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14

김흡영 서평_『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김용준 지음| 2005 - 교수신문

본격서평_『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김용준 지음| 돌베개 刊| 400쪽| 2005 - 교수신문



본격서평_『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김용준 지음| 돌베개 刊| 400쪽| 2005
김흡영 강남대
승인 2005.04.25 

장대한 두 문화의 만남...추상적 형이상학 느낌도



과학과 종교사이의 가교를 놓은 ‘한국 최초의 사상가’로 존경받는 원로 학자 김용준 교수가 그 개념적 지도를 그린 기념비적 작품을 내놓았다. 그가 지난 40년 동안 자연과학과 신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천착한 연구들을 정리한 4백쪽에 이르는 방대한 역작이다. 그동안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이루어진 담론들을 자상하게 해설한 귀중한 정보들과 자료들로 꽉차있어서 취약한 이 분야를 위한 친절한 안내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인간과 과학’에서 저자는 실존적 인간을 사색한다. 젊은 날 그의 휴머니즘과 로맨티시즘이 물씬 풍겨지는 대목이다. ‘사색하는 과학자로서 인간의 실존’, 그것이 지금까지 그를 사로잡아왔고, 또한 고뇌케 한 화두였으며, 이 책이 나오게 된 동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고전적 문헌을 들추며 집요하게 그 해답을 추적한다. 이를 위해 인류고고학, 동물행동학,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닐스 보어, 노엄 촘스키, 자크 모노, 그리고 특히 루돌프 불트만, 마르틴 하이데거, 한스-게오르크 가다머에 주목한다. 과학자이면서도 과학은 하나의 방법론에 불과하다는 해석학적 비판을 겸손하게 수용한다. 그러면서도 결코 두 세계를 연결시키는 ‘실존적 해후’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 등의 모든 개념이 인간문화의 한줄기에서” 나왔다는 잠정적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과학과 종교의 두 영역을 함께 이해할 수 있는 공통 언어의 발견, 나아가서 그 둘을 통합하는 새로운 언어의 탐구에 목표를 둔다.

제2부 ‘과학과 기독교’에서 저자는 자신의 종교인 기독교를 분석한다. 그는 두 가지의 모태신앙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첫째는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기독교요, 둘째는 그의 천직인 과학이다. 그는 이 두 모태신앙들 사이에 연결고리를 찾아 나선다. 종교개혁전통(청교도정신)이 과학혁명의 모태였다는 막스 베버-유진 클라렌의 이론에 고무된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가능케 한 것은 케플러와 보일이 보여준 것처럼 기독교가 ‘구원의 종교’에서 ‘창조의 종교’로 패러다임 변환을 이행했기 때문이라고 조심스럽게 설명해본다. 찰스 다윈, 모노, 리처드 도킨스, 에드워드 윌슨, 나일즈 엘드리지, 대니얼 데넷, 마이클 비히 등이 주도했던 진화론 논쟁을 섭렵하면서, 스티븐 호킹, 빌렘 드레스, 폴 데이비스 등이 제시한 인간원리를 살펴본다. 특히 종교를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라고 주장한 랠프 버후의 과학신학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그런데 ‘고뇌하는 인간 루터’와 종교개혁 사상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면서도 칼뱅을 언급하지 않는 점이 흥미롭다. 청교도정신과 창조신학을 선호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루터보다는 칼뱅이 중요할 터인데도 말이다. 칼뱅적 로고스보다는 루터적 파토스를 좋아하는 내면적 성향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제3부 ‘몸과 마음’에서 저자는 종교와 과학에 대한 실마리를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인지과학과 뇌과학에서 찾고자한다. 몸과 마음의 문제는 바로 과학과 종교의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심신이원론보다는 김재권의 심신수반론과 환원적 물리주의에 관심을 쏟는다. 그러면서도 마크 존슨과 조지 레이코프의 체험주의(신체화)와 제널드 에델만과 언토니오 다마지오의 의식과 자아 형성과정에 대한 이론에 심취한다. ‘나’라는 느낌의 신비, 하나님 모듈의 가능성을 기뻐하면서도 지나친 신비주의는 함석헌과 함께 윤리적 이유로 배격한다. “과학은 사고를 위한 언어”라는 견해를 옹호하면서 언어가 생물학적 능력이라는데 동의한다. 문법유전자, 스티븐 핀커의 멘탈리스(정신어), 최초의 언어(바벨탑 사건)와 사투리에 대한 비교는 흥미롭다. 몸과 마음의 문제는 이성과 감성, 결국 의식과 감각질의 문제로 귀착된다. “자아란 반복적으로 재구성되는 생물학적 상태”이고 이 자아는 개체들 사이에 ‘설명적 간극’을 유발한다. 그것의 원인인 “외부세계에 대한 주관적 느낌”을 감각질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의 인간론은 흔들린다. 그동안 간직했던 하이데거, 가다머, 촘스키 류의 초월적, 초과학적 인간론이 한계에 부딪친다. 오히려 인간은 물리주의로 설명이 가능한 생물체, 곧 감각질이라는 독특성을 가진 영장류의 한 종이라는 사실이 중요해진다.

