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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6년 12월호)
동아시아신학의 미래와 한국신학의 과제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가 인식된 이후 세계선교는 교세 확장보다는 그 선결 요건으로서 ‘땅끝까지’ 복음을 적용할 수 있는 기독교 내용의 구성, 즉 신학의 세계화가 절실하게 요구되어 왔다. 신학의 세계화에 있어서 마지막 ‘땅끝’은, 오랜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한국 외에는 선교에 실패한, 전통적으로 유교 문화권에 속한,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이다. 글로벌신학의 미래는 이 마지막 보루인 유교 문화에 익숙한 동아시아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신학, 즉 동아시아신학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신학은 글로벌신학의 완성이며 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독교의 세계화를 위해 중요한 동아시아신학의 미래를 누가 담당하느냐? 그것은 당연히 제1세계와 제3세계의 중간에 위치하며, 기독교와 유교가 동시에 강렬하게 작동하고 있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신학자를 보유한 한국교회가 담당해야 할 몫이다. 그것이 동아시아신학 및 나아가서 글로벌신학의 미래를 위한 한국교회와 한국신학이 지닌 최대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특집에서 필자가 맡은 부분은 신학 담론에 관한 것이어서, 교회 및 다른 실천적 주제에 관한 논의는 다른 필자들에게 위임하고 있음을 독자들은 양지해주기 바란다.
서구신학과 아시아신학
필자는 지난 20여 년간 미국종교학회(American Academy of Religion, 이하 AAR)에 거의 매년 빠짐없이 참석해왔으며, 지난 8차 총회를 제외한 7차에 걸친 아시아신학자협의회(Congress of Asian Theologians, 이하 CATS)에도 모두 참석했다. AAR은 신학과 종교학 분야의 최대 학회로 매년 11월에 세계에서 약 1만 명의 신학자와 종교학자들이 대거 참석한다. 현역 학자들은 물론이고 박사수련생들을 포함한 전 세대의 학자들이 참여하여 매년 새로운 연구 주제들을 발표하며 토론하는 최고의 학회이다. 이곳에 참석하지 않으면 세계 담론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최신 학술정보와 네트워크에 소속될 수 없을 정도로 학자로서 자기 분야의 학술적인 촉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꼭 참석해야 하는 필수적인 학회이다. CATS는 아시아 전역에 걸쳐 있는 약 15개 국가의 대표적인 신학자와 신학생들이 참석하는 지역적 신학 플랫폼이다. 이 두 곳을 중심으로 필자는 나름 서구신학과 아시아신학 간의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하려고 노력해온 셈이다.
이 여정에서 필자는 항상 경계선 신학자로서의 딜레마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 딜레마는 필자만의 문제가 아닌 이 학회들에 속한 모두에게 내재하는 공동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선, 오늘날 그 어떤 신학도 지금까지 주도해 온 서구신학 전통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서구적 문화사유체계에 토착화된 서구신학은 20세기 후반부터 서구사상이라는 맥락적 한계에 부딪혀 글로벌신학으로 발전하는 돌파구를 찾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 대표적인 한계가 형상과 질료, 초자연(신)과 자연(인간), 정신과 육체, 이론(로고스)과 실천(프락시스) 등 서구신학의 온갖 것에 깊이 내포된 그리스적 이원론이다. 특히나 역사가 오랜 동양종교들을 만나서는 사유체계에 근본적인 도전을 받아 당황하고 있다. 더욱이 서구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지형 변화라는 엄연한 현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 중심의 서구 기독교는 교인 숫자로 볼 때, 더 이상 다수를 점하지 못하고 총 기독교인의 4분의 1에 불과한 소수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그 감소 속도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유럽으로부터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아시아로 기독교의 중심축이 이동한 것은 이제 기정사실이다. 이렇게 기독교의 중심이동과 함께 ‘서구 기독교의 신화’는 이제 완전히 사라져가고 ‘새로운 기독교의 출현’이 도래하고 있다.1)
