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2

CK Park - 평화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오랫동안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전쟁은 다른 이의...



(21) CK Park - 평화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오랫동안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전쟁은 다른 이의...





CK Park
20 July at 09:53 ·



평화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오랫동안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전쟁은 다른 이의 생명을 살상하고 다른 이의 것을 빼앗는 행위를 당연시한다. 고대사회에서의 전쟁은 야만 그 자체였다. 전쟁에서 이긴 편은 남자들은 무참하게 학살하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노예로 삼았다. 그 잔인한 전쟁의 역사는 오직 평화로만 잠재울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부재한 상태가 평화라는 생각은 매우 폭력적인 평화를 말하는 것이다. 상대를 진압하여 얻는 평화는 승자 독식의 평화였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평화와 서구 사회에서의 평화를 살펴보다 보면 아시아인의 평화 이해가 매우 전근대적이고도 비인간적이라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서구 사회를 비판하는 아시아 학자들은 아시아의 정신적 풍요를 낭만화하며 그 우월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심원한 유불선의 유산을 생각하면 그리 틀린 것은 아닐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는 서구 사회가 가지는 이웃에 대한 적대성과 우리가 경험한 이웃에 대한 적대성에는 큰 차이가 있다. 즉 이웃을 이해하는 방식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유럽의 역사에서 평화 사상의 원류를 찾아보면 기원전 그리스 세계에서 형성되었던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각축전의 성격과 그 시대에 그들이 꿈꾸었던 평화 사상을 만나게 된다. 소규모의 도시국가들이 각축전을 벌이다가 강력한 페르시아나 마케도니아 세력의 위협을 받게 되자 도시국가의 지도자들은 상대를 살육과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생각을 버리고 공존의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거기서 나온 개념이 에이레네, 평화다. 그러니까 이웃을 나와 같은 인간, 나와 같은 생존권, 나와 같은 삶의 의지를 가진 인간이라고 바라보는 데에서 평화 사상이 싹튼 것이다.

다양한 차이와 일방적인 집단의 욕망을 넘어서 서로가 인간, 동류라는 의식은 서구 사회에서 평화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 되었다. 물론 그들 역시 종족주의적인 우월성, 그리고 이질 집단을 향한 비하와 멸시의 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갈등과 투쟁,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를 극복하기 위하여 그들은 서로의 생존을 보장하는 원칙을 평화의 근본 요건으로 삼았다. 그리스 도시국가 중에서 자웅을 겨루던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등과 같은 도시국가들의 지도자들은 평화협약을 맺을 때 불가침의 조건만 내건 것이 아니었다. 상대의 생존을 보장하는 원칙을 반드시 포함시켰다. 평화의 약속은 상대를 향한 인도주의적인 생존 보장 약속이 담겨있었다. 보급로를 끊는다든지, 용수로를 차단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이런 인도주의적인 정신에 바탕을 둔 평화 사상이 모든 영역에서 보편적으로 시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근동 아시아 지방에서 형성된 야훼종교는 가장 포악한 전쟁사를 기록한 문서를 남기고 있다. 그것이 성서다. 야훼 백성이라 자인하는 이스라엘 집단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했다. 그들은 상대편이라면 남녀, 노소, 짐승의 새끼까지 죽이는 족속이었다. 원시 유대교의 포악은 갈멜산 위에서 광기에 사로잡힌 야훼 제사장들이 이교도들을 살육하는 피튀기는 장면에서 극을 이룬다. 그들은 상대를 자신들과 같은 존재라고 여기지 못했다. 이런 이들이 가진 평화 사상이란 정복과 잔인한 살상 이후에 얻는 “피 묻은 평화”였다. 야훼 종교의 한 얼굴이다.

하지만 성서의 전통에는 피 묻은 평화 사상만 담겨있는 것이 아니다. 성서에는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의 평화, 자기들만의 평화를 측정하는 기준도 있었다. 거기에서 샬롬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샬롬은 일종의 복지적 개념이다. 몸과 마음과 관계의 평화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유대인들이 이러한 샬롬 사상을 자기네 족속에게만 적용하곤 했다는 것이다. 샬롬 평화 사상을 종족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넘어 보편적으로 확대하여 새롭게 해석한 종교가 예수의 사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독교다.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구약 성서에 나타난 피 묻은 평화를 영적 전투라 해석하며 호전적인 선교론을 제창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거짓 교사들에게 속아 피 묻은 평화를 주장하며 포악해지는 기독교인들은 매우 잘못된 가르침에 세뇌된 것이다.

