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3

한병철 / 심리정치-피로사회

한병철 / 총 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심리정치-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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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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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은이),김태환 (옮긴이)문학과지성사201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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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146쪽
125*200mm
175g
ISBN : 9788932027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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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선택
"용기 있고 '지혜로운 바보'의 지혜"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한국인이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심리정치>를 간결하게 정리한 다음 문장 역시 마찬가지다. “억압 대신 친절로, 금지 대신 유혹으로 개인을 조종하는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 한병철의 저작이 꾸준히 소개되며 독자에게 호응을 얻는 까닭은 제목에 그대로 드러나는 결론 때문이 아니라(그의 저작 제목은 분석의 결과가 아니라 분석의 대상이라 하겠다), 현실과 이론을 종횡으로 넘나들며 우리가 이미 몸으로 알고 있는 세계의 특성을 간명하고 솔직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자본과 신자유주의가 거의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 받는, 문제와 사고의 과정마저도 그 안에 포섭된 오늘을 설명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착취 가능한 자유이고, 자유를 위해 자유를 희생시키며 자유에 종속되었다는 걸 깨닫는 데에, 심리와 감정이라는 지속 상태에 머물지 못하고 기분과 흥분의 연속과 단절을 불안하게 이어 붙이며 기분마저 소비하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도 별다른 어려움은 없다. 한병철은 이런 예속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바보에게서 찾는다. 사유는 백치 상태 속에서만 사건에서 이탈할 수 있고, 정보와 자본이 요구하는 동일성을 방해할 수 있다. 이렇듯 “지혜로운 바보”의 지혜 역시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남은 건 과연 스스로 바보가 될 용기가 있느냐는 건데, 바보가 되지 않으려 끊임없이 노력해도 바보 되기 쉬운 오늘이니, 오히려 한 발 앞서 용기를 내보는 건 어떨까. "용기 있고 지혜로운 바보"가 되는 일 말이다.
- 사회과학 MD 박태근 (2015.03.03)


책소개
한국에 소개되는 그의 다섯번째 책. 전작 <피로사회>에서 ‘해야 한다’를 넘어 ‘할 수 있다’라는 성과사회의 명령 아래 소진되어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관찰하고, <투명사회>에서는 긍정적 가치로 여겨진 ‘투명함’이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통제사회로 나아가게 한다는 사실을 짚어냈다면, 이번 책에서는 그 논의들의 연장선상에서 신자유주의는 우리를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물음에 깊이 파고든다.

‘할 수 있다’를 넘어 ‘하고 싶다’라는 욕망을 창출하고 이용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하게 하는 은밀하고 세련된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은 이를 ‘심리정치’라고 부른다. 우리의 욕망과 의지는 과연 우리의 것인가?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가?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호감을 사고 욕구를 채워주고자 하는 ‘스마트 권력’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적, 무의식적 사고를 읽고 분석하며, 인간의 자유 의지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종해 자본에 의존하게 만든다. 이러한 심리정치 시대에는 지배가 그냥 저절로 이루어지며 사회적 저항이 일어나는 대신 우울증 환자가 양산된다. 이처럼 한병철은 우리가 평소 자각하지 못하는 이 시대의 문제들을 진단하고 사고 구조를 뒤흔드는 화두를 던진다. 한병철이 내세운 이 책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책속에서


첫문장
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로 끝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을 위해서 일한다. 자본에서 생성되는 자본의 고유한 욕구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구라고 착각한다. 자본은 새로운 초월성, 새로운 예속의 형식이다. 우리는 삶이 어떤 외적 목적에 종속되지 않고 오직 삶 자체로 머물러 있는 차원, 즉 삶의 내재성에서 다시 추방당한다. (「... 더보기
신자유주의는 시민을 소비자로 만든다. 시민의 자유는 소비자의 수동성으로 대체된다. 오늘날 소비자가 된 유권자는 정치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없다. 즉 적극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해가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것이다. 그는 공동의 정치적 행동을 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는 궁시렁궁시렁 불평하면서 정치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따름이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는 소비자와 똑같다. (「자유의 위기」, 22~23쪽) 접기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지배 관계에 들어오도록 유도하는 권력의 기술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 그것은 가로막고 억누르는 대신 사람들을 더 활발하게 하고 더 자극하고, 가능한 한 최상의 상태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한 권력 기술의 효율성은 금지와 박탈이 아니라 호감과 충족을 통해 작동하는 데서 나온다. 신자유주의적 권력 기술의 목표는... 더보기
심리정치가 이 체제의 통치 형식이 된다. 그것은 “회피할 수 없는 경쟁을 끊임없이 확산시킨다.” 이로써 “유익한 승부욕과 탁월한 행위 동기”가 촉발된다는 것이다. 모티베이션, 프로젝트, 경쟁, 최적화, 자발성은 모두 신자유주의 체제의 심리정치적 통치술에 속한다. (「두더지와 뱀」, 34쪽)
우리는 고문과 협박으로 자백을 강요받는 대신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다 털어놓는다. 스마트폰이 고문실을 대신한다. 빅브라더는 이제 친절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빅브라더의 친절함이 감시를 대단히 효과적으로 만든다. 벤담의 빅브라더는 보이지는 않지만 수감자들의 머릿속에 편재한다. 그들은 빅브라더를 내면화한다. 반면 디지털 파놉티콘에서는 아무도 감시받거나 협박당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감시국가”라는 용어는 디지털 파놉티콘을 지칭하기에는 부적합하다. 우리는 그 속에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감정, 오웰의 감시국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유의 감정이야말로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친절한 빅브라더」, 58~59쪽)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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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한병철의 책은 우리를 잠에서 깨워주는 채찍이다. 한병철의 사회비판은 무자비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시대를 열정적으로 껴안고 간다.
- 다스 마가친

놀랍도록 정밀하게 이 시대의 핵심을 꿰뚫는다. 인문학이 과거의 위상을 상실했다며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와중에도, 인문학이 여전히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낼 수 있는지를 강렬한 언어로 능숙하게 입증해 보인다. 그것은 바로 시대의 비판적 관찰자이자 경고자로서의 역할이다.
- 슈피겔

한병철에게 문제는 구글이나 NSA가 아니다. 그는 디지털 실존에 대한 가차 없는 진단을 제시한다.
- 디 벨트 (독일 일간지)

그는 철학계의 새로운 스타로 통한다. 불과 몇 개의 문장들로 우리의 일상을 떠받치고 있는 사고의 구조물을 무너뜨린다.
- 디 차이트 (독일 시사 주간지)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한겨레
- 한겨레 신문 2015년 3월 5일자
중앙일보
- 중앙일보 2015년 3월 7일자 '책 속으로'



저자 및 역자소개
한병철 (Byung-Chul Han)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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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살아 있는 철학자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철학, 독일 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베를린예술대학교 철학ˑ문화학 교수를 지냈다.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그의 대표작 『피로사회』는 2012년 한국에도 소개되어 주요 언론 매체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등 한국 사회를 꿰뚫는 키워드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투명사회』, 『에로스의 종말』, 『서사의 위기』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저자는 최신작 『불안사회』에서 불안이 잠식한 사회에서 끊어져 버린 연대와 만연한 혐오에 경종을 울린다. 짙은 불확실성과 깊은 무기력에 빠진 현대인의 삶에 필요한 것은 ‘희망의 정신’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희망에 관한 그간의 무지한 착각에서 벗어나 위기를 극복하고, 비로소 생기로운 삶을 되찾을 것이다. 접기

최근작 : <[큰글자도서] 불안사회>,<불안사회>,<생각의 음조> … 총 120종 (모두보기)

김태환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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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했다. 현재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이다. 지은 책으로 《문학의 질서》, 《미로의 구조》, 《우화의 서사학》, 《실제 저자와 가상 저자》, 《우화의 철학》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모던/포스트모던》, 《피로사회》, 《투명사회》, 《에로스의 종말》, 《변신·선고》 등이 있다.

최근작 : <카프카, 카프카>,<우화의 철학>,<일꾼과 이야기꾼> … 총 47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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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정신병동 수기>,<소설 쓰는 로봇>,<빛과 실>등 총 1,940종
대표분야 : 한국시 1위 (브랜드 지수 2,037,235점),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5위 (브랜드 지수 1,114,069점), 철학 일반 10위 (브랜드 지수 87,531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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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1-10 공감 (37) 댓글 (2)



진정한 행복은 일탈과 방종함, 풍부함, 무의미함, 넘침, 잉여에 있다. 즉 필요, 노동과 성과, 목적에서 벗어나는 곳. 하지만 오늘날에는 과잉 자체가 지본에 흡수되어 그 해방의 잠재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75p
좋은날 2016-12-20 공감 (0) 댓글 (0)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목적에서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 경영자 사이에서는 목적 없는 우정도 생겨날 수 없다. 하지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들 곁에 있음을 의미한다. 인도게르만어에서 자유와 친구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다. 사람들은 좋은 관계 속에서,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속에서 비로소 ... 더보기
좋은날 2016-12-15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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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생철학을 뛰어넘는 철학책.
보빠 2015-11-21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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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전율이 흐른다. 정말 사유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지 않을까 쉽다. 별 10개 주고 싶다.
녹차 2015-03-06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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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더 이상 해방의 기획의 중심이 될 수 없으며, 해방 그 자체가 기만이라는 것. 그에 대한 처방이 아렌트와는 반대로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이라는 점에서 너무나 `철학자적인` 저작이란 생각이 든다. 흥미롭지만 경계해야 할 사유다.
oneitherside 2015-04-08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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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후기만 읽어봤는데도 좋음
심야책방 2020-11-17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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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통찰력이 돋보였던 앞서의 <피로사회>, <투명사회> 보다는 독창성이 떨어지는 면이 있지만 뒷부분에 제기되는 반론은 여전히 깊이가 있습니다.
Astro boy Atom 2015-07-01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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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심리정치>



아직 한국은 ‘심리정치’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다. ‘투명사회’는 더더욱 아니다. 한국에 대해 말하자면 <위험사회>의 울리히 벡, <쓰레기가 되는 삶>들의 지그문트 바우만, <호모 사케르>의 아감벤, <구별짓기>의 부르디에의 이론이 한병철의 이론 보다는 더 적절할 것이다.



어떤 국가든 한병철이 비판하는 ‘심리정치’의 단계로 나아가는 게 역사의 일반적 흐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이없게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야할 색누리당이라는 군사독재 잔당들이 권력을 잡는 바람에 한병철의 이론이 맞지 않는 국가가 돼버리고 말았다.



한국은 투명사회가 아니다. 메르스 사태에서 볼 수 있듯 국가는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 국가는 정보를 독점하려 한다. 국민이 반드시 알아야할 정보자체도 공개하지 않는다. 국민이 죽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한국의 빅브라더는 눈곱만큼도 ‘스마트’하지 않을뿐더러 친절하지도 않다. 여전히 ‘규율 권력’을 작동시킨다. 정보를 공유하려는 국민들을 유언비어 유포라는 이유로 협박하고 감금한다. 국민의 알 권리를 존중한 JTBC 손석희는 소환 당했고, 정부와 박근혜가 ‘아몰랑’으로 일관하고 있을 때 메르스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던 박원순 시장은 검찰로부터 허위사실유포 혐의로 수사를 받는 중이다.



