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0

12 고수케 고야마 물소신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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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물소신학 비평
2012.09.06 22:08 향기 있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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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소 신 학 비평

(Waterbuffalo Theology)

김영남(선교신학1학기)

1. 서 론

2. 소승불교

2.1 소승불교의 교리

2.2 소승불교로 인한 선교의 장애

3. 물소 신학

3.1 고수케 고야마

3.2 신학의 재뿌리화(re - rooting)

3.3 물소신학의 위치

3.3.1 아시아 신학 안에서의 물소신학의 위치

3.3.2 상황신학의 유형에서 물소신학의 위치

3.4 물소신학의 내용

.3.4.1 태국 역사 안에서의 신학의 정착(Rooting Theology in Thai History)

3.4.2 태국 문화의 사고 안에서의 신학의 정착

(Rooting Theology in Thai Cultural thinking)

3.4.3 태국 불교인의 삶 속에서의 신학의 정착

(Rooting Theology in Thai Buddhist life)

3.4.4 기독교인의 생활방식 안에서의 신학의 정착

(Rooting Theology in a Christian lifestyle)

4. 물소신학의 평가

4.1 긍정적인 평가

4.2 부정적인 평가


5. 결 론




1. 서 론

태국은 4세기 동안의 카톨릭과 170년간의 개신교 사역에도 불구하고 태국의 기독교인은 카톨릭을 포함하여 전 인구 5천5백만의 1%에 불과하다. 카톨릭의 비율은 지난 40년동안 거의 증가하지 않았고, 개신교 신자는 1980년대에 약간 증가하기 시작하여 전체인구 5천8백만 가운데 약0.2%이다.1)

태국은 전통적인 불교국가로 인구의 93%가 불교신자이다. 문화적 환경이 불교적인 국가이기 때문에 종교와 사회간의 대화문제가 신학적인 큰 관심사이다. 태국교회가 계속 선교적인 노력을 하고 있지만 기독교는 아직도 국가 종교가 되다시피 한 불교에 비해 신흥종교 혹은 외래종교로서의 선교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

태국선교의 장벽이 이같이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원인은 태국인의 97%가 되는 소승불교와 관련이 있다.2) 불교인들 가운데 지속적 기독교 공동체의 결여는 세 가지 주요 이유로 이해된다. 박해와 제설혼합주의 및 불교인 공동체의 사회적 결속 안으로 파고드는데 있어서의 교회의 실패이다.3)

이러한 태국의 상황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접근이 고수케 고야마에 의해 실시 되었다. 먼저 태국의 종교와 문화의 바탕이 되는 소승불교에 대해 살피고, 태국적인 상황화 신학인 '물소신학'에 대한 개괄을 살피고, 비평해 보고자 한다.




2. 소승불교

2.1 소승불교의 교리

태국에서 불교는 추종자들의 철학관과 가치관은 물론 모든 영역에서 영향을 미친다. 불교와 그들의 문화는 거의 동의어이다. 여기에 그들의 주체성과 사회적 연대와의 기초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종교적/문화적 사회 안에서 태어난다.

2.1.1 사성(四聖)제4)

사성제는 부처의 가르침 중에서 정수이다. 이는 실제적인 견지와 이론적인 견지에서 고난의 원인에 대한 규명이다. 고성(苦聖)제는 두카(Dukkha)로서 인생의 본질, 그 고난, 그 희비, 그 불완전과 불만, 그 무상과 무실 체이다. 집성(集聖)제는 두카의 근원으로 욕망, '갈증',정욕, 오욕, 불결을 동반한다. 고멸(苦滅)제는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욕망을 버리는 것이다. 이는 두카의 종결로서 절대적 진리 내지 궁극적 실재인 열반이다. 도성(道聖)제는 열반을 깨닫게 하는 도, 혹은 길이다

2.1.2 팔정도(八正道) 5)

열반은 팔정도로 지칭되는 중도(中道)를 따를 때에 획득된다. 지식에서는 정견(正見,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올바른 이해)과 정사(正思, 올바른 생각), 윤리적 행위 에서는 정어(正語, 올바른 말) 정행(正行, 올바른 행위) 정업(正業, 정직한 직업 생활로 형성되는 올바른 삶), 정신적 훈련에서는 정정진(正精進,선을 보존하려는 올바른 노력) 정심(正心, 올바른 마음가짐) 정념(正念, 부처와 법에 대한 올바른 집중)을 이루는 것이다.

2.1.3 실존의 본성 6)

무상(Anicca) 윤회적인 실존을 이루는 모든 조건적인 사물이나 현상적인 과정은 그것이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무상이다. 모든 것은 항상 유동하는 상태이며, 전혀 정적인 양상을 갖지 못한다.

고통(Dukkha) 이것은 흔히 고통으로 번역되는데 '질병' '악' '불만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무아(Anatta) 이는 무상과 연결되는 것으로 인간의 삶 속에 어떠한 지속적인 실재도 없을뿐더러 인간 속에 어떠한 참된 자아나 혼이나 인성도 없다는 것이다.

2.1.4 윤회(samsara) 7)

어느 실존이 이곳에 탄생하기 위해서는 어느 실존이 어디선가 죽어야 한다. 즉 어느 실존의 탄생은 과거의 삶에서 어느 죽음의 실존과 상응한다는 것으로 각 개인의 삶의 유동과 연관한 출생과 죽음의 항구적인 연속은 순환적인 방랑이여 이것이 윤회이다.

