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13

장기표 아내 조무하 “민주화운동이 훈장? 보상금 신청하라니 쪽팔렸다” - 조선일보

장기표 아내 조무하 “민주화운동이 훈장? 보상금 신청하라니 쪽팔렸다” - 조선일보


장기표 아내 조무하 “민주화운동이 훈장? 보상금 신청하라니 쪽팔렸다”
[아무튼, 주말] 거리의 혁명가 장기표와 45년 산 여인
조무하가 말하는 ‘바보 장기표'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입력 2021.07.10 03:00


지난달 14일, 서울대 교수회관 앞 노천카페에서 만난 조무하·장기표 부부. 조무하는 “여름옷이 없어 오랜만에 원피스를 한 벌 사 입었다”며 수줍게 웃었다. 이후 대선 출마를 선언한 남편에 대해서는 “이젠 화도 안 난다”고 했다. 그동안 선거는 지지자들의 자원봉사로 치러왔다. 이날도 손형기 전 TV조선 시사제작국 에디터가 ‘장기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있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조무하는 장기표의 아내다. 스물여섯 살, 수배 중이던 ‘거리의 혁명가’를 만나 45년을 살았다. 왕십리 중앙시장 다방에서 결혼을 서약한 지 석 달 만에 구속된 남편은 10년의 도피, 10년의 옥살이를 반복했고, 꽃 같던 여인은 남편 옥바라지에 두 딸 키워내느라 손에 매니큐어 한번 발라볼 틈 없이 나이를 먹었다. 서대문경찰서에서 단식 투쟁에 들어간 남편에게 죽이라도 먹이려 찾아갔던 날을 기억한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형사과장이 말했다. “이제 보니 장기표가 호랑이 등에 업혀서 사는 거였네. 부인을 보니 알겠네.”

전태일 분신, 민청학련 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 민주화 운동 한복판에서 남편 못지않은 수난과 고초를 겪었으나, 정작 조무하는 담담했다. “옛날엔 내가 특별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나이 드니 알겠더라구요. 누구나 다 특별하게 살고 있다는 걸. 누구나 우리 못지않게 산전수전 겪으며 저마다의 인생을 치열하게 산다는 걸.” 10억원에 달한다는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거부한 이유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건 남편 장기표뿐이다. 재야의 ‘동지’였던 이부영·김근태·이재오·김문수는 제도권에 들어가 명성과 권력을 누렸는데, 장기표는 “내가 추구하는 정치가 아니다”라며 ‘안 되는 길’로만 골라서 갔다. 창당과 출마를 거듭했다 실패한 것만 일곱 번. 거덜날 살림도 없지만 논술 교사로, 문화센터 강사로 뛰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아내는 선거철만 돌아오면 가슴이 내려앉는다. “남들은 영원한 재야, 천연기념물 이러면서 존경한다는데, 제가 볼 땐 그냥 바보예요, 바보(웃음).”

남편 모교이자, 자택 근처인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앞에서 조무하(71)·장기표(76) 부부를 만났다. 장기표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기 20일 전이다. 이달 5일, 남편의 느닷없는 출마 선언에 전화로 다시 만난 조무하는 “이젠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며 웃었다. “청룡열차가 정해진 목표도 없는데 점점 끝을 향해 달리는 느낌이랄까요.” 교사 출신의 강직한 성품을 지닌 아내 앞에서 장기표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앉아 있었다.

# 많은 사람들이 문통과 더민당을 지지하는 이유를 ‘약자의 편에 서는 점’으로 꼽는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이 약자의 편에 서는 경우는 자신들 가진 것이 침해되지 않을 경우에 한해서만 그렇다. 장기표는 다르다. 그의 삶은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초지일관된 노력의 연속이었다. 취할 수 있는 무수한 유혹들을 뿌리치고 소위 ‘안 되는 길’만 고집함으로써, 그동안 쌓았던 명예와 동지들을 잃었다.

