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0

태양 속에 사는 세 발 달린 까마귀 이야기. 삼족오 세계한민족문화대전

세계한민족문화대전

태양 속에 사는 세 발 달린 까마귀 이야기. 삼족오






한자太陽 속에 사는 세 발 달린 까마귀 이야기. 三足烏
영문Three-legged crow
분야역사/전통 시대
유형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일상문(日象文)의 성립 배경


태양 속에 사는 삼족오(三足烏)는 천상과 지상을 넘나들며 태양의 정령(精靈)을 지상에 전달해주는 상서로운 새를 의미한다. 한편 태양을 상징하고 이를 형상화한 일상문(日象文)은 둥근 태양 안에 삼족오와 같은 새를 표현한 것과 원(圓)만으로 태양을 나타낸 것으로 대별된다.

태양 속에 사는 삼족오[세 발 달린 까마귀]는 동이족(東夷族)의 태양 숭배 사상 및 새 토템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그런 까닭에 둥근 태양 안에 삼족오를 표현한 일상문[日象文:태양을 상징하고 이를 형상화 한 문양]은 대부분 동이족의 생활 영역과 이동 경로에 나타나고, 동이족의 설화에는 태양과 까마귀에 관한 내용이 많이 전승되고 있다.

동이(東夷)는 산동(山東) 반도와 만주·한반도·일본 등에 거주했던 동북아시아의 고대 종족을 일컫는다. 산동 반도 지역의 동이는 진한(秦漢) 교체기 때 한족(漢族)에 흡수 통합되며, 이후 문헌에 보이는 동이는 만주·한반도·일본 등 동북 지역에 분포된 동이족을 지칭한다.

태양 숭배 및 새 신앙과 동이족과의 상호 관련성은 동이족의 일파인 한(韓)민족의 고대 유적과 문헌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태양과 삼족오를 결합시킨 ‘해 속의 삼족오’와 같은 일상문이 고구려고분에 벽화로 그려졌고, 북부여의 해모수(解慕漱)와 고구려의 동명성왕(東明聖王) 등 한민족의 고대 통치자 이름에는 태양의 속성인 밝음을 함축하는 글자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천상과 지상을 잇는 우주나무로서 장대와 새를 결합시킨 솟대에서 새는 영혼·천명(天命)·곡령(穀靈)의 전달자를 의미하며 태양 숭배와도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죽은 자의 영혼을 영생의 공간인 하늘로 인도하는 새의 상징성과 죽은 자의 영혼 불멸을 기원하기 위해 망자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에 날마다 재생하는 태양을 형상화한 일상문을 표현한 것은 상호 관련성을 지니며, 새로운 통치자에게 천명을 전달하거나 그 출현을 알리기 위해 새가 등장하는 것은 태양이 왕권을 상징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아울러 곡령의 전달자인 새는 곡식을 생장시키고 풍농을 가져다주는 태양의 속성과 많이 닮아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고구려·신라·가야의 시조(始祖) 모두 알에서 태어난 난생(卵生)이며 하늘에서 강림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난생은 한민족의 새 토템과 함께 시조가 천신(天神)의 화신인 천자(天子)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늘을 나는 새가 하늘과 인간 세계를 연결하는 천명(天命)의 전달자 내지 실행자로서 최고 권력을 지닌 통치자를 상징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한편 알의 부화에 있어 빛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고, 일상문이 태양을 상징하고 이를 형상화한 것임을 고려할 때 난생 설화와 일상문 모두 태양 숭배 사상을 반영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태양과 삼족오를 결합시킨 일상문의 등장과 전개


앞선 시기의 유물 가운데 다리 셋 달린 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는 신석기 앙소 문화기(仰韶文化期)의 채색 토기와 안양(安陽) 은허(殷墟) 후가장 대묘(侯家莊大墓)에서 출토된 상대(商代)의 방정(方鼎) 등이 있다. 그러나 둥근 태양 안에 새를 그린 일상문이 월상문(月象文: 달을 상징하고 이를 형상화한 문양)과 짝을 이루어 나타나는 것은 기원전 2세기인 전한(前漢) 시대이다. 하지만 전한 시대에 조성된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 1호묘와 산동성(山東省) 임기(臨沂) 금작산(金雀山) 9호묘 출토 백화[帛畵:명정의 일종인 비단 그림]에 그려진 일상문의 새는 서 있는 정지된 모습에, 다리는 셋이 아닌 둘로 표현되었고 새의 모습도 까마귀보다는 까치와 참새를 닮았다.

