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3

希修 무아와 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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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아와 윤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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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언급되는 1, 3, 4 단계는 초기경전에 나와 있는 것이고, 2단계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중간에 넣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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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단계 (Mundane Level): 업의 책임자로서의 '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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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들이 업에 의해 생겨나고 자기 업의 상속자가 된다고 AN 5:57은 말한다. 하지만, 건강, 적성, 부모 등 삶의 큰 윤곽을 결정하는 요소들은 타고났어도, 마치 어떤 방송국에서 TV 연속극 제작을 시작할 때는 대충의 플롯만 있고 스토리의 디테일은 시청자 반응을 보면서 전개해 가는 것처럼 삶의 구체성은 매순간 자유의지로 내리는 선택 (생각, 말, 행동)과 노력에 의해 스스로 완성해 간다. 물론 삶을 특정한 방향으로 흐르게끔 하는 모멘텀을 그 윤곽 자체가 이미 갖고 있기는 하며 ('자유의지'가 '100%의 자유'는 아니라는 뜻), 그 모멘텀을 바꾸는 게 쉽지는 않지만 완전히 불가능하지도 않다. (모멘텀을 바꾸지 못 한다는 전제 하에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바로 점성술이라고 나는 생각.) 나의 현재 행동 (생각과 말 포함)이 얼마나 skillful 혹은 wholesome한지, 즉 어떤 탐진치(貪瞋痴)가 얼마나 많이/적게 들어 있는지에 따라, 이것이 새로운 업으로서, 전생/과거 업과 상호작용을 계속하면서 나의 삶을 확정해 나간다. (삶에 저항 않고 분별 없이 무조건 수용하는 것이 영성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건 그야말로 운명/팔자의 노예로 살겠다는 얘기. 저런 수용적 태도는, 최선을 다 해도 당장 바뀌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만 적용해야 하는 것.)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신의 쾌락/이익만 좇는 이기적인 사람은 내세에 고통스러운 조건들을 타고나고, 바른 과정/방법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내세에 행복한 조건들이 갖춰진 곳으로 윤회한다는 내용을 초기불교에서는 mundane right view라고 부른다. 암튼 이 삶의 책임( ≠탓)은 오로지 '나'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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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ity and impurity are one's own doing. No on purifies another." -- Dhp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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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the owner of my actions, heir to my actions, born of my actions, related through my actions, and have my actions as my arbitrator. Whatever I do, for good or for evil, to that will I fall heir." -- AN 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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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단계: '나'라고 동일시/집착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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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기독교나 베다전통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영원불변하는 그런 영혼을 불교에선 인정하지 않는다. One and the same 영혼이 옷을 갈아입듯 몸을 바꾸는 것이 힌두교의 윤회(reincarnation)이고, 한 양초의 불로써 다른 양초에 불을 붙이듯 그렇게 불=업이 다음 양초=생으로 넘어간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윤회(rebirth). 힌두교의 윤회와 다른 점은, 불교의 윤회에서는 이전 양초의 불과 이후 양초의 불이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말하기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전생의 A가 남긴 업이 물질을 끌어와 B라는 이승의 육체를 형성한다. 이 때 A의 업 때문에 몸을 받는 B는 A의 업도 상속받는다. (마치, 부모님의 사업체 상속시 채무도 함께 상속되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상속받은 업을 요리할 책임은 B에게 있고, 그 요리의 결과가 B의 미래 and/or B의 업을 상속할 내세의 C에게 영향을 미친다. 다만 어떤 업이 이승의 B 자신에게 결과를 가져오고 어떤 업이 내세의 C에게 갈지 알 수 없기에, B로서는 그저 요리에 최선을 다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불교에서의 윤회이며, 해탈로써 정지시키지 않는 한 이 과정은 영원히 무한히 반복된다. 겉모습으로만 A-B-C의 '세 사람'인 것이지 업은 그렇게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이 셋이 100% 동일한 인물인 것도 아니다. 전생의 나와 이승의 나의 연결성도 보아야 하고, 동시에 현 찰나의 나와 ('찰나'는 1/75초) 다음 찰나의 나 사이의 다른 점도 볼 수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을 규정할 근거/바탕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예를 들어, B가 사고로 팔 하나를 잃어도 심지어 식물인간이 되어도 그는 D나 E 아닌 여전히 B다. 이런 식으로 하나씩 살피다 보면, B가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근거로 삼을 만한 본질적/필수적 부분/요소를 단 한 가지도 확정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 B의 타고난 성격은 A의 업의 결과이기에, B의 뜻대로 100% 컨트롤하기는 어렵다. 