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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4

[[알라딘: 영원의 철학 - 모든 위대한 가르침의 핵심 올더스 헉슬리

알라딘: 영원의 철학

<영원의 철학 - 모든 위대한 가르침의 핵심>   
올더스 헉슬리 (지은이),조옥경 (옮긴이),오강남 (해제)
김영사 2014-07-14
원제 : The Perennial Philosophy
5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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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시대를 초월한 영성의 고전. 동서고금 420여개의 보석 같은 인용문을 통해 ‘영원의 철학’을 다채롭게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1945년 출간 이후 끊임없이 언급되고 재인용되었으며, 21세기에도 그 깊이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방대한 독서량과 탁월한 안목은 27개 주제 속에 배치한 멋진 인용문들을 통해 절묘하게 드러나며, 해설에서 묻어나는 사유와 체험의 깊이는 《멋진 신세계》의 천재 작가로만 알고 있던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적 자극과 충격을 안겨준다. 인용문만 따로 골라 읽어도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흥미로운 인문학적 보고이자 탁월한 종교·명상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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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해제_ ‘영원의 철학’으로 세계 종교의 심층을 보다

들어가며

01 그대가 그것이다
여기에 그분 말고 누가 있겠나

02 근본바탕의 성질
이름 없는 것에서 하늘과 땅이 생겼다

03 성격, 거룩함, 신성한 화신
동일시를 통해, 은총을 통해

04 세상 속의 신
그러나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리라

05 최고의 사랑
모든 오류는 사랑의 부족에서 생긴다

06 고행, 비집착, 올바른 생계
일상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수용하기

07 진리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두루마리가 진짜 경전이다

08 종교와 기질
체질과 기질에 따라 그 길은 다를 수 있다

09 자기이해
어리석은 자들은 스스로 깨어있다고 여긴다

10 은총과 자유의지
그대가 거절하지 않는다면 결코 버림받지 않는다

11 선과 악
악마를 보지 못했다면, 그대의 자아를 보라

12 시간과 영원
어떻게 시간적 상태가 비시간적 상태와 공존할 수 있을까

13 구원, 해방, 깨달음
자기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그것을 잃어야 한다

14 불멸과 존속
어디로도 가지 않고, 어디에서도 오지 않는 자

15 침묵
갈망과 혐오의 목소리를 고요하게 잠재우는 일

16 기도
제 안에서 당신 스스로에게 기도하소서

17 고통
돌아오라, 영원한 실재의 온전함으로

18 믿음
믿음은 극락으로 이끌지만, 다르마는 니르바나로 이끈다

19 신은 조롱받지 않는다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20 종교로 인해 짓는 죄
가장 근본적인 속박의 원인은 잘못된 믿음과 무지

21 우상숭배
진리와 정의가 새로운 우상이 될 때

22 감정에 호소하기
정서와 느낌의 우상숭배는 대가를 치른다

23 기적
영혼과 신 사이에 드리워진 방해물

24 의식, 상징, 성찬식
영원으로 통하는 문인가, 속박의 도구인가

25 영적 훈련
새로운 질병을 유발할 수도 있는 약의 사용법

26 끈기와 규칙성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

27 묵상, 행위, 사회적 유용성
무엇이 이 세상을 지탱하는가

옮긴이의 글

참고문헌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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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23 모든 인간의 최종 목표는 자신이 실제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일이다.

P. 76 근본바탕에 대한 직접적인 앎은 합일union을 통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으며, 합일은 오직 ‘그것’으로부터 ‘당신’을 분리하고 있는 장벽인 이기적인 에고를 소멸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

P. 136 자아가 소멸되었다는 생각은 파나fana(선禪의 무심無心)에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는데 이는 허물이다. 최고의 상태는 소멸도 사라진 것이다. 아트만-브라흐만이라는 내적 정점에는 황홀경이라는 ‘소멸로부터의 소멸’이 있다. 더 포괄적인 소멸로부터의 또 다른 소멸은 내적 정점에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 세상을 통해, 신에 대한 충만하면서도 깨어있는 일상의 앎 속에 존재한다. 

P. 140 지금 그대가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지금 그대가 고통받고 있는 것을 아파하라. 이 모든 것을 신성하게 행하라. 그대의 가슴hearts 이외에 변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의 질서에 따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기꺼이 하는 데에 신성함이 있다. - 드 코사드

이것은 《신심명》에서 간택함을 꺼리고 망령된 견해를 쉬며, 꿈이 사라지고 진리가 스스로 명백하도록 눈을 뜨면서, 지극한 도道를 따르는 것과 똑같다.  접기

P. 150 사랑은 확실하다. 거기에는 오류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오류는 사랑의 부족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 윌리엄 로

P. 244 그대의 영리함을 팔아서 당혹감을 사들여라.
영리함은 의견일 뿐이지만, 당혹감은 통찰이다. - 잘랄루딘 루미

P. 44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는 선을 인식하고, 우리의 영원한 근본바탕으로 돌아가서 비록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항상 존재했던 곳에 머물러있음으로써, 구원받고 해방되며 깨달음을 얻게 된다. - h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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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40년 가까이 애장하며 필요할 때마다 참고하고 인용하는 책이다. 캐나다에서 대학 상급반 교과서와 주요 참고도서로 활용할 정도다.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종교의 심층을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 이번에 김영사를 통해서 한국어로 나오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다. 신학적 제국주의를 충격적으로 일깨워준 책. 올더스 헉슬리의 수많은 작품 중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 단언하고 싶다.
- 오강남 (종교학자,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명예교수) 

봉우리는 하나뿐이되 거기에 이르는 길은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이 책만큼 잘 보여주는 책도 없으리라. 루미, 장자, 에크하르트, 십자가의 성 요한 등 동서고금의 신비주의자가 남긴 침묵의 언어가 한데 모여 있다. 종교에 대해서 논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삶과 예술과 진리를 하나의 봉우리로 이끄는 단 하나의 방법, 즉 자기 무지에 대한 인식과 한없는 겸손과 무조건적인 복종을 불쏘시개로 자아를 불태우는 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종교와 인종을 넘어서, 원하는 이들에게는 모두 그 불씨를 나눠준다는 데에 이 책의 미덕이 있다. - 김연수 (소설가) 


“세상에 꼭 필요한 책, 마스터피스!”
- 뉴욕 타임스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 그 신비주의 사상가들로부터 헉슬리가 이끌어낸 종교 사상의 핵심적 통합.”
- 워싱턴 포스트 
“이 책은 문화·종교·영성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출발점이 어디이건 진리를 이해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한다.” - 가디언 

“이 책은 다른 모든 작품들의 위대한 디딤돌이자 개별 탐구를 위한 좋은 출발점을 제시한다. 매우 포괄적인 추천 도서 목록을 포함한다.” - 아마존 리뷰 

“이 책을 사라. 읽고 또 읽으라.
장담하지만,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아홉 번째 읽고 있지만 여전히 이 책을 사랑한다.” - 아마존 리뷰 
“시간을 초월한 고전.” - 허핑턴 포스트 


 - 조선일보 북스 2014년 8월 2일자 '책 속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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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올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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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범위한 지식뿐 아니라 뛰어나고도 예리한 지성과 우아한 문체에 때로는 오만하고 냉소적인 유머 감각으로 유명한 그는 1894년 7월 26일 서리 지방 고달밍에서 토머스 헉슬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튼과 옥스퍼드의 밸리올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소설가로서 더 널리 알려지기는 했으나 수필, 전기, 희곡, 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21년에는 『크롬 옐로(Crome Yellow)』를 발표해서 당대의 가장 재치 있고 이지적인 작가라는 평을 들으며 위치를 굳혔다. 『멋진 신세계』는 1932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미래 과학 문명의 세계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열여덟 살 때 완전히 실명했다가 차차 시력을 회복한 경험을 바탕으로 1936년 『가자에서 눈이 멀어(Eyeless in Gaza)』를 발표했다. 이는 헉슬리의 ‘후기파’ 성향을 지닌 첫 소설로서, 그의 작품 세계에서 분기점 노릇을 한다. 1958년에는 『멋진 신세계』의 예언적 주제들을 심도 있게 검토한 미래 문명사회 비판론인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를 발표했다. 활동 후반기에는 힌두 철학과 신비주의에 깊이 끌렸으며 이 경향이 작품들에 반영되었다. 그는 미국에 정착해서 살다가 1963년 11월 22일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어릿광대의 춤(Antic Hay)』, 『연애대위법(Point Counter Point)』, 『불멸의 철학(The Perennial Philosophy)』, 『루덩의 악마(The Devils of Loudun)』, 『지각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 『섬(Island)』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멋진 신세계>,<멋진 신세계>,<소담 고전 명작 시리즈 세트 - 전5권> … 총 864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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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옥경 (옮긴이)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인도 뿌나대학교에서 요가심리학을 수학했다. 인도 아엥가센터와 미국 히말라야연구소에서 요가 수련을 했고, 현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심신통합치유학과 교수이자 한국요가학회 회장이다. 역서로 《통합심리학》(학지사, 2008) 《마음챙김을 위한 요가》(학지사, 2009, 공역) 《웰니스를 위한 비니요가》(학지사, 2011) 《영원의 철학》(김영사, 2014) 《요가를 통한 심리치료》(학지사, 2015, 공역) 《켄 윌버의 신》(김영사, 2016, 공역) 등이 있다. 의식의 변용과 확장을 위해 요가 수행을 기반으로 한 몸-마음-영성의 통합적 건강 및 성장 패러다임을 연구하고, 지도하며, 임상적으로 적용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접기
최근작 : <요가심신테라피>,<불교와 심리>,<바디워크 테라피> … 총 20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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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해제)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연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화엄華嚴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그동안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 서강대 등에서 객원교수, 북미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AAR)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역임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노장사상을 풀이한 “도덕경” “장자”, 종교의 이해와 분석을 담은 “예수는 없다” “세계종교 둘러보기”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종교 너머, 아하!”(공저)가 있으며, 인생과 종교에서의 깨달음을 담은 “아하! 오강남 교수가 속담에서 건진 작은 깨달음”,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 최근 “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을 펴냈다. 번역서로서는 “종교다원주의와 세계종교”,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귀향”, “예언자”, “예수 하버드에 오다”, “예수의 기도”, “마지막 강의”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코로나 이후 예배 설교 미래 리포트>,<매거진 G 1호 나란 무엇인가?>,<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 … 총 64종 (모두보기)
인터뷰 : 예수는 없지만 예수는 있다 - 2002.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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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멋진 신세계》의 올더스 헉슬리가 이끌어낸
모든 위대한 종교의 공통 핵심!”
시대를 초월한 영성의 고전, 종교의 패러다임을 바꾼 기념비적 저서가 부활하다!

봉우리는 하나뿐이되 거기에 이르는 길은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이 책만큼 잘 보여주는 책도 없으리라. 루미, 장자, 에크하르트, 십자가의 성 요한 등 동서고금의 신비주의자가 남긴 침묵의 언어가 한데 모여 있다. 종교에 대해서 논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삶과 예술과 진리를 하나의 봉우리로 이끄는 단 하나의 방법, 즉 자기 무지에 대한 인식과 한없는 겸손과 무조건적인 복종을 불쏘시개로 자아를 불태우는 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종교와 인종을 넘어서, 원하는 이들에게는 모두 그 불씨를 나눠준다는 데에 이 책의 미덕이 있다. _김연수 (소설가)

‘영원의 철학’이란 ‘모든 위대한 종교의 본질적이고 공통된 핵심 진리’로서, 세계 대부분의 종교적 전통들이 공유하고 있는 세계관·인간관·윤리관을 말한다. 고도로 발달된 종교 및 철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이와 같은 개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영원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이라는 표현 자체는 16세기 이탈리아 구약성경학자 아고스티노 스테우코Agostino Steuco가 자신의 저서 《Deperenni philosophia》(1540)에서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라이프니츠가 ‘역사를 초월해서 전승되는 형이상학적 근본진리’라는 의미로 본격적으로 사용했으며, 19세기 초월주의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20세기에 와서 올더스 헉슬리의 이 책 《영원의 철학The Perennial Philosophy》에 의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드디어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올더스 헉슬리는 엄청난 양의 종교적 가르침들을 낱낱이 검토하고, 문학·역사·철학·심리학·과학·예술 등 인류의 다양한 정신적 유산에서 진리의 조각들을 모아, 그 바탕에 면면히 흐르는 공통된 핵심을 발견하여 빛나는 모자이크를 보여주었다. 바로 그 올더스 헉슬리의 혁명적 영성 고전 《영원의 철학The Perennial Philosophy》이 국내 최초로 김영사에서 완역되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변치 않는 불멸의 가치를 찾는 이들에게 전설처럼 언급되어왔다.
동서고금 420여개의 보석 같은 인용문을 통해 ‘영원의 철학’을 다채롭게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1945년 출간 이후 끊임없이 언급되고 재인용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동서양의 종교와 심리학을 독창적으로 통합시킨 유명한 사상가 켄 윌버Ken Wilber가 ‘세계의 위대한 영적 스승·철학자·사색가들이 채택한 보편적인 세계관’으로 이를 즐겨 언급하고 통합사상의 기본 전제로 삼으면서 21세기에도 그 깊이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방대한 독서량과 탁월한 안목은 27개 주제 속에 배치한 멋진 인용문들을 통해 절묘하게 드러나며, 해설에서 묻어나는 사유와 체험의 깊이는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의 천재 작가로만 알고 있던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적 자극과 충격을 안겨준다. 인용문만 따로 골라 읽어도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흥미로운 인문학적 보고이자 탁월한 종교·명상서이기도 하다.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기도 하는 귀중한 ‘지혜의 가르침’들은 지금 보아도 여전히 신선한 감동과 통찰을 던져주어, 출간된 지 70년이 다 된 이 책이 왜 여전히 아마존닷컴의 장기 베스트셀러로 사랑받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감성적이고 가벼운 힐링 서적이 아니라 진정 변치 않는 무언가에 목마른 독자들이라면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지성을 넘어 영성을 추구한 20세기의 천재 작가,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헉슬리는 1894년 영국에서 태어나 1963년 미국에서 사망한 작가·시인·사상가이다. 그는 과학·의학·예술·문학 분야에서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하여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도 등재된 유명한 ‘헉슬리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풍성한 지적 자극과 창의적 재능의 격려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다윈의 자연도태설을 옹호하고 종교적 전통에 강하게 반발하며 ‘불가지론agnosticism’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만들어 주장한 저명한 생물학자 토머스 헨리 헉슬리가 그의 조부였고, 명문 차터하우스학교 부교장이자 전기 작가인 레너드 헉슬리가 그의 아버지였으며, 유네스코 초대 사무총장으로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현대 진화론의 대가 줄리언 헉슬리는 그의 형,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앤드루 헉슬리는 그의 동생이었다. 외가 쪽은 문학 및 종교에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에 교육개혁을 일으킨 교육자이자 종교인인 토머스 아놀드가 그의 외증조부였고, 어머니는 옥스퍼드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저명한 명상 시인이자 문예비평가인 매튜 아놀드는 그의 외삼촌, 사회와 종교문제를 대담한 소설로 그려낸 험프리 워드 부인은 그의 이모였다.

20세기 중반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인으로 평가되는 헉슬리는 시·희극·소설·수필·비평 등 문학의 여러 장르를 섭렵했을 뿐 아니라 철학자, 신비가, 사회현상에 대한 예언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초기 작품들 속에서 그는 날카로운 지성과 비평을 통해 사회비평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지만, 후기에는 철학적 신비주의와 초심리학 등에 관심을 가지면서 종교적이고 영적인 주제에 몰입하게 된다. 동서양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은 1937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더욱 깊어져, 말년에는 주로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면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스와미 프라바바난다 등 쟁쟁한 영성가들과 깊이 교류하며 전쟁·정치·경제·윤리·교육·종교·기술 등의 현실적 문제를 궁극의 실재와 조화시키려 애썼다. 평화운동에 적극 동참하면서도 궁극적 의식체험을 위해 명상과 요가 외에 스스로 환각제까지 투여했던 탐구의 내용은 《인식의 문》《천국과 지옥》으로 발표되어 화제를 낳는다.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날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는 동양의 신비주의와 통합적인 삶의 예술, 서양의 과학기술과 합리적인 방법론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현대문명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다고 역설했다.

동서양 위대한 종교의 공통적인 핵심을 밝힌다!

이 책은 헉슬리 스스로도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영원의 철학 선집(대표적 작품을 뽑아 엮은 책)’이다.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철학서가 아니라, 스스로 거듭나고 깨달음으로써 ‘궁극의 실재Reality’를 직접 통찰하여 자질을 갖춘, 진실로 ‘성인 같은 남녀들’이 여러 시대와 장소에 걸쳐 토로한 구절들에 헉슬리의 해설을 덧붙인 지혜의 모음집이다. 모든 존재의 근거인 신성한 실재는, 사고와 언어로는 접근할 수 없는 체험을 통한 ‘직접적인 영적 앎’의 영역이다. 