“친절한 스마트 권력은 예속된 주체의 의지에 정면으로 반하기보다는 그들의 의지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종한다. 그것은 안 된다고 말하기보다 그러라고 말하는 권력이며, 억압적이기보다 유혹적인 권력이다. 그것은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착취하려고 애쓴다. 그것은 금지하는 대신 유혹한다. 그것은 주체와 대적하는 대신 주체의 욕구에 부응한다.



자유분방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자극하고 유혹하는 스마트 권력은 명령하고 위협하고 규제하는 권력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좋아요 버튼은 스마트 권력의 인장이다. 사람들은 소비하고 소통하면서, 즉 좋아요 버튼을 누르면서 스스로를 지배 관계 속에 빠뜨린다. 신자유주의는 좋아요-자본주의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강제와 금지를 통해 작동하던 19세기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이 한국 사회와는 들어맞지가 않는다.

우리의 대통령께서 독재자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일까.



이 책에 접근하기 위해선 국가에 대한 논의는 배제하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의로 한정하는 편이 나을 듯싶다. (후진국 국민으로서 감수해야하는 불편함)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개인은 ‘자본의 페니스’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에서 긍정성은 부정성만큼이나 폭력적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빅데이터를 우상화한다. 그러나, 한병철이 보기에 빅데이터는 통계에 불과할 뿐이다. 통계를 통한 지식은 유일무이한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것은 ‘절대적 무지’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경험’해야한다.



체험과 반대로 경험은 비연속성을 바탕으로 한다. 경험은 변신을 의미한다. 어느 대담에서 푸코는 니체, 블랑쇼, 바타유가 말하는 경험이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떼어내어 주체가 더 이상 주체 자신이 아니게 되거나, 주체가 자신의 파괴 또는 해체로 내몰릴 지경에 이르게” 하는 어떤 것이라고 지적한다.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은 주체를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 경험은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가 주체를 예속 상태 속에 더 깊이 빠뜨리기 위해 이용하는 체험 또는 기분과 정반대다.



푸코가 말하는 삶의 기술은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을 낳는 자유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탈 심리화의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삶의 기술이란 심리학을 죽이는 것, 자발적으로, 또한 다른 개체들과도 어울리며, 아무 이름도 없는 존재, 관계, 특성 들을 생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이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바보’가 돼야만 한다.






“바보는 현대의 이단아다. 이단은 본래 선택을 의미한다. 즉 이단아는 자유로운 선택을 쥐고 있는 자다. 그는 정통에서 이탈할 용기가 있다. 그는 순응의 압박을 용감하게 떨쳐버린다. 이단아로서의 바보는 합의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형상이다. 그는 아웃사이더의 마력을 보존한다. 순응의 압박이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오늘날, 이단적 의식의 날을 벼려야 할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다.



바보짓은 신자유주의적 지배 권력과 그것이 강제하는 총체적 커뮤니케이션과 총체적 감시에 반기를 든다. 바보는 ‘소통하지’ 않는다. 바보는 소통 불가능한 것으로 소통한다. 그는 침묵의 장막 속으로 들어간다.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 정말 말해질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



들뢰즈는 말했다. “철학은 언제나 바보노릇”이라고. 철학사는 바보짓의 역사다. 오직 바보만이 완전히 다른 것에 접근할 수 있다. 바보만이 ‘동일자의 지옥’속으로 빠져들지 않는다.




네트워크에서 벗어나 상상을 초월하는 외부 공간에 거주해야 한다.







메모한 문장들



자유의 위기.



우리는 자유 자체가 강제를 생성하는 특수한 역사적 시기를 살고 있다. 할 수 있음의 자유는 심지어 명령과 금지를 만들어내는 해야 함의 규율보다 더 큰 강제를 낳는다. 해야 함에는 제한이 있지만, 할 수 있음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할 수 있음에서 유래하는 강제는 한계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역설적 상황에 빠진다. 자유는 본래 강제의 반대 형상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강제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처럼 강제의 반대여야 할 자유가 강제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기는 성과주체는 실제로는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성과주체는 주인에 묶여 있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에서 절대적 노예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목적에서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 경영자 사이에서는 목적 없는 우정도 생겨날 수 없다. 하지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들 곁에 있음을 의미한다. 인도게르만어에서 자유Freiheit와 친구Freund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다. 사람들은 좋은 관계 속에서,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초래하는 개개인의 전면적 고립 상태는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



개인적 자유는 스스로의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에 악용된다는 점에서 노예 상태와 다름없다. 그러니까 자본은 자신의 번식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착취하는 것이다. “자유 경쟁 속에서 자유롭게 해방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자본이다.”



개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것은 자본의 자유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개인은 자본의 성기로 전락한다. 개인의 자유는 자본에 “자동적인” 주체성을 부여하며 이로써 자본의 능동적 번식을 추동한다. 자본은 끊임없이 “살아 있는 새끼들”을 친다. 오늘날 과도한 형태에 이른 개인의 자유는 결국 자본 자체의 과잉을 의미할 따름이다.



자본의 독재.



신자유주의 질서는 타자에 의한 착취를 어떤 ‘계급’도 빠져나갈 수 없는 자기 착취로 탈바꿈시킨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무계급적 자기 착취를 전혀 알지 못했다. 사회 혁명이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의 구별을 전제로 한다면, 무계급적 자기 착취는 바로 사회 혁명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성과주체는 고립화되고, 이로 인해 공동의 행위를 할수 있는 정치적 우리 자체가 형성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에서 실패하는 사람은 사회나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바로 여기에 신자유주의적 지배 질서의 특별한 영리함이 있다. 신자유주의 질서는 시스템에 대한 저항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 만든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억압적 지배 관계를 전제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자기 착취적 질서 속에서 사람들의 공격성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겨냥한다. 이러한 자기 공격성으로 인해 피착취자는 혁명가가 아니라 우울증 환자가 된다.





어쩌면 우리는 행동하지 않아도 되려고, 즉 자유롭지 않아도 되려고, 책임을지지 않으려고, 여원히 채무자로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액의 부채는 우리가 자유로울 능력이 없다는 증거가 아닐까? 자본은 우리를 다시 채무자(죄인)로 만드는 새로운 신이 아닐까? 발터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종교로 파악한다. 자본주의는 “죄를 씻기는커녕 오히려 빚을 지우는 제의를 벌이는 최초의 사례”다. 죄를 씻을 길이 없기 때문에, 부자유의 상태가 영구화된다. “죄를 씻을 길을 알지 못하는 엄청난 부채의식을 빚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빚을 보편화하기 위해서 제의에 의존한다.”



투명성의 독재 : 한국사회와 아직은.

스마트 권력 ; 왜 한국은 아직도 규율 권력인가.



규율 권력은 여전히 전적으로 부정성의 영향 속에 있다. 그것은 허용이 아니라 금지의 형태로 구현된다. 규율 권력은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신자유주의 지배 질서를 기술하는 데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 신자유주의 지배 질서는 긍정성의 빛을 발산한다. 신자유주의적 권력의 기술은 섬세하고 유연하며 스마트한 형태를 취하며, 결국 사람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예속된 주체는 자신이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예속된 주체에게 지배 관계는 완전히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규율 권력은 비효율적이다. 사람들을 명령과 금지의 코르셋 속에 폭력적으로 욱여넣기 위해 막대한 힘을 소모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지배 관계에 들어오도록 유도하는 권력의 기술이 훨신 더 효율적이다.



신자유주의적 권력 기술의 목표는 인간을 온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존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친철한 스마트 권력은 예속된 주체의 의지에 정면으로 반하기보다는 그들의 의지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종한다. 그것은 안 된다고 말하기보다 그러라고 말하는 권력이며, 억압적이기보다 유혹적인 권력이다. 그것은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착취하려고 애쓴다. 그것은 금지하는 대신 유혹한다. 그것은 주체와 대적하는 대신 주체의 욕구에 부응한다.



자유분방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자극하고 유혹하는 스마트 권력은 명령하고 위협하고 규제하는 권력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좋아요 버튼은 스마트 권력의 인장이다. 사람들은 소비하고 소통하면서, 즉 좋아요 버튼을 누르면서 스스로를 지배 관계 속에 빠뜨린다. 신자유주의는 좋아요-자본주의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강제와 금지를 통해 작동하던 19세기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두더지와 뱀




두더지는 개방을 견디지 못한다. 이제 두더지의 자리를 뱀이 대신한다. 뱀은 규율 사회의 뒤를 이은 신자유주의적 통제사회의 동물이다. 두더지와 달리 뱀은 닫힌 공간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뱀은 오히려 움직임을 통해 공간을 열어간다. 두더지는 노동자다. 반면 뱀은 경영자다. 뱀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동물이다.



규율 체제는 들뢰즈에 따르면 마치 “몸”처럼 조직되어 있다. 그것은 생정치의 체제다. 반면 신자유주의 체제는 마치 “영혼”과 같은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심리정치가 이 체제의 통치 형식이 된다. 그것은 “회피할 수 없는 경쟁을 끊임없이 확산시킨다.” 이로써 “유익한 승부욕과 탁월한 행위 동기”가 촉발된다는 것이다.



생정치



규율 권력은 표준화하는 권력이다. 그것은 주체를 규범, 명령, 금지의 체계에 예속시키고, 일탈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요소를 제거한다. 바로 이러한 조련의 부정적 성격이 규율 권력의 본질적 요소다.



푸코의 딜레마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푸코의 권력 분석에서 맹점으로 남아 있다. 푸코는 신자유주의적 지배 체제가 자아의 기술을 완전히 포섭했다는 것, 신자유주의적 자아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의 부단한 최적화가 지배와 착취의 효율적 형식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섬세한 형식을 취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개인을 예속시키지 않는다. 개인이 자발적인 자기 제어를 통해 지배 관계를 자신의 내면에 전사하도록 유도한다. 개개인은 이렇게 내면에 전사된 지배 관계를 자유로 해석하게 된다. 여기서 자아의 최적화화 복종, 자유와 착취는 하나가 된다. 자기 착취라는 형식으로 자유와 착취를 결합시키는 이러한 권력 기술은 푸코의 시야 너머에 있다.



힐링 혹은 킬링



사람의 인격을 긍정성의 강제 속에 완전히 묶어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정성이 없다면 삶은 “죽은 존재”로 쭈그러들 것이다. 부정성은 삶을 생동하게 한다. 고통은 경험의 본질적 부분을 이룬다. 삶이 순전히 긍정적 감정과 플로우 경험만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인간적 삶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영혼에 깊은 긴장을 선사하는 것은 바로 부정성이다.



끝없는 최적화의 명령은 고통마저 착취한다. 미국의 유명한 모티베이션 트레이너인 앤서니 로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CANI 원칙을 꼭 지켜라! Constant Never Ending Improvement. 부단히, 끝없이 개선할 것! 부단히 끝없이 더 나아지고 싶다는 소망, 모든 인간이 느끼는 소망을 솔직히 인정하라. 불만족, 긴장으로 인한 일시적인 컨디션 난조에서 생겨나는 스트레스가 다시 힘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당신이 삶 속에서 필요로 하는 종류의 고통이다.” 그러니까 오직 최적화라는 목적의 관점에서 이용 가능한 고통만이 용인되는 것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부정성의 폭력만큼이나 파괴적이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의식 산업을 활성화하며 이로써 결코 긍정 기계일 수 없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자아 최적화의 명령, 즉 더 큰 성과를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강제 속에서 몰락해간다. 힐링은 킬링으로 귀결된다.