이런 내용들을 한 마디로 간단히 표현한 것이 바로 '無我'이지만, 사실 부처님은 "'나'라는 건 없다"거나 "'나'라고 할 만한 것이 본래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I have a self'도 'I have no self'도 잘못된 견해 6가지에 들어간다고 부처님은 MN2에서 명시하셨다.) 몸이나 생각 등을 '나'라고 동일시해 봐야 고통만 따르므로 '내가 아님 (not self)'을 기억하라고 하셨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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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그런데 한자로 번역할 때 無我라고 해 놓고 나니, 글자 그대로 '내가 없다'고 과잉 단순화하는 데에서 온갖 문제가 비롯된다. 글자 그대로 '나'도 없고 '너'도 없다면, 모든 것이 "본래 없"고 환상일 뿐이라면, 내가 너를, 혹은 네가 나를 죽이면 안 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이미 아라한이 된 사리풋타와 마하가섭은 왜 여전히 천성의 차이를 보이는지? 無我 가르침은 그저 동일시/집착하지 말으라는 얘기일 뿐, 모든 행동 (생각과 말 포함)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나에게 있다. 부처님이라고 해서 배고플 때 남의 입에 밥숟갈 넣지 않으셨다. 나와 남을 구분 못/안 하는 게 무아인 것이 아니며, 나의 개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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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단계 (Transcendent Level): 매사를 process로서, impersonal하게 파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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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불교는 윤회와 무아를 말하는데, 내가 없다면 대체 무엇이 윤회한다는 말인가? 이 둘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라며 많은 이들이 헷갈려 한다. (윤회 방편설이 등장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런지.) 하지만 '나'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무엇이 윤회하는지, 해탈한 존재들은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 업을 짓는 나와 그 과보를 받는 내가 동일인물인지 아닌지, 우주의 시작과 끝이 무엇인지, 세상 만사가 내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환상인지 아닌지, 만물이 결국 하나인지 모두 제각각인지 등의 문제들은 고와 고의 해결에 오히려 방해만 되니 이런 문제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은 아예 하지도 말라고, 부처님은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명시하셨다 (SN 44:10, MN 2, MN 72, MN 63, SN 12:15, SN 12:20). 업을 짓는 이승의 '나'와 그 과보를 받는 내세의 '나'. 이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견해도 하나의 극단이요 그 둘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견해도 또 다른 극단일 뿐이니, 어떤 문제든 self라는 관점에서도 not-self라는 관점에서도, existence의 관점에서도 non-existence의 관점에서도 생각하지 말고, 다만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관점으로만 파악하라고 하셨다 (SN 12:12, SN 12:15, SN 12:48). 이것이 transcendent right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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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카메라로 사진 찍을 때 portrait 모드로 찍으면 주인공 얼굴만 또렷이 나오고 그 외에는 흐릿하게 나오듯이,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은 '나'라는 주체에 모든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그러나 촛점을 행위의 주체나 존재가 아닌 행동 (생각과 말 포함) 자체에 두고서, 심지어 자기 자신 포함 세상 만사를 자신의 생각/감정/이익 아닌 오직 인과의 관점에서만 impersonal하게 바라보는 것이 바로 'not self,' 'no conceit'인 것. 그래서 Thanissaro 스님은 '나' 포함 세상 만사를 process로 파악하라고, Bodhi 스님은 a series of events로 이해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Vimalaramsi 스님은 impersonalization이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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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ikkhu Bodhi on Brahman / Atman / Oneness / Fullness (Brahmanism) vs. Emptiness (Early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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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ikkhu Bodhi on 'not 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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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다음은 SN 21:2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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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다] "우리의 스승인 부처님에게 어떤 변화 (죽음을 의미)가 생긴다면 사리풋타 존자님은 그로 인해 슬픔, 탄식, 고통, 번뇌, 절망 등의 영향을 받으실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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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풋타] "부처님이 오래 사신다면 무수한 존재들을 위해 물론 훨씬 더 좋은 일이겠지만, 스승님께 어떤 변화가 생긴다 해도 내게 슬픔, 탄식, 고통, 번뇌, 절망 등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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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다]
(번역 i) "That must be because Venerable Sāriputta has long ago totally eradicated ego, possessiveness, and the underlying tendency to conceit. ... ..."
