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1

최한기 ‘기측체의’, 권오영 2007

[21세기와 고전] 새 문명에 대한 갈망, 조선을 흔들다



[21세기와 고전] 새 문명에 대한 갈망, 조선을 흔들다

3. 한국의 전통과 근대 ③ 최한기 ‘기측체의’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한국사
입력 2007.03.30. 23:44




1850년대 초 중국 베이징 천안문 근처의 출판사 인화당(人和堂)에서 조선 학자의 책이 호화 활자판으로 출간됐다. 조선 말기의 학자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 1803~1877)의 ‘기측체의(氣測體義)’였다. 이런 일은 매우 드문 일로 근대 조선의 여명기에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육당 최남선은 최한기를 조선 최고의 저술가로 꼽았고 호암 문일평은 최한기의 저서가 300여 권이었다고 했다. 개성에서 태어난 최한기는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창동(남대문시장)과 상동(한국은행 근처)에서 줄곧 살았다. 그는 청소년기부터 고산자 김정호와 절친하게 지냈고, 두 사람은 서로 만나 조선을 위해 무언가 큰 일을 하자고 굳게 맹세했다. 그런 인연으로 김정호는 1834년에 창동에 있는 최한기의 집에서 세계지도를 판각하기도 했다.

최한기가 34세에 쓴 ‘기측체의’는 
  • 기(氣)의 원론을 논한 ‘신기통(神氣通)’과 
  • 기의 응용을 논한 ‘추측록(推測錄)’으로 구성돼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수백 년간 지배 이데올로기의 자리를 차지해오던 조선 이학(理學)의 지위를 박탈하고 대신 기를 내세워 새로운 시대에 유용한 학문체계를 제시했다.

신기통’에서는 인식의 주체인 신기(神氣)라는 개념을 새롭게 내놓았다. 
신기는 지각의 근원이자 바탕이며 지각은 신기가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라고 했다. 

먼저 소통에 대한 일반론을 소개하고 이어 소통의 수단으로 눈·귀·코·입 등 감각기관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서양의 고대와 중세의 인식론도 과감하게 활용하여,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 대상세계를 신기에 저장하고 
다시 외부에 응용하는 새로운 인식방법론을 보여준다. 

또한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의 대기설도 수용하여 
자신의 기철학의 논리를 보강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이학의 견고한 장벽이 제거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있다.

‘추측록’에서는 새로운 공부방법론을 제시했다. 
즉 성리학시대의 궁리(窮理)라는 진리 탐구에서, 
이제 추측(推測)이란 새로운 공부방법으로의 전환이 시도되고 있다.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미루어 나가(推) 원리나 대상을 헤아린다(測)는 추측의 공부방법을 통해 
저자는 서양의 정치·법제도 그것이 좋은 법이고 훌륭한 제도라면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물론 서양에서도 동양의 좋은 법과 훌륭한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이다. 
동이든 서든, 남이든 북이든 서로의 앞선 법제와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긴장된 목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저자는 인간이 지구를 일주한 사실에 대해, 
캄캄한 긴 밤을 지나 태양이 환하게 떠오르는 상황으로 묘사했다. 

심지어 ‘천지의 개벽’이라고 경탄을 금치 못하기도 했다. 
이제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시대가 
인간과 인간은 물론, 지구촌의 여러 나라가 두루 소통하여 변통하는 일이 절실한 때라고 보았다. 이 책에서 주통(周通)과 변통(變通)을 매우 강조한 것은 그 때문이다.

평생을 서울에서 생활하며 당시 베이징에서 들어오는 신서적은 모두 사서 읽느라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지적 호기심에 불탔던 최한기는, 동서고금의 책을 서재에 비치하고 학문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모든 인류가 평화롭고 모든 민중이 자각하는 문명세계를 꿈꾼 그가 청장년기에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기측체의’는, 이제 성리학의 시대를 마감하고 기학(氣學)이 새로운 시대를 주도하는 시기가 도래할 것임을 알리고 있다. 따라서 전통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새로운 문명을 갈망하며 씌어진 이 책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고전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