헉슬리는 이 점을 드러내기 위해 불교·힌두교·도교와 그리스도교·이슬람교 신비주의 등의 여러 경전을 면밀하게 탐구한 후,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들을 비교·분석하면서 본질적인 공통점을 찾아 종합했다. 인용문으로 가려 뽑은 글들만 420여 개에 이르고 있다.

가톨릭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윌리엄 로의 글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으며, 십자가의 성 요한, 잘랄루딘 루미, 성 프랑수와 드 살도 자주 인용하였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뎅크와 프랑크, 퀘이커교를 창시한 조지 폭스의 글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톨스토이·워즈워스 같은 문학 대가들의 글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동양의 현자 중에서는 장자와 노자의 글을 자주 인용하였고, 인도의 유명한 경전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도 인용 횟수가 적지 않다. 다양한 불교 경전도 인용하고 있는데, 달마가 혜가에게 전했다는 《능가경》이 가장 많고, 그밖에 《육조단경》《전심법요》《신심명》 등 선禪의 정수를 보여주는 내용들과 함께 《대승기신론》《청정도론》《능엄경》《법구경》《금강경》 등 웬만큼 불교를 안다고 하는 동양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승과 소승, 교종과 선종의 핵심을 골고루 아우르고 있다.

이런 인용문들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희귀한 자료도 많을 뿐 아니라 그 폭과 깊이, 자료 선정의 안목, 해당 주제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복합적 구성 등을 통해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지적·영적으로 의외의 놀라움을 계속 안겨준다. 이처럼 동서양 영적 천재들의 다종다양한 목소리를 총결집시킨 헉슬리의 방대한 독서량과 사유의 지평, 그리고 해설에서 묻어나오는 체험의 깊이는 그의 천재성이 주는 경이감과 함께 의식이 고양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어떻게 그 길을 찾을 수 있을까?
: 서로 다른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는 순간의 짜릿한 전율!

신은 어디에 있는가? 진리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어떤 이는 초월적인 바깥에서 구하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마음속을 살피며, 어떤 이는 곧장 자신이 바로 절대자이고 진리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종교가 오랜 탐구와 모험 끝에 내미는 이러한 고민에 대한 결론을 헉슬리는 책의 서두에서부터 곧장 제시하며 시작한다.

“그대가 그것이다” “모든 것에서 하나만을 보라” 신은 우리 안에도 저 밖에도 계신다. 영혼 속에도, 영혼을 통해서도 절대적 실재Reality로 가는 길이 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을 통해서도 절대적 실상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다른 것을 배제하고 이들 중 어느 한 길을 따름으로써만 최종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p.111)

하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방법은 쉽지 않다. 아니, 대관절 이게 타당하기나 한 사실일까? 그 까닭과 논리, 전후과정과 방법론들이 이 책의 다른 페이지들을 다채롭게 채우고 있다. 사랑과 진리의 관계, 자신을 이해한다는 말의 의미, 자유의지와 은총, 자아, 선과 악, 시간과 영원, 구원과 해방, 믿음과 지식, 침묵과 기도, 우상숭배, 영적 훈련과 기적의 가치 등 묵직한 주제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내용들이 현대의 심리학이나 과학?정치적 현실과 만나는 지점 등 세부 주제를 통해 ‘신성한 실재’의 특성을 다양한 측면에서 들여다본다. 
수많은 인용문과 함께 제시되는 이러한 내용들이 바로 ‘영원의 철학’이라는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거대한 체계를 모자이크처럼 아름답게 구성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놀라움은 이런 탐구와 인용들이 단순히 ‘좋은 말’에 그치거나 일반 명상서적들이 전하는 피상적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1장의 제목이자 그리스도교?불교?힌두교의 성인들이 모두 언급한 “그대가 그것이다”라는 유명한 표현 하나만 보더라도, 헉슬리는 그러한 통찰이나 진리 그 자체가 다시 하나의 ‘우상’이 될 때 빚어지는 위험성과 그 다음 단계, 그것의 사회적 파급효과까지 언제나 몇 발짝 더 들어감으로써 우리 인식의 지평을 다각도로 넓혀준다.

니르바나(열반)와 삼사라(윤회)가 하나라는 것은 우주의 본성에 관한 사실이다. 그러나 영성이 매우 진보한 영혼만이 이 사실을 충분히 깨닫거나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평범하고 친절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런 진리를 풍문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한다면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반율법주의의 온갖 어두운 이야기들은 사람들이 모든 것은 신이고 신은 모든 것이라는, 순전히 지적이면서 깨달음이 없는 이론을 실제로 적용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p.131~132)

사람에 따라 저마다 그 길이 다른 까닭은?
: 행위의 길, 앎의 길, 헌신의 길을 통해 이르는 곳

본성이 본성에 의해 스스로를 초월하는 방법을 발견할 때까지 우리는 길을 잃고 있는 셈이다. (p.267)

왜 어떤 이는 믿음을 우선시하고, 어떤 이는 분석적인 설명을 좋아하며, 다른 이는 윤리적 실천을 중요시하는 것일까? 어느 시대에서나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여기며 서로를 설득하고 강요하려 애쓴다. 다시 불거지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뿐만 아니라 대규모 인종 학살, 여성 학대, 전쟁과 살인, 폭력의 배후에는 서로 ‘다름’을 존중하지 못하고 또 그 속의 ‘같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치체계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과학적 연구와 종교적 지혜라는 서로 다른 접근을 통해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공통된 이유를 흥미롭게 짚어낸다. 내배엽-중배엽-외배엽이라는 각자의 생리적 기질(체질)이 어떻게 다르며 삶의 방식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이것이 고대 종교가 발견한 헌신의 길, 행위의 길, 앎의 길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역사의 과정에서는 불완전한 종교들 중 어느 것인가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모든 종교의 궁극적 목적을 향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이들을 그 자체로 훌륭하고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 오류는 때로 끔찍한 영향을 끼쳤다. (중략) 쉘던이 지적했듯이 격렬한 개종은 대개 중배엽의 정도가 높은 성격의 사람에게만 한정되는 현상이다. 이런 사람들은 매우 외향적이어서 마음의 낮은 수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들이 자신의 주의를 내면으로 돌리면, 그 결과로 생기는 자신에 대한 앎은 그 생소함과 낯섦으로 인해 계시의 힘과 질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회개metanoia, 혹은 마음의 변화는 갑작스러우면서도 감동으로 넘친다. (중략) 이런 종류의 정서적 격변에 자연스럽게 끌리는 사람에게 구원을 개종에 의존하게 만드는 교리는 만족감을 주지만, 영적 성장에는 매우 치명적이다. (p.266~267)

종교적 문제에서 시작하지만 이는 결국 자기 수행과 진리탐구의 방법론으로 이어지며,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는 전쟁과 폭력의 역사까지 종합하여 짚어내는 설명은 체질론의 옮고 그름을 떠나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고통과 욕망으로 넘치는 이 세상의 의미는 무엇일까?
: 돌아오라, 영원한 실재의 온전함으로

우리는 모두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저마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삶은 오히려 고통으로 가득하게 된다. 위대한 성인들은 저 멀리 천국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에 신이 계시고, 세상 자체가 바로 신이라고까지 하건만, 우리의 삶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일까? 그리스도교는 이에 대한 설명으로 ‘원죄’와 ‘타락’을 이야기했는데, 헉슬리가 ‘영원의 철학’을 통해 밝히는 그 본질은 ‘개체화된 존재에 대한 열망’이다.

신성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완전함과 통합unity이 있는 곳에는 고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창조의 목적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고통이라는 결과를 낳는 현혹적인 분리에로의 충동과 분리감에서 벗어나, 결합하는 앎unitive knowledge을 통해 영원한 실재의 온전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p.383)

모든 인간의 최종 목표는 그 사실을 스스로 발견하고 자신이 실제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일이다. (p.23)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이 삶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무언가를 다시 믿어야 하나? 금욕? 기도? 봉사? 무심? 열정? 아니면 또 다른 배움일까?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은 삶이 그러하듯 이 책 속에서도 늘 의외의 인물을 통해 다양한 경로로 제시된다. 동서양의 수많은 문학 작품과 시/소설/희곡/아포리즘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노래하고 있다.

지금 그대가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지금 그대가 고통받고 있는 것을 아파하라. 이 모든 것을 신성하게 행하라. 그대의 가슴hearts 이외에 변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의 질서에 따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기꺼이 하는 데에 신성함이 있다. _드 코사드 (p.122)

"자아가 소멸되었다는 생각은 파나fana(선禪의 무심無心)에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는데 이는 허물이다. 최고의 상태는 소멸도 사라진 것이다." 아트만-브라흐만이라는 내적 정점에는 황홀경이라는 ‘소멸로부터의 소멸’이 있다. 더 포괄적인 소멸로부터의 또 다른 소멸은 내적 정점에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 세상을 통해, 신에 대한 충만하면서도 깨어있는 일상의 앎 속에 존재한다. (p.136~137)

종교란 본래 당대 최고의 지적 성찰과 고민을 담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이를 일러 '으뜸가는 가르침宗敎'이라고 했던가. 이 책은 그러한 종교의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공통 원리를 언급하면서도 ‘종교’ 그 자체가 아니라 ‘지금’의 나 자신과 ‘여기’의 내 삶으로 행복하게 돌아오는 방법, 그 가장 오래된 지혜를 깊이 있게 이야기한다.

진정한 깨달음과 영적 통합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나침반이 되어줄 책!

1945년에 영어로 출판된 책이 약 70년 만에 한국에서 번역 출판된 데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21세기 새로운 천년을 맞아, 이성과 합리성이 시대정신을 주도하던 근대,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것을 억압하는 형식적 합리성의 지배를 피하려는 탈근대적 시도를 넘어 새로운 통합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객관적·이성적 사유를 기반으로 과학이 발달하고 기술·산업의 발전을 향유하고 있는 밝은 그림과는 대조적으로, 삶의 상품화, 질적 차이의 평준화, 생명세계의 파편화, 천박한 유물론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경험한 인류는 지성을 넘어 영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향한 갈망이 점차 커져가고 있다. 그동안 종교의 영역으로 치부해왔던 ‘영성’이라는 주제는 2000년대에 들어와 의료계를 통해 정신건강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들이 꾸준히 보고되면서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최근 대중들 사이에서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고 있는 점을 보아도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는 도덕적·윤리적 욕구가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곧 우리 모두가 근본에서 하나임을 보여주는 ‘영성’이라는 궁극의 도덕과 직접 관련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고려할 때, 동서양 영적 천재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종합하여 고대부터 내려오는 인류 보편의 진리가 존재함을 보여준 《영원의 철학》은 오히려 21세기에 반드시 읽을 필요가 있는 기본서이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로 ‘지구촌’으로서의 세계를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는 정보화 시대에 동서양의 통합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도, 동서고금의 수준 높은 지혜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보다 높은 의식의 지평을 여는 단초가 될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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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분포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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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가 쓴 책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철학의 중요한 요점들을 잘 정리했다.  구매
도사림 2014-12-16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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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다시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깊은 영성을 주셔서 감사드려요!  구매
장미꽃이슬 2014-12-02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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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주는 책!!!
머리속의 지식이 아닌 영혼을 살찌게하는 책!!!
아무나 읽을 수 없는.....  구매
불가사리 2014-12-08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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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 420여개의 보석 같은 인용문을 통해 영원의 철학을 다채롭게 소개하고 있는 인용문만 따로 골라 읽어도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흥미로운 인문학적 보고이자 탁월한 종교,명상서.  구매
다비치 2014-08-3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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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드디어 만나보는 올더스 헉슬리의 후기 대표작...

 2차 대전이 서서히 끝나가던 1945년.
 '멋진 신세계'에서 현대 문명이 가열차게 추구하고 있는 물질주의가 가져오는 건 결국 인간 소외와 공허 밖에는 없다고 말했던 올더스 헉슬리는 한 권의 책을 발표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의 철학'이죠. 이 책이 일으킨 파장이 엄청났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우리가 흔히 '뉴에이지'라고 알고 있는 것들도 다 이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죠.

 원제는 'The Perennial Philosophy'. 책의 첫머리부터 올더스 헉슬리는 라이프니츠가 한 말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 용어는 중세 때부터 있었습니다. 최초로 그 말을 쓴 것은 'Agostino Steuco'라고 합니다. 이탈리아인으로 주로 구약을 연구하던 학자였는데 당시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주도하고 있던 신플라톤주의를 그는 '영원의 철학'이라고 불렀다는 군요. 피치노는 당대 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신앙을 약화시키고 있다고까지 생각했죠. 그래서 그는 플라톤에게로 기울었습니다. 플라톤의 사상을 이길 수 있는 건 오직 그리스도 사상 밖에는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는 플라톤 철학을 '경건의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그 플라톤 철학을 자신이 신봉하는 그리스도 신학과 합치고자 했죠. Steuco는 '경건의 철학'이라는 말을 살짝 바꾸어 '영원의 철학'으로 부른 것입니다. 네, 실은 조금 경멸의 의미였죠. 그건 신학이 아니라 철학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어쨌든 '영원의 철학'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피치노는 플라톤의 실재주의를 경유해 무엇보다 영혼의 불멸성을 강조했습니다. 그 불멸하는 인간의 영혼을 중심으로 우주를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플라톤처럼 가상인 우리의 현실과 이데아인 참 세계로 나누고 그것은 바로 인간의 영혼을 통해 결합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인간 영혼의 목표는 초월적 존재이자 '이데아'인 신과의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보았죠. 이것은 후일 우리가 'perennialism'이라고 부르는 것이 됩니다. 영속주의 혹은 항존주의라고도 부르는 것이죠. 다년생 식물을 뜻하는 'perennia'의 뜻처럼 영원히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을 그렇게 부릅니다. 종교적 입장을 투영하자면 그 가치는 물론 신이 되겠죠. 피치노가 말했던 '신과의 합일'이 종교로서의 'perennialism'이 지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피치노처럼 기독교만이 유일의 통로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죠. 'perennialism'의 근본 목적은 신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동,서양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이론과 방법들을 하나도 허투르 보지 않고 다 의미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거기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골라내 진정한 신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통로(흔히 '비전의 핵심'이라 이르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 바로 이것이'perennialism'입니다. 이 'perennialism'은 하나의 여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최초의 거대한 파문을 일으킨 것이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입니다.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이미 물질문명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당연히 물질문명은 참된 정신에 의해 인도되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더구나 바깥은 참된 정신으로 인도되지 않은 물질문명이 어떠한 비극을 초래하는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이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에게 절박감은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36년에 나온 '가자에서 눈이 멀어'는 헉슬리의 그러한 심리를 잘 나타내 주고 있죠.  그는 위안으로서든, 구원으로서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기독교는 그에게 그걸 가져다 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러했던가? 그 이유를 그는 이 책의 336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와 형이상학에 관해 집필하는 대부분의 유럽 및 미국의 저자들은 유대인, 그리스인, 지중해 연안 지역과 서구 유럽 사람들만이 이 주제에 관해 생각해본 것처럼 쓰고 있다. 완전히 자의적이면서 고의적인 무지가 20세기에 와서야 이렇게 드러난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불명예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하다.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제국주의는 영원한 세계 평화의 위협이 되고 있다.(p. 336)

 '멋진 신세계'와 '가자에서 눈이 멀어'에서 이미 파시즘에 대한 공포와 환멸을 드러내고 있는 그입니다.
 그런 그에게 오로지 하나의 진리만 있다고 주장하며 다른 모든 것을 배척하는 서양의 신학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치는 자신들의 전쟁을 '제2의 십자군'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길이 필요했습니다. 하나가 아닌 다양한 길이. 모든 경계를 초월하고 동시에 아우르는 길이. 그 보편을 향한 대화. 그리하여 그는 '영원의 철학'을 썼습니다. 그냥 책이 아니라 쓴다는 것이 동시에 자기 구원의 노력이기도 한 책을. '영원의 철학'은 그런 책입니다.

 모두 27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건 올더스 헉슬리가 찾아낸 모든 종교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가 27가지라는 뜻도 됩니다. 그는 이 책에서 그 요소 하나를 각기 한 장씩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내용은 정말 광범위합니다. 불교, 도교, 유교를 비롯하여 동,서양의 종교들이 거의 다 인용되고 있으니까요. 정말 읽다보면 어떻게 이걸 다 혼자의 힘으로 찾아내고 더구나 체계적으로 정리까지 했는지, 거기 투영된 신학적 제국주의를 벗어나고자 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집념이 무서울 정도입니다. '과연, 듣던대로 대단하구나!' 느낄 수 밖에 없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종교학자로 명망있는 오강남 교수는 이 책에 대해 단적으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나는 그가 쓴 수많은 책 중에 단연 이 '영원의 철학'이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 단언하고 싶다.'