2.1.5 업(Karma) 8)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삶은 과거의 업에 따라 결정된다. 이는 인과 법칙을 따라 행한다. 이 상황은 끝없이, 그리고 쇠사슬처럼 중복적인 결과를 일으키며 계속된다.

2.1.6 열반(Nirvana)9)

불교인에게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열반은 탐욕, 증오 및 망상이라는 불꽃의 소멸이며, 갈망을 종식시켜 그 결과 윤회적인 실존을 종결시키는, 오성(悟性)에 의한 깨달음의 달성이다.

2.1.7 태국 불교도들의 세계관10)

그들은 우주의 실체를 하나의 환상적인 것으로 보는 환상적 존재론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찰나에서 찰나로 바뀌어 가면서 새로운 것이 생성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아(我)는 형성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신론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사상을 이루게 되었다.

그들은 무종말적인 역사관을 갖는다. 시간은 종말을 향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의미만 있을 뿐이다. 이것의 기초가 윤회이며, 윤회의 동기가 되는 법이 바로 업이다. 업은 그 개체의 행위에서 일어나는 것을 축척 하였다가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그것이 환생이다. 이는 태국인의 낙천성과 숙명적인 피동적 자세, 무관심한 태도를 가지게 한다.

또 그들은 상대주의 가치관을 갖는다. 이는 불교의 연기(緣起)의 법칙에 연유한 것으로 어떤 절대적 존재도 개념도 없고 다만 상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포용주의를 형성했다.

2.2 소승불교로 인한 선교의 장애11)

2.2.1. 신학적 개념 문제

태국인들은 불교와 기독교가 똑같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불교의 아비야, 구원은 고통에 얽매여 끊임없이 윤회하는 세상에서의 구원을, 천국은 열반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유사점은 매우 피상적이고 실재로는 상당한 차이를 갖는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인격적인 신을 부인하고, 구원은 자력으로 얻는다고 믿는다.

개 념
불교의 정의
기독교 관점과의 차이

1.고통

(dukkha)


개인 존재는 슬픈 것이요. 구원을 필요로 한다. 고통의 원인은 탐욕이다.
성경은 고통의 기원과 탐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통치를 통해 고통이 근절되는 방법을 보여준다.

2.덧없음

(anicca)
우주의 모든 것은 무엇이든지 정적인 상태가 없고 계속적인 유동 상태에 있다.
성경의 자명한 진리에 의하면 모든 것이 덧없는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지만 우주에는 덧없음과 유동성이 어떤 요소에는 적용된다.

3.無
(Anatta)

경험적인 사람은 자아가 없고 혼이 없는 요소들의 복합체이다. 불교는 영속하는 정체성의 인격 실존을 거부하는 면에서 독특하다.
불교에서는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인격에의 믿음이 없는데 반하여, 기독교에서는 경험적이고 궁극적인 의미에서 인격과 개성의 실재와 정체성에의 믿음이 있다.



4. 윤회
(Samsara)
존재에서의 의지와 의향 및 욕망은 세상에서의 가장 큰 욕망이며, 죽은 뒤에도 멈추지 않는다. "개인"은 윤회에 묶여 있고 모든 욕망이 사라진 때에야 윤회로부터 단지 이탈되어 질 수 있다. 그때라야 윤회의 끝이 온다.
생명은 윤회하지 않고 죽은 후 하나님의 존전에 올라간다. 하나님은 생명의 흐름이 기원자이다. 심지어 인간의 욕망은 거룩한 갈망이며, 거룩하지 않은 갈망의 범주로 간주되지 않는다.


5.도덕적
인과 법칙

(업:Karma)
비록 이 말 자체는 활동이나 행위를 의하나, 불교에서는 의지적 행위를 의미한다. 모든 행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또는 나쁜 방향으로 계속되는 한가지 힘을 갖는다. 단순한 자연 법칙은 신성에의 언급이 없다.
하나님은 지고의 도덕법 수여자요 능력이며, 소위 악한 업의 영향조차도 지배하는 지고자 이시다. 부처 자신도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다.

6.열반
(Nirbana)

더 좋은 용어가 없기에, 사멸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열반은 불교적 삶의 궁극적 목적이다. 열반은 천국 같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도달하는 실현이다.
죽음 후, 하나님의 낙원에서 즉시

'고통'(dukkha)의 끝이 있을 것이다. 열반이 실현인 반면에서 천국은 분명한 장소이다. 열반은 더 이상 생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천국은 보다 충만한 생성(fuller becoming)이다.
이같은 유사점과 차이점은 복음의 전달을 어렵게 하며, 용어의 의미전이를 곤란하게 하고, 혼합주의 위험과 복음에 대한 거부감 등 다양한 문제를 표출한다.



2.2.2. 사회계층의식 문제

태국은 지배계급과 하부의 농민계층으로 구성된 계급사회이다. 하부계층은 지배계급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지배계급의 결정에 반감을 갖지 않고 따른다. 이는 불교의 업 사상에 기인한다. 상부계층은 전생에 쌓은 선업의 결과를 누리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전도에 있어서는 복음이 상부계층을 통해 하부로 전달되어야 함을 의미하며, 개인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민족배신 행위로 여겨진다.



