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소요유, 제물론 내용 요약 | book
무소유 2009. 7. 2. 01:38
http://blog.daum.net/musoeu/1243
글쓰기와 읽기(한금윤 선생님)
0211638 최형지
장자 요약
一. 소요유(逍遙遊)
북녘 바다의 물고기 곤은 새로 변해 붕이 되어 남쪽으로 날아간다. 남쪽으로 날아갈 때는 파도와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면서 6월의 태풍을 탄다. 이 때 붕은 9만리나 올라가는데, 그것은 날개 밑에 바람이 쌓여야만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그만 것들은 이러한 대붕의 넓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즉,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며, 작은 지혜를 큰 지혜에 견주려 함은 어리석은 일이다.
작은 지혜는 자기 시선에서 큰 지혜를 바라보려 하는데, 여기서 둘의 차이가 드러난다. 작은 지혜를 가진 자는 단지 자신 앞에 놓인 상대적인 것을 분별할 뿐이며, 천지자연을 따르고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여 무한한 세계에서 노니는 자는 그런 분별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은하수처럼 계속되는 아득한 이야기도 작은 지혜를 가진 자에게는 허황된 이야기로만 들리는 것이다.
장자와 혜자의 대화에서 혜자는 장자를 고목 나무에 빗대어 쓸모 없는 사람이라 비웃는다. 그러나 장자는 고목 나무에서 한가로이 쉬기도 하고 누가 해를 끼칠 일도 없는 장점을 살려내어 도리어 혜자의 작은 지혜를 비웃는다.
二. 제물론(齊物論)
남곽자기와 안성자위의 대화가 도를 말해준다. 대지가 내쉬는 숨결은 바람인데 이 바람이 일면 인간과 사물의 덧없는 구멍이 울린다. 그리고 이 구멍이 울리면 시비를 일삼고 각종 언쟁이 불붙는 사사로운 일들의 소리가 난다. 그러나 바람을 알아야지 사사로운 소리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 바람이 도이기 때문이다.
큰 지혜는 한가하고 너그럽지만 작은 지혜는 사소함을 따진다. 대립된 감정의 변화, 기쁨, 슬픔, 이것들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려 하지도 말고, 또 그것은 알 수도 없다. 참된 도는 따로 있다. 참된 도는 그런 사사로운 감정의 것들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들의 사사로운 시비에 가려져 진실과 허위가 나오는 것뿐이다. 참된 도는 어디에나 있고 소박한 말도 어디에나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인간의 작은 지혜 때문에 가려지고 파묻힐 뿐이다. 유가와 묵가의 시비 판단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를 넘어서서 큰 지혜, 곧 도를 얻으면 모든 세상의 상대성인 이것과 저것, 죽음과 삶, 시비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성인은 시비가 아닌 자연의 조명에 비추는, 자연에 맡기고 사사로운 것에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게 초월한 절대적인 경지를 도추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 최고의 경지는 애초부터 사물이 없는 경지이다. 그리고 그 다음의 경지는 구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시비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시비가 나오면 도가 파괴되고 그렇게 되면 편애가 이루어지므로 갈등이 생긴다. 그리고 어차피 시비라는 것도 그것을 판단할 척도가 없다. 그러므로 참된 도를 지닌 성인은 자기 판단을 가하지 않고 평상시의 자연스러움에 맡긴다. 참된 도는 한계가 없고 말은 일정한 의미와 내용이 없다. 도를 말로 하면 구별이 생긴다. 성인은 도를 그대로 가슴속에 품고 그대로 내버려두지만 일반인은 도를 자기 밖으로 드러내 보인다. 즉, 구별하는 것은 참된 도를 보지 못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참된 도는 칭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알지 못함에 머물러 있는 것이 최고의 지식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을 아는 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천부(天府)이며 그 경지를 보광이라 한다.
【소요유】逍遙遊
1.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어 그 이름을 곤이라 한다 ⇒ 大와小
북녘 극단 파도속에 거대한 몸집으로 가로질러 있는 곤이란 이름의 물고기이다. 그 거대한 곤이 무지개 극광의 신비로 세월을 겪은 다음, 변신의 때를 맞아 등넓이가 수천리나 되는 큰 새로 변한다. 곤이란 본디 물고기 알이었다. 이 가장 작은 곤을 북극에 검푸른 바다에 사는 거대한 물고기의 이름으로 인용하고 있다.