-작년 총선 때 정연두 서울시립대 교수가 경남 김해로 출마한 장기표를 지지하며 올린 글이 화제였다. ‘안 되는 길’ 고집하지 말고 이제 좀 편하게 살면 안 되나.

장기표(이하 장): “안 되는 길을 고집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어릴 때부터의 일념, 다른 하나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믿어서다. 사람들은 내가 민중·민주·정의·노동 같은 거창한 가치를 위해 희생하며 살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국은 나의 행복 때문이었다. 신앙의 궁극적 목표가 자기 구원이듯 민주화운동이 내겐 신앙이었다.”

조무하(이하 조): “아유, 그럼 혼자 살았어야지(웃음).”

-아내와 두 딸의 삶도 배려해야 하는 것 아닌가.

조: “이 양반은 자기 이념, 자기가 생각하는 삶의 방식을 관철하려는 욕심이 하늘을 찌른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 소설책이나 보며 편히 살고 싶은데 그게 안 맞으니 참 힘들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참고 사셨나.

조: “저 양반 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꼭 나쁜 일은 아니니까. 많은 이가 ‘장기표는 참 이상적이다’라고 하는데, 그건 ‘저 사람 참 바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도 바보같이 살자, 했다. 다 내려놓고 흘러가는 대로….”

-조무하가 없었으면 오늘의 장기표도 없었겠다.

조: “이이는 평생 여성들 도움을 받고 산 사람이다. 어머니, 형수, 그리고 두 딸들까지. 수배돼 도망 다닐 때도 그 집 여성분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숨어 지낼 수 없었다. 그 세월이 기니 우리가 모르는 도움의 손길도 많았다. 나중에 소문으로 들으니 우리 때문에 곤욕을 치른 분들도 계시더라. 죄송할 뿐이다.”

-둘이 동시에 감옥에 간 시기도 있었다.

조: “처음엔 남편이 재판받는 법정에서 소란을 피웠다고 48시간 유치장에 갇혔다. 6~7년 뒤엔 아예 구속돼 넉 달인가 집을 비웠다. 큰애가 6학년이었는데, 우리가 구속돼 있을 때 수학경시대회에서 1등을 했다고 하더라. 나중에 들으니 엄마 아빠가 힘든데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공부를 잘하는 것밖에 없었다고 하더라. 지금도 마음 아픈 기억이다.”

-딸들은 어떤 일을 하나?

조: “둘 다 박사 후 과정이다. 큰애는 과학사회학, 작은애는 국제정치. 장 선생이 우리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 자립심이다(웃음). 어디다 내놔도 제 밥벌이는 할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영역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 허리띠 졸라매고 대학원까지 공부시켰다.”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교사 생활을 했더라.

조: “수배당해 도망 다니는 남자 뒷바라지 하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5·18광주민주항쟁 터지고 남편과 함께 도피할 상황이 되면서는 학교도 그만둬야 했다. 이후로는 아이들 교습소, 논술 교사, 온갖 문화센터를 전전하며 가르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받았다면 좀 더 여유 있게 살지 않았을까.

조: “신청 서류를 써 내라는데 구차하더라. 솔직히 쪽팔렸다. 나는 외국 정상들이 무명 용사들 묘에 헌화하는 걸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다. 누구나 자기 영역에서 치열하게 고생하며 산다. 무슨 특별법, 이런 걸 자꾸 만드는데 그들은 자존심도 없는 건가.”

-그래도 미련이 남을 것 같다.

조: “처음 보상금을 준다고 한 게 1995년 김영삼 정부 땐데, 젊어서 그랬나, 그때는 이렇게 힘들게 살 줄 몰랐다, 하하!”

장: “받아도 되는 돈을 안 받은 게 아니다. 받으면 안 되는 돈이라 안 받은 거지. 농사 짓는 사람,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 그런데 민주화운동 했다고 보상을? 얼마 전 헌법재판소가 5·18 보상법에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게 한 건 위헌이란 판결을 내렸더라. 정신적 피해 위자료도 청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파렴치한 짓이다.”