제4부에서 저자는 마침내 과학과 종교의 융합모형으로서 진화신학을 제시한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홈즈 롤스톤 3세, 존 호트, 한스 요나스의 신학에서 그 패러다임을 모색한다. 특히 롤스톤의 ‘고난과 창조’론에 대한 해설은 감동적이고 신학적 심오성이 엿보인다. 또한 그는 마이클 루스의 다윈주위적 기독교 변증에 매료된다. 그러나 자신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과학과 종교 사이”가 노출된다. 루스의 논리와 이성의 신과 롤스톤과 호트의 고난과 케노시스의 신 사이에는 간극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고난의 하나님, 종말론적 소망을 위해 무한한 개방성을 가진 신론이 대미를 장식한다.


본서는 난해한 과학과 신학분야를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개념적 지도’를 그려주고 있어,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후학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옥의 티라 할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개념적 지도에서 그의 실존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동양종교문화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자아와 사투리간의 긴밀한 관계를 이론적으로 옹호하면서도 막상 그 자신은 자기의 사유적 사투리(존재의 제소리)를 무시하는 자기모순에 빠져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와 과학 담론의 자기 신체화를 실천하기보다는 서구의 철학?신학적 언어에서 보편문법을 찾으려는 형이상학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이점은 앞으로 이 분야의 2세대 학자들의 학문방향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다. 탈식민주의비평, 오리엔탈리즘 등에 의해 서구학문 속에 포장되어 있는 문화제국주의가 명확히 폭로되어왔다. 더욱이 종교와 과학의 담론이 유럽우월주의의 낭만적 환상을 버리지 못한 학자들에 의해 농락당할 가능성이 크다. 이 책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판넨베르크와 루스는 솔직히 말해서 유럽식 영광과 지배를 포기하지 못한 서구적 사고방식의 소유자들로 보인다. 유럽신학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칭해지는 전자는 이제는 낡은 유럽식 패러다임의 신학을 고집하고 있고, 후자에게서는 서구기독교문화 외에는 무지한 세계화가 덜 된 백인남성의 한계를 발견한다.

앞으로 한국에서 종교와 과학의 담론은 비록 부족하더라도 주체성을 갖고서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단지 서구 담론의 번역 또는 번안정도의 학문으로서 끝낸다면 한국의 종교와 과학은 여전히 서구 담론의 아류로서 종속적 경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과학과 종교의 딜레마는 결국 서구기독교 신학과 현대과학 사이에 가로놓인 이원론적 간극에 기인하며, 따라서 오히려 한국학자들이 동양종교사상적 대안을 가지고 이 분리를 극복할 수 있다. 앞으로 “틀려도 좋으니 맘껏 한번 해보라”는 원로의 말이 듣고 싶다.

김흡영 / 강남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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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 과학인 김용준의 연구 노트 
김용준 (지은이)돌베개2005-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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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인 저자가 '종교와 과학'의 문제에 천착한 글들을 묶었다. 현대과학의 결실에 대한 주요한 논쟁점들을 아우르고, 과학.종교.철학.윤리학이 연관된 총체적 질문들을 던지며 새로운 사유의 실마리를 찾고자 하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해 역사학, 인류학, 신학, 윤리학, 존재론의 성찰을 받아들이고 동물행동학, 생명과학, 우주학, 인지과학 분야의 과학적 발견들을 참조해 다시 신의 문제로 되돌아오는 구성이다. 분과학문 체계의 한계를 벗어나 많은 학문을 넘나들며 저자는 종교와 과학의 문제가 전문가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임을 역설한다.


