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26

겨울 하늘, 빈 산.. :: 뒤틀린 현대사 바로잡는 ‘40년 망명객’의 증언 [한겨레 기획연재]

겨울 하늘, 빈 산.. :: 뒤틀린 현대사 바로잡는 ‘40년 망명객’의 증언 [한겨레 기획연재]






정경모 '길을 찾아서' 2009/07/09 11:13 leerberg


길을 찾아서 새 연재 시작하는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자서전 같은 것 쓸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길을 찾아서’를 위해 회고록을 쓰다 보니 이젠 그냥 (저 세상으로) 갔으면 어찌될 뻔 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써 달라고 해서 참 고맙다.”

“한국 못간다…안간다” 민족주의 외길
해방공간 내부서 순도높은 체험담 전개
망명·방북…‘시대지성’의 인생역정 펼쳐


전화선을 통해 들려오는 40년 ‘망명객’ 정경모(85·사진·일본 요코하마 거주)씨의 목소리는 여전히 쟁쟁했고, “이제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나이”라곤 했지만 기억 또한 펄펄 살아 있었다.


2002년에 첫 한글판이 나온 그의 저서 <찢겨진 산하>(한겨레출판부)의 발문에서 원로 언론인 임재경씨는 그 책을 읽고 받은 충격을 이렇게 묘사했다. “어렸을 적 전등 소켓에 손가락을 넣었다가 갑자기 온몸에 전류가 관통할 때의 느낌이었다. 인간이 가장 큰 감명을 받는 순간은 지나쳐버린 진실과 다시 마주칠 때라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그 글을 쓸 때 임씨는 1945년 광복부터 한국전쟁까지, 한국현대사의 흐름을 결정한 5년동안의 이른바 ‘해방공간’의 좌우대립을 이데올로기 대결로만 파악하는 우리의 ‘상식’이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다는 것을 그 책을 통해 깨달았다면서, 싸움의 핵심은 친일행위와 농지 소유관계 모순 즉 친일파와 토지개혁 문제 처리를 둘러싼 현실적 갈등이었다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찢겨진 산하>와 <일본의 본질을 묻는다>, <이제 미국이 대답할 차례다> 등 한국에서 출간된 정씨의 책 3권은 우리가 우리 현대사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실들이 실은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 그리고 그 잘못된 인식이 지금 우리 현실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비틀어놓고 있는지를 그야말로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81년께부터 일본어 잡지 <씨알(아래 아)의 힘>과 강연들을 통해 한국현대사에 대한 연구와 발언을 계속해온 그는 오랜 지기인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제1권을 일본어로 번역했고 황석영의 <장길산> 전 10권 역시 일본어로 번역(오는 9월 후지와라출판사 출간 예정)했다.


간간이 외부활동도 하지만 “요즘엔 주로 ‘길을 찾아서’ 집필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그의 글에 대해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운명은 경기중학 졸업 뒤 일본 게이오대 의학부에 들어갔을 때 일본 하숙집 주인 모녀(그 집 딸이 지금 그의 아내다)와의 조우를 통해 한 번 물줄기를 틀었고, 광복 뒤 귀국해 서울대 의대를 다니다가 47년 미국 에모리대학으로 유학가 화학공부를 하고 있던 그를 맥아더의 일본점령군(미군) 사령부(GHQ)에 밀어넣은 당시 주미 한국대사 장면(제2공화국 국무총리)씨의 긴급전화 한 통화로 다시한번 방향을 틀게 된다. 그 뒤 한국전쟁 휴전회담 통역자로 판문점에서 목격한, 어떤 역사책도 알려준 바 없는 놀라운 사실들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은 소름마저 돋게 한다.


한때 그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골수 친일파들을 기용해 단독정부 수립을 꾀하며 백범 김구와 몽양 여운형, 조봉암 등 정적들을 배제해간 사실들에 대한 기억은 지금의 ‘뉴라이트’적 민족사 인식의 허구성을 깨뜨리는 역사적 증언일 수 있다. 이승만의 정치적 후계자라할 박정희 군사정부를 겪으면서 느낀 환멸과 자각은 결국 70년 망명으로 이어졌다. 그길로 40여년, 어떤 면에선 가장 순수하고 철저한 민족주의자이기를 그만둔 적 없는 정씨는 여지껏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박형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여러 차례 전화해 귀국을 종용했으나 89년 문익환 목사 평
양방문에 동행한 그의 전력을 문제삼은 ‘공안의 벽’ 앞에 좌절해야 했던 그의 얘기는 서글프고 아프다. 6살 위인 문 목사와는 방북 당시 이미 40년 지기였던 그의 평양행에 얽힌 얘기들, 일본우익들에 관한 섬뜩한 진실들, 그를 망명으로 내몬 부패한 한국 지배세력의 생얼굴들, 그리고 김대중씨 개인과 민주화 이후 정권에 대한 복잡한 심경 등 오직 그만이 알고 있는 수많은 사실들이 <한겨레> 연재를 통해 한국현대사를 엮는 또 다른 씨줄과 날줄로 당당하게 자리잡게 될 것이다.


“단재 신채호와 백범, 몽양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은 그는 장준하, 문익환도 그 계열선상에 올렸다. 그리고 “나는 거기(한국)에 못 가는 게 아니라 안 가는 거야. 여기서 이대로 꺼지는거야”라며 “상징적 의미가 있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선각들이 그 제단에 몸을 바쳐야 했던 불운한 민족사의 과제는 아직 완수되지 못했으며, 이미 자신도 동참해온 그 대열에 여생까지 바치겠다는 얘기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요코하마/사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기사등록 : 2009-05-03 오후 06:28:45 기사수정 : 2009-05-03 오후 06:3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