2.2.3. 사회적 인성과 지도자 결핍 문제

열대 우림 지역이라는 자연적 요소와 생활 속의 불교가 태국인의 인성을 형성했다. 그들은 태만하다. 이는 철저한 운명론에 근거를 둔다. 일반적으로 노력해고 개선해서 무언가를 성취하겠다는 의욕보다 전생의 결과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인다. 또 지식보다는 도덕성으로 사람을 평가하기에 성경지식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낙천성이 지도자 결핍현상을 초래했다



2.2.4. 역사와 사회 문화적 장애

서구 식민지역사와 더불어 출현한 기독교는 서구 종교라는 인식 하에 나쁜 이미지를 갖는다. 불교인이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에라도 불교 문화를 떠날 수가 없다.



3. 물소 신학

3.1 고수케 고야마12)

본래 태국의 토착적인 신학의 시도로 이 물소신학을 주장한 신학자는 고수케 고야마(Kosuke Koyama)이다. 고수케 고야마는 아시아에서 가장 상상력이 뛰어나고 창의적이며 널리 읽히는 신학자로 불리운다. 그는 아시아의 신학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일본인으로 1929년에 태어났다. 1942년에 침례를 받았다. 1961년부터 1969년까지 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고, 태국연합신학교에서 교수로 일했다. 그는 1974년에 기독교신학을 태국에 토착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신학적 전망으로 물소신학을 발표했다. 1980년이후에는 미국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고수케 고야마는 태국신학교(Thailand Theological Seminary)에서 가르쳤으며, 남동아시아 신학교 연합회 실행총무였으며, 남동아시아 신학교 학장이었으며, 남동아시아 신학저널(South East Asia Journal of Theology)의 편집인이었다.



3.2 신학의 재뿌리화(re - rooting) 13)

태국 연합신학교를 중심으로 불교라는 종교 문화적 전통사회에서 기독교적 토착신학을 발전시키려는 변증법적이며 선교적 신학이 전개되어 왔다. 이의 대표적인 것이 물소신학(Waterbuffalo Theology)이라 할 수 있다.

고야마의 태국적 토착화 신학은 기독교 선교와 신학의 새로운 상황화를 요청한다. 고야마는 신학이란 세상과 인간의 경험을 더 잘 보기 위한 방법이며 또 그것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으로 보고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주장한다. 이러한 발상은 고야마가 태국 시골지역에서 진흙 속에 있는 물소를 보면서 자신의 선교활동과 신학교육을 반성한데서 기인한다. 태국의 상황에 있어서는 태국 농부들이 경험할 수 있는 물소, 고추, 바나나, 닭싸움, 쌀밥과 같은 일상생활 속에서 보여지는 현실에서 신학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는 태국에서의 복음전도는 태국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는데서 시작한다. 그는 태국의 농부에게 복음이 전파되려면 먼저 태국 농부들의 상황이 강조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대한 서구의 기독교 사상은 서구의 철학과 역사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이기에 태국이라는 상황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상황화 신학은 복음 속에서 담겨진 의미를 구분하여 그들의 땅에 뿌리 내리도록 관리하고 물을 주고 기르는 재뿌리화(re - rooting)의 개념으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의 재뿌리화 작업은 반드시 신학적인 원리에 의해 인도되어져야 한다고 하며, 그는 신학의 재뿌리화(re - rooting of theology) 대신에 신학적인 재뿌리화(theological re-rooting)를 주장한다. 불교 그 자체보다 불교적인 삶에 관련된 신학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면서, 그들의 삶의 스타일로 인하여 빚어진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고 그들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상황화란 마치 식물을 옮겨 심는 것과 같이 암스테르담에서 자카르타로, 뉴욕에서 마닐라로 전환하여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상황화는 마치 이미 받았던 살아있는 믿음의 씨앗을 그 본래의 토양에 심고 돌보고 물을 주고 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고야마의 상황화된 신학은 종교적 논리나 구조라기 보다는 문화적 요인들을 탐구하는 발견적 경향이 있다. 이는 제3세계신학의 여러 이슈가 발흥하는 이유가 되었다.



3.3 물소신학의 위치

3.3.1 아시아 신학 안에서의 물소신학의 위치14)

종교는 아시아인의 삶과 역사의 한 부분이다. 아시아는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등 세계적인 모든 종교의 고향이다. 또한 유교와 도교(Taoism),신도(Shintoism)도 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

아시아는 그 독특한 상황으로 기독교 메세지를 아시아인에게 전달하기 위한 상황화 작업이 쉽지 않다.

첫째는 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지역이며 그 안에는 다양한 문화와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번째로 아시아의 기독교인은 세계에서 가장 종교적인 전통들과 현대화의 영향, 좌우익간의 이데올로기 분쟁, 국제적인 분쟁과 기아와 빈곤, 군국주의, 인종차별 등과 같은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셋째로 기독교내의 급진 보수의 갈등이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다양한 시도에 반응이 별로 없고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이다.

아시아 신학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다양한 시도를 한 결과 일본의 하나님의 고통의 신학(the Pain of God theology) 태국의 물소신학(waterbuffalo theology) 송천성의 중국인을 위한 제3의 눈 신학(third eye theology) 중국과 한국의 음양신학(yin yang theology) 대만의 변화의 신학(theology of change) 한국의 민중신학(Minjung theology )등이 결과로 나왔다. 이를 노봉린교수는 위의 신학을 4가지 범주로 구분하였다.