후한(後漢) 시대에 이르러서야 다리 셋 달린 삼족오가 일상문에 등장하는데 하남성(河南省), 강소성(江蘇省), 산동성 등의 무덤방에서 출토된 화상석(畵像石)을 통해 이를 살필 수 있다. 하지만 후한 시대에는 일상문의 새가 서 있는 정지된 모습이 아닌 날아가는 모습으로 묘사된 것이 많고 이때 다리 표현은 생략되어 있다.

이후 남북조(南北朝) 시대를 지나 수당대(隋唐代)가 되면 태양과 삼족오를 결합시킨 일상문은 중원(中原) 지역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고, 요령성(遼寧省)과 투르판[현재의 신강성(新疆省) 토로번현(吐魯番縣)] 등 화북(華北)의 외곽 지역에서만 나타난다. 그 예로는 요령성 조양(朝陽) 원태자(袁台子) 벽화 묘와 투르판 아스타나 지역 고분에서 출토된 복희(伏羲)·여와도(女媧圖)를 들 수 있다.

한편 중원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는 태양과 삼족오를 결합시킨 ‘해 속의 삼족오’와 같은 일상문은 고구려로 전승된 후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파된다. 이러한 사실은 진한(秦漢) 교체기 때 한족(漢族)에 흡수 통합된 동이족의 새 토템을 반영하는 삼족오 문화가 한족 문화에 일시적으로 수용되었음을 시사하며, 아울러 한국과 일본 등 동이족의 대표적인 생활 영역에서 태양과 삼족오를 결합시킨 일상문이 전승된 것은 동이족과 삼족오 문화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한민족의 고대 유적 가운데 태양과 삼족오를 결합시킨 일상문은 4세기 이후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지만, 그 연원이 이보다 오래되었음은 고려 때(1193년) 이규보(李奎報)가 저술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3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해모수 관련 기사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동명왕편」에는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왕[주몽]의 부친이며 북부여를 세운 태양의 화신인 해모수가 머리에 까마귀 깃털로 만든 오우관(烏羽冠)을 쓴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태양과 까마귀와의 결합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문헌 기록은 우리나라에서 태양과 까마귀와의 연계성을 인식한 것은 그 연원이 오래되었고, ‘해 속의 삼족오’와 같은 일상문으로 구체화 된 것은 4세기 고구려 고분 벽화에 이르러서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해 속의 삼족오’로 표현된 일상문의 구성 요소와 상징성


1. 원(圓)

일상문에서 원은 주기적 회귀성을 지닌 곡선으로 무한의 순환론을 함축한다. 아울러 하늘 세계를 대표하는 태양을 둥근 원으로 나타냄으로써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동양의 오래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죽은 자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에 둥근 원으로 태양을 상징하는 일상문을 표현한 것은 태양처럼 재생과 부활의 삶이 사후(死後) 인간에게도 영속되길 염원했기 때문이다.

한편 국가 출현과 함께 최고 통치자가 천자(天子) 내지 천손(天孫)으로 인식됨으로써 하늘 세계를 대표하는 태양과 이를 형상화 한 일상문은 왕권을 상징하게 되었다. 이때 일상문의 원은 태양의 영속성과 함께 왕조의 무궁과 영위에 대한 희구를 담고 있다.

2. 현조(玄鳥)의 개념

일상문에 그려지는 삼족오는 통상 ‘세발 달린 까마귀’로 풀이된다. 하지만 ‘세발 달린 검은 새’로도 인식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삼족오의 ‘오(烏)’가 까마귀 외에 검다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족오의 ‘오’는 까마귀라는 특정 조류를 일컫기보다는 검은 새 즉 현조(玄鳥)의 범칭으로 이해되며, 까마귀가 현조의 범칭임은 까마귀의 어원이 검은 새라는 뜻의 ‘가마고’에서 비롯되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아울러 현조의 ‘현(玄)’을 천자문(千字文)의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과 관련지어 보면, 천자문에서 하늘이 검다는 것은 하늘이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깊고 오묘한 세계임을 뜻하고 있어 현조가 단순히 검은 새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지상의 일반적인 새들과는 차별화되는 깊고 오묘한 속성을 지닌 하늘새로 풀이되며, 태양 안에 그려진다는 점에서 태양새를 의미한다.