2. 두더지가 강물을 마신다 해도 그 작은 배를 채우는데 불과하다
⇒ 요리인과 신주
중국의 전설적인 성군인 요와 먼 옛날부터 전하여 오는 허유라는 유덕한 은자(隱者)를 등장시키고 있다. 천자의 자리를 물려 주려는 요임금과 이를 사양하는 허유의 대화를 보면, 요임금왈, "해와 달이 이미 나와 충분히 밝은데 횃불을 끄지 않고 더욱 밝게 하려 한다면 횃불로써 밝게 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는가?" 라고 하자 허유왈, "임금이시여, 나에게는 세상 천하가 아무 쓸모가 없소. 요리사가 비록 솜씨가 없다하여 시축이 주책없이 부엌으로 들어서서 음식을 들고 그를 대신할 수는 없지 않소.”
3.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갓을 밑천 삼아 월나라로 갔지만,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깍고 문신을 하고 있었으므로 갓이 필요 없었다
⇒ 쓸모없는 상품
무위에 세게에 노니는 신인들에게는 요임금의 바른 정치도 별다른 의미가 없다.오히려 이들의 세속에 대한 초월적 자세에 감동된 요임금이 궁궐로 돌아온 후 얼빠진 사람처럼 세상일을 잊게 되었다. 우주적인 위대한 공덕앞에서는 인간적인 영위로 성립된 것은 그 어떤 공덕도 無와 같다.
4. 쪼개어 바가지를 만들자니 평평하고 앝아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 활용방법(생각전환)
무용에서 참다운 유용함과 자유의 가치를 찾아 나서는 세속의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는 장자와 혜자의 이야기이다.
혜자왈, "위왕이 나에게 큰 박씨를 주기에 그것을 심어 잘 길렀더니 다섯 섬들의 열매가 되었네. 쪼개어 바가지를 만들었으나 평평하고 얕아 아무 소용이 없었네. 확실히 크기는 하나 아무 쓸모가 없어 그것을 부수어 버렸네.”
장자왈, "당신은 다섯 섬들이 박을 가졌는데, 어째서 큰 배를 만들어 강호에 띄울 생각은 못하고 그 박이 크고 넓에 쓸모가 없음을 걱정하는 것이오. 이는 곧 선생에게 아직도 뒤엉킨 마음이 있기 때문이오.”
5. 큰 일은 능히 할 수 있을지라도 한 마리의 쥐는 잡지 못한다.
혜자왈, "나에게는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이 이를 개똥나무라 부르오.
굵은 줄기는 혹투성이여서 먹줄도 못치고 작은 가지는 굽어 자를 댈수도 없으니 길가에 서 있어도 목수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소.”
장자왈 "지금 그대의 말도
크기만 했지 아무 소용되는 게 없어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을 거요."
지인은 잔재주를 버려 자연질서와 하나되어 유유히 삶을 즐긴다.
【제물론】齊物論
1.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저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 천뢰를 듣다
남곽자기와 제자인 안성자유의 문답으로 이루어 진다. 여기에서 장자적 절대자인 나를 버린 해탈을 보여주는데, 인간인 우리는 자아의식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또, 땅의 음악을 자연의 교향약이 바람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 하여, 땅위의 온갖 구멍에 부딪히는 저마다 독특한 소리를 내게 하는 무한자를 無라 부른다.
현자는 승패와 득실에 연연치 않으며,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육체적·정신적 건강을 중요시 한다. 작은 지혜의 사람은 물건의 구분이나 차별을 두지않고 그것을 넘어 자연을 따르게 된다. 소문·사광·혜시의 재사들은 밝힐 바가 아닌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밝히려 했기에 오류를 범하게 되는데 그것은 '견백의 궤변'으로 그치게 된다.
2. 위대한 道는 표현할 수 없으며 위대한 이론은 말로써 나타낼 수 없다
⇒ 말의 한계성
도가 드러나면 도가 아니며, 말이 많으면 이르지 못한다. 인이 고정되면 이루지 못하고, 청렴이 깨끗하면 믿음이 없으며 용이 해치면 이루지 못한다. 이 다섯가지는 둥근 것이지만, 지나치면 모난 것이 된다. 이러한 경지를 '드러나지 않는 빛'이라 한다.
도는 작은 성취에 숨기어져 있으며, 말은 화려한 수식 속에 가리워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가와 묵가의 시비가 일게 되어, 상대방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상대방이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이다.