목차


책을 펴내며

제1부 인간과 과학

제1장 인간의 탄생과 과학
호전적 야수에서 평화롭고 이타적인 존재로
물음에 대한 이해
서양 과학의 기원이 된 그리스 시대의 철학

제2장 언어와 사고
언어의 창출
신피질의 의미
호모 사피엔스
학문과 실존
언어와 실존

제3장 해석의 문제
'진리'와 '방법'
'방법'의 한계
자연과학의 '방법'
'방법'을 넘어서

제2부 기독교와 과학

제4장 과학혁명과 기독교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
스피리추얼리즘과 주의주의
과학혁명 이후의 과학

제5장 진화론과 기독교
헉슬리와 윌버포스의 논쟁
다윈의 <종의 기원>
진화론의 계보
다윈의 후예들

제6장 우주론과 창조
우주 메커니즘의 창조자
우주의 탄생
우주의 씨앗

제7장 인간원리
신이 선택한 인간
생명체의 출현 조건
인간의 기원과 우주의 기원

제8장 진화고리로서의 종교
윌슨의 사회생물학
진화의 고리로서의 종교

제9장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고뇌하는 인간 루터
구원의 종교에서 창조의 종교로
과학혁명의 주인공 - 케플러, 데카르트, 뉴턴

제3부 몸과 마음

제10장 마음과 뇌
이원론과 상호작용설
의식하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가
종교적 감정을 관장하는 뇌

제11장 언어는 생물학적 능력인가 문화의 소산인가
사고의 언어, 멘탈리스
최초의 언어
방언의 탄생

제12장 심신수반론과 그것의 극복
김재권의 학문의 길
불완전한 심신수반론
두 가지 심신문제

제13장 이성과 감성, 의식과 감각질
인간과 이성
신체로 환원되는 이성과 감성
의식과 자아
물질은 어떻게 상상력이 되는가
역동적 중핵 가설
감각질의 특성

제4부 진화신학을 향하여

제14장 현대문화 속에서의 신학
신학자 판넨베르크
신학과 자연과학의 대화
우연과 장의 신학
예수의 부활과 기독교의 희망

제15장 다윈주의와 그리스도교
창조과학은 과학인가 종교인가
생물학적 이타주의
다윈주의자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
기적의 문제

제16장 설계, 너무도 심원한 주제
지적 설계
다윈과 설계
설계 은유

제17장 진화신학을 향하여
고통의 진화사
다윈 이후의 신
고난의 하나님
접기


책속에서


사람의 생활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술이나 예술과 마찬가지로 종교도 수십 억 년을 거쳐서 내려오는 유전학적인 진화과정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오늘과 같은 완전한 의식상태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일정한 의식상태에서 문화적 진화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내려오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2000~3...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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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용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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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A&M대학교에서 유기화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 및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갈릴레오의 고민』, 『내가 본 함석헌』, 『사람의 과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 『부분과 전체』, 『인간을 묻는다』 등이 있다.


최근작 : <로티의 철학과 아이러니>,<내가 본 함석헌>,<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 총 10종 (모두보기)
김용준(지은이)의 말
지금까지 몇 권의 저서와 번역서를 냈지만 그 책들은 사실상 그때그때 원고 청탁에 못 이겨 원고 마감 기일을 독촉받아가며 썼던 글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 평생에 '과학과 종교'라는 제목의 책을 한 권 써보는 것이 소원이었고, 한편으로는 이렇게라도 나 자신을 묶어놓아야 글을 쓸것 같아서 결정했지만 막상 집필을 독촉받고 보니 이번에야말로 내가 큰 실수를 한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이 앞섰다.

나이가 들수록 글스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을 이번 글을 집필하면서 새삼 통감했다. 그동안 읽어두었어야 할 책들이 눈앞에 아롱거려 집필보다는 독서 쪽으로 더 기울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런 글을 시작할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 아예 집필을 미루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번 했다. 그러나 미루자는 말을 꺼내는 것도 역시 쉬운 일이 아니어서 결국은 체계적인 준비도 없이 또다시 붓을 들었다.

