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06

미국에서 남북을 잇다 -재미동포 평화운동가 이행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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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앤피플 15] 미국에서 남북을 잇다 -재미동포 평화운동가 이행우 선생-
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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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남북을 잇다
-재미동포 평화운동가 이행우 선생-


"좋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시작하면 돈은 따라옵니다. 남북이 화합하고 통일해서 평화로 갈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통일과 평화를 위한 활동가로 일생을 매진한 이행우 선생은 올해 85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찬 목소리였다. 한반도의 중요한 고비마다 막후에서 미국과 남북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해왔던 이 선생은 여전히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고민하는 살아있는 활동가였다.

이행우 선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퀘이커(Quaker)다. 이 선생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60년 동료 교사의 소개로 퀘이커의 존재를 알게 됐다.

"고향인 전라북도 익산에서 고등학교 수학교사로 재직 중이었어요. 그런데 같이 근무하던 영어 선생님이 퀘이커교를 믿고 있었어요. 익산에서 2년 있다가 서울로 근무지를 옮겼는데 그 영어 선생님도 비슷한 시기에 서울로 올라와서 저랑 같은 학교에 부임했어요. 그러더니 느닷없이 퀘이커 모임에 같이 가자고 하더라구요.

저는 처음에 '예수쟁이들 모이는 거 아니야? 안 갈래'라고 했는데 이 선생님이 다른 예수쟁이들이랑은 다르다면서(웃음) 살살 꼬시더라구요.

그래서 같이 가게 됐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좋더라구요. 목사가 없는 것도 특이했구요. 그리고 제가 원래 한 번 시작하면 좀 오래하는 편이라서 모임에 꾸준히 나갔어요. 그러다보니 한국 퀘이커 모임 창립 멤버까지 됐죠. 지금 창립 멤버 중에 남은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1960년 서울에서 한국 퀘이커 모임을 창립하는 데 함께했던 이 선생은 퀘이커가 한국전쟁 당시에도 다른 기독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호활동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퀘이커들이 첨예한 갈등을 보이는 두 진영의 중재 역할을 했다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도 퀘이커들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퀘이커는 양쪽이 갈등을 보일 때 중재 역할을 해왔어요. 전쟁 이후 구호활동을 벌이더라도 양쪽 모두에 들어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죠. 실제 한국전쟁 때도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에도 들어가려고 했어요. 북쪽에서 반대했기 때문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요.

구호활동 자체가 다른 종교나 기관이랑 좀 다르기도 합니다. 구호활동, 지원활동을 하겠다고 목사가 오면 큰 집을 차지하고 자기 집에 울타리를 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퀘이커는 일단 목사가 없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더라구요.

최대한 현지에 맞추려는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이랑 똑같이 살고 구공탄 떼서 밥 해먹고, 봉사활동하고 그러더라구요. 또 한국전쟁 당시에는 한국에 차가 별로 없어서 자동차가 지나가다가 클랙숀을 누르면 놀라는 사람이 많았대요. 그래서 아예 클랙숀을 떼버리고 운행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쓰는 것에 정말 놀랐죠.

이런 모습을 보고 퀘이커들이 한반도 문제에도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퀘이커들의 중재로 한반도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 선생은 퀘이커 모임에 나가면서 사상가이자 인권운동가였던 함석헌 선생과 본격적인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8년 함 선생의 추천으로 미국에서 1년 동안 퀘이커의 역사를 공부하는 기회를 얻게 됐다.

"제가 원래 전공은 수학이에요. 한국에서 아이들도 가르쳤고. 그래서 미국에 가게 된 김에 퀘이커 역사 공부를 마친 뒤에 수학공부를 더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학비가 만만치가 않더라구요.