 저도 동의합니다. 물론 여파도 컸었지만 여기 들어간 그의 노고만으로도 그렇다고 인정해주고 싶어요. 내용도 그리 쉬운 편은 아니고 번역이 다소 불친절하여 읽는 속도가 좀 더딜 수 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고 곱씹으면 이해못할 부분은 없습니다. 또한 의외로 올더스 헉슬리 스스로 자신이 개진하고자 하는 '영원의 철학'을 꽤나 체계적으로 다져놓고 있기도 합니다. 개념정리, 구분과 계층화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이죠. 제가 그랬듯이 따로 노트를 준비하여 정리해가며 읽는 것도 이 책을 소화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년에 올더스 헉슬리는 신비주의로 더욱 기울었습니다. 죽을 때는 아내가 두 번이나 LSD를 놓아 되도록 그가 바라는 상태에서 세상과 작별하도록 하기도 했었죠. 이처럼 그 역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작가 켄 키지만큼이나 환각제가 깨달음을 위한 새로운 통로가 되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인식의 문'이란 책을 썼는데 짐 모리슨은 거기에 감명을 받아 나중에 자신이 조직한 락밴드의 이름을 'DOORS'라 짓기도 했습니다. 소설만큼이나 올더스 헉슬리의 종교나 신비주의에 관한 책들도 영향을 많이 미쳤는데 거기에 관한 책들은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그랬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네요. 그것도 그 시기 가장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원의 철학'을. 덕분에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헉슬리 후기 모습에 대한 궁금증을 제대로 풀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다른 많은 종교에 대해서도 이해가 풍부해진 듯 합니다. 특히 종교에 대해서라면 그것에 대한 시각을 근본부터 다시 되짚어 보게된 것 같습니다. 종교를 보다 폭넓은 시야로 이해하고 싶다면 분명 좋은 동반자가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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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로이 2014-08-07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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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진리

모든 종교는 비슷한 진리를 품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작 그 모든 종교들을 하나의 고리로 엮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한 평생을 종교 하나만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은데, 동서양의 종교를 망라하는 작업은 생각만 해도 막막하다. 그런데 이미 몇십년 전에 이 일을 해낸 사람이 있다. '멋진 신세계'로 잘 알려진 올더스 헉슬리가 바로 그 인물이다. 모든 종교들에서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을 뽑아낸 뒤에 각 종교마다 해당 이념에 대해서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종합해놓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비교적 쉽게 쓰여있다고는 하나,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은 결코 쉽지 않다. 원래 개념도 어려울뿐더러 원문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쓰여있는 단어들도 상당히 까다롭다. 종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독자에게는 조금 벅찬 책이다. 그래도 시간을 가지고 찬찬히 읽다보면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는 무엇보다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기 위해서이다. 세상에 아무것도 지지할 것이 없다고 여겨질 때 종교만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에 의지힌다. 그런데 평화를 위한 종교가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 간에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분명 각 종교의 지도자는 사랑과 이해를 가르쳤을텐데, 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킨다. 이 사람들에게 서로가 다르다고 등돌리기 전에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이념이 다른 것이 아니라,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약간 그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다. 이렇게 여러 종교를 통합적으로 보면 각 종교가 가진 한계도 보이고 장점도 보인다. 그럼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 넓힐 수 있다.

종교를 깊이 탐구할수록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알게된다. 외부 환경을 보고 이런저런 말을 하기는 쉽지만, 정작 나의 내면을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다. 비교적 쉽게 번역을 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자신에 대해 좀 더 곰곰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어떤 절대적인 진리를 찾기보다 결국은 나를 위해서 종교를 믿는다. 하나의 종교에만 치우치지 말고 좀 더 다양하게 믿음의 폭을 넓혀보는 것도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현대 사회의 종교적 갈등을 보며 가장 안타까운 일은 자신의 왜곡된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일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나면 종교에 대한 편협된 생각이 없어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조금 어렵지만, 그래도 충분히 이 책은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종교의 보편적인 진리에 대해 관심이 많은 독자들에게 적극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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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하늘 2014-08-03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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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슬리의 보편적 진리 새창으로 보기
冊 이야기 2014-164

『영원의 철학』 올더스 헉슬리 / 김영사

1. "아. 이 멋진 인간들이여!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간들인가! 오, 멋진 신세계여..." 올더스 헉슬리를 생각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것이 《멋진 신세계》이다. 흔히 조지 오웰의 《1984년》과 함께 거론되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2. 많은 이야기 중 책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오웰이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공포와 기만이 지배하는 세계이며, 헉슬리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욕망과 말초적인 자극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오웰이 책을 금지할 자들을 두려워했다면, 헉슬리는 아무도 책을 읽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책을 금지할 필요조차 없어질 것을 두려워했다.

3. 책에 대한 관점만 보면 올더스 헉슬리가 이겼다. 최근 인터넷에 오른 글들 중에 머니투데이의 [新대한민국 리포트] '책 안 읽는 사회'를 보면 올더스 헉슬리가 백번 옳다. "문학소녀? 찌질하잖아요. 쌤도 문제 하나 더 풀라던데요". "진지 빨지 말고 책 치워라~". '무식한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의 기사 중간 중간 눈에 띄는 이러한 문구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제대로 가고 있는가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 아이들이 이 나라를 과연 어떻게 운전해갈지 큰 걱정이다.

4. 책의 제목인 ‘영원의 철학’에 무게감이 실려 있다. 영원히 풀어가야 할 철학이냐? 영원을 향한 철학이냐? 헉슬리는 ‘영원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이 근대 독일의 수학자이며 철학자이자 뉴턴과 별개로 무한소 미적분을 창시한 독일 근세 철학의 원조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최초로 사용한 용어라고 한다.

5. 그러나 옮긴이 조옥경 교수는 ‘영원의 철학’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이탈리아 구약성경학자 아고스티노 스테우코가 자신의 저서 《Deperenni philosophia》(1540)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라고 한다. 라이프니츠가 이 용어를 ‘역사를 초월해서 전승되는 형이상학적 근본진리’라는 의미로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6. 영원의 철학에 따르면, 기독교 · 불교 · 유교 · 도교 · 이슬람교 · 유대교 · 힌두교 등 세계의 종교는 영원의 철학이 제안하는 보편적인 진리가 각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적용된 결과로 나타난 모습니다. 이 보편적인 진리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7. 첫째, 물질 · 생명 · 정신권의 근본바탕에는 신성한 실재가 존재하며, 모든 현상은 그러한 실재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둘째, 신성한 실재는 분석적 사고를 통해서는 포착할 수 없으며, 더 높은 차원의 직관적 통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셋째, 인간은 현상적 자아와 영원한 참자아라는 이중성을 지니며, 참자아는 신성한 실재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넷째,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러한 실재와 경험적으로 합일하는 데 있다.

8. 헉슬리는 ‘그대가 그것이다’, ‘세상 속의 신’, ‘최고의 사랑’, ‘진리’, ‘종교와 기질’, ‘선과 악’, ‘시간과 영원’, ‘침묵’, ‘기도’, ‘믿음’, ‘우상숭배’, ‘기적’, ‘영적 훈련’ 등을 포함한 27개의 화두를 갖고 생각을 풀어나가고 있다. 400여 인용문엔 각 종교의 경전 외에 노자, 장자, 에크하르트, 십자가의 성 요한, 카뮈, 사르트르 등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9. 다소 종교적인 면에 치중된 감이 크지만, 요즈음처럼 신앙인은 없고 종교인만 있는 현실을 직시해볼 때 종교를 갖고 있건 아니건 읽어볼 만한 책이다. 간혹 종교에 대한 불신감만 충만한 사람들은 하나님도 안 믿고, 부처님도 안 믿고 ‘나는 나를 믿는다’고 한다. 그럼 그 ‘나’는 제대로 알고 있는가? 종교는 우선 믿고 알아가는 방법도 있다. 그 후에 맛을 보는 경우도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4:8) 단지 그 맛에만 길들여져서 다른 맛은 모두 배척하는 지나침은 자제해야 할 일이다. 아울러 ‘나’를 제대로 알고 ‘나’를 믿는 계기도 되리라 믿는다. 그 ‘나’를 제대로 알고 나면 ‘나’를 믿게 될지 어떨지에 대해선 말을 아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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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saint 2014-08-05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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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철학] 읽어보고 싶다 와 읽을 수 있다는 다르다.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지적 허영이라고 해야 할까? 김영사 서포터즈 선택 도서 중 하나였던 영원의 철학. 책에 대한 소개를 읽고 덜컥 신청하였다. 쉽지 않아 보였으나 그래도 읽을만 하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를 했다. 사실 ‘철학’ 이라는 글자가 붙으면 괜히 읽어보고 마음이 생기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그런 기대와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다. 이 책은 내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아직 내가 이 책을 읽을 정도의 넓이와 깊이가 갖춰지지 않은 것이겠지. 따라서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은 ‘서평’이라 말하기에는 매우 부끄럽고 단순한 ‘후감’ 아라 할 수 있겠다.

영원의 철학. 이 책이 세상에 나오는지는 70년이 되었다. 그리고 국내에 완역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마 김영사 같은 국내의 큰 출판사였기에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영원의 철학이 당장 불타나게 팔릴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이제 우리나라에도 제대로 된 영원의 철학의 번역본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출판사에서 낸 것이라고 믿고 싶다. (아! 그런데 지금 글을 쓰다 보니 매년 꾸준한 수요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 대학수업의 부교재로 쓰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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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철학은 세계 종교의 ‘공통적 요소’ 27가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없다. 내가 그 수준이 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군데군데 마음에 드는 구절과 저자의 주장이 있으니 적어보고자 한다. 가장 마음에 와 닿고 배움에도 아래와 같은 자세가 매우 필요하다. 특히나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더욱더 아래의 가르침을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다.

자기 종파의 영광을 높일 목적으로 자신의 종파에 전적으로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종파만을 공경하고 다른 종파를 비방하는 사람은 사실상 그런 행위로 인해 자신의 종파에게 심각한 해악을 끼치고 있다. 그러므로 화합하는 것, 더 정확히 말해서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경건함의 법칙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것이 훌륭하다. - 아소카의 칙령

신의 아이들은 매우 사랑스럽고 매우 별나고, 매우 친절하지만 매우 편협하다. - 사두 선다 싱

백 년 전에는 산스크리티어‧팔리어‧중국어가 유럽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유럽 학자들의 무지가 그들의 편협주의를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어느 정도 적절한 번역이 풍성해진 오늘날에는 그럴 이유가 전혀 없으며 변명의 여지 또한 없다. 그럼에도 불굴하구 종교와 형이상학에 관해 집필하는 대부분의 유럽 및 미국의 저자들은 유대인, 그리스인, 지중해 연안 지역과 서구 유럽 사람들만이 이 주제에 관해 생각해 본 것처럼 쓰고 있다. 완전히 자의적이면서 고의적인 무지가 20세기에 와서야 이렇게 드러난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불명예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하다.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제국주의는 영원한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되고 있다. 


다음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종교와 기질 : 체질과 기질에 따라 그 길은 다를 수 있다> 이었다.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에도 사람들의 차이에 따라 각자 맞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맞는 말이며 종교에서도 가르치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들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가? 우리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한 가지 길만을 고집하는 경우가 있다. 타인에게도 한 방법만을 강요함으로써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한 길을 인정하는 것은 이미 예로부터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영원의 철학’은 옛 방식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어 머리에 꽉 차 들어가게끔 말이다. 그래야 여기의 글들이 마음을 통해 울려지지 않을까 싶다. 나 같은 사람보다는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깨달음을 줄 수 있을 책이라 생각된다.

쉽게 읽고 끝낼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곰곰이 씹어볼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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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gperson 2014-08-10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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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영원의 철학

한마디로 미추어버릴 것 같은 책. 올더스 헉슬리의 이름을 여러 번 되내이면서 정말 헉소리가 나는 책이었다. 페북스터디로 <개념 뿌리들>을 하고 있는데 그 책만큼이나 어려운 책이었다. 그래서 난 서평을 못하겠다!!! 헉슬리의 생각을 간파할 수도 없고, 헉슬리의 이야기를 요약하기도 어렵다. 그저 난 이제 한 번 이 책을 읽었을 뿐이다. 감히 어찌 이 책을 논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하자면, 몇 몇 chapter를 소개하는 정도이지 싶다.

헉슬리는 최고의 사랑이란 chpater에서 사랑을 love가 아닌 charity라고 했다. Charity는 자비나 관용, 자애, 너그러움 등을 의미한다. 즉, charity는 더 이상 최고이자 가장 신성한 형태의 사랑의 뜻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왜 love와 charity를 굳이 구분하나 싶기도 할 것 같다. 영적 삶을 사는 스승들은 낮은 형태의 사랑일 때 love를 사용했으며, 최고의 사랑일 때 charity를 사용했다고 한다. 용어에 정확히 구분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다. 볼펜 가져와 했는데 붓 가져가면 쓰겠나?

최고의 사랑은 사심이 없고, 보상을 바라지 않으며, 그 선함에 대해 어떤 악을 돌려받아도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최고의 사랑이 있을까 싶지만) 또한 낮은 형태의 사랑과는 달리 정서(emotion)이 아니라는 점이다. 의지의 행위로 시작해서 순수하게 영적인 자각, 그 대상의 본질과 결합하는 사랑-앎으로 완성된다고 한다. (아마 낮은 형태의 사랑은 이끌림의 사랑이 아닐까 싶다. 남녀간의 사랑은 앎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니까)

결론적으로 최고의 사랑은 사심 없음, 고요함 그리고 겸손이다. 그러면서 현대는 냉혹함(lovenessless)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 대자연에 대한 자비가 부족하여 자연을 파괴한다고 하였다. 여기서보면 lovenessless라고 했다. 낮은 단계의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낮은 단계의 사랑은 높은 단계의 사랑 charity로 가는 과정인데 현대 사회는 love가 없다는 것이 헉슬리의 생각이라고 추론했다.

헉슬리는 사유에 대해서 그리 찬성하는 편은 아니라는 생각을 받았다. 사유하면 집착이 되기에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또 해본다.

여기까지가 최고의 사랑 charity라는 한 chapter의 내용을 나만의 방식으로 요약해 본 것이다. 27개의 chapter 중 겨우 하나의 chapter를 요약하는데 이 정도 걸렸으니 아마도 이 책은 올해까지 읽으면 다행이다 싶을 것 같다.

종교의 이야기를 떠나 헉슬리의 책은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분석하지 않고 나만의 느낌으로 받아들이더라도 나를 한 단계 올려줄 “입맛 까칠한” 책임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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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2014-08-06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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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진정한 깨달음을 위한 420개 나침반

진정한 깨달음을 위한 420개 나침반
서정보기자  2014-08-02 

◇영원의 철학/올더스 헉슬리 지음·조옥경 옮김 /528쪽/김영사 (2014)

올더스 헉슬리(1894∼1963·사진)를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소설 ‘멋진 신세계’의 작가로만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뜻밖으로 여겨진다. 1944년 출간된 책이 70년이 지나서야 한국어로 완역돼 선보인다는 것 역시 뜻밖이다.

이 책은 사회비평가였던 그가 1937년 미국에 건너온 뒤 크리슈나무르티, 프라바바난다 등 유명한 영성가들과 교류를 나누며 궁극의 실재와 영성을 탐구한 결과다.

영원의 철학은 ‘모든 종교의 본질적이고 공통된 핵심 진리’를 뜻한다. 헉슬리는 이를 신과 결합하는 삶이고 인간의 최종 목적이라고 지칭한다. 알쏭달쏭한 이 결론에 대해 독자가 동의하는지는 별개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이 책에서 영성과 관련한 27개의 주제를 정하고 기독교는 물론 이슬람교 불교 도교 힌두교 등 수많은 종교의 주요 저작에서 420개의 인용문을 뽑은 점이다. 적어도 ‘영성’과 관련해 인류 역사 속에서 축적돼온 방대한 가르침의 진수를 한 권에 축약 정리한 것만 해도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 책에서 다루는 궁극의 실재, 신, 영혼(soul) 영(spirit) 자아(self) 등의 개념에 대해 한마디로 저자의 생각은 이렇다고 정의를 내리긴 쉽지 않다.