예수는 모든 형태의 국가주의나 종족주의적, 심지어 영적 전투를 빙자한 종교적인 폭력을 거부했다. 예수는 고위 유대 종교가 버린 사람들을 친구라 불렀다. 그는 부유한 사람들이 멸시하는 가난한 이의 이웃이 되었고, 거룩함을 자랑하는 종교인들과는 달리 거룩하지 못한 사람으로 간주하던 이들의 친구였다. 민족적 순수라는 우월성에 사로잡혀 이교적 문화를 수용한 이들을 저급한 존재로 여기던 전통도 여지없이 깨뜨리신다. 이 예수가 가르치신 평화는 인종, 신분, 소유, 권력을 통해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아름다운 평화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이 이 예수의 평화를 안이하게 여긴다. 그저 주어지는 것이라고 여기고, 그러한 평화를 위한 실천적 지평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사실, 예수의 평화는 무수한 차별과 적대성과의 싸움을 의미한다. 예수는 유대 종족주의와 싸웠고, 권력자들과 대립했으며, 종교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이들과 등졌다. 예수는 자애롭고 평화로운 부처의 미소를 가지지 않았다. 그는 수행자이기도 했지만, 수행자만이 아니었다. 그는 논쟁했고, 심지어 다투기도 했으며, 제자들을 향하여 엄격하기도 했다. 그에게서 평화란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훼손하는 악과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아침 일본군들의 성노예로 살아가신 다섯 분의 이야기를 읽었다. 남의 나라 사람이면 강제로 잡아다가 가두어 두고 집단 성폭력을 하고, 성노예로 삼아도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추악한 도덕성의 희생자들이다. 일본인은 자신의 누이나 어머니도 일제 군사의 성욕의 하수구로 삼았을까? 어쩌다가 그리스인들이 기원전에 인식한 평화 사상의 근간, “나도 그대도 사람이라는 인식”이 일본인들에게서는 19세기가 넘도록 형성되지 못했을까? 그리고 이런 일본인들이 범한 전쟁범죄를 박정희의 대일청구권 행위 하나로 면탈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국인이 할 수 있을까?

일군 성노예로 살아가셨던 이들은 그 고되고 수치스러운 악몽으로 남아있는 기억을 더듬어 증언했다. “주말이면 그들이 트럭을 타고 와 수십 명이 줄을 서서 문밖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렸어요...” 짐승들의 세계가 아닌가? 세상의 어느 군대가 이런 조직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성을 범한단 말인가? 자신의 누이나 어머니가 일제 군인들에게 할머니들이 겪었던 집단 성폭력을 수개월 혹은 수년 동안 겪었다면, 자신의 아버지를 일제가 끌고 가 개처럼 학대하며 징용살이시켰다면 그렇게 만만하게 용서하라고 할 수 있을까?

일제 성노예로 살아갔던 김군자 할머니는 해방된 후 자신이 모은 돈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기부했다. 한번은 5,000만 원, 또 6,000만 원, 그리고 1억 원을 모두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학비로 써달라고 내놓았다. 가난때문에 자기처럼 못 배워 자기 권리를 박탈당하는 일이 없도록 가난한 학생을 도우라고 내놓은 것이다. 이런 할머니가 지금 일본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받기 위해 항의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가공할 몹쓸 짓을 집단으로 범하고서도 모른 척하는 일본인들의 비양심을 드러내며 진정한 사죄를 요구하는 것일까?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많은 이들이 일본과의 선린우호 관계에 이상이 왔다며 적당한 평화를 주장한다. 거기에는 속내로 경제적인 이유, 과학기술의 의존성, 혹은 개인적인 일본과의 친분 등을 이유로 든다. 할머니들의 인간의 존엄성을 바닥까지 부정한 집단에게 슬쩍 돈으로 퉁 치려던 박정희나 그의 딸 박근혜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그것이 그대가 바라는 평화인가? 평화는 일본인들이 사악한 제국주의적 망상에 사로잡혀 전쟁을 벌이며 조선인의 인간의 존엄성을 토탈 부정한 행위가 잘못된 것이었다는 자인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참회한 것이 아니다. 돈 문제로 보상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라는 것을 일러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평화는 돈 주고 사는 것도 아니다. 적당히 퉁치는 데에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피차 사람의 얼굴로 서로를 인간으로 바라볼 때 찾아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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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Kang-nam Oh, Sung Luke Kim and 13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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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구 참된 평화는 평강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가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닐까요?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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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 Park 김진구 네 강한 자, 사자가 약자, 어린 양을 먹잇감으로 바라보지 않는 관계가 평화의 상징적 의미지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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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d

이의용 고맙습니다.
깨우쳐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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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애 교수님 글 소중히 읽고 가슴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늘 가슴한켠이 아린 구약성경의 내용이 있습니다 왜 가나안 사람들을모두 죽이라고 하셨는지요? 이스라엘의 정복전쟁의 전멸방법이과연 하나님의 방법이었을까요? 이방사람과 같은 잔인한 살육인 듰싶어서요 신약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맞지 않고요~20대의 제 딸은 구약의 이스라엘의 나라세우는 방법들에 대한 회의가 많습니다 구약엔 폭력이 아주정당하게 그려지고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저와 제딸은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에대한 이해에 가끔 혼란이 옵니다~ 첫 댓글에 어려운 질문을드려죄송합니다~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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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 Park 조경애 성서는 다양한 자료를 묶은 책이고, 각 자료들의 저자와 사회적 맥락이 다르지요. 문자적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좋은 주석서를 구해 함께 읽으셔야 조금은 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요. 이 주제와 관련된 제 책을 읽어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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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d

Byung Jik Kim 참으로 귀한 말씀을 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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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h

Paul Ji 격하게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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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자 이런 역사를 알아야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시대에 살면서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아픔입니다.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잡기 위해서 역사를 바르게 인식해야되고 크리스찬은 정신 좀 차려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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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재 누구든 남여노소, 이념과 종교를 불문하고
"#사람의얼굴로 #서로를인간으로 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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