여든을 눈앞에 둔 나의 한계를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계속 집필하겠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마치 호랑이 꼬리를 붙잡고 꼼짝없이 따라갈 수 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쫓기면서 쓴, 미완의 글을 내놓는 나의 심정을 독자 여러분께서 깊이 이해해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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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과학자


과학과 종교가 이렇게 함께 얘기될 수 있다는 자체가 현재의 과학 수준이 얼마나 일천한가를 말해준다. 먼저 이 책에 대해서 말하면 읽는데 상당한 인내력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물론 나의 이해력이 모자라기는 하지만 저자역시 이책 저책에서 인용된 문구를 그렇게 번역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앞선다. 그저 사전하나 옆에 놓고 자기도 이해하지 못할것 같은 문장으로 책임감도 없이 그렇게 번역해 버렸다.

나는 이책을 저자가 화학자라서 구입했다. 뭔가 객관적인 안목으로 과학과 종교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이 조금이라도 보였으면 이렇게 실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학자도 신학자도 아닌 어중간한 자세로 그저 기독교인으로서 결론적으로 기독교가 은근슬쩍 과학을 품으려는 의도 밖에 보이질 않는다. 책제목을 '과학과 기독교 사이에서' 라고 해야 옳을것 같다. 사실 불교는 일종의 과학이기 때문에 이런 책이 나올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햇병아리 같은 과학이 지금까지 수백년 동안 기득권을 누려온 기독교에 위협이 되자 이를 어떻게 해서든지 막아보려고 하는 애처로운 몸부림으로만 보인다. 서양철학자, 신학자들의 그런 몸부림을 모아놓은 것이라 보면 좋을 것이다. 언젠가는 과학이 신을 완전히 해부할 날이 오고야 말것이다.

과학자들은 과학적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 의미나 역할에 대해서는 성급히 결론을 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마도 확실하지가 않으니까 뭐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인이나 신학자들은 과학적 사실을 모른다. 이해하지도 알려하지도 않으면서 그 의미와 역할을 자신있게 결론을 내버린다. 그 용기가 부럽다. 과학자의 거짖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는 황우석교수 사건이 잘 말해준다. 과학자는 거짖말 해서는 안되고 거짖말도 언젠간 들통이 나게 되있으니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종교인과 신학자들은 정치인과 더불어 아무리 거짖말을 해도 들키지도 않고 비난 받지도 않는 그룹에 속한다. 이책이 그런 책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과학자가 아니다. 이책을 물렸으면 좋겠다. 돈과 시간을 낭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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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ke 2006-02-16 공감(6)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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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2006-03-12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책임한 독서평같군요. 목차를 대충 보고서도 어떤 책일지 감을 못잡고 구입했다면 이건 전적으로 구입자의 실수입니다. 책을 사기 전, 목차를 보고 어떤 내용일 것이다 감을 잡고 구입하는 것은 기본 아닌가요? 사실 이 책의 내용들은 그렇게 어려운 내용도 아니고 그동안 있었던 논쟁들을 잘 요약한 것들인데 그렇게 폄하하다니 솔직히 제대로 정독하신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참.... "거짖말"이 아니라 "거짓말"이 올바른 표기법입니다.

가을강 2007-08-08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려운 내용맞습니다. 내용이 어렵다기 보다는, 자기만의 노트식으로 풀어썼기에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겁니다. 저자가 혼자 보기엔 일목요연하게 요약이 되니 좋았겠지요. 글을 써서 책으로 낼 때는 읽은 사람들을 생각해서 써야 합니다. 그런점에서 내용을 떠나 잘 써진 책은 물론 아니지요. 저는 저처럼 신앙와 이성사이에서 고민하는 인생의 경륜이 쌓인 분이 쓴 책이라 기대를 했는데, 남들 생각의 요약집이란 느낌이 들어서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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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도에게 자연과학의 지식이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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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6-16 공감 (22)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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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책들(34)

용무 때문에 토요일 오전부터 학교에 나왔다. 귀국 이후엔 처음이다. 조용할 줄 알았는데, 점심을 먹고 나니까 여기저기서 북적거린다(대개 나와 같은 종류의 용무이다). 한 편의 프로그램성 글을 작성하는 것이 오늘의 할일인데, 아직 동료들의 글이 도착하지 않은 걸 핑계로 잠시 쉬고 있다. 이 잡는 기분으로 몇 자 적는다. 오는 길에 두 종의 토요일자 신문에서 북리뷰도 읽은 티를 낼 겸. 발터 벤야민의 ... + 더보기
로쟈 2005-04-02 공감 (10)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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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무능성