그러나 헉슬리는 난조를위한 몇 가지 전제 조건을 명확히했다. 신이 준 것에 대한 한없는 겸손, 자신의 무지에 대한 인식, 탐구의 길은 오직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다는 것이다. 또한 "영원한 철학 '과는 반대로, 시간 속에서 미래의 유토피아를 꿈꾸는'시간의 철학 '은 종교와 이념의 이름으로 엄청난 폭력과 배척의 원인이라는 점도 분명히했다. 

책을 추리 소설을 읽는 것 처럼 단번에 읽지 않는다는 것을 희망한다. 조금씩 음미 다시 씹어 습기 찬다 과정을 통해 자신의 영성을 기르도록 읽고 진행 좋겠다. 27의 주제를 1 일 1 개씩 읽으면 딱 속도이다. 그리고 영혼이 갈증을 기억할 때마다 꺼내 읽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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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onga.com/jp/article/all/20140802/425610/1/%E7%9C%9F%E3%81%AE%E6%82%9F%E3%82%8A%E3%81%AE%E3%81%9F%E3%82%81%E3%81%AE%EF%BC%94%EF%BC%92%EF%BC%90%E3%81%AE%E7%BE%85%E9%87%9D%E7%9B%A4

2021/08/29

발제 문명전환의 정치와 새로운 인간 이남곡/연찬문화연구소 이사장

 2021 여름 지리산연찬

주제 : 문명전환 정치의 주체

2021.8.27(금) 오후 3시 ▶ 8.28(토) 오전 11시

주/요/일/정

8.27 ● 연찬1 오후 3:00-6:00

2021/08/03

조던 피터슨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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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피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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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베어런트 피터슨
Jordan Bernt Pet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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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정치적 견해
3.1. 사형제 반대3.2. 캐시 뉴먼과의 인터뷰3.3. Bill C-163.4마르크스 비판
3.4.1슬라보예 지젝과의 토론
3.5지능과 기술적 실업에 대한 시각3.6무신론 비판 및 독특한 종교관3.7지구 온난화에 대한 입장
4. 젊은 남성들로부터의 인기5. 논란 및 비판
5.1. 정치 성향에 대한 논란
5.1.1. 극우파라고 보는 견해5.1.2. 극우파가 아니라고 보는 견해
6. 여담7. 국내 출판된 저서8. 관련 문서9. 바깥 고리

1. 개요[편집]

캐나다의 임상 심리학자이자 문화 비평가. 2021년 현재 토론토 대학교의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된 연구 분야는 사회심리학성격심리학 등이며, 특히 인간이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믿게 되는 심리적 원인, 개인의 성취를 향상시키는 방법, 반사회적 행동의 교정법 등에 대해 연구를 했다. 출신 학교는 캐나다의 앨버타 대학교(학부)와 맥길 대학교(대학원)로, 박사 학위 취득 후 맥길 대학교에 2년간 더 연구원으로 남아있다가, 1993년에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하버드에서 5년간 교수로 재직한 뒤에 1998년 토론토 대학교 전임교수가 되어 캐나다로 돌아왔다.

2016년 캐나다의 의회가 Bill C-16 법률[4]을 통과시키려하자, 캠퍼스에서 이 법과 정치적 올바름을 비판하는 장면(원본영상한국어 번역)과 피터슨을 나치라며 공격하는 리버럴 대학생들과의 설전[5] 유튜브를 통해 알려지면서 대중과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개인 유튜브 채널과 언론에 지속적으로 출연하면서, 북미의 언론들이 '조던 피터슨 현상'이라고 명명할 정도로 화제가 되고 있다. 뉴욕 타임즈에 의해 지성의 암흑망의 일원으로 지목되었다.#

그의 첫번째 저서 《의미의 지도: 믿음의 구조》(Maps of Meaning: The Architecture of Belief)는 1999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믿음과 신앙의 구조와, 이것이 감정과 대량 학살의 동기에서 갖는 역할에 대해 서술하였다. 그의 두 번째 저서 《12가지 인생의 법칙 - 혼돈의 해독제》(12 Rules for Life: An Antidote to Chaos)는 2018년 1월에 출판되었다. 2018년 10월 31일 한국에서도 출판되었다.

사상적으로 카를 융[6]지그문트 프로이트장 피아제프리드리히 니체표도르 도스토옙스키[7]알렉산드르 솔제니친에게 영향을 받았다. 정작 니체는 무신론자였다

2. 생애[편집]

1962년 6월 12일 캐나다 앨버타 주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청소년 시절에는 좌익 계열 정당 신민주당(New Democratic Party)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도 하였는데, 결국 이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18세가 되던 해에 신민주당을 떠났다. 1982년 앨버타 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1년간 유럽 여행을 떠났는데, 냉전시기 동안 핵전쟁의 공포가 유럽에 전체주의를 야기하고 있는 현상에 흥미를 느껴 심리학을 더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피터슨은 다시 앨버타 대학교로 돌아와 심리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1984년 맥길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였다. 1991년 임상 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1993년 하버드 대학교 교수로 임용되기 전까지 2년간 맥길 대학교에서 박사 후 연구과정을 수행하였다.

1989년에 어린 시절부터 이웃에 살던 1살 연상[8]의 태미 로버츠(Tammy Roberts)[9]와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2017년, 딸 미케일라 피터슨(Mikhaila Peterson)의 출산으로 손녀 스칼렛을 보게 되었다.

2019년 9월 19일 항불안제(벤조계열의 신경안정제) 중독 증세로 인해 뉴욕 시의 재활시설에 입원했음이 밝혀졌다. 조던 피터슨 가족 근황 아내의 신장암 말기 진단으로 그는 극심한 불안감에 빠졌는데, 더 큰 불안증상을 예방하고자 의사에게 합법적으로 처방받아 복용한 항불안제는 매우 중독성이 심한 약품이었고, 금단증상을 이겨내기 위해 재활시설에 스스로 입원했다.(자세한 내용은 딸 미케일라 피터슨이 올린 영상에서 알 수 있다.)# 2020년 1월 러시아의 병원에 입원했다.#

2020년 6월 수개월만에 딸 미케일라 피터슨이 진행하는 팟캐스트에 모습을 보여 직접 근황을 전하였다.

2020년 10월 20일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일을 다시 시작할 것이라는 동영상을 업로드 했다.

3. 정치적 견해[편집]

피터슨은 정치적 올바름에 관련된 많은 문제, 특히 페미니즘탈근대주의, 부의 재분배, 백인 특권(White privilege)[10]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 환경주의 등에서 현대 자유주의자들의 관점을 비판하고 있다.

정치적 신념에 대한 그의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본래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믿었던 정치적 올바름은 평등주의적인 성격을 띄었지만 현대의 정치적 올바름의 전사들(SJW)은 권위주의적인 양상을 보인다. SJW는 이성적 사고보다는 공감을 무기화하며, 이들의 행태는 심지어 우익 권위주의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피터슨은 정치적 올바름이 왜곡된 원인에는 대학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본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1990년대부터 북미의 대학가에 광풍처럼 번져나간 정치적 올바름은 한쪽으로 경도된 인문학 교수들이 주도하였으며, 특히 인문학은 부패해가고 있고, 과학을 불신하며, 지성적 대화보다는 이념적 대화에 몰두하고 있다. 교수로서의 그의 경험에 의하면, 그동안 이념의 허상이 많은 참상을 야기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르친 대부분의 학생들이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 치하의 범죄와 대량학살에 대해 전혀 교육받지 못한 채 대학에 입학한다

피터슨은 1960년대 이후 철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의 사상이 (비록 본인들은 소련 치하의 범죄와 공산주의의 경제적 실패 때문에 이러한 연관성을 인정하기 싫어하지만)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로부터 시작해 미국 예일대 영어영문학과를 통해 탈근대주의이 퍼져나가며 영향력을 획득하였는데, 탈근대주의자들은 교묘한 속임수를 부려서 억압받는 노동 계급과 억압하는 자본계급의 관계에서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로 이름만 바꾼 채 같은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인종 정체성, 성 정체성 등의 집단적 정체성이 개인 정체성보다 중요하다는 사상이 퍼져나가고 있고, 이러한 신념을 지닌 사람들이 정부기관의 일부(특히 중하부)를 통제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신마르크스주의에 잠식된 여성학과 인종학(ethinic studies) 연구에 대해 국가의 지원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학생들에게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왜곡된 사회학인류학영문학 등의 분야를 피할 것을 권고한다. 그는 이러한 분야들이 학문의 가면을 쓴 채 비과학적 방법론과 사기에 가까운 동료평가,[11][12] 출처 불명의 문헌 인용 등의 만행을 부리고 있으며, 학생들에게 광신적 행동을 유발하고, 안전 공간(safe spaces)[13]을 도입하고, 극좌적 사상을 불어 넣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정체성 정치 및 정치적 올바름을 마르크스주의와 연관지으려는 피터슨의 시도는 비단 친PC진영뿐이 좌파 진영 전반에게 큰 비판을 받았다.

부의 재분배 문제에 관련해서 피터슨은 파레토 법칙 때문에 인위적으로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기는 대단히 힘들다고 말한다.[14][15] 이 예를 들어 농업의 경우 근면하고 농업기술이 있는 20%의 농부들이 전체 수확의 80%를 생산한다. 또한 조직생활에서 작은 이점을 가진 어떤 사람이 그 이점을 활용할 경우 남들보다 빨리 승진하게 되고, 승진을 할수록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며, 이를 통해 더 빨리 승진을 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더 큰 성공을 하게 된다. 이렇게 소수의 사람이 많은 권력(혹은 부)를 가지게 되는 현상은 인간의 모든 사회 조직에서 관찰되며,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단순히 악덕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한 결과가 아니다.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조직 내에서 가장 앞서가려는 경향이 있는 동시에 자신이 속한 조직이 붕괴하지 않게 보호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부의 편중이 심해져서 사회가 불안해질 경우, 마르크스의 예언과는 달리 자발적으로 소외계층을 보호하는 자정작용이 발생하고, 이러한 균형이 사회를 지탱한다. 비록 이러한 자연적인 균형이 하위 20%에게는 불공평해 보이겠지만, 그 누구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인간 사회 구조를 결과의 평등이 이루어지도록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며, 과거에 공산주의자들이 인위적인 조정을 실험하였을 때 소련의 라스쿨라치바니예나 중국의 대약진 운동과 같이 수천만 명이 굶어죽는 참사가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피터슨은 노동자 정당에 대해 별로 신뢰하지 않는데, 이는 청소년 시절 캐나다의 노동자 정당인 신민주당에 몸담았던 경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노동자 정당의 사람들이 겉으로 노동자들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부유한 자들에 대한 시기와 분노로 가득차 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런 사람들이 권력을 획득할 경우 노동자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하고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인다. 특히 가진 자들에 대한 분노를 가진 사람이 반사회적 성향을 가질 경우, 소외 계층에서 반사회적 인물들을 선동할 뿐만 아니라 집단적 정체성의 이름으로 반사회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론을 제공하면서, 사회를 파괴하는 폭력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피터슨은 '백인 특권(White Privilege)'이라는 용어가 '어떤 개인(즉 백인)이 단지 특정한 인종 그룹에 속해있다는 이유만으로, 가설상으로나 존재하는 범죄의 가해자라고 비난하는데 사용되고 있다'면서, 이러한 주장이 오히려 극단적인 인종차별이며 멈추어져야 한다고 비판하였다. 흔히 좌익 계열에서 발견되는 백인 특권에 대한 비난은 우익 세력들이 종종 국수주의와 인종적 자부심을 이용하는 것 만큼이나 위험하다. 한편 2017년 버지니아 샬러츠빌 폭동에 대해서는 정체성 정치[16]를 비판하기도 했다. "코카소이드(caucasoid: 생물학적 의미의 백인종)들이 백인(white: 집단 정체성으로의 백인)으로 회귀해서는 안된다. 이는 나쁜 생각이고 위험한 생각이지만, 빠르게 다가 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집단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현대 사회에 급격히 퍼져나가고 있다면서, 집단정체성은 "심각하게 병적이고,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인종 청소와 다름없으며, 결국 인류 문명을 망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동성결혼에 대해서는 조건부 찬성 입장을 밝혔다. 동성애자들 역시 전통적 가족관계를 맺을 권리를 주는 방향의 동성결혼이라면 찬성하겠지만, 전통적 가족제도를 파괴하는 방향의 동성결혼이라면 반대하겠다고 말했다.

피터슨은 본인을 영국식 고전적 자유주의자(classic British liberal)로 소개한다.# 다만 이는 본인과 지지자들의 주장이며 반대자들은 그를 대안우파 온건파(alt-lite)라고 주장한다.

3.1. 사형제 반대[편집]

정부에게 그 정도의 권력을 부여할 것인가? 저는 '사실상 안 된다'라고 말할 겁니다.
왜 그러느냐, 정부가 그 일을 그저 쉽게 할 수 있으면 안 되거든요. 그리고 정부는 실수도 하죠, 많은 실수를요.
사형이 합당한 범죄들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폭력적인 강간이 그중 하나일 겁니다. 당연히 그것을 넘어서는 범죄들도 있죠. 당신의 딸이나 어머니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폭력적으로 강간당했는데 살인 충동이 들 만큼 격분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뭔가가 잘못된 것이죠. 당신에게서 그 짐을 충분한 처벌로 덜어주는 것이 정부에게 달려 있다는 것인데 아마도 그 처벌은 사형이어야겠죠. 그러면 정부는요. 여기서 누가 괴물인가요? 범죄자인가요, 아니면 정부인가요. 뭐 범죄자는 분명 괴물이겠죠, 하지만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ManOfAllCreation, Jordan Peterson - The Death Penalty (게시일 : 2017.11.08)
피터슨바라기, [KOR SUB] 조던 피터슨, 사형 제도에 대해서 (게시일: 2018. 7. 26.)#
정부는 실수를 많이 하는데, 그런 정부에게 사형을 할 권한을 주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죽여야 할 범죄자가 있는 것과 실제 죽일 권한을 주는 건 쟁점이 다르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지적했다.

3.2. 캐시 뉴먼과의 인터뷰[편집]


2018년 1월 영국의 Channel 4에서 앵커 캐시 뉴먼(Cathy Newman)과 남녀 임금격차에 대해 토론하였는데, 뉴먼은 30분 가량의 인터뷰 내내 피터슨의 발언을 왜곡하려고 시도해서 말끝마다 피터슨에게 참교육을 당하는 동시에 빈축을 샀다. 뉴먼은 시종일관 "그러니까 당신이 하는 말은..."(So, you're saying...)이라는 표현을 반복했는데, 이로 인해 So, you're saying...은 뉴먼을 조롱하는 일종의 이 되었다.


이 뉴스 이후, 캐시 뉴먼을 향한 조롱과 공격, 협박이 심해지면서, Channel 4에선 경호 전문가를 따로 불렀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에 피터슨은 마치 자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들 때문에 기분이 언짢았으나, 뉴먼을 향한 악성 댓글 중에는 정말 심각한 것도 있어서 그에게 협박성 메시지를 보내지 말 것을 당부하는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재밌는 건 20개가 넘는 영국 언론들이 다시 그걸 가지고 피터슨이 '팩트'를 인정했다며 공격했다는 것이다.

이 영상에서 캐시 뉴먼이 당황한 것은 조던 피터슨의 독특한 포지션 때문이다. 'So, you're saying that...'은 기존 캐시뉴먼이 알고 있던 토론 구조와 동일화하려는 시도였지만, 조던 피터슨은 그 모든 답에 대해 부정하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학자이기에 자신의 대화주제에 많은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캐시 뉴먼은 앵커이기에 조던 피터슨이 말하는 연구 결과나 이론들에 대해 효과적인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이래서 보통의 경우에는 앵커와 학자간의 대담일 때는 정해진 질문을 앵커가 하고 학자가 대답하는 우호적인 포지션을 취하지만 제작진과 앵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학자와 논쟁하는 선택을 했고, 그 결과 조던 피터슨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기존 담론구조와 어떻게 다른지 충분히 이야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편집 의도가 의도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겠지만, 앵커는 앵커의 역할을 했고, 학자는 학자의 역할을 했다.

3.3. Bill C-16[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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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마르크스 비판[편집]



미국의 팟캐스트 ‘조 로건 익스피리언스’(Joe Rogan Experience)에 출연해 자본주의·시장경제 체제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낳는다는 카를 마르크스 식의 분석을 비판했다. 조던 피터슨은 “마르크스가 본 것은 자본이 갈수록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쌓여가는 양상이었고, 그것을 자본주의의 구조적 결함이라고 해석했는데 이것은 틀렸다”며 “자본주의의 고유한 결함이 아니라 모든 생산 체계의 속성이다”라고 주장했다.