사진기자가 “두 분이 살짝 손을 잡아주시면 어떨까요?” 하자, 아내가 “우리 그런 사이 아닌데요” 해서 웃음이 터졌다. 이들 부부는 25평 아파트에서 한 달 수입 95만원과 얼마간의 연금으로 산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 세상이 다 나를 칭송하더라도 당신이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칭송은 내게 헛된 것이며, 세상 사람이 다 당신에게 위로의 말을 할지라도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의 말 한마디에 어떻게 비길 수 있겠소?

-이 명문이 적힌 <우리, 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날 때>가 1988년 출판됐다. 책이 나왔을 때 저자인 장기표는 감옥에 있었다는데, 지금도 이 마음, 변함 없으신가.


장: “물론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 장기표가 훌륭하다 해도 집사람이 ‘당신은 형편없어’ 하면 완전히 황이지, 하하!”

조: “그 당시엔 좋았는데 지금은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들린다(웃음).”

-수배 중으로 쫓겨 다니던 남자가 왜 좋으셨나?

조: “도망 다니는 형편인데도 그 집 어르신들 챙기는 마음 씀씀이가 따뜻하더라. 빨래, 설거지 등 숨어 있는 그 집 살림살이를 도맡아했다. 그때 내가 프랑스 68운동, 시몬느 베이유, 창비 책들을 한창 읽을 때라 되지도 않는 정의감이 있었고(웃음).”

-왕십리 중앙시장 다방에서 커피 한 잔 놓고 결혼했다는 게 사실인가.

장: “둘 다 커피를 좋아해서. 그날 날씨가 참 좋았다.”

조: “측은지심이었던 것 같다. 도망 다니는 처지이니 사랑도, 돈 버는 여자도 필요하지 않았을까(웃음).”

- ‘우리, 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날 때’가 당시 운동권 남녀들의 연애 교본이었다고 하더라.

장: “교도소에서 이불 덮어쓰고 쓴 책이다. 도망 다닐 때 날 숨겨준 집의 따님이 결혼을 한다는데 선물할 게 딱히 없어서 사랑학을 써봤다. 사랑의 자기 구원성을 강조하고 싶었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도 사랑받는 기술이 아니라 사랑하는 기술이다. 예수가 설파한 사랑의 본질도 그것이다.”

-종교가 기독교인가?

조: “신자는 아니지만, 이이가 감옥에 있을 때 둘이서 매일 한 장씩 신약성경을 읽어나갔다. 밤 10시로 시간을 정해놓고 남편은 교도소에서, 나는 바깥에서. 성경 구절도 좋지만 장 선생의 해석이 참 좋았다. 그런 건 인정한다(웃음).”

-어떤 구절을 가장 좋아하나?

조: “하늘을 나는 새들도, 들에 백합도 다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시는데 너희들한테 안 주겠느냐 하는 말씀. 너무 힘이 되고 고맙더라. 요즘은 범사에 감사하란 말씀으로 산다.”


-가장 힘들 때는 언제였나.

조: “구속됐을 때,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이 양반 선거 출마했을 때. 그럴 땐 도서관에 가서 온갖 수기를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다. 나보다 더 힘들게 산 사람들이 쓴 책을 엉덩이에 땀띠가 나도록 읽으면서 힘을 얻었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책을 전혀 이해도 못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적도 있다(웃음).”

-득도의 경지에 올랐을 것 같다.

조: “장 선생이 사상가네, 경세가네 해서 책을 많이 냈는데 언제부턴가는 내가 더 책을 많이 읽으니 요즘은 (남편이) 아래로 보인다(웃음).”

장: “나 같은 사람 만나서 당신이 책도 많이 읽고 생각도 많이 하며 살게 된 거지.”

조: “봐라. 모든 게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다, 하하!”

1972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재판정에 선 장기표(왼쪽 둘째)와 조영래(맨 오른쪽).

