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수 믿기에서 예수 살기로
2016년 07월 29일작성자 김기석
예수 믿기에서 예수 살기로
-한인철, <예수, 선생으로 만나다>
종교가 추문거리로 변한지 이미 오래 되었다. 특히 개신교회는 바닥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다. 제동장치조차 없으니 더욱 큰 문제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지만 핵심은 분명하다. '본'을 버리고 '말'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예수의 십자가는 사라지고 피상적인 위안과 욕망을 추인하는 언어가 춤을 추고 있다. 저 높은 곳에 올려진 예수는 더 이상 우리의 비근한 일상에 개입하지 못한다. 1970년대 초 김지하는 희곡 '금관의 예수'를 통해 교회 안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는 예수의 비애를 지적했다. 금관이 씌워진 예수는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왕관을 벗겨줄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카타콤베에서 숨죽여 예배를 올리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선한 목자 예수는 수염조차 나지 않은 젊은이로 그려졌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예수는 그들에게 경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고단한 인생길의 동반자였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예수는 우리와 구별되는 존재로 격상되기 시작했다. 중세 초기에 그려진 이콘 속의 예수의 눈은 유난히 크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세상을 살피는 예수의 초월적 시선은 두려움을 자아낸다. 마침내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었을 때 예수는 우주를 뜻하는 저 반구형 돔 꼭대기로 높여졌다. 판토크라토르 곧 만유의 주로서 말이다. 더 이상 높여질 수 없을 정도로 높여진 예수가 과연 이 땅에서 의식주의 문제로 애태우며 사는 이들의 벗이 될 수 있을까?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연세대학교 교목실에서 일하는 한인철 박사는 매년 입학하는 학생들에게 기독교 입문을 가르친다. 비기독교인들이 다수인 강의실에서 예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귀한 기회를 소홀히 할 수도 없다. <예수, 선생으로 만나다>는 그런 그의 삶의 자리에서 나온 책이다. 그는 학생들 특히 비기독교인 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예수 이야기를 쓰고 싶어한다. 아직 신앙 고백의 자리까지 이르지 못한 이들에게 예수 이야기가 의미있는 담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저자는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이 책이 겨냥하는 것은 비기독교인 학생들만이 아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교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에 공허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 역사적 예수에 대해 깊이 알고자 하는 사람들, 역사적 예수 연구 결과를 자기 목회에 적용하려는 이들을 염두에 두고 집필되었다.
들어가는 말과 나가는 말을 제외하고 총 10장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의 구성은 매우 교과서적이다. 각 장은 표제와 더불어 작은 글씨의 부제가 붙어 있다. "왜 역사적 예수인가? - 예수믿기에서 예수살기에로", "예수의 자리 – 유대교, 헤롯가, 그리고 로마제국", "예수의 가르침 – 하나님의 나라", "예수의 삶 – 고통의 치유와 공동식사, 그리고 비폭력적 저항", "예수의 동시대인 읽기 – 함께 아파함과 냉혹한 비판",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 – 일벌백계(一罰百戒)", "다시 살아난 예수 –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이 된 예수 – 니케아 별장의 야합", "예수 새로 보기 – 선생(先生) 예수", "다시 태어나는 기독교인 – 예수의 길벗". 목차만 자세히 살펴도 이야기의 흐름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한국교회가 신앙의 그리스도에 집중함으로써 역사적 예수를 소홀히 다루고 있고, 그 결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강조되고 있지만 예수를 따라 사는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을 결정한 신학적 요인으로 '니케아 신조', '사도신경', '사영리'를 들고 있다. 니케아 신조는 예수가 곧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과 본질이 같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인간의 죄를 구원할 수 없다는 신학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도신경은 예수의 출생, 고난과 죽음 그리고 승천과 재림을 말하지만 정작 예수의 지상적 삶은 통째로 빠져 있다. 