또 피터슨은 구약이 “완벽한 국가는 과연 무엇인가(The Aim is what (is) the perfect state)”라는 화두를 서구 문명에 던졌다고 말했다. 이어서 구약이 던진 완벽한 국가에 대한 물음은 유토피아적 세계관을 꿈꾸는 서구 지식인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고 피터슨은 주장했다. 여기에, 마르크스는 구약의 담론을 과감하게 차용했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도 실은 실낙원(Lost Eden)에서 쫓겨난 인류는 소외와 방황을 거듭해 계급투쟁을 거쳐 궁극적 유토피아인 공산체제에 도달한다는 구약과 유사한 담론 패턴을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 이와 관해 피터슨은 “마르크스주의가 구약 세계관의 산물인 ‘완벽한 국가(Perfect State)’에 대한 최종 해법으로서 ‘공산국가체제’를 제시하며, 마치 이를 인류 구원(Salvation)의 대안인 것처럼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3.4.1. 슬라보예 지젝과의 토론[편집]

[17]

2019년 4월 19일, 슬라보예 지젝과 만나서 토론했다. 토론 제목은 <<행복: 자본주의 vs 마르크스주의>>.[18]

피터슨은 모두 발언에서 "토론 상대방인 지젝의 저작을 최대한 많이 읽어서 토론에 대비하려 했지만, 토론 일정이 다소 급하게 잡힌 반면 지젝의 저작은 너무 방대하고 시각이 독특해 차마 시간 내에 다 읽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대신 공산당 선언이 마르크스주의의 시발점[19]이라고 생각해 18살에 읽었던 공산당 선언만 토론 직전에 한번 더 읽고 나왔다고 말했다. '그럼 공산당 선언 외 다른 마르크스주의 서적은 한번도 안 읽어봤다는 거냐'라는 비판이 나왔지만, 적어도 본 토론에서 피터슨이 '공산당 선언 외에 마르크스주의 관련 서적은 읽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일단 피터슨은 토론 내내 '공산당 선언' 이외 어떠한 마르크스의 저서도 인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산당 선언' 을 제외한 마르크스의 다른 주 저서중 남은 하나인 Das Kapitals 은 경제학 적인 목적이 강하고 이미 경제학 사회에서는 제대로된 취급을 받지 못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마르크스 본인의 저서들은 '공산당 선언' 외에 인용할 만한 책이 없는것도 사실이다. 만일 공산당 선언 외에 관련 서적을 읽지 않았다면 일전에 지젝이 지적한 것처럼, 실질적으로 마르크시스트들의 구체적인 주장이나 내용에 대해서는 일절 아는 바가 없이 인상비평에만 의존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온라인에 돌아다니는 피터슨의 강의들 속의 언급들이나 그의 추천 독서 리스트 등을 들어보면 '공산당 선언' 외에 공산주의 관련 서적을 읽지 않았다는 지적은 말이 않되는 비판이다. 그리고 공산주의 라는 큰 이데올로기의 맥을 짚어보면 사실상 '공산당 선언' 이 말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영원한 역사적 갈등, 그리고 결론적 모든 사회적 개급구도의 종결, 그리고 이 이대올로기로부터 발생한 소련, 그리고 중국의 근대 역사를 숙지하면 공산주의의 주요 역사는 충분희 알고 토론에 임하는것도 사실이다. 현시대 공산주의는 많은 인문학 학자등을 통해 상당한 변화와 분열을 격었지만 실질적으로 인용된 대표적인 예는 모두다 너무 잘 알고있는 근대역사이니 그 많은 공산주의 이대올로기의 분열이론들을 이 토론에서 언급하기는 실용적이지 않다. 물론 피터슨이 지젝의 저작을 최대한 많이 읽지 않은 것은 너무나도 안된 일이다. 피터슨은 자신의 많은 강의속 본인의 프로이트에 관한 심취함을 표현한 바, 그리고 헤겔에 관하여 상당히 자주 강의한봐 (지젝은 프로이트-헤겔 공산주의 학파이다) 지젝이 사실은 본인을 공산주의자 보다 헤겔주의자 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라고 토론중 밝히자 이 표현을 매우 반기는 반응이었고 솔직히 많은 사람들은 이때 이 둘이 그다지 피터지게 토론하며 싸우지 않을 것을 알았다. #

평가는 물론 반반으로 갈라진다. 피터슨의 비판론자들은 여러모로 피터슨의 약점과 그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부족한 지식을 드러냈다고 평할 수 있는 토론이었다 라고 말하고 특히 피터슨 우호진영에서도 토론에서의 우위 여부는 물론이거니와, 여러 면에서 피터슨이 부족하였다는 것은 인정한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피터슨 팬덤의 본진 격인 조던 피터슨 팬 서브레딧을 확인하면 r/jordanpeterson|# 일부 피터슨의 팬들은 이번 토론을 보고 사회주의로 전향하기로 했다며 농담조의 글을 올리거나 붉은 깃발을 흔드는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지젝은 토론 주제에 맞게 행복의 의미,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구체적으로 발언한 반면에, 피터슨은 공산당 선언과 '탈근대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을 피상적으로 비판을 하는데 그쳤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지젝은 피터슨의 입장을 충분히 인지하고 온 반면에, 피터슨은 지젝의 입장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채 토론에 임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20]. 그리고 물론 피터슨의 열혈한 신봉자들은 피터슨의 압도적인 승리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실질적인 결과는 무승부, 비승부 라고 보는것이 더 정확하다.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바라던것 처럼 격하고 디태일한 논쟁은 발생하지 않았고, 특히 매우 많은 부분에서 둘이 동의하는점이 자주 보였으며 사실상 토론은 매우 친선적인 분위기로 시작, 진행, 그리고 끝났다.

피터슨의 비판론자들은 공산당 선언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지젝이 순순히 인정하자 피터슨이 "당신은 참 특이한 마르크스주의자다, 그럼 그냥 지젝주의 하지 왜 마르크스주의를 하냐" 라고 한것에 관하여, 바로 이 지점에서 피터슨이 마르크스로부터 비롯한 좌파 철학사에 무지하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주장이 피터슨의 머리속에 존재하는, "완전한 결과의 평등을 외치며, 공산주의 혁명을 이룩하면 유토피아가 찾아올 것" 이라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최소한 21세기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는 결과의 평등이나 유토피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21]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한 계급의 소멸'을 물론 꾸준히 주장했고 이때문에 불완전하고 모호한 이론이며 원칙을 명백하게 침해하지 않고 여러 모순적인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비판받았다.[22] 토론 중에서도 슬라보예 지젝은 "마르크스의 저서 어디에도 '결과의 평등'을 언급한 부분은 없다."고 지적했다.[23]. 이에 관하여 친 마르크스주의자들, 혹은 피터슨의 비평론자들은 즉,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이념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을 붙여서 공격했다는게 논의 과정중 알려진 것이다 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피터슨의 비평론자들은 또한 피터슨은 심리학자이고 심리학의 방법에 따라 사회현상에 대해 분석해 스스로 '탈근대 신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오개념이었다 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피터슨의 추종자들은 피터슨이 친 마르크스주의자라 지적한 많은 위인들은 공개적으로 자신이 마르크스주의, 또는 마르크스주의로부터 파생한 학파/신념주의자 것을 인정한다고 하고, 이 묘한 모순을 이해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유서있고, 학계에서 인정받는 마르크스주의에 뿌리를 둔 많은 학파들은 현시대 포퓰리즘을 통해 판을 치는 마르크스주의라고 주장하는 학파들을 '무늬만 마르크스주의라' 비판, 또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지젝은 과거에 정체성 정치를 마르크스주의와 연관시키려는 피터슨의 주장을 정신나간 음모론(Crazy conspiracy theory)이라고 불렀는데, 이번 토론에서도 "피터슨 당신이 그토록 성토하는, '탈근대 신마르크스주의자(Post-modern neo-marxist)'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대체 그들의 주장 어디가 마르크스주의에 해당하는가? 이 소위 '탈근대 신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는 학자가 있다면 단 한 사람이라도 이름을 대보라."라며 질문했고 피터슨은 구체적인 학자를 호명하는 대신 "조사에 따르면 사회 과학과 인문학 분야에 보수 측의 의견이 극도로 부족하고, 미국 내 사회 과학자의 25%가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로 여긴다고 한다"고 발언한 뒤,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탈근대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부르주아지 vs 프롤레타리아'의 구도, 즉 '억압자 vs 피억압자' 구도를 그대로 차용해 '한 정체성이 다른 정체성에 대한 억압한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논리에 활용한다"고 대답했다.[24] 여기서 슬라보예 지젝은 "전적으로 동의한다(Totally agree with you)."라고 대답했는데, 이는 슬라보예 지젝이 피터슨의 논리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피터슨이 탈근대주의를 비판하는 논리가 바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탈근대주의를 비판하던 논리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라고 비판론자들은 말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서, "조던 피터슨, 당신의 논리가 바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리이다."라고 말한 것이다라는 견해도 있다. 이는 동의한다는 발언 직후 "정확히 그게(탈근대주의자들의 행태가) 바로 비마르크스주의자의 방식이다.(That's precisely non-Marxist gesture)"라고 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토론의 흐름은 사실상 돌아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지젝이 현시대 포퓰리슴을 통해 특히 미국에서 판을치는 사회적 마르크스주의를 좋게보지 않는다은 것은 이 토론에서 명확히 표현되었다. 그에 반응해 피터슨은 서로 동의함에 반갑고 어느정도 놀란 반응이였다. 이것을 두고 지젝이 피터슨과의 토론에서 승리하였다 하는 의견은 무리한 주장이다. 물론 토론 전에는 이것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몰랐지만 결국 돌아보고, 두 사람의 컨텐츠들을 살펴보면 사실 서로 많은 면에서 동의하되 현시대 공산주의 학파의 정체성, 혹은 무엇이 '공산주의의 정통적 파생 이대올로기가 맟고 어느것이 아닌가' 에 관하여 번복하는것이 후에 피터슨은 이 토론을 두고, 솔직히 굳이 무언가를 토론한것같지는 않았다 라고 밝혔다. https://www.youtube.com/watch?v=EyA3tLjKWPM.

피터슨의 비판론자들은 본 토론에서 피터슨이 밝힌 '탈근대 신마르크스주의'의 명명 이유.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이율배반적인 단어를 주장하는지에 대한 피터슨의 의견을 다음에서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급진 마르크스주의 탈근대 타입들, 특히 1960년대 프랑스의 데리다나 푸코 등은 소련, 스탈린주의마오주의 등의 몰락을 보며 자신들이 도덕성 싸움(moral battle)에서 지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 같다. 설 기반을 잃은 그들은 "인류의 역사는 경제적 약자와 억압자 간의 영원한 투쟁"이라는 마르크스의 관념을 수정하는 대신, 개념을 재구성해서 "경제가 아니라 정체성 기반의 투쟁이다. 그래도 '억압자 vs 피억압자'의 구조는 같다."라고 한 거다. 내가 보기에 이건 마르크스주의의 근간이 되는 담론과 목표를 은근슬쩍 가져와 놓고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꼴이다.
이에 대해 나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탈근대주의자들은 탈근대주의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거대 담론(meta-narrative)에 대한 회의론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건 나도 아주 잘 알고 있고, 마르크스주의가 거대 담론 중 하나라는 것도 알고 있다. 따라서 탈근대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자일 수는 없다는 거다. 하지만 여전히 내게는 그 둘이 융합된 모습이 보인다.
첫째로 탈근대주의자들은 제일 중요한 가치는 그룹의 정체성이고, 세상을 '특정 그룹의 정체성으로 정의된 개인들 간의 전쟁터' 및 '억압자 vs 피억압자'의 구조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로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계층의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했던 것과 매우 유사하게, 저들은 피억압자는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굳이 혁명적인 수단을 통해서일지는 모르겠지만, 구조를 변화시켜 억압이 사라진 특정한 평등사회가 도래한다는 주장이다.
당신은 마르크스가 결과의 평등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난 동의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모든 계급이 사라진 진정한 공산주의가 도래한 궁극의 유토피아'를 말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제일 중요한 형태의 계급이 사라진다는 암시는 있다. 마르크스가 다른 형태의 계급에 대해서도 논했을 수 있지만, 그렇다면 왜 경제적 계급이 사라진 결과로 나타나는 세상이 유토피아일 거라고 생각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면 여전히 다른 형태의 계급이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또 다시 그에 대해 지금처럼 논쟁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경제와 관련이 매우 적은 '매력'의 계급을 들 수도 있는데, 이는 다른 능력들이 그렇듯이 논쟁이 없을 수가 없는 부분이다.
이게 내가 정치적 올바름 탈근대주의자들을 보고 마르크스주의를 연상하는 이유다. 저들은 세상을 '억압자 vs 피억압자'의 구조로 바라본다.

조던 피터슨이 자크 데리다와 미셸 푸코를 보고 "급진 마르크스주의 탈근대주의자"라고 하자 지젝은 "당신이 미셸 푸코와 같은 학자를 인용하는 것은 흥미롭다. 그들이 비판했던 것은 마르크스주의였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피터슨의 비판론자는 실제로 푸코는 마르크스주의의 논리를 해체하고자 시도한 탈근대주의자이기 때문에 이것으 피터슨의 명백한 실책이라고 주의한다. 반대로 피터슨 추종자들은 사실상 푸코가 프랑스의 공산당 맴버였던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그가 전통적 마르크스 주의를 비판한것 또한 사실이나 피터슨의 푸코에 관한 비판은 공산주의에 관한, 결국은 푸코가 마르크스의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전통적 마르크스와는 다르나 결국은 나름의 방식으로 추구하였기 때문이라는 의미의 비판이라면서, 이 비판은 사실상 피터슨의 주장의 요점은 무시하고 누가 공산주의인의 특정한, 또는 전통 마르크스 주의자들로부터 인정받는 학파인가 아니면 사실상 어느 사회주의의 학파인가, 이 정확한 나뉨을 피터슨이 옳게 사용하지 않았다라는, 혹은 너무 자유롭게 사용하였다는 비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당신이 정의한 탈근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혁명가[25]라고 하자. 이들은 소외되는 것은 좋은 거라며, 자신들이 소외된 자들이라는 걸 즐기는 듯 보인다. 개인적으로 그걸 보면서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향수가 일어날 정도였다. 적어도 그들은 '우린 소외된 자로 남지 않겠다. 우린 중앙에서 권력을 쥐고 싶다'라고 인정하는 솔직함이라도 있었다. 이 탈근대 혁명가들의 행태는 역겹다."는 말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여기서 지젝은 마르크스주의와 탈근대주의를 분리하면서, 마르크스주의가 탈근대주와 반목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피터슨의 비판론자들은 피터슨이 사상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없이 인상비평에 의존한다는 비판이 나온 것도 한 세기에 걸쳐 진행된, 마르크스주의와 탈근대주의 사이의 오랜 갈등과 반목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들을 무리하게 엮으려고 시도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에 피터슨 추종자들은 사실상 현시대 포퓰리즘을 통하여 번지고 있는 많은 사상들은 실질적으로 사상적 뿌리를 무작위로 도용하기도 하며 적확한 마르크스시슴의 학파로 구별하기가 어렵고, 그 때문에 피터슨 및 많은 학자들이 그들을 크게 묶어서 포스트모던-마르크스시스트, 바로 탈근대주의 마르크시스트 라고 통칭한다면서 이는 실질적으로 포스트모던-마르크시스트가 마르크시즘의 가장 중요하고 원초적 사상인 개급사회의 개급간 갈등에 관한 이념을 계승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피터슨의 비평가들이 주장하길 슬라보예 지젝은 토론 도중에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라고한다. 여기서 지젝은 히틀러가 혼란스러운 독일 사회에 '이야기'를 제공하여 지지를 얻었다는 논리를 펼친다. 지젝은 과거에 피터슨의 '탈근대 신마르크스주의자' 호명이 정신나간 음모론이라고 주장했는데, 피터슨의 논리가 사상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흐름의 이해 없이, '이야기'를 제공하여 지지를 얻는 '음모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는 과거에 그가 피터슨을 비판하며 쓴 칼럼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전개된다고 볼수도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왜 사람들은 조던 피터슨의 말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할까(원문)왜 사람들은 조던 피터슨의 말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할까(번역문)

지젝이 비록 'MTV 철학자', '철지난 라캉에 매료된 궤변론자' 같은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헤겔과 마르크스에 대한 지젝의 연구는 결코 평가절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륙철학계에서는 존경받는 인물이며, 지젝의 영향을 받은 알렌카 주판치치 같은 철학자는 지젝의 모교이기도 한 류블라냐 대학의 정교수다. 지젝을 예능형 학자라 까는 놈 촘스키 같은 사람들도 기본적으로 지젝이 정석적인 대륙식 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전문가란 명제 자체는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피터슨 같은 사람들이 비난하는 북미식 리버럴 진영의 정체성 정치는 오랫동안 비판해오고 반목해왔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피터슨의 비판론자들은 피터슨이 자신이 그리 핏대세워 비판하던 '탈근대 신마르크스주의자'가 실존하는지도 모르고 있었고, 심지어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인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공개된 토론이었다고 평가한다. 물론 피터슨의 추종자들은 그 반대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 토론을 듣고 그 내용뿐만 아니라 흐름, 또한 분위기를 포함해 고려하면 피터슨과 지젝은 큰 충돌없이, 어느 면으로는 기대 이하로 이밴트성 없이, 대부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토론을 시작부터 끝가지 이어갔다. 피터슨의 지젝에 관한 토론 후 반응은 상당히 긍정적이고 지젝의 피터슨의 관한 반응도 상당히 긍정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gzVKihSrqN0https://www.youtube.com/watch?v=fbhZlUEnKxc.

