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2

Ten Ideas for Saving the World – Ecological Civilization in Korea Project



Ten Ideas for Saving the World – Ecological Civilization in Korea Project



Ten Ideas for Saving the World
ecocivkorea2017년 June 6일John Cobb - Anthology



지구를 구하는 10가지 아이디어
존 캅

“우주 심장부의 창조적 에너지가 과거에 그렇게 훌륭하게 발현됐다면, 우리는 그런 창조성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미래로 인도할 수 있기를 희망할 이유가 있다. 이제 우리의 도전은 지구의 패턴에 일치하는 방식으로 살기 좋은 도시를 건설하고 건강한 음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메리 이블린 터커, 브라이언 토마스 스윔

우리는 중간 크기의 은하에서 중간 크기의 별을 도는 작은 행성에 살고 있다. 우리가 지구상의 무수한 생명을 파괴한지 한참 뒤에도 지구는 여전히 궤도를 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구를 구할 필요도, 구할 수도 없다. 우주의 역사로 보면 찰나에 작은 우리가 거대한 다중 은하의 여행에 포함됐다는 사실에서 경외감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메리 이블린 터커와 브라이언 토마스 스윔은 다른 많은 이들처럼 우주에 대한 경탄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인간을 포함해 지구상의 생명에 대한 친밀감을 가리키는 바이오필리아 는 생명의 보편성뿐만 아니라 특수성에도 해당한다. 그래서 지구 생명의 아름다움과 다양성을 아껴야 하며 우리 자신 역시 아껴야 한다. 우리는 지구와 스스로에게 많은 해를 끼치는 우리의 행동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야 한다. 이런 지혜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 자신과 나머지 생명을 존중하면서 살라는 소명을 들을 수 있을까. 혹은 너무 늦었을까.
40년 전에 나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화이트헤드 철학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학을 발전시키는 중이었고, 내 아이들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환경과 관련된 이슈에 관여하도록 자극 받았다. 나는 우리가 어떻게 이 세계를 살아야 할지에 도움이 된다면 신학은 생태신학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계는 인간만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그물이다.
그래서 나는 라는 책을 썼다. 그 책에서 나는 정반대 흐름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다른 생명이 의존하는 생명유지시스템의 파괴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희망적인 책이었고 어떤 면에서 나는 희망적인 사람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희망을 갖기에 너무 늦었다고 보일 때조차 하나님은 우주와 지구에 새로운 가능성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나는 우주의 창조성 안에 존재하는 영감이 신성하다고 믿는다. 나의 희망은 또한 세계 자체, 자연, 그리고 자연의 일부인 사람들의 통렬함과 아름다움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우리 인간은 자신과 자연 속의 나머지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고유한 책임을 갖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관리자로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절대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과거를 바꾸거나 인형극처럼 현재를 조작할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은 강요가 아닌 설득, 조작이 아닌 사랑이다. 여러 면에서 이제 너무 늦었다. 너무 많은 것이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고통 받는다.
우리는 솔직해야 한다. 우리는 끔찍한 시간을 살고 있다. 우리의 행동이 우리를 지탱해주는 지구를 파괴하는 걸 알면서도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 우리는 현재 상황을 무시하거나 기술적 기적이 우리를 구해주기를 바라면서 맹목적으로 앞을 향해 뛰어든다. 현대 세계는 지구의 한계를 넘어섰으며 우리 문명은 붕괴할 것이다. 이제 중요한 질문은 (1)얼마나 남을 것인가 (2)우리는 폐허에서 지속가능한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 두 가지다.
우리가 나쁘게 행동하는 이유 중 한 가지는 현대 세계가 현실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잘못 인도함으로써 인류 전체가 점점 먼 곳으로 이끌려왔다. 더 나은 이해가 없으면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1)거의 남지 않는다 (2)아마 불가능하다, 가 될 것이다. 세계를 이해하는 더 좋은 방법을 만나는 행운을 가진 사람들인 우리는 그것을 공유해야 할 깊은 책임이 있다.
나로서는 화이트헤드 철학이 더 좋은 방법임을 발견했다. 그의 유기체철학 혹은 과정철학은 최상의 생태적 사고와 최상의 인본적 사고를 결합시키고 과학적, 종교적, 윤리적, 예술적 통찰력을 한데 모은다. 아직 적은 숫자이지만 점점 늘어나는 다른 이들처럼 나는 화이트헤디언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말한 모든 것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이들처럼 화이트헤드 식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화이트헤드식 접근법을 공유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이 소유한 것에 만족하거나 대안이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무시된다. 그러나 이제 많은 사람들이 우리 행동의 광기를 보고 다른 길이 없는지 질문한다. 그래서 나는 열 가지 설명을 통해 보다 나은 이해와 좀더 희망적인 함의를 제시하려고 한다. 이 아이디어들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 현실은 상호 연관된 사건들로 구성된다.
현대 세계는 시계를 모델로 한 자연의 관점 위에 세워졌다. 거대한 중세의 시계들은 시간을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듯 움직이는 인형으로 구성된 쇼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것은 생명체가 궁극적으로 무생물과 함께 복잡한 메커니즘을 이룬다고 설명했다. 과학의 임무는 이 메커니즘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전 세계는 움직이는 물체들로 구성됐다. 이 모델을 기반으로 한 과학은 세계에 대해 매우 많은 것을 알아냈다.
이런 사고를 멈추게 한 핵심은 과학자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인간이 기계적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물체의 세계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대철학의 창시자인 르네 데카르트는 인간의 사고가 물체의 세계와 매우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물질과 함께 정신을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실재(entity)로 간주했다. 정신을 인간으로 제한함으로써 그는 세계의 나머지를 기계론적 과학의 영역으로 넘겼다.
실용적 목적을 위해 현대는 이원론을 채택한다. 실험을 하거나 새로운 발견을 하거나 새로운 법칙을 고안할 때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탐구하는 기계적 세계의 부분으로서 그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육체를 포함해 자신들을 나머지 세계로부터 격리시켜 생각하는 것은 후대의 철학자들을 깊이 괴롭히는 이론적 문제를 만들어냈다.
기계론적 과학의 성공은 심지어 인간의 경험조차 포함하는 많은 분야에서 엄청난 자신감을 주었다. 그런데 진화론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유사한 전(pre)인간 단계로부터 점진적 단계를 밟아서 발달했다고 설명한다. 이런 설명은 인간의 정신과 나머지 모든 것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계속 주장할 수 없게 만든다. 현대 사고의 지배적 관점은 이론적으로 모든 현실이 기계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다.
기계론적 사고는 일반적으로 원자적이다. 원자는 더 작은 단위로 나눠지지 않는 극소의 물질 단위로 이해된다. 이 원자들은 움직이거나 모인다고 간주되며, 과학의 연구대상인 모든 복잡한 실재들은 이런 집단화와 운동에 의해 설명된다고 본다. 그런 세계에서는 질과 가치, 감정과 믿음, 희망과 목적은 인과적 혹은 설명적 역할을 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그것들은 부차적이며, 그런 것이 생길 때조차 진짜 현실(real)의 보조일 뿐이다.
이런 세계관은 실제 인간의 경험을 움직이는 물체들의 세계에다 꿰어 맞추는 문제점 이외에 또 다른 충격을 경험했다. 원자라고 불리는 것이 원자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즉, 그들은 더 작은 실재로 분해될 수 있다. 이런 부(sub)원자들은 그 동안 과학이 이해해온 작은 덩어리들의 행동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또한 작은 덩어리들이 해야 하는 방식대로 상호 독립적이지도 않았다. 그것들은 심지어 기계론적 과학의 원리에서는 금지된 방식으로 공간적으로 독립돼 있을 때조차 서로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과학의 응답은 과거의 기본적 이해를 고수하면서 이런 문제들을 인간의 경험처럼 궁극적으로는 설명될 수 있는 비정상으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다른 응답이 가능하다. 진화론이 인간의 경험과 사고는 자연 세계의 일부라는 것을 보여 주었을 때 일부 사상가들은 자연이 당시의 지배적인 모델보다 더 풍부하고 복잡하다고 선언했다. 인간이 감정과 희망과 목적을 갖고 있다면, (1)그들의 동물 조상들도 이런 것들을 가졌고 (2)오늘날 다른 동물들도 이런 것들을 공유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의 일부라는 것이 인간의 경험을 위한 유일한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연은 그 자체로 경험적 특성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매우 뚜렷하고 놀랍게도, 부원자의 세계에 대해 과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순전히 물질적인 특성보다 경험적 특성을 가진 자연에 더 잘 맞는다.
우리가 아는 과학은 아마 자연의 이런 특성들을 무시하도록 강요 받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이 연구해온 세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이 스스로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과학자들은 그들의 발견이 자연 세계를 망라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대안으로서 과학은 중세의 시계들로부터 파생된 모델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아마 다른 모델이 모든 데이터를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화이트헤드를 따르는 사람들은 후자의 대안을 채택한다. 우선 그는 현실이 근본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지속돼온 것들로 구성된다는 가정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물질적 실체의 개념이다. 우리는 실제로 이것들이 무엇인지 모르고, 철학자들은 이것들이 편의상의 가정일 뿐 실제 증거가 없다고 지적한다. 또 다른 접근방식은 세계가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세계에는 전쟁이나 선거와 같은 커다란 사건이 있다. 이것들은 무수한 작은 사건들, 궁극적으로는 동물이 어떤 일을 경험하는 순간이나 양자의 운동들로 쪼개질 수 있다. 이것들은 큰 사건들을 구성하는 최소 사건들의 사례이다.