# 장기표씨가 어떤 사람이냐고 누가 내게 물을 때면 나는 한마디로 “그는 순수한 사람이다”라고 대답한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어부의 노래를 그는 알지 못한다. 세상이 다 취해도 홀로 깨어 있으려고 하는 그 지나친 순수함이 그의 병이요, 그의 죄이다.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장기표는 무슨 죄가 그리 많은가’란 제목으로 조영래가 쓴 칼럼이 지금도 회자된다.

장: “난 어릴 때부터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사람이다. 대학 들어와 1학기를 마쳤는데, 여기 다녀서는 세상을 못 바꾸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김용기 장로의 가나안농군학교에 갈까도 생각했는데 근검절약만 강조하니 이 또한 세상을 바꾸는 길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학번 위인 조영래가 찾아왔다. ‘장형, 학교 그만두지 말고 나와 함께 세상을 바꿔봅시다’ 하더라. 내가 사는 법률연구원(고시원)과 조영래 집을 오가며 함께 공부하고 함께 민주화 투쟁을 했다.”

-왜 어릴 때부터 세상을 바꾸고 싶었나?

장: “지독한 가난에 대한 분노. 장리쌀을 아나? 춘궁기에 쌀 한 가마 빌리면 추수기에 한 가마 반을 갚는 것인데, 그걸 못 갚아 우리 집을 비롯한 빈농들은 가난에 몸부림쳤다.”

-운동권인데 군대, 아니 월남전까지 다녀왔더라.

장: “어릴 때부터 군대 기피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전쟁 직후라 더 그랬다.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했다. 67년에 베트남 파병 부대로 입대했다. 차출이 왔는데 3000원을 주면 안 갈 수 있었다. 그것도 싫었다. 요즘 말로 내로남불 아닌가. 죽고 사는 건 하늘에 달렸고 나로서는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위험한 상황도 많았을 것 같다.

장: “구정 대공세 때 한국군이 많이 죽었다. 고엽제도 엄청나게 쏴서 밀림이 단풍이 들 정도였다. 그땐 그게 병이 된다는 걸 몰라 정글화 신고 물 웅덩이에 들어가 첨벙거렸다. 더우니까.”

조: “난 저이가 고엽제 환자인 줄도 모르고 결혼한 거다(웃음).”

장: “살이 떨어져 나가는 사람, 심장이 망가진 사람도 있는데 난 운이 좋아 가려움증으로만 앓았다. 개뼈다귀를 구해서 긁고 또 긁었다. 고엽제를 앓으면서 피부병 연구도 많이 했다. 독성을 땀을 통해 뽑아내야겠다 결심하고 교도소에 있을 때도 매일 땀을 흘리며 살았다.”

-조영래가 쓴 대로, 가난한 농꾼의 아들이 서울법대까지 들어왔으면 육법전서 한 가지만을 의지해서 판검사로 출세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 것 아닌가. ‘터무니없는 자존심, 타협을 모르는 지나친 강직함이 장기표의 죄’라고도 썼더라.

장: “날 보고 이상주의자라고 하는데, 난 지독한 현실주의자다. 길을 가는데 술 취한 사람이 쓰러져 있다. 그 사람을 지나치지 않고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상주의자인가? 아니다. 그야말로 현실주의자다.”

민국당을 창당했던 장기표가 2000년 3월 김영삼 전 대통령을 방문한 모습.

-그럼 제도권 정치로 들어갔어야 하지 않나.

장: “제도권에선 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들은 내 사상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정연두 서울시립대 교수는 장기표는 투사이기 전에 사상가라고 했다. “실패한 사회주의에 대한 대안을 누구보다 열심히 모색해온 장기표는 민주시장주의에 기반한 복지국가 건설을 꿈꾼다”고 썼다. 장기표 사상의 핵심은 노동이 ‘부가가치 생산을 위한 경제활동’이 아니라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시장이 이윤 추구의 장이 아니라 자아실현의 장이 된다는 것이다.

-장기표의 이상대로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장: “그렇게 안 하면 망한다. 이 방법이 아니고는 대량 실업, 소득 양극화, 팬데믹, 인간성 상실을 막을 수 없다.”