사영리(The Four Spiritual Laws)는 CCC를 창설한 빌 브라이트가 요약한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 현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 영접하는 자만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가지 고백의 공통점은 지상에 현존했던 예수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깨끗하게 소거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고백과 경배의 대상으로 고양되어 나타난다. 예수는 닮을 수도 없고, 닮으려는 희망을 품어서도 안 되는 초월적 존재처럼 여겨진다.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체포되어 17년 동안 갇혀 살았던 서준식은 감옥 안에서 예수를 깊이 연구한 후에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야 예수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묘한 '아이러니'"(<서준식 옥중서한>, 노사과연, 저자교열판, 2015년 3월 24일, p.246)라고 말했다. 예수가 종교에 갇히는 순간 예수는 침묵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의 삶의 자리
역사적 예수를 괄호 속에 묶어 제거한 결과 한국교회는 두 가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나는 배타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결핍이다. 저자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역사적 예수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1980년대에 '예수 세미나'를 이끌었던 로버트 펑크도 이 점을 정직하게 시인하며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 뿐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예수가 기원 전 6년이나 7년에서 36년 사이에서 살았을 것이라는 것, 그의 활동기간은 1년 내지 3년의 짧은 기간, 고향은 이스라엘 북부에 있는 갈릴리 나사렛, 활동 장소는 이스라엘, 아버지는 목수이거나 장인, 어머니는 마리아, 형제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네 명, 거기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누이 두 명, 모국어는 아람어(Aramaic)이고 아마도 그리스어를 말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 세례요한의 문하생으로 있다가 그의 죽음 이후 가르치고 치유하고 공동식사를 행했을 것이라는 것, 그의 주변에 시몬 베드로, 세배대의 아들들, 헤롯대왕, 헤롯 안티파스, 빌라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는 것 정도가 그것이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에 대해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저자는 예수의 삶의 자리부터 살핀다.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규정했던 것은 유대교와 로마의 식민 지배 그리고 로마의 하수인인 헤롯 왕가의 전횡이었다. 유대교 갱신 운동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성전 체제는 민중들의 일상적 삶과 유리되어 있었고, 소위 로마의 평화라는 허구의 평화가 사람들의 삶을 옭죄고 있었다. 로마에 부역하는 헤롯 왕가는 재원 마련을 위해 가혹한 세금 정책을 펼쳤고, 총독이 다스리고 있는 예루살렘 인근 지역 사람들도 제국세(토지세, 수확세, 관세, 통행세, 연공 등)에 시달렸다. 여기에 사람들이 성전에 바쳐야 했던 종교세를 더하면 세금은 대략 수입의 35%가 되었다고 한다. 소작민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했다. 그로 인해 향촌 사회는 급격히 해체되었고, 갈릴리를 비롯한 농촌 지역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바로 그런 현실에 비춰볼 때 그 의미가 오롯이 드러난다. 저자는 "안티파스의 통치기간 동안 갈릴리의 소작농들에 대한 경제적 수탈은 예수의 대안적 '왕국'(alternative kingdom) 운동의 배경"이 되었을 것(97)이라는 넬슨-폴마이어의 견해에 공감한다.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흔히 생각하듯 죽은 후에 가는 나라가 아니다. 그곳은 이 땅에서 경험해야 할 새로운 현실이다. 그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도래하는가? 하나님 나라를 추동하는 주체는 하나님인가, 인간인가? 저자는 "새로운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열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에 의해서만 열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 참여와 협력에 의해서만 열릴 수 있다"(99)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는 열린 미래로서 과정 속에 존재한다(104). 하나님 나라는 강자들의 폭력이 정상으로 용인되는 사회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검질기게 노력하는 이들을 통해 서서히 다가오는 현실이다.
