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2

이기상 Ki-Sang Lee - ‘시간’과 ‘공간’을 둘러싼 동서양의 ‘심층문법’ [페이스북에 김태창 선생께서 내가 올린... | Facebook

Ki-Sang Lee - ‘시간’과 ‘공간’을 둘러싼 동서양의 ‘심층문법’ [페이스북에 김태창 선생께서 내가 올린... | Facebook

Ki-Sang Lee

‘시간’과 ‘공간’을 둘러싼 동서양의 ‘심층문법’

[페이스북에 김태창 선생께서 내가 올린 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셨다. 아래의 글은 그 물음과 그에 대한 나의 간단한 대답이다.]

이기상 교수님이 내셨던 책에서 "태양를 꺼라"라는 제목의 글을 읽은 것은 10년도 넘는 전에 일본서 공공(하는)철학 대화활동을 하고 있을 때 주로 유럽과 미국에서 국제회의를 개최할 때마다 선생님에게서 배워 알게 된 다석 사상을 조금씩 소개하면서 저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가운데서 가장 치열한 공방전을 촉발했던 화두가 바로 "태양을 꺼라"는 것이었습니다. 맹열한 반박과 차분한 응답이 교환되었던 일들이 새삼 그리운 추억이 되었는데 다시 여기서 읽게 되는 감회가 남다릅니다.

이기상 교수님, 한 가지 여쭈어 볼 것이 있습니다. 

"때"는 어떻게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빔과 빔-사이"의 "빔"은 여러 각도에서 말씀하셔서 이해해 가는 도중에 있지만 "때와 때사이"라 할 경우의 "때"는 "빔"과 다른 그 무엇입니까? 아니면 "빔"은 "때"와 "곳"이 서로 갈라지기 전의 본바탕이고 거기서 "때"와 "곳"이라는 두 얼개가 우리의 "있음"이나 "됨됨이"를 "없음"과의 긴밀한 연관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알게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물론 한자어의 '공간'을 염두에 두셔서 '빔-사이'라고 하셨을 것이라는 추측은 되지만 중국인 사고와는 한겨레의 사유방식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라고도 생각되어서요. "빔" 이란 이미 모든 "사이"들을 안고 넘어선 = 포월한 텅빔이 아닌가 싶어서요. 제가 실제로 몇몇 나라에서 철학대화를 했던 현장에서 부디쳤던 경험이 있어서 이교수님에게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가령 독일어 공유권에서 "Zwischen-Zeit-sein"이라는 표현은 서로 상통될 수 있었지만 "Zwischen-Nichts-sein"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격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온통빔’에 무슨 사이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Nichts에는 무와 공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고 어느 쪽 의미로도 사이를 넘어 선 것이라는 거지요.
(2021.03.04.)

빔-사이: ‘가이 없음’과 ‘가이 있음’ 
때-사이: ‘이 긋’, ‘제 긋’, ‘이 제 긋’

김태창 선생님의 물음은 아주 근원적인 물음입니다. 

깊은 사색 속에서만 피어오를 수 있는 물음이지요. 그것은 다석 선생이 말씀하고 계신 하느님의 마루뜻이 생각이라는 불꽃을 통해 튀어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무·공·허는 정말 사색의 한계를 벗어납니다. 개념으로 잡아낼 수가 없지요. 그럼에도 많은 철학자, 사상가, 영성가들이 다양한 형태의 ‘표현’으로 잡아내려 시도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러한 개념적 표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았지요. 결국 소통이 되지 않는 어려운 개념으로 허공을 떠돌며 지금의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내려옵니다. 저 역시 무·공·허에 관한 다양한 동서양의 유명한 책들을 많이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언어의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지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할지어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경구가 귓전을 때립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개념적인 파악의 시도를 접고 그 무·공·허와 더불어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김태창 선생께서 위와 같은 물음을 던져 오셨습니다. 놓아버렸던 사유의 끈을 다시 잡아보라는 초대의 말씀이며 이 또한 위에서 번개치듯이 내게 안겨오는 ‘생각의 불꽃’인 듯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놓았던 생각의 실마리들을 다시 한 번 주어 담아 봅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손가락을 보지 말고 그것이 가리키는 그 방향에서의 ‘그 무엇’을 생각으로 품으려 노력해야 된다는 점이겠지요.

