejo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