인간 경험의 한 순간이 하나의 사건이며,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잘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추상적 사고나 의식처럼 부원자적 사건에는 존재하지 않는 많은 특징들이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모든 사건들에 공통적인 특징들을 식별해낸다. 그것은 선행 사건의 요소들의 종합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뒤에 놓여있는 사건들의 참여자가 된다. 그것은 스스로의 생성(becoming)에 참여하며, 그래서 그 사건이 왜 그렇게 일어났는지 설명한다면 그 사건은 그 자체의 원인의 하나로서 포함되어야 한다.
이것은 사건이 미래에 일어날 사건의 객체일 뿐 아니라 스스로의 생성에서 주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것이 행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스스로의 생성과 미래의 사건에서 그것이 행한다는 점에서 주체이다. 주체로서 그것은 주체적 특성을 갖는다. 화이트헤드는 그것이 매력적이고 정서적이라고 본다. 그것은 만족스러운 정서적 상태에 이른다. 반면 기계론적 세계관에서는 실재는 모든 다른 실재에 대해 외부적이다. 화이트헤드의 사건은 과거 실재의 특성들을 포함하며, 각각의 사건이 미래 사건들의 구성에 참여한다. 내적 관계가 중요하다.
화이트헤드는 육체와 정신 사이에 구분이 있다는데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순수하게 육체적이거나 순수하게 정신적인 사건은 없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건은 부분적으로 육체적이다. 이것은 사건이 과거로부터 많은 부분을 물려받았다는 뜻이다. 모든 사건은 부분적으로 정신적이다. 이것은 사건이 스스로 선택한 가능성들을 포함한다는 뜻이다.
현대과학의 전제가 되는 지배적 개념과 화이트헤드 철학을 모두 공부한 사람들에게 화이트헤드의 사고가 증거를 더 포괄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이 화이트헤드 철학을 채택해왔다. 그러나 대부분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배운 패턴대로 연구를 계속하기를 원한다. 그들이 기존 방식대로 새로운 자료를 해석하는 한 그들은 다른 방식을 생각할 수 없다. 현재 방식을 지속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재난으로 이끄는 많은 실천과 정책들을 지지한다. 대안을 생각해야 하는 매우 타당한 이유들이 있다.

2. 내재적 가치의 단계(gradation)가 있다.
무엇이 얼마나 가치가 있냐고 질문할 때 우리는 종종 그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하고 이익이 되는지를 뜻한다.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이 시장에서 지불할 가격이 답변이라고 믿는다. 물론 그들은 우리가 숨쉬는 공기에는 돈을 내지 않지만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런 문제를 다루기 위해 그들은 상대적 희소성을 고려하는 복잡한 이론을 도입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가치를 결정하더라도 ‘도구적’ 가치, 즉 어떤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것에 도구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가치로 여겨지는 것이 또 다른 가치를 가질 때만 의미가 있다. 만약 그것이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즐거움을 더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그 자체로 가치 있게 여긴다. 인간의 즐거움은 그것이 다른데 기여하는 정도에서 대개 가치가 없다. 그것은 그 자체로만 가치가 있다. 그것은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 물론 사람의 즐거움은 도구적 가치를 가질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즐거움에 기여할 수도 있다.
가치란 정의하자면 우리가 증가시키고자 하는 무엇이다. 극단적 사례로 어떤 사람이 즉각 생성되는 경험만을 증가시키고자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경험과 다른 경험 사이에 연속성이 높은 우리 같은 피조물에게는 연속적인 사건 경험의 내재적인 질에 대한 관심이 있다. 많은 동물에게는 유아나 그룹 구성원에 대한 관심이 있다. 인간에게는 내재적 가치의 증가에 대한 관심이 거의 무제한적이다.
즐거움은 주관적 상태다. 한 과학자가 이 상태의 육체적 상관관계를 발견하고 주관적 느낌이 육체적 발생의 부산물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육체적 발생은 내재적 가치가 없다. 내재적 가치라는 생각은 지배적인 과학의 세계관이 발생에 아무런 실제의 역할을 허용하지 않는 주관적 세계에 묶여있다. 그리고 내재적 가치가 없는 곳에는 도구적 가치 또한 없다. 원칙적으로 과학적 세계관을 완전히 채택할 때 물리적 대상의 한 배열은 다른 어떤 것보다 좋거나 나쁘지 않다. 실용적으로 말해 대부분 과학자들은 이런 점에서 이원론자들이다. 과학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가치를 무시하지만, 개인의 삶에서는 스스로의 안락과 타인들의 복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화이트헤드 사상은 이런 가치중립적 우주와는 극적으로 대비된다. 화이트헤드에게는 모든 사건이 발생 자체로 주제이며, 주체 각각의 존재 방식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말하자면 모든 사건이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 물론 이런 내재적 가치는 또한 미래의 기회에 도구적 가치 또한 갖는다.
인디언의 사고는 인간 이외 사물의 내재적 가치에 가장 충실하다. 적절한 연속적 관심은 보통 감성의 한계 혹은 삶의 한계에 주어진다. 자이나 교도들은 내재적 가치를 지닌 창조물을 파괴하지 않는 데서 더 나아간다. 서구에서 슈바이처는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을 가르쳐 유명해졌다. 인간이 아닌 생명체의 파괴에 대한 서구의 일반적 무관심과 모든 생물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날카롭게 대조된다.
화이트헤드는 내재적 가치를 생물에만 제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은 상대적으로 부원자적 사건의 안녕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실용적 목적에서 생명의 감정에 대해 연속적 관심을 갖는 건 타당하다. 화이트헤드는 데카르트나 그의 서구 추종자들보다 인디언이나 슈바이처에 훨씬 가깝다. 그러나 그는 어디에도 제한된 경계선을 그리지 않는다.
화이트헤드는 모든 “생명은 강도”라고 가르쳤다. 즉, 생명은 먹이를 파괴하는데 의존한다. 내재적
가치가 이 과정에서 파괴된다. 물론 우리 인간이 붉은 고기나 모든 고기, 모든 생선, 모든 해산물을 피한다면 더 적은 내재적 가치가 파괴된다. 우리는 많이 혹은 적게 강도질 하지만, 어떤 자이나교 성인들이 하듯이 우리 자신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강도질”을 한다.
화이트헤드의 결론은 우리가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우리의 강도질에 선을 그어야 한다는 것이라기보다 “강도는 정당화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재적 가치를 지닌 어떤 실재의 파괴는 그 파괴가 다른 것들의 복지에 기여함으로써 정당화될 수 있다. 모든 사건이 어떤 내재적 가치를 갖더라도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가정한다. 실제로 그 차이(variation)는 매우 극단적일 수 있다. 개의 복지를 위해 진드기를 죽이고 인간의 복지를 위해 박테리아를 죽이는 걸 정당화하기는 쉽다. 인간의 소비를 위해 채소를 죽이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내재적 가치의 정도가 있고, 인간은 이런 종류의 합리적 판단을 하는 위치에 있다는 개념에 의존한다.
내재적 가치와 도구적 가치의 구분은 후자의 폄하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내재적 가치의 무게가 낮은 창조물이 가장 큰 내재적 가치를 지닌 창조물보다 생태계에서는 더 중요한 경우도 종종 있다. 예를 들어 플랑크톤은 고래보다 해양에 훨씬 중요하다. 분명히 우리는 고래를 구하기 위해 막대한 플랑크톤을 희생시킬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래와 플랑크톤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고래를 희생시켜야 한다. 플랑크톤이 없으면 고래도 살 수 없기 때문에 이 결정은 쉽지만, 나는 이 요점이 분명하기를 바란다.
물론 많은 결정이 매우 어렵다. 음식을 얻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동물을 죽이는 게 도덕적일까. 동물의 서식지를 농지 확장으로부터 얼마나 보호해야 할까. 인간을 위험한 약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어떤 동물로 어떤 실험을 하는 게 정당화될까. 토종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외래 종을 언제 죽여야 할까.
마지막 질문은 내재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는 부각되지 않는 중요한 질문이다. 생태계는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강조되지 않는 중요한 질문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생태계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적 서식자들을 통해서만 내재적 가치를 갖지만, 이런 서식자들은 생태계의 통합성을 유지함으로써만 이익을 얻는다. 어떤 경우 인간의 간섭은 생명이 거의 없는 지역을 선택해서 그것을 많은 생명체가 사는 곳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희귀한 생태계를 파괴하고 비슷한 많은 것에 하나를 추가하는 일이 된다. 생태계의 다양성이 갖는 가치는 무엇인가. 희귀종 풍뎅이를 보호하기 위해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할 수 있을까.