따라서 일상문에 그려지는 삼족오와 같은 현조의 범위에는 동북아시아에서 샤먼의 정령으로 인식되었던 독수리·매·까마귀와 같은 맹금류, 기쁜 소식과 계절을 알려주는 까치와 제비, 겨울 철새이며 물새인 흰 색의 학과 오리, 어둠을 물리치고 여명을 여는 개벽의 상징인 닭 등이 포함되며 일상문에 이러한 새의 모습이 표현된다.

3. 현조인 까마귀의 일상문의 등장 배경

① 동이족의 까마귀 숭배

까마귀를 숭배하는 동이족의 새 토템은 샤머니즘과 연계된 동북아시아의 조장(鳥葬) 풍습과 동이계 설화에서 현조인 까마귀가 태양과 왕을 상징하고 왕과 왕재(王才)를 보필하거나 위험에서 구하는 존재로 등장하는 것과 상호 관련성을 지닌다.

동북아시아의 조장 풍습은 이 지역에서 최초의 샤먼을 독수리·매·까마귀와 같은 맹금류의 현조로 인식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까닭은 하늘계와 인간계를 매개하는 샤먼과 같이 인육(人肉)을 먹는 맹금류가 지상에서 천상으로 인간의 영혼을 운반하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망자 및 왕권과 관계된 유적과 유물에 까마귀를 그린 일상문을 표현한 것은 까마귀의 검은 색이 어둠과 죽음, 권위와 엄숙을 상징하고 조류 중 가장 영특한 새가 까마귀이므로 영혼과 천명의 전달자로서 손색이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왕권과 양(陽)을 상징하는 일상문에 까마귀를 나타낸 것은 뛰어난 영역 장악력을 지닌 까마귀의 특성이 자신의 통치 영역을 확고히 사수해야 하는 왕의 입장 및 역할과 비견되었고, 까마귀가 에너지 넘치는 양조(陽鳥)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하듯 한방에서는 지상의 인삼, 바다의 해삼과 더불어 까마귀를 양기를 보충해주는 비삼(飛蔘)으로 일컫고 있다.

② ‘10개의 태양과 예(羿) 장군’과 같은 동이족의 신화 전승

동이족의 후예로 알려진 예 장군이 하늘에 동시에 떠오른 10개의 태양을 향해 활을 쏘자 태양이 까마귀로 변해 땅에 떨어졌다는 ‘10개의 태양과 예 장군’과 같은 신화 전승은 동이족·태양·까마귀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시사한다. 이 신화에서는 고구려의 주몽(朱蒙)[부여어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 등 동이계 영웅 신화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선사자(善射者:활을 잘 쏘는 사람)의 모습을 예(羿) 장군을 통해 살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일상문 중 매서운 눈매와 날카로운 부리 등 까마귀의 특징적 모습이 잘 표현된 예는 동이족의 생활 영역이었던 요령성 지역의 벽화 묘, 집안(集安)과 평양(平壤)·안악(安岳) 지역의 고구려 고분 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4. 다리 수

일상문의 현조(玄鳥)는 다리가 셋 또는 둘로 그려지며 날아가는 새로 묘사될 경우 다리 표현이 생략될 때가 많다. 다리 둘은 자연계의 일반적인 조류의 형상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우주 만물의 본체가 상호 대립적인 성격을 지닌 양(陽)과 음(陰)으로 이루어졌다는 음양설을 반영된 것으로도 풀이된다.