3.5. 지능과 기술적 실업에 대한 시각[편집]

그래서 미국 정부는. 제가 이미 전에 한번 말씀드린 것 같은데, IQ가 83 미만인 사람은 미국 군대에 입대시키는 것이 불법이에요. IQ 83 미만이면 인구의 약 10%입니다. 미 육군은 IQ 테스트가 시작된 처음부터 IQ 테스트를 계속 사용해 왔습니다. 미 육군은 입대시킬 수 있는 사람은 최대한 많이 입대시키려고 하는 조직이에요. 군대라는 게 평화로운 시절에는 사람들을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위로 올라가게 할 방법으로 쓰이고, 그리고 전쟁 중에는, 뭐 당연하게도, 군대에 최대한 많은 병사가 필요한 상황인 거죠. 그러니까 필요하지 않은 이상 사람을 뽑는데 있어서 까다롭게 굴 이유가 전혀 없는 조직인 거에요. 그러니까 미 육군이 IQ가 83 미만인 사람을 입대시키는 것이 불법이라고 규정해놨다는 것은 그 기준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서라는 걸 유추할 수 있죠. 사람들이 자기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결과를 발견하고 그 결과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면 그 결과가 웬만하면 잘 사라지지 않고 분명히 존재한다는 이유로 받아들일 수 있겠죠.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면 군대에서 IQ가 83 미만인 사람이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일반사회에서 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 것 아닙니까?#

피터슨은 현대 직업 선택에 있어서 지능의 중요성을 역설하는데, 진보와 보수 둘 다 낮은 지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을 위한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며 비판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보수가 주장하듯 '노력'으로 나아질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니며, 진보가 주장하듯 동등한 기회와 환경을 제공 받는다고 해서 사회의 평균적인 구성원들의 몫을 해낼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니라는 것이다. 피터슨은 이 사람들을 위한 명백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변한다.

피터슨을 단순한 우파 혹은 자유지상주의자라고만 보기 어려운 이유가 또 한번 드러나는 부분이며 그가 기술의 빠른 발전에 대해 경계심을 나타내는 것도 이 때문. 현재도 그렇지만, AI의 빠른 발전으로 자율주행 자동차가 나오거나 기업의 업무 전반이나 서비스 업종을 AI가 수행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저 '낮은 지능'의 허들이 굉장히 높아질 것이며 이는 사회에서 일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피터슨은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기술 발전에 대한 강력한 제한을 가해야 한다'라는 급진적인 주장을 하지는 않지만, 완곡하게 '빠른 기술 발전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라고 짚고 넘어간다.

해당 이론은 보수측에서 기본소득을 주장할 때 자주 인용된다. 다만 조던 피터슨이 기본소득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밝힌 바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3.6. 무신론 비판 및 독특한 종교관[편집]

또한 종교가 문명을 유지하는데에 있어 중요하며, 무신론은 위험하다는 입장이다. 종교 없이는 도덕이나 예술 등이 탄생할 수 없다며 무신론자 예술가는 자신이 신을 믿는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라는 의견을 보여서 무신론자들로부터 비판받기도 한다. 이러한 입장으로 인해 무신론자 샘 해리스와 토론을 하기도 했다. 기독교는 서구 문명의 토대라고 말하기도 했다.

종교 그 자체는 인간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정신적 요소라 주장하지만,[26] 기독교 근본주의성서무오설, 조직화된 종교 집단들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세상의 종교들은 신화를 통해 추상적으로 삶의 가치들을 묘사했지만, 21세기에 들어서는 더는 추상화가 필요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피터슨 교수의 종교관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유튜브에서 그의 성경 강의들을 보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 피터슨 교수의 다른 강의들에 비해 길긴 하지만 성경을 벗어나 실존주의, 현대 심리학의 기초 등 유익한 개념들을 성경과 연계하여 무게 있게 분석하니 시간이 있다면 보길 추천한다.

정리하자면 피터슨과 다른 무신론자들 사이의 논쟁은 단순히 성경의 내용이 무조건 옳으냐, 신이 존재하느냐 같은 교리나 신학적 도그마에 관한 것이 아닌, 서구사회에서 종교, 특히 기독교가 가지는 역할과 지위에 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이 피터슨에게 신을 믿느냐고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하여 피터슨은 그 질문이 자신을 어떠한 진영 논리에 가두려고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나는 신이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마지막으로 피터슨 개인의 기독교적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티머시 롯(Timothy Lott)과의 대화에서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규정했다. 예수의 신체적 부활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적인 입장이라고 밝히면서도 전적으로 부정하진 않았다. 피터슨은 인간 의식의 한계에 대해 자신은 알지 못한다며 부활은 자신이 아직 이해하지 못한 영역이라고 대답했다. 종교적으로 불가지론자로 보였다.
그러나 최근의 인터뷰(2021.3.21 기준)에서는 유신론자 같은 입장을 보였는데 그리스도를 '신화적으로 믿느냐' 혹은 '실존적으로 믿고 있느냐'라는 조나단 페거(Jonathan Pageau)의 질문에 아마도(probably) 믿을수도 있는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이어 피터슨은 "나도 내가 이런 믿음을 가질수도 있다는 게 신기하다. 그러나 여전히 이해되지는 않는다."(I'm amazed at my own belief and I don't understand it.)고 덧붙였다."

3.7. 지구 온난화에 대한 입장[편집]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연중 지구 온난화에 대한 질문에 답변

20:29쯤 영상을 보면 한 학생이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해 좌파우파가 힘을 합쳐 국제적인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했고 피터슨의 답변은 '아니다' 이다. 피터슨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과학과 정치를 분리시키는 것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지구 온난화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좌우가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27]
  • 지구온난화에 관한 가장 급진적인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인류는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모른다.
  • 지구에는 해결해야 할 더 큰 문제들이 있다. 반면 지구 온난화에는 명확한 해결책이 없다.
  • 기후 변화와 같은 장기적인 문제의 경우 초기 데이터의 작은 오차가 시간이 흐를수록 증폭된다. 50년 후에 관한 데이터는 오차 범위가 너무 넓어져 의미있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특정 정책을 취했을 때 그것이 장기적으로 어떤 효과를 가질지 예측할 수 없다면 해결책을 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 탄소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재생에너지 도입시도는 실패했다. 예를 들어 독일은 풍력과 태양광 발전을 시도했으나 결과적으로 전기료가 폭증했으며, 탄소 배출량은 오히려 높아졌다. [28]
  • 탄소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석탄 발전소를 뒤엎자는 발상은 나쁜 생각이다. 그 결과는 전기료 폭등이다.
  • 차라리 기후변화 예산을 빈곤 국가 어린이들의 영양개선에 투자하는 게 더 현명하다.
  • 지구온난화 문제가 아무리 심각해도 사람들은 결국 난방, 전기, 자동차, 기차, 아이폰 사용량을 줄이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피터슨은 기후변화 문제에 우리가 어느 정도의 우선도를 부여해야 하는가, 그 대응책이 효과적일 수 있는가에 대해 주류 과학계와 판이한 가정을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기후 변화 회의론자'라 평가 받고 이에 대해 자주 비판받는다. 트위터에서 지구 온난화 부정론자의 글을 종종 리트윗하기도 하는데, 평소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글 또한 자주 리트윗 해왔기도 하고, 트위터 프로필에서도 "리트윗을 추천으로 받아들이지 말아달라. 나는 가끔 내가 동의하지 않는 글도 리트윗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평소 '환경주의자들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데에만 몰입하고, 자연이 인간을 파괴하는 사례에는 눈을 감는 경향이 있다.'고 발언하는 등 급진적 환경주의자들을 비판해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동의하지 않는 트윗을 리트윗할 때는 그에 대한 비판을 적는 것이 좋은데, 피터슨은 지구온난화 회의론 리트윗에 비판을 적지 않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추가로 '기후 변화 부정론자'라는 단어에 대해 대표적인 기후 변화 부정론자인 Bjorn Lomborg를 칭찬했던 본인의 트윗을 리트윗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He's casually called a "climate change denier," for example, which is an appallingly treacherous term of criticism, used to denigrate someone personally by associating them with Holocaust deniers. The ethics of anyone who employs it should be instantly questioned.
그는[29] 흔히 예를 들어, "기후 변화 부정론자"라고 불리는데, 이는 무시무시하게 위험한 비판 용어로서, 이 용어는 누군가를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연관시켜 개인적으로 폄하하는데 쓰였다. 그 용어[30]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윤리관은 즉시 검증받아야 한다.

즉 피터슨 교수는 '기후 변화 부정론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며, 기후 변화 부정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기후 변화 부정론자'를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동일선상에 놓고 있다고 본다.

실상은 지구온난화에 대한 주류 학계의 의견은 이미 모아졌고 결론은 지구가 인간에 의해 온난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이 어디까지 올라가고 속도가 어느 정도 될 것이냐에 대해서는 예측이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자료들의 공통점은 결코 그 위험이 적지 않고 인류에게 중대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과학진흥협회(AAAS)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한 지구과학자의 77%가 지구온난화가 매우 큰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라는데 동의했다. 나머지 17%도 다소 위협이 된다고 응답했고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응답한 과학자는 2%에 불과했다. 또한 유럽 환경청, NASAIPCC와 같은 단체에서도 동일하게 우리 세대의 중대한 위협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아무리 복잡하고 예측이 어려운 지구과학이라지만 현재까지의 연구들의 결과는 어떻게 예측을 해도 위험할 거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의 공신력 높은 기관들과 최고의 석학들이 경고하는 내용을 단순히 겁을 주려고 떠드는 이야기라 치부하고 대응하는 노력을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듯 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재해가 아무리 막기 힘들다고해도 국가적 차원에서 준비하고 대응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대 시대에 홍수를 막기 힘들다고 치수도 안하고 제방도 안만드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현재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예방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홍수를 막기 위한 제방을 만드는 것과 동일한 행동들인 것이다. 최고의 대중 과학자로 꼽히는 칼 세이건이 얘기했듯 지구는 하나 밖에 없는 우리의 고향이다. 여기를 떠나서 산다는 것은 현재의 기술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지구의 환경의 변화를 막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모색해야만 하는게 현실이다.

또한 피터슨은 지구 온난화를 말하는 사람들의 입장이 '반자본주의자' 로 칭하는 부류가 내세운 데이터를 신뢰할수 없는 정치적인 결과라는 음모론을 내세운다.##
Most of the global warming posturing is a masquerade for anti-capitalists to have a go at the Western patriarchy. That’s partly why the climate change thing for me is a contentious issue, because you can’t trust the players. You can’t trust the data because there is too much ideology involved."
대부분의 지구 온난화 입장은 반자본주의자들이 서구 부계사회로 향해보려는 가장 무도행렬입니다. 때문에 참여자들을 믿을 수 없으며, 기후 변화 문제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입된 이데올로기가 너무 많기 때문에 데이터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4. 젊은 남성들로부터의 인기[31][편집]

미국, 캐나다, 서유럽 국가, 한국의 젊은 남성들로부터 열렬한 인기를 얻고 있다. 사실 조던 피터슨은 그의 정치적 견해보다는, 심리학 강의, 자기계발 강의를 통해 인기를 얻었다. 피터슨의 유튜브 영상 구독자의 대부분이 젊은 남성들이며, 2018년 1월에 출간한 저서 12가지 인생의 법칙: 혼돈의 해독제[32]는 순식간에 북미와 서유럽에서 베스트 셀러 목록에 들었다. 이 책의 구매자 대부분이 2030 남성들이라고 한다. 피터슨 본인은 딱히 젊은 남성을 타겟으로 설정한 적이 없지만, 자신의 저서와 강의가 유독 젊은 남성 층에서 인기있는 것을 볼 때 현대의 젊은 남성들은 현대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메시지에 목말라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NBC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당신이 인기를 끄는 이유가 자녀에게 "허리를 곧게 펴고 서라", "거짓말을 하지마라", "방을 청소해라"라고 명령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상에 있는 것 아니냐? 하고 비아냥거리는 톤으로 물었는데[33] 그것을 그대로 받아쳐 자신도 인식하고 있다며 오히려 "아버지가 없는 사람들이 나를 굉장히 호의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알고 있다"고 한다. 임상심리학자로서 자신의 강의에 열광하는 남성과 여성들의 상당수가 이혼이나 사망 등으로 아버지의 존재가 없었던 사람들이라면서 극단적으로 혼동스러워진 현대 사회가 한때는 일반적이었던 이런 교훈마저 사람들에게 주지 못하는 게 오히려 문제의 징후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더불어 본인도 인정하듯, 여러 강연이나 토론에서 심각한 스트레스 상황에 처했을 때 피터슨이 보여주는 엄청난 냉정함과 침착성이 대중에게 어필한다는 점이 있다. Bill-16 논쟁과 관련해 좌파 대학생들이 피터슨의 강연에 난입해 경적을 울리고 강연을 방해했을 때라든지#So you’re saying... 캐시 뉴먼같은 여러 적대적인 호스트들이 지속적으로 피터슨의 과거 주장을 왜곡하려는 시도를 했을 때, 흥분하거나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더욱 침착하고 냉정하게 답변하며# 상대를 당황하게 하는 모습들이 유튜브에 올라가고 많은 사람이 감명을 받아 인기가 가속화된다는 것이다.