특별히 세계 모든 종교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아시아 종교들과의 만남에서 서구신학은 충격을 받아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서구신학자들은 문화신학, 종교 간의 대화, 종교신학, 글로벌신학, 비교신학 등 계속해서 새로운 이름을 붙인 신학 장르를 만들어가며 대책을 마련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글로벌신학을 형성하기 위해 환골탈태하는 대규모적 패러다임 전환보다는 기존 서구신학의 몸통에 성형 및 약간의 부분 시술을 하는 수준에 머물러왔다. 그들의 속내는 앞으로도 계속 서구의 신학적 주도권을 유지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19세기 식민주의 선교 시절의 군림하던 자세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을 보이지만, 아직 그들의 몸통은 서구신학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한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의 통계에서 숨겨져 있던 것이 확인된 것처럼, 내부적으로 백인 남성 기독교인 우월주의는 아직도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지난해 AAR에서 그들은 보다 진일보한 신학 상품들을 내놓았다. 소위 ‘담 없는 신학’(theology without wall) 또는 ‘간종교적 신학’(trans-religious theology)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앞으로는 각종 교회의 담은 물론이고, 상표(레테르)가 붙은 기존 종교들의 담을 넘어 서로 소통하는 신학을 해야 한다고 과감하게 제안했다. 겉으로 보면 그럴듯하다. 그러나 서구 기독교가 아시아에서 지금까지 ‘선교’라는 미명하에 아시아 종교전통들을 반기독교적이라고 무시하며 파괴해온 역사적 오류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반성 없는 그런 상품과 제안들은 일종의 ‘값싼 은총’을 서구신학에 주려는 신학적 획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제 와서 서구신학자들이 그냥 책상에 앉아 생각나는 대로 말할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역사적 오류들을 참회하고 복구하려는 ‘값비싼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런 취지로 지난해 AAR의 한 분과 모임에서 필자는 그런 주장을 하는 서구신학자들을 강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아시아 신학자들의 모임에서 하나의 큰 주제는 여전히 “어떻게 서구신학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아시아신학을 할 수 있느냐?”이다. 이런 이유로 초기 민중신학자들을 비롯하여 1세대 아시아 신학자들은 ‘반(서구)신학이 아시아신학’(Anti-theology is doing theology for us!)이라는 선언을 했지만, 그것은 너무 단순하고 환원적인 해체신학이었고, 그 비판과 해체의 방법론도 대부분 서구적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 후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아시아신학은 로고스(토착화)신학과 프락시스(해방)신학이라는 서구신학의 이원론적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아시아신학은 토착화신학(문화신학, 종교 간의 대화, 종교신학 등)과 해방신학(민중신학, 달릿신학, 투쟁신학, 아시아여성신학 등)의 분리를 확실하게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신학과 동아시아신학
아시아신학은 그동안 서구 기독교의 선교 역사와 식민지의 경험을 가진, 언어적으로도 영어권이라 할 수 있는 인도를 비롯해 서양 언어에 능숙한 동남아시아 지역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세계적으로도 그렇게 알려져왔다. 서구 식민지의 경험이 없는 한국과 일본 등에 있는 동아시아의 신학자들은 언어 장벽 때문에 세계적 토론에 참여가 제한되었다. 또한 유교 및 도교 등 동북아시아의 종교문화적 배경은 이슬람, 힌두교 등 유신론적인 동남아시아의 그것과 그 궤를 완전히 달리한다. 한스 큉(Hans Küng)이 이러한 동북아시아의 종교전통을 독특한 지혜적 유형으로 규명하고, 중·근동의 유일신적 유형과 인도의 신비적 유형을 구분하여 제3의 세계종교 패러다임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지만, 그리 많은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점이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 2013년 부산에서 개최된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이다. 