한편 삼족오의 다리 셋은 지상의 일반적인 새들과는 차별화되는 하늘새 내지 태양새를 나타낸 것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중국의 정사(正史) 『이십오사(二十五史)』에는 삼족오를 헌상했다는 내용이 여러 번 나오고 있어 삼족오가 실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삼족오의 다리 셋의 상징성에 대해서는 천지인(天地人) 합일 사상, 8괘 중 긴 선 3개로 천(天)을 나타낸 건(乾 : ☰)의 상징, 양(陽)과 남성의 성기[다리 셋 중 가운데 다리] 표현, 일출·충천(沖天)·일몰, 3과 같은 홀수가 양수(陽數) 및 길수(吉數)를 나타내기 때문이라는 등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삼족오의 다리 셋은 일반적으로 천지인 합일 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천지인 합일 사상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영적 능력자인 샤먼으로 대표되는 인간을 통해 천지와의 조화를 이루는 무(巫)의 세계관을 의미한다. 이를 반영하듯 무속과 관련된 삼재(三災) 부적에서도 다리 셋은 아니지만 머리가 셋으로 표현된 현조(玄鳥)의 일종인 매가 그려진다.

동이족의 일파인 한민족은 우주를 천지인 등 셋으로 나누어 보되 이 셋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으로 보았다. 즉 3을 매개로 하여 모든 대립을 하나로 아우르는 천지인 합일이라는 독특한 사유 체계를 지니고 있다. 이 같은 한민족의 사유 체계가 반영된 것이 바로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려진 ‘해 속의 삼족오’와 같은 일상문이다.

5. 동세(動勢 : 움직임)

일상문에 그려지는 현조(玄鳥)의 동세는 서 있는 모습과 날아가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일상문의 현조가 영혼과 천명의 전달자임을 고려할 때 태양 안에 서 있는 정지된 모습의 현조는 죽은 이의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하는 소임을 마쳤거나 왕과 왕이 될 자에게 천명을 전달한 후 태양으로 돌아와 안착한 상태를 나타낸다.

또한 태양 안에 날아가는 현조의 모습은 천명(天命) 사상과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된다. 천명 사상은 상(商)을 정벌한 주(周)가 이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시한 것으로 하늘로부터 부여된 천명이 떠났기 때문에 왕조 내지 왕을 교체함을 의미한다. 한편 한(漢)나라 때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제시된 천인감응설은 하늘과 사람은 상호 교감과 영향을 받기 때문에 군주가 잘못한 정치를 행할 경우 하늘이 이를 천재지변으로 경고하고, 그럼에도 군주가 반성과 개선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면 유덕하고 인자한 이에게 천명이 옮겨간다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을 바탕으로 한 유학의 중요한 정치 사상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정치적 안정기에는 일상문에 서 있는 정지된 모습의 현조가 주로 그려지고, 정치적 혼란기에는 일상문에 날아가는 모습의 현조가 많이 나타난다.
동이족과 한족의 문화권에 따른 일상문의 특징


1. 동이족 문화권의 일상문

동이족의 일상문은 태양을 상징하는 원 안에 삼족오와 같은 현조(玄鳥)가 표현되고, 동이족의 새 토템을 반영하는 맹금류(까마귀·독수리·매)의 특징적 모습이 현조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현조의 다리는 세 개로 묘사되며 현조의 동세는 서 있는 정지된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때 하늘새와 태양새를 상징하는 현조는 하늘의 대리자를, 다리 셋은 샤머니즘과 연계된 천지인(天地人) 합일 사상을 의미한다. 또한 현조가 천명의 전달자를 상징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서 있는 정지된 모습의 새는 하늘의 대리자인 지배자의 확고한 지위와 함께 신권(神權) 정치적 측면을 반영한다. 아울러 붉은 태양과 검은 색의 현조를 결합시킨 일상문을 표현한 것은 태양을 밝음과 양(陽)의 상징으로만 본 것이 아닌 어둠과 음(陰)이 함께 공존하며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영원성을 지닌 대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2. 한족(漢族) 문화권의 일상문

중원(中原)을 중심으로 한 한족의 유교 문화권에서는 일상문에서 현조 표현이 생략되거나 현조를 표현하더라도 맹금류인 까마귀의 특징적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은 한대(漢代) 이후에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이는 동이족의 현조 숭배가 한족의 일상문 표현에 일시적으로 반영되기는 했지만 현조 숭배가 한족의 문화전통이 아님을 시사한다.