친절한 빅브라더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금지하고 방지하고 억압하기 보다, 내다보고 허용하고 기획한다. 소비는 억제되지 않고 극대화된다. 결핍이 아니라 괴잉, 즉 과도한 긍정성이 생성된다. 우리는 커뮤니케이션하고 소비하도록 독려받는다.



우리는 고문과 협박으로 자백을 강요받는 대신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다 털어놓는다. 스마트폰이 고문실을 대신한다. 빅브라더는 이제 친절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감성 자본주의



게임화



마르크스의 가정과는 달리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변증법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새로운 착취 관계 속에 얽어맨다.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를 넘어서 사유해야 할 것이다. 자유를, 자유로운 시간을 정말 우리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말이다. 자유로운 시간은 오직 노동의 타자만이, 생산력이 아닌 다른 힘, 어떤 노동력으로도 전화되지 않을 어떤 힘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다. 즉 생산 형식이 아닌 어떤 삶의 형식, 완전히 비생산적인 어떤 것.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생산의 피안에서 쓸모 없는 것의 쓸모를 찾아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빅데이터



오늘날 수치와 데이터는 절대화되는 데 그치지 않고 섹슈얼하고 물신적인 성격까지 지니게 되었다. 예컨대 “양화된 자아”는 그야말로 리비도적 에너지로 작동한다. 다타이즘은 전반적으로 리비도적인, 심지어 포르노적이기까지 한 특성을 나아낸다. 다타이스트들은 데이터와 성교한다. 그래서 요즘에는 “데이터 성애자”에 대한 얘기도 종종 들을 수 있다. 데이터 성애자들은 “철두철미하게 디지털”하다고 한다. 그들은 데이터를 섹시한다고 느낀다. 디기투스(손가락)는 팔루스(남근)에 가까워진다.



빅데이터는 벤야민이 말하는 영화 카메라에 비유할 수 있다. 데이터 마이닝은 디지털 돋보기로서 인간의 행동을 확대하여 의식이 작용하는 행동 공간 뒤에서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또 하나의 행동 공간을 조명해준다. 빅데이터의 미시물리학은 액톰, 즉 의식에서 벗어나 있는 미시행동을 가시화할 것이다. 빅데이터는 또한 개개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집단적 행동 패턴도 드러낼 것이다. 이로써 집단 무의식에의 접근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미시물리학적 또는 미시심리학적 관계망을 “시각적 무의식”이라는 벤야민의 개념을 변형하여 디지털 무의식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으리라.



데이터 회사인 액시엄은 약 3억 명에 이르는 미국인의 개인 정보를 가지고 장사를 한다. 그러니 사실상 거의 모든 미국인의 개인 정보가 액시엄의 소유 아래 있는 것이다. 액시엄은 이제 미국인에 대해 FBI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액시엄은 인간을 70개의 범주로 나눈다.




액시엄의 카탈로그에 인간은 70개 종류의 상품으로 제시되어 있다. 필요에 따라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여기서 경제적 가치가 낮은 사람은 “웨이스트” 즉 “쓰레기”로 지칭된다. 시장 가치가 비교적 높은 소비자는 “슈팅 스타”그룹에 들어 있다. 나이는 36세에서 45세로 활동적이고,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며, 아이는 없으나 기혼이고, 여행을 즐기며 시트콤 ‘사인필드’를 시청한다.



빅데이터는 새로운 디지털 계급사회를 만들어낸다. “쓰레기”로 분류되는 사람은 최하층 계급에 속한다. 점수가 낮은 사람은 신용대출을 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파놉티콘과 나란힌 바놉티콘이 수립된다. 파놉티콘이 시스템에 갇힌 수감자를 감시한다면, 바놉티콘은 시스템에서 떨어져있거나 시스템에 대해 적대적인 자들을 불청객으로 낙인 찍고 배제하는 기구다. 고전적인 파놉티콘이 훈육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바놉티콘은 시스템의 안전과 효율을 보장한다.



빅데이터는 정신을 완전히 불구로 만든다. 순수하게 데이터의 힘으로 추진되는 인문과학은 더 이상 인문 과학이 아니다. 총체적인 데이터 지식은 정신의 원점에 놓여 있는 절대적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에게 통계 수치는 그저 인간이 무리 짓는 짐승이라는 것, “점점 더 인간이 똑같아진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이러한 획일화는 오늘의 투명사회, 정보사회의 특징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즉시 드러난다면, 일탈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투명성으로부터 타자, 낯선 것, 불일치를 제거하는 순응의 압력이 발생한다. 빅테이터는 무엇보다도 집단적 행동 패턴을 가시화한다.



다타이즘 자체가 동일화의 증대 경향을 강화한다. 데이터 마이닝은 기본적으로 통계학과 다르지 않다. 데이터 마이닝이 드러내는 상관관계는 통계적 개연성의 표현이다. 그것은 통계적 평균치를 계산해낸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유일무이한 것에 접근하지 못한다. 빅데이터는 사건을 보지 못한다. 역사를, 인류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은 통계적 개연성이 아니라 개연적이지 않은 것, 유일한 것, 사건이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미래도 보지 못한다.



체험과 반대로 경험은 비연속성을 바탕으로 한다. 경험은 변신을 의미한다. 어느 대담에서 푸코는 니체, 블랑쇼, 바타유가 말하는 경험이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떼어내어 주체가 더 이상 주체 자신이 아니게 되거나, 주체가 자신의 파괴 또는 해체로 내몰릴 지경에 이르게” 하는 어떤 것이라고 지적한다.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은 주체를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 경험은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가 주체를 예속 상태 속에 더 깊이 빠뜨리기 위해 이용하는 체험 또는 기분과 정반대다.



푸코가 말하는 삶의 기술은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을 낳는 자유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탈 심리화의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삶의 기술이란 심리학을 죽이는 것, 자발적으로, 또한 다른 개체들과도 어울리며, 아무 이름도 없는 존재, 관계, 특성 들을 생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이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심리학적 프로그래밍과 제어를 통해 지배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지속시키는 통치술이다. 따라서 자유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의 기술은 탈심리학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의 기술은 예속화의 매체인 심리정치를 무장해제시킨다. 주체는 탈심리화되고, 비워진다. 이로써 아직 이름이 없는 삶의 형식을 위한 자유가 생겨난다.



바보



바보는 현대의 이단아다. 이단은 본래 선택을 의미한다. 즉 이단아는 자유로운 선택을 쥐고 있는 자다. 그는 정통에서 이탈할 용기가 있다. 그는 순응의 압박을 용감하게 떨쳐버린다. 이단아로서의 바보는 합의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형상이다. 그는 아웃사이더의 마력을 보존한다. 순응의 압박이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오늘날, 이단적 의식의 날을 벼려야 할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다.



바보짓은 신자유주의적 지배 권력과 그것이 강제하는 총체적 커뮤니케이션과 총체적 감시에 반기를 든다. 바보는 ‘소통하지’ 않는다. 바보는 소통 불가능한 것으로 소통한다. 그는 침묵의 장막 속으로 들어간다.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 정말 말해질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순수한 내재성은 심리화되지도, 예속화되지도 않는 공허다. 내재적 삶은 비어 있는 만큼 더 가볍고, 더 풍부하고, 더 자유롭다. 개별성이나 주체성이 아니라 독특함, 특이성이 바보의 본질이다. 그래서 바보는 아직 개인도, 인격도 아닌 아기들과 근본적으로 닮았다. 개인적 속성이 아니라 비인격적 사건이 아기들의 존재를 이루는 핵심이다.



바보는 “그 누구와도 혼동되지 않지만 더 이상 이름이 없는” “호모 탄툼, 특성 없는 인간”을 닮았다. 바보가 들어갈 수 있는 내재성의 층위는 탈예속화와 탈심리화의 매트릭스다. 그것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해방시켜 “저 측량할 수 없는 텅 빈 시간 속으로” 보내는 부정성이다. 바보는 주체가 아니다. “차라리 꽃의 실존. 빛을 향한 단순한 트임”





-2015. 6. 16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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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2-20 공감(30) 댓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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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이 저에게 선물을 줬어요! 알라디너는 자유로워요.








"주인님이 저에게 양말을 줬어요! 도비는 자유로운 집요정이에요"




(영화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도비가 하는 말)







인터넷 서점 알라딘이 올해도 고객의 구매 기록을 수치화한 통계 내역을 공개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알라딘 홈페이지 위에 ‘당신의 총 구매 금액은 얼마일까요? 라는 문구가 적힌 배너가 보인다. 알라딘 구매 고객이라면 그동안 구매한 책이 총 몇 권이며 월평균 구매 금액은 얼마인지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가장 많이 구매한 작가가 누구인지, 거주지에서는 몇 번째로 책을 많이 구매했는지 등 다양한 구매 관련 통계도 확인할 수 있다. 서비스 오픈 16주년 기념 이벤트 기간 중 이벤트 대상 도서를 포함해 5만 원 이상 구매하면 책 표지로 만든 북 스탠드를 받는다. 알라딘 측에서는 구매 고객을 위한 16주년 특별 선물이라고 하는데 이 선물을 받으려면 지갑을 과감히 여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구매 과정에서 선택한 증정품에 따라 구매 마일리지가 차감된다. 도서정가제의 최대 할인 폭인 ‘정가의 15%’를 넘지 않기 위해서다.















알라딘은 구매 고객의 눈에 속삭인다. 당신은 16년간 알라딘과 함께했다고. 그러면서 당신의 구매 기록을 보여준다. 램프의 요정 지니(genie)는 알라딘의 소원을 다 들어주는 신령이다. 알라딘은 디지털화로 탈바꿈한 거대한 지니다. 일명 ‘디지털 지니’다. 알라딘 홈페이지를 접속하는 구매 고객이 지니에게 명령하는 알라딘이다. 그래서 알라딘 블로그를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알라디너’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부터는 구매 고객을 ‘알라디너’로 부르겠다) 디지털 지니는 알라디너가 가지고 싶은 것을 보여준다. 알라디너는 매달 디지털 지니가 선보이는 증정품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책을 주문한다. 디지털 지니는 책을 구매한 알라디너에게 선물을 준다. 5만 원 이상 책을 사지 않은 사람은 선물을 받을 수 없다. 디지털 지니는 16가지나 되는 알라니더의 기록들을 상세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알라디너에게 지금과 같은 독서 패턴을 쭉 유지하면, 80세까지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다고 알려준다. 자신의 구매 기록을 타인에게 공개하도록 권유까지 한다. 알라디너는 자신의 구매 기록에 흡족해하면서 수치화된 독서량을 블로그나 SNS에 공개한다. 16가지의 맞춤형 기록을 다 보여주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디지털 지니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알라딘과 함께해 주세요!”



심리정치 시대에 사는 대중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유로운 존재라고 착각한다. 신자유주의는 대중에게 자유를 허용한다고 약속을 하나, 현실은 자유를 얻으려면 자본이 필요하다. 즉, 자유를 누리기 위해 열심히 일해서 얻은 자본을 지불해야 한다. 자유를 얻기 위한 돈을 마련하려고 노동에 투입되다 보니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자유마저 희생하는 상황을 감수한다. ‘디지털 지니’ 알라딘이 운영되는 방식은 디지털 심리정치의 원리와 상당히 유사하다. ‘하고 싶다’라는 욕망을 창출하고 자발적으로 착취하게 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술이 심리정치라고 한다면, 알라딘의 디지털 심리정치는 알라디너에게 ‘책을 사고 싶다’라는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메피스토펠레스다. 독서를 권장하는 세련된 악마는 알라디너의 지갑과 구매 마일리지를 담보로 증정품을 준다. 알라디너는 매년 달라진 게 없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알라디너는 알라딘에서 읽고 싶은 책을 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읽고 싶은 책을 고를 수 있는 자유가 제한적이다.