-사상가로서 이를 구현해줄 현실 정치인을 찾는 게 낫지 않을까.


장: “마르크스는 사회적 존재가 그 사람의 의식을 결정한다고 했다. 자본가 계급은 자본가의 생각을, 노동자 계급은 노동자의 생각을 갖게 된다는 건데, 난 동의하지 않는다. 돈 많은 사람 중에도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고, 노동자 중에도 악한 사람이 있다. 그래서 난 ‘생활이 의식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통찰력은 머리가 좋거나 책을 읽어서 얻는 게 아니다. 자기 생활이 바라야 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세상을 바꾸려는 강렬한 의지가 있어야 올바른 전략이 나온다. 그것이 내가 현실 정치를 하려는 이유다.”

-정치인이 아니라 성직자를 했으면 어땠을까.

장: “도망 다닐 때 태종사란 절에서 법명도 받고 사미계도 받았다. 천수경도 외워 독송한다. 규율 하나는 잘 지키는 사람이라 목사나 신부가 됐어도 잘했을 거다. 하지만 정치를 통하지 않고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조: “이런 비유가 맞는지 모르지만, 촌에서 자라서 그런지 이이는 상당히 용감하다. 가슴에 책보 둘러매고 앞만 보고 질주하는 딱 그런 스타일. 자기가 내린 결론에 조금도 의문을 갖지 않고 회의하지 않는다(웃음).”

# 사랑이 넘칠 때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진보적인 것이다.

-장기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장: “전태일. 제대로 배운 적 없는데도 지식과 지혜가 풍부한 청년이었다.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기 한 몸을 버려야겠다고 결단한 것이다. 사랑이 넘칠 때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진보적인 것임을 일깨워준 사람이다.”

-박근혜에게 최순실 1명이 있다면 문재인에겐 최순실이 10명 이상 있다고 비판했다. 민주노총엔 전태일이 없다고도 했다.

장: “마르크스주의는 1980년 가을부터 범람했다. 주체사상은 85년부터다. 나는 운동을 1960년대 중반부터 한 사람이라 그런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는다. 신출내기 운동권들이 마르크스와 레닌을 따르고 북한을 숭배한다. 학생들이 주장하면 우~ 따라가고, 노동자들이 주장하면 또 우~ 따라간다. 민주노총만 해도 87년 6·29항복을 받아낸 뒤 해방공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오히려 한국노총이 혹독한 독재 시절 탄압받아가며 노동조합을 만든 사람들이다.”

-장기표가 극우화된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장: “나는 태극기 집회에는 가지 않는다. 촛불 시위에는 매번 나갔다. 국민을 이기는 정권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중형을 받을 만큼 죄를 지었나.

장: “그렇지 않다. 구속해서도 안 되는 거였다. 사면해야 한다. 문 대통령이 생각이 있는 사람인가 싶다.”

-현 정권을 비판하면 함께 민주화 투쟁했던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나.

장: “민주화운동을 타락시킨 건 이 정권이다. 목숨 걸고 싸운 민주화운동에 대한 자부심을 땅에 떨어뜨렸다.”


-장 선생이 준 선물 중 가장 기억나는 것이 있는지.

조: “옥살이 끝난 뒤 이이가 처음 간 외국이 중국인데, 옥으로 된 분홍색 목걸이를 사왔더라. 그게 우리 결혼 생활에서 전무후무한 선물이다.”

-남편에게 준 선물은?

조: “옥바라지 하나는 정말 미친 듯이 했지. 5·3 인천 사태로 구속됐을 땐 매일매일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래야 교도소에서도 이 사람을 무시하지 않을 것 같아서. 아빠 얼굴 잊을까 봐 아이들도 자주 데리고 다녔더니 하루는 큰애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이러는 거다. ‘엄마, 글쎄 내 짝은 서울구치소를 몰라’, 하하!”

-다시 태어나도 장기표와 결혼하시나?

조: “아유~ 안 한다. 누구와도 안 하고 혼자 살 거다. 자유롭게!”