또한 천인(天人) 합일을 중시했던 한족의 문화권에서는 일상문의 현조 표현을 태양의 흑점을 나타낸 것으로 인식했고, 태양의 흑점 역시 달이 해를 가리는 일식(日蝕)처럼 군왕의 상징인 태양을 가리는 것으로 여겨 원만으로 태양을 표현한 일상문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현조의 다리도 셋이 아닌 둘로 그려졌고, 동세(動勢)도 서 있는 정지된 모습보다는 날아가는 모습일 때가 많은데, 이는 앞서 언급한 ‘일상문의 구성 요소의 상징성’ 중 다리 수와 동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다리 둘은 음양설을, 날아가는 모습의 현조는 천명(天命) 사상과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각각 반영한 것으로 본다.

문헌에 나타난 한민족의 삼족오 신앙


고구려고분에는 태양과 삼족오를 결합시킨 일상문이 많이 등장하지만 고구려 관련 문헌에는 삼족오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 같은 일상문이 전승되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삼족오를 언급한 기록은 눈에 띠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언급된 까마귀 관련 기사를 통해 한민족의 삼족오 신앙을 단편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들 문헌에서 까마귀는 태양과 왕을 상징하거나 왕과 왕재(王才)를 보필 또는 위험에서 구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우선 까마귀가 태양 또는 왕을 상징하는 경우는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가 머리에 쓴 오우관(烏羽冠 : 까마귀 깃털로 만든 관)과 일본으로 건너가 왕과 왕비가 된 일월지정(日月之精 : 해와 달의 정기)의 상징인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이름에 포함된 까마귀 오(烏)를 통해 살필 수 있다. 또한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弓裔)에게 임금 왕(王) 자가 새겨진 상아 조각을 전한 까마귀는 천명의 전달자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한편 왕 또는 왕이 될 자를 보필하거나 위험에서 구하는 경우는 훗날 고구려를 건국하는 주몽이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동부여를 빠져 나올 때 주몽을 모셨던 오이(烏伊)나 백제온조왕(溫祚王)의 남하 시 동행했던 오간(烏干)의 이름에 각각 포함된 까마귀 오(烏)와 사금갑(射琴匣) 설화에서 까마귀가 궁중에서 일어난 승려의 비행을 신라의 소지왕(炤知王)에게 알려 위급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왕을 구한 내용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왕을 보필하는 관직명에서도 까마귀 오(烏) 자를 살필 수 있는데, 신라 유리왕 9년(32년)에 설치된 17관등 중 15관등인 대오(大烏), 16관등인 소오(小烏)가 이에 해당한다.

이 밖에 동부여의 대소왕(帶素王)이 고구려대무신왕(大武神王)에게 머리는 하나이고 몸은 둘인 적오(赤烏 : 붉은 까마귀)를 보냈다는 기사는 고구려대무신왕의 동부여 정벌로 동부여 내부가 분열되고 이후 고구려의 입지가 강화되는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지배 계층 스스로가 천자(天子)임을 자처하는 등 천신(天神) 신앙의 영향력이 컸던 시기에 고구려와 동부여의 지배자들이 까마귀를 매개로 하여 양국의 합병을 논하고 있음은 까마귀가 천신의 사자로 인식되었음을 말해준다.

이 같은 문헌 기록을 통해 한민족이 까마귀를 상서롭고 신성하게 여겼음을 파악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려진 일상문


고구려고분 중 일상문의 세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곳은 집안 지역의 각저총(5세기 초)·무용총(5세기 중반)·장천 1호 고분(5세기 중반)·통구 사신총(6세기 중반)·오회분 5호묘(6세기 중반)·오회분 4호묘(6세기 중후반)와 평양·안악 지역의 천왕지신총(5세기 초중반), 쌍영총(5세기 후반), 덕화리 1호분(5세기 말〜6세기 초), 덕화리 2호분(5세기 말〜6세기 초), 매산리 사신총(수렵총 : 6세기 초), 개마총(6세기 초중반), 진파리 1호분(6세기 중반), 덕흥리 고분(408년), 강서 중묘(6세기 말〜7세기 초), 복사리 벽화분(5세기 초), 성총(5세기 중후반) 등이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 외에 평안남도 중화군진파리 제7호분에서 출토된 금동 투조 장식에서도 ‘해 속의 삼족오’로 표현된 일상문을 엿볼 수 있다.