제국의 지배에 맞선 하나님 나라 운동
앞서도 말했듯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이다. 대체 어떤 삶과 어떤 가르침이 그렇다는 말인가? 저자는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가 주목하지 않는 예수의 삶에 주목한다.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던 것 세 가지는 질병, 기아,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었다. 예수는 그 세 가지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공권력의 폭력과 착취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빈곤은 영양실조를 낳고, 영양실조는 면역력 결핍을 낳고, 면역력 결핍은 질병으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질병은 개인 위생의 문제가 아니고 구조적 문제이다. 환자 치유의 자리가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는 자리가 되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자리이기도 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129).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예수가 기아 문제를 전면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하지만 치유의 현장이 때로는 밥상 공동체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저자는 크로산의 견해에 의지하여 말한다. "예수는 질병에 걸린 사람들의 고통을 치유해 주면서, 그 환자와 가족들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지 않는 대신, 환자와 그 가정은 예수와 그의 일행, 그리고 예수를 보러온 그 지역의 배고픈 청중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130). 치유에 대한 감격이 빚어낸 "공동 식사 자리는 계급에 의한 차별에 도전하고, 평등 사회를 구현하는 자리"(132)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로마 제국과 헤롯의 지배가 폭력에 의지하는 것이라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것이어야 한다. 로마의 폭력적 지배에 폭력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더 큰 폭력을 초래하는 일임을 예수는 너무나 잘 알았다. 그렇다고 하여 강한 자들의 폭력 앞에 비굴하게 굴종할 수도 없다. 약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폭력을 추문거리로 만들 수 있는 내적 능력이다. 비폭력 저항이 의도하는 것은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변화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원수 사랑이 아니겠는가.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있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예수의 십자가가 비폭력의 전형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폭력과 착취에 근거한 로마식 삶의 방식과 성전체제에 반대한 예수에게 세상이 안겨준 것은 십자가였다. 예수는 한 사회의 안정성을 토대로부터 뒤흔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기득권자들은 사회의 맨 밑바닥에 사는 이들이 자기들의 처지를 운명처럼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예수는 당시 세계가 설정해놓은 모든 경계선들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거룩함과 속됨,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의 구별 혹은 차별은 그 앞에서 다 무너지고 말았다. 어디서든 당연의 세계에 물음표를 붙이는 행위는 불온한 행위가 아니던가.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로마 제국은 예수를 제거하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 저자는 마커스 보그의 견해에 동조하면서 "'예수의 죽음은 십중팔구 유대교 종교지도자들과 관료집단...의 협의체(산헤드린, 필자주)와 로마 총독이 공모한 결과'였다고 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옳은 판단일 것"(206)이라고 말한다.
예수, 다시 살아나다
하지만 십자가가 예수 운동의 끝은 아니었다. 예수는 다시 살아났다. 부활 사건은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건이기에 누구에게나 당혹스러운 일이다. 물론 예수 시대 이전에도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셀류커드 왕조의 폭압적 지배가 유대인들을 괴롭힐 때 사람들은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어간 이들의 운명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부활은 그처럼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 제시되었다. 그렇다면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자칫 잘못 다루면 오해의 소지가 큰 미묘한 문제이다. 하지만 저자는 부활에 대한 질문을 바꿀 것을 제안하고 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예수가 정말 부활했는지 여부가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살아 생전에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은 예수가 부활했느냐"(229).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부활에 대한 가르침의 전통에도 부합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부활한 예수는 불의한 권력자들에 의해 박해받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실천했던 예수이다. 그를 죽이려는 이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끝끝내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예수이다. 그런데 그 예수는 정말 몸으로 부활했는가? 저자는 이 질문을 애매한 태도로 회피하지 않는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라는 '개별자'의 부활이 아니라 그의 길을 이어가는 제자들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던 제자들이 일어나 예수가 가르치고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를 다시 가르치고, 병자들을 치유하고, 식탁 공동체를 이루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저자가 이해하는 몸의 부활이다. 예수 정신이 제자들의 삶을 통해 온전히 육화되는 것, 바로 그것이 부활이라는 것이다(242).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지만 저자는 아주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 역사 안에서 예수의 부활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예수가 교회 회의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외아들로, 급기야는 하나님으로 고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한 니케아 회의에서 예수와 하나님이 동일본질이라는 고백에 당도했음을 잘 알고 있다. 저자는 이런 급격한 변화가 황제의 야심과 무관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황제를 보좌하고 있던 호시우스는 '두 주님설'로 황제를 설득한다. 이 세상에는 동등한 자격의 두 주님이 존재하는데, 한 주님은 종교계를 다스리는 예수이고, 다른 주님은 정치계를 다스리는 황제라는 것이다(271). 예수에게 신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곧 황제의 신적 지위 획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자 황제는 니케아 회의에서 그런 결정을 종용했고 마침내 관철시키고 말았다. 기독교는 이제 제국 종교가 되었다.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박해하는 기독교로 변신한 것이다. 기독교가 노정하는 배타주의와 개종주의의 씨앗은 이렇게 파종되었다(276-7). 하나님으로 높여진 예수는 이제 경배의 대상이지 더 이상 따라야 할 생의 모범이 아니었다.
