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8

[영성신학] - (1)`본질 및 학문적 영역`

에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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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2008. 1. 23.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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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신학의 본질 및 학문적 영역*




1. 영성이란 ?







1) 구약성서에 나타난 ‘영’이란 무엇인가 ?

구약성서에서 ‘靈’은 히브리어로 ‘ruach'로 나타난다(희랍어로는 ονευμα, 라틴어로는 anima). 이는 숨, 바람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생명의 원리를 상징하고 있다(히브 1,7; 요한 3,8). 창세기에서 ‘ruach’는 하느님께서 진흙을 빚어 인간을 만드신 후 입김을 불어 넣어 주었다는 데서 나오며, 이는 인간 생명의 근원임을 드러내 준다. 또 이 입김은 인간의 감정, 의식, 정신, 마음을 지배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입김이 없다면 인간은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다.

인간의 마음을 영혼의 기능들의 집합이라 할 때 마음은 자연 생명이 갖는 자연적 조건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무엇에 의해 지배받느냐야 따라 그 표출 방식이 달라진다. 즉 마음이 欲情에 의해 지배를 받느냐, 아니면 하느님의 靈에 의해 지배를 받느냐 하는 문제이다.

인간에게 입김을 불어넣는다 함은 자연적 인간 안에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생명을 불어 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초자연적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2,7에서는 ‘입김’을 하느님의 현존, 창조의 기원으로 제시하고 있다(창세 6,17; 숨).

이스라엘 백성은 가난안 땅에 정착하여 이민족과 많은 전쟁을 치루게 되는데, 이 때 백성의 지도자로 나타나 민족을 구한 판관들은 일시적으로 야훼의 靈을 받아 초인적인 지혜와 힘을 발휘한다. 이렇게 볼 때 靈이란 인간 안에 들어가서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의 뜻에 따라 살도록 해주는 야훼의 靈이다.

또 야훼의 靈을 받은 사람은 도유의식을 통해 신성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기름을 바르는 순간 그는 자신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의 삶을 산다는 정신을 갖게 된다. 즉 야훼의 靈이 그 사람을 완전히 사로 잡고 온 존재를 감싸주는 것이다.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이 靈은 충격적인 예언활동을 가능케하는 힘으로 등장한다. 또 야훼의 靈은 이스라엘을 윤리적으로 형성시킨다. 야훼의 靈은 참회와 겸손과 덕성과 평화를 주고,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는 지혜를 준다(지혜 9,17). 야훼의 靈은 이스라엘을 淨化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며(에제 36,26-27), 백성 전체에게 야훼의 靈이 주어진다. 또 구약성서에서 야훼의 靈은 하느님의 힘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볼 때 구약성서에서는 야훼의 靈에 따라 사는 삶을 靈性生活이라 할 수 있다.




2) 신약성서에 나타난 ‘영’이란 무엇인가 ?

신약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의 靈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계하고(루가 1,5-25), 마리아의 예수 잉태 사건에도 관계된다(루가 1,35). 또 세례자 요한은 靈의 도우심으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인지하게 된다(요한 1,32-34).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의하면 메시아는 聖靈과 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며(마태 3,11), 예수의 세례 때에도 靈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나타났다(마태 3,13-17). 즉 예수의 세례는 그가 성령으로 충만한 메시아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루가 4,14). 또 예수는 靈의 힘으로 당신을 유혹하는 마귀를 쫓으셨다(마태 4,11). 이는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내는 외적 표징으로 이해된다. 즉 惡의 세력이 물러나고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하느님의 靈이 작용하고 계심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의 모든 말씀은 창조적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 능력은 야훼의 靈에서 나온다.

이러한 靈은 지금 우리 안에서도 現存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과 함께 있는 협조자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靈이 제자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한 14,16). 부활한 예수는 인간성의 나약함을 초월하여 성령으로 사는 靈이 되셨다. 예수의 부활은 바로 時空의 제한에서 초월함을 의미한다. 예를들면 겁에 질러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가 나타나신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요한 20,19-23). 이는 곧 육체적 제한을 벗어남을 의미하며, 동시에 시간적 제약을 초월해 지금 여기에 현존하고 계심을 뜻한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힘에 의해 부활하신 후 이제는 당신 자신이 그 靈을 주는 자로 변신하신다. 승천과 함께 빠라끌리또 성령을 약속하신다. 이는 지상적 現存樣式을 바꾸심을 의미한다. 회개하고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통해 그 인간 안에 그리스도께서 居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는 생명을 주는 자로서 성령의 부여자가 되신다(1고린 15,45).

우리가 하느님의 靈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 자연적 생명안에 靈의 부여로 말미암아 자연적 조건들이 완성되기 시작됨을 의미한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은총이 인간을 완성한다고 표현하였다. 세례로 그리스도의 靈을 받아 사는 사람을 신앙인이라 한다.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와 일치하려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靈(그리스도의 뜻)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3) 그리스도교적 영성이란 ?