아내가 보낸 엽서의 여백에 깨알 글씨로 빼곡히 답장한 편지를 책으로 묶은 것이 ‘장기표 옥중서한-새벽노래’다. ‘김대중 옥중서신'에 못지않은 진보 진영의 명저로 꼽힌다. 인터뷰 다음 날 장기표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내의 말은 살면서 처음 듣는 게 대부분이었다. 어젯밤 모처럼 둘이서 맥주 한잔 했다. 덕분이다.”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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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창피함을 아는 사람… 고향 위해 일한 게 없는데 이 나이에 票를 달라고 하면…
오랜 민주화운동으로 고생한 고향 사람 장기표를 돕자는 이들의 성원에 따뜻한 情 느껴”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20.04.27 03:15
지난 주말 저녁, 경남 김해에서 막 올라온 ‘영원한 재야’ 장기표(75)씨와 술잔을 나눴다.

그는 또 떨어졌다. 총선 전적만 7전 7패가 됐다. 그전까지 군소 정당이나 신생 정당, 혹은 자신이 만든 정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거대 정당 후보로 나와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미래통합당 공천 작업의 막바지에 김해을(乙) 공천을 받았더군요. 그 도시와 무슨 연고가 있습니까?

"내 고향이죠. 하지만 지금껏 한 번도 고향 출마는 생각해본 적 없었어요. 그전까지 선거에서 떨어져도 다 서울에서 떨어졌지요."

―다들 연고(緣故)를 찾아가는데, 왜 고향 출마를 피했습니까?

"한창나이에는 지역주의를 깨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고…, 저도 창피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동안 고향을 위해 일한 게 없는데 이 나이에 고향으로 가서 표 달라고 돌아다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 않습니까."

41년간 미뤄온 신혼여행

―그렇게 느끼면서 왜 김해에 공천 신청을 했습니까?

"저는 미래통합당에 공천 신청을 하지도 않았어요. 제가 나서서 그렇게 하기에는 염치없는 짓이니까요. 공천 작업 막바지인 3월 중순쯤 김형오 공관위원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험지인 김해에 출마해달라'고 했어요. 제가 '쓸데없는 소릴 하신다'며 한마디 하고 끊었어요."

―공천 준다는데 왜 그런 단호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출마할 수 있으면 저 같은 사람은 서울에서 해야지요. 처음으로 털어놓는데, '장기표가 이 나이 되도록 국회의원 한 번 못 했으니 비례대표나 당선될 만한 서울 지역구를 누군가가 알아서 챙겨주겠지' 하는 속마음이 있었지요."

장기표씨는 “과거에는 보수가 기득권, 지금은 민주당이 더 형편없는 기득권 세력”이라고 말했다.
―보수정당에서 선생 같은 분이 좌파운동권 세력의 공세를 막아줄 역할을 할 수 있지요. 미래통합당이 왜 이런 전략적 판단을 못 했는지 안타깝군요.

"정치판은 그렇지 않아요. 아무도 신경 안 씁니다. 나를 당내 경쟁자로 봤을 수 있고, 어쩌면 내게 어디에 출마하라고 말을 하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김해을은 어떻게 수락했습니까?

"김형오 위원장이 전화한 지 두 시간쯤 지나 다시 전화해 '김해 험지에서 싸워줄 적당한 인물이 없다'며 설득했어요. 이번에는 예의상 매정하게 끊지 못하고 '생각은 해보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공관위원인 P의원이 저를 설득했어요. 그리고 얼마 안 돼 '공천 명단을 곧 발표하니 승낙해달라'고 했어요. 이렇게 갈 수밖에 없구나 싶어 받아들였어요."

―당초 선생은 사회단체 대표 자격으로 '국민통합신당 창당준비위'에 참여했다가, 공천관리위원회 구성 문제로 갈등을 빚었지요?