1.혼합주의적인 신학(Syncretistic theologies) - 인도의 힌두교내의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Unknown Christ of Hinduism)

2. 적응 신학(Accomodation theologies) - 고수케 고야마의 물소신학, 이웃을 위한 예언적 기독론(Prophetic Christology for Neighbourlogy)

3.상황신학(Situation theologies) - 가조 기타모리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 김용복의 민중신학, 기타 해방신학 류의 신학들

4. 성경중심의 신학



3.3.2 상황신학의 유형에서 물소신학의 위치15)

비번스는 종합적 형태(The Synthetic Model)의 대표적인 모델로 물소신학을 예로 든다. 이 형태는 변형적 형태나 인류학적 형태 그리고 실천적 형태의 모델에 비해 균형을 잡아보려는 시도이며, 다른 문화와 사고 방식을 나름대로 통합 흡수해 보려는 것이다. 즉 다른 세 가지 모델 - 변환적 모델. 인류학적 모델(흑인신학), 실천적 모델(해방신학, 민중신학)의 합일체적 형태이다. 문화와 사회적 변화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전통적인 메시지와의 통합을 유지해야 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함을 인식하고 있다. 이 형태는 믿음을 표현하는 내용과 방법, 모두의 발전을 위해 다른 신학적 표현과 다른 문화에 관한 자료들을 포함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 단지 타협을 위해 여러 가지를 함께 묶어보려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차원에서 모든 관점에 적합한 것을 발전시켜 보려는 헤겔의 방법론적인 종합체이다.

이 모델의 전제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상황과 문화의 복잡한 성격을 염두에 두면서 모든 문화는 각기 독특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반면에 다른 문화와도 공통점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 모델은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이라고 하는 특수한 문화 속에서 역사적으로 제한된 가운데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특별한 문화적인 제약을 가지고 있는 메시지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그 상황을 완벽하게 만들어 가려고 사람들이 문화적인 변혁과 사회적인 변화를 통해 그들의 상황 속에서 역동적인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기본적인 방법론은 개방성과 대화에 있다. 이 유형의 기본적인 도식은 다음과 같다.

문제점은 신학자들의 계속적인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합일점에 도달하기 보다는 애매모호한 신학이 될 수 있다는 것과 서로를 진정으로 포용하지도 못하면서 단지 관념적으로 혹은 이상적으로 서로가 현재 위치하고 있는 데에서 그냥 평행선을 달리고 있을 위험성도 있다.



3.4 물소신학의 내용

고야마가 그의 책 Waterbuffalo Theorogy에서 설명한 것을 중심으로 요약과 설명을 하고자 한다.16)

3.4.1 태국 역사 안에서의 신학의 정착(Rooting Theology in Thai History)

오늘의 태국은 단지 하나가 아니다. 그 사회 안에는 두 개의 태국이 있다. '태국 하나'는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수입된 데라바다 불교의 가치관을 중심으로 다양한 세력에 의해 다듬어진 전통적인 가치관이다. 탄생과 성장, 늙음과 질병이 끝없는 순환의 경험을 근거로 한다. 결국 자연의 법칙은 역사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전횡의 범주보다 더 신뢰할 만하다. 그들은 열 가지 덕목을 지킨다. : 자비심, 경전에 따른 도덕적인 생활, 종교 후원, 정직, 연민, 잘못된 야망으로부터의 자유, 복수심으로부터의 자유, 아버지처럼 사람들을 사랑함, 징벌에서의 중용, 사람들의 복지와 행복에 대한 지속적인 돌봄. '태국 둘'은 미국식화된 태국이다. 이것은 서구의 식민지주의의 산물이다. 식민지주의는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현대화와 기독교라는 것을 가져왔다. 태국인들은 이 다이나믹한 역사적 상황(historical context)의 중간에 서 있다., 이떻게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

태국 하나와 태국 둘은 서로 직면하고 있다. 이 상황은 다양하게 설명될 수 있지만 그 중에 태국과 이스라엘의 교차점에서 일어나는 신학적인 마찰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태국 '하나'는 긴장요소를 확대하고, 현대화에 대한 토론에서 근간을 제공함으로 공헌하였고 태국'둘'은 사회구조의 변화 즉 종교와 심리적인 것을 포함하는 전환을 가져오는데 공헌하였다. 이렇게 기초가 흔들리는 가운데서 태국의 문화신학자들은 불교에서 언급하는 인간의 상태나 인간의 역사 가운데 이루어진 현대화와 세속화를 정죄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pathos)는 이스라엘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태국 안에서 역사 하신다. 그리고 전통주의와 현대화는 그의 일을 이루는데 기여한다. 그 긴장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실재를 위한 태국인의 영성을 준비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은 태국 안에서 좋은 토양을 준비하시는 주님의 역사 하심의 목적이다.

이런 면에서 고야마는 새로운 측면에서 기독교 역사관에 대한 질문한다.17) 고야마는 그의 글 '몬순장마는 하나님을 젖게 하는가?' 라는 글에서 기독교의 역사관과 구원사건을 직선적(Linear)역사관과 '단번에 모두를 위함(Once-for-all)'으로 분석하고 이는 기독교 신학의 자연에 대한 무시와 거절로 보며, 상승적 나선형 역사관을 제시한다.