‘알라딘 추천마법사’는 알라디너의 구매 내역, 클릭 내역, 블로그 활동 등을 기반으로 고객의 취향을 분석해 그에 맞는 최적의 도서를 추천해주는 서비스이다. 추천마법사는 사람과 사람 간의 상호 영향을 수집하는 빅테이터를 기반으로 한 추천 시스템이다. 알라디너의 구매 성향이나 관심사 등을 통계적으로 분석하여 알라디너에게 책을 추천한다. 최고의 책을 투표로 선정하는 ‘제6회 독자 선정 이 분야 최고의 책’ 이벤트에 알라디너는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의 최고의 책을 뽑을 수 있다. 추천마법사에 근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빅데이터는 우리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행동패턴, 무의식적 욕망까지 읽어 낸다. 한병철은 인간의 행동을 정량화하는 빅데이터가 자유의지의 종언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북플의 마니아 지수는 북플 내 모든 활동을 수치화한 것이다. 관심 있는 책에 별점을 주거나, 서평을 작성하면 누구나 특정 분야의 마니아가 된다. 결국, 지수를 높여서 어떤 분야의 첫 번째 마니아가 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책을 구입하고, 읽고, 글을 쓰는 일에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다. 알라딘의 스마트 권력은 소통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무제한의 자유를 허락하고 있지만, 알라디너는 '자유'라고 착각한 채 글이나 사진을 블로그에 채움으로써 스스로 노출하고 전시한다. 자기 노출의 정보는 더 많은 구매욕을 생성한다. 북플은 마니아 지수가 높은 알라디너와의 소통을 유도하여 마니아가 소개한 책을 읽도록(구매하도록) 장려한다.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디지털 파놉티콘’ 안에 욕망을 창출하는 심리정치가 작동된다.



한병철은 신자유주의 통치술에 벗어나려면 내면을 비우는 백치 상태가 되라고 말한다. 지폐를 가지고 놀다가 찢어버린 그리스의 아이들처럼 자유를 착취하는 대상을 멀리하자는 의미인 셈인데 대안이 현실적인 면에서 떨어진다. 돈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 속에 자본의 속박을 벗어나서 해탈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글에서 나는 알라딘의 마케팅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지만, 심리정치의 손아귀에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적으로 여유 있게 살아야지” 하고 큰소리를 치지만, 어느새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게 나다.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멀리하여 디지털 문맹으로 살겠다는 현대판 러다이트 족이 되고 싶지 않다. 디지털 사회를 거부할 수 없지만, 냉정하게 손익계산을 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너무나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정신을 차리려면 이런 중심 잡기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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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7-12 공감(25) 댓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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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말 자유로운가?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가?

스마트폰은 자유와 동시에 구속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나날이다. 스마트폰의 활용 중심에 분명 SNS가 있다. 소식의 창구역할이자 소통의 도구로 잠시도 떨어트려놓을 수 없는 무엇이 되었다. 폰 하나만 손에 들면 못할 것이 없을 정도로 활용도도 좋고 쓸모 있는 도구이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하기 보다는 검색해서 다수의 의견에 따르는 경향성이 농후하다. 점점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한 경우을 주변에서 심심찮게 만난다.



자유롭고자 선택한 것이 결국 자신을 구속하는 도구로 작동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이렇듯 스스로는 알아차리지도 못하면서 구속된 상태로 살아가는 것, 신자유주의 자본의 교묘한 지배방법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 그물에 걸려 노는 꼴이니 고단수의 지배방식이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모습을 파헤쳐가는 ‘피로사회’와 ‘투명사회’라는 저작들로 만났던 한병철의 또 다른 저작이 ‘심리정치’다. 한병철은 ‘할 수 있다’를 넘어 ‘하고 싶다’라는 욕망을 창출하고 이용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하게 하는 은밀하고 세련된 신자유주의의 통치술를 ‘심리정치’라고 부른다. 그의 전작들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피로사회'가 '심리정치'를 요청하고, '투명사회'가 '심리정치'를 강화한다’라는 흐름으로 현대사회를 파악하고 있다고 보면 된 것이다.



짧은 글들로 이어지는 이야기들 속에는 다소 학문적인 용어들로 인해 이해랄 수 있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스마트 권력이나 두더지와 뱀, 친절한 빅브라더와 같은 글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같은 맥락으로 파악된다. 바로 우리의 의식적, 무의식적 사고를 읽고 분석하며, 인간의 자유 의지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종해 자본에 의존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 핵심으로 읽힌다.



특히, ‘빅데이터’에서 분석하는 신자쥬주의사회의 특징으로 ‘개인이 네트워크 속에 자신의 일상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순간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며 내적 자아를 통제 당하게 된다는 것’에 있다. 바로 ‘‘사람들의 소비, 동선, ‘좋아요’ 등 온갖 행위 패턴들이 데이터화 되어 그 데이터를 통해 사람들의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에 주목한다.



"남들과 똑같은 기회가 주어져 있는데, 내가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라거나 "남들보다 자기계발에 게을렀다거나" 자책하는 식으로. 실패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묻도록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경찰이나 법으로 다스리는 것 보다 굉장히 효율적/비용 절감적인 '통제술'로 기능한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유를 착취당하고, 힐링으로 킬링’되는 사회가 바로 신자유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보이지 않은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자유로운 시간을 정말 우리 것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한병철은 우리 마음 자체가 자본의 인질로 붙들려 착취의 대상이 된 심리정치의 시대에 내면을 비우고 ‘백치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자본이 만들어놓은 자유의 그물, 자본의 유혹에 얽혀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함부로 가로질러간다.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 정말 말해질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어떻게 가능할까?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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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無盡 2015-03-27 공감(10)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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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가라, 브라질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어 놓았더니 / 잡지에서는 예쁜 것만, 신문에서는 거짓말만, 텔레비전은 웃긴 것만, 학교에서는 영어 수업만…….」 좋아하는 뮤지션의 어느 노랫말인데 실은 '/' 앞과 뒤로 나뉜 부분은 서로 자리 바꾸기를 해야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병철에겐 자유가 성공적 공동체와 동의어이고, 그 성공적인 공동체 즉 타인과 함께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은 거꾸로 강제적이다. 그러니까 자유가 강제를 초래한다는 거다. 정치가와 정당이 수동적 시민(소비자)에 대해 상품을 제공하는 납품업자가 되고 자유에 경쟁과 눈가림이 간섭하면, 해방되는 것은 자유로워야 할 시민이 아니라 자본이며 그 개인은 자본의 성기로 변모하는 이유에서다.(p.13) 엊저녁 우연찮게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본 드라마에서 아들이 물었다. 자유롭게 사는 것이 뭐냐고. 아버지는 말한다. 남이 이렇게 살아줬으면 좋겠다싶은 대로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생긴 대로 사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것, 그렇게 살아도 안 혼나는 것, 이라고. 당연히 그렇다. 자유가 진정 자유롭도록 느끼는 '자유의 유한한 테두리'가 설치되어 있으니 그 안에서라면 아무리 자유로워도 나는 꾸짖음을 당하지 않는다. 즐거이 춤이라도 추어야 할 것만 같은 제목의 영화 《브라질》에서 흘러나오는 말랑말랑하고 흥겨운 음악처럼 마음껏 살아도 된다. 단 '브라질'을 벗어나면 안 된다. 이런 규율 속에서 나는 누군가로부터 두들겨 맞지 않고 조용히 통조림 속에 욱여넣어져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거다. 많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잡지가 다른 어떤 인물보다도 예쁜 소녀의 얼굴, 즉 독자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예쁘면서도 독자들이 충분히 받아들일 정도로 순결한 소녀의 얼굴을 표지 모델로 선호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가?(월터 리프먼 『여론』) 한병철이 [신자유주의 = 좋아요-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뭔가? 한마디로 '자유로운 결정'이란 미리 정해진 가능성들에 대한 선택으로 전락했기 때문인데, 과도한 긍정성으로 무장한 채 인간을 금지(억압) 대신 유혹(친절)으로 낚시질하며 살금살금 꾀고 있는 까닭이다. 때문에 다투고 실랑이하며 물어뜯을 것이 도처에 널려 피곤한데도 나는 나 자신과 다시 한 번 드잡이를 해야 한다. '성공적 공동체'라고 착각하는 곳에서도, 동시에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데이터 속에서도. 「페이스북 같은 디지털 봉건 영주들은 우리에게 땅을 주며 말한다. 경작해라, 공짜로 주겠다. 그리고 우리는 미친 듯이 경작한다. 결국 수확을 걷어가는 건 봉건 영주들이며 이것은 소통의 착취다.」(<강렬한 시대 비판자 한병철을 만나다> 『심리정치』 부록) 짐승들 중에도 사로잡히면 곧바로 죽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을 떠나면 죽고 마는 물고기처럼, 마찬가지로 짐승들도 세상을 버리고 눈을 감는다. 천부의 자유 상태를 빼앗긴 후에는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 그러나 나는 이성이 있는 인간이다. 하여 한병철의 말대로 실제로는 노예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기는 성과주체인 양 살아간다. 이런 성과주체는 ‘절대적 노예’이다. 나를 보듬고 허용해주며 장려하여 내가 나 자신을 고문해 용이한 감시가 가능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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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코로만 2015-03-06 공감(10)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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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브라더와 빅데이터



군주의 권력이 군림하던 시대가 지나고 규율 권력의 시대가 왔다. 규율 권력을 기반으로 한 생정치는 개인의 몸을 정형하고, 인간을 규범 체계 속에 묶어두며 모든 것을 통제했다. 그리고 새롭게 도래한 신자유주의의 권력은 빅데이터를 통해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고 심지어 예측하는 심리정치의 시대를 알린다. 그것은 더이상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강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사라고, 더 하라고 부추길 따름이다. 긍정성의 과잉 상태야말로 신자유주의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권력의 차별성이다.




투명성이 강조되고, 개인은 이제 자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익숙해져 있다(SNS에 한번만 들어가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심리 지도를 구축한 빅데이터는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인간을 끊임없이 자아의 최적화를 욕망하는 경영자로, 자기 착취자로 만들었다. 빅데이터는 더이상 우리를 감시하지 않는다. 투명성이 강조되면서 만인에 의한 만인의 감시 체제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빅데이터는 우리의 모든 것, '좋아요'를 통해 표현되는 심리 상태까지 모두 기록하고 이를 바탕으로 예측할 따름이다. 근대의 빅브라더는 빅데이터로 전환된 것이다.




문제는, 이 책의 서술이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일치하는지 여부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그리고 내면의 기록이 범람하는 디지털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끊임없는 자기 혁신(이라고 쓰고 착취라 읽는다)과 최적화(힐링으로 대표되는 세태)를 추구하는 분위기를 보고 있으면 보이지 않는 빅데이터의 손길이 아른거린다. 하지만 눈을 조금만 돌려보면, 여전히 한국 사회는 빅브라더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회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잦아진 "2분 증오"의 편린들, 전혀 투명해지지 않고 감춰지는 정보들은 우리가 여전히 규율 권력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한없이 투명해지는 것은 소비자일 뿐, 우리에게 소비재를 제공하는 대상은 전혀 투명하지 않다. 신자유주의가 노동자를 자기 경영자로 탈바꿈시켜 자신의 자유를 착취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친절해진 빅브라더/빅데이터는 여전히 베일에 감춰져 있다. 우리의 욕구를 우리 자신이 인식하기도 전에 그것을 예측해 눈앞에 내놓을 따름이다.