5. 논란 및 비판[편집]

비전공 영역의 연구를 강의나 토론에서 종종 사용하며 이에 잘못된 인용,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 무신론자 맷 딜러헌티(Matt Dillahunty)와 신의 존재 증명에 대한 토론 중 초자연적 현상을 증명하는 예시로 환각 버섯을 말했다.#
딜러헌티: We have no way of confirming that this something mystical or supernatural actually can happen. - 우리는 신비하거나 초자연적인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피터슨: Stops people from smoking. - 담배를 끊는 것이 있죠.
딜러헌티: Well you can stop smoking without any sort of supernatural intervention. - 근데 금연은 아무런 초자연적인 개입 없이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피터슨No not really. -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딜러헌티: You can't stop smoking without supernatural? - 초자연적 현상 없이 담배를 끊지 못한다는 말인가요?
피터슨: They aren't really any reliable chemical means for inducing smoking cessation. (중략) but if you give people magic mushrooms psilocybin and they have a mystical experience they have about an 85 percent chance of smoking cessation of one treatment - 지금 금연을 유도하는 신빙성 있는 화학 요법이 실제로 있진 않습니다. (중략) 하지만 사람들에게 환각 버섯 실로시빈을 주고 그들이 신비한 체험을 한다면 단 한 번의 처방으로 85%의 확률로 금연을 유도할수 있습니다.
피터슨: Yeah but that's kind of like evidence - 예... 뭐 그게 증거의 일종일 수도 있겠죠.
링크된 영상에서 잘 설명하고 있지만, 피터슨이 예시로든 실험은 15명의 지원자를 8주 동안 실험한 결과로서 연구자 자신도 샘플이 너무 작다고 강조한 연구이다. 실로시빈 외에도 여러 약물을 사용했으며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의 처방이었다. 피터슨의 주장은 환각 버섯이 금연 효과를 만드는 게 아니라 환각 버섯으로 환각 작용을 경험하면 그것이 대상에게 초자연적 경험으로 인식되어 정신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 수업 중 모든 문명에 걸쳐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묘사한 그림이 존재한다#는, 초고대문명설을 연상시키는 주장을 한적이 있는데, 이로 인해 비판받기도 했다.#
  • 여러 강연, 강좌들을 통해 개인의 일생에 있어서 배우자와 자녀를 갖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 배우자, 자녀의 존재가 책임이라는 형태로 삶에 의미를 부여해준다는 것이다. 이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MGTOW 진영의 남자들을 '한심한 작자들(Pathetic Weasles)'#이라고 불렀다가 크게 반발을 사기도 했다. 후에 이 발언이 실수였음을 인정하고, 철회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표현이 부적절했음을 인정한 것이지, MGTOW에는 여전히 비판적이다. 애초에 사과 동영상 자체에서도 이런 태도는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하고 있다. 다만 그들 역시도 현실에 기반한 어느정도의 논지는 있으며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그들의 선택을 비난한 것에 대해선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이다.
  • 놈 촘스키는 이메일을 통한 대화에서 표현의 자유와 관련하여 피터슨과 샘 해리스에 대해 큰 관심을 줄 필요가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입을 막을 정당성도 없다고 얘기했다.#
  • 슬라보예 지젝은 "왜 사람들은 조던 피터슨이 아주 설득력있다고 느끼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좌파가 자기 집을 정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여기서 자기 집 정리가 뜬금포로 왜 나오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조던 피터슨이 평소에 방 청소의 중요성을 역설해왔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적 올바름정체성 정치에 집착하는 진보가 정작 자기네 내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거나 설명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수의 보편적인 대중을 설득할 만한 매력적인 주장을 펼치지도 못한다는 맥락에서 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피터슨은 그에 대한 대답이 개인의 선택과 책임에 있음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기존의 진보 진영의 주장에서 자기 인생에 대한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해결할 대안을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명쾌한 대안, 예를 들자면 방 청소 같은 단순하고 언제든 실천가능한 행동을 해결책으로 제시함으로서 엄청난 지지를 얻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피터슨에게는 바닷가재유인원 등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여성과 결혼에 대해 말할 능력이 없으며[34], 또한 정체성 정치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주장은 정신나간 음모론(crazy conspiracy theory)라고 말했다.
  • 포비아 페미니즘의 저자 박가분[35]은 리얼신문 기고에서, 진지하게 상대할 필요가 없는 인물이라고 말하며, 목적을 잃은 진보의 과도한 PC 규범이 피터슨 열풍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 이슬람 혐오 티셔츠를 입은 팬과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로 뉴질랜드 이슬람 사원 테러사건 이후 뉴질랜드 대형 서점인 휫콜스(Whitcoulls)에서 그의 저서가 모두 퇴출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벤 샤피로가 얘기한 것처럼 수많은 팬들과 사진을 찍느라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찍을 때마다 상대방 티셔츠에 뭐가 적혔는지 일일이 보고 있을리도 없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휫콜스가 너무 호들갑을 부리는 바람에 노이즈 마케팅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 2019년 텍사스의 오스틴 시에 있는 액턴 경영대학(Acton School of Business)의 MBA과정에 Jordan Peterson Fellowship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10개월 과정인데, 그 질이 매우 떨어진다는 평가는 물론이고, 심지어 사기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일단 10개월 중 5개월이 온라인 과정인데, eMBA 과정을 운영하는 세계적인 대학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해가 안 되는 점은 아니다. 하지만, MBA 과정의 질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는 과정 이수 후 연봉 상승폭인데, 이 과정을 졸업한 학생들은 보통 연봉이 하락하거나, MBA 입학 전과 같은 연봉을 받는 직장을 찾는데에도 몇 개월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10개월 간 학비가 6만 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다니는 것이 손해라고 할 수도 있다.[36] 심지어 피터슨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에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말이 나오고 있고,# 피터슨에게 우호적이면서 전통적인 MBA 과정에 부정적인 사람들도 피터슨의 프로그램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지원자에게 재정지원과 관련하여 매우 수상한 답변을 내놓는다는 것이 알려졌다.#
  • 강연이나 강의중에 카를 융의 이론들을 인용하거나 본인의 주장에 대한 근거처럼 사용할 때가 많은데,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미 반박되고 폐기된 부분이 많은 분야다. 아무래도 피터슨은 전문가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할 위치이고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융을 인용할 때는 이것이 이제는 과학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 의견이라는 점을 확실히 밝히며 진행할 필요가 있음을 비판하는 학계의 의견도 있다.#
  • 그의 종교관이 신비주의적 요소와 연금술 등과 주류 기독교가 짬뽕된 것이라 보는 의견도 있다.#

5.1. 정치 성향에 대한 논란[편집]

이 문서는
 토론을 통해 조던 피터슨의 극우 여부에 대해 상반되는 양측의 입장을 두 항목(극우파라고 보는 견해 / 극우파가 아니라고 보는 견해)으로만 나누어 기술하며 피터슨의 문화마르크스주의 음모론자인가에 대한 여부도 각각 두 항목에 MPOV로 기술하기(으)로 합의되었습니다. 합의된 부분을 토론 없이 수정할 시 제재될 수 있습니다.
피터슨 교수 개인의 극우 여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그의 주장이 전통적인 기독교 문화를 기반으로 사회를 분석하는 경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37] 물론 피터슨 교수 본인은 공공연하게 대안 우파를 비롯한 정치극단주의에 대해 강한 반감을 드러내고 반대를 표명하기는 했지만 그의 사상이나 주장 등은 구미권의 극우 세력들도 종종 인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심지어는 Bill C-16에 찬성했다가 피터슨과 교류를 하며 반대 입장으로 선회한 이후 극우 정치인으로 흑화한 케이스마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이 피터슨 교수가 악의적으로 영미 극우파의 사상적 정당성을 마련해주는 것인가, 혹은 극우파들이 피터슨 교수의 주장을 악용하고 곡해하는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피터슨의 극우 논란의 주요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5.1.1. 극우파라고 보는 견해[편집]

CC-white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쥐스탱 트뤼도/비판 및 논란 문서의 r41 판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미국의 대안 우파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래셔널위키(Rationalwiki)[38]에 따르면, 그는 기독교 철학을 변호하고, 지구온난화 회의론에 관련된 기사들을 리트윗했다고 한다.[39] 그리고 바닷가재를 예시로 인간 사회의 불평등이 사회적 구성이 아니라 생물적 본성이라고 주장했다.[40] 또한 대안 우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인물이며 그의 이론이 주로 온건 대안 우파[41]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비판자들은 주장한다.

또한 그의 Bill C-16에 대한 강경한 반대 입장도 그가 명백한 대안우파적 트랜스포비아임을 입증하는 근거라는 리버럴~진보진영의 비판도 거세다. 실제로 피터슨이 이 법률이 대중들의 언어를 제약하고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한다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캐나다 법률전문가들은 선호되는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는 절대 처벌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42] 또한 성 표현과 성 정체성을 캐나다 인권법의 보호 근거로 추가하고, 증오 선전대량학살 선동, 형량 악화 요인을 다루는 형법 조항에도 추가했다는 사실을 곧바로 성 중립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면 처벌한다고 해석하는 것도 심각한 논리적 비약인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성 표현에는 남성과 여성도 있는데 당연히 남성을 여성이라고 부르고 여성을 남성이라고 불렀다는 이유, 혹은 남성을 남성이라 안 불렀다고 처벌되지 않는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그것을 차별행위라고 보기도 힘들다. Bill C-16 법은 딱 그정도 수준의 법률이다. 캐나다 인권법에 추가했다는 부분도 트랜스젠더들이 성중립적 표현을 사용했다고 서비스를 받지 못하거나 취직에 불이익이 있다거나, 논바이너리 등을 집단적으로 괴롭히거나 학살하자는 수준의 대놓고 증오선동이라던가 이런 것을 막기 위한 법적 조치이지 그 어디에도 ze/sie/zie/ey/per 같은 트랜스젠더들이 선호하는 성중립적 대명사를 트랜스젠더에게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한다는 내용은 명시도 안 되어있고 전문가들도 단순히 그런 사유로는 처벌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43]

피터슨이 나치즘이나 백인우월주의를 비판하기 때문에 대안 우파가 아니라는 말이 있지만, 대안 우파는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백인우월주의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일로 이아노풀로스같은 온건파들은 오히려 백인우월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게다가 다른 보수주의자들도 나치즘을 공산진영과 일치시켜 반대하고 있고 심지어 나치즘까지 좌파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에서는 피터슨이 그의 이성적인 모습과 심리학 강연, 서구의 주류 페미니즘[44][45]을 비판하는 모습 위주로 알려져서 그에 반발하는 진보진영이 편협한 SJW로만 보이게 된 듯하다. 기독교를 변호하면서 이슬람을 비판하는 것과 지구온난화를 의심하고 불평등을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를 중립적인 학자가 아니라 '서양 정체성 정치'와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반한 배외적 보수주의가 아니냐는 비판이다.[46]

또한 피터슨은 여러 이슈들에 있어서 (기독교적 가치관과 세계관에 기반해) 사회보수주의 내지 전통주의적 견해를 취한다. 그는 서양 세계를 기독교적 정체성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는 무신론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취하며 무신론적 세계관을 스탈린의 생각과 비교하기도 했다. # 여성관도 굉장히 보수적인데 그는 상당한 안티페미니스트이며, 전통적인 결혼제도를 강력하고 지지하고 있고, 역사를 통틀어서 여성이 억압받았다는 생각 자체가 끔찍한 이론이라고 주장했다.#[47] 그리고 60년대 성혁명 이후 피임약이 대중화가 되면서 여성들이 남성다운 남성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있다며 여성과 남성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반감이 피임약 때문에 존재할 수도 있다며 피임약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표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남성은 미친 여성을 통제할 수 없는데 이는 여성에 대한 신체적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발언#도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포르노와 자위행위 대해서도 극도로 부정적인 견해를 수도 없이 많이 취했다.[48]

그는 마이크 세르노비치, 개빈 맥이네스, 폴 조셉 왓슨을 포함한 소위 대안 우파 강경파, 백인민족주의자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또한 2017년 2월, 캐나다 보수당의 막심 베르니에는 피터슨과 Bill C-16에 대해 의논한 후 그의 입장이 찬성에서 반대로 바뀌었음을 밝혔으며 이후에도 둘은 여러번 스킨십이 있었다.[49]

피터슨이 주장한 '탈근대 신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은 문화적 마르크스주의 음모론과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단어만 살짝 비틀어서 말장난을 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피터슨 지지자들은 탈근대 신마르크스주의 드립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미흡한 지식에 기반한 실수일 뿐 음모론 찬동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애초에 문화적 마르크스주의 음모론 그 자체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몰이해와 소수자혐오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결국 본질적으로 다를 건 없다.

또한 피터슨은 음모론의 정황을 여러차례 북미 인문학계 잠식론 주장의 근거로 사용해 왔기에, 단순한 명칭 분류상의 실수라며 음모론 지지 여부를 거부하는 것은 궁색한 변명이 될 뿐이다####

이러한 점을 근거로 일각에서는 '캐나다 정치 맥락에서의 극우'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5.1.2. 극우파가 아니라고 보는 견해[편집]

https://www.youtube.com/watch?v=qT_YSPxxFJk&ab_channel=TheMillSeries
하지만 조던 피터슨을 극단적인 기독교 전통주의자라고 보긴 어렵다. 여러 영상에서 기독교 및 기독교 계통의 종교들을 바탕으로 정치체제를 구축했던 과거를 비판했으며 또 이슬람에 대해선 회의적이기보단 긍정적이었다. 위 영상에서 피터슨은 이슬람에 대한 관점을 묻는 질문을 받았으나 자신은 이슬람에 대해 해설할 정도로 이슬람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진 않았다며 매우 중립적인 의견을 보였다. 때문에 이슬람에 '비판'적인 건 이슬람이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슬람의 특징[50]이 매우 생소하기에 서양 사회와 잘 맞을지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이에 대해 증거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 본 영상을 보면 대안우파, 보수주의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같이 기독교를 변호하고 그 업적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는 것 역시 꺼려하는 수준을 넘어 혐오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피터슨은 기독교적인 과거 서구 세계가 세운 수많은 업적은 칭찬할 일들이 틀림없으나, 이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하는 태도를 보이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오히려 이 업적들을 세운 과거 위인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바짝 긴장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즉 대안우파, 보수주의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것이다.[51]

무엇보다도, 조던 피터슨이 극우 또는 대안우파라는 주장에는, 피터슨 교수 본인이 강도높게 반박한 바 있다. 일례로 비즈니스 인사이더의 기자 스티브 코박(Steve Kovach)이 자신의 기사에 조던 피터슨을 대안 우파라고 소개한 바 있다. 이에 피터슨 교수는 해당 기자에게 어떤 근거로 자신을 대안 우파라고 판단했는지 알려달라는 이메일을 보냈고, 스티브 코박은 결국 자신의 기사를 정정했다. 이 후 피터슨은 해당 기자의 동의 하에 주고받은 이메일을 인터넷에 공개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we-nflsPzBk&ab_channel=CBCNews%3ATheNational

일례로, 2017년 말, 윌프리드 로리어 대학(Wilfrid Laurier University)의 조교 린지 셰퍼드(Lindsay Shepherd)가 학부 1학년 수업에서 피터슨이 출연했던 성중립적 호칭(gender neutral pronouns)과 관련된 TV토론 영상을 보여주었는데, 해당영상 피터슨의 발언을 보여준 것이 교내 성관련 규정 위반이라는 이유로 고발을 당했다. 단순 고발로 끝났다면 그저 해프닝으로 끝났겠지만, 당사자는 해당 고발로 인한 미팅 내용을 녹음하여 인터넷에 공개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던 피터슨의 발언은 히틀러마일로 이아노풀로스의 발언들과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교수[52]가 등장한 것으로만 봐도 그에 대한 이미지가 얼마나 극명하게 갈리는지 알수 있다.

해당 조교 학생은 수업의 참고 영상으로써 조던 피터슨이 등장하는 영상을 사용했다는 점, 대학은 자유로운 의견의 교환이 이뤄져야한다는 점, 해당 영상에는 피터슨뿐만 아니라 다른 토론 참여자들도 있었기에 다양한 입장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을 어필하면서 고발에 맞섰고, 결국 학교의 학생회장과 교수진이 사과문을 올렸다.# 물론, 논란은 있었으며, 2017년 12월 달까지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시위대와 그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학교 내에서 시위를 했다고 한다. 후의 라디오 방송에서 피터슨과 린지 셰퍼드가 만나기도 했다.#

위 법안 C-16 관련 얘기도 일각에서는 말 한마디 실수했다고 감옥에 집어넣는 심각한 법률이 아니며, 피터슨이 호들갑 떨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캐나다 상원 청문회에서 재러드 브라운이 확실히 짚고 넘어간다. Bill C-16을 어긴다고 감옥에 직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벌금이나 징계는 피할수 없을것이고, 만약에 벌금을 내는 것을 거부한다면 감옥에 간다. 따라서 Bill C-16이 단순히 "감옥에 갈 정도로 심각한 법은 아니다"라는건 엄연히 틀린 말이다. 더군다나 피터슨은 정부가 요구하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는것 자체가 용납할 수 있는 선을 넘은 횡포라는 입장이므로 감옥에 가니 벌금으로 끝나니는 의미없는 반박이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그의 입장에 찬성하는 사람들 중에는 여성, 비백인성소수자들도 있다. 그를 지지하는 트랜스젠더의 유튜브 영상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부에서도 성 중립 인칭대명사 이슈에서 피터슨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

또한 피터슨의 주된 연구 업적 중 하나가 독일인들이 나치에 찬동하게 된 심리학적 원인에 대한 분석이다. 또한 백인우월주의자, 대안 우파들도 정체성 정치를 하고 있다며 비판해 왔다.

또한 피터슨이 '문화적 마르크스주의' 음모론자라는 것에도 반론의 여지가 있다. 피터슨은 심리학자이고 심리학의 방법에 따라 사회현상에 대해 분석해 스스로 '탈근대 신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오개념이었다. 피터슨 자신은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음모론을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오개념에서 나온 주장은 음모론자들의 논거가 되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부족한 지식을 가지고 '탈근대 신마르크스주의'라는, 탈근대주의에 마르크스주의를 씌워서 섀도복싱을 한 것이 비판받아야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미흡한 지식으로 일어난 실수가 곧 음모론 찬동자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반박이다.

이러한 이유로 피터슨 지지자들은 그에 대한 극우몰이가 전형적인 급진 좌파들의 낙인찍기 수법일 뿐 피터슨이 극우라는 근거 자체가 없다고 주장한다.