3. 하나님은 가치의 극대화를 목표로 한다
질문은 계속된다. 화이트헤디언에게는 기성품 응답이 없다. 우리의 공헌은 이러한 문제를 논의하고 관련된 고려사항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순간적 인간 경험과 같은 사건의 본질적인 가치는 그것이 합성하는 다양성에 의해 증가한다. 이것은 희귀종의 보전에 정당성을 더한다. 그러나 수천종의 희귀한 곤충이나 박테리아에 대해 아는 게 인간에게 많은 이익을 준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성을 인식하기에 부족한 역량으로 인해 그 가치가 제한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우리는 이러한 다양성이 우리에게 기여한 것(흔히 인용되는 의학적 혜택의 가능성 등)에 더해 생명체의 무수한 다양성이 그 자체로 혹은 전체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깊고도 정당한 직감에서 화이트헤드를 따른다. 이러한 직감은 모든 생명이 통일된 경험을 갖거나 그렇게 존재해야만 완전히 정당화된다는 게 화이트헤드의 제안이다. 그를 따르는 우리는 생명권역(biosphere)을 단순화하는 건 하나님을 빈곤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다양성을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건 아니다. 잘 모르는 딱정벌레 종의 생존에 필요한 땅을 확보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경제적 기회를 부정하는 건 하나님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다. 요점은 전체의 가치에 대한 다양한 고려 없이 어떤 결정을 내리면 안 된다는 점이다. 결국 우리가 알려고 노력해야 하는 건 전체의, 전체를 위한 가치다.
우리는 우주가 포괄적 가치의 증가를 명령 받았다고 믿는다. 이는 그런 증가가 하나님의 목표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의 사건에 신성하게 내재함으로써 이 목적을 실현한다. 이 내재는 모든 창조물에게 시공간에 필요한 가치를 실현하려는 목표로 준다. 나는 이 목표가 사건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거나 보다 광범위한 관심의 지평을 가질 수 있다고 앞에서 지적했다. 화이트 헤드의 관점으로 볼 때 관심의 넓이는 도덕의 척도다.
현대적 시각에서는 목적이 일어나는 일에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화이트헤드의 관점은 목적이 각 사건이 시작되는 기초라는 것이다. 우주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물질의 덩어리들로 구성된 세계에서 목적을 위한 자리란 없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과거 요소들의 합성으로서 발생하는 사건들로 구성된 세계에서 시공간에 맞는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는 목적은 기초가 된다. 현대적 시각에서 하나님에게 주어진 역할이라면 물질들의 창조자이자 입법자이다. 그렇게 해서 우주는 하나님에, 하나님은 우주에 참여한다.
하나님은 태초에 가치의 실현을 증진시키는 가장 보편적 특징들을 결정했을 것이다. 이 신념은 “인류”의 원리로 잘못 불리는 것과 들어맞는다. 화이트헤드로서는 이것이 각 생명에 맞춘 무수한 상수의 집합을 갖는지 설명하기 위해 수백만 개의 우주가 필요하지 않다. 모든 현실의 바탕에 있는 가치들의 목적은 (원리에 대한) 설명만으로 충분하다.
화이트헤드의 목적론에 대한 확신은 현대 과학이 강력하게 반발해온 목적론의 갱신이 아니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화이트헤디언이 볼 때 현대과학은 중세과학이 사용해온 최종 원인과 보다 근래의 진화론에 대한 설명을 올바르게 거부했다. 우리는 그런 형태의 목적론의 재귀를 제안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목적론에 대한 알레르기는 다른 종류의 부조리를 초래했다. 예를 들어 현대 신다윈주의 진화론자들은 진화과정에서 동물의 목적이 어떤 역할을 했다는 점을 과학적으로 거부해야 한다고 여긴다. 동물들이 변화하는 환경 상황에 적응하고, 식량을 찾거나 스스로를 방어하는 새로운 방법이 유전적 변화가 긍정적 효과를 갖는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이런 거의 확실한 사실은 진화적 변화에 대한 표준적 설명에서 완전히 누락돼 있다. 그것이 목적의 역할이란 문을 열게 되는데 많은 생물학자들은 목적이 심지어 증거를 배제하는 비용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제외돼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종류의 기계론적 도그마주의는 그것이 대체한 중세과학보다 나을 게 없다. 살겠다는, 잘 살겠다는, 더 잘 살겠다는 깊은 의지가 없다면 진화도 없다. 그러나 무신적 과학자들의 의심은 기초가 든든하다. 만약 동물의 목적이 진화에서 어떤 역학을 한다면 현실의 주체적 측면은 어쨌든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 특히 목적을 가진 요소들은 기계론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우주, 자연, 도, 성령, 조물주, 혹은 화이트헤드와 나의 명명법으로 “하나님”은 생명계에 만연한 살겠다는, 잘 살겠다는, 더 잘 살겠다는 목표의 원천이다. 이것은 어떤 가치의 실현이라는 일반적 목표를 가진 생물권역에서의 표현이며 이 목표는 현실 전체에 만연한 목표이기도 하다.
만물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목표는 창조물과 신성한 삶에 이바지하는 가치의 실현이다. 이것이 화이트헤드의 비전이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과학과 상충하지 않고 과학적 정보를 오히려 간단하게 설명해준다. 또 현재의 과학이 숨기거나 모호하게 만드는 사실을 알도록 해준다. 그것은 신자뿐 아니라 무신론자들 사이에서도 종종 보이는 영감에 근거한다. 이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관심을 흩트리지 않으면서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생태적 사고를 깊이 격려한다. 그리고 긴급히 요구되는 윤리학을 정초하며 종교적 정신의 가장 세련된 형식을 제공한다.

4. 인간은 고유한 가치와 책임이 있다.
화이트헤드 추종자들에게는 인간이 서로 다른 창조물들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자연세계의 일부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직 인간만이 내재적 가치가 있다는 견해에 맞서 나는 모든 사건이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고 확신하는 화이트헤드를 따른다. 인간은 모든 것의 척도가 아니다. 우리의 오만은 엄청나고, 그 결과는 끔찍하다. 그러나 화이트헤디언은 인간이 특별한 가치나 중요성을 주장할 수 없는, 여러 종 가운데 하나라는 주장은 따르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여러 종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우리 종은 모든 다른 종들과 집단적으로, 개별적으로 구별되는 중요한 존엄이 있다. 우리가 특별한 고유성을 주장하는 건 정당하다.
인간은 타인과 다른 종, 그리고 우리가 부분을 이루는 전체를 보살피는 능력에서 고유하다. 우리 지식으로는 다른 생명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만 우리가 하듯이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의 출중한 능력이 있지만 우리는 전체의 가치를 증진시키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힘과 능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하는 대신 그것을 무시하거나 부정하고 하나님의 목적에 반대되는 제한된 목표를 위해 우리의 능력을 쓴다는 점에서도 고유하다.
우리는 지구상의 어떤 다른 창조물보다 인간의 경험에서 더 많은 가치가 실현됨을 믿는다. 우리가 돌고래와 고래의 자질에 감탄하는 것을 배웠던 것처럼, 우리는 경험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의 대부분이 거의 확실하게 부족한 언어의 복잡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결코 우리가 그들의 운명에 무관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일차적 관심사는 단순히 임의적 인간중심주의 혹은 “종파주의”의 문제가 아니란 뜻이다. 우리는 무엇이 더 큰 내재적 가치를 만드는지에 대한 상대적으로 객관적 이해를 갖고 있으며, 우리 종이 이의 현실화에서 고유한 능력을 가졌다는 판단에서 정당화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을 위해 모든 종을 보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보존하는데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사물들의 체계에서 우리 자신이 갖는 고유한 중요성을 인정하는데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런 중요성은 가치 실현을 위한 고유한 잠재력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속한 세계에서 우리 종이 현존재로 진화하면서 너무 많이 파괴한 데 대한 고유한 책임이기도 하다. 우리가 환경을 망쳐온 유일한 종은 아니지만, 다른 어떤 종보다 대규모로 파괴해왔다.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를 의식적으로, 체계적으로 무시해왔다. 다른 종이 파괴적으로 행동할 때는 도덕적 타격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생물권역과 하나님에 대해 비교할 수 없는 강도의 범죄를 집단적으로 저질렀다.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디. 이것이 우리를 다른 종들로부터 극적으로 분리시킨다.
우리가 다른 파괴적인 종, 예를 들어 사람들을 죽이는 세균을 만날 때 우리는 그 파괴력을 포함해 종 자체를 쓸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훨씬 더 파괴적으로 행동할 때 우리의 악행을 감당할 다른 종은 없다. 오직 우리만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런 우위를 심각하게 고려하기를 거부한다. 개인의 경험에서 가장 큰 가치를 구현하는 우리는 스스로를 포함해 생물권역의 생존에 대한 즉각적인 위협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인간에게 허세를 줄이고 우리의 자리를 상호연결된 전체 속의 한 종으로 여기라는 주문은 현명하지 않다. 우리가 세계에 끼친 피해는 세계 스스로 치유하기에는 너무 심각하다. 그러려면 너무 늦다. 우리 자신에게 그동안 잘못 사용해온 특별한 권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회개하라고 요구하는 게 낫다. 회개는 다른 방향으로 돌려 우리가 특별한 위치를 갖는 전체 생물권역을 위해 우리의 권력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간섭하지 않은 곳에서는 생명이 번성하고 가치가 증가했지만, 의미로서 “자연”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와 떨어진 자연이 성취한 균형을 어지럽힌 자연의 일부다. 우리는 자신이 창조한 새로운 종으로 대체함으로써 자연의 진화를 가로막았다. 가치들의 창조에서 하나님과 협력하는데 힘을 쓰는 대신, 치아의 일부로 하나님의 지속가능한 창조를 우리 자신의 지속가능하지 않은 창조로 대체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의 방식에 대해 많이 배웠고, 세계의 구원을 위해 신과 함께 일하는 위대한 재능을 갖게 됐다.