한병철의 책을 처음 읽었는데, 다른 작품인 『피로사회』와 『투명사회』도 이 책의 연장선상에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심리정치』가 셋 중에 가장 나중에 나온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결국 피로는 자기 착취가 진행 중임을 나타내는 표지일 것이고, 투명사회는 디지털 심리정치를 가능하게 한, 빅데이터의 탄생을 초래한 원인일 것이다. 저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날카롭게 벼려져 현대 사회의 이면을 찌르고 있고,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명료하게 표현할 수 없었던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생각이 언어화되어 있었다. 다만 한국 사회가 규율 권력의 시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에 잘 적용되지 않았을 따름이다. 빅브라더와 빅데이터가 뒤섞인 이곳은 아직 권력이 '스마트'해지진 않았다.




저자가 내리는 결론은 "바보"가 되는 것,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커뮤니케이션과 네트워크에서 벗어나 있는, 어떤 상상을 초월하는 외부 공간"에 거주하는 것, 그로 인해 주체로부터 해방되고 탈예속화·탈심리화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 바보가 되는 길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을 낳는 자유의 실천"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은 결국 개인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어떤 흐름을 형성해서 신자유주의 질서에 반하는 새로운 변혁을 창조할 수 있을까? 이미 자본이 부여한 자유의 착각에 깊이 얽혀버린 현대인에게, "바보"가 되는 길은 새로운 인간형의 등장뿐인가? 내가 이토록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보"가 되는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 이미 견고해진 구조에 맞설 수 있는 개인의 의지를 신뢰할 수 없게 되어서인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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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2016-05-04 공감(9)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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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은이),김태환 (옮긴이)문학과지성사2012-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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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100자평(97)리뷰(124)

책소개
독일 최고 권위지〈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이 극찬한 책. 저자 한병철은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로, 서양 철학의 언어를 구사하며 그 속에 동양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새로운 종류의 문화비판가로 떠올랐다. 이 책에서 그는 현대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적대성 내지 부정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에서 그러한 부정성이 제거된 사회,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의 변화가 20세기 후반 이후 일어났다는 것이다.

한병철 교수는 이 새로운 사회를 성과사회, 그리고 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성과주체라고 명명한다. 과거의 사회가 금지(“해서는 안 된다”)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긍정의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성공하라는 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규율이며, 성공을 위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이다.

그러나 부정성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긍정성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귀결되며 타자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른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자아는 피로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은 우울증을 낳는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한병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피로사회|
신경성 폭력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깊은 심심함
활동적 삶Vita activa
보는 법의 교육
바틀비의 경우
피로사회

미주

|우울사회|

미주
역자 후기



책속에서


첫문장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시대마다 그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수있다 -11쪽 - mira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것이다. " -28쪽 - mira
긍정성의 과잉상태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자신을 착취한다. -27쪽 - mira
다윈이래 인간은 동물에서 유래한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이제는 다시 동물로 변신하려는 중일지도 모른다.-40쪽 - mira
피로사회 잉여사회 부정성 - 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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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위대한 사상가의 짧은 에세이. 카를스루에의 철학 교수 한병철은 영리하고도 독창적인 방식으로 오늘의 성과사회를 진단하고 그에 더해 심심함과 분노라는 처방을 제시한다.

- 쿨티베르줌

한 권의 철학책이 2주 만에 매진되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이 짧은 철학 에세이는 ‘우울증’과 ‘세계사’를 향해 동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데서 그 성공의 비결을 찾을 수 있다.

-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영감을 주는 피로
- 이다혜 (씨네21 기자, 에세이스트, 북칼럼니스트)

피로한 마음, 누일 곳을 찾아라
- 장석주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성공 경쟁사회가 건 최면 자기착취
- 한겨레

피로를 거부하는, 조용한 대중이 성장하다
- 방누수

피로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 전안나

피로의 새로운 의미를 찾다 _ 장동석_

- 경기문화재단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2년 03월 10일 '인문사회'
조선일보
- 조선일보 북스 2012년 12월 15일자
최재천 (민주당 전 국회의원)
- <시사IN>이 선정한 올해의 책, 2012 행복한 책꽂이
김승환 (전라북도 교육감)
- 교육감은 독서중 (모악 刊)



저자 및 역자소개
한병철 (Byung-Chul Han)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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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살아 있는 철학자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철학, 독일 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베를린예술대학교 철학ˑ문화학 교수를 지냈다.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그의 대표작 『피로사회』는 2012년 한국에도 소개되어 주요 언론 매체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등 한국 사회를 꿰뚫는 키워드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투명사회』, 『에로스의 종말』, 『서사의 위기』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저자는 최신작 『불안사회』에서 불안... 더보기

최근작 : <[큰글자도서] 불안사회>,<불안사회>,<생각의 음조> … 총 120종 (모두보기)

김태환 (옮긴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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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했다. 현재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이다. 지은 책으로 《문학의 질서》, 《미로의 구조》, 《우화의 서사학》, 《실제 저자와 가상 저자》, 《우화의 철학》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모던/포스트모던》, 《피로사회》, 《투명사회》, 《에로스의 종말》, 《변신·선고》 등이 있다.

최근작 : <카프카, 카프카>,<우화의 철학>,<일꾼과 이야기꾼> … 총 47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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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정신병동 수기>,<소설 쓰는 로봇>,<빛과 실>등 총 1,940종
대표분야 : 한국시 1위 (브랜드 지수 2,037,235점),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5위 (브랜드 지수 1,114,069점), 철학 일반 10위 (브랜드 지수 87,531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우울증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대한 우아하고도 날카로운 철학적 진단!

“피로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독일 최고 권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 2010년 10월 2일자에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의 한병철 교수의 철학적 업적을 조명하는 특집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에서 한병철 교수는 새로운 종류의 문화 비판의 개척자로 묘사되고 있다. 문화 비판은 니체, 프로이트, 아도르노, 벤야민 등 독일 사상의 중요한 전통을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독일의 최고 권위지가 한국 출신의 철학자에게 문화 비판의 혁신자라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은 범상하게 넘겨볼 일이 아니다.
위 기사의 필자인 마르크 지몬스는 지금까지 중국, 일본, 한국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경제적, 기술적으로 인상적인 업적을 보여주었을지 모르지만 서양에 대해 거의 아무런 사상적 영향도 주지 못해왔다고 지적하면서, 한병철이 이러한 사상적 침묵을 깨고 동아시아적 시각에서의 문화 비판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것은 곧 한병철 교수가 독일의 지성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최초의 동양인 철학자임을 의미한다. 고국에서 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하여 독일의 권위 있는 출판사들에서 꾸준히 저서를 출간해온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를 통해 이제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로, 서양 철학의 언어를 구사하며 그 속에 동양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새로운 종류의 문화비판가로 떠올랐다.

『피로사회』는 출간 즉시 철학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큰 화제가 되었다. 거의 모든 독일의 주요 신문과 방송 매체들이 이 책을 비중 있게 다루었고, 시대의 핵심적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친 책으로서 격찬하였다.
한병철 교수는 이 책에서 현대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적대성 내지 부정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냉전, 면역학, 규율사회)에서 그러한 부정성이 제거된 사회,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의 변화가 20세기 후반 이후 일어났다는 것이다. 한병철 교수는 이 새로운 사회를 성과사회, 그리고 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성과주체라고 명명한다. 과거의 사회가 금지(“해서는 안 된다”)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긍정의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성공하라는 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규율이며, 성공을 위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이다(“Yes, we can!”). 그러나 부정성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긍정성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귀결되며 타자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른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자아는 피로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은 우울증을 낳는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한병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이 책에서 성과사회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화가 낳은 결과로 해석된다. 더 큰 성과를 올려서 더 큰 성공을 거두고자 하는 개개인의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자본주의는 전체적인 생산성을 극대화해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착취는 이렇게 해서 자발적인 착취의 양상을 띤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노동수용소를 짊어지고 있다. 범람하는 성공학 도서들이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경영자입니다”라고 말할 때, 한병철은 그것을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착취자입니다”라고 읽는다.
한병철은 성과사회의 과잉활동, 과잉자극에 맞서 사색적 삶, 영감을 주는 무위와 심심함, 휴식의 가치를 역설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피로’의 개념도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성과사회에서 ‘피로’란 할 수 있는 능력의 감소이고, 그저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무위의 가치에서 출발하는 한병철은 피로가 가진 또 다른 측면을 본다. 피로는 과잉활동의 욕망을 억제하며, 긍정적 정신으로 충만한 자아의 성과주의적 집착을 완화한다. 피로한 자아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유아론적 세계에서 벗어나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한병철은 모든 권위를 타파하고 가장 완전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한 서구 사회, 부정성이 거의 완전히 제거된 듯한 긍정성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의문, 다시 말해 “왜 우리는 여전히 진정 자유롭지 못한가?”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가?”라는 의문에 대해 명석한 답을 제시해준다. 그것이 바로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독일에서 이 책이 그토록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이유일 것이다.

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 묘사되는 성과사회의 모습은 상당 부분 한국 사회의 현실과도 일치한다. 이 점은 긍정의 힘을 통한 성공을 설교하는 처세 관련 책들이 한국의 도서 시장에서 얼마나 많이 팔리고 있는지를 보더라도 확인된다. 한국인이 바라는 이상적 사회의 모습은 아마도 능력(업적)과 성공의 일치일 것이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노래 실력 하나만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의 우승자가 된 허각에게서 사람들이 본 것도 그러한 이상이다. 하지만 능력(업적)=성공이라는 이상은 능력(업적)을 최상의 가치로 만드는 성과사회의 패러다임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이상적인 사회의 목표가 될 수 없음을 한병철의 책은 깨닫게 해준다. ‘존재하려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가 모든 개개인의 마음속에 내면화된 지상 과제가 될 때 사회는 한병철의 말대로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양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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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한병철의 가장 유명한 저작을 읽다. 피로 사회와 우울 사회 두 챕터로 되어 있는데 피로 사회의 개념이 워낙 알려져서인지 우울 사회 내용이 더 마음에 와닿았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라는 그의 일갈은 얼마나 적확한 것인가. 또한 과거에 우리가 강요받았던(하지만 요즘... 더보기
JYOH 2025-01-01 공감 (2) 댓글 (0)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들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성과주의 사회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우울증 환자는 분노하는 법도 잊어버리고 과잉긍정에 시달린다. 무언가를 부정하고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돌이켜 생각하기‘가 필요하다. 모두가 타버려 소진되기 전에!
은하수 2024-12-26 공감 (23) 댓글 (0)

