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0

동학 어떻게 읽고 할 것인가 - 나는 누구인가 임자의 철학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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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어떻게 읽고 할 것인가 - 나는 누구인가 임자의 철학

강주영

2021. 7. 16.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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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집강소강의록



- 동학 어떻게 읽고 할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 임자의 철학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만민편등을 바란 동록개의 꿈이 있는 원평집강소, 지척에 10대의 전녹두와 전창혁 선생이 살던 황새마을이 있고 김필상 그러니까 김덕명 선생이 사시던 원평에서 여러분과 대화를 하게 되니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10대 후반 전녹두는 이곳 황새마을에서 봉남으로 글을 배우러 다녔다고 합니다. 어느 날 스승에게 글을 그만 배우겠다고 했답니다. 그때 스승이 너는 내 이름도 마을 이름도 잊으라고 했답니다.

난세에 한쪽에서는 동학사상이 자라고 다른 쪽에서는 동학과 무관하게 혁명조직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두 조직이 서로 다른 경로로 자라고 만나서 1894년의 동학혁명이 났다고 봅니다.

지금 시대의 고통은 1,800년대보다도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습니다. 분단, 지구대분할, 기후위기, 코로나 괴질, 디지털 빅브라더, 지역 소멸 방식의 지구자본화, 나라와 나라•사람과 사람의 극심한 빈부 격차, 자본주의형 사람만을 기르는 교육 등은 과연 우리가 지구공동체의 주민인가 의심에 의심이 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철학 또는 사상 동학을 하는 까닭입니다. 철학 또는 사상은 무엇을 정의正意하는 게 아니라 고통과 폭력을 없애는 일입니다.

오늘 동학에 관한 말은 신앙으로서의 동학이 아닌 사상으로서 동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동학의 말씀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 중요한 말은 한자를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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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학東學은 어떤 사상인가

여러분 동학하면 무슨 말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까? 동학은 사람이 사람답게, 자기통치(줄여서 자치, 지방자치의 자치가 아님)의 주인으로서 자기를 살리며 삶을 살아내는 생성生成(기르는)을 하며, 사람답지 못하게 하는 것을 물리치자는 사상입니다. 사람답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사람은 살리다 살다에서 온 말입니다.

동학은 나를 살림으로서 세상을 살리자는 사상입니다. 동학은 나를 나답게, 사람을 사람답게, 세상을 세상답게, 지구를 지구답게 하자는 사상입니다.

2. 심학心學과 몸학

해월의 길과 전녹두의 길 이 두 경로가 동경대전 읽기, 동학하기의 바탕이라 생각합니다.

비유하면 해월은 성자요, 전녹두는 혁명가입니다. 해월의 길과 전녹두의 길은 다르지 않습니다. 두 분다 혁명 품은 개벽꾼입니다.

굳이 말하라면 해월은 심학이요. 전녹두는 몸학입니다. 인도의 간디와 네루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둘은 서로가 다르지만 서로를 필요로 하며 보완하는 동이상보同異相輔요. 서로 가르치며 서로 크는 교학상장敎學相長하는 사이입니다.

심학心學은 마음공부, 마음 수련을 말합니다. 몸학은 생성生成과 행동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둘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흔히들 믾은 분들이 동학은 기氣

주체 심학이라고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현대 최신 양자역학과 생물학에 의하면 마음과 몸은 따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몸은 마음의 거처요, 마음은 몸의 생령生靈이요, 몸의 기운입니다. 마음이 거처를 잃고 떠돌면 떠도는 유령이나 도깨비불이 됩니다. 마음은 곧 기이도 한데 마음 또는 기운이 거처를 잃으면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 부릅니다.

3. 생성生成과 조화정造化定

동학에는 조화정과 불연기연不然其然이 있습니다. 저는 불연기연을 뭣뭣다움너머(불연, 원평다움너머, 사람다움너머), 뭣뭣다움(기연, 원평다움, 사람다움)이라고 풉니다. 여기서는 기연이요, 저기서는 불연입니다. 생성은 기연과 불연이 갈아드는 과정입니다.

동학사상가 이돈화는 불연기연을 '반대일치의 논리'라고 하였고 김지하는 '아니다', '그렇다'의 '혼돈'과 '질서' 카오스모스 Chaosmos라고 하였습니다. 코스모스는 cosmos 질서가 가득한 우주입니다. 카오스모스와 코스모스는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질서와 혼돈의 평형 상태가 사물 또는 생명이고 이 평형이 깨지면 사물 또는 생명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합니다. 이 차원이동을 사람들은 진화進化•진보進步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원숭이는 원숭이대로 귀하고, 사람은 사람대로 귀하기에 진화진보는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닙니다.

차원 이동은 이쪽에서는 죽음과 파괴요(불연), 저쪽에서는 생성과 자람입니다.(기연) 동학의 말로는 이천식천以天食天 양천養天, 체천體天입니다.