(번역 ii) "Surely, it's because Ven. Sariputta's I-making & mine-making and obsessions with conceit have long been well uproote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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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경은, '나'라는 존재를 중심에 놓고서 take personally하는 '자기중심주의'를 버리라는 메세지로 해석해야만 이해가 된다. 즉 불교의 ‘not self,’ ‘no conceit’는 우리가 흔히 생각해 오던 상식적 의미의 '겸손'이나 ‘자기희생’이 아니라 take things impersonally하라는 가르침인 것. "네 의지의 격률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항상 행동하라"는 칸트의 도덕법칙도 결국 자신의 이익, 감정, 이미지에 대한 집착 없이 공평무사하게, impersonal하게 행동하라는 얘기일 테니, 그런 측면에서 칸트의 도덕법칙도 무아와 비슷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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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단계 (Final Level): 모든 것을 초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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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正道의 right view에서부터 시작하여 팔정도의 8요소를 모두 계발한 후 다시 right view로 돌아와 해탈이 완성된다. 시작 단계의 right view = mundane discernment는 부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매사를 탐진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분별력이고, 주체/존재 아닌 행위/인과의 관점에서만 impersonal 하게 매사를 바라보는 right view는 transcendent discernment. 그리고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단순히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직접 '확인'/'체험'하는 것이 final right view 혹은 right knowledge (9단계). 그리고 이 경지에 이르면 모든 것, '나' 포함 모든 관념 및 수행의 노력까지도 놓게 된다 => 10단계인 right release/liberation/deliverance (DN 18, DN 33, MN 8, MN 65, MN 78, MN 117, AN 10:103, AN 10:108, AN 10:118, AN10:122, SN 14:29, SN 45:26, SN 55:26, etc.). 이것이 바로, 윤회의 강 건너편에 안착한 뗏목에서 내리는 '해탈'이며, 이렇듯 수행은 10단계 프로세스 (Tenfold Path)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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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나'에 대한 집착은 강의 건너편에 안착했을 때에야 비로소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으며, 그래서 타니사로 스님은 강을 건너가고 있는 수행의 와중에는 건강한 '에고' (프로이드가 말한 원래 의미 그대로의 '본능과 사회적 요구들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에고')가 오히려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자신을 위로할 줄 모르고 자신을 행복하게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만족을 위해 남을 이용하려고 하는 나르시시스트 혹은 소시오패스처럼 행동하게 (의도야 어떻든, 스스로 의식하든 못 하든) 될 것이기에. 팔정도의 8요소를 계발하고 있는 과정에서는 매사를 오직 인과의 관점에서 impersonally 하게 분석하는 노력으로 충분하며, 강의 건너편에 안착하기도 전에 '에고없는 척'하는 것은 강의 한가운데에서 배에서 내려 물에 빠져 죽는 행위와도 같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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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22: The Wisdom of Ego. Mature Wisdom Requires a Mature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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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 at a later time, he abandons conceit, having relied on conceit." -- AN 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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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강의 건너편에 도달도 못 했으면서 심오한 척하느라 4단계의 얘기를 주문처럼 읊조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integrity에 주의해야 하고, '나 없다'의 과잉단순화된 무아에 취해 있는 사람은 3단계의 skillful vs. unskillful 사고를 '수준 낮은 이분법'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영성에 관심있는 이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도 바로 과잉단순화된 무아나 oneness/nonduality에 대한 집착인데, 초기불교는 이 oneness/nonduality마저 거쳐 가는 명상 단계일 뿐 truth/reality는 아니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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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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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를 주체 아닌 행위에 촛점을 두고서 인과의 관점에서만 impersonal 하게 파악해야 하는 이유는 그럼 무엇인가? '나'라는 주체 위주로 생각할수록 존재에 집중=집착하게 되고, 그 집중/집착의 힘이 바로 존재를 반복하는 윤회의 동력이 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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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ver one’s selfhood turns up, there that action will ripen. Where that action ripens, there one will experience its fruit, either in this very life that has arisen or further along in the sequence." -- AN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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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not self, no conceit을 가르치는 것이며, 이런 교리들의 목적도 상식적 의미의 '겸손'이나 '원만한 인간관계' 혹은 '사랑'이 아니라 바로 '윤회로부터의 해방' 즉 '해탈'인 것. 그러니 "불교에서 윤회는 방편설" 류의 얘기는, 불교의 대전제부터 아예 부정하고 들어가는 셈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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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해탈하실 때 3가지를 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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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본인의 윤회. 수십만 번에 걸치는 윤회동안 어떤 생에서 어떤 음식을 먹었었는지까지 자세히.
(b) 인간들의 윤회 패턴. 어떤 행동을 하면 결과가 어떻게 되고 그 결과가 언제 찾아오고 등등.