일상문의 유형을 일상문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원과 원 안에 표현된 현조(玄鳥)의 유무(有無) 및 동세를 기준으로 나누어 보면, 형식Ⅰ[원 안에 날개를 접은 채 서 있는 삼족오], 형식Ⅱ[원 안에 날개를 펼친 채 서 있는 삼족오)], 형식Ⅲ[원 안에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현조], 형식Ⅳ[원으로 구성된 일상문] 등 4개로 분류할 수 있다.

한편 일상문의 유형을 형식별로 분류해 정리해보면 형식Ⅰ에는 각저총·무용총·장천 1호분·천왕지신총·쌍영총·덕화리 1호분·덕화리 2호분이, 형식Ⅱ에는 통구 사신총·오회분 5호묘·오회분 4호묘·매산리 사신총(수렵총)·개마총·진파리 1호분이, 형식Ⅲ에는 덕흥리 고분과 중서 중묘가, 형식Ⅳ에는 복사리 벽화분과 성총이 각각 포함된다.

고구려의 대내외 정세를 고려하여 6세기 중반 이전과 6세기 중반 이후로 나누어 일상문의 시기별 특징을 살펴보면, 6세기 중반 이전의 일상문은 형식Ⅰ[원 안에 날개를 접은 채 서 있는 삼족오]이 주류를 이룬다. 한편 원 안에 그려진 삼족오에 까마귀의 특징적 모습이 잘 나타나 있고, 머리의 공작형 벼슬이 뒤로 길게 뻗혀 있는 등 사실적인 모습보다는 이상화된 신조(神鳥)로서의 모습이 강하다. 일상문의 삼족오를 천명의 전달자란 측면에서 볼 때, 날개를 접은 채 서 있는 삼족오는 천명이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머물려 있던 정치적 안정기를 상징한다. 이를 뒷받침하듯 5세기 초에서 6세기 초는 고구려가 동북아시아 일대의 패권을 차지했던 최전성기였다.

6세기 중반 이후의 일상문은 형식Ⅱ[원 안에 날개를 펼친 채 서 있는 삼족오]가 다수를 차지한다. 6세기 중반 이전의 일상문과 비교해 볼 때 까마귀의 특징적 모습이 삼족오에 잘 나타나 있지 않고, 머리의 공작형 벼슬이 짧아지거나 간략화 되는 등 신조로서의 모습도 약화된다.

이 시기 형식Ⅱ의 일상문 중 관심을 끄는 것은 집안 지역의 통구 사신총·오회분 5호묘·오회분 4호묘이다. 그 이유는 이들 고분에는 별자리의 하나로서 표현된 일상문과 남자 모습의 상반신에 용 모양의 하반신이 합쳐진 태양신의 머리 위에 있는 둥근 공 모양 안에 삼족오를 표현한 복희·여와형의 일상문 등 두 가지 유형의 일상문이 함께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원 안의 삼족오를 천명의 전달자란 측면에서 볼 때 날개를 펼친 채 서 있는 삼족오는 천명이 떠나려 하거나 천명이 머물기 위한 과도기적 단계, 즉 정치적으로 다소 불안정한 시기임을 상징한다. 이를 말해주듯,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초는 고구려가 내적으로는 귀족연립정치의 전개와 지방분권화의 진행을 겪게 되는 등 정치적·사회적 혼란에 직면하고, 외적으로는 신라가 성장하여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중국에 수(隋)·당(唐)과 같은 통일 왕조가 등장하여 국제 질서의 재편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수·당이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국제 질서 개편을 위해 주변 세력인 고구려에 압력을 행사할 때 고구려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대항하는 등 자주적인 면모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고구려의 국력은 점차 약해되고 결국 와해의 길을 걷게 된다.

4세기 이후 선보인 태양과 현조를 결합시킨 고구려 고분 벽화의 일상문은 이후 우리나라 일상문의 정형(定形)으로 정착하면서 대한 제국 시기까지 그 맥을 이어간다.

고려 시대의 일상문


통일 신라에서는 태양과 삼족오를 결합시킨 일상문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후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해 속의 삼족오’와 같은 일상문은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며 건국된 고려 시대에 다시 선보인다.