평점
분포

8.6






성과주의, 긍정성 과잉, 과잉활동 시대에 스스로를 착취하면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소진되고 결국 우울증에 빠지는 현대인의 초상. 멍 때리기. 가만히 있기. ‘쓸모 없음의 쓸모’- 우루사를 까 먹으면서 자기를 채찍질하기보다는 나는 계속 이렇게 누워서 책 읽으며 살련다.
잠자냥 2023-08-30 공감 (36)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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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취와 피착취를 뒤섞어 놓으니,˝자본주의적 자기 착취˝와 같은 괴상한 결론이 나온다. 모두가 피해자라고 여기니 해결책이 허망한 것도 당연하다. 그가 제시하는 ˝무위의 피로˝는 구조적 부조리를 조망하는 시선의 부재를 드러낼 뿐. 부정성이 사라진 것과 부정성을 보지 못하는 무능력은 다르다.
브리콜라주 2013-09-10 공감 (1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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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독일(넓혀 보아도 서구) 사회를 전제로 하는, 기본적으로는 인상비평일 수 밖에 없는 이론서. 이론서 치고는 선언적. 그럴듯하지만, 아, 그렇습니까, 그리고 끝.
melona 2012-03-15 공감 (2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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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능력과 성과로 평가하는 사회에서
나 자신까지 나를 평가하며 좌절하고 우울해지는
멍청한 정신세계로 꾸역꾸역 기어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치유 2015-01-28 공감 (1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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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과잉의 세상. 예스 위 캔을 외치는 오늘날 과연 우리는 자신을 자기가 만든 노동 수용소에 가둬 놓고 자신을 착취하고 있는건 아닐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유까뮈 2012-03-14 공감 (2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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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한병철, 번역: 김태환



바랜 보라색 책의 표지를 꽤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한 병 철

김태환 옮김




한 명은 저자이고 한 명은 역자인데, 둘 다 한국 사람 이름이다. 내가 지금 한국에 있고, 표지가 한글이니 김태환은 한국 사람일 것이다. 한병철. 귀화한 외국인 느낌이 나는 이름은 아니다. 사실 그런 느낌의 이름이 어떤지 모른다. 표지를 들쳐보고서야 알게되었다. 한병철님은 한국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독일에서 철학, 독일 문학, 카톨릭 식한을 공부하고 하이데거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따고 현재 독일 카를수르에 조형예술대 교수로 재직 중 (2012년 기준)이다. 한국 사람이 독일에서 독일어로 책을 내고, 그 책을 한글로 번역 한 것이다.




저자와 역자의 색다른 국적과 언어처럼 '피로사회'의 논지도 '긍정'과 '피로'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다룬다.




근대는 외부로부터의 억압과 착취가 있었다. 지배층, 차별, 사상, 질병 등 나와 외부와의 대립과 그로 인한 개인이 내가 세상에 대한 피로였다. 외부로부터 착취였다.

현대는 그 외부들은 점점 사라졌고, 개인이 밝은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 긍정 에너지를 가득 받게 되었다.

외부의 적들은 모두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민주주의, 평등, 면역학, 그리고 자본주의. 그런 것들이 모두 나의 문제와 동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나의 내부와 외부의 갈등과 마찰의 지점에서 나의 내부에 자리 잡게 되었다. 무한한 긍정은 무한 경쟁을 부추겼고, 만족이 없는 끝없는 성취는 스스로의 착취를 낳았다. 충천의 '심심함'은 '나태'로 자아비판하게 되었다. 보이지도 인지되지도 않는, 적인지 나 자신인지 분간할 수도 없는, 내부의 요소들로 스스로 착취하게 되었다. 피곤이 아닌 부정적 피로가 가득하게 되었다.

기업의 발전과 도약을 위한 멈출 수 없는 모멘텀을 우리 각자는 스스로 짊어지게 된 것이다.




한병철은 이 보라색 책에서 '피로사회'와 '우울사회'로 그것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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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03-12 공감(4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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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병들었어요



얼마전 미드를 보다가 내가 주인공들이 일하는 모습을 강렬하게 동경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나는 내가 러브라인이나 해피엔딩이나 주인공들이 일하는 고층빌딩의 반짝이는 야경을 동경한다 생각했는데 미드 시청 10년 차에 그간 가장 열망하고 동경했던 건 사실 그들의 일하는 모습이었단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의 일하는 모습이란? 상사에게 쪼이고 밥벌이의 고단함을 토로하는 범인과 달리 잘나가는 커리어우먼 전문직의 모습들. 좋아하는 일을 신나서 열정적으로 하고 엄청 많은 돈을 벌고 그리고 그 돈을 마음껏 쓰는 모습. 명장면 명대사를 꼽자면 '로맨틱 할리데이'에서 헐리우드의 일급 영화예고편 제작자인 카메론 디아즈가 자신의 작업물을 보여주며 자신만만하게 "That's why they pay me big bucks." 라고 말하는 컷. 내가 얼마나 중증으로 일하고 성취하는 캐릭터에 경도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이런 내 모습에 대해 나는 문제의식은 커녕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거라 믿었다. 회사에서 하루종일 정신없이 일을 하고 때때로 노트북을 들고 복도를 뛰어다니며 난 제대로 살고 있다는 근거없는 믿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한병철은 이런 내가 병들었다 한다. 강제와 규제로 노동생산성을 최대로 올리던 이전 사회가 생산성 향상의 한계에 도달하자, yes we can 을 구호로 외치며 개인이 자신의 자아실현이라는 명목으로 스스로를 착취하고 생산성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긍정성 과잉 사회가 도래하였고, 이 시대의 대표적 병리환자가 바로 나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결국 지친 개인은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자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의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는데, 21세기 현대인들의 질병은 우울증과 소진증후군이며 그 이면에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는 그의 분석은 탁월하다. 요즘 쏟아지는 힐링이 어쩌고 하는 현대인 마음 위안용 책들은 한병철의 분석 앞에 껍데기뿐인 가짜로 전락할 뿐이다. 내가 나를 착취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일시적인 마음비우기는 절대로 해답이 되지 못할것이다.




문득. 무서워졌다. 늘 의심하고 진짜만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생각했는데 내가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니 내가 내 삶을 분별있게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달까. 그의 분석을 부인하기에는 우울증이며 소진증후근이며 경계성성격장애 등 그가 열거하는 병명들로부터 어느 하나 자유롭지 못하다. 나이가 들수록 분위기가 가라앉고 인상이 변하는 게 단순히 사회생활에 닳고 나이가 들어서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주도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의 끝없는 반복에 지쳐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한병철의 말이 10배쯤 더 신빙성 있어 보인다. 늘 독립적이고 능력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감내해야 하는 고통은 성인으로서 당연히 아무 말 없이 꾹 참아내어야 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것이 나에 대한 나의 착취임은 감히 상상도 못한 채..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거의 찢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수동성과는 정말 거리가 먼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고 유적과정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간다면 적어도 동물 특유의 느긋함이라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정확히 말해서 전혀 동물적이지 않다. 그는 과도하게 활동적이고 신경과민 상태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자아를 지키는 것이 노동에 매몰되지 않고 나를 지키는 것이라 믿었는데 이 뒤통수. 이제 나를 어찌 다시 지켜내어야 할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다. 가슴이 아푸다.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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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2-10-01 공감(50)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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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불 안 가리고
















강 건너 빌 보듯 :



물불 안 가리고








1970년 강건너 빌보드 차트 1위 곡은 사이먼 앤 가펑글의 <<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 라는 팝송이었다. 피로하고 지친 당신이 작게만 느껴지고 /



당신의 눈에 눈물이 고이면 / 내가 닦아 줄게요 / 험한 물살 위에 다리가 되어 드릴게요 / 견디기 어려운 밤이 찾아올 때 / 내가 당신을 위로해 드릴게요 / 네가 당신 편에 서 드릴게요...... 한국에 << 여러분 >> 이란 가요가 있었다면 미국에는 <<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 라는 팝송이 있었다. 1970년이면 오일쇼크로 전세계가 휘청거렸던 시대이니 남성 듀엣이 부르는 달달한 하모니에 피로한 대중이 응답한 모양이다. 가사를 음미하면서 듣다가 문득 19살 수리공의 죽음이 떠올랐다. 우리는 과연 험한 세상에 필요한, 야곱의 사다리를 만들 수 있을까 _ 그런 낙담. 이 글은 힘과 불에 대한 이야기다.



추운 겨울에도 런닝을 하고 나면 땀이 난다. 몸은 힘(力)을 쓰면 열(火)이 발생하기 마련. 발열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한자 勞 : 일할 노/로'는 이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노동자란 결국 자신의 심지(心-)에 불을 붙여 열-에너지'인 노동(勞動)을 파는 직업군'이다. 그것은 촛불과 같아서 힘(力)과 불(火)을 팔아 재화를 얻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노동자의 운명이다. 노동이 몸을 움직여서(動:움직일 동) 힘과 불을 만들어낸다는 측면에서 노동에 의한 열 에너지 생성은 운동 에너지이면서 위치 에너지의 성격을 띤다.



반면 근로(勤勞)는 노동자의 유한한 힘과 불을 최대한 착취하려는 형국이다. 한자 근(勤)에서 음에 해당되는 菫 : (노란)진흙 근'은 동물 가죽을 불에 말리는 모양으로 건조 과정에서 가죽에 바르는 흙과 불이 결합된 글자'다. 즉, 근로'라는 조합은 노동자의 힘과 불을 강화하는 성격이 짙다. 한자의 형국만 봐도 앙상한 가죽이 될 때까지 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려는 모습이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 勞와 勤의 사전적 의미만 보아도 그 차이는 분명하다. 勞의 뜻은 < 일하다 > 이고, 勤의 뜻은 < " 열심히 " 일하다 > 이다. 기득권 세력인 자본가가 노동자를 악착같이 근로자'로 바꿔부르는 이유이고 노동자의 날을 근로자의 날로 강제하는 이유'이다.



그들이 보기에 노동자가 " 일하는 것 " 은 일하는 게 아니다. 하는 일도 없으면서 꼬박꼬박 월급만 받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노동자가 " 땀 흘리며 부지런히 일해야 " 노동자'답다고 생각한다. 철학자 한병철은 한국 사회를 << 피로 사회 >> 로 규정했다. 疲 : 피곤할 피에 勞 : 일할 로'이다. 한자 疲의 부수가 疒 : 병들어 기대다' 이니 피골이 앙상한, 가죽만 남은(皮 : 가죽 피) 몸으로 병실에 누워 있는 사회'란 말이다. 근로자의 미래는 피로 사회'인 셈이다. 피로 사회는 곧 과로 사회이며 과열 사회'이다. 철학자 한병철이 과로 사회나 과열 사회'라고 명명해도 될 것을 굳이 피로 사회'라고 한 데에는



앙상한 가죽만 남은 채 병실에 누워 있는 상징성 때문에 선택한 결정이 아닐까 싶다. 근로(勤勞), 피로(疲勞), 과로(過勞), 과열(過熱), 열심(熱心), 열정(熱情)의 공통점은 불기운'이다. 이들 한자의 부수는 모두 불(火, 灬 ) 이다. 곰곰 생각하면 한국 사회를 작동시키는 에너지는 불기운'이다. 노동의 가치는 폄하되고 근로의 가치가 숭앙받는 사회이며, 삶의 목표는 열심히 하는 것이다. 또한 열정은 올바른 청년을 상징하는 키워드'이다. 우리는 단 한번도 < 열심히 살아야 된다 > 거나 < 열정을 불태워라 > 라는 문장을 의심한 적이 없다. 삶은 열심히'라는 부사가 수식해야 가치가 있고 열정은 불태워야 멋있다.