(c) 심리적 윤회. 어떤 마음을 먹으면 그 결과로 내 생각과 감정이 어떻게 되고 그로 인해 어떤 경험이 찾아오고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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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b와 c를 관통하는 공통된 법칙을 찾으셨는데 그게 12연기=인과이다. 그러니까 b는 12연기가 거시적 레벨 (생과 생 사이)에서 작용하는 것이고 c는 미시적 레벨 (한 개인의 한 찰나의 의식과 다음 찰나의 의식 사이)에서 작용하는 것인 셈. 그래서 매사를 주체 아닌 행위에 촛점을 두고서 인과의 한 과정으로만 파악하라고 하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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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는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자기 마음의 변화는 직접 확인할 수 있고 어차피 미시적 차원에서의 원리와 거시적 차원에서의 원리는 동일하기에, 윤회가 믿기지 않는다면 안 믿어도 상관은 없다. 미시적 차원에서의 연기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윤회가 있을 경우 좋은 곳으로 윤회할 것이고, 설사 윤회가 없다 한들 이미 이승에서 마음 수행의 효용을 보았으니 억울할 이유가 없는 것. 하지만 누가 죽을 때마다 제자들이 부처님에게 그 사람은 어디로 윤회했느냐고 묻고 이에 대해 부처님이 대답하시거나, 어떤 행동은 이승에서 그 결과가 오고 어떤 행동은 다음 생에서 그 결과가 오며 또 어떤 행동은 몇 생 후에 결과가 온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얘기들이 초기경전에 줄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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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無我之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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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만 추가로 언급하고 맺으려고 한다. 예술 작품/활동에 푸욱 빠져 잠시나마 '나'를 완전히 망각할 때 '무아지경'이라는 표현을 쓰고, 이걸 바람직한 상태로 오해하기에 그래서 심지어는 섹스를 '수행'으로 삼는 탄트라라는 것도 생긴 것이지만, 이런 해석은 부처님의 관점과는 전혀! 무관하다. 초기불교는 섹스, 도박, 권력, 쇼핑, 예술, 여행, 우정/사랑, 심지어 학문마저도 모두 감각적 즐거움을 위한 feeding이라 간주한다. 물론 도박보다는 예술이 건전하고 인간관계보다는 자연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건강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즐거움은 명상을 통해 자가발전하는 것. 또, 예술이든 뭐든 그런 외부 자극에 distract되지 않기 위해 일상생활 중에도 늘상 자신의 호흡에 대한 관조를 자기 마음/의식의 anchor로 삼으라고 (바로 이것이 'centered'의 의미)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니 외부의 무언가에 빠져 잠시나마 자신을 망각/상실하는 의미의,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아/무아지경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완전히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 What an ir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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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대한 오해 #8. 무아는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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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대한 오해 #7. 남의 자기중심주의를 떠받드는 것이 Not Self, No Conc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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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대한 오해 #6. 어머니가 외아들을 사랑하듯 세상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불교의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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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대한 오해 #5. 무조건 남을 내 위에/앞에 두는 것이 무아/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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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대한 오해 #3. 남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남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는 것이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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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ity of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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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希修
    '공동체의 화합!을 원한다면 비판!을 잘 하고 또 잘 받아 들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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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崔明淑
    3단계는 자기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상태이겠네요.. 인간의 행복감을 느끼는 상태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과문하여 글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네요.ㅜㅜ 그래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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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希修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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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希修
    주어를 삭제한 채 술어만 들여다 보고 impersonal하게 판단하는 것. 불교의 '무아'를 바르게 이해하는 방법.
    "박원순을 빼고 봐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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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anjin Kang
    이해를 돕기 위해 선생님이 추가하신 2단계가 굉장히 값지네요 ^^ 이렇게 공짜로 봐도 되는건지 살짝 죄송스러움이 느꺼질 정도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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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njin Kang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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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y be an image of text that says "Master Gotama? Is the one who acts the same one who experiences (the results of the act)?" "The one "(Το say,) brahman, one who acts is the same one who experiences, is one extreme." "Then, Master Gotama, is the one who acts someone other than the who experiences?" "(Το say,) brahman, The one who acts is someone other than the one who experiences, is the second extreme. Avoiding both of these extremes, the Tathagata teaches the Dhamma via the middle: "From ignorance as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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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 w
  • May be an image of text that says "requisiteconditioncome condition come fabrications...." SN 12:46 S 12. "Whatever brahmans and contemplatives, teachers of kamma, who declare that pleasure and pain are self-made, even that is dependent on contact. Whatever brahmans and contemplatives, teachers of kamma who declare that pleasure and pain are other-made... self-made and other-made... neither selfmade nor other-made, but arise spontaneously, even that is dependent on cont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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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 w
  • 希修
    자타 불문, 주어/대상 아닌 술어/과정에 집중하는 것이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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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希修
    '내가 남보다 위'라는 생각뿐 아니라 '내가 남보다 아래'라는 생각 역시 conceit (자만. self-image 집착)이라고 아비담마는 말한다. '나'라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자기중심적') 사고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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