태국에서 몬순장마기에 형성되는 자연현상의 반복은 시간을 순환론적<그림1>으로 보게 하며 이는 '단번에 모두를 위함'이라는 기독교적 질적시간 개념과 달리 '수차례(many-times-ness)'라는 개념을 제사한다고 보았다. 태국인은 자연에 순응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이해하여 왔다. 인간의 삶은 우주의 광범위한 순환의 일환으로 본다. 이는 성서적 관점이 '단번에 모두'를 거절하며, 이런 사고는 삶에 긴장과 부담을 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성경적 근거로, 창세기8장22절 '땅에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를 제시하며 이는 순환론적 자연관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 구절에서 순환의 규칙은 그 자체에 의존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된 것으로 봄으로 신학적인 전환을 이룬다. 우주적 순환 자체가 하나님께 그 기원이 있고 하나님은 그것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결국 그의 결론은 몬순장마는 하나님을 젖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몬순장마의 주가 되신다는 것이다. 고야마는 하나님이 비를 보내시는 것은 단순한 물방울이 아니라 이미 신학화되고 역사화된 것이라고 한다. 태국에서의 신학적 사고는 역사와 자연을 동등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고야마는 직선과 순환이 합쳐진 상승적 나선형 역사관을 주장한다.



또한 모든 사람은 단지 우주적인 역사 가운데 살 뿐 아니라 역사 가운데 특별한 상황 안에서 산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그것은 현재 안에 살아있는 과거이며, 어느 누구도 자신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한다. 인간은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데, 지역적인 역사와 문화 언어를 갖고 있다고 한다. 각각의 역사는 진리와 존귀함, 의로움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인정해야 하고, 그것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한다. 이것을 고야마는 특정궤도 신학(Particular orbit theology)이라 칭한다. 그리고 신학에서 이것을 받아들이는데 실패하면 신학은 게토화(ghettoize) 한다고 한다.



3.4.2 태국 문화의 사고 안에서의 신학의 정착(Rooting Theology in Thai Cultural thinking)

고야마는 신학함에 있어서 상황화된 사고와 참여를 요구한다. 그는 신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18)



'신학은 하나의 사고, 반추(reflection)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본 역사에 대한 사고이다. 그 말씀은 요한복음 14장 26절의 진지한 신학적 메세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이해와 요한복음14장26절의 조명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은 자기의 영성이 밝아지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알게된다. 역사적인 상황에 동참한다고 하는 것은 그 상황이 어떤 것이건 간에 , 변할 수 없다거나 조절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황이란 계속해서 변화되어야 하고 또 변화하기를 강요받는 그 어떤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실례로 마태복음 15:21-28절의 해석을 든다. 이 본문은 한 가나안 여인이 자기의 귀신들린 딸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온 사건이다. 예수님은 그녀의 요청을 거절하셨다. 고야마가 처음 이 본문을 태국의 농부들에게 설교할 때에 그는 루터의 해석을 따랐다. 그녀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예수께서 거절하실 때에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강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믿음의 기본적인 요소는 믿음은 믿는 자가 강탈/협박(assault)당할 때에라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태국의 농부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고야마는 이것을 다시 생각하였다. 태국인의 입장에서 보고 해석하였다. 예수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진 여인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그녀가 그렇게 고집스럽게 주장할 수 있었던 근거로 병든 딸에 대한 강한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 자연적인 사랑,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전환된 그 사랑은 태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16세기 종교개혁자의 해석을 단순히 따르는 것을 거절한다. 그의 해석은 오히려 다른 문화와 시간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해석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림2>

기독교 문화와 태국 문화의 만남을 살필 때에 고야마가 제시하는 두 번째 문제는 두 문화에 대한 차이점이다. 이는 그의 두 논문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춧가루와 불교주의의 소금(Aristotelian pepper and Buddhist salt)'과 '평온 문화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이해(The wrath of God in a culture of tranquility)'에 잘 나타나 있다.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를 전제로 한 복음해석과 신학적 주장을 하는 것은 태국의 불교문화와 상응되어 기독교신학을 평범하게 만들거나 진정한 복음의 의미를 상실하게 한다는 것이다. 복음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하나님의 구원의 메세지를 역사화한 복음이 전파되어져야 하며, 역사가운데 개입하시며 사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으로 증거 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고야마는 우리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상황은 우리를 신학의 해석으로 이끈다고 믿었다. 그 자신의 일은 문화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포함한다고 한다. 그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추와 불교의 소금'의 글에서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부엌에서 우리는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해 후추와 소금에 대해서는 그 자체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그것들을 사용한다. 이와 유사한 것이 교회 내에서 일어난다. 서구교회는 합리주의와 통상적인 관계로 표현되는 아리스토텔리스의 후추를 신학적인 음식에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태국교회는 이것을 가져다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영감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우주적인 논쟁을 토론한다. 그리고는 의존적인 기원(dependent originations)의 교리에 불교의 소금을 뿌린다. 그리고 거기에 초월적 삶의 방식이라는 소금을 더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추와 불교의 소금은 둘 다 기독교의 복음과 그리스도를 희미하게 만든다. 그러나 해결책은 결코 후추와 소금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예수를 맛내기 위해서 사용되어지는 것을 발견하므로, 단순히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거나, 불교의 진리(dharma)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우리는 그 불교에서의 그 진리의 내용이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림3>



고야마는 복음이 태국인에게는 얼마나 생소한 서구적인 것인가를 지적한다. 태국인들은 '불타가 자기 죄로 고통받는다 혹은 예수가 유일한 지존자라거나, 예수의 성육신, 죄지은 인류를 향한 끝없는 사랑, 대속적 피흘림과 죽음' 등의 기독교적인 가르침에 문화적 저항, 심리적 반감, 감정적인 반작용을 가진다고 한다. 이는 지나치게 직설적이며, 태국인들은 오히려 이런 것을 불교적인 개념에서 이해한다고 한다. 그는 제안하기를 '불타는 자기의 dukkha(苦)의 중압에 신음했다. 예수는 우주 안에서 유일한 arahant(阿羅漢)이다. 그분은 욕정에 사로잡힌 인류에게 끝없이 자비를 보이셨다. 그리스도는 samsara(윤회)에서 빠져나오는 길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려고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다.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dharmma(法)를 통해 Nirvana(열반) 에 이르는 구원을 주셨다'고 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한다. '예수의 피를 통한 구원'은 태국 청중을 망연자실하게 할 것이고, dharmma를 통한 구원을 말한다면 기독교와 불교는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되기에 최선의 길은 dharmma의 내용이 그리스도의 희생하는 죽음임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형태의 신학 즉 불교의 소금으로 맛을 낸 태국의 신학은 외부인에겐 애매한 맛이지만 그들에겐 구미에 잘 맞는 맛이라고 주장한다.