제가 당시 나이가 39이었어요. 장학금은 35세 이하한테만 주더라구요.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어서 수학공부는 하기 힘들 것 같았고, 그래서 컴퓨터를 공부해서 취직을 하자는 생각을 했죠. 그때만 해도 컴퓨터 기술이 막 발전하기 시작할 때라서 일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그렇게 미국에서 10년을 일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한국에 한 번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국을 떠나온 지 12년 만인 1980년, 그는 한국을 찾았다. 그런데 그가 목도한 한국은 '아름다운 조국'이 아니었다. 1980년 5월, 5.18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동포들의 힘만으로는 어렵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무참한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을 현장에서 목격한 이행우 선생은 미국으로 돌아가 한국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한 운동에 박차를 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 우선 갈라져 있던 동포 사회가 서로를 이해하고 만나는 장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동포 사회는 통일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을 두고 좌와 우로 갈라져 있었어요. 먼저 민주화를 한 뒤에 통일을 해야 한다는 '선민주 후통일'과 통일을 한 뒤에 민주화를 해야 한다는 '선통일 후민주'로 나뉘어져 있었죠. 의견이 갈라지면서 서로 잘 만나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동포사회의 화합을 위해 1947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퀘이커 평화단체 '미국친우봉사회(AFSC,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의 도움을 받았죠. 이 단체의 이름으로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컨퍼런스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고, 1981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첫 컨퍼런스를 열었는데 호응이 좋았어요. 이후 3년 동안 매년 컨퍼런스를 열면서 동포사회의 화합에 주력했죠"

이행우 선생의 노력에 진보와 보수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남북의 평화 통일을 위해 동포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고 이를 <코리아 리포트>로 묶어냈다. 또 1985년에는 미국의 한국 문제 전문가들과 함께 <두 개의 한국, 하나의 미래>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대는 여전히 전두환 정권의 독재가 이어지고 있었다. 동포들만의 힘으로는 어려운 현실에서 그는 재미동포들이 미국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선생은 동포들이 미국 의회와 정책 담당자들을 상대로 로비 활동을 벌이고 이를 통해 평화통일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새로운 모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하면 풀어나갈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재미동포들은 미국이 제대로 된 한반도 통일 정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1994년 미 교회협의회(NCC) 회장 이승만 목사와 함께 미주동포전국협회(NAKA, National Association of Korean Americans)를 창립했어요"

NAKA는 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운동을 비롯해 재미동포의 인권과 권익을 보호하는 등의 역할을 목표로 삼았다.

"NAKA를 만들고 난 뒤 미국 국무성과 의회를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그동안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었다면서 아주 반가워 하더라구요. 그래서 우리 활동에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죠"

이후 이 선생은 2004년 남한과 북한, 미국 의원들이 모두 모이는 컨퍼런스를 열었다.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을 변화시키기 위한 중요한 발걸음이었다.

2004년 7월 20일 이행우 선생은 미 의회에서 '한반도 평화·안전 포럼'을 열었다. 남한·미국의 국회의원과 북한의 유엔 대사가 이 자리에서 만났는데, 남한과 북한, 미국 인사가 한 자리에 마주 앉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국에서는 당시 열린우리당 장영달, 강혜숙, 김재윤, 선병렬 의원과 이창복 전의원 등이 참석했고 북한에서는 박길연 유엔주재 대사와 한성렬 부대사, 미국에서는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와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의 민주당 간사를 맡고 있던 조 바이든 상원의원이 등이 참석했다.

이행우 선생은 이 포럼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도널드 그레그 전 대사이자 코리아 소사이어티 회장을 움직여 공동주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레그와 만나서 한 말은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그의 첫 말이 요즘 퀘이커가 좋은 일들을 많이 한다는 것이었고, 나의 답은 당신은 명문 윌리암스 대학을 나오고 CIA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사람으로서 좋은 일을 많이 하니 감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번 포럼이 당신의 아이디어냐, 바이든 의원의 아이디어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내가 우리 아이디어인데 바이든이 받아들였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레그가 자금이 있냐고 묻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돈은 없다고 했더니 '오케이, 같이합시다'라고 말하더라구요. 생각보다 별로 어렵지 않게 이야기가 끝났어요"

이 선생은 이전에 그레그 회장과 안면은 있었지만 한 번도 진지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레그는 비교적 쉽게 이 선생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레그의 협조로 포럼은 순조롭게 치러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중간에 실무적인 단계의 난관도 적지 않았다. 당시 유엔 주재 북한 외교관들은 맨해튼 콜롬비아 스퀘어에서 25마일 밖으로 나가려면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당장 이 허가를 받아야 북한 인사들이 컨퍼런스에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전까지는 국무부 허가 사항이었는데 부시 정부에서는 백악관 전결사항으로 되어있어 허가를 받는데 더 많은 시일이 필요했지요.

