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선라이즈’가 낭만적이었다면, 현실은 ‘6번 칸’이지 않을까
등록 2023-03-09
김은형 기자 사진
영화 ‘6번 칸’ 리뷰
험악한 인상·투박한 진심
영화 <6번 칸> 스틸컷. 싸이더스 제공
그렇게 번번이 실망하면서도 또다시 기차를 타면 머릿속이 자동 ‘재부팅’ 된다. 옆자리에 매력적인 누군가가 타지 않을까? 설레는 대화를 하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썸’ 같은 게 이뤄지지 않을까? 이 모든 게 오래전 영화 <비포 선라이즈>(1995) 때문이다. 8일 개봉한 <6번 칸>(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을 두고 미국 영화·연예 잡지 <버라이어티>가 ‘현실판 <비포 선라이즈>’라고 평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핀란드에서 모스크바로 유학 온 라우라(세이디 하를라)는 러시아 최북서단 도시 무르만스크에 암각화를 보러 가기 위해 장거리 기차를 탄다. 며칠 동안 이어질 여정을 함께해야 하는 파트너가 <비포 선라이즈>의 선남선녀 주인공 같은 인물일 리, 물론 없다. 팔뚝에 네오나치 문신이라도 새기지 않았을까 싶은 인상의 남자 료하(유리 보리소프)는 앉자마자 보드카를 부어라 마셔라 하는데, 점잖게 응대하니 성희롱까지 서슴지 않는다. 자리도 바꿀 수 없어 모스크바로 돌아갈까 망설이며 라우라가 건 전화를 받은 애인은 벌써 마음이 저만큼 떠난 듯 시큰둥하다.
영화 <6번 칸> 스틸컷. 싸이더스 제공
시작부터 <비포 선라이즈>와는 다른 냉혹한 현실 버전으로 보이는 <6번 칸>은 모든 면에서 <비포 선라이즈>의 반대말 같다. 화려한 빈과 비교되는 쇠락하고 황량한 러시아의 외곽도시들, 물도 잘 안 나오는 지저분하고 낡은 열차, 외모도 성격도 심란한 료하, 침울한 라우라. 매끈한 할리우드 로맨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투박하다. 어찌어찌해서 료하가 라우라를 다시 만나 고생 끝에 찾아간 무르만스크 바닷가 암각화 풍경도 쓸쓸하다. 족히 영하 30~40도는 되어 보이는 북극의 눈보라 속에서 두 남녀가 터질 듯 새빨갛게 얼어붙은 얼굴로 눈뭉치를 던지면서 자유를 만끽하는 장면은 달콤하고 낭만적이기보단 ‘저러다 얼어 죽지’라는 생각부터 든다.
영화 <6번 칸> 스틸컷. 싸이더스 제공
그런데 그 투박함이, 그 황량함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관습적이고 달콤한 로맨스 드라마에서는 느낄 수 없는 낯선 아름다움이 화면에 가득하다. 어감도 생경한 무르만스크를 비롯해 시간마저 얼어붙은 듯한 도시들의 풍경, 도시의 풍경보다 촌스럽고 (술 깬 뒤) 주눅 들어 있는 료하, 심란한 라우라가 충동적으로 따라간 료하의 중간 행선지에서 우연히 앉게 된 따뜻한 저녁 식탁 등 작은 반전들이 쌓여가며 영화 초반 얼어붙은 관객의 마음을 은근하게 녹인다. 특히 요즘 보기 힘든 35㎜ 필름 카메라에 담긴 화면들은 영화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한껏 고양시킨다. 어둑해지는 하늘에 흩날리는 눈발, 덜컹거리는 기차의 느린 속도에 맞춰 멀어지는 도시의 노랑과 초록 조명이 물감처럼 번져가는 필름 속 풍경은 디지털 화면에서 느끼기 힘든 질감의 서정성을 담고 있다.
영화 <6번 칸> 스틸컷. 싸이더스 제공
라우라는 료하의 투박한 진심에 서서히 마음을 열고 기차가 종착지에 도착할 무렵 서로에 대한 호의를 확인한다. 어떻게 보면 이런 화해가 ‘할리우드 엔딩’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의 관심사는 로맨스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해다. 영화 중간 훤칠한 외모에 기타를 메고 무임승차한 남자는 라우라와 세련된 대화도 하고 아름다운 음악도 연주한다. ‘열폭’한 료하는 괜히 마음 상하고 토라져 더 찌질해 보이지만, 정작 라우라의 뒤통수를 치는 건 이 멀쩡해 보이는 남자다. 낡고, 거칠고, 초라하고, 촌스럽고, 별 볼 일 없음을 표현하는 수많은 단어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는 진심을 모든 풍경과 인물에 담은 <6번 칸>은 2021년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이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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