9장에서 이 책의 목표가 무엇인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경배의 대상이 된 예수를 이제 본래의 자리인 지상으로 모시자는 것이다. 신적 휘장에 가려졌던 예수의 본래 모습을 회복함으로 우리들의 비근한 일상 속에서 늘 만나고 여쭐 수 있는 선생으로 삼자는 것이다. '참 하나님, 참 인간'이라는 교리에 충실한 이들은 예수를 선생으로 삼자는 말에 당황스러워 할 것이다. 예수를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모니와 같은 스승의 반열에 세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선생'을 앞서 난 사람이 아니라 '앞서 걸은 사람'이라 말한다. 진리의 길을 우리보다 앞서 옹골차게 앞서 걸어간 예수는 어떤 분인가?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조건을 갖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한계 속에서 태어난 보통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는 참 인간, 참 세상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한다", "예수는 참 인간, 참 세상에 대한 비전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어야 한다", "예수는 참 인간과 참 세상에 대한 비전을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르친 그대로 살았어야 한다", "예수는 가르친 대로 살아온 그 삶을 죽는 그 순간까지 끝까지 지켰어야 한다"(286-7). 예수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선생이다. 그러나 우리와의 차별성은 없는 것일까? 누구도 예수처럼 살 수 있지만 실제로 예수의 삶을 오롯이 살아낼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당혹스러운 이들이 많을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통해 역사적 예수의 실체에 접근하려다 보니,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은총'과 '신비' 그리고 '역설'에 대한 논의가 소홀히 된 느낌이 있다. 예수 살기를 강조하는 동시에 구원의 문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남겨진 과제라 하겠다. 비기독교인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다고는 하지만 기독교 대중들에게 구원의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학문적 저술을 의도하지 않는다. 마치 대중강연처럼 느껴지는 것은 글의 초고를 작성한 후 대중들과 독회를 반복하면서 수정 과정을 거쳤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의 초상을 그리려던 저자의 계획은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경배의 대상으로 높여짐으로써 정작 우리 삶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역사적 예수를 우리 삶의 자리에 다시 초대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이 책은 예수의 길벗이 되어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다양한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예수 믿기에서 예수 살기로
-한인철, <예수, 선생으로 만나다>
종교가 추문거리로 변한지 이미 오래 되었다. 특히 개신교회는 바닥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다. 제동장치조차 없으니 더욱 큰 문제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지만 핵심은 분명하다. '본'을 버리고 '말'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예수의 십자가는 사라지고 피상적인 위안과 욕망을 추인하는 언어가 춤을 추고 있다. 저 높은 곳에 올려진 예수는 더 이상 우리의 비근한 일상에 개입하지 못한다. 1970년대 초 김지하는 희곡 '금관의 예수'를 통해 교회 안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는 예수의 비애를 지적했다. 금관이 씌워진 예수는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왕관을 벗겨줄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카타콤베에서 숨죽여 예배를 올리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선한 목자 예수는 수염조차 나지 않은 젊은이로 그려졌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예수는 그들에게 경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고단한 인생길의 동반자였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예수는 우리와 구별되는 존재로 격상되기 시작했다. 