백악관에서 허가가 떨어지기 전에 우선 국무부에서 결재가 나와야 하는데, 결재가 콜린 파월 국무장관한테까지 올라가지를 않는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중간에 결재가 막혀 있더라구요.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습니다. 결국 행사를 나흘 앞두고 국무장관 결재를 받았죠. 행사가 화요일에 있었는데, 그 전주 금요일 오후 5시 5분 전에 백악관 허가가 떨어졌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주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죠"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포럼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포럼 이후 그레그 회장은 북측 인사들의 태도가 아주 인상 깊었다며 만족감을 표시했고 다른 미국 민주당 의원들도 ‘북한의 핵 폐기가 모두가 혜택을 볼 수 있는 '윈-윈' 게임이 될 것’이라며 ‘문제 해결을 위한 공감대를 좁혀 나가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또 <워싱턴 포스트>에서도 이를 크게 보도했다.

하지만 이 포럼에서 이행우 선생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찾기는 어려웠다. 사실상 포럼을 기획하고 포럼 성사를 위해 뛰어다녔지만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은 셈이다. 이렇게까지 묵묵히 목표한 바를 위해서 열심히 움직인 이유를 묻자 이 선생은 "어떻게든 목적을 달성하면 됐지 내 이름이 나고 안 나고는 관심 밖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함께 했지 나 혼자 한 일도 아니고요"라는 우문현답을 내놓았다.

"저는 일단 시작하는 사람이에요. 좀 미련하기도 하지만 안 되더라도 일단 합니다. 또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하는 편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자금도 없이 포럼이나 컨퍼런스 등을 주최해왔는데 신기하게도 적자를 보거나 자금에 문제가 있던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좋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면 되는 것이지, 돈이 없다고 아무 것도 못하는 건 아니라고 후배들에게도 이야기합니다"

그 포럼을 마치고 난 며칠 후 그레그 회장한테 전화가 왔다. 그레그는 이 선생에게 "나는 처음에는 매우 회의적이었는데 당신이 밀어붙여 일이 성공했는데도 결국 내가 주목을 다 받았다"고 말했다. 이에 이 선생은 "이번은 다만 시작이고 나는 앞으로 매년 계속하려고 하는데 당신도 나와 함께 계속 하겠느냐?"고 물었고 그레그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그레그 회장은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설득의 기술, 묵묵한 실천

이후 2009년 버락 오바마 정부가 출범한 뒤 이행우 선생은 한국의 시민 사회와 미국 의회 간의 만남을 주선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박원순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오재식 전 월드비전 회장, 이문숙 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총무 등이 존 케리 상원 외교위원장과 북핵 문제를 포함한 북한과의 대화를 모색하는 자리였다.

한국에서 참가하는 이들은 새로 출범한 오바마 정부가 북한과 적극적인 협상에 나서야 북핵 문제가 해결될 수 있고, 이를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후 2011년 독일의 에버트 재단을 알게 된 이 선생은 6자회담 참가국들과 통일의 경험이 있는 독일을 함께 묶으면 의미 있는 세미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2012년 3월 세미나를 준비했다.

"독일이 통일도 했고 유럽연합도 만드는 등 좋은 경험이 있는데,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에 독일 당신들의 경험을 좀 나눠 주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한 달 후에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저는 북한 참석자들이 비자를 받지 않아도 되는 중국 수도 베이징에서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베이징에서 하려면 베이징 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하더군요. 중국 쪽에서 그런 큰 국제회담은 뉴욕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뉴욕에서 하면 자기들도 꼭 참석하겠다고 해서 결국 미국에서 하는 것으로 밀어부쳤습니다"

이 세미나는 북미 간 2.29 합의를 이룬 직후였고 6자회담이 멈춘 지 햇수로 4년이 되어가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동북아를 비롯해 세계 주요 국가로부터 관심을 받았다.

당시 이 세미나에 미국 측에서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존 케리 상원 외교위원장, 제임스 레이니·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 등 한반도 전문가들이 총출동했다. 북한에서도 리용호 외무성 부상과 최선희 부국장 등 6자회담과 관련한 인사들이 참석했다.

한국에서는 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문정인 연세대학교 교수, 손학규 의원과 함께 정부 인사로 임성남 외교통상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조현동 평화외교기획단장 등도 참석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러시아에서도 관련 인사들이 참석하는 등 6자회담 참여 국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시간이었다. 여기에 독일과 유럽연합 관계자까지 참석하는 명실상부한 국제포럼이었다.