‘빔-사이’와 ‘때-사이’의 차이와 관계에 대한 물음과 그것들이 갖고 있는 ‘빈탕한데[온통빔]’과의 관계성에 대한 물음이 핵심적인 듯싶습니다. 그야말로 말로 표현될 수 없는 내용들이지요. ‘손가락’을 써서 소통을 시도해보려 합니다. 가장 큰 차원의 이해의 지평은 결국 생활세계의 역사가 간직되어온 문화의 ‘심층문법’에 결과 무늬로 새겨져 지금의 우리의 생활세계 속으로 전해져 오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 ‘무’, ‘텅빔’, ‘때’, ‘빔’ 등과 같은 근원적인 낱말이 갖는 뜻[의미]은 생활세계와 문화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겠습니다. 열린 마음이 있지 않으면 다른 문화권의 심층문법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자기들 언어의 ‘표피문법’으로 재단하고 평가해서 설명해버리면 애초에 문화권 사이의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동서양의 대화방식이었습니다. ‘이성’과 ‘논리’를 앞세워서 자기들의 인식관심에 따른 ‘환원적 해석학’으로 모든 다른 생활세계의 심층문법을 재단하고 평가해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말 속에 간직되어온 심층문법에 귀를 기울여 그 속에서 말건네 오고 있는 하느님의 마루뜻을 읽어내려 온갖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이점에서 제가 다석 선생을 높이 평가하며 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이라고 자리매김하는 이유입니다. 하이데거는 ‘시간’을, 즉 ‘때-사이’를 논하면서 시간에는 ‘연대기적 시간’과 ‘카이로스적 시간’이 있다고 구별하였습니다. 연대기적 시간은 우리가 시계를 갖고 측정하는 양적인 시간을 말합니다. 그에 반해 ‘카이로스적 시간’은 하느님의 재림이라는 종말론적 시각을 갖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림의 순간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매순간 매순간 내 목숨을 걸고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결단하는 시간을 살아가는 ‘칼날 위의 삶’을 말합니다. 하이데거는 그러면서 ‘본래적인 시간’은 바로 내가 나의 존재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 ‘결단의 순간들’이라고 강조합니다. 
저는 ‘빔-사이’를 설명하면서 우리말 ‘가’가 핵심낱말이라고 하면서 그 낱말의 도움을 받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없음은 근원적으로 보자면 ‘가이-없음’이다. 이 ‘가이-없이는’ ‘가를-없앰’에 터하고, 이 ‘가를-없앰’은 다시금 ‘없앰’ 그 자체에 바탕한다. 없앰은 자신마저도 없애 마침내 오직 텅빈 없음만이 ‘있을’ 뿐이다. 내용물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턱 트인 들녘만 있을 뿐이다. 내용은 없고 형식만이 있을 뿐이다. 얼개는 없고 바탕만이 있을 뿐이다. 

없앰 그 자체는 공간 안에 등장하는 가 있는 모든 사물들의 ‘가’를 없앨 뿐 아니라, 이 공간의 ‘가’까지 없애 무한한 공간, 가이-없는 공간, 텅빔 그 자체, 빈탕한데, 끝이 없는 일자, 온통 하나(한·, 한 나)를 이룬다. 그것은 또한 시간 안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의 시작과 끝을 없앨 뿐 아니라 시간 자체의 ‘가’까지도 없애 가이-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시간, 끝없이 이어지는 ‘늘-그러함’을 만든다. 가이-없는 공간, 가이-없는 시간, 이 둘은 본디 둘이 아니라 하나이고, 그것을 하나이며 전체로 묶어서 이름한 것이 ‘한늘’, ‘하늘’, ‘한·’, ‘하나’, ‘한 나(大我)’이다. ‘하늘’은 바로 이러한 사태를 일상적으로 일컫는 근본 낱말인 셈이다. 하늘은 하나이고 온통이다. 그 많은 별들이 생겨났다 사라지지만 하늘은 더 넓어지지도 않고 더 늙어지지도 않는다. 늘 그러한 텅빈 온통이다. 하늘이 그렇게 늘 그러한 텅빈 온통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갖고 있는 ‘없앰’의 힘 때문이다. 