"자유한국당에서 이미 꾸려놓은 '김형오 공천관리위'를 통합신당에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김형오는 자기 당에 대해 '존재 자체가 민폐'라고 말하던 김세연 의원을 넣는 등 독단적으로 공관위를 구성했어요. 제가 '김형오에게 모든 권한을 줘 공천 잘못으로 참패하면 그때 가서 한탄한들 뭐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결국 제 말이 맞았잖아요."

―김형오 위원장은 소신을 갖고 했다고 하지만, 납득 안 되는 공천이 꽤 있었어요. 총선 패배에 공천 실패도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결국 김형오가 중간에 사퇴했는데, 자기 사람들을 심고 '먹튀'한 모습과 비슷하잖아요. 위성 비례정당인 미래한국당 대표와 공관위원장도 중간에 그만뒀고, 이미 정해놓은 공천 후보까지 바꾸고…, 선거일이 가까이 오는데도 선거대책위도 제때 출범 못 시켰잖아요. 지구당에 당 공약집도 안 내려왔습니다. 선거 앞두고 이렇게 하는 정당이 과연 공당(公黨)입니까."

―그런 경위야 어떠했든 선생은 당 공천심사를 안 거치고 공천받은 특별 케이스인데?

"김해에 내려와 있으니, 당 사무국에서 '공천 심사 서류는 갖춰야 한다'고 했어요. 공천 서류는 분량이 많고 기입할 게 많아요. 내 사무실 직원이 대략 적어낸 것 같습니다. 공천이 너무 촉박하게 준비 없이 이뤄져 선관위에 마감 날까지 후보 등록을 못 맞출 뻔했어요. 후보 등록 서류에는 범죄 이력 증명서도 첨부해야 하는데, 경찰서에서 이런 서류를 발급받으려면 이틀이 걸립니다. 날짜에 쫓겼어요. 알다시피 제가 시국 전과가 많잖아요."

그는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서울대 법대학생장(葬) 추진(1970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1971년), 민청학련 사건(1974년), 청계피복노조 사건(1977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1980년), 5·3 인천 사태(1986년), 중부지역당 사건(1993년) 등 1970년부터 1990년 초반까지 주요 시국 사건에 관계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기간 다섯 번 수감돼 총 9년 이상을 살았고 더 많은 세월은 수배자로 보냈다.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1976년 서울 왕십리 중앙시장에 있는 다방에서 차(茶) 두 잔을 놓고 결혼했던 사람이다. 그가 쓴 책에는 '부부가 잘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다. 오래도록 행복했던 시간으로 간직할 수 있을 만한 오붓한 추억거리를 만들어둬야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면서 결혼 41년 만에 처음 부부 동반으로 강원도에 2박 3일 여행 간 얘기를 적었다. 이를 '41년간 미뤄온 신혼여행'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렇게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다.


―또 선거에 출마한다니까 부인의 반응은요?

"다 늙어 또 한다니 엄청나게 반대하지요."

―이번에는 거대 정당의 공천을 받았으니 당선 확률이 높다고 설득하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출마할 때마다 설득해봤지만 효력이 없어진 지 오래됐습니다. 설득하겠다는 걸 단념했어요. 혼자 김해로 내려왔습니다."

―부인께서 선거운동을 안 도왔습니까?

"정식 선거운동 기간에는 내려왔어요. 나이 들어 이렇게 한다는 게 다 창피하지요. 제 스스로도 민망한데, 박지원씨 같은 경우에는 국회의원을 계속 해왔으니까 좀 덜 하겠지만."

본 투표에서 106표 졌는데

―역시 생물학적 나이라는 게 핸디캡이 되지요?

"내 선거운동을 도와줄 운동원들이 처음에는 '우리 후보님 나이가 너무 많아 걱정'이라고들 했어요. 하지만 며칠 같이 현장에 다니고 나서는 그런 말은 쑥 들어갔어요."

―김해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이고 여당 텃밭인데, 내려가니 주민들이 선생을 알아보던가요?