우리가 집단적으로 지구에 가한 거의 치명적인 상해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해로울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집단적으로 끔찍한 죄를 지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강렬한 개인적 죄책감과 후회가 된다면 가치의 증가가 아니라 감소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방향을 바꾸는 집단적 회개가 필요하다. 이것은 객관적 죄의 인식과 후회의 감정 없이는 일어나지 않지만, 심화되면 안 된다. 매우 민감한 개인이라면 덕을 갖추기 위해 후회를 강조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사람들은 충분히 후회한다면 자신이 참여한 죄를 갚는다고 생각한다. 그건 그렇지 않다. 죄책감과 후회가 회개로 이어진다면 집단적 죄에 참여했다는 인식에 대한 건강한 반응이 되지만, 다른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인류가 세계에 행한 일에 대한 너무 많은 개인적 후회는 오늘날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지배적 세계관은 개인주의를 부추긴다. 각각의 개인은 오직 자신들이 한 행동에 대해서만 책임을 느끼도록 배웠다. 나아가 그런 행동이 옳은 것으로 간주된다면, 그 결과가 아무리 파괴적이라도 개인은 결백하다고 여겨진다. 비난은 다른 곳을 향한다. 기업의 책임에 참여한다는 생각은 이런 지배적 세계관과 일치하지 않는다.
화이트헤디언은 사물을 다르게 본다. 공동체와 떨어진 개인은 없다. 매 순간의 존재는 지난 사건의 종합이다. 그런 종합이자 스스로의 생성의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결정되면서 존재는 자신이 탄생한 세계를 초월한다. 그러나 존재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그 세계에 의해 구성된다. 그리고 그 세계는 고도로 구조화돼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거,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주로 구성된다. 과거는 이미 스스로 해석돼 우리에게 온다. 이 해석이 주로 우리의 자기이해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나는 자신을 화이트헤디언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시카고대학 신학원에서 화이트헤디언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주어졌다. 내가 다른 곳에서 공부했다면 이런 자기정체성은 생기지 않았거나 만약 생겼다면 실제로 나의 자기이해에서 그랬던 것처럼 강력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내 자신의 결정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 정반대다. 그러나 내 결정의 역할은 특정 공동체와의 동일시를 확인하고 그 공동체의 형성과 확장에 참여하는 것이다. 나는 그 공동체가 해온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 이것이 나의 자기이해에 기여했다. 그러나 그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 나의 자존감을 높였다면 공동체의 실수나 한계에 대한 인정 역시 나의 자기이해의 한 부분이 돼야 한다. 이것은 내가 그 실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그런 한계를 초래하지 않았을 때도 그렇다. 좋든 나쁘든 나는 성취와 실패에서 단체의 현실에 참여한다.
나는 미국인이다. 나는 이 공동체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나에게 세계에서의 특정 지위와 특권을 주었다. 나는 집과 학교에서 배운 대로 내 조국에 자부심을 가졌다. 이것이 내 자존감에 추가된다. 나 자신을 미국인이란 정체성에서 떼어놓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나중에 시민권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시민권을 포기한 미국인으로 남을 것이다. 내가 조국의 성취에 자부심을 갖는다면 내가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조국의 범죄에서도 나를 분리시킬 수 없다. 참여를 인정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집단적 회개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의 회개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없었을 만한 개인적 책임감을 가질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화이트헤디언들에게 개인 정체성은 집단 정체성과 떼어놓을 수 없다. 아마 집단 정체성의 가장 강력한 형식은 인간일 것이다. 인류 전체가 공포스러운 죄악에 가담했다면 그 지위로부터 많은 이점을 얻고 많은 행동이 정당화됐던 한 인간으로서 나는 책임감을 공유한다. 사실 나는 인류의 파괴적 행위에 매우 직접적이고 지속적으로 가담해 왔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불참은 제한적 참여보다 나쁜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이상적으로 말해 내가 그런 환경에서 가능한 최선을 다했다면 개인의 죄는 없다. 그러나 나에게 파괴적 행동을 강요한 상황을 변화시킬 책임은 공유한다. 개인적 결백은 중요한 목표가 아니다.

5. 교육은 지혜를 위한 것이다
현대 세계관은 교육을 형성하고 교육을 통해 스스로를 전파한다. 그 세계관이 잘못되고 현대사회를 타락시키기 때문에 현재의 교육은 선보다 해악이 크다. 그렇다고 전혀 선이 없는 건 아니다. 많은 선을 행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교육은 생명을 유지하는 지구의 수용력을 파괴하고, 그래서 이런 운명으로부터 우리를 구하기보다 자기파멸로 이끈다.
문제는 조기교육에 있는 게 아니다. 유치원에서 교사들은 아이들과 그들의 건강한 발달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빠르게 관심은 빠르게 경제를 지탱하고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주제와 기술로 옮아간다. 경제에 대한 사회의 요구와 요구 받는 경제의 성격을 고려할 때 경제에 맞춰지는 게 노동자들의 복지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들을 여기 맞춰 준비시키는 건 합리적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런 종류의 교육이 어린이들을 필연적인 종말로 가는 경제에 참여시키기 위한 준비일 뿐 아니라 엄청난 고통을 준다는 점이다. 파괴적 경제에 맞는 준비를 해온 이들은 가능한 한 그 경제에 매달리지만, 그 파괴성은 명백하다.
고등교육은 훨씬 더 문제적이다. 이 단계 교육의 표준은 연구중심 대학이다. 성공적인 연구는 어떤 영역의 데이터를 분리시키고 그 분야의 연구방식을 개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결과는 학문 “분과”로 불린다. 모든 지식을 각각의 분과로 조직하고 그 각각이 인간에게 유용한 정보를 추가하는 게 이상으로 여겨진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각 분과학문은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 한 주제는 다른 주제만큼 연구에 적합해야 한다.
연구자 개인의 관심이 어느 정도는 반영될 것이다. 그러나 성과가 쉽게 나올수록 연구에 돈이 몰린다. 결과적으로 대부분 연구는 펀딩 여부에 좌우된다. 의료, 기업, 군사 목적에 돈이 주로 몰리므로 대부분 연구가 이 분야에 집중된다. 연구중심 대학이 가치중립적이므로 연구 평가는 수혜자의 입장에서 독단적으로 이뤄진다.
대다수 연구는 그것이 속한 분과학문의 현재 사고체계에 의해 엄격하게 결정된다. 확립된 방법이 사용된다. 이 방법들에 의해 연구될 수 없는 내용은 연구로 인정받지 못한다. 대부분 분과에서 방법과 이론 사이에 논쟁이 있으며, 연구자들은 이것을 연구의 지적 실체라고 믿는다. 그러나 분과의 역사에 대한 연구나 그 논쟁이 일어난 맥락에서의 기본 가정에 대한 숙고는 거의 없다.
연구중심 대학은 인간에 대한 정보량을 엄청나게 늘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이 정보가 어떻게 사용돼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주지는 않는다. 붕괴에 이를 만큼 극단적으로 질주해온 현대 세계의 가정들에 대한 비판도 없다. 지속가능성을 위해 필요한 사회와 경제의 변화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대학의 어디에서 오늘날 세계가 어디로 가는지 이해하기 위해 도움을 얻을 수 있는지 묻는다면, 그 대답은 모든 곳이다. 물론 많은 독립적 연구에서 얻어진 정보는 일관성이 없고 지침을 주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대학은 붕괴되는 문명을 구하는 것이 군대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지구온난화가 가속화하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지만, 축구 점수에 대한 정보보다 중요하지 않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전자보다 후자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분과의 경계를 넘어 글로벌 위기에 대해 일관성 있게 고민하는 일부 교수들이 있지만, 그들은 대학으로부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다. 고등교육에 대한 명망 있는 저자인 스탠리 피시의 최근 책은 지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대한 관심보다 가치중립적 연구를 지지한다. 책 제목은 “네 나름의 세계를 구하라(Save the World on Your Own Time)”이다. 세계에 대한 관심은 현대 대학 모델에 맞지 않는다.
연구중심 대학은 전문대학원들이 보완해주는 수많은 학과들로 구성된다. 초기교육에서 학생들은 노동자가 될 준비를 하는데 비해 대학은 학생들을 연구자나 교수뿐 아니라 경영인, 의사, 교사, 변호사, 엔지니어 등이 되도록 준비시킨다. 분과 별로 전문화된 학습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직업별 실용교육은 분과보다는 전문대학원에서 이뤄진다. 피닉스 대학은 분과학문을 넘어선 새로운 종류의 고등교육을 개척했다. 이 대학은 숙련 직무교육을 제공한다. 또 훈련 받은 직무와 직결된 연구에서 나온 정보를 제공한다. 명백히 이런 종류의 교육에 대한 수요가 있다. 가치중립이 유일한 가치인 대학들은 점점 이런 수요에 부응한다.