이 ‘가이-없는’ ‘가를-없앰’의 바탕 안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가’를 받아 주어진 ‘빔-사이’를 이으며(채우며) 주어진 ‘때-사이’를 잇다(살다, 사르다)가 다시 ‘가이-없어져’ ‘가이-없는’ 텅빈 온통 속으로 돌아가 다시 텅빔과 하나 된다.

가이-있는 모든 것은 오직 이 가이-없는 텅빈 온통을 배경으로 하여 자신의 ‘가’를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텅빈 ‘빔-사이’가 아니라면 ‘가’는, 즉 형태, 모습, 형상은 그것이 무엇인 바 그것일 수가 없다. 다시 말해 텅빈 온통으로서의 ‘없음’, ‘무(無)’가 모든 유(有), 있음의 유래이며 가능조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무극과 태극의 관계, 공(空)과 색(色)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때-사이”의 ‘때’는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다석 선생의 도움을 받는다면, 내가 살고 있는 나의 ‘때’는 나의 ‘긋’이다. ‘긋’은 ‘끄트머리’를 뜻한다. 그것을 다석 선생은 ‘이 제 긋’이라고 이름한다. 우주생명 자체인 한얼로부터 이어이어 지금의 나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온 ‘이 긋’이 곧 사람이 각기 부여받고 있는 각기 그 자신의 ‘제 긋’이다. 

다석 선생의 “이 제 긋”에 대한 풀이를 직접 들어보자.
<이 제 긋>
‘긋(끝)’은 모릅니다. 긋(긑)이 있는 것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긋이라는 낱말은 끝막는다는 뜻입니다. 소위 세속적인 말로서, 무슨 끝을 볼까 하는 것은 좋은 일의 끝을 보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처음보다 참으로 크게 되어 그치라는 인생입니다. ‘끝’이라는 글자에 ‘ㅌ’ 받침이 붙는 것은 긋(끝)에 가서 긋을 찾아 기어이 터뜨려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끝’과 ‘긋(싹)’이 일치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실상 우리에겐 ‘한 긋’밖에 없습니다. 이 ‘한 긋’을 줄곧 가지고 끝막으면 그만인 줄 압니다. 긋이라는 것은 ‘나말슴’입니다.[『다석강의』 209]

‘나말슴’에서 ‘나’라는 것은 이어 이어온 한 긋입니다. 이전 사람을 내가 제법 잘 안다는 것은 내가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나아가야지 나아가지 못하면 안 됩니다. 내가 나아가야지 아나가지 못하면 안 됩니다. 여기 오랫동안 머무르면 안 됩니다.... 긋이란 싸고 싸두어도 드러나야 합니다. 나가는 것이, 내가 나가는 것이 긋입니다. 나는 늘 나갑니다. 주머니 속에 든 송곳 모양으로 감추려고 해도 끝이 절로 삐죽이 삐쳐 나갑니다. 보이게 나옵니다. 이 끄트머리가 ‘나’란 말씀입니다. 나라고 하면 몸뚱이를 말하는데, 몸뚱이의 어느 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긋은 생각의 긋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이라는 뜻입니다.[209]

이승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꾸 나아가는 것은 생각입니다. 생각 끄트머리가 자꾸 삐죽하게 나가려고 하는 까닭에, 여기 이 ‘나말슴’은 ‘긋말슴’이 되고 ‘생각말슴’의 뜻도 됩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여도 ‘나’라는 것은 있습니다.[209]