요한 복음 3장 6절에 보면 “肉으로부터 난 것은 肉이고 靈으로부터 난 것은 靈입니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肉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본능적인 행위로 이기적이다. 그리고 肉의 원천은 원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肉의 열매(행실)로는 “음행, 부정,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원한, 싸움, 시새움, 분노, 모략, 불목, 분열, 질투, 술주정, 폭음 폭식”(갈라 5,19-21) 등이 있고, 靈의 열매로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착함, 신용, 온유, 절제”(갈라 5,22-23) 등이 있다. 肉을 따라 사는 데는 충만성과 여유가 없는 반면, 靈을 따라 사는 사람은 충만함과 여유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영성, 즉 靈을 따라 사는 삶은 신앙인의 본질적 요소이다. 일반적 영성이란 인간 행위를 유발하는 어떤 태도나 정신을 뜻하지만, 가톨릭적 영성 개념은 인간을 신앙인으로 살게 하는 정신, 즉 하느님의 계시와 구원신비 전체(하느님의 靈)를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교적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聖三位에 이르는 것이다. 聖三位의 삶에 일치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 안에서 완성된 생명의 원리인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이 靈은 씨앗의 형태로 우리 안에 풍성하게 존재하게 되며 그럴 때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우리 마음 안에 뿌려진 이 靈의 씨앗은 구체적으로 信望愛를 통해 배양된다. 이는 하느님만을 믿고, 그분에게만 희망을 두며, 그분만을 사랑하는 생활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 참고로 聖化恩寵에는 주부덕과 성령의 은사가 포함되고, 주부덕에는 向主三德과 윤리덕이 포함된다.




2. 영성신학이란 ?


1) 영성신학의 발전과 용어적 의미

영성신학이란 신앙인들의 초자연적 생명이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도록 그 원리 원칙과 방향을 제시해 주는 학문이다. 처음에는 客觀的 靈性과 主觀的 靈性으로 구분되었다. 객관적 영성이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믿음과 인식의 측면에서 다룸을 말한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계시, 구원론, 그리스도론, 교회론, 성서학, 성사론 등의 학문이 포함되며 모두 하느님께 대한 이해 인식에서 비롯된다. 이에 비해 주관적 영성은 하느님의 계시를 인간이 받아들이는 측면에서 다룬다. 즉 삶을 통해 신앙 안에서 키워나가며,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다룬다.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인식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으로서 삼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실천이 따라야 한다. 또 한 영혼이 정상적 발전을 위해서는 이 두 영역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의신학에서 배우는 모든 것을 습득했다고 해서 조화로운 영혼이라 볼 수 없고, 반대로 이것을 모르고 봉사만 한다면 이는 인간적 봉사의 차원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과 삶은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된다.

12,3세기까지는 객관적인 영성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교의신학으로 발전하였다. 주관적 영성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응답할 수 있는 인간?? 내면적 정신에 의해 처음에는 심리학적 영역에 치중했다. 그러다가 트렌트 공의회 이후 이단설에 대항하여 진리의 깊은 연구 필요성에 따라 전문영역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18세기에 와서 주관적 영성은 修德神學과 神秘神學으로 구분되었다.

여기서 수덕신학이란 개인적 노력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 完德을 추구하는 삶을 의미한다. 신비신학은 은총의 작용하에 영혼이 수동적으로 하느님과 일치되어 가는 삶을 말한다. 이 둘의 관계에 있어서 시간적으로 前後를 구별할 수 없는데 이는 끊임없이 교차되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수덕 차원의 과정 안에서 하느님의 도우심과 은총이 함께 할 때만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용어상으로 수덕적이란 말은 그리스어의 ‘askeein’에서 유래한다. 이는 어떤 기술, 특히 운동 기술을 숙달하기 위하여 연습하고 훈련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후에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용어를 철학연구나 덕행실천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사도 바울로는 크리스찬 생활의 덕행을 위한 노력에 이 용어를 사용한다. 아울러 그리스도인의 덕행실천과 운동연습을 자주 비교하며 설명하였다(1고린 9,24-27; 필립 3,13-14; 2디모 4,7).