고야마는 이런 토착신학의 발전단계를 '부엌신학'이라고 한다.19) 토착신학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다기 보다는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고 보았고, 할 일이란 더 많은 성서정보와 현대의 전반적인 신학논의에 도움이 될만한 통찰들을 부어 넣는 것이라고 한다.

부엌신학의 예를 들어보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에 기초를 두나, 태국인의 감정과 심리에 따르면 사랑(khwamrak)이란 말은 사물, 인간,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인류의 애착(attachment)을 뜻한다. 애착은 불가피하게 슬픔과 괴로움을 낳고, 초탈(detachment)은 불가피하게 평정과 정직함과 참된 행복을 낳는다고 한다. 또 태국문화에서 '선'이란 '빨아서 잘 다린 후 정돈된 서랍에 넣어서 제대로 닫아둔 옷'이며 그 옷은 더러운 세상과 '떨어진' 곳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한다. 고야마는 농촌에서 한 달란트를 고이 싸두었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에 되돌려준 종을 예수가 책망한 것에 대해 격렬한 반발에 직면했었다. 평정의 서랍에 보관한 정직한 종이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인가? 예수는 오히려 분별없고 터무니 없는 사람이라는 주장이 태국인의 민족심리 근저에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평온의 이상(a tranquillity ideal)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이상한 것이 되고 만다고 한다 .훈련된 승려는 진노로부터 자유롭고, 그들은 신이 화를 내시는 것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불교에서 분노는 열반에 반(反)하는 감정이며, 불교문화는 냉정,정적, 평온을 가장 높은 덕목으로 삼기에 기독교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격정은 복음전도에 거침돌이 된다고 한다. 태국인의 신에 대한 사상은 하나님은 초연한(impassible)존재라는 것이다. 기독교 복음이 예수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것은 역사화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역사 속에 개입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결코 평안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림4>



-이웃(Neighborology) : 고야마는 우리가 만일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게 비생명적인 존재로 여긴다면 그들을 maya(환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을 maya로 만듦으로 우리는 자신과 기독교 복음을 maya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우리의 이웃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고야마는 태국인은 기독론에 대해 관심이 없으나,. 그러나 그들은 이웃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고 한다. 고로 기독교의 메시지는 이웃의 언어로 전달되어져야 하며, 또 그리스도는 오늘의 모든 아시아인에게 이웃이시라고 한다.



- 아시아의 이슈와 기독교 신학 : 고야마는 만일 아시아의 신학자가 자기의 존중하는 문화에 신학을 정착시키려면 그들은 반드시 열가지 이슈를 다루어야 한다. 상호 독립적인 세상, 성경, 선포와 적응 그리고 혼합주의, 다른 신앙과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 서양, 중국, 소유한 자와 무소유자들,정령숭배적인 세계, 영성, 교리적인 자비

고야마는 아시아의 상황으로부터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원했으며, 하나님의 개념도 다음과 같은 4가지방식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첫째 구원의 개념을 이 세상에서 비참여적인 것으로 보는 동양적인 근본적인 개념하고는 다르게 보면서 현재의 상황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감동적인 하나님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자연의 순환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동양적 구원의 개념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비윤회적인 면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셋째 하나님은 단순히 초월적이라기 보다는 현실가운데 하나님의 신성한 참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억압받고 버려진 자들과 함께 연대성을 갖고 삶의 예민한 부분과 함께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3.4.3 태국 불교인의 삶 속에 신학의 정착(Rooting Theology in Thai Buddhist life)



물소신학은 불교 그 자체보다는 불교도에 초점을 맞춘다. 보통 사람들은 사람(ist)보다 주의(ism)에 더 큰 관심을 둔다. 이는 불교도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보다 불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 더 적은 에너지와 노력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불교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 불교자체가 아니라 불교도에 대한 이해이다.

기독교의 교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리일 뿐이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삶의 현장에서 실제화 되지 않는 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마치 시원한 냉차에 대한 생각이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실제화 되고 그 능력과 역동성이 보여져야 한다. 사람은 많은 교리에 둘러 쌓여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교리적으로 훈련된 시각으로 본다. 그러나 성육화된 눈으로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 8:4에서 사람들은 간음을 행한 여인을 돌로 치려고 했다. 그들은 교리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육화된 시각으로 보았다. 그는 땅에 이렇게 쓰셨다.'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그림5>



한 예로 그것은 냉랭한(cool) 태국인과 열정적인(hot) 하나님을 본다. 불교도들의 개념들, 즉 Dukkha(불만족 고통) annica(무상) annata(무아)는 냉랭한 태국인이 되게 한다.