모든 것과 대조적으로 화이트헤드의 비전은 지혜를 지향하는 교육을 요구한다. 물론 모든 사회는 젊은이들이 경제를 포함해 사회에 참여하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첨단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기관이 필요하며 다음 세대의 일부는 이런 연구를 잘 하도록 교육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 절망적 위기의식으로 지혜를 추구하고 이를 얻도록 젊은이들을 격려하는 연구기관이 필요하다.
지혜 추구는 초기의 인격 발달에 대한 관심과 이어진다. 적어도 화이트헤디언에게는 지혜란 성숙한 인간의 중요한 특성이다. 과거 세기에는 고등교육이 지혜를 포함한 인격 발달을 지향했다. 인문학은 이런 관점에서 유용하게 여겨졌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분과학문에 걸쳐있는 사상을 가르치는 인문대학들이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대학들은 분과 연구에 맞춰지지 않은 교수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화이트헤디언은 고등교육에서 인문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싸울 것이다. 그럼에도 인문학의 특별한 역할에 대한 고전적 이해로 돌아가는 것으로는 오늘날 고등교육에 필요한 사명을 완수할 수 없다. 인문학은 전지구적으로 생물권역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 없던 시기에 생겨났다. 그것들이 인간중심적인 반면, 우리는 인간과 나머지 자연의 통합이 최우선 과제인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 인문학은 사회적 책임을 받아들이면서도 개인주의를 독려한다. 또 엘리트주의로 인해 여유가 있고 그 여유를 잘 활용하려는 이들과 그저 오락을 즐기려는 보통 사람들을 분리시킨다. 지혜는 중요성의 판단에서 드러난다. 연구중심 대학이 이런 종류의 판단을 거부하는 것은 지구의운명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디언은 대학이 연구기관으로서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하며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통해 커리큘럼을 재조정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나아가 학생들이 이런 비판적 반성에 참여하고, 이런 결정을 자신의 연구과제와 직업에 연결시키도록 독려함으로써 대학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바꿔야 한다.
이것은 특별한 초점을 포기하는 게 아니다. 세계는 물리학자와 엔지니어, 초등학교 교사와 경제학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물리학자와 엔지니어는 인간에 대한 특별한 주의와 더불어 생물권역의 번성을 고려하면서 연구와 프로젝트를 결정해야 한다. 초등학교 교사는 어린이들이 미리 겁을 먹지 않도록 하면서 어떻게 그들을 우리 시대의 현실로 인도할지 고민할 것이다. 경제학자는 어떻게 하면 경제를 성장시킬지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어떤 경제의 경제를 제공해야 할지, 어떻게 그 방향으로 빨리 이행할지 질문해야 한다. 모든 분야에서 기본 가정은 끊임없이 발화되고 재고돼야 한다.
나는 고등교육 수준에서만 지혜를 교육의 가장 기초적 목표로 삼는 게 어떤 것인지 논의했다. 그러나 이런 형식의 고등교육은 초기교육과 단절되면 안된다. 생물권역의 상태에 대한 숙고와 이런 맥락에서 인류의 전망은 청소년들에게도 중요하다. 사회가 격려해준다면 그들 역시 지혜의 척도가 될 수 있다.

6. 경제는 생물권역의 번성을 향해야 한다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혁명은 산업혁명이다. 그 이전까지는 대중의 삶의 방식에 많은 중요한 변화가 있었지만, 농업경제에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시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대부분 사회에서 사람들은 토지에 생존을 의지했고, 소수만이 농부들의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의 잉여를 흡수해 부를 얻었다. 이런 잉여가 마을과 도시의 삶을 지탱했으며, 여기서 장인, 상인, 전문가의 중산계급이 도시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발달했다. 소수는 호사스럽게 살았다. 대개 빈민층에 대한 제한된 식량공급이 빠른 인구증가를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세기에 발견한 것은 같은 수의 노동자가 더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의 초점은 의류, 가구, 일상용품, 도구, 기계의 생산에 있었다. 노동자들을 조립라인에 배치하고 석탄 에너지로 그들을 지원함으로써 노동시간당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과거에 희소했던 상품이 풍부해지고 가격도 크게 떨어졌다. 부자들의 사치품이었던 것을 대중들도 쓸 수 있게 됐다.
거기에는 처음부터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었다. 장인들이 느꼈던 만족감이 조립라인 노동자들에게는 없었다. 공장에서는 전례 없는 공해가 발생했다. 공장 투자자들의 이익 추구는 농촌에서 소작인의 착취보다 더욱 악독한 노동 착취로 이어졌다. 산업 도시는 빈민가로 가득 찼다. 실업은 농업사회에서 거의 경험하지 못한 문제가 됐다. 지주 귀족은 그들의 권력이 산업 자본가들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단순한 이익 추구로 변했다. 모든 사람들이 산업화로 인한 변화에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시계를 되돌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산업모델은 점점 더 넓게 적용됐다. 결국 농업도 산업화되었고, 산업적 방법의 특징은 상품화에도 적용되었다. 노동시간당 생산으로 정의되는 생산성 증가는 모든 곳에서 표준이 되었다. 산업경제는 더 큰 시장을 요구했다. 규모의 경제가 돼야 거대한 공장이 작은 공장들보다 가격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제품을 판매하려면 더 많은 고객이 필요했다. 산업권력이 전세계에서 시장을 찾으면서 국제관계에 영향이 미쳤다.
공장들은 종종 지역에서는 충분하지 않은 천연자원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경제가 주요한 정책 관심사인 국가들은 자원 확보에 관심을 가졌다. 제국주의가 진전한 또 다른 계기가 있다.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려는 욕망이 2차 세계대전 이후 특별히 커졌고, 그래서 조건이 좋은 곳이라면 어디서든 상품을 생산하고 수요가 있다면 어디서든 판매했다.
애덤 스미스로 시작된 현대 경제이론은 산업화와 더불어 성장했다. 경제학자들은 산업화의 이점을 설명하고 산업주의자들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사람들에 맞서 산업주의자들의 편을 들었다. 그들은 공장생산뿐 아니라 전체 경제가 재화와 서비스 생산량으로 측정하는 “성장”에 의해 추동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글로벌 시장으로 향하는 움직임의 강한 옹호자였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연구와 이론의 기반을 산업사회에 두었다. 오늘날에는 금융부문이 생산부문을 지배하게 되었다. 금융은 정부마저 장악했다. 통화공급의 조절이 권력의 주요 원천이다. 경제학자들은 산업경제를 대체한 이런 현상에 대한 이해가 훨씬 낮다. 은행이 조절하는 시장은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경제이론가들이 산업 성장에 필요한 원자재를 공급하는 환경의 능력에 관심을 가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이 문제를 무시했다. 그들은 특정 자원이 고갈되면 가격이 올라간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사용자가 이 자원을 보다 절약하고 효율적으로 쓰며, 더 풍부하고 덜 비싼 대체재를 찾도록 한다. 그런 희소성은 또 발명가로 하여금 부족한 자원이 불필요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내게 한다. 경제학자들은 경제적 신호가 희소성의 문제를 우회하는 개발로 이끈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자원 부족을 성장의 한계로 여기지 않는다. 아주 최근까지 공해에 대한 논의는 적었지만, 경제학자들은 이것에 같은 유형으로 대응했다. 인간 경제의 무제한 성장에 반대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공동체의 국외자로 간주된다.
“용량초과와 붕괴”라는 아이디어는 동물학에서 왔으며,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주류경제적 사고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늘날 심각한 지구온난화의 문제는 이 개념을 인간사에 적용할 것을 요구한다. 지금까지 그것은 경제이론에서 제외됐다. 경제학자는 어디서나 어던 환경에서나 경제성장의 치어리더로 남아있다. 그들은 가장 유해한 형태의 현대적 세계관에 깊이 빠져있다.
다행스럽게도 학계와 경제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규모 문제를 강조하는 생태경제학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들은 인간경제가 자연경제의 일부이며 한정된 부분으로 나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자연 경제가 한정적인 한 인간경제 역시 제한되어야 한다. 허먼 데일리는 오랫동안 이런 발전의 선두주자였다.
생태경제학자들은 경제의 목표를 재정의한다. 이 작업에 중요하게 기여한 책이 마크 애니얼스키의 “행복의 경제학(The Economics of Happiness, 2007)”이다. 우리는 경제학자들이 그렇게 추켜세운 성장이 실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 못함을 발견했다. 경제학자의 임무는 인간의 복지에 기여하는 경제의 조직 방식을 찾는 것이다. 부탄왕국은 국민총행복(Gross National Happiness)이란 용어로 행복을 측정한다.
경제학의 목표를 재정의하는데 중요한 전환은 주류 경제이론의 근간인 개인주의로부터 공동체에 대한 배려로 가는 것이다. 최소 수준을 넘어서면 인간의 행복은 소비하는 상품과 재화의 양보다 인간관계의 작동에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불행하게도 현대적 사고는 경제학을 오도했다. 그들은 계약과 교환 이상의 인간관계를 무시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방식은 그들이 사는 공동체의 질을 높이는 것이지만, 현대 경제사상의 적용은 공동체를 체계적으로 파괴했다.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경제 성장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깨끗한 물, 음식, 개선된 쉼터, 교육, 의료 혜택을 통해 많은 공동체들이 개선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공동체를 떠나도록 만드는 건 인간의 복지에 거의 기여하지 않는다.