프레시안에 연재중인 최무영의 글을 오래간만에 옮긴다. 과학의 무능성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어서이다. 사실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어느 영역에서나 이 무능성이라는 말은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싶다. 그건 철학도 예외가 아니다. 철학의 만능성 혹은 철학의 유용성 혹은 필요성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무능성 혹은 무용성 혹은 유해성도 주장해야하지 않을까.

과학의 위험성

현대기술은 과학을 응용한 것으로서 물질문명을 낳았습니다. 과학은 기술과 영향을 주고받았고 현대기술을 낳았지만, 본질적으로는 정신문화라고 강조했지요. 대체로 우리는 정신문화를 과학보다는 문학, 예술, 철학, 종교 같은 것들로 생각합니다. 과학은 기술과 함께 묶어서 물질문명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요. 여러분은 그동안 많이 공부했으니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정신문화의 범주에는 과학과 함께 흔히 생각하는 문화, 예술, 철학, 종교 등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학과 예술은 별로 그렇지 않지만 철학이나 종교는 역사적으로 과학과 가끔 충돌한 경우가 있습니다. 대체로 과학의 합리주의와 종교의 초월주의 사이의 갈등인데, 철학도 근대와 달리 중세의 철학은 초월주의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앞에서 소개한 러셀의 저서 중에 ≪종교와 과학(Religion and Science)≫이라는 짧은 논고가 있습니다. 부제목은 '독단과 이성의 투쟁사'이지요. 러셀은 철학과 수학에 중요한 업적이 있고, 물리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고 지적했지요. 정치가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고 교육자로서 상당한 교육철학의 저서도 남겼습니다. 작가로서 노벨 문학상도 받았지요. 무엇보다도 행동가여서 감옥에 가기도 했습니다. 베트남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으로 널리 알려졌고, 나이가 많이 들어서 무려 80세일 때에도 시위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이른바 빨갱이로 낙인찍혔는데, 놀랍고 흥미로운 사람이지요. [러셀은 30여 년 전에 타계했는데 현재 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며 활동하고 있는 사람으로 촘스키(Noam Chomsky)를 들 수 있겠습니다. 원래 언어학자로서 20세기 언어학에서 최고의 업적으로 꼽히는 변형생성문법(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으로 유명하지요. 언어철학과 심리학에도 업적이 있는데 요새는 활발한 정치 비평, 특히 미국의 대외 정책의 위선과 야만성을 폭로하는 행동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저서가 한글로도 번역이 되어있지요. 그의 강연회에서 만나서 인사를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고 있는데 아무래도 '미국적'이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는 - 내가 '한국적'인 한계를 지녔듯이 - 지니고 있다고 느꼈어요.]















과학에 대해 그릇된 인식은 이른바 과학만능주의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만능주의는 희한하게도 종종 종교와 만나곤 합니다. 러셀의 저서를 독단과 이성의 투쟁사라고 했는데 물론 독단이란 종교를 가리키고 이성은 과학을 나타냅니다. 여기 종교를 믿는 학생들이 물론 있겠는데 여기서 독단이란 종교의 독선주의, 배타주의를 말합니다. 잘못된 의미의 종교지요.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러셀의 의미에서 독단과 이성이 만나서 투쟁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도리어 과학과 종교가 사이좋게 잘 만나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는 그릇된 인식에 바탕을 둔 과학과 기술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과학만능주의는 이성이 아니라 독단으로서 문제가 심각하다 하겠습니다. 과학과 종교의 사이좋은 만남이란 것이 사실은 독단과 독단의 만남인 셈이니 어떻게 되겠어요? 당연히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요. 전형적인 예가 바로 미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로 일어난 대표적 현상이 이라크 침략이겠지요. 과학만능주의가 종교의 배타주의, 초월주의와 만나서 미국의 세계 지배 전략이라는 것을 뒷받침해서 얻어진 끔찍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가장 걱정되는 과학의 미래입니다.