중세 초기에 그려진 이콘 속의 예수의 눈은 유난히 크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세상을 살피는 예수의 초월적 시선은 두려움을 자아낸다. 마침내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었을 때 예수는 우주를 뜻하는 저 반구형 돔 꼭대기로 높여졌다. 판토크라토르 곧 만유의 주로서 말이다. 더 이상 높여질 수 없을 정도로 높여진 예수가 과연 이 땅에서 의식주의 문제로 애태우며 사는 이들의 벗이 될 수 있을까?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연세대학교 교목실에서 일하는 한인철 박사는 매년 입학하는 학생들에게 기독교 입문을 가르친다. 비기독교인들이 다수인 강의실에서 예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귀한 기회를 소홀히 할 수도 없다. <예수, 선생으로 만나다>는 그런 그의 삶의 자리에서 나온 책이다. 그는 학생들 특히 비기독교인 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예수 이야기를 쓰고 싶어한다. 아직 신앙 고백의 자리까지 이르지 못한 이들에게 예수 이야기가 의미있는 담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저자는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이 책이 겨냥하는 것은 비기독교인 학생들만이 아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교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에 공허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 역사적 예수에 대해 깊이 알고자 하는 사람들, 역사적 예수 연구 결과를 자기 목회에 적용하려는 이들을 염두에 두고 집필되었다.
들어가는 말과 나가는 말을 제외하고 총 10장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의 구성은 매우 교과서적이다. 각 장은 표제와 더불어 작은 글씨의 부제가 붙어 있다. "왜 역사적 예수인가? - 예수믿기에서 예수살기에로", "예수의 자리 – 유대교, 헤롯가, 그리고 로마제국", "예수의 가르침 – 하나님의 나라", "예수의 삶 – 고통의 치유와 공동식사, 그리고 비폭력적 저항", "예수의 동시대인 읽기 – 함께 아파함과 냉혹한 비판",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 – 일벌백계(一罰百戒)", "다시 살아난 예수 –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이 된 예수 – 니케아 별장의 야합", "예수 새로 보기 – 선생(先生) 예수", "다시 태어나는 기독교인 – 예수의 길벗". 목차만 자세히 살펴도 이야기의 흐름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한국교회가 신앙의 그리스도에 집중함으로써 역사적 예수를 소홀히 다루고 있고, 그 결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강조되고 있지만 예수를 따라 사는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을 결정한 신학적 요인으로 '니케아 신조', '사도신경', '사영리'를 들고 있다. 니케아 신조는 예수가 곧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과 본질이 같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인간의 죄를 구원할 수 없다는 신학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도신경은 예수의 출생, 고난과 죽음 그리고 승천과 재림을 말하지만 정작 예수의 지상적 삶은 통째로 빠져 있다. 사영리(The Four Spiritual Laws)는 CCC를 창설한 빌 브라이트가 요약한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 현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 영접하는 자만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가지 고백의 공통점은 지상에 현존했던 예수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깨끗하게 소거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고백과 경배의 대상으로 고양되어 나타난다. 예수는 닮을 수도 없고, 닮으려는 희망을 품어서도 안 되는 초월적 존재처럼 여겨진다.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체포되어 17년 동안 갇혀 살았던 서준식은 감옥 안에서 예수를 깊이 연구한 후에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야 예수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묘한 '아이러니'"(<서준식 옥중서한>, 노사과연, 저자교열판, 2015년 3월 24일, p.246)라고 말했다. 예수가 종교에 갇히는 순간 예수는 침묵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의 삶의 자리