“행복을 위한 경제학” 조차도 우리 시대에는 충분하지 않다. 애니얼스키와 부탄의 통치자들이 완전히 이해한 것처럼 인간의 행복은 전체 생태계의 번성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전지구 생물권역의 재생을 위한 경제이론이 필요하다.
생태경제로의 이행은 산업과 정부에 대한 금융기관들의 지배를 깨트릴 것을 요구한다. 열쇠는 공동체를 위해 어떤 수준에서든 통화공급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연방준비제도”의 국유화는 미국의 상황을 변화시킬 것이다. 노스 다코타처럼 주립은행들은 주들의 재정조건을 크게 개선할 것이다. 화폐 발행은 더 낮은 단계에서도 가능하다.
현재의 글로벌 경제는 붕괴되고 있다. 이 붕괴를 예방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이 기회를 공동체에 봉사하는 지역경제를 건설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이것은 장기적 추세의 심오한 반전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공동체를 다국적 은행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주립은행과 지방은행과 지역통화가 포함된다. 지역경제는 성장 대신 절약과 지속가능성을 장려한다. 빈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장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대신 지역사회는 원하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고 일할 수 없는 사람의 필수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책임을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는 상품의 과잉으로 측정된 “높은” 생활수준을 건강한 생태계, 건강한 인간공동체의 안전한 장소와 교환할 수 있다.

7. 농업은 토양을 되살려야 한다
인간의 개입과 상관없이 계절의 순환은 토양을 조금씩 되살려 놓는다. 그것은 점점 비옥해져 스스로의 성장을 촉진한다. 인간이 사냥과 채집으로 살았을 때는 이런 토양의 개선이 계속됐다. 변화는 농경사회가 부상하면서 생겼다. 사람들은 땅을 경작하고 의도적으로 한가지 작물을 심으면 원하는 식물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농사는 다양한 맥락과 형식으로 발전했다. 일부는 다른 것보다 지속 가능했지만, 모두 표토를 쌓아 사용하는 것으로부터 반대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일부 고대문명은 사람들이 경작하던 땅이 부양 능력을 잃어버렸을 때 멸망했다. 이것은 “용량초과와 붕괴” 모델의 농업을 시도하려는 이들에게 경고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경작할 만한 새 땅이 발견되고, 오래된 땅의 일부도 여전히 비옥한 것처럼 보였다. 어떤 경우이든 대안은 없어 보였다. 농업은 인구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음식을 생산했다. 인구를 부양하려면 유해한 방식의 경작이 계속돼야 헸다. 사람들이 새 땅으로 옮겨야 했다면 그렇게 했다. 지구의 인구가 경작지 규모에 비해 작은 한 문제는 사소한 것으로 보였다.
수천 년 동안 기본적인 농업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특히 20세기에는 산업모델이 농업에 적용됐다. 가족농장은 농업기업에 길을 내주었다. 농업과학은 식물의 화학적 수요와 잡초 및 해충을 죽이는 방식을 연구했다. 비료와 독극물이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필요한 영양을 인공적으로 주입할 수 있으므로 토양의 상태는 덜 중요해졌다. 단일경작이 확산됐다.
새로운 화학적 지배에 맞춰 식물의 유전자를 변형시켰다. 다양한 종의 밀과 옥수수는 화학물을 사용하기에 적합한 단일종으로 대체됐다. 거대한 기계가 인간과 동물의 노동력을 대체했다. 농촌의 많은 지역에서 인구가 감소했다.
이 모든 것에서 얻어진 성과는 생산량을 노동시간으로 나눠 계산한 “생산성”이었다. 경제이론가들은 이런 성과를 농장노동자들이 다른 일을 하도록 해방된 것이라고 축하했다. 생태학자들은 토양이 자연적 비옥함을 잃고 더 빨리 침식되는데 불안을 느꼈다. 그들은 또 유전적 다양성의 상실과 인공적 품종이 자연, 환경, 그것을 먹는 사람들의 건강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우려했다.
화이트헤드의 관점에서 볼 때 생태학자들은 걱정할 권리가 있다. 수천 년 동안 농업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친밀한 개입으로 이어져 왔다. 인간의 조작에도 불구하고 농업은 주로 자연과의 작업과정이었다. 산업과 관련해 개발된 현대 경제이론을 농업에 적용하는 것은 전체 과정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것은 또한 농사를 점점 희소해지는 담수와 석유라는 자원에 의존하게 한다.
쿠바가 그런 위험을 보여준다. 소비에트연방의 피보호자였던 쿠바는 현대적 방식으로 특별한 임무를 부여 받는다. 소비에트연방과 위성국가들을 위해 설탕을 생산하라는 임무였다. 대신 쿠바는 석유와 식량을 포함한 다른 필수품목을 받기로 했다. 광대한 쿠바의 농지가 산업적인 설탕 생산에 들어갔다.
그런데 미국의 봉쇄조치가 이뤄졌다. 쿠바는 설탕을 수출할 수도, 석유와 식량을 수입할 수도 없었다. 적응은 어려웠다. 그러나 대규모 기아는 없었다. 자산을 가진 농부들이 재빨리 석유의존적인 설탕 생산에서 유기농으로 전환했다. 다행히도 유기농법에 대한 연구와 실험이 많이 진전됐고, 필요가 생기자 농부들은 빨리 배웠다.
산업화된 설탕 생산자들은 이런 전환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건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런 농장들은 설탕 생산에 맞춰졌다. 그들의 장비는 설탕 생산용이었고 노동자들은 다른 작물이나 경작 방식에 대해 지식이 없었다. 어쨌든 전통 농법을 아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쿠바에는 농민 농사가 산업적 형식에 완전히 휩쓸려 나가지는 않았다.
화이트헤디언들이 미래를 내다보듯이 우리는 기업농에 사용된 땅이 전통적 방식으로 회복되기를 희망하며 전통적 가족 농사로부터 진화되는 과정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 그것은 석유난에 부딪친 쿠바인들이 택했던 유기농 생산이다. 그러나 유기농 조차 토양을 착취하며, 토양이 감소하면서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의 임무는 착취를 멈추고 토양을 회복하는 자연적 과정을 따르는 방식을 찾는 것이다.
기업농과 관련해 부정적 측면과 함께 많은 긍정적 발전도 이뤄졌다. 무경운(no-till) 농법은 토지를 바람에 노출시키는 쟁기질을 안 해도 된다는 걸 보여주었다. 특정 식물들의 조합이 해충 피해를 크게 감소시킬 수 있다. 관개는 직접 필요한 곳에만 사용하는 시스템에 의해 훨씬 적은 물로도 가능하게 됐다.
우리는 일년 중 언제라도 거의 모든 음식을 먹는데 익숙할 만큼 부자가 되었다. 이것은 글로벌 경제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사치다. 그것의 붕괴를 준비하는 우리는 지역에서 키운 작물을 먹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은 다양성을 감소시키지만, 장점도 있다. 유기농법으로 키운 신선한 작물은 그 자체로 훌륭하다.
이 방향으로 이미 많이 진전됐다. 전 세계에 걸친 수천 개의 파머스 마켓은 작물을 키우는 농부뿐 아니라 식습관의 변화도 독려한다. 광범위한 도시농업 운동도 있다. 이것은 많은 공지와 빈집과 실업자들이 있는 디트로이트에서 가장 발전했다. 내가 사는 LA 카운티 주거지역에서도 노는 땅을 실업상태인 멕시코 이민자들에게 이용하게 하려는 노력이 있다. 지금까지는 지역의 식품생산이 식품산업에 비해 주변적이다. 그러나 이것의 성장은 글로벌 체제의 붕괴에서 누가 얼마나 살아남을 것인가의 문제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다. 토지가 제한적이고 식량 수요가 커지면 집약적인 식량 생산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사례는 이미 있다. 패서디나에 사는 여섯 명의 가족은 4분의 1 에이커에서 생산한 식량으로 자급자족한다. 또 현금을 벌기 위해 특별 품목을 인근 레스토랑에 판매한다.
장기적으로는 또 다른 진전이 중요해질 것이다. 집약노동 방식은 토양 침식을 막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완전히 새로운 농법도 배울 수 있다. 캔자스주 살리나에 있는 랜드연구소의 웨스 잭슨은 광대한 미국 대초원이 다년생의 다품종 경작이 이뤄진 수천 년 동안 비옥한 표토로 뒤덮였다고 밝혔다. 유럽 농부들이 이주했을 때 그들은 이것을 일년생 단일작물 재배로 바꿨다. 그래서 토양유실이 시작됐다.
