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2

알라딘: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최성호

알라딘: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 삶의 의미, 부조리, 반대신론의 철학 | Meaning of Life 시리즈 15
최성호 (지은이)필로소픽2019-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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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어때요?
기본정보
208쪽
책소개

Meaning of Life 시리즈 제15권. 사람들은 하루하루 삶에 온 정성을 다해 매진하면서도 끊임없이 삶이 덧없다고, 무의미하다고 중얼거린다. 그러면서도 삶에 대한 지극한 몰입과 집중을 멈추지 못하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언젠가 죽음이 다가올 땐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며 삶의 무상함과 허무함을 한탄할 것이라는 것을. 이 책은 이 같은 일견 모순적인 인간 조건인 ‘부조리’에 대한 탐구이다.

알베르 카뮈와 토머스 네이글은 ‘부조리’라는 개념을 통해 이러한 인간 조건을 포착하려 했다. 카뮈는 부조리에 대해 우리의 숙명을 경멸하는 영웅주의적 반항으로 대응하라고 조언한다. 반면, 네이글은 부조리는 절망하거나 통탄할 인간조건이 아니라고 반박하면서 아이러니를 머금은 미소로 응대하면 충분하다고 조언한다. 저자는 이 둘의 서로 다른 정의와 처방 중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를 면밀히 살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상당수 종교인과 신학자가 주창하는 삶의 의미에 대한 이론이 헛된 구호에 지나지 않음을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반대신론(anti-theism)’의 개념을 통해 논증한다.

시공간적 왜소함과 존재의 우연성에도 불구하고 자기초월적 의식을 통해 자신을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여기에 있다. 자신의 삶이 궁극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탐구하는 동안, 삶의 의미와 목적의 부재, 정당성의 부재, 명증한 이해 가능성의 부재가 유발하는 부조리로부터의 탈출이 시도된다.


====
목차


|머리말|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 포기할 수 없는 목적들

1장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
2장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스
3장 부조리와 허무주의
4장 부조리와 극적 아이러니
5장 토머스 네이글의 ‘영원의 관점’
6장 철학적 부조리와 회의주의
7장 부조리한 존재로 살아가기
8장 부조리에서 탈출하기
9장 아이러니는 부조리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을까?
10장 반대신론이란 무엇인가?

|맺음말| 이 우주에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책속에서


P. 25 인류는 아주 오랜 기간 자신의 우주적 중요성에 대하여 깊은 자기기만에 빠져있었다. 인간이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자신들이 우주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는, 만물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운행한다는 미몽은 전근대인들이 스스로에 대하여 지녔던 자긍심의 근저를 이루는 신념이었다. 그러나 과학의 진보는 인류가 그러한 미몽에 안주하는 것을 허용하지않았다. 접기 - 호두파이
P. 46 그렇게 신들에 의해 지독한 무의미의 삶을 강요받은 시지프스가 그삶을 기꺼이 살아냄으로써 신들의 오판을 증명하는 반항인으로, 진정한
‘부조리의 영웅‘으로 재탄생한다고 카뮈는 강조한다. - 호두파이
P. 119 실제로 부조리에 관한 많은 문헌들은 자살에 관한논의를 포함하고 있다. 카뮈는 ˝진정으로 엄중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고 그것은 자살˝이라고 말하며 그의 <시지프스의 신화>를 시작한다. - 호두파이
P. 124 인간의 부조리에 대한 세 번째 해결책은 우리의 일상에 대한 일인칭적, 주관적 관점을 철저히 억누르면서 오직 삼인칭적, 객관적, 관찰자적 관점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나는 어떤 특별한 존재가 아닌 무수히많은 인간들 중 하나, 아니 이 광대한 우주의 무수히 많은 물체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에 따라 나는 나에게 발생하는 고통, 쾌락, 기쁨, 슬픔, 좌절, 고뇌 등에 어떤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할 이유나 근거를 상실한다. 그것은 멀고 먼 우주의 가장자리 어느 작은 행성에 잠시 출현했다가 영원히 사라지는 한 이름 모를 생명체에게서 발생하는 고통, 쾌락, 기쁨, 슬픔, 좌절,
고뇌에 내가 특별히 중요성을 부여할 이유나 근거가 없는 것과 같은 이지이다. 접기 - 호두파이
P. 131 마치 곤충학자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개미의 움직임을 관찰자의관점에서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특히 일인칭적 관점에서 자신이 극진한 중요성과 의미를 부여하던 그 모든것들에 대하여, 관찰자의 관점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때 나에게 닥치는 불행은 어느 임의의 한 인간에게 닥치는 불행 이상이아니고, 내가 만끽하는 행복은 어느 임의의 한 인간이 만끽하는 행복 이상이 아니다. 접기 - 호두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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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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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최성호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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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 그전에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호주 시드니대학교, 캐나다 퀸스대학교에서 재직했다. 《Mind》, 《Nous》, 《Philosoph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 등의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했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의 〈성향(Dispositions)〉 항목을 작성했다. 저서로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 《그럼 군대 다녀온 나는 비양심적이란 말이냐?》,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가 있다.