역사적 예수를 괄호 속에 묶어 제거한 결과 한국교회는 두 가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나는 배타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결핍이다. 저자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역사적 예수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1980년대에 '예수 세미나'를 이끌었던 로버트 펑크도 이 점을 정직하게 시인하며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 뿐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예수가 기원 전 6년이나 7년에서 36년 사이에서 살았을 것이라는 것, 그의 활동기간은 1년 내지 3년의 짧은 기간, 고향은 이스라엘 북부에 있는 갈릴리 나사렛, 활동 장소는 이스라엘, 아버지는 목수이거나 장인, 어머니는 마리아, 형제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네 명, 거기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누이 두 명, 모국어는 아람어(Aramaic)이고 아마도 그리스어를 말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 세례요한의 문하생으로 있다가 그의 죽음 이후 가르치고 치유하고 공동식사를 행했을 것이라는 것, 그의 주변에 시몬 베드로, 세배대의 아들들, 헤롯대왕, 헤롯 안티파스, 빌라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는 것 정도가 그것이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에 대해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저자는 예수의 삶의 자리부터 살핀다.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규정했던 것은 유대교와 로마의 식민 지배 그리고 로마의 하수인인 헤롯 왕가의 전횡이었다. 유대교 갱신 운동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성전 체제는 민중들의 일상적 삶과 유리되어 있었고, 소위 로마의 평화라는 허구의 평화가 사람들의 삶을 옭죄고 있었다. 로마에 부역하는 헤롯 왕가는 재원 마련을 위해 가혹한 세금 정책을 펼쳤고, 총독이 다스리고 있는 예루살렘 인근 지역 사람들도 제국세(토지세, 수확세, 관세, 통행세, 연공 등)에 시달렸다. 여기에 사람들이 성전에 바쳐야 했던 종교세를 더하면 세금은 대략 수입의 35%가 되었다고 한다. 소작민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했다. 그로 인해 향촌 사회는 급격히 해체되었고, 갈릴리를 비롯한 농촌 지역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바로 그런 현실에 비춰볼 때 그 의미가 오롯이 드러난다. 저자는 "안티파스의 통치기간 동안 갈릴리의 소작농들에 대한 경제적 수탈은 예수의 대안적 '왕국'(alternative kingdom) 운동의 배경"이 되었을 것(97)이라는 넬슨-폴마이어의 견해에 공감한다.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흔히 생각하듯 죽은 후에 가는 나라가 아니다. 그곳은 이 땅에서 경험해야 할 새로운 현실이다. 그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도래하는가? 하나님 나라를 추동하는 주체는 하나님인가, 인간인가? 저자는 "새로운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열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에 의해서만 열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 참여와 협력에 의해서만 열릴 수 있다"(99)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는 열린 미래로서 과정 속에 존재한다(104). 하나님 나라는 강자들의 폭력이 정상으로 용인되는 사회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검질기게 노력하는 이들을 통해 서서히 다가오는 현실이다.