우리는 흔히 식량공급에 필요한 곡식이 일년생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잭슨은 다년생의 옥수수와 밀이 있지만, 우리가 경작하는 일년생에 비해 생산량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다년생 작물이 인간에게 필요한 씨앗을 덜 생산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는 생산성이 높은 다년생 곡물을 개발하기 위한 50년에 걸친 실험에 착수했고, 큰 진전을 이뤘다. 이런 연구야말로 우리 대학들이 장거리 선적을 잘 견디는 토마토를 만들기 위한 연구 대신 해야 하는 일이다. 식습관의 변화 역시 더 많은 사람들이 붕괴에서 살아남도록 해줄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육식에 중독돼 있다. 우리는 인류 역사의 대부분 사람들보다 많이 먹는다. 그리고 우리는 건강에 필요하고 좋은 이상으로 먹는다. 많은 경우 우리가 먹는 고기의 열량에 비해 열 배나 많은 열량의 곡식을 동물 먹이로 사용한다. 육식의 극적 감소는 더 많은 곡물이 더 많은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염두에 두고 육식문제에 접근할 때 목표는 완전한 채식주의가 아니라 곡물 사료로 키우는 동물의 육식을 그만두는 것이다. 농사는 안되지만 목장에 맞는 땅이 있으며, 고기생산은 거기에 가장 적합하다. 또한 작은 농장을 가장 통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동물이 필요하다. 그들은 버려져야 할 쓰레기를 먹고 작물에 필요한 천연비료를 생산한다. 잉여 동물의 소비는 식량 공급에 효율적으로 기여한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비전은 다른 이유로 많은 사람들을 채식주의자가 되도록 한다. 우리가 죽이는 동물들은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 그들을 죽이는 건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만큼 가치를 파괴하지는 않지만, 같은 종류의 죄악이다. 화이트헤디언은 그런 살생이 최소화해야 된다고 믿는다. 육식을 자제함으로써 기여할 수 있다.
화이트헤디언의 또 다른 주장이 있다. 화이트헤디언의 관점에서 고통을 가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악하다. 이론적으로 달리 주장하더라도 현실은 오늘날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고기가 잔인한 방식으로 사육된다는 것이다. 이런 고통은 죽음의 순간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있다. 고기소비는 동물의 고통에 야만적으로 무관심한 산업을 지탱한다.

8. 편안한 주거는 자연에의 요구를 최소화해야 한다
값싼 땅, 값싼 교통, 값싼 설비의 시대에 우리는 교외의 넓은 땅에다 수백만 채의 넓고 단열이 안되는 집을 지었다. 주택 건설에 많은 나무를 사용해 그 과정에서 숲을 희생시켰다. 개인주의는 대가족을 핵가족으로 대체하고 이웃으로부터도 우리 자신을 분리시켰다. 우리 이웃보다는 다른 곳에 있는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에게서 공동체를 찾았다. 우리 집은 우리 자신과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고, 우리가 그렇듯 남들도 우리 사생활을 존중해주기를 기대했다.
우리는 이제 지역에서의 식량 생산을 위한 토지가 필요하고 교통과 설비가 비싸지는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숲을 없애기보다 나무로 덮어야 한다. 어떻게 전환할 것인가.
분명 우리의 임무 중 많은 부분은 가진 것을 개선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열로 설비 이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태양판으로 우리가 쓰는 에너지 일부를 생산할 수 있다. 이웃과 협력관계를 만들어 나홀로 차량을 줄이고 공용의 설비를 마련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 땅을 식량 생산에 사용할 수도 있다.
이것은 중요하며 얼마 동안은 붕괴를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기여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장에서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 가진 것을 대체해야 하는 새로운 것에 집중하고자 한다. 다행히 숲을 더 벌채하고 냉난방 설비의 효율을 더 높이지 않고도 안락한 주거를 제공하는 건물 실험이 많이 이뤄졌다.
슈퍼벽돌이 한 사례다. 전통벽돌은 우리 현대인들이 짓는 집보다 환경에 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것은 목재가 필요했고 다른 한계도 있었다. 슈퍼벽돌 건물은 집을 짓는 땅으로부터 90% 이상의 건축자재가 나온다. 목재도 쓰지 않는다. 그래서 건설 과정에서 약간의 운송이 필요하고 원거리 숲에 의존하지 않는다. 전통벽돌처럼 두꺼운 벽은 우수한 단열효과를 낸다. 내구성도 높다. 화재에도 강하다. 지진에 대비해 벽을 보호하는 작은 철봉을 사용한다. 그것은 매우 다른 미래로의 전환에 맞게 지어지는 건물이다.
이런 것으로 현재 교외 건물을 대체하는 것은 훌륭한 진전이지만, 이것은 주거 문제의 일부만을 해결한다. 거주자들은 여전히 직장이나 필요한 서비스에서 떨어져 있다. 자전거로 연결될 수도 있으나, 교통 수요는 남아있다.
파올로 솔레리는 이런 문제를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그는 우리가 짓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도시를 상상했다. 이것을 건설하려면 슈퍼벽돌 건물보다 많은 재료가 필요하지만, 현재의 교통수요를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제안한 도시를 “건축적 생태학” 혹은 “아르콜로지”라고 부른다.
그는 어떤 도시들의 다운타운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자연스런 발전으로서 아르콜로지를 바라본다. 오늘날 우리는 호텔에서부터 걷거나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길을 건너지 않고도 백화점, 식당, 사무실, 상업시설, 극장에 갈 수 있다. 때로는 실내공원도 포함된다. 이런 복합공간을 학교나 병원까지 확장하는 것도 상상할 수 있다. 호텔 옆이나 안에 거주용 아파트들이 들어설 수도 있다.
이것은 건물의 층고 덕분에 좁은 지역에서도 가능하다. 10에이커에 짓는 80층짜리 건물 한 동이 800에이커를 차지한 1층짜리 건물과 가용공간이 비슷하다. 도로, 보도, 주차장, 주유소뿐만 아니라 건물 둘레, 건물 사이의 공간까지 실내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 실제로는 더 넓을 것이다. 여기에는 도시가족이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대부분의 시설이 들어간다. 이 건물 안에서는 모터 운송수단이 필요 없거나 사용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도보나 필요한 경우 휠체어 혹은 다른 장비로 접근 가능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악몽처럼 들릴 수도 있다. 폐소공포로 상상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주거구역을 바깥벽에 배치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그런 건물을 도시의 거리와 다른 건물들에 둘러싸인 것으로 상상하는 대신 바깥의 거대한 야외에 혼자 서 있는 것으로 상상해보자. 건물의 어느 곳에서든지 잠깐 걸으면 정원일이나 레크리에이션을 위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 달리 말해 오늘날 대부분의 도시거주자들보다 훨씬 쉽게 시골지역에 접근할 수 있다. 차를 운전해야 한다면 빌리면 된다. 다른 도시로 가는 교통편도 있을 것이다.
솔레리는 아르콜로지를 언덕 위에 건설하고 아래 경사면을 덮는 온실도 만들 것을 제안했다. 온실을 통과하면서 덥혀진 공기를 아르콜로지의 난방이나 다른 용도로 쓰려는 것이다. 산업시설은 지하층에 배치해 나머지 건물에서 쓰고 남은 잔열을 활용한다. 아르콜로지 자체가 단열되고 계절에 따라 태양이나 그늘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지어진다. 직간접 태양에너지는 아르콜로지의 모든 수요를 충족시킨다.
일단 건설되면 아르콜로지는 화석연료가 필요 없다. 아르콜로지의 모든 사람들은 모터 교통수단 없이 그 안에서 모든 곳에 접근할 수 있다. 슈퍼벽돌 주택과 비교했을 때 문제는 건설이다. 현재 형태의 도시를 건설하는 것보다는 돈과 자재가 적게 들겠지만, 여전히 사회적 부와 정교한 교통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런 자원이 있다면 아르콜로지는 금방 건설될 것이다. 그들은 다른 도시들보다 글로벌 경제의 붕괴에서 훨씬 잘 생존할 수 있다.

9. 대부분 제조업은 지역적이어야 한다
인류가 마침내 자살과도 같은 화석연료 사용을 끝내기로 결심했을 때 한곳에서 생산한 상품을 전세계로 운송하는 일도 끝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것은 쉽게 예측되는 현재 문명 붕괴의 한 부분이다. 물론 화석에너지 중독이 너무 강해서 인간과 생물권역에 어떤 비용을 치르게 할 지 모르는 글로벌 문명을 지키려고 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지구 용량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만약 더 큰 규모의 원자력 에너지로 돌린다면 생존에 대한 위협은 그 성격만 달라질 뿐 사라지지 않는다. 인류는 자살 직전 멈출 것이라는 전제 아래 말하겠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살 수 있는지의 문제에 대면한다. 현재 글로벌 문명의 장점 가운데 어떤 것을 계속 누릴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까지 식품과 주거지에 대해서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싶은 막대한 제조품의 세계가 있다. 가능할까.
대답은 아무도 무엇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글로벌 유통을 위한 제조로부터 현지 생산으로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점진적 진전이 이상적이다. 교통비용이 올라감에 따라 무겁고 부피가 큰 품목은 수요지 가까이서 생산할 것이다. 화석연료 사용이 점점 제한된다면 그런 추세는 가속화하며 작고 가벼운 상품조차 더 지역에서 만들 것이다. 이런 전환은 많은 문제를 야기한 글로벌 생산방식에 비해 우리의 삶과 사회에 적은 영향을 미친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경제의 지역화의 일부이다.
그러나 상품운송이 유일한 문제는 아니다. 산업생산은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한다. 이제 대체에너지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가장 좋은 것은 풍력 및 태양이다. 소규모 지역생산은 현재 대세인 대규모 집중생산 방식에 비해 풍력과 태양 에너지를 활용하는데 유리하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제조에 필요한 천연자원을 해당지역에서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원을 운송할 수 없다면 제품 생산도 어렵다. 이 문제는 많은 독창성이 요구된다. 이것이 해결되면 많은 수요가 지역에서 가능한 원료들로 충족될 것이다.