최근작 : <썸타기와 어장관리에 대한 철학적 고찰>,<그럼 군대 다녀온 나는 비양심적이란 말이냐?>,<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 총 5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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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심리철학>,<프로이트와 슈퍼히어로>등 총 131종
대표분야 : 철학 일반 12위 (브랜드 지수 56,370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철학적 자살로 삶을 지탱하고 있는 당신에게
삶의 허무에서 발 떼기 위해 스스로를 혹사시키고도 여전히 그 의미를 찾지 못하는 당신에게, 이 책은 대답할 수 없는 그러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의미에 대해 탐구할 기회를 열어준다.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허무주의에 발을 담가봤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 덧없고 무상하다는 허무주의가 깊은 우울로 빠지기 전에, 사람들은 허무주의에서 도망치는 방법으로 도리어 삶에 대한 지극한 집중을 권유받아 왔다. 이렇게 삶의 의미도 정당성도 구하지 못한 채 내 욕망과 계획이 진짜 내 삶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양 살아가는 방식은 이 책에서 말하는 ‘철학적 자살’에 가깝다. 철학적 자살이 부조리에 대한 대응으로는 충분하지 않을지라도, 인간의 부조리에 대한 충분한 사유 없이 성급히 허무주의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철학적 자살은 육체적 자살의 차선책으로서는 충분했을지 모른다.
허무주의와 철학적 자살을 선택하기 전에 인간의 부조리 조건에 대한 고찰을 먼저 살펴보자. 삶의 불가해성은 인간을 우주적 관점에서 초라한 존재로 만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삶의 불가해성에 대해 고민하는 유일한 존재가 되게도 한다.
저자는 허무주의라는 산통을 견디며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부조리 철학에 대해 촘촘한 예시를 든다. 특히 철학적 사료는 물론이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소설, 영화, TV프로그램, 가상의 대화 상황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풍성한 해설이 독자를 부조리 철학으로의 탐구로 견인한다.

“왜 당신은 죽으면 안 되지요?”
“왜 살아야 하지요?” “왜 당신은 죽으면 안 되지요?”라는 오래되고 불가해한 질문에 여전히 명쾌한 대답을 내놓을 수는 없지만 그 부조리가 곧장 우리를 살 이유가 없는 존재 또는 죽어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는 않는다.
삶의 의미를 찾는 인간의 갈망과 이에 오직 불합리한 침묵으로 일관하는 세계 사이의 충돌에서 카뮈의 부조리가 있다. 카뮈의 경우라면 그 갈망에 응답하는 존재가 있을 때 부조리가 해소될 수 있다. 반면, 인간 내의 일인칭적 관점과 영원의 관점 사이의 충돌에서 부조리의 조건을 찾는 네이글의 경우는 카뮈가 요구하는 신적 존재가 있다 하더라도 그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도 회의할 수 있기 때문에 부조리는 해소되지 않는다.
저자는 카뮈의 시지프스와 네이글의 영원의 관점을 중심으로 부조리에 대한 정의와 처방을 심도 깊게 탐구한 뒤, 허무주의와 회의주의 구분, 철학적 자살과 반대신론으로 부조리 철학의 개념을 속도감 있게 확장시켜나간다.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철학적 쾌감을 선사함은 물론, 허무주의적 명제의 그 신비로운 마력이 분석철학을 통해 일순간 타파되는 순간을 목격하는 지적 즐거움까지 맛보게 한다.