신비적이란 용어 역시 그리스어의 ‘mystikos’에서 유래된 것으로, 오직 신입 신자들에게만 알려지는 은밀한, 혹은 감추어진 전례를 가리킨다. 신약성서에서 사도 바울로는 인류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비밀 - 어떤 이야기 속의 숨겨진 상징적 의미, 혹은 그 작용이나 능력이 알려지지 않은 그 무엇 - 을 의미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신비신학이란 용어는 6세기 초 「신비신학에 관하여」의 저자인 僞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에 의해 서방신학에 소개되었는데, 여기서 그 개념이 神에 관한 체험적이고, 직관적인 지식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 후 이 단어는 점차로 관상이라는 뜻과 동일시되었다. 현대에 와서 도미니꼬회 회원인 레지날드 가리구-라그랑즈(Garigou Lagrange)는 크리스찬 完德이 수덕과 신비의 단계를 포함하지만, 完德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이며, 신비적 생활은 비상한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세례 때 모든 크리스찬이 받게 되는 은총의 정상적인 발전과 완성이라고 정리하였다.

결국 수덕신학과 신비신학 모두를 영성신학이라고 말한다. 구분을 하자면, 수덕은 입문에서 관상 전까지, 신비는 주입적 관상에서 수동적 정화, 일치까지를 취급한다. 이는 실존적인 차원에서 영성생활이 어느 순간에든 수덕적인 면이나 또는 신비적인 면이 우세하기 때문에 둘의 구분이 합리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성신학에서는 이 수덕과 신비 둘을 구별없이 포함한다. 왜냐하면 신비현상은 수덕현상 없이 이해될 수 없고,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수덕현상은 그 자체 안에 신비 체험의 씨앗을 이미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영성과 신학

신학은 하느님에 관한 학문이다. 그리고 신학은 자연신학과 초자연적 신학으로 구분된다. 자연신학이란 인간의 이성으로만 하느님을 깨닫고 탐구하는 신학을 의미하고, 초자연적 신학이란 하느님의 계시에서 출발해서 그 내용을 고찰하고 신앙의 진리에 대한 결과를 연역하는 신학이다. 초자연적 신학은 흔히 교의신학과 윤리신학으로 구분된다. 교의신학은 계시된 신비들, 특히 삼위일체, 말씀의 강생, 구속, 성체성사와 다른 여러가지 성사들, 그리고 미래의 삶 등을 취급한다. 윤리신학은 인간의 행위, 계시된 교훈과 권고들, 은총, 신학적 및 윤리적인 크리스찬의 덕행들, 계시로써 알려진 초자연적 목적을 지향하는 행동원리인 성령의 은사들을 취급한다.

이와같이 이해된 윤리신학은 분명히 인간을 최상의 성덕으로 인도하는 데 필요한 원칙들을 포함한다. 영성신학은 이렇게 광범위한 윤리신학을, 인간이 하느님과 더욱 밀접하게 일치할 수 있도록 지도하기 위해 응용한 것에 불과하다. 수덕신비신학은 그리스도교 교리가 크리스찬 덕행 및 성령의 은사의 본질과 특성에 관해 가르치는 바를 전제하고, 完德의 견지에서 그리스도적 덕행의 발전법칙과 조건을 연구한다.

수덕신비신학은 최고의 덕행실천과 성령께 대한 완벽한 순종을 가르치고 하느님과의 일치생활로 인도하기 위해 교의신학과 윤리신학의 모든 지식을 총망라한다. 이리하여 전자는 후자를 최대한으로 응용하고 후자의 왕관이 된다.

영성신학이 포함하고 있는 요소로는 첫째 영성체험의 심리학적 자료, 둘째 신학원리의 적용, 셋째 크리스찬 完德의 관점에서 본 영성생활의 진보에 관한 실천적 지침 등이다. 이러한 자료가 신학원리와 통합될 때 영성생활의 보편성을 발견할 수 있고, 이것은 동시에 그리스도교 完德의 실천적 지침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즉 종말론적 영성과 육화적 영성이 그것이다. 종말론적 영성이란 이 세상을 죄와 고통으로 보고 여기서 구원될 방법으로 언제 도래할지 누구도 모르는 종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신자들의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기에 합당한 준비를 늘 갖추도록 강조한다. 다분히 현세 이탈적이기에 침묵과 관상을 강조하고 자기성화와 完德을 강조한다. 또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와 죽음에 동참하도록 권고한다. 이는 교회의 전통적 영성으로 수도회의 경우 관상수도회가 포함된다. 여기서는 특히 하느님의 사랑이 강조되고 있다.

다음으로 육화적 영성이란 그리스도께서 육화하신 것은 죄와 고통, 죽음의 세계에 오셔서 이것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세상을 피할 것이 아니라 신적 질서로 바로 잡아 구원시킬 대상으로서 세상을 바라본다. 따라서 세상을 올바르게 인도하여 성화시키고 구원시키도록 촉구한다. 결국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육화적 영성은 그리스도의 육화의 완성인 부활에 참여하는 영성이다. 따라서 사랑과 봉사활동, 노동의 가치, 사회생활 등을 강조하고, 신앙 안에서 행동하는 실천적 특성을 지닌다. 그리고 여기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강조된다.