예를 들어 옷을 생각해보자. 면과 모는 옷의 중요한 원료다. 그러나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이 원료를 구할 수 없다. 다행히도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섬유로 옷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상점들은 지금 당연히 여기는 수많은 종류의 옷을 갖추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옷에 대한 실제 수요는 세계 어디서든지 대부분 충족될 수 있다.
지역생산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많은 것들이 비실용적이라는 것이다. 자동차가 그 예다. 백만 명이 사는 도시라도 시장이 그 도시로만 한정된다면 자동차를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없다. 그 도시는 확실히 여러 경쟁 회사를 지원할 수 없다.
이상적인 답은 도시들이 자동차가 필요 없도록 건설돼야 한다는 것이며 실제 이런 방향으로 나가길 희망한다. 자가용들이 어렵긴 하겠지만 재앙 없이 사라지길 상상해본다. 그러나 대중교통은 많은 장소에서 지역생산이 더욱 비실용적인 차량들을 요구한다. 교통수단이 붕괴하는 글로벌 사회로부터 지속가능한 지역사회로 고통 없이 전환되는 걸 상상하기는 어렵다.
도시교통과 관련해 두 방향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하나는 자가용뿐 아니라 대중 교통수단도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거주자들로 하여금 자전거를 주요 교통수단으로 삼을 만한 자족적 지역 안에서의 생활을 영위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거대도시들이 자신들의 교통수단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용량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차량을 제조하는 공장과 함께 화석연료를 쓰지 않고 교통체계에 전력을 공급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또 다른 폭넓은 변화가 상상되고 고무될 수 있다. 우리는 값싼 대량생산 제품에 익숙해졌다. 미국인 대다수는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은 물건을 갖고 있다. 우리의 문제는 그것들을 쌓아두거나 새것을 위한 공간을 만들려고 옷장을 비우는 것이다. 이런 물건의 홍수는 사람들이 실제 필요한 물건이 대부분 손으로 만들어지던 상황을 대체했다. 오늘날 수작업은 주업이 아닌 취미이지만, 이런 방향으로의 후퇴는 환영할만한 거시다. 수작업이 칭찬받고 그 생산품이 수익을 남겨 팔린다면 실업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최소한의 자연과 최소한의 물건을 사용하겠지만, 우리가 갖는 것은 더 큰 만족을 주며 그것의 생산은 일상적 행동이 아닌 창조적인 것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전자통신의 광대한 세계가 글로벌 경제의 붕괴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 새로운 질서 안에서 우리가 즐겼던 여행은 드문 사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나머지 세계와 단절시킬 필요는 없다. 우리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전자적으로 접촉하는 세계 시민이 될 수 있다. 새로운 글로벌 상황에의 적응이 한 장소에서 성공하면 세계의 다른 사람들과도 쉽게 공유될 수 있다. 외딴 마을의 사람들도 세계에서 가장 앞선 사상가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다. 최선의 의학지식에 누구든 접근할 수 있다. 생산의 지역화가 넓은 지평의 사고와 행동의 적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10. 모든 공동체는 공동체들의 공동체여야 한다
글로벌 경제와 연관 제도의 붕괴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역 자원으로 뭔가를 해보도록 이끌 것이다. 사람들이 이 과제에 지속불가능한 글로벌 경제와 지구 자원의 용량초과를 만들어냈던 것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접근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매우 황폐해질 것이다. 이 글은 대안을 북돋우기 위해 씌었다. 인류는 지역 공동체를 건설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공동체는 가까운 거리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자동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부분 교외지역의 이웃들은 공동체가 아니다. 공동체는 주민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 즉 나는 나 자신을 “필그림”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나의 은퇴시설인 필그림 플레이스의 생활에 참여하는 것이 지금 내가 누구인지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참여하는 공동체다. 필그림 플레이스는 거기에의 참여가 다른 필그림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는 것이며 전체에 대한 일정 책임을 지는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의 공동체다. 우리는 누구도 재정문제 때문에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민족국가가 생겼을 때 그것은 공동체가 되고자 했다. 사람들은 자기 정체성의 많은 부분을 국적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국가가 국민의 복지를 책임지기를 기대하고 국가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거기에 기여하고자 한다.
민족국가들로 구성된 유럽의 형성은 모더니티의 부상에 기여했다. 그것은 민족공동체를 강화하기 위해 지역공동체와 종교공동체를 약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의 많은 부분이 지역적이었고, 지역공동체는 강력하게 남아있었다. 산업혁명은 지역경제를 크게 약화시키고 국가 안에서의 이동성을 증가시켰다. 지역공동체는 중요성을 잃고 더 이상 공동체로 작동하기를 멈췄다. 이런 전체 과정은 계몽주의 사상이 뒷받침하는 개인주의에 의해 강화됐다.
이런 개인주의는 이제 민족공동체에 대해서도 등을 돌렸다. 경제엘리트는 더 이상 자신들을 특별히 미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공동체에 속했다면 그것은 부와 권력을 가진 초국가적인 것이다.
많은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모든 미국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기여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확신하지 않는다. 공동체에 뿌리를 둔 그런 생각을 “사회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영향력도 커진다. 그들은 정부가 자신들에게 자유를 주고 이익을 보장해야 한다고 믿는다. 정부는 그들을 다른 사람들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다른 목적의 어떤 기여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커져가는 글로벌 위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체의 중요성을 새로 자각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그것은 지역 차원에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될 수 있다. 심각한 공동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하고 새로운 삶을 건설하는데 동의하기를 희망한다. 앞 장에서는 가장 희망적인 방식으로 가능한 것을 제시했다.
공동체의 주요한 문제는 자신들을 다른 공동체와 구분해서 정의하는 위험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공동체의식이 강한 개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실제 혹은 가상의 위협으로 인식한다. 세계를 우리/그들로 이해하는 것은 “그들”에 대해 부정적 이해와 함께 쉽게 생겨난다. 각자 중요한 결핍을 가진 지역공동체들로 구성된 세계는 쉽게 폭력으로 변하는 갈등으로 위협받는다. 이런 종류의 세계는 지속불가능하다.
그래서 목표는 강하고 건강한 지역공동체일 뿐 아니라 공동체의 공동체가 돼야 하는 것이다. 스포츠의 세계에서 이런 사례를 볼 수 있다. 소도시의 고등학교 팀을 생각해보자. 소도시민들은 그들의 팀에 강한 소속감을 느끼고 그들을 맹렬히 응원한다. 그러나 특정리그를 구성하는 팀들은 또한 그 리그에 참여함으로써 정체성을 얻고, 그 정체성이 강하고 건강하기를 원한다. 또한 관심이 좀더 넓어지면 자신들의 팀을 운영하던 이들은 다른 팀을 응원하는 다른 소도시에 관심을 갖는다. 팀 간의 경쟁은 스포츠맨십의 맥락에 포함되며, 팀들은 경쟁팀을 존중하는 일의 중요성을 배운다.
건강한 지역공동체는 기본적 자기이해의 일부로서 다른 공동체와 그 소속원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가질 것이다. 한 공동체가 자연재해로 고통 받는다면 이웃들이 도우러 올 것이다. 경쟁을 하는 건 건강하지만, 여기에 좀더 넓은 맥락의 존중과 협력이 없다면 건강하지 않다.
지역공동체들은 상대적으로 자립적 경제를 유지하지만, 이웃과의 협력이 필요한 경제적 문제도 있을 것이다. 오직 경쟁만 하는 곳은 생존하지 못하며, 자신과 함께 다른 공동체까지 파괴할 것이다. 건강한 공동체는 공동체의 공동체에 참여해야 한다. 각 공동체가 상당한 자율권을 갖더라도 완전히 독립하려는 어떤 노력도 실격이다. 공동체의 공동체는 또한 결정의 권위가 필요할 것이다. 공동체의 공동체의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지역에 초점이 있는 세계에서조차 글로벌 수준에서의 거버넌스가 필요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정치구조는 우리가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을 극복할 때만 지속가능하다. 현대세계에서 개인주의는 지역과 민족 단위 공동체의 침식뿐 아니라 어떤 수준에서든 “주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드러난다. 그런 필요는 “실체”의 사고로부터 나온다. 과정사상은 공동체적 사고다. 개인은 공동체에서만 건강한 사람이 된다. 사람은 지배하지 않으며 공동체도 그렇다. 공동체는 사람을 형태 짓고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형태 짓고 권위라는 수단을 부여한다. 지역공동체는 지배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동체들의 공동체 안에서 다른 공동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건강하고 강해질 수 있다. 상위의 공동체는 지배하지 않는다. 그것을 구성하는 공동체들에 봉사하려고 존재하지만, 이런 공동체들은 스스로의 권위라는 수단이 필요하다.
실체적 사고는 한 기관의 힘이 커지면 다른 기관은 힘을 잃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과정사상은 협력이 아니면 큰 힘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협력의 매개의 힘을 키우는 것은 그것을 통해 협력하는 사람들의 힘을 키우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형태의 힘은 다른 사람의 힘을 키우는 힘이다. 그것을 깊이 이해하는 세계가 지속가능한 세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