분명히 이것은 유교 문화권에서 처음 개최되는 세계적인 기독교인들의 모임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와 동남아시아의 기독교를 중심으로 논의되었으며, 종교 간의 대화도 유교와 같은 주최지역의 전통보다는 중·근동과 동남아시아 종교전통들에 국한되었다. 다만 한 마당 프로그램에서 행한 필자의 발표가 거의 유일한 것이었다. 이 동북아시아 종교문화 전통에 대한 엄연한 무시에 대하여 필자는 WCC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래서 WCC의 종교 간 대화 담당국은 자체 예산으로 한국에 사절단을 보내 유교와 기독교 간의 대화를 추진하겠다고 약속했고, 필자에게 그 주선을 일임했다. 그러나 아직 그 대화를 위한 마땅한 후원단체와 유림 등 유교를 대표해서 대화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지 못해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글로벌신학과 한국신학
세계적으로 한국 기독교가 가진 위상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우선 일본과 중국 등 기독교인 숫자가 소수에 불과한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과 달리, 한국은 총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기독교인이며, 사회적으로도 강력한 위세를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볼 때는 그 양상이 전혀 다르다. 서구와 아시아와 관련된 글로벌신학 담론에서 한국신학에 대한 논의는 민중신학을 제외하고는 그리 활발하지 못하다.(성서신학 분야 외에 AAR과 같은 세계학회에 참여하는 한국 신학자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우선 AAR과 같은 경우, 한국신학으로 소개되는 것은 오히려 한국적 맥락에서 온전하게 연구된 것이라기보다는 미국이라는 디아스포라적 상황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 경험한 실존적 입장에서 구상한 코리안-아메리칸(Korean-American)신학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의 업적도 중요하지만, 그들은 결코 한국신학을 대변한다고 할 수 없다. 이들의 활발한 신학 활동으로 인해 동아시아 문화를 모르는 서구학자들에게는 이들이 마치 한국신학의 핵심인 것처럼 인식되고 와전되는 경향마저 보여서 걱정된다.
그런가 하면, 아시아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CATS와 같은 아시아 신학자들의 모임에 참여하는 한국 신학자들도 극소수이다. 비교적 정교한 서구신학과 제1세계적 풍요에 익숙한 대부분의 한국 신학자들은 아시아신학의 수준을 우습게 보고, 제3세계적 열악한 상황에서 고투하며 쌓아 온 아시아 신학자들의 업적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현재의 한국신학은 AAR과 CATS와 같은 세계적(글로벌-에큐메니컬) 신학토론의 장에서 동떨어져 있는, 고립된 고도에서 벌어지는 ‘우물 안 개구리’식 지역담론으로 고착되는 인상마저 든다.
한국에는 해외의 유수한 신학교육기관에서 연수를 받은 유능한 신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국내에 돌아와서는 글로벌신학 토론에 계속해서 참여하기보다는 한국교회와 신학교육 현장에 필요한 몇몇 주제에 국한되어 그것에 매이게 된다. 그래서 대다수 학자들은 아시아신학 같은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고, 학생 시절 외국에서 배운 서구신학만 소개하다가 시간이 지나 글로벌 담론의 흐름에 대한 촉각마저 상실한다. 그리하여 우수한 자질과 교육 배경, 그리고 탁월한 신학적 장래성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용 신학자로 국한되어 굳어버리는 듯해서 애석함을 금할 수 없다. 능력 있는 교회들이 이런 우수한 자질을 가진 신학자들이 미래지향적인 한국신학의 개발을 위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고무하고 지원해주기보다는, 한물간 백인 신학자들을 호사롭게 초청하여 고귀한 교인들의 헌금을 낭비하는 것을 볼 때 매우 안타깝다. 이렇게 간다면 한국신학은 비단 제1세계적 글로벌신학 담론에서 10년 이상 뒤처진 채 계속 그 후진성을 탈피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제3세계 신학에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 민중신학과 달릿신학의 관계에서 이미 그 실례가 나타나는 듯하다. 한국신학의 세계화에 대한 민중신학의 공헌은 크다. 그러나 앞으로의 논의는 보다 큰 세계적 지평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인도의 달릿신학은 민중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고 발전한 신학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글로벌신학으로서 자리매김은 오히려 민중신학을 앞서고 있는 듯하다.