반대신론, 인간의 부조리와 신(神)의 모순에서 탈출하기
삶의 의미와 부조리를 탐구하는 동안 의도적으로 신의 존재에 대한 논의를 배제한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유신론과 무신론의 오래된 논쟁을 뛰어넘어 신의 존재를 가치론적으로 분석한 “반대신론”을 제시한다. 반대신론은 무신론과는 다른 새로운 개념으로 신의 존재 유무에 관심을 두는 대신 신의 존재가 가져올 장단점을 가치론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이다. 2011년 카하네의 논문으로 처음 학계에서 주목 받기 시작했고, 국내에서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소개되는 이론이다. 신의 설계 속 도구로 존재하여 신이 제시한 소명을 받들고 산다는 것이, 삶의 의미와 부조리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며 신의 존재로 삶의 불가해성을 해결하게 된다고 해도 그것이 더 인간에게 더 바람직한 삶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부조리를 해소할 수 있는 초월적 존재의 가정까지도 논리적·가치론적으로 살펴 인간을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는 의지가 분명히 느껴지는 이 메시지는 부조리 탐구를 통해 저자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바를 한층 더 분명하게 한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도 혼신으로 응하는 인간이라는 존재
삶의 의미는 때로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더 선명해진다. 시간은 갈수록 가속이 붙는 것 같다고들 말하지만 그것을 죽음이 더 빨리 다가오고 있다고 느끼는 경험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은 예정된 결말임을 알기에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을 준비한다. 가상의 유서는 쓰기 시작한 첫 줄부터 가상이 아니게 되고 사람들은 삶의 덧없음을 실감하며 그간의 삶을 반추하기 시작한다. 삶의 의미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 상태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살아온 삶과 남은 삶을 극명히 대비시키며, 이를 통해 삶의 불가해성과 그로부터 오는 혼란 자체가 인생의 의미는 아님을 재확인시킨다.
사람들은 어떤 사명과 호소에 도취되었다가도 금세 허무와 회의로 휘청이기도 한다. 때로는 우울에 휩싸여 삶의 의미를 부정하다가도 우연한 전화 한 통에, 갑작스런 허기에 극단적 선택을 미루기도 하는 존재 자체가 불가해한 존재가 인간일지 모른다. 하지만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은 삶의 의미를 견뎌낸 존재로서, “혼신의 노력으로 자기 나름의 삶을 설계하고 구현하는 부조리의 표본과 같은 인간”이기에 그 존재 자체가 특별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에서 소개한 것과 같이, 영원히 불가해할 것만 같은 삶의 의문과 부조리를 견뎌낸 사람들이 삶의 의미에 대해 수세기를 거쳐 궁리해왔을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답을 향한 갈망은 매순간 좌절로 끝났을 테지만 도리어 삶의 의미에 대한 다채로운 해석과 지평을 열어주었는지 모른다. 부조리한 인간 조건 속에서도 유의미한 오답들을 통해 삶은 지속해볼 만하다는 오랜 확신들을, 우주의 어느 외진 구석 초라한 존재들이 만들어왔던 게 아닐까. 접기

평점 분포 9.7




훌륭하다. 최근 언어와 사고의 필연적 아이러니에 대해 고심이 많았는데 많은 도움이 됨.
ssum 2020-08-09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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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작에 가깝습니다
shc-94 2021-11-01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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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명쾌하면서 훌륭하다.
간만에 읽는 즐거움을 찾아준 책.
음향과분노 2022-09-04 공감 (0) 댓글 (0)


훌륭

좋은 책입니다. 서두와 맺음말이 특히 훌륭합니다. 본문은 다소 논증과 분석을 위한 장이어서, 결코 어렵지 않지만 또 쉽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체는 아주 쉬운 편입니다. 저자는 아주 어려운 얘기를 쉽게 정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제가 주제인 만큼 분명 머리를 쓸 생각을 하고 읽는 게 좋은 그런 책입니다.

약간 아쉬움이 없진 않은데 일부 내용이 중복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자의 견해와 차이가 있을 것 같지만 나름대로 내용을 조금 정리해보면, 문제의 발단은 전근대 단계의 세계관이 깨지면서 근대의 인간은 우주적 초라함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인생의 의미와 정당성, 정합성이 깨진다는 것입니다. 근대 과학의 폭로에 따르면 인간은 우주의 중심도 아니고 정말 미미한 존재인데 - 그런 채로 수백 년이 지났는데 -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는 왜 사는가? 이에 대해 카뮈와 네이글의 견해를 논의의 중요한 두 축으로 삼습니다.




카뮈는 인간이 인생의 의미, 정당성을 추구하지만 그에 대한 답이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과 세계 사이의 부조리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조리를 비극으로 승화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삶의 부조리를 방조하는 신, 우주, 세계를 경멸하고 반항하는 삶 자체.




이런 논의 후에 저자는 분석적으로 인간과 허무주의적 세계를 따로 구분한 뒤, 둘 사이에는 인간의 허무주의적 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논의의 돌파구를 엽니다. 허무주의에 따르면 그런 믿음조차 사실 허무한 것일 뿐이라는 논리적 결함도 덧붙이면서.