하지만 그것은 소진일 뿐 생성이 아니다. 차가운 물은 떨어지면 위치 에너지(수력발전소)를 발생하고 뜨거운 불은 화력 에너지(화력발전소)를 발생하지만, 전자는 재생이 가능하지만 후자는 재생이 불가능하다. 다 타버린 불쏘시개는 재생산되지 않고 재로 남는다. 19살 수리공은 끼니를 챙길 시간도 없어서 연장을 담는 가방 속에 컵라면과 숟가락을 챙겼다고 한다. 끼니를 챙길 시간도 없이 땀 흘려 일을 하니 자본가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모범적인 근로자상'이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쇄신(碎身)이었다. 뼈를 가루로 만들고 몸을 부순다는 뜻으로, 정성으로 노력한다는 의미인 (분골)쇄신은 역설적으로 문자 그대로 쇄신'이 된 것이다.



불꽃 투혼(한화)이라는 말로 포장된 과잉 근로 예찬의 결과는 참담할 뿐이다. 김성근은 근로를 예찬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휴식보다는 훈련을, 실수에는 징벌을 내리는 감독이다. 이기기 위해서는 물불 안 가리는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그가 한국의 모범적 리더'란다. 김성근이 박근혜와 악수를 나눈 장면은 상징적이었다. 병든 사회, 불 보듯 뻔한 결과'였다. 불보다는 물이 필요한 사회'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은 온실 가스'가 아니라 노동자를 한갓 불쏘시개로 생각하는 근로 사회'가 만든 결과가 아닐까 싶다. 물불 안 가리는 사람은 되지 말자. 불을 보면 강 건너 불 보듯 하지 말고 끄읍시다. 물과 불은 가립시다, 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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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6-01 공감(24) 댓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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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다시, 제자리에서 말하기








분단 이후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서 전개되어온 남한의 현대사는 이중 부정성, 이중 타자의 문제에 시달려왔다. 즉 이데올로기적 타자(북한)와 민족적 타자(미국)의 문제. 이 때문에 근대적 의미에서 자아를 지키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혼선을 빚게 된다. 이데올로기적 타자에 대한 부정은 민족적 타자에 대한 부정(민족적 정체성의 구성)을 방해하고, 민족적 타자에 대한 부정은 이데올로기적 타자에 대한 부정(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의 구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124쪽)






우리는 이제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이래로 우리를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했던 이중의 부정성이라는 문제에서-여전히 이런저런 불안 요인과 염려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점차 빠져나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이중의 부정성 문제를 어떻게 단순화하느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형성된 남한 특유의 정치 지형(보수-진보의 대립 구도)도 조만간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126쪽)






이글은 저자의 논지가 타당하다는 것을 전제로 쓴 김태환의 <역자 후기> 일부입니다. 이 내용에 저자가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리뷰 닫는 글을 씁니다. 이 글이 2012년 12월 치러진 대선 이후 요동치는 대한민국의 광경, 특별히 세월호사건을 목도하고 쓰였다면 또 다른 내용으로 채워졌을 수도 있었으리라 짐작해볼만합니다. 그러나 초판 1쇄가 나온 이래 40여 쇄가 찍히는 동안 다시 쓰지 않은 것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김태환이 남한의 현대사를 이중 부정성 문제로 이해하는 내용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리며, 그 전망 또한 긍정성 사회의 도래를 간명하게 안내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내용의 설득력은 문제를 단순화한 데서 오는 편의처럼 다가오고, 전망의 간명함은 추상의 착시처럼 감지됩니다. 이 글이 본격적으로 남한 사회와 그 역사의 성격을 논하려고 내놓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피로사회』에 대한 ‘축사’로 읽힐 위험성이 다분히 있어 보입니다.






김태환은 남한 사회의 이중 부정성을 이데올로기적 타자인 북한과 민족적 타자인 미국의 길항으로 놓습니다. 그런 대립구도 형태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실체는 대부분 허구에 가깝습니다. 미국은 제국주의며 조국은 하나라고 주장하는 힘과 북한은 주적이며 미국은 형제라고 주장하는 힘의 ‘대결’이 실제로 남한사회에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제국주의며 조국은 하나라고 주장하는 힘은 이른바 사회구성체논쟁 과정에서 NL로 불리다가 나중에 주사파로 헤게모니 일부가 넘어가기도 한 극소수 ‘운동권’ 진영에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남한 사회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이들 자체의 힘이 아니라 이들을 거대 세력을 부풀리고 권력의 획득과 유지에 이용한 집단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그러니까 북한은 주적이며 미국은 형제라고 주장, 또는 어쩔 수 없이 동조하는 자들이 줄곧 남한의 권력을 잡아왔으므로 남한의 이런 이중 부정성 문제는 위장된 것입니다. 이 진실을 누락시킨 문제 상정은 안일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진실 은폐에 일조하는 것입니다.






이중 부정성의 문제가 실제 어떤 대결로 일어났던 것은 80년대 NL과 PD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한 사회가 식민지인가 아닌가, 자본주의인가 아닌가,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싸웠던 운동권 내부 경험이 실재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이 경험을 전거로 들며 남한 사회와 역사를 논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럴 가치가 없어서라기보다 그럴 힘을 얻지 못한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일제의 식민 통치가 외부의 힘으로 갑자기 종식되면서 남한 사회가 겪은 정체성 혼란의 진원은 김태환이 말한 민족적 타자인 미국이나 이데올로기적 타자인 북한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식민지 및 신식민지 전략을 구사한 미군정(청)입니다.






미국이 민족적 타자인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그 동안 거의 전혀 타자로 인식되어오지 않은 것 또한 명백합니다.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은 일제의 식민지체제 근간을 유지한 채 식민지 부역 세력을 그대로 온존시키면서 미국적 콘텐츠를 각 분야에 이식하였습니다. 이 전략에는 두 가지 노림수가 있었습니다. 하나, 매판적 본질을 지닌 식민지 부역세력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갈아탈 뿐 민족적 정체성 문제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민족적 부정성의 문제를 가만히 앉아서 사라지게 하는 효과를 거두는 방법입니다. 그들의 약점을 거머쥐고 표면에 내세우면 신식민지 전략을 손쉽게 연착륙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 식민지 부역세력이 자기들의 매판적 본질을 덮기 위해 북한을 주적으로 삼아 반공 이데올로기를 생산함으로써 남한 내부를 허위 이데올로기적 타자 문제로 환원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남한 사회는 명실상부 민족적 정체성 구성을 위한 이론적·실천적 싸움을 한 적이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미국의 신식민지 상태로 깊이 침륜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이데올로기적 타자인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북한을 타자라고 보기에는 남한 자체의 이데올로기적 부정성이 너무도 심각한 것 또한 명백합니다. 북한이 정말 이데올로기적 타자라면 남한이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북한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세습독재만이 아닙니다. 남한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제대로 된 것인지 문제 삼아야 합니다. 남한의 부정불의를 덮기 위해 북한을 동원하는 것 따위를 가지고 이데올로기적 부정성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남한의 이데올로기적 부정성 문제의 중심은 민주주의와 공화국을 유린하는 남한의 허울뿐인 민주주의와 사실상의 독재국과 관련된 것입니다. 북한은 이 부정성 문제의 일개 변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된 이데올로기적 타자는 이승만 이후 남한의 권력을 독식해온 반민주주의·반공화국 세력입니다.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과 북한의 타자성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 상황을 들여다보면 김태환이 말하는 이중 부정성, 이중 타자의 문제의식은 피상적 또는 도식적인 것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한 현대사 이중 부정성 문제의 비틀림, 그 분열과 착종의 부조리한 전개에 결정적 이니셔티브를 행사한 것은 물론 군정청을 교두보로 한 미국의 신식민지주의 세력입니다. 일제 식민지에 이어 미국의 신식민지 세력에게까지 부역하면서 남한 현대사를 치욕으로 몰아간 세력이 다름 아닌 남한의 매판독재분단세력입니다. 현재 남한 사회의 모든 권력과 부가 저들의 독과점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 독과점을 더욱 공고히 영구히 하려고 저들은 제국의 자본에 민족혼을 팔고, 민주공화국을 압살하며, 이 생명공동체의 연속성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대선 부정, 세월호사건, 일본군성노예문제 합의, 개성공단 폐쇄 등 일련의 정치적 협잡을 통해 드러나는 두 세력 간의 역학관계를 보면서 이중 부정성의 문제에서 점차 빠져나가는 중이라고 진단하는 것은 아무래도 나이브하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서구 사유에 젖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순이나 역설을 다루는 사유의 방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정과 긍정은 모순개념이고 이 모순 사이에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서구 형식논리학의 배중률입니다. 그러나 실재 세계에는 부정이기도 하고 긍정이기도 한 중간, 부정도 아니고 긍정도 아닌 중간이 존재합니다. 이 중간 상태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배중률을 사유의 중요한 한 축으로 삼는 서구 사유로는 쉽지 않습니다. 동아시아 사유는 그 중간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감수성을 지녔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정과 긍정 사이에 ‘인정’이 있습니다. ‘인정’이야말로 실재를 관통하는 사유입니다. 실재의 세계는 모순을 그대로 품은 ‘인정’의 세계입니다.






식민지와 독립 국가는 모순입니다. 전자는 부정이고 후자는 긍정입니다. 식민지와 독립 국가 사이에 신식민지가 있습니다. 신식민지는 인정의 세계입니다. 인정의 세계에 낯선 서구 사유로는 자기들이 만든 것이면서도 신식민지를 낯설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유에서 받아들이기 힘들 테지만 저들이 낳은 사생아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 점에서 서구인들은 영원히 부정성과 긍정성의 대립·이행 문제를 풀어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 배운 비서구인들도 공부에만 머물면 그리 될 것입니다. 한병철도 김태환도 아직 공부에 머물러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와락 기우가 들이닥칩니다.






모든 사유, 모든 글쓰기는 자기 자신의 현재 삶 자리를 깔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계이기도 하고 책무이기도 합니다. 세월호사건, 아이들에게 던져진 한마디 말로 요약되는 오늘 여기, 대한민국이 제 삶 자리입니다. 이 말이 과연 부정성에서 빠져나가는 표지일까요?