동아시아신학의 미래
동아시아 국가들의 세계적 영향력이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다. 한국, 중국, 일본,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이 세계화 시대에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다. 이들이 속한 전통적인 유교 문명권과 미국과 유럽 등 전통적 기독교 문명권 간의 충돌에 대한 경고음은 석학들을 통해 서방세계에 이미 울려 퍼지고 있다. 그리고 공산주의 이념 대신 유교를 내세우며 G2를 넘어서 세계적 리더십마저 주장하는 중국의 부상은 눈이 부실 정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앞으로 동아시아신학이 처한 글로벌신학적 입지는 매우 민감하고 중요하다고 하겠다.
우선, 서구신학은 20세기 후반부터 위기에 봉착해 있는 것을 인정했으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20세기 중반까지 세계를 주도해온 유럽신학은 박물관 신학으로 전락하였고, 미국신학도 급진적 미국신학 및 포스트모던신학을 내세우며 극복하려 했지만, 뾰쪽한 대안을 내놓지 못한 채 강대국 백인 우월주의의 담을 성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랫동안 젖어 있던 서구신학의 배타적 선민주의와 변증법적 지배 속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조화와 소통과 융합의 새로운 대안적 신학 패러다임을 동아시아의 신학적 자원에서 찾고자 한다.
더욱이 동아시아에서 한국을 제외하고는 기독교 선교는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서구 신학자들과 선교사들의 무지, 즉 유신론과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는 동아시아 종교와 문화에 대한 몰이해에 있다. 글로벌신학은 진정한 세계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러한 유교적 종교문화의 담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는 동아시아신학의 토착화를 위한 필수적인 과제일 뿐만 아니라 글로벌신학의 온전한 세계화를 위한 선결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세계 종교와의 만남 이외에도 가장 시급한 신학적 과제는 자연과학과의 대화이다. 그동안 초자연(신)과 자연(인간)의 계층적 분리를 전제 조건으로 하던 서구적 사유 얼개에서는 신학과 자연과학의 진정한 대화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글로벌신학은 이웃 종교들에서 그 대안을 찾고 있다. 여기에 유교와 도교 등 자연(내재)과 초자연(초월)의 분리를 극복한 동아시아의 지혜전통의 시대적 필요성이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한 한 대안으로서 ‘도(道)의 신학’(theodao: theology of the Dao)을 제시해왔다.2) 개신교 신학의 시작은 루터(Martin Luther)가 말한 ‘coram Deo’(하나님 앞에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그것이 발생하게 된 역사적 질곡의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루터는 면죄부를 위시한 당시 가톨릭교회의 횡포에 저항하여 하나님 앞에서 기독교인의 독립된 자아를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몸을 제외한 환원주의적 요소는 결과적으로 개인주의와 인간중심주의라는 역기능을 초래했고, 결국 극단적인 무한경쟁적 상업주의와 더불어 생태계(지구의 몸)의 위기라는 종말론적 현상을 유발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흙으로 몸을 빚고 숨(영혼)을 불어 넣어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2:7)고 믿는 기독교 신앙은 루터의 ‘코람 데오’보다는 다석 유영모(柳永模)가 언급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통전적(天地人) 실존, 즉 ‘가온찍기’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3) 신앙이란 하나님 앞에서 대상화된 나 또는 나와 너(Martin Buber)의 관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늘(天)과 땅(세상·우주, 地)과 내(人)가 연결된 통전적 상황에서 신과 연합된 나의 자리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구원은 정신만이 아닌 육체(몸)의 구원, 나아가서 생태계의 구원이 포함되는-몸이 생태계의 일부이므로-온전함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육체를 무시하고 정신을 강조하는 그리스적 이원론을 극복하지 못하는 서구의 정체적 로고스신학은 이 한계에 막혀 더 이상 활로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 글로벌신학은 이러한 서구신학의 고질병을 이어받아 그 이원론적 한계의 역사적 결과인 로고스신학(theo-logos)과 프락시스(해방)신학(theo-praxis)의 분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아시아신학도 여전히 그 한계를 답습하고 있다. 필자는 동아시아신학과 한국신학은 동아시아의 종교문화 전통에서 그 대안적 지혜와 통찰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러한 제3의 신학 유형을 ‘도의 신학’이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도(道)란 보통 오해의 소지가 있는 그런 ‘도’가 아니라 ‘머리 수’(首) 자와 ‘달릴 착’(辶) 자로 이루어진 ‘도’, 즉 지(logos)와 행(praxis)이 일치를 이룬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신학을 말하는 것이다. 더욱이 ‘도’는 ‘로고스’보다도 더 성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신을 로고스라고 말한 적이 없고 단지 호도스(o`do.j), 곧 길(道)이라 했고(요 14:6a), 사도행전에서도 기독교의 최초의 이름은 예수의 ‘도’였던 것이다.(행 9:2, 22:4, 24:14, 22)