그러면서 저자는 네이글의 견해를 중요하게 가져옵니다. 자기의식에는 일인칭적 시점과 삼인칭적 시점이 있음을 환기합니다. 적절한 예들이 나오고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우린 자기 자신을 때로 타자로서 관찰하는 입장을 갖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문제는 바로 이 삼인칭적 시점입니다. 이 삼인칭적 시점은 인간만이 획득한 것으로서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삶과 세계를 '회의'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허무가 집어삼키는 허무주의와는 구분해서 이를 회의주의라고 명명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의 부조리는 자기 의식 안의 두 시점의 존재로 인한 것으로 설명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생의 정당성, 의미가 부여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왜 '삶의 부조리'가 생기는지 알게 됩니다.

이런 설명틀 아래, 제가 읽기로는 카뮈의 시지프스가 다시 소환 또는 진화한 모델로서 논의가 가능해집니다. 인간은 그러한 자기 부조리를 관찰하면서 '어리석게' 또는 '숭고하게' 또는 '담담하게' 바위를 언덕 위로 끊임없이 밀어올리는 존재가 됩니다. 카뮈식의 반항아, 낭만주의 영웅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부조리를 미소 지으면서 관조하는 시지프스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신'의 존재가 있다면 이 모든 논의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짚고 넘어갑니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증명할 수 없는 채로 둘 수밖에 없고... 저자는 너무도 훌륭하게 반대신론, 찬성신론, 무신론, 유신론에 대해 설명하고 왜 자신이 반대신론의 입장에 서는지 설명합니다. 논증을 건너뛰고 그 이유를 말하면 간단합니다. 신의 존재는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 차라리 부조리를 떠안고 가는 인간이 진짜 인간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거칠게 썼는데 실제 저자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직접 읽어보시길.
- 접기
회색궤도 2020-06-25 공감(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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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소되지 않는 부조리

(여러 철학자의 주장을 읽기 쉽게 취합하고 정리해서 논증한 좋은 책임은 인정하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어 짧게 써봤습니다. 논증으로서는 훌륭할지 모르나 현실과 괴리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허무함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라서 느끼는 반발심이거나 그냥 식견이 짧은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반대신론 보다는 8장에 소개된 불교 철학이 더 와닿았습니다..)


즐거울 때 삶을 긍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에 ‘무한퇴행’ 하지 않기는 쉽다. 괴로운 삶을 사는 경우에 ‘왜’를 정당화하기는 훨씬 어렵다. ‘영원의 관점’을 택하는 것은 안나 카레니나의 부정을 알아챈 알렉세이 안드로비치의 경우처럼(‘이제 그는 평온하게 다리를 건너던 중 갑자기 다리가 무너져 그 아래의 바닥 없는 구덩이를 본 사람이 느낄 법한 감정을 느꼈다’) 상실, 배신, 사고, 패배, 실직, 빈곤, 장애로 절망할 때다. 일인칭적 세계에서 균열을 느낄 때 영원의 관점은 출현하고 강력해진다.

종교 비판은 (종교를 낳는) 눈물의 골짜기에 대한 비판이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기억해보라. 이반 카라마조프가 자주 인용하는 볼테르의 말 ‘신이 없다면 발명하기라도 해야할 것이다’는 눈물의 골짜기를 살아가는 민중의 존재로 정당화된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병든 노파에게 ‘냉소적 미소를 머금은 아이러니’(네이글)가 무슨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초월적인 신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믿음, 이데올로기, 물신을 필요로 한다. 국가, 돈, 스포츠와 같은 물신에 기대어 살아갈 때 반대신론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초월적 신을 세속적 물신으로 대체했을 뿐 아닌가. 아니면 인간을 신격화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특히 신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이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존재”(117쪽)가 된다는 결론은, 신학적인 명제인 자유의지의 존재를 긍정한다는 것인데 세계가 허무적이라는 전제를 뒤집은 것 아닌가 싶어서 납득이 어려웠다. 먼거리를 돌아 자유주의/휴머니즘으로, 인간을 신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철학자의 글이기에 그렇겠지만, 역사적 맥락을 배제한 순전히 사변적인 논의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듯하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양차대전의 참화와 파시즘의 잔혹함을 겪은 후에야 탄생한 것이다. 즉, 신의 부재를 목격한 뒤에야 반항은 절실해진다.

책장은 덮은 뒤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겨울빛>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아내의 죽음으로 신앙을 완전히 잃고도 신부는 미사에 나선다. 어떤 사변보다 그 장면에 감화된다. 그것이 모순된 인간 조건을 더 정직하게 드러내므로.
- 접기
고라니 2022-01-03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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