4. 생성과 창발創發 - 엔트로피entropy와 진보

물리학 복잡계이론은 차원이동을 '창발'이라고 합니다. 창발은 창조와 달리 과거로부터 온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창발적 진화'創發的進化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로 환원될 수 없으며, 생명은 단백질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생명은 단백질에서 온 것은 맞지만 생명과 단백질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단백질 50조 개(우리 몸 세포 수)의 합이 아닙니다. 어떤 것은 부분들의 단순 합이 아닙니다.

거처 잃은 마음, 기운을 서양말로 하면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 (무질서도)라고 합니다. 동학은 이것을 혼원지기(渾元之氣)라고 합니다. 혼원지기 또는 엔트로피는 같은 계, 고립계에서는 무질서도이지만 열린계(지구와 태양)에서는 쓸모 있는 기운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나무도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주 전체를 하나의 고립계로 보면 엔트로피, 혼원지기는 증가하기 때문에 멸망은 필연의 일이 됩니다.

엔트로피법칙은 진화•진보의 끝은 멸망이기에 진화•진보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진보'라는 관념이 지구와 사람을 망치는 폭력입니다. 진보의 다른 이름은 우승열패 약육강식입니다.

5. 기氣, 이치理致, 접신강령接神降靈

기란 우리 말로 하면 숨, 기운 서양 말로 하면 에너지입니다. 동학에서는 혼원지기, 기 이렇게들 말합니다. 이 기가 움직이는 것을 '이치'라고 합니다. 동학에서는 그 이치를 무위이화無爲而化의 도道라고 합니다. 기가 무위이화의 이치로 움직이는 것을 '기화'氣化 또는 "기화지신' 氣化之神이라고 합니다. 이 기화가 어느 날 문득 우리가 통찰이라고 부르고, 절집에서는 '한소식 들었다'고 하는 깨달음을 얻을 때 '접신강령'했다고 합니다. 접신강령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잡신강령雜神降靈인 것도 많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아닌 개독교, 동학이 아닌 개동학도 있습니다. 돈벌이 종교가 얼마나 많습니까?

잡신강령의 대표적인 경우가 민주당 대선주자 9명의 출마선언문입니다. 농사의 농, 기후위기의 기, 생태의 생자 한 마디도 없습니다. 제대로 접신강령한 대표적인 경우는 나락 크는 소리를 듣는다는 여름지기(농사꾼의 우리말)입니다. 아이를 기르는 부모의 마음, 사람과 만물을 기르는 생명의 천지부모 지구마음이야말로 접신강령일 것입니다.

6. 산알, 복승(複勝), 주파수

북한의 김봉한이라는 분이 1960년대에 동의학에서 말하는 경락, 즉 기의 실체를 과학적 실험과 관찰로 증명했습니다. 말하자면 생명의 원조는 단백질이 아니라 '기'라는 것입니다. 세포를 생성하고 조절하는 기를 김봉한은 '산알'이라 이름했습니다. 산알이 다니는 길이 경락이요, 침자리입니다.

​이 기운의 입자와 파동이 곧 마음입니다. 우리가 빛을 입자와 파동이라고 하잖아요. 엄마의 마음이 아기에게 가면 아기가 방긋 웃습니다. 사랑하는 연인끼리는 보기만해도 엔돌핀이 납니다. 라디오 주파수가 있습니다. 아기와 엄마, 연인들끼리는 서로 주파수가 맞습니다.

그것을 때맞춤(동기화同期化)이라고 부릅니다. 하늘주파수와 나의 주파수를 맞추는 것, 동기화하는 것, 동귀일체同歸一體하는 것이 곧 심학이요. 몸학입니다. 이 주파수를 맞추는 것, 산알이 움직이는 것은 생성입니다. 생성은 '복승'(複勝)의 길을 가야합니다. 그것은 숨어있는 차원에서 문득 솟아오르는 근원적 우주 생명의 솟음입니다. 김봉한(金鳳漢)의 '산알'입니다. 이것이 동학 주문의 조화정입니다. 당신이 저를 사랑하면 저와 주파수가 맞아서 당신 마음의 입자는 제 가슴에 꽂히고, 파동은 제 심장을 뒤흔들 것입니다.


7. 동東은 무엇인가?


여기서 동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없습니다. 동은 해동성국할 때의 동이지 서양의 서에 대칭•대립되는 말로 좁혀 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 땅에서 나고 받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도道인즉 천도天道이나 학學인즉 동학東學"이라는 말은 지구와 우주 곳곳에 천도는 있으나 조선에서 천도를 모시는 방법 혹은 체계를 말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우분투ubuntu가 있습니다. "네가 있으니 내가 있다."는 뜻의 우분투가 남아공의 동학입니다.

세계를 동과 서로 나눌 까닭은 없습니다. 동양, 서양은 없고 지구와 우주만 있습니다. 동학은 서학에 대립하여 생긴 것만은 아닙니디. 그렇다면 지구적 보편성이 없습니다. 그것도 1860년대라는 특수한 시대적 여건의 특수성에 갇히게 됩니다.

천도란 지구학이자 우주학이며 나의 마음학이요 몸학입니다. 지구란 것도 결국은 내가 담는 것입니다.