한국신학의 과제
전통적으로 유교 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 기독교 선교가 성공한 나라는 오직 한국뿐이다. 여기에는 명백한 신학적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개신교 전통인 개혁신학과 한국 성리학의 사유체계는 이들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발생한 이질적인 전통임에도 불구하고 두터운 유사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특히 동시대의 인물인 장 칼뱅(John Calvin)의 신학과 퇴계 이황(李滉)의 유학 사이에는 놀랄 만한 유사성이 내재한다.4) 그들은 경천애인(敬天愛人) 사상, 경건과 학문의 방법론(fides quarens intellectum과 居敬窮理), 인간론(신형상론과 천명론), 수양론(성화론과 수신론) 등에서 서로 크게 공명한다.5) 그러나 한국신학은 그동안 이러한 우리의 중대한 종교문화적 자산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무시해왔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과 유교전통 간의 특별한 만남의 자리가 한국신학이 정체성을 확립(가온찍기)하고 글로벌신학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줄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므로 한국신학의 최대 과제 중 하나는 한국인의 종교적 유전자에 스며 있는 유교전통을 어떻게 신학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국 가톨릭과 개신교 둘 다 비판적 지식인들이던 조선의 선비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시작되었고, 따라서 한국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유교적이다. 초기 성서 번역은 물론이고 실천 현장에서도 강한 유교적 내성을 표출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는 우리의 주요한 종교문화적 콘텍스트인 유교에 대한 연구와 교육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예컨대, 한국 개신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큰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500년 전 이러한 개신교 신학을 품고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사상적 콘텍스트인 퇴계를 비롯한 한국의 유학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를 볼 때, 한국 개신교는 더 오랜 전통을 가진 자신의 종교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남의 역사 속에 발전해온 개신교 전통이 우리에게 그대로 이식될 수 있다는 착각에 여전히 빠져 있는 듯하다. 전혀 다른 종교문화적 상황에서 발생한 남의 신학인 개신교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 영성과 정신(골수)을 우리 몸(종교문화) 속에 알맞게 체화하여 우리 신학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신학을 베끼고 모방하는 종속적인 사대신학의 구태를 답습하는 듯해서 안타깝다. 자기의 종교문화를 제대로 모르면서 다른 종교문화에서 발생한 남의 신학을 맹신하는 신학, 그러한 가현설적 신학에는 온전한 윤리성과 도덕성이 담보될 수 없다.
결론적으로, 글로벌신학의 큰 틀에서 오늘날 한국신학에 주어진 과제를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해보고자 한다.
- 동아시아신학: 동아시아의 전통적 종교문화에 대한 활발한 연구와 대화를 통해 동아시아신학을 개발하여 종교문화적으로 비교적 비슷한 동아시아에서 신학 청지기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다만 이 지역이 같은 유교 문화권에 속하였다고는 하나 한·중·일 각 나라와 유교와의 관계에는 온도 차가 있다. 일본은 유교의 역사가 짧아 불교의 영향이 더욱 강하다. 중국은 문화혁명의 조직적 파괴 때문에 유교 전통이 사실상 붕괴되었으며, 도교가 성행하고 있다. 유교 전통이 아직도 역동적으로 살아 있는 곳은 한국사회이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신학에서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한 분업을 하자면, 일본은 불교와의 대화, 중국은 도교와의 대화, 한국은 유교와의 대화를 맡는 것이 적절하다. 여기에 한국신학의 유교 연구에 대한 특별한 중요성이 있고, 그것은 곧 글로벌신학이라는 큰 틀에서 ‘동아시아신학의 지킴이’로서 한국신학이 가진 시대적 사명을 함의한다고 하겠다.