이상적인 apatheia인은 음식을 먹되 음식의 맛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픔을 치유하고 배고픔을 만족시키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 그들은 비록 음식이 좋지 않더라도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먹으면 배고픔은 면하게된다. 만일 반대로 맛이 좋기 때문에 먹는다면 탐심이 생기게 된다. 그들은 만족스럽게 먹기보다는 굶주리는 사람들이다. 집 없음을 추구한다. 다툼의 산실이 집생활이다. 그곳은 노고와 욕구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열린 하늘아래 자유롭고 고귀한 삶으로 인도하는 것은 집없는 삶이다. 그들은 적어도 스스로 자신을 비우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이고 역사 속의 어떤 장소에 집착하지 않는, 역사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정적이시다. 그는 역사 속에 개입하신다. 하나님은 계약의 하나님이시다. 성경적이 관점의 계약은 '열정'적이다. 하나님은 나(我)를 재건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결코 냉랭한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따뜻하게(warming) 하길 원한다. 하나님은 냉랭한 사람들의 Dukkha(불만족 고통) annica(무상) annata(무아)를 받아줌으로 그들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 자신의 됨됨은 태국 청중들에게 의미 있게 만들어져야 한다.



다른 예를 들면 물소신학은 어떻게 야고보서가 태국인에게 적합한지를 본다. 야고보서는 내용은 냉랭하나, 실제로는 열정적이다. 사물은 전환되고 변화한다. 그러나 변함없는 하나님 안에서의 믿음은 초월을 통해서가 아니라 제한적인 사람들의 세계 가운데 포함됨으로 표현되어진다.



3.4.4 기독교인의 생활방식 안에서의 신학의 정착(Rooting Theology in a Christian lifestyle)



신학의 중심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와 세상에서 믿는 자들의 선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인도한 것이다. 이것은 역사를 구원하기 위한 값비싼 참여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세상을 섬긴다. 개인적인 야망이나 기관의 목표는 자주 이것을 방해한다. 인간에 대한 찬양이나 인간에 대한 비판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방해한다. 그리스도의 정체화는 고통받는 세상에 대한 그 자신의 참여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의만찬 식탁에 덧붙여진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주의나 과학기술주의, 공산주의 ,세계적인 종교와 간은 다른 테이블의 구원의 메시지로부터 자유롭다.

4. 물소신학의 평가



4.1 긍정적인 평가




4.1.1.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 추구

고야마는 태국에 맞는 상황화를 시도하였다. 태국이 갖고 있는 열대지역이라는 특성과, 소승 불교, 그 문화의 독특성을 이해했다. 그는 아시아에 대한 역사와 문화, 종교적 배경을 십분 이해 하였다. 그는 아무런 문화에 대한 배려없이 단순한 복음진리의 선포가 제한적이라고 이해하고 그들의 이해가 가능한 문화적 접근을 시도한다. 그는 태국복음화의 진전이 미약한 이유를 그들의 상황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는 서구신학의 접근이라고 지적한다. 그가 불교에서 갖고 있는 개념으로 사랑이나 천국, 영생에 대한 개념이 태국인에게 저항을 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4.1.2. 탈 서구화에 대한 시도

고야마는 기독교 자체가 서구의 틀을 가지고 있다고 간파한다. 그는 기독교의 원래의 모습과 서구적인 틀을 구분하려고 시도하였고, 태국인에게는 원래의 기독교를 태국인의 신학적 이해 안에서 소개하려고 한다. 즉 하나님은 각 민족에게 고유하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미리 역사 하셨으며,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4.1.3. 창의적인 신학



4.2 부정적인 평가

이현모 교수의 논문에서 상황화를 평가하는 4가지 기준을 살피고, 각 기준에 따라 평가해 보고자 한다.20)

1. 성경적(Biblical)인가?

어떤 상황화 신학도 반드시 성경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매우 단순하고 직선적인 기준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성경적인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 간단치 않다. 이는 성경이 완전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것이 되는 것은 단지 성경에 나타난 용어나 개념, 그 자체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과는 다르다. 또한 비서구의 기독교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해 서구신학의 문화적인 유산으로부터 탈 상황화를 해야 한다. 또 성경에 나오는 의미와 형태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때로 형태를 바꾸었을 때에 의미마저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2. 예언적(Prophetic)인가?

효과적인 신학적 상황화는 단지 그 문화의 긍정적인 가치뿐 아니라 사탄적이고 악한 세력으로 표현되는 부분에서도 도전되고 시도되어야 한다. 복음과 문화는 피할 수 없는 대립이 있다. 예언적 기준은 상황화에서 심판적인 관점이다.

3. 대화(Dialogical)가 가능한가?

서구신학의 비극은 '지역신학'의 개발이다. 불행하게도 상황화는 잠재적으로 '지역신학'을 산출한다. 상황화 신학은 대화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그 지역의 기독교인들과의 대화, 그들이 포함되어있는 세계의 세계관,정치,경제,종교,사회구조,실생활의 이슈, 그리고 광범위한 교회와의 대화가 시도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천편일률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주적 교회와 지역의 특징 사이의 긴장이 중요하다.

4.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가? (Open-Ended)

상황화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하고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사회와 문화는 계속적으로 변화한다. 특정이슈가 사라지고 또 다른 것이 출현하기도 한다.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야 한다.



4.2.1. 물소신학은 성경적(Biblical)인가?