3. 여희(麗姬)같은 미인이라도 물고기는 이것을 보면 깊이 숨어 버린다
⇒ 주관적 가치판단
옛날에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그 먹이로 도토리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침에 세 개를 주고 저녁에 네 개를 주면 어떻겠느냐?" 그 말에 원숭이들이 화를 내자, "그러면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 개를 주마."라고 말하니까, 원숭들이 모두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 명분이나 실제 내용은 달라진 게 없는데도 기뻐하고 화를 내게 된 것 역시 그와 같은 주관적인 심리작용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은 시비의 논쟁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의 균형 속에 여유 있게 머무는데, 그것을 일러 양행 이라고 한다.
4. 꿈속의 현실에서 헤맬 때는 그것이 꿈인 줄을 알지 못한다
사물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버린 이는 모든 작위를 버리고 긍정하는데 이는 곧 '만물 제동의 경지'이다.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입장에서 현실은 꿈이며 꿈은 곧 현실이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우리 삶이 큰 꿈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경지에서는 삶도 죽음도 없다.
5. 나에게는 의지하는 것이 있다
망량과의 대화에서 그림자는 인간의 운명힘을 거역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그림자를 낳고 그림자는 형체에 의존한다고 생각하며 궁극적인 원인으로 본다. 이는 조물주에 의해 만들어졌고 만물이 자연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6. 장주가 나비인가, 나비가 장주인가
⇒ 자아 집착에서 벗어남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자신이 장주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잠에서 깨어나니, 자신은 엄연히 장주였다. 도대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일까? 고기가 되었을 때는 물속 깊이 헤엄쳐 노닐며 죽음이 닥치면 조용히 무덤으로 들어가 편안히 쉬게 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장주와 나비에는 반드시 분별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일러 물화라고 한다. 하지만 나비와 나, 현실과 꿈 사이에 선을 그을 수는 없다. 【소요유】逍遙遊
1.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어 그 이름을 곤이라 한다 ⇒ 大와小
북녘 극단 파도속에 거대한 몸집으로 가로질러 있는 곤이란 이름의 물고기이다. 그 거대한 곤이 무지개 극광의 신비로 세월을 겪은 다음, 변신의 때를 맞아 등넓이가 수천리나 되는 큰 새로 변한다. 곤이란 본디 물고기 알이었다. 이 가장 작은 곤을 북극에 검푸른 바다에 사는 거대한 물고기의 이름으로 인용하고 있다.
2. 두더지가 강물을 마신다 해도 그 작은 배를 채우는데 불과하다
⇒ 요리인과 신주
중국의 전설적인 성군인 요와 먼 옛날부터 전하여 오는 허유라는 유덕한 은자(隱者)를 등장시키고 있다. 천자의 자리를 물려 주려는 요임금과 이를 사양하는 허유의 대화를 보면, 요임금왈, "해와 달이 이미 나와 충분히 밝은데 횃불을 끄지 않고 더욱 밝게 하려 한다면 횃불로써 밝게 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는가?" 라고 하자 허유왈, "임금이시여, 나에게는 세상 천하가 아무 쓸모가 없소. 요리사가 비록 솜씨가 없다하여 시축이 주책없이 부엌으로 들어서서 음식을 들고 그를 대신할 수는 없지 않소.”
3.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갓을 밑천 삼아 월나라로 갔지만,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깍고 문신을 하고 있었으므로 갓이 필요 없었다
⇒ 쓸모없는 상품
무위에 세게에 노니는 신인들에게는 요임금의 바른 정치도 별다른 의미가 없다.오히려 이들의 세속에 대한 초월적 자세에 감동된 요임금이 궁궐로 돌아온 후 얼빠진 사람처럼 세상일을 잊게 되었다. 우주적인 위대한 공덕앞에서는 인간적인 영위로 성립된 것은 그 어떤 공덕도 無와 같다.
4. 쪼개어 바가지를 만들자니 평평하고 앝아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 활용방법(생각전환)
무용에서 참다운 유용함과 자유의 가치를 찾아 나서는 세속의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는 장자와 혜자의 이야기이다.
혜자왈, "위왕이 나에게 큰 박씨를 주기에 그것을 심어 잘 길렀더니 다섯 섬들의 열매가 되었네. 쪼개어 바가지를 만들었으나 평평하고 얕아 아무 소용이 없었네. 확실히 크기는 하나 아무 쓸모가 없어 그것을 부수어 버렸네.”