- 글로벌신학: 이처럼 유교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형성된 한국신학은 토착화 및 상황신학(contextual theology)의 차원을 넘어 글로벌신학의 한 패러다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다. 그것은 로고스신학과 프락시스신학으로 이원화된 글로벌신학에 통전적 돌파구를 제공하고, 나아가 선교의 난제였던 동아시아 문화권을 포함한 기독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예컨대, 도의 신학) 특히 현대신학의 최대 안건인 자연과학과의 대화에서 자연과 초자연의 분리라는 장벽을 넘어 과학기술시대인 21세기에 적절한 신학의 모형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 글로벌한국신학: 한국신학에 주어진 이러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한국 신학자들은 서구 신학자들과 아시아 신학자들 모두와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해야 한다. AAR과 CATS와 같은 국제적인 모임에 참여하여 활발하게 소통하고 서로 간의 간극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하여 서구 신학자들에게 동아시아 전통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촉진하고, 아시아 현장의 어려운 사정을 인식시키며 아시아신학과 서구신학 간의 가교 역할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앞으로 한국신학은, 지금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것과 같이, 서구신학의 연장선상에서 우리의 신학을 정초하려는 맥락적 착오에서 시급히 탈피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의 입장에서 서구신학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들이 지닌 문화제국주의적 독소와 반문화적 요소를 해체하고 난 후, 그 골수(핵심)를 우리의 실정에 맞게 조정하여 수용하는 신학적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한 안티테제의 자원으로서 유영모와 같은 토종신학의 활용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한국신학을 더욱 심화시켜 글로벌신학 담론에 공헌할 수 있는 수준의 글로벌한국신학을 정립해야 한다.
- 환대(hospitality)신학: 나아가 한국신학은 토착화신학과 문화(상황)신학의 단계를 넘어 복음적인 환대신학으로 더욱 성숙되어야 한다. 성육신과 삼위일체론은 서로 다른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서 품어주시는 신적 환대의 극치를 천명한다.6) 한국사회에 이주민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고 있고, 문화와 인종적으로 다양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문화적·인종적·이념적 장벽을 넘어 모든 것을 품고 환대하는 환대신학이 한국교회에 요청되고 있다.(마 25:31-46) 이것은 그동안 무시해온 우리의 종교문화는 물론이고 이웃들의 것, 나아가 우리를 억압한 자들의 것도 포함한다.
한국신학이 주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에 보답하여 하나님께 참된 영광을 돌리고 세계 속에 모든 이들을 품고 성령의 인도 아래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는 복음적 한국교회와 한국 기독교로 성숙할 수 있는 신학적 기반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 Philip Jenkins, The Next Christendom: The Coming of Global Christianity(Oxford University Press, 2002), 79-105; 김신권 역, 『신의 미래』(도마의길, 2009) 참조.
2) 김흡영, 『도의 신학』(다산글방, 2000), 『도의 신학 2』(도서출판 동연, 2012) 참조.
3) 김흡영, 『가온찍기: 다석 유영모의 글로벌 한국신학 서설』(도서출판 동연, 2013) 참조.
4) 김흡영, 『도의 신학』, 181-228 참조.
5) 위의 책, 231-261 참조.
6) Heup Young Kim, “Embracing and Embodying God’s Hospitality Today in Asia,” CTC Bulletin: 28/1(2012), 1-11 참조.
김흡영 | 세계과학종교학술원(ISSR) 창립회원이고, 아시아신학자협의회(CATS) 공동의장과 한국조직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강남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이며 한국과학생명포럼의 대표이다. 저서로는 『도의 신학 I』, 『도의 신학 II』, 『가온찍기: 다석 유영모의 글로벌 한국신학』,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