제국의 지배에 맞선 하나님 나라 운동
앞서도 말했듯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이다. 대체 어떤 삶과 어떤 가르침이 그렇다는 말인가? 저자는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가 주목하지 않는 예수의 삶에 주목한다.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던 것 세 가지는 질병, 기아,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었다. 예수는 그 세 가지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공권력의 폭력과 착취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빈곤은 영양실조를 낳고, 영양실조는 면역력 결핍을 낳고, 면역력 결핍은 질병으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질병은 개인 위생의 문제가 아니고 구조적 문제이다. 환자 치유의 자리가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는 자리가 되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자리이기도 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129).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예수가 기아 문제를 전면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하지만 치유의 현장이 때로는 밥상 공동체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저자는 크로산의 견해에 의지하여 말한다. "예수는 질병에 걸린 사람들의 고통을 치유해 주면서, 그 환자와 가족들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지 않는 대신, 환자와 그 가정은 예수와 그의 일행, 그리고 예수를 보러온 그 지역의 배고픈 청중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130). 치유에 대한 감격이 빚어낸 "공동 식사 자리는 계급에 의한 차별에 도전하고, 평등 사회를 구현하는 자리"(132)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로마 제국과 헤롯의 지배가 폭력에 의지하는 것이라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것이어야 한다. 로마의 폭력적 지배에 폭력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더 큰 폭력을 초래하는 일임을 예수는 너무나 잘 알았다. 그렇다고 하여 강한 자들의 폭력 앞에 비굴하게 굴종할 수도 없다. 약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폭력을 추문거리로 만들 수 있는 내적 능력이다. 비폭력 저항이 의도하는 것은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변화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원수 사랑이 아니겠는가.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있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예수의 십자가가 비폭력의 전형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폭력과 착취에 근거한 로마식 삶의 방식과 성전체제에 반대한 예수에게 세상이 안겨준 것은 십자가였다. 예수는 한 사회의 안정성을 토대로부터 뒤흔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기득권자들은 사회의 맨 밑바닥에 사는 이들이 자기들의 처지를 운명처럼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예수는 당시 세계가 설정해놓은 모든 경계선들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거룩함과 속됨,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의 구별 혹은 차별은 그 앞에서 다 무너지고 말았다. 어디서든 당연의 세계에 물음표를 붙이는 행위는 불온한 행위가 아니던가.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로마 제국은 예수를 제거하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 저자는 마커스 보그의 견해에 동조하면서 "'예수의 죽음은 십중팔구 유대교 종교지도자들과 관료집단...의 협의체(산헤드린, 필자주)와 로마 총독이 공모한 결과'였다고 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옳은 판단일 것"(206)이라고 말한다.
예수, 다시 살아나다
하지만 십자가가 예수 운동의 끝은 아니었다. 예수는 다시 살아났다. 부활 사건은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건이기에 누구에게나 당혹스러운 일이다. 물론 예수 시대 이전에도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셀류커드 왕조의 폭압적 지배가 유대인들을 괴롭힐 때 사람들은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어간 이들의 운명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부활은 그처럼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 제시되었다. 그렇다면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자칫 잘못 다루면 오해의 소지가 큰 미묘한 문제이다. 하지만 저자는 부활에 대한 질문을 바꿀 것을 제안하고 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예수가 정말 부활했는지 여부가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살아 생전에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은 예수가 부활했느냐"(229).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부활에 대한 가르침의 전통에도 부합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부활한 예수는 불의한 권력자들에 의해 박해받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실천했던 예수이다. 그를 죽이려는 이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끝끝내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예수이다. 그런데 그 예수는 정말 몸으로 부활했는가? 저자는 이 질문을 애매한 태도로 회피하지 않는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라는 '개별자'의 부활이 아니라 그의 길을 이어가는 제자들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던 제자들이 일어나 예수가 가르치고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를 다시 가르치고, 병자들을 치유하고, 식탁 공동체를 이루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저자가 이해하는 몸의 부활이다. 예수 정신이 제자들의 삶을 통해 온전히 육화되는 것, 바로 그것이 부활이라는 것이다(242).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지만 저자는 아주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 역사 안에서 예수의 부활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예수가 교회 회의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외아들로, 급기야는 하나님으로 고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한 니케아 회의에서 예수와 하나님이 동일본질이라는 고백에 당도했음을 잘 알고 있다. 저자는 이런 급격한 변화가 황제의 야심과 무관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황제를 보좌하고 있던 호시우스는 '두 주님설'로 황제를 설득한다. 이 세상에는 동등한 자격의 두 주님이 존재하는데, 한 주님은 종교계를 다스리는 예수이고, 다른 주님은 정치계를 다스리는 황제라는 것이다(271). 예수에게 신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곧 황제의 신적 지위 획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자 황제는 니케아 회의에서 그런 결정을 종용했고 마침내 관철시키고 말았다. 기독교는 이제 제국 종교가 되었다.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박해하는 기독교로 변신한 것이다. 기독교가 노정하는 배타주의와 개종주의의 씨앗은 이렇게 파종되었다(276-7). 하나님으로 높여진 예수는 이제 경배의 대상이지 더 이상 따라야 할 생의 모범이 아니었다.
