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2

Philo Kalia - *시장의 성화(聖化)와 삼위일체적 정치경제학(Trinitarian political...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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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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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성화(聖化)와 삼위일체적 정치경제학
(Trinitarian political economy)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 22:16)
“하느님을 아는 것”, 이것은 전적으로 신학이 생긴 이래 신학의 주 과제이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오늘 세속화 시대, 무신론 시대, 무종교의 시대에 하느님을 변호하거나, 이해하려고 하거나, 변증하면서 멀리 도망갈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 가까이에서 그들을 변호하는 것이어야 함을 말한다. 신학의 말은, 인간이 시공의 제약 속에서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이니 신의 본성, 신 자체(God in itself, God for God)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라고 무슨 신비한 것을 발견한 듯 말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형이상학적 본성을 모른다고 회초리를 들지 않는다. 신학은 하느님을 알 수 없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아주 간단하다.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 아니냐!
예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은 앎(知이) 아니라 행함(行)으로 말씀하신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태복음 25:40) 그러니 신학에서 신의 존재론, 신의 인식론, 무신론, 신의 속성론, 삼위일체론 등으로 신론을 말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고, 다 헛발질하는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 알 수 없는 하느님, 인간이 가장 큰 것을 생각한 것보다 더 크신 하느님.... 道니, 無이니, 空이니... 사유의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런 과제들을 총괄하여 “내재적 삼위일체”(the immanent Trinity,)라는 이름으로 다룬다. 그러나 하느님의 실재는 하느님의 의미를 앞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실재’(God in itself)는 우리를 위해 일하시며, 세상 안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의미’(God for us)라는 입장이다. 이것을 총괄하여 경세적(경륜적) 삼위일체(The economic Trinity)라는 이름으로 말한다. 슐라이어마허는 경륜적 삼위일체를 인간이 특정한 상황 속에서 경험하는 하느님의 속성론으로 밝힌 신학자, 그런 의미에서 신학의 주체적 전환을 시도한 근대 신학자이다. 신학의 주체적이며 실존적 전환은 사실 그 의도와 영향에서 보면 신학의 성령론적 전환이다. 성령은 인간과 세계 안에 거하는 영과 기(氣)로서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의 관계 문제는 현대신학의 중요한 문제이다. 백충현 교수는 바로 이 제목으로 11명의 현대 신학자의 삼위일체론을 효과적으로 분석했다. 방대한 작업을 서로 비교하면서 그 특징들이 도드라지게 잘 수행했다. 대개의 신학자들(바르트, 라너, 몰트만, 판넨베르크...)은 양자 사이의 상호 상응이나 상호관계를 말한다. 미국의 과정 신학자 수코키나 여성신학자 라쿠나가 내재적 삼위일체보다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우위성을 말하는 정도다. 그렇지만 세상을 위한 하느님,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하느님의 경륜을 우위에 놓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륜(oikonomia)을 강조하는 신학(theologia)일 뿐이다.
그러므로 신학이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신학이 세상 안에서의 살림살이에 관심가지고 검토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신학이 경제학, 정치경제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학을 인간학으로 환원, 축소한 포이어바흐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단순히 정치경제학으로 환원, 축소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의도는 ‘삼위일체적 정치경제학’(The trinitarian political economy)의 이름으로 신학의 과제를 수행함으로써 하느님에 관한 담론이 고준담론이 아니라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경제학은 경세제민(經世濟民) 아닌가! 성경의 하느님은 경세제민에 가장 큰 관심이 있다.
위르겐 몰트만은 “하느님의 이름은 정의”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의도 단순하지 않다. 사회정의, 경제정의, 생태정의, ... 하느님은 경세가(경륜가, 경제학자)이니까(God the Economist)
나는 최근에 생태경제학, 순환 경제학, 생명경제학, 탈성장, 돌봄 경제학, 도너츠 경제학, 나우토피아(Nowtopia) 등의 책을 읽으면서 이들의 분야가 하느님을 아는데 종래의 신학적 담론보다 더 세상 사람들에게 와닿는 복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지하가 말하는 호혜와 재분배가 이루어지는 ‘신시’(神市)나 ‘시장의 성화’도 이와 뜻을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김지하의 말이다. “삶은 거룩한 것이다. 상품화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정체성이요, 인격적 사회관계요, 그리고 자연생명이다. 이 거룩한 삶을 거룩하게 실현시킬 수 있는 성스러운 시장을 꿈꿀 수 없는 것인가? 시장의 聖化, 장바닥에 비단을 까는 일, 이것은 인류의 문화와 종교가 발생한 이래 영속되어온 모든 지혜자들의 꿈이었다.” 시장의 성화, 이 꿈결 같은 명제를 화두로 하는 경제학을 ‘생명경제학’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갈망과 변화를 통틀어 ‘삼위일체적 정치경제학’(The trinitarian political economy)이라는 이름으로 신학과 연결될 때 신학은 신에 대한 이론적 담론에서 벗어나 경세제민, 일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실천적 담론이 될 것이다.








朴忠良

시장의 성화... 이제 믿음이 없어졌습니다..ㅠㅠ

Philo Kalia

朴忠良 믿음 뛰고 해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