6. 여담[편집]

  • 한국 독자들을 위해 영상을 찍었었다, 자막에 한국어를 지원하니 켜고 보는 것을 추천. 이후 한국어 공식 채널이 생겼다.
  • 남성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에 관련된 그의 여러 강연들은 이미 워런 패럴, 로이 바우마이스터 등이 자신들의 여러 저서들을 통하여 언급했던 내용들을 반영하고 있다. 요컨대 강자 남성 vs. 약자 여성의 간단한 정체성 정치로 환원하여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더 많은 정보는 《소모되는 남자》와 같은 도서들을 참고할 수 있다.
  • 인터뷰에 따르면, 육류, 소금,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엄격한 육식 식이요법(Carnivore Diet)을 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딸 미카일라 피터슨이 어렸을 때부터 극심한 자가면역질환과 합병증[53]에 시달렸었는데, 대학생이 된 딸이 육식 식이요법을 하게 되면서 자가면역질환 증상이 극적으로 약화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피터슨 교수 본인도 육식 식이요법을 시작한 이후 만성적인 우울증과 무기력증이 사라졌다고 한다. 다만 피터슨 교수는 이는 자신의 사례를 말한 것에 불과하고, 결코 육식 다이어트를 권장할 의도는 없다고 밝혔다.
  • 그의 목소리가 개구리 커밋과 목소리가 비슷하다는 사람들이 많다. 이로 인해 커밋과 엮이는 경우가 많은데, 피터슨 본인도 이를 즐기는 듯 하다.
  • 빌 마는 피터슨을 굉장히 호평하는 진보적 성향의 인물 중 한 명인데, 마도 정치적 올바름이나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라 그가 피터슨을 좋아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 2014년에 한 사건과 관련한 법정에서 전문가 증인[54]으로 섰었는데 여기서 자신이 고안한 성격 평가 테크닉이 법정 수사 도구(forensic) 목적으로는 부적합하다는 판정을[55] 받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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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딸 미카일라 피터슨 역시 30만 이상의 구독자를 가진 유튜버이다.
  • 탈북자이자 인권운동가 박연미씨와의 인터뷰에서는 신좌파 사상에 의해서 오염된 미국 대학들의 현실을 통탄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하였다.

7. 국내 출판된 저서[편집]

  • 12가지 인생의 법칙 : 혼돈의 해독제 교보문고
  • 질서 너머 :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12가지 법칙 교보문고[60]

8. 관련 문서[편집]

9. 바깥 고리[편집]


r/jordanpeterson - 조던 피터슨의 철학에 동의하는 팬 서브레딧
r/enoughpetersonspam - 조던 피터슨의 철학을 비판하는 서브레딧
[한국어] 한국어 공식 채널[2] Fairview High School.[3] #[4] 트랜스젠더젠더퀴어 등의 성 정체성 표현을 법으로써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성소수자가 모욕을 느낄 수 있는 발언을 규제하는 법안. 2017년에 통과되었다.[5] 촬영자의 영상 내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학생은 피터슨을 욕먹게 하려는 의도로 자신이 찍은 영상을 인터넷에 최초로 올렸으나 오히려 정반대의 효과가 나타났다.[6] 본인이 매우 자주 언급한다.[7] 도스토옙스키를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로 꼽기도 했다. 출처 실제로 그는 강연에서 도스토옙스키에 관한 인용을 많이 한다.[8] 피터슨이 월반을 하면서 학년은 동일했다고 한다.[9] 13살에 남편 성을 따르지 않기 위해 자기보다 약한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으며, 그 후보로 피터슨을 골랐는데 그 자리에 피터슨도 있었다고 한다.[10] 현대 사회가 구조적으로 백인에게 유리하게 짜여 있으며, 백인들은 그저 백인이라는 이유로 구조적 혜택을 누리며 다른 인종을 억압한다는 개념이다. 가장 흔한 사용례는 백인(특히 백인 남성)들을 향해 "당신의 특권을 확인하라.(Check your privilege.)"라고 외치는 것이다[11] 물론 많은 인문학 논문들의 피인용수가 0에 가깝기는 하지만 학문마다 피인용수가 갖는 의미를 고려할 필요는 있다. 어지간히 유명하면 천 번씩 인용되는 게 예사인 의ㆍ약학 분야 기준에서 보면 사기가 아닌 학문을 찾기 힘들 것이다(...). 또한 인문학은 원래 논문의 수 자체가 많지 않은 편이고, 단행본의 비중이 크다. 여기서는 그보다는 인문학계에서 R&R 프로세스가 약한 풍조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Grievance Studies Affair만 봐도 얼마나 황당한 글들이 논문으로 등록되는지 알 수 있다.[12] 그러나 Grievance Studies Affair 자체가 피어리뷰 절차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준다는 견해도 있다. 워싱턴 대학의 칼 버그스트롬 교수는 "이들은 논문 발표 절차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보인다. 피어리뷰는 사기나 틀린 아이디어를 골라내기 위한 절차가 아니고, 검증은 오직 재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평했다.# 심지어 이들은 자신들을 도와주기 위한 코멘트를 편집하고 왜곡해서 웃음거리로 삼기도 하는 등,(참고로 해당 코멘트를 남긴 저널은 논문 게재를 거절하였다.) 여러가지 문제점을 노출했다.[13]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고, 성정체성, 인종, 나이 등의 문제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보장받는 공간. 논란에도 불구하고 북미의 몇몇 대학에 이미 도입되었다.[14] 피터슨 교수는 저소득층에게 무작정 퍼주기, 적극적 우대조치 등 '결과의 평등'식 복지정책에 반대한다. 대신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지역의 기반시설을 개선하고, 저소득층이 더 나은 교육과 의료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기회의 평등'식 복지정책에는 찬성한다.[15] 그러나 파레토 법칙은 사회적 경향을 설명하는 모델일 뿐, 인과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절치 않은 논리라는 반론이 있다. 파레토 법칙 항목의 오해 부분 참조.[16] 쉽게 말하면 진영논리에 가깝다.[17] 한국어 자막은 아직 없다.[18] 원문은 Happiness: Capitalism vs. Marxism[19] 피터슨은 이를 'Original cause of all the troubles', 즉 '모든 문제의 최초 원인'이라고 표현했다.[20] 위 문단에서 보듯이 피터슨 스스로 토론 준비를 제대로 안했다고 인정했다.[21]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어떤 경로로 달성하고 그 이후엔 경제를 어떻게 운영할지에 관해서 구체적인 서술을 'Das Kapitals' 에 남긴 바가 있으나 이 책은 현 시점 정신있는 경제학자라면 취급도 하지 않은지가 벌써 몆십년이 넘어간다.[22] 실제로 마르크스주의자,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면서 유토피아를 약속하고, 절대적인 결과의 평등을 추구했던 활동가들은 20세기 현대사에 종종 등장했다. 러시아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레닌과 볼셰비키는 그때 그때 상황에 맞춰서 임기응변식으로 대처했고, 이와중에 적백내전이 터지면서 일단 '혁명을 사수해야 한다'는 절대목표 아래 인권을 무시한 무자비한 철권통치를 강행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대로 스탈린주의-마오주의로 이어지면서 지금 대중이 알고 있는 현실공산주의 체제가 되었다. 그중에 최악은 킬링필드의 참극을 만든 크메르 루주. 마치 똑같은 성경을 근거로 하면서도 자신들만의 왜곡으로 주화입마해서 미쳐버린 사이비종교집단들을 생각하면 된다.[23] 이에 피터슨 추종자들은 'Das Kapitals' 에서 마르크스는 상품에 가격을 어떻게 붙이는가에 관한 고찰에, 모든 노동은 동등하고 경제적 상품의 가치은 무조건 들어간 노동의 총량, 말하자면 노동의 강도, 그리고 들어간 시간으로 측정하여야 한다라고 서술했다면서 이것이 노동의 결과적 평등을 실질적으로 주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24] 이 대답은 '구체적인 학자를 한 명도 제대로 호명하지 못하고 진영논리를 호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25] 여기서도 지젝은 탈근대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분리하면서 탈근대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나가고 있다.[26] 전통적 종교관이 많이 사그라든 21세기의 시각으로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지만, 그의 주장과 같이 인간의 정신적인 요소와 물질적인 요소를 분리하여 보는 개념 자체는 전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니체, 도스토옙스키, 융 등의 수많은 실존주의의 거물들이 주장한 20세기 철학의 뿌리깊은 필수요소이다.[27] 피터슨은 기후변화에 관한 경고가 과학적 근거가 아닌 이데올로기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주장한다. #[28] 전기료가 증가했으나 탄소 배출량은 30년간 50% 낮아졌으며 2030년까지 감축 목표보다 초과달성할 예정이다.[29] 본인의 기존 트윗에 적혀 있던 Bjorn Lomborg[30] 기후 변화 부정론자[31] 피터슨의 지지자들 중 젊은 남성이 다수라는 거지 젊은 남성 다수가 피터슨을 지지한다는 것이 아니다. 젊은 여성들보다는 보수적이지만 젊은 남성들 다수도 좌파 성향이 강하다.[32] 아마존닷컴 사이트[33] NBC는 미국 방송계에서 가장 좌파적인 방송이다.[34] 이에 대해서는 피터슨 교수가 바닷가재와 유인원을 언급하는 이유는 진화생물학 때문이며, 여성과 결혼에 관한 문제가 환경에 의해 발생한 자연적인 현상이지 악의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적인 문제가 아님을 설명하기 위해 꺼내드는 것일 뿐이라는 반론이 있다. 하지만 그 진화생물학적인 주장조차 체리피킹이라는 반박이 있다.[35] 경제학 전공(석사)이다.[36] 심지어 이 6만 달러를 당장 지불 할 능력이 없는 학생들에게는, 3회에 걸쳐 각각 1천 달러, 5천 달러, 그리고 1만 달러를 받은 후, "pay-it-forward"라는 명목상의 가불을 해주는데, 이 가불을 받은 사람들은 추후 연봉의 10% 씩을 매년 상환해야 하므로 사실상 융자나 마찬가지다.[37] 실제로 피터슨 교수는 영미권 주요 언론들이나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종종 '전통주의자'(traditionalist)로 언급된다.[38] 내과의사인 피터 립슨(Peter Lipson)이 극우 위키 사이트인 컨저버피디아(Conservapedia)의 내용을 수정하려다가 거부당하자, 이에 반발하여 2010년에 만든 위키. 위키 분야의 본좌인 위키백과가 십대 청소년들의 반달에 휘둘리고 있다며, 자신들이 과학적 진실을 퍼트려야 한다고 믿는다. 과학적 회의주의 성향을 띤다.[39] 지구온난화에 대한 그의 자세한 입장은 지구 온난화에 대한 입장 문단을 참조.[40] 피터슨의 저서 "삶의 12개 규칙: 혼돈의 해독제"에 나온 내용이다. 바닷가재의 군집을 연구해보면, 어떤 바닷가재가 군집의 상위계층으로 올라갈수록 긍정적 사고를 하게 만드는 호르몬(세로토닌) 수치가 점점 높아지고, 하위계층으로 갈수록 그 반대가 된다. 세로토닌은 인간의 두뇌에서도 발견되는데, 이를 통해 인간도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 긍정적이고 활동적이 되며, 지위가 낮아질수록 더 위축된다고 유추할 수 있다. 즉, 가재와 인간의 신경망 속에 있는 어떤 회로가 하위 계층에 속한 사회 구성원이 상위 계층으로 진급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피터슨은 일이 안풀릴수록 더 당당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12개 삶의 규칙 중 첫번째 규칙) 다만 이런 바다 가재를 이용한 비교는 체리피킹이라고 비판받은 적도 있다체리피킹이라는 비판의 근거는, 피터슨은 바닷가재라는 하등 생물에서도 보이는 계층 구성의 필연성을 이야기 하며 인간 사회에 적용한 것이다. 만약 비유의 차원에서 바닷가재를 예시로 든 것이었다면 비판의 여지가 적겠지만, 피터슨은 늘상 해오듯 자신의 주장에 일종의 과학적 엄밀함을 덧칠하려 시도하였으므로, 반례가 제시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주장은 엄정하게 해 놓고, 주장을 변호할때 느슨한 기준의 적용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특히 바닷가재 이야기에 대한 반박은 피터슨의 주장의 핵심인 세로토닌과 같은 호르몬의 기전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므로 절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만약 해당 주장을 비유로 후퇴시키고자 한다면 오히려 더욱 광범위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한다. 그래서인지 이 바닷가재 이야기는 피터슨 비판자들이 피터슨을 깔 때 자주 언급하는 것이기도 하다[41] 통상 Alt-lite라고 칭해진다. RationalWiki에서도 조던 피터슨을 대안우파 온건파(Alt-lite)로 분류중이다. 이들도 물론 일반적으로 대안우파 세력의 일부로 간주되지만 일반적인 대안우파와 달리 백인우월주의는 싫어한다.[42] 실제로 해당 법률은 극좌가 아닌 중도우파적 자유보수주의자들 상당수도 동의한 법률이다.[43] 캐나다 인권법과 형법 전문까지 인용하자면 엄청나게 길어지기 때문에 짧게 핵심만 요약하자면 Bill C-16이 성중립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할 수 있는 법률이 되려면 우선 캐나다의 형법을 개정하여 "집단학살"과 "증오의 대중적 선동"이 아닌 논쟁적인 언행들을 싸그리 다 범죄화해야만 가능하다. 캐나다는 영미법을 적용하는 서양 선진국이라서 독일, 프랑스 같은 대륙법을 적용하는 서양 선진국보다 처벌하는 증오발언의 범위가 의외로 적은 편이다. 애초에 북미는 웬만한 차별, 혐오발언은 대중적 증오조장이 아니면 법률이 아닌 (기업, 사회, 서비스 제공처 등)민간에서 통제할 수 있게 한다.[44] 단순히 래디컬 페미니즘이라고 일반화하기는 어려운 지점이 있다. 물론 피터슨같은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경멸적 의미에서 '래디컬' 페미니스트이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Bill C-16을 강하게 지지하는 페미니스트들은 보통 남성혐오/트랜스배제적 "래디컬 페미니스트"들보다는 친-트랜스 성향의 "교차 페미니스트"들로 이들은 되려 Bill C-16을 반대하는 여성들을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라고 비난한다.[45] Bill C-16을 지지하는 교차 페미니스트들은 오히려 피터슨이나 소머즈 같은 주류 페미니즘 비평가들이 (트랜스 배제나 젠더 이분법 등을 이유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과 은근히 연대하면서 주류(교차)페미니스트들을 극좌라고 공격해 다수자여성(=시스젠더여성) 편들고 트랜스여성혐오를 하는 극우 포퓰리즘적 행태를 보인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를 근거로 RationalWiki에서는 소머즈를 TERF로 분류하고 있다.[46] 실제로 극우 언론 매체인 PragerU에 자주 출연했다.[47] 이는 전근대 시절에 실존했던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와 극도의 여성혐오를 부정하는 발언이라는 논란이 일었다.[48] 야동 자체를 보지 말라고 하고, 자위 자체도 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안티포르노 페미니즘이 극도로 만연한 한국과 달리 서구 페미니스트들이나 과학적 회의주의자들은 남성이 적절한 포르노를 통한 자위행위를 통해 성욕을 해소하는 것은 성범죄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49] 실제로 막심 베르니에가 보수당을 탈당해 인민당을 창당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Bill C-16같은 자유주의적 정체성 정치에 대해 보수당마저 미온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Bill C-16이 진짜로 정체성 정치인가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는 있다.[50] 정치와 종교가 결합한 형태 등.[51] 그는 스스로 개신교 신자이며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고 밝히기는 했으나, 정작 그는 기독교의 여러 교리에 대해 회의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어서 온전한 의미의 개신교인이라고 보긴 어려운 면도 있다. 단지,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개신교 윤리의 많은 부분에 대해 공감하고 있기는 하나 영적인 부분에서는 일면 불가지론, 회의론적 태도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52] 피터슨은 자신이 그들과 같은 부류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일개 트롤러를 20세기 최대 학살범과 동일선상에 놓았다는 점에서도 이 교수를 비판했다.[53] 발목과 골반의 일부를 교체해야할 정도의 대수술을 받았으며, 통증으로 인한 우울증, 진통제 중독으로 고생했다고 한다.[54] 변호인 측이 법정에서 어떤 전문분야에 대한 견해를 위해 증인으로 세우는 전문가[55] 아래 판결문 내용에서 나오듯이 민간 컨설팅용이지 포렌식 목적으로는 알맞지 않았다.[56] 미국 연방법이 사용하는, 전문가 증인의 증언의 인용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기준. 탄탄한 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도출된 결론인지를 따지는 것을 골자로 한다. 캐나다 법원은 도버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57] 북미 의사들이 증상을 잘못 진단했다고 생각해서라고 한다.[58] 피터슨 교수의 저서 ‘12가지 인생의 법칙’을 대놓고 저격한 것이다.[59] 그가 인간의 사회 구조를 설명하면서 랍스터의 생태에 비유한 적이 있는데 반대측 진영에서 사람이 랍스터냐는 식으로 전혀 엉뚱하게 호도한 것을 재차 비꼰 것이다.[60] 2021년 3월 23일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