그런데 과학에서 잠재적으로 더욱 큰 위험성은 무능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예로 든 과학만능주의의 문제점은 기술과 관련되어 비교적 명백하게 나타나므로 쉽게 인식이라도 할 수 있지만, 독단이 아닌 정상적인 과학의 무능함은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정상과학은 워낙 세세하게 나뉘어 있고 전문화되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능해졌어요. 제대로 된 과학자라고 해도 사실은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매우 좁은 전문분야의 지식밖에 알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물리학에도 여러 분야, 곧 입자물리, 원자핵물리, 원자분자물리, 응집물질물리, 그리고 통계물리 따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응집물질물리학자라고 해도 응집물질에 대해 다 아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응집물질 중에도 초전도체, 반도체, 금속, 자성체, 강상관계, 흐름체, 무른 물질 따위 여러 주제가 있는데, 보통 그 가운데에서 한 가지만 알지요. 그 한 가지에서도 대부분은 극히 일부만 압니다. 너무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 있기 때문에 깊으면서도 넓게 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요. 따라서 좁은 주제에 대해 극히 일부분만 알게 되고 멀리 넓게 전체를 내다보는 조감을 지닌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전체를 보고 판단할 수 없으면 무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의 진행이 위험한지 판단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위험성이라는 것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정말로 위험한지 아닌지는 대부분 모릅니다. 특히 전체를 고려하지 않고 좁게 대상 자체만 보면 제대로 판단할 수 없지요. 여기서 위험한지 아닌지 잘 모르는 경우에는 당연히 판단을 유보하고 그것을 예의주시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혹시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니 판단을 유보해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위험성 없음'으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험성 없음으로 판명된 것이 아닌데도 위험하다는 증거가 없으면 대체로 위험성이 없다고 받아들이지요. 위험하지 않다는 증거 또한 없는데도 그렇습니다.

대표적으로 이미 논의한 핵발전과 핵폐기장, 그리고 우리 일상생활에 특히 중요한 유전자변형유기체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 일상에서 이른바 유전자 조작 식품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점심에 먹은 음식도 십중팔구 유전자를 조작하여 변형한 생물체로 만들었을 겁니다. 햄버거로 상징되는 간편하게 먹는 쓰레기음식(junk food)은 직간접적으로 상당 부분 유전자변형유기체를 사용합니다. 이것이 해로운가 아닌가는 완전히 확정된 결과가 없습니다. 강조하지만 위험하지 않다고도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안전하다는 증거가 필요한 것인데 일상에서는 위험이 입증되지 않았으니 문제가 없다며 마구 팔고 있습니다. 이에 반대하면 위험하다는 증거를 대라고 강변하지요. 그런데 사실은 동물 실험에서 위험하다는 실험적 증거가 있는데 이를 감추고 왜곡해서 선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네이처≫ 잡지던가요? 심사가 통과되어 게재하기로 했던 실험 결과가 편집자에 의해 취소되고 어이없게 정반대 결과의 논문이 실린 예도 있지요. 이러한 직접적인 위험성뿐 아니라 제어하지 못하는 교차수분의 위험성, 유전자 오염과 생물 다양성 훼손 등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습니다. 파국이 올 수도 있지요.

현재 세계에서 유통되는 유전자변형유기체의 다수가 미국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특히 몬산토(Monsanto)회사가 악명이 높지요. 이 초국적 기업은 베트남 침략 전쟁 당시 고엽제로 이름을 떨쳤고 - 이 때문에 아직도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지요 - 유전자를 조작해서 번식을 하지 못하는 콩과 허위 선전으로 독성 제초제를 팔고, 판매한 돼지가 낳은 새끼들에까지 특허권 소송을 걸고 독극물을 방류하는가 하면 어린이를 포함한 노동력 착취 등 화려한 활약을 자랑합니다. 이 대부분이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 주로 개발도상국에서 이루어지는 반면 미국에서는 디즈니랜드(Disneyland)와 손을 잡고 있으며 - 양의 탈이 생각나지요 -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엄청난 로비를 통해 정치권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 실상을 알면 너무나 놀랍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이 외에도 여러 미국의 기업들이 악명을 떨치고 있습니다. (사실 디즈니랜드의 진실을 보면 그 자체가 전형적인 양의 탈이지요.)