8.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동학에 말 중에 보국안민이 있습니다. 흔히 듣는 말입니다. 흔히 듣기에 별다른 생각이 없이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보국안민에서 국을 지구나 우주로 바꾸면 혹은 나로 바꾸면 어떤가요. 세상은 "공유된 불안'에 갇혀 있습니다. 억압, 폭력, 불평등이 넘칩니다. 굶주려 죽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이들은 우주여행을 합니다. 세상은 온통 폭력이 가득합니다.

폭력을 없애고 사람과 지구를 평화롭게 행복하게 하자는 것이 동학입니다. 그런 뜻에서 '동'은 밝을 동으로 읽어도 되겠습니다.

폭력으로부터 바로잡자는 학이 동학입니다. 보국안민의 보는 지킬 보保가 아니라 바로잡을 보輔입니다. 나 너머 나라와 지구까지 바로잡을 계책은 어디서 나올 것인가?


9. 무위이화無爲而化의 도道 - 생명의 자기 발현

보국안민에서 민은 사람을 말합니다. 민은 인과 달리 지배받는 사람 또는 일하는 사람입니다. 자연과 만물은 서로가 자기본질을 발현하며 산다는 뜻에서 자연自然한 존재들입니다. 자연하다는 말은 어떤 조작이나 변형없이, 지배하지도 지배받지도 않는 삶입니다. "자연한 가운데 화해 난다"는 동학의 말은 다윈의 말처럼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경쟁과 다툼의 세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꿀벌이 수분작용을 도와 꽃이 핍니다. 자연의 생존체는 단지 생존의 필요로만 먹이 사슬을 구성합니다. 자연은 먹이사슬 전체로 보면 상호부조 협동과 환대의 세계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위이화의 삶이며, 자연한 삶입니다. 함이 없다는 것은 이치를 좇아 이치에 더하는 조작의 함이 없음이요, 함이 있다는 것은 이치를 좇는 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연한 이치가 사람뿐 아니라 모든 만물에 있고(시자侍者는 내유신령內有神靈) 그 만물은 서로 상호부조로 엮여져 있으며(외유기화外有氣化) 이 협동의 망에서 떨어져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각지불이各知不移)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10. 사람은 최고령자最高靈者

- 동학은 사람을 바로잡는 학

​생존이 아닌 탐욕과 쾌락의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고통받게 나아가 지구까지 아프게 하는 것은 만물 중에 오직 사람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제일 신령스럽다는 수운의 말은 사람만이 위대하거나 고귀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도리어 제일 신령스럽기에 제일 위험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만물이 신령하되 사람만이 유독 만물을 괴롭힐 수 있는 존재라는 경계의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은 잘 쓰면 사람과 지구를 살리나 잘못쓰면 사람과 지구를 죽이는 독입니다.

보국안민을 보민안민으로 바꿔 읽으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사람을 바로잡아서 모든 인류와 지구까지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시인이 있습니다만 지금까지는 "사람만이 고통의 근원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큰 마음 먹고 바로잡으려 생각했는데 곧 좌절에 빠집니다. 핵, 기후위기, 전쟁, 폭력, 빈부격차, 온갖 불평등과 차별, 코로나 대유행...

바로잡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크고 많은데 나는 너무나 작고 힘이 없습니다. 당장 내 눈 앞의 삶도 버거운데 핵이며, 기후위기, 사회불평등이니 하는 말들은 너무나 거창하고 멉니다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나와 가족들을 먹여살리기도 힘든데 뭘 할 수 있겠어. 맞습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그렇게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라도 내 가족만이라도 잘 먹여 살려야지. 맞습니다. 그것이 모심, 모실 시侍입니다. 내 새끼들을 위해 이 한낮의 뙤약볕 속에서도 일을 합니다. 저녁에 가족과 삼겹살을 함께 먹을 생각을 하면 엔돌핀이 솟습니다. 성경신誠敬信! 내 가족에 정성을 다하며, 내 가족을 공경하며, 내 가족에 거짓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세상은 로빈슨크로소처럼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크로소는 선주민 이름을 유럽식으로 바꿔 부릅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수탈입니다. 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내 가족에게는 성경신誠敬信을 다하면서도 타인에게는 사기, 권력 등 억압을 합니다. 익명의 수용소인 도시에서는 훨씬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살고 내 가족이 살기 위해서라도 이웃과 상호부조하고 서로 모시는 우정과 환대의 마을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80년대 초까지만해도 농사는 두레라는 협동망 없이는 농촌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횃불은 세상을 태워서 바꾸고, 촛불은 영성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영성은 우정과 환대로 모시는 마음입니다. 세상은 크지 않습니다. 세상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만큼의 크기로만 있습니다. 나, 가족, 집, 집강소만하게, 황새마을만하게, 원평만하게, 금구, 김제, 전라북도, 대한민국, 아시아, 유라시아, 지구, 우주...눈을 감고 잠시만 생각해봅니다. 어디까지 보입니까? 보이는 만큼만 사랑하시면 됩니다. 애써 대한민국까지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대통령 바꾸면 기분만 좋지 바뀌는 것은 거기서 거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허구헌날 대통령은 누