이 두 측면은 다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종말론적 영성만을 강조한다면 현세를 부정하게 되고, 육화적 영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하느님과 자신의 뜻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이둘을 조화시킬 필요가 있다.




3) 영성신학의 정의

용어적인 측면에서 영성신학은 내적 생활, 초자연적 생활, 수덕신비신학, 完德 신학 등 다양한 말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지향점은 동일하다. 내용적 측면에서 영성신학은, 신적인 계시진리와 개개인의 종교체험에서 시작하여, 초자연적 생활의 본질을 밝히고, 그 성장과 발전을 위한 지침을 규정하며, 영성생활의 시초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영혼들의 진보과정을 설명하는 신학의 한 영역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와같이 신학의 한 분야로서의 영성신학은 그 방법에 있어서 순수 이론신학과는 다른 실천 혹은 응용신학을 택하고, 주제에 있어서는 크리스찬의 完德과 기본 원리들을 대상으로 한다.

신학은 초자연적 신앙의 눈을 통해 계시진리를 이성적인 추리과정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탐구한 신학의 내용은 심리학적 자료들이 계시진리의 영역을 언급할 때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될 때는 실천적 지침이 될 수 있다.

영성신학은 개개인의 종교체험에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영성신학이 실천적 응용신학이기에 영성신학의 법칙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이용하게 된다. 따라서 영성생활을 다루는 신학자는 특히 심리학을 비롯해서 자연과학의 많은 자료들을 직접 취급해야 하기 때문에 종교체험의 본질과 현상을 연구할 때에는 신학의 교도적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영성신학을 초자연적 생활의 본질을 밝히는 신학이라 정의하는데, 여기서 신학자는 계시진리와 교회의 가르침 및 조직신학의 결론들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한다. 따라서 크리스찬 完德의 본질과 은총생활, 주입덕행 및 성령의 은사의 작용 등과 같은 문제에 초점을 두고 탐구해야 한다.

영성신학은 영성생활의 성장과 발전을 다루는 법칙과 지침을 규정하기도 한다. 영성신학은 경험적 자료보다는 계시진리 및 신학적 결론과 밀접하게 관련된만큼 그 연구방법이 경험적이고 서술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학문적이고 사변적이다. 이렇게 해서 보편적인 법칙들이 밝혀지고 설명될 때 비로소 평신도의 영성과 사제의 영성, 수도생활의 영성, 혹은 전례적 영성 같은 특수형태의 영성을 논하고 평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영성신학의 분야(지침)는 죄악과 유혹, 능동적 및 수동적 정화, 성사, 선행 및 기도의 단계 등의 내용을 취급한다.

또 영성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의 시초부터 그 完德에 이르기까지 정상적으로 거쳐 가는 과정을 서술한다. 이렇게 영성생활의 진보 과정을 설명해 줄 때 구도자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별력을 터득하게 된다.




최민순 신부님에 의하면, 영성신학은 영성생활을 다루는 신학의 한 부분으로서 성세 때 받은 하느님의 생명, 즉 사랑을 가꾸어 완전하게 만드는 학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끝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으며, 창조되지 않은 은총의 선물을 받았다. 이 초자연적 덕인 생명의 덕은 영혼의 능력인 지성과 의지, 기억에 가해져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도록 빛을 준다. 이 하느님의 생명은 만약에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되면 상실하게 되며 그 때 인간에게 남는 것은 본성뿐이다. 즉 하느님의 사랑이 미칠 수 없는 자연인으로서 남게 되는 것이다. 범죄함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을 상실한 인간은 자연법에 따라 덕은 행할 수 있지만 초자연적 덕행을 실천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두번째 창조를,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역사를 시작하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구원은 인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객관적인 구원이 나의 구원, 즉 주관적인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세례를 통해 가능하다. 그러므로 아담이 잃은 은혜가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초자연적 삶에로의 성장이 가능해졌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아 하?윱纛? 생명을 가꾸고 완전케할 능력을 받았다. 여기서 열매를 맺도록 해 주는 것이 바로 영성신학이다.

자연인은 영혼의 능력들이 성장하여 성인이 되지만, 초자연인은 영혼의 능력에 가해진 은총에 의해 성장하고 영혼의 능력을 완성시킨다. 따라서 자신 안에서 성장하는 信望愛를 따라, 은총도 성장한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덕에는 자연덕과 초자연적인 덕이 있다. 자연덕이란 단순한 자연적 습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자연덕은 영혼의 여러 기능에 편이함을 줄 뿐이다. 그러나 초자연적 덕은 영혼의 능력에 가해진 습성이요 주입된 덕이다. 이러한 초자연적덕(信望愛)이 주입되어 영혼의 기능들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며, 영혼의 기능을 보완하고 완성시켜 준다.



[주님 저 하늘 펼치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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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다시래기(Hodie Mihi Cras Tibi)
글쓴이 : FireBall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