고려 때 태양과 삼족오를 결합시킨 일상문은 11세기에 제작된 현화사비(1022년)와 지광국사 현묘탑비(1085년), 무신 집권기(1170〜1270년)의 고려 상감청자, 원(元) 간섭기(1270〜14세기)의 고려 불화(佛畵)를 통해 살필 수 있다. 그러나 건국 초기인 10세기에는 원으로 구성된 일상문이 ‘태조 왕건상’(10세기 중반)에 나타나고, 금(金)의 등장 이후부터 무신 난 이전에는 일상문 자체를 찾기 어렵다.

태양과 삼족오를 결합시킨 고려 시대 일상문의 시기별 특징을 보면 11세기 현화사비와 지광국사 현묘탑비의 경우, 일상문의 새는 닭과 흡사하며 날개를 펼친 채 서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에 제작된 고려 상감청자에 시문(施文)된 일상문은 둥근 태양 안에 새가 날개를 펼친 채 서 있거나 날아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긴 부리와 가는 목 등이 물새를 닮았다. 또한 원 간섭기 고려 불화에 그려진 일상문의 새는 날개를 펼친 채 서 있고 날카로운 부리와 매서운 눈매 등 맹금류의 특징적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태양과 삼족오를 결합시킨 일상문은 고구려 계승 의식과 자주성이 고양될 때 많이 나타난다. 11세기는 거란의 고려 침입을 계기로 고려의 고구려 계승 의식이 높아졌고, 이 점을 거란에 인식시켜 고구려의 옛 땅인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거란의 침입을 막아냄으로써 고려의 자주 의식이 강화된 시기이다.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환기시키고자 이규보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의 영웅적 업적을 서술한 「동명왕편」을 편찬했고, 국가의 위기 의식이 고조되고 자주권이 크게 위축된 원 간섭기는 일연이 쓴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단군(檀君)을 한민족의 공동 시조(始祖)로 인식하고 우리 역사의 시발점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설정하는 등 고구려 계승 의식보다 확대된 단군 조선 계승 의식이 부상했던 시기이다.

한편 원으로 구성된 일상문이 등장하거나 일상문을 살피기 어려운 시기는 고려가 친신라적 경향을 보이거나 자주 의식이 약화될 때이다. 원으로 구성된 일상문은 10세기 중반에 제작된 ‘태조 왕건상’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고려가 건국 초에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했다고는 하나 문화 전반에 걸쳐 신라적 요소를 반영한 측면이 강했고, 따라서 당(唐) 문화의 영향을 받은 원으로 구성된 통일 신라의 일상문이 이 시기에 수용된 것으로 이해된다. 금(金)의 등장 이후부터 무신 난 이전에는 일상문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이자겸 집권 시 금과 사대 관계를 맺음으로써 고려의 자주 의식이 약화되었고, 아울러 묘청의 난 이후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개국 초의 북진 정책을 강화하고자 했던 서경파가 몰락하고 유교적 합리주의를 내세운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파가 승리함으로써 중국 유교 문화의 영향력이 커진 것과 일정 부분 관련성을 지닌 것으로 본다.

조선 시대의 일상문


조선 시대에는 원으로 구성된 일상문이 다수를 차지한다. 한편 일상문 중 ‘원 안에 날개를 접은 채 서 있는 새’는 조선 전·후기 불화(佛畵) 몇 점과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제작된 일월도자수(日月圖刺繡) 가사(袈裟)들을 제외하고는 볼 수 없고, ‘원 안에 날개를 반원형으로 접은 채 서 있는 새’는 성종 때 제작된 약사삼존 십이신장도(藥師三尊十二神將圖)와 같은 불화(1477년)에 나타난다.