9장에서 이 책의 목표가 무엇인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경배의 대상이 된 예수를 이제 본래의 자리인 지상으로 모시자는 것이다. 신적 휘장에 가려졌던 예수의 본래 모습을 회복함으로 우리들의 비근한 일상 속에서 늘 만나고 여쭐 수 있는 선생으로 삼자는 것이다. '참 하나님, 참 인간'이라는 교리에 충실한 이들은 예수를 선생으로 삼자는 말에 당황스러워 할 것이다. 예수를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모니와 같은 스승의 반열에 세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선생'을 앞서 난 사람이 아니라 '앞서 걸은 사람'이라 말한다. 진리의 길을 우리보다 앞서 옹골차게 앞서 걸어간 예수는 어떤 분인가?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조건을 갖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한계 속에서 태어난 보통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는 참 인간, 참 세상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한다", "예수는 참 인간, 참 세상에 대한 비전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어야 한다", "예수는 참 인간과 참 세상에 대한 비전을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르친 그대로 살았어야 한다", "예수는 가르친 대로 살아온 그 삶을 죽는 그 순간까지 끝까지 지켰어야 한다"(286-7). 예수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선생이다. 그러나 우리와의 차별성은 없는 것일까? 누구도 예수처럼 살 수 있지만 실제로 예수의 삶을 오롯이 살아낼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당혹스러운 이들이 많을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통해 역사적 예수의 실체에 접근하려다 보니,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은총'과 '신비' 그리고 '역설'에 대한 논의가 소홀히 된 느낌이 있다. 예수 살기를 강조하는 동시에 구원의 문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남겨진 과제라 하겠다. 비기독교인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다고는 하지만 기독교 대중들에게 구원의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학문적 저술을 의도하지 않는다. 마치 대중강연처럼 느껴지는 것은 글의 초고를 작성한 후 대중들과 독회를 반복하면서 수정 과정을 거쳤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의 초상을 그리려던 저자의 계획은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경배의 대상으로 높여짐으로써 정작 우리 삶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역사적 예수를 우리 삶의 자리에 다시 초대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이 책은 예수의 길벗이 되어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다양한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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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선생으로 만나다
한인철 (지은이)청송2016-06-10
목차
1장 왜 역사적 예수인가?-예수믿기에서 예수살기에로
2장 예수의 자리-유대교,헤룻가,그리고 로마제국
3장 예수의 가르침-하나님의 나라
4장 예수의 삶-고통의 치유와 공동식사, 그리고 비폭력적 저항
5장 예수의 동시대인 읽기-함께 아파함과 냉혹한 비판
6장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일벌백계
7장 다시 살아난 예수-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8장 하나님이 된 예수-나케아 별장의 야합
9장 예수 새로 보기-선생 예수
10장 다시 태어나는 기독교인-예수의 길벗
저자 및 역자소개
한인철 (지은이)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서 『종교다원주의의 유형』, 『예수, 선생으로 만나다』를 저술했으며, 『예수는 누구인가』, 『새로 만난 하느님』, 『예수는 어떻게 하느님이 되셨는가』를 번역했다.
최근작 : <그때도, 지금도 그가 옳다>,<예수, 선생으로 만나다>,<종교다원주의의 유형> … 총 11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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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예수의 삶을 돌아보고 , 따르기를 도모하고 싶어지는 책 구매
똘이엄마 2023-03-07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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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예수, 선생으로 만나다, 한인철 저, 청송, 201606, #6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