탈 서구화는 시도했으나 성경의 본래의미를 찾는데에 부족했다. 흐릿한 신학으로 변질되는 혼합주의의 위험이 있다. 이해를 돕는 것과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 태국인에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와 진리 그 자체를 포함하는 문화적인 틀 까지도 부인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많은 태국복음화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제안하는 실제 전도방법이 주로 강력한 메시지의 쇼크요법(일종의 능력대결), 태만성을 깨우고 윤회적인 틀을 깨는 방법으로 제안되는 것을 보더라도 태국적인 상황만을 고려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실례로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추와 불교의 소금'에서 맥길버리 박사에게 맹공을 퍼붓지만 그 자신은 맥길버리 박사의 시대에 일어난 부흥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특별히 그가 제시한 마태복음 15장의 해석에서 여인의 믿음을 믿음 그 자체 보다 여인의 사랑에 초점을 맞춘것은 인간본성에 의존한 것으로 동양인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해석하는 것은 믿음에 대한 오해이다. 이해를 도울 수는 있으나 보편적으로 인간의 사랑(에로스)을 통해서 믿음에 이른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4.2.2. 물소신학은 예언적(Prophetic)인가?

고야마는 물소신학에서 태국문화에서 기독교 복음전도에 전이해가 필요한 부분은 집중적으로 설명하지만 부정적인 사악한 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태국 문화의 결정적인 약점 왕권의 신성화이다. 태국인들은 왕을 불타의 현현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특히 권력의 구조와 이로 말미암는 하층민들의 무비판적 절대적 복종으로 이어진다. 절대권력과 업 사상의 굴레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상황이다. 정치와 종교의 밀접한 관계에서 빚어지는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닌 생활로서의 불교, 운명으로서의 불교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이나 제안이 없다.



4.2.3. 물소신학은 대화(Dialogical)가 가능한가?

지역적 신학이 필연적, 태국의 특성이 강조되나 다른 지역에서 가능할가? 심지어 다른 불교지역이라도 이 신학이 적용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 그는 문화와 역사는 특정지역마다 특이하며 각각의 문화와 역사는 고유의 신학을 요구한다고 한다. 이는 자유주의 신학계열 상황에 대한 집중으로 말미암는 지역신학의 탄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그의 상황화 신학의 배경에는 WCC계통에서 주장하는 이론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4.2.4 물소신학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가? (Open-Ended)

물소신학은 신학으로서의 체계가 미흡하다. 신학으로서의 이론적 체계를 완전히 확립한 것은 아니었다. 고야마는 문제를 제기하기는 했지만 그 결과로서의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는 신학함에 있어서 성경에 대한 관심보다 상황과 문화에 집착함으로 균형을 상실했다. 상황은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태국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상황화작업은 계속 추진되어야 한다.




5. 결 론



헤셀그레이브와 롬멘은 이렇게 고야마의 '아래로 부터의 신학'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21)

'그는 본문과 씨름한다. 동시에 그는 동시에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재료들을 직접 찾으며, 그것들이 생생하게 본문가운데 살아있게 만든다. 또한 그것이 존재하는 상황 속의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세계복음화를 이루기 위해서 특별히 한 나라를 복음화 하기 위해서 좋은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 어느 일본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이 '효과적인 일본 선교의 방법'이라는 강연에서 자신이 그것을 안다면 먼저 실행하겠노라고 강의의 서두를 시작한 적이 있다. 태국선교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지난 수백년의 기독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복음전도가 지지부진하여 많은 선교단체가 스스로 철수하는 지역에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기독교 복음전도가 서구적인 방법으로 아시아의 문화와 상황을 배려하지 못했다면 이를 반성하고 보다 적극적인 이해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상황 그 자체가 언제나 모든 것의 해답일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본문과 상황간의 균형이 절대적이고, 복음적인 상황화는 계속 추구되고 시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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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Nanchai Megudon "무앙타이 교회의 역사와 선교전망," 불교권의 선교신학과 방법.(서울:기독교대한성결교회 선교국,1993),P.170

3 Lausane Committe. "소승불교의복음화 방법", 불교권의 선교신학과 방법.(서울:기독교대한성결교회 선교국,1993),P.67.

4 홍성철 "태국 불교인도 엘렝틱스를 경험할 수 있는가?," 불교권의 선교신학과 방법.(서울:기독교대한성결교회 선교국,1993),PP.138-142.

5 Ibid., P.138.

6 Ibid., P.139.

7 Ibid., P.140.

8 Ibid., P.141.

9 Ibid., P.142.

10 Lausane Committe. "소승불교의복음화 방법", 불교권의 선교신학과 방법.(서울:기독교대한성결교회 선교국,1993),P.69.

11 최명길 "태국의 소승불교와 선교적 제안". 1995.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PP.47-53

12 정흥호. 복음주의 입장에서 본 상황화 신학. 서울 : 로고스서원,1995. P.83.

13 Ibid pp.83-86

14 Hesselgrave,David J. "Contextualization : meanings, methods, and models. Baker Book House,1989. pp.70-73.

15 Bevans, Stephen B, Models of contextualtheology, Orbis Books, 1992. PP.81-92.

16 Koyama, Kosuke. Waterbuffalo Theology. Orbis Books,1989.

17 서창원. "제3세계 신학". PP.287-291.

18 Hesselgrave. P.84.

19 딘 윌리암 펀 엮음, 강인철 옮김, 제3세계의 해방신학, 분도출판사,1993.1.25.PP.443-455.

20 이현모. "A Missiological Appraisal of the Korean church in light of theological contextualization",Ph.D, Southwestern Theological Seminary.1992. PP.21-23.

21 Hesselgrave,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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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 2003년 02월 21일 20:12:23




출처 : 내 사랑 태국선교 | 글쓴이 : 이영근 |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