아울러 ‘원 안에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새’는 조선 전기에는 중종 반정 이후 제작된 왕실 발원 불화와 반정에 관계된 사대부 묘비(墓碑)에 표현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영조 때 제작된 약사여래도(1744년) 및 대한 제국 시기의 일기(日旗)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 일상문에 표현된 새는 시기별로 맹금류, 닭, 물새의 특징적 모습이 반영되었던 고구려 및 고려 시대와는 달리 새의 특징적 모습이 시기별로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원으로 구성된 일상문은 일상문의 새 표현을 태양의 흑점을 나타낸 것으로 인식하고 태양의 흑점 역시 군왕의 상징인 태양을 가리는 것으로 여겨 새 없이 원으로만 태양을 표현한 중원(中原) 유교 문화권의 일상문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한족(漢族)의 유교 문화권에 많이 보이는 원으로 구성된 일상문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조선이 유교를 국교(國敎)로 삼았고, 명(明)과 사대(事大) 관계를 맺으며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 하에 있었던 조선의 정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원 안에 날개를 접은 채 서 있는 새’와 ‘원 안에 날개를 반원형으로 접은 채 서 있는 새’로 표현된 일상문은 그 수는 많지 않지만, 명(明)을 섬기면서도 왕권 확립과 함께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을 넓혀가며 조선 중심의 국제 질서를 구상하고자 했던 15세기 왕실 발원 불화들에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원 안에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새’로 표현된 일상문에서 일상문의 새를 천명(天命)의 전달자로 볼 때 날아가는 새는 천명이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는 즉, 왕조 또는 왕이 바뀜을 상징한다. 이를 뒷받침하듯 반정의 당위성과 통치자의 합법성이 중요시되었던 중종 반정 이후, 병자호란 이후 반청(反淸) 감정이 고조되면서 제시되었던 소중화 사상[조선이 중화(中華) 문화를 계승할만한 유일한 문화 국가임을 표방]이 팽배했던 영조대(英祖代), 조선 왕국의 종언을 고하며 제국(帝國)을 탄생시켰던 대한 제국 시기에 나타난다.

한민족의 역사와 ‘해 속의 삼족오’


한민족의 역사에서 ‘해 속의 삼족오’로 표현된 일상문은 자주적 천하관을 표방했던 고구려와 외세의 침입과 간섭을 받게 됨으로써 어려움 속에서도 자주 의식이 고양되었던 거란의 고려 침입 이후, 고려의 몽고 항쟁기, 고려의 원 간섭기 및 대한 제국 시기에 나타난다.

또한 조선의 중종 반정 이후 통치자의 합법성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16세기에서도 살필 수 있다. 여기서 천하관이라 함은 온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그 가운데 자기 나라의 위치가 어떠한가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즉, 국내외의 현실적인 정치 질서에 대한 인식을 뜻한다. 하지만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 관계가 강화되고 유교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 조선 시대에는 ‘해 속의 삼족오’와 같은 일상문보다는 둥근 원으로 태양을 표현한 일상문이 많이 나타난다.

이처럼 태양과 현조가 결합된 일상문이 대내외적으로 힘든 시기에 많이 나타나는 것은 양에는 음이, 음에는 양이 포함되어 있음을 함축한다. 즉, 복락(福樂)과 재화(災禍)는 별개가 아닌 함께 존재하며, 완전한 밝음[陽]도 완전한 어둠[陰]도 없음을 시사한다. 태양을 밝음의 상징으로만 인식한다면 일상문은 태양을 상징하는 둥근 원만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생명과 아침을 상징하는 붉은 태양 안에 죽음과 어둠을 의미하는 까마귀와 같은 현조를 함께 표현한 것은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이 죽음과 어둠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며 생성과 소멸은 경계 없는 동반자라는 우주론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국난 속에 자주 의식이 싹텄던 시기에 ‘해 속의 삼족오’와 같은 일상문이 표현된 것은 어려움의 시기가 지나면 밝은 세상이 올 거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크고 작은 환란 속에서도 오늘날까지 한민족의 역사를 이어온 원동력은 바로 절망의 순간 절망이 아닌 희망을 노래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태양과 현조를 결합시킨 ‘해 속의 삼족오’와 같은 일상문은 오랜 기간 동이족을 상징하는 표식으로 기능해왔다. 그런 까닭에 동이족의 현 생활 영역인 한국·일본·만주 지역에서 ‘해 속의 삼족오’와 같은 일상문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태양과 현조를 결합시킨 일상문 전통이 고구려 이후 전승되어 대한 제국 시기에 이르기까지 그 맥을 이어왔고, 지금은 삼족오가 변이(變移)된 봉황을 대통령 문장(紋章)과 국쇄 장식에 사용하고 있어 한민족의 문화 계통성과 문화 공동체 인식을 파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더욱이 이같은 한국의 일상문 전통은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행해지고 있는 오늘날, 국가와 영토 범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문화적 계통성과 전통성은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도 면면히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