“가만있어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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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i_che 2016-06-09 공감(2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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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출간 8주년, 다시 성과사회를 진단하다



『피로사회』는 2010년 가을 독일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나오자마자 현지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5p), 이어 2012년 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본이 나왔다. 한국에서 역시 이 책은 상당한 반향을 얻었다. 국내 유력 일간지에서는 여러 편의 소개 기사가 실렸고, 많은 이들이 이 책 내용을 인용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는 『피로사회』가 출간된 그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성과 경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우리나라 현실상 책의 주제가 많은 사람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책은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11p)는 이제는 유명해진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항생제 발명 이전의 시대는 박테리아(세균)와 바이러스의 시대였다. 이들은 ‘외부성’과 ‘부정성’을 대표하는 것들로, 생물체의 내부에서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타자성’을 지닌 존재다. 저자는 이를 사회를 해석하는 틀로 확장한다. 개인적 혹은 사회적 차원에서, 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을 부정하여 자아를 관철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대비되는 ‘적’이 확실한 존재로 드러난다. 냉전 시대의 진영 대립과 같이 명확한 동지와 적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반면 이질성이 실종된 현대에는 면역학적 패러다임이 더는 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는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계와 문턱이 사라져가는 21세기에는 세계가 점점 같아지고, 모두가 성과만을 추구한다. 인터넷과 실물 세계의 ‘난교’와도 같은 활발한 교류가 부정성이 설 자리를 잃게 한다. 이렇듯 ‘이질성의 실종은 우리가 부정성이 많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21세기의 신경성 질환들 역시 그 나름의 변증법을 따르고 있지만, 그것은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니라 긍정성의 변증법이다. 그러한 질환은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7p) 부정성이 없으니 적도 없다. 적이 없으니 배척도 없기에 자신의 성격 또한 존재하지 않게 된다. ‘자아는 타자와 대립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정립’(88p)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그저 세계화의 과정에서 환경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주입되는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환경결정론 속 종속된 개체와도 같다.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확산되며 그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보다도 눈에 덜 띈다. 긍정성의 폭력이 깃드는 곳은 부정이 없는 동질적인 것의 공간,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다.’(21p)



한병철은 21세기 현재의 만연한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소진증후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와 같은 신경성 질환들의 원인이 바로 이러한 부정성의 결여와 긍정성의 과잉이라고 지적한다. 즉 이로써 면역학적 시대를 지나 신경증적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타자는 타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면역 반응의 대상이 되었는데, 현재에는 위험하지 않은 타자가 수용되는 세상, 다시 말해 부정성이 실종되고 긍정성만 남은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규율사회였던 근대와 구분하여 이러한 현대 사회를 ‘성과사회’라고 지칭한다. 앞서 언급한 신경증적 질환들은 성과사회적 질병이라고 부를 만한데, 이는 주로 부정성의 결여로 인해 나르시시즘적 인간이 된 개인의 심리적 요인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시스템적인 긍정성의 폭력이 일으키는 성과사회의 폭력인데, 이로써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가 일어나 인간적 유대의 결핍을 가져온다는 것이다.(26p)



성과 사회에서는 규율 사회의 복종적 주체가 성과주체로 변모한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다. 경쟁이 유독 심한 편인 한국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우리는 이런 표현에 꽤 익숙하다. 대부분 거쳐 가는 고등학생 시절의 입시경쟁이 본격적인 경쟁의 출발점이다. 바로 이때부터 ‘죽을 힘으로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식의, 자기착취를 독려하는 메시지가 만연하다. 노력하지 않는 모습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인식된다. 부모님이나 선생님, 책과 대중매체 할 것 없이 “누구 좋으라고 공부하니? 너 좋으라고 공부하지!”, “10분만 더 공부하면 배우자 얼굴이 바뀐다” 같은 이른바 동기부여 메시지를 적나라하게 쏟아낸다. 유능한 사람, 멋진 사람이 되자는 것이 당대의 목표였다. 2000년대에는 자기계발서 열풍이 불었다. 자기계발서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게 요지다.

이러한 성과 사회가 열린 이유로 저자는 사회의 생산성 최대화 열망을 꼽는다. 규율은 생산성을 최대화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현대에 새로운 규율로 작용하는 성과의 패러다임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25p) 그리고 이러한 ‘성과의 패러다임’이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를 만들고, 이것이 인간적 유대의 결핍을 초래하여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이 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104p) 오늘날 전쟁으로 죽는 사람의 수보다 우울증과 그에 따른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의 수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은 이러한 논의와 연관 지어 주목할 만하다.





한편, 우울사회라는 또 다른 에세이가 책 안에 두 번째 저작으로 실려 있다. ‘이 글은 저자의 제안에 따라 『피로사회』에 개진된 생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강연 원고 「우울사회」를 번역한 것이다.’라는 우울사회 표지에 적혀 있는 문장이 나타내듯이, 앞부분과 유사하게 후기근대적 성과주체의 심리적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에 앞서 한병철은 근대 규율적 주체의 심리를 살펴본다. 그는 규율적 주체는 ‘명령과 금지로 이루어진 억압적 강제 장치’라고 인간을 바라보는 ‘프로이트의 심리적 기구’를 틀로써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무의식이 필연적으로 부인과 심적 억압의 부정성과 결부’된 개념이라고 할 때, 무의식이 없는 ‘포스트프로이트적 자아’다. 그는 무의식을 두고 ‘금지와 억압의 부정성이 지배하는 규율사회의 산물로서,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런 사회를 떠난 것이다.’(84p)라는 파격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더 이상 프로이트적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프로이트적 자아가 해내는 일이란 무엇보다도 의무의 이행’(84p)인데, 그와는 달리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의무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86p)아서다. ‘복종, 법, 의무 이행이 아니라 자유, 쾌락, 선호가 그의 원칙이다. 그가 노동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쾌락의 획득이다.’(86p) 그러나 ‘타자로부터의 자유’가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계로 전도되며, 이것이 ‘오늘날 성과주체가 겪는 많은 심리적 장애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즉 타자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나 역설적으로 그것이 발생시키는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계로 인해 새로운 문제인 심리적 장애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필수적 조건이라고 여겨지는 멀티태스킹은, 진보라기보다는 퇴화라고 할 수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멀티태스킹은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30p)이라서다. 이를테면 식사하는 중에도 새끼들을 감시하고, 짝짓기 상대를 주시해야 하는 야생동물들은 주의를 다양한 활동에 분배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도 멀티태스킹을 함으로써 인생의 다양한 부분에서 목표한 성과를 창출하기 위해 사색과 같은 몰입이 요구되는 활동에 관심을 배분할 수 없는 것이다.



한병철은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삶이란 ‘성공적인 공동의 삶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지만,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생존 자체에 대한 관심에 밀려나고 있다.’(31-2p)고 우려한다. 이어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인류의 문화는 성과 추구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예로 춤을 든다. ‘춤은 성과의 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치’(33p)라는 것. 이는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가 『저주의 몫』에서 말하는 ‘소모적인 행위’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인간의 실존은 어떤 면에서 보면 유용한 구체적 사물들로부터 인간의 성장(또는 생활)에 도움이 되는, 꼭 필요한 부분을 구분해낸다. 그러다가 절대적 필요성이 사라지면 인간은 더 이상 ’유용한 사물‘을 소망하지 않는데, 그때부터 인간의 실존은 포착할 수 없는 것, 자기 자신과 재화의 무익한 사용, 그리고 놀이를 찾는다."

_조르주 바타유, 조현경 옮김, 『저주의 몫』(문학동네, 2000), 116p.



"번갈아 나타나는 엄격한 축적과 넉넉한 낭비는 에너지 사용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 리듬이다. 낭비를 엄격하게 경계할 때에만 인간과 사회는 힘의 체계를 성장시킬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시기에 이르면 성장은 한계에 부딪히며, 더 이상 축적이 불가능한 잉여의 부분은 소비되어야 한다."

_조르주 바타유, 조현경 옮김, 『저주의 몫』(문학동네, 2000), 223p.



인용문 중 앞에 있는 것은 성과 추구 중에는 유용성과 관계가 없는 소모가 시작되지 못함을 말하며 한병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뒤의 글은 성장이 한계에 부딪힐 때 축적 불가능한 잉여가 소비됨을 말한다. 현대 사회는 유사 이래 물질적으로 가장 풍족하다. 그러나 바타유의 말대로 축적 불가능한 잉여의 소비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과의 패러다임’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성과를 위해 스스로를 착취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에서는 놀이와 소비가 없다.



‘인간 전체가 하나의 성과기계가 되어 원활한 작동으로 최대의 성과를 산출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발전 경향에 제동을 걸 수 있는’(66p) 더 나은 미래 사회의 모습으로 저자는 ‘피로사회’를 제시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67p)인데 비하여 피로사회의 피로는 ‘무위의 피로’라는 것이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71p) 한병철은 부정성에서 사색, 나아가 무위의 피로로 논의를 확장하며 규율 사회와 성과사회에 이어 ‘피로사회’가 도래하는 미래를 바라본다. 피로사회는 ‘소속이나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70p)이 존재하는 열린 사회다.





한편 피로사회가 출간된 지 8년, 한국어판 출간으로부터 6년의 세월이 흘렀다. 과연 그동안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최근 주목할 만한 사회적 흐름으로, YOLO‧워라밸‧소확행과 같은 삶을 즐기는 문화가 인기다. 이는 지금까지 오로지 성과를 추구하기 위하여 달려왔던 사회 속에서 한 발 떨어져 여유를 갖고 평온함을 되찾자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바타유식으로 말하면 '엄격한 축적'이 끝나고 나타나는 '넉넉한 낭비'다. 정책적으로는 지난달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었다. 이는 지나친 성과주의의 패러다임이 가지는 한계를 인정하고 구성원들에게 충분한 여가를 보장하자는데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간 우울증과 자살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고, 직장에 얽매여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왔다.

한편, 출판계 흐름도 이를 반영한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 많아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가령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하완, 2018), 『곰돌이 푸,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곰돌이 푸 원작, 2018),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김수현, 2016), 『자존감 수업』(윤홍균, 2016), 『어차피 다닐 거면 나부터 챙깁시다』(불개미상회, 2018),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박진영, 2018) 같은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성과에 앞서 개개인의 인간다운 삶을 먼저 찾자는 메시지에 독자들이 공감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말에 한 일간지에는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한 달을 맞은 직장인들이 퇴근 후 무엇을 하는지를 취재한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많은 이들이 퇴근 후 문화생활에 시간을 쏟는다고 한다.



"퇴근 시간이 앞당겨지면 외국어·자격증 학원만 북적일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자기 계발보다는 취미 생활에 관심 갖는 직장인이 늘면서 '1인 1취미' 시대가 열렸다. 꾸준히 투자해야 하는 취미 생활을 할 만한 여건이 갖춰졌기 때문이다. 입사 과정에서 치열한 경쟁을 경험한 직장인들이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선호하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



_변희원, 백수진, 이해인, 「저녁7시… 김대리는 화가, 이과장은 피아니스트가 된다」, 『조선일보』, 2018년 7월 28일.



다만 한병철이 타자성이 어느 수준까지 요구되는지를 언급한 점이 없다는 것에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다.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13p)되고, ‘차이에는 말하자면 격렬한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가시가 빠져 있다. 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13p)하였다고 그는 말하며 타자성과 이질성의 부재한 현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를 타자성을 절대화하자는 주장이라는 식의 지나친 해석은 경계함이 옳다. 저자가 '피로사회'적 공동체, 즉 인간답게 공존하는 삶이 가능한 사회를 대안으로 제시할 뿐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극단적인 이질성이 전쟁을 촉발하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허용 가능한 타자성은 평화와 양립할 수 있는 수준에 그쳐야 할 것이다.

한병철은 또한 분노의 순기능적 측면을 들어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그에 따르면,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무분별한 분노의 폭력적인 측면 또한 경시해서는 안 된다.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주요한 관심사 중 하나는 한병철이 주장하는 부정성이 과연 평화적으로 추구될 수 있는지였다. 과한 주장으로 번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성장과 성과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인류가 지속 가능한 정도의 성과 추구는 무위와 사색에 필수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아마 그의 견해는 과도한 성과 추구를 경계하고 사색적 삶과의 균형을 촉구하는 의미 정도로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일종의 ‘워라밸’ 강조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6년이란 세월은 길다. 이제까지 살펴본 위와 같은 변화가, 사회가 점차 성과사회적 모습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긍정성 과잉의 시대에 ‘부정성’을 역설함으로써, 한병철의 철학은 세계가 인간다운 삶이 가능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곳이 되는 데 크게 일조했고 생각한다. 그는 날카로운 철학으로 세계를 진단하여 사회의 긍정화 흐름에 제동을 걸고 부정성과 사색적 삶의 부활을 역설했다. 그의 철학을 이어 인간적인 삶, 사색적인 삶을 향한 여정도 지속하여야 할 것이다.




2018. 8. 9. (목) 00:17 최종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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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텔게우스 2018-08-08 공감(1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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