환경오염과 관련해서 대기에 미세먼지가 얼마고, 일산화탄소나 질소산화물이 얼마 있는데, 이는 기준값보다 낮으니까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는 기준값보다 낮다고 해서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기준을 가지고 기준값을 정했는지도 문제가 있지만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준값보다 높으면 크게 해롭다는 뜻이고, 기준값보다 낮아도 일반적으로 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리 크지는 않다는 것이 정확한 의미입니다. 그러니 기준값보다 낮다고 무조건 안전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가공식품에 많이 쓰는 첨가물도 마찬가지지요.

그런 예가 매우 많습니다. 위험성 관계가 불확실하다고 해서 위험하지 않다고 간주하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예가 앞 강의에서 언급한 광우병입니다. 광우병은 소에게 고기, 곧 동물의 사체를 먹여서 발병했지요. 풀을 먹고 살아야하는 소에게 고기를 먹인 것은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소를 빨리 키우고 무게를 늘려서 비싸게 팔고 젖소에게 최대한 많은 젖을 짜내어 이익을 늘리려고 양을 비롯한 동물의 사체를 갈아서 사료에 섞여 먹였지요. 그런데 양에게는 두뇌의 신경그물얼개 조직이 스펀지 모양으로 구멍이 숭숭 뚫리는 스크래피(scrapie)라는 해면상뇌증이 있었는데 그 양을 갈아 먹인 소에 옮겨서 광우병이 생겼다고 여겨집니다. 심지어 소의 사체도 갈아 먹였으니 소끼리 옮겨졌는데 이는 사람에게 사람을 먹인 셈입니다. (사람의 사체를 먹어서 걸리는 쿠루(Kuru) 병과 흡사한 조건이 되었네요.) 광우병 인자를 가진 소가 발병할 때까지 시간이 상당히 걸리는데 그 사이에 인간이 그 소를 먹으면 옮아서 변종 크로이츠펠드-야콥병, 이른바 인간광우병에 걸리게 되지요. 감염된 후 10∼20년, 때로는 30년이 지나서 발병할 수 있으니 여러분도 쇠고기를 먹고 나서 30년은 지나봐야 그 쇠고기가 문제가 없는지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양을 먹인 것이 그런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지요. 이미 말했지만 광우병을 일으키는 병원체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이 아니라 프리온 흰자질입니다. 생명체는 물론 아닌데 우리 몸속에 들어가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번식해서 뇌를 파괴합니다. 병에 걸린 소의 뇌나 척수를 비롯한 신경조직에 많지만 피나 살코기에도 소량 있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워낙 극소량으로 발병할 수 있어서 먹지 않아도 수혈이나 혈액제제, 심지어 젤라틴을 포함한 화장품과 수술실 등 가공품으로도 감염될 수 있다고 하지요. 일단 걸리면 고칠 수 없고, 늦추는 방법도 없습니다. 끔찍한 고통과 죽음밖에 길이 없지요. 영국에서 처음 환자가 생겼는데 세계적으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걸리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수만 또는 수십만 명이 걸리게 될 거라는 비관적인 예측도 있고, 일반 (산발성) 크로이츠펠드-야콥병(sporadic Creuzfeld-Jacob disease; sCJD)은 물론 알츠하이머병(Alzheimer's disease), 흔히 치매라고 알려진 사망자의 상당수가 사실은 인간광우병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몇 해 사이에 미국에서 알츠하이머 환자가 수십 배로 급증했는데, 일반적으로 진단방법이 발전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환자의 병력이 길지 않은 경우 사망 후 부검하지 않으면 알츠하이머병인지 인간광우병 따위 해면상뇌증과 관련이 있는지 확진하기 어렵습니다.

아무튼 그런 결과를 낳을 거라고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흰자질이 스스로 증식해서 치명적인 병을 가져오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더욱이 일반적으로 서로 다른 종 사이에 장벽이 있다고 믿었으므로 그 장벽을 뛰어넘어 발병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위험성과의 연관관계를 몰랐다가 나중에야 치명적인 위험이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안전한지 확실하지 않은데 위험성이 없다고 간주해버린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보여 주지요. 이러한 교훈을 볼 때 유전자조작은 매우 염려가 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얻어질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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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우스 2008-08-14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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