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던 동광원
평산 심중식 원장님의 안내로 동광원을 둘러 보았다.
나는 동광원을 당시 글을 쓰기 위해 공부했던 정경옥 교수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후 동광원을 마음에 그리기만 하다가 이번 가나안 종교 순례 여정에서 마침내 동광원을 가게 된 것이다.
정경옥 교수는 1930년대 감리교 신학교 교수였다. 감리교신학교에 부임한 지 5년만인 1937년 3월,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교수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진도로 내려갔다. 그는 후에 교수직을 포기하고 낙향한 이유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젖어든 타성과 타협의 생활 습관에서 오는 ‘영적 위기’ 때문임을 밝혔다.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지 5, 6년 동안에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봄이 되면 봄 과정을, 가을이 되면 가을 과정을, 그리고 겨울이 되면 겨울 과정을 해마다 같은 노트에 같은 방법으로 기계를 틀어놓은 것 같은 강의를 반복하는 동안에 해마다 말은 자라나 생명은 죽어서 스스로 독서도 하지 않고 연구도 끊이고 생활에 반성이 없으며 창작력이 진하였다. 날마다 사는 것이 외부에 있어서 광대(廣大)하고 내면에 있어서 외축(畏縮)하는 생활이었다. 나의 영은 나날이 황폐의 여정을 밟고 있었다. 기도를 하여도 마음속에 솟아 나오는 기도가 아니었고 노래를 불러도 혼이 들어있는 노래가 아니었다. 이것이 끊임없이 괴로웠다. 누가 무어라고 말하는 이는 없으나 나로서는 쓴 잔을 마시는 것 같이 괴로웠다. 내 몸이 세상에 알려지고 칭찬하는 소리를 들을 때 마다 나는 더욱 괴로웠던 것이다.”(정경옥, “위기 ․ 흙 ․ 나”, <새사람> 7집, 1937.7, 11~12쪽.)
정경옥은 진도에 내려온 직후 화순 땅에 ‘도인’(道人) 칭호를 받던 수도자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만났다. 예수처럼 살았던 ‘도암의 성자’ 이세종(李世鍾)을 만난 것이다. 정경옥은 진도로 내려 온지 얼마 안 되어 이세종에 대한 소문을 듣고 화순까지 가서 그를 만난 것으로 보이며 그때 만난 이야기를 <새사람>에 “숨은 성자를 찾어”란 제목으로 발표하였다.(정경옥, “조선의 성자: 숨은 성자를 찾어”, <새사람> 7집, 1937.7, 30~37쪽.)
이세종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한국교회사에 어느 정도 상식을 지닌 사람이면 한국의 대표적 개신교 수도공동체인 동광원을 창설한 ‘맨발의 성자’ 이현필(李賢弼) 정도는 안다.(엄두섭, 『맨발의 성자 이현필 전』,) 그 이현필이 “도무지 따라 할 수 없었던” 스승이라 불렀던 인물이 바로 이세종이다.
이세종은 ‘득도’한 후 이름 대신 ‘이공’(李空)으로 불려지길 윈했다. 그는 전남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남의 집 머슴으로 살다가 결혼한 후 악착같이 재산을 모아 동네 부자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자식이 없어 아들을 얻기 위해 산당을 세우고 정성을 드리던 중 성경을 구해 읽고 ‘참 도’를 발견한 후 정성 드리던 것을 폐하고 산당에서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독수도(獨修道)에 들어갔고, 깨닫는 대로 말씀을 실천에 옮겼다.
이세종을 바라보는 정경옥의 경이로운 눈빛은 다음과 같았다.
“공[이세종]은 감각의 세계를 벗어나 영의 사람이 되고 말었다. 그는 동네 뒷산 깊은 암자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고 진리를 명상하는데 몰두하였다. 교회의 전통이나 교파의 신조나 제도의 구속(拘束)을 벗어나 그의 적나라한 영은 하느님의 말씀과 직면할 수가 있었든 것이다. 그는 어느 유명한 학자에게서 계통이 있는 사상의 체계를 전수한 것도 아니오 어떤 성경학자의 주석이나 비판을 참고한 것도 아니다. 그는 성경을 손에 들고 자기의 독특한 해석을 나리우고 성경을 통하여 자기의 독특한 영감을 받았다. 공이 성경을 연구하고 진리를 명상하는 동안 그 자기를 잊어버리고 시절이 바꾸이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철을 따라 옷을 바꾸어 입고 때를 좇아 음식 먹는 것을 잊었다.” <새사람>, 1937.7, 34쪽.)
정경옥은 이세종을 만나면서 도전과 희망을 읽었다. 서울 생활을 하면서 일과 사람에게 시달리고, 터무니없는 모함과 비난을 받으며 마음도 많이 상했지만, 모든 것을 훌훌 털고 고향에 내려 와 흙과 친하게 지내면서 마음을 어느 정도 다스린 후, 화순 땅 천태산 골짜기에서 ‘도를 닦는 예수꾼’ 이세종을 만나면서 자신이 당한 시련과 아픔, 고독과 눈물이 오히려 참 신앙의 길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진도로 돌아와 원서 대신 이세종식으로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예수를 재발견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그는 이러케 살았다』이다. 그가 성경에서 발견한 예수도 한 없이 외로운, ‘고독의 성자’였다.
“한 제자는 그를 밀고하였고 한 제자는 그를 모른다고 하였으며 또 다른 제자들은 예수께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실 동안 잠을 자다가 예수께서 잡혀 가시는 것을 보고 사면에 흩어져 다라났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이 다 어디로 가고 자기 혼자 남아 있다는 것이 외롭다는 것보다 사랑을 주어도 받을 이 없다는 것을 외로워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신앙의 사람이 되려면 세상에서 친구가 없다.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고독의 사람이요 눈물의 사람이다. 선견을 갖인 사람은 군중의 환영을 받지 못한다.
세상은 사랑을 받으려고는 하나 사랑하려고는 하지 아니한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주기만 하면 말없이 떠나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될지언정 사랑을 받으려는 사람은 되지 말라. 세상 사람의 친구가 되기는 할지언정 세상이 너를 친구 삼으리라고 기대하지는 말라. 성도의 운명은 고독과 눈물이었나니 우리도 그 고독, 그 눈물을 맛보아야 한다.”(정경옥, 『그는 이렇게 살았다』, 131~132쪽.)
-(이덕주 교수의 ‘동광원’에 관한 글을 참조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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