"여당 후보가 이전 선거에서 득표율 60%대 이상으로 이겼던 지역구입니다. 소위 '노무현 타운'입니다. 행정 조직 말단까지 여당이 다 장악하고 있어요. 작년에 최 선생의 인터뷰로 지식인들에게는 내가 많이 알려졌지만, 김해에 내려오니 특히 젊은 사람들은 나를 몰라요. 나에 대해 좀 아는 주민들은 '장 선생님 같은 분이 왜 기호 2번으로 나왔나?'라고 물어요."

장기표씨 선거 유세 사진
―선생이 주사파 운동권과 민노총·전교조 등에 맞서 싸워온 사실을 잘 몰라서 그랬겠군요. 어떻게 답변했습니까? 

“이런 질문에 솔직하게 ‘내 정치적 뜻을 이루려면 국회의원이 돼야 하는데 그동안 독자적으로 아무리 주장해도 사람과 돈이 안 붙었다. 그래서 양당 중 하나를 선택했다. 과거에는 보수가 기득권인데, 지금은 민주당이 더 형편없는 기득권 세력이고, 나라를 망치는 주사파 운동권에 의해 장악돼 있다’고 했어요.” 

―거대 정당의 후보로서 선거운동을 해보니 과거와는 확실히 다르지요? 

“그전까지는 총선에 출마해도 국가 정책을 공약했지, 지역 발전 공약이라는 걸 해본 적 없었어요. 선거가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에 내려와 선거공보물을 만들기도 빠듯했어요. 실제로 김해의 지리(地理)도 잘 몰라요. 코로나 사태로 장사가 안 되는 상가를 돌며 후보입네 인사를 하는 게 미안했어요. 문재인 정권의 실정(失政)을 전혀 부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정권 중간에 치르는 선거는 정권 심판 성격인데, 코로나 사태로 전혀 다른 차원의 선거가 됐지요?

 “코로나 대응이 세계적으로 평가받자 오히려 문재인 정부의 큰 성과가 됐어요. 서민들은 경제적으로 절박한데, 통합당은 재난 지원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비쳤어요. 그런 점이 투표에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젊은 직장인이나 지식인들은 정부 여당이 싫어도, 수구 꼴통 꼰대의 이미지가 있는 통합당은 차마 찍지 못했을 겁니다.” 

―결국 1만1000표 이상 차이로 떨어졌는데?

 “본 투표 개표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4만481표 대 4만375표였어요. 106표(0.13%) 졌어요. 그런데 사전투표 개표에서 여당 표가 막 쏟아졌어요. 3만1153표 대 1만9628표로 무려 22.7% 차이나 났어요.” 

―어떻게 그런일이…. 이게 선거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한낱 특이 현상인지, 일각에서 제기하는 사전투표 조작 의혹과 관련된 것인지 밝혀져야 할 필요가 있겠군요. 어쨌든 이번 선거에서 무슨 기억이 가장 남습니까? 

“나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으로 고생한 고향 사람 장기표를 돕자’며 열렬하게 성원해줬습니다. 그런 따뜻한 정을 느끼면서 내가 김해 출마를 참 잘했구나 싶었어요. 일면식도 없는 타지 분이 내려와 ‘장기표 선생이 꼭 당선돼야 한다’며 열정적으로 도와줬고요. 선거 전날에는 제 둘째 딸이 지원 유세를 했습니다. 아버지로서 해준 게 없었는데 듣고 있으니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제 아버지 장기표는…” 

유튜브에서 딸의 지원 유세 영상을 찾아봤다.

 ‘제 아버지 장기표는 일생 동안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감옥 생활·도망 생활·고문을 당하고도 10억원가량 민주화보상금을 받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런 보상금은 일반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고 민주화운동의 진정성을 해친다고 했습니다. 너무 이기적인 정치인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의 신념과 원칙이 낯설지 모릅니다. 제 아버지 장기표는 무분별한 공공기관이 세금을 축낸다고 공공기관 이사장 자리를 거절했습니다….’ 

술잔을 놓으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출마할 일이 안 올 수 있겠지만, 정치로써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내 꿈을 포기하진 않았어요. 꿈이 이뤄질 때까지 나는 늙지도 죽지도 않아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