장자왈, "당신은 다섯 섬들이 박을 가졌는데, 어째서 큰 배를 만들어 강호에 띄울 생각은 못하고 그 박이 크고 넓에 쓸모가 없음을 걱정하는 것이오. 이는 곧 선생에게 아직도 뒤엉킨 마음이 있기 때문이오.”
5. 큰 일은 능히 할 수 있을지라도 한 마리의 쥐는 잡지 못한다.
혜자왈, "나에게는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이 이를 개똥나무라 부르오.
굵은 줄기는 혹투성이여서 먹줄도 못치고 작은 가지는 굽어 자를 댈수도 없으니 길가에 서 있어도 목수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소.”
장자왈 "지금 그대의 말도
크기만 했지 아무 소용되는 게 없어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을 거요."
지인은 잔재주를 버려 자연질서와 하나되어 유유히 삶을 즐긴다.
【제물론】齊物論
1.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저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 천뢰를 듣다
남곽자기와 제자인 안성자유의 문답으로 이루어 진다. 여기에서 장자적 절대자인 나를 버린 해탈을 보여주는데, 인간인 우리는 자아의식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또, 땅의 음악을 자연의 교향약이 바람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 하여, 땅위의 온갖 구멍에 부딪히는 저마다 독특한 소리를 내게 하는 무한자를 無라 부른다.
현자는 승패와 득실에 연연치 않으며,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육체적·정신적 건강을 중요시 한다. 작은 지혜의 사람은 물건의 구분이나 차별을 두지않고 그것을 넘어 자연을 따르게 된다. 소문·사광·혜시의 재사들은 밝힐 바가 아닌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밝히려 했기에 오류를 범하게 되는데 그것은 '견백의 궤변'으로 그치게 된다.
2. 위대한 道는 표현할 수 없으며 위대한 이론은 말로써 나타낼 수 없다
⇒ 말의 한계성
도가 드러나면 도가 아니며, 말이 많으면 이르지 못한다. 인이 고정되면 이루지 못하고, 청렴이 깨끗하면 믿음이 없으며 용이 해치면 이루지 못한다. 이 다섯가지는 둥근 것이지만, 지나치면 모난 것이 된다. 이러한 경지를 '드러나지 않는 빛'이라 한다.
도는 작은 성취에 숨기어져 있으며, 말은 화려한 수식 속에 가리워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가와 묵가의 시비가 일게 되어, 상대방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상대방이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이다.
3. 여희(麗姬)같은 미인이라도 물고기는 이것을 보면 깊이 숨어 버린다
⇒ 주관적 가치판단
옛날에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그 먹이로 도토리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침에 세 개를 주고 저녁에 네 개를 주면 어떻겠느냐?" 그 말에 원숭이들이 화를 내자, "그러면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 개를 주마."라고 말하니까, 원숭들이 모두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 명분이나 실제 내용은 달라진 게 없는데도 기뻐하고 화를 내게 된 것 역시 그와 같은 주관적인 심리작용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은 시비의 논쟁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의 균형 속에 여유 있게 머무는데, 그것을 일러 양행 이라고 한다.
4. 꿈속의 현실에서 헤맬 때는 그것이 꿈인 줄을 알지 못한다
사물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버린 이는 모든 작위를 버리고 긍정하는데 이는 곧 '만물 제동의 경지'이다.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입장에서 현실은 꿈이며 꿈은 곧 현실이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우리 삶이 큰 꿈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경지에서는 삶도 죽음도 없다.
5. 나에게는 의지하는 것이 있다
망량과의 대화에서 그림자는 인간의 운명힘을 거역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그림자를 낳고 그림자는 형체에 의존한다고 생각하며 궁극적인 원인으로 본다. 이는 조물주에 의해 만들어졌고 만물이 자연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6. 장주가 나비인가, 나비가 장주인가
⇒ 자아 집착에서 벗어남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자신이 장주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잠에서 깨어나니, 자신은 엄연히 장주였다. 도대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일까? 고기가 되었을 때는 물속 깊이 헤엄쳐 노닐며 죽음이 닥치면 조용히 무덤으로 들어가 편안히 쉬게 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장주와 나비에는 반드시 분별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일러 물화라고 한다. 하지만 나비와 나, 현실과 꿈 사이에 선을 그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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