그 긋을, 생각의 긋을 잘해 항상 참된 생각을 해야 하는 존재가 ‘나’란 말입니다. 이 ‘나’란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고 정신입니다... 정신을 참에 두고, 머리를 하늘에 둔 존재가 ‘ㅣ’입니다. 그러니까 ‘ㅣ긋 제긋’이 됩니다. ‘긋’의 글자 모양을 보면, 하늘[ㄱ]을 사이에 두고 한 줄[ㅡ]을 가로로 그어놓은 것입니다. 여기 이 세상입니다. ‘ㅅ’은 세상을 말합니다. 사람[인(人)]을 뜻하기도 합니다. 본래 정신이 본(本)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온 생명이기 때문에, 끝이 여기서 그치어 하느님을 받드는 긋입니다. 이 긋은 무슨 긋인가 하면 ‘제긋’입니다. 제긋이 나[오(吾)]오는 것입니다. ‘나’라는 긋입니다. 이 긋은 ‘제긋’으로 ‘이제긋’입니다.[210]

‘이제긋’의 ‘이제’는 실제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라는 말은 ‘그제’라는 말과 같이 쓰일 수 있습니다. ‘이긋제긋 이제긋’의 이제는 오늘의 이 세상을 말합니다... 이제의 내 긋이지, 그제의 남의 긋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긋제긋 이제긋’입니다. 그런데 이 긋은 영원이 이어 내려온 한 긋이 되었습니다. 이어 이어서 여기에 내려온 긋입니다. 곧 ‘예긋’입니다.[210]

다석은 우주의 영원한 생명줄이 이어이어 내려와서 지금 여기의 나의 몸에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을 ‘이제긋’이라고 이름한다. 무한한 생명이 이어져 내려와 그 끄트머리가 나에게까지 닿은 것이 ‘이긋’이고, 이제 그것을 지금 여기의 내가 이어받아 이어나가야 할 끄트머리로 삼을 때 ‘제긋’이다. 이렇게 ‘하나’인 우주생명 은 ‘이제긋’으로서 나의 몸에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웋일름[하늘의 뜻]을 따라 하늘로부터 받은 속알[바탈]을 태워 다시 ‘하나’에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선 오늘은 생각의 실마리를 여기까지만 풀어봅니다. “빔-사이”를 우리말 <가>를 갖고 풀어보았고, “때-사이”를 우리말 <긋>을 갖고 풀어보았습니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과 ‘공간’을 독일 일상어 “Zeitigen”과 “Räumen”, “Einräumen”을 갖고 설명하면서 독일어의 심층문법에 기대고 있듯이, 다석 선생의 우리말 풀이를 갖고 우리말의 생활세계적 심층문법을 끌어들여 보았습니다.

긔림: < 다석강의>, 마이클 알파노의 <질문하는 마음>, <김태창 선생 2009년 한일철학포럼>, <빔사이>, 이철수 <그새 깃드는 탑>
(202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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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chang Kim
자상하면서도 예리한 말씀글을 통해서 깊진한 철학함의 새길엶길을 보여주시는 이길상교수님으로부터 몸받은 시사와 자극에 늘 감사하고 후학들을 아끼시는 맘결에 감동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의 소박한 질문에 자상한 회답주심에 또 다시 감사드립니다. 저 자신 선생님 말씀글을 잘 읽고 또 읽으며 깊새김 새새김해 보겠습니다.


Ki-Sang Lee
Taechang Kim “담론”은 지식을 축적하여 체제를 유지하며 기록을 남겨 후대에 전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대화”는 생산적인 지식창출, “새로움의 꽃피움”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한 분이 바로 김태창 선생이십니다. 항상 담론에 집착하지 않으시고 “대화”를 통해 새로움을 꽃피워 내시려 애쓰셨습니다. 저도 그런 “사유하기”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복받는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