키신저 전 장관과 그레그 전 대사, 존케리 상원위원장까지 미국 내 대표적인 인사들을 이 선생은 어떻게 한 자리에 모을 수 있었을까? 그는 원래 이 인사들과 친분이 있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이런 분들은 자기 휘하에 각 분야 담당 보좌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담당 보좌관을 설득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직접 이야기한다고 해도 거의 대부분 본인의 보좌관에게 물어보지요. 결국 주요 인사들을 설득하려면 이 사람이 어떤 문제를 누구한테 물어보는지를 파악하여 그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공하면 사실상 반 이상은 설득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존 케리 외에도 키신저 전 장관이나 북한의 외무성 부상 등 6자회담 및 북핵 문제와 관련된 인사를 한 자리에 모이도록 섭외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선생은 마치 그런 일에는 도가 튼 듯 열정적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일단 북한이 나와야 세미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엔 대표부에 갔죠. 세미나 참석여부 관해서 본국(평양) 의사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더니 열흘 만에 참석하겠다는 답변이 왔지요.

그 다음에는 케리 상원 외교위원장에게 북한의 답을 알려주며 협조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케리 위원장은 북한에서 고위급이 올 경우 참석하겠다고 했고 결국 세미나에 함께 하기로 했죠. 이러다 보니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생각났습니다. 키신저가 참석하는 회의에서 북한 사람들은 그의 발언을 열심히 듣고 기록한다는 점에 착안, 키신저가 참석하면 북한에서 더 고위층을 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죠. 그래서 키신저를 움직였고 참석 승낙을 받아냈지요.

그러다 보니 한국 내 국회의원이나 전직 관료, 그리고 외교부에 있는 현직 관료까지 참석을 하게 된 겁니다. 그때는 정말 힘들었지만, 많은 분들이 함께 해서 행사가 성황리에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북미 양국의 2.29 합의 직후로 날짜를 일부러 맞춘 것이냐는 질문에 이 선생은 "의도적으로 맞춘 건 아니었고, 키신저와 또 한 사람의 일정에 맞추다 보니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한 푼도 없이 시작했지만 결국 이번에도 적자를 내지 않았다. 좋은 프로그램이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완전히 단절된 남북, 민간이 적극 움직여야

남한과 북한, 미국과 북한 간의 다리를 놓으며 만남의 자리를 만들었던 이행우 선생에게 2016년 현재 북한의 핵 문제 해결과 동북아 정세 완화를 위해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지난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2월 남한 정부의 개성공단 전면 중단, 그리고 7월 남한 내 사드배치와 9월 북한의 5차 핵실험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점점 더 엄혹해져 가고 있다.

"정부가 나서지 않을 때는 민간이 적극 다리를 놓고 만나는 장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번에 말레이시아에서도 북한의 한성렬 부상과 미국의 전직 관료들이 만났습니다. 로버트 갈루치는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 낸 경험이 있고, 조지프 디트라니는 2005년 9.19 공동성명이 나왔을 때 미국 측 차석대표로 참석한 적이 있는 인물입니다. 이런 것처럼 자꾸 만나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과 베트남이 국교 정상화에 성공했듯이 북한과 미국의 국교 정상화를 위해서도 로드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베트남과 미국은 국교 정상화를 위한 로드맵을 만들었습니다. 단계별로 국교정상화까지 가는 것이었죠. 그렇다고 단계별로 시한을 정해둔 것은 아니었고, 한 단계가 끝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단계에 따라 진행하는 건데, 이렇게 하면 훨씬 더 체계적인 관계 수립이 가능합니다.

북한과 미국도 이처럼 로드맵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마지막 단계가 끝났을 때 핵도 없어지고 평화협정을 맺고 양측이 국교 정상화로 나아가야 합니다. 만약 북한과 미국 또는 남북한과 미국 또는 6자회담 참가국 등 관련한 국가들의 만남이 있다면 북미 간 국교 정상화를 위한 로드맵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과정을 통해 북핵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2016년, 남북한은 핵실험과 각자 억지력의 구축으로 극단으로 치닫고 있고, 미국은 트럼프의 당선으로 어떤 대북정책을 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일본은 재무장의 날개를 달았고 러시아는 호시탐탐 동쪽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다.

이렇듯 동북아와 한반도는 앞이 보이지 않는 혼돈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선생의 삶과 조언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낼 수 있는 자양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정국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당사국 간 만남의 자리를 만들었고, 그 안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던 이행우 선생, 지금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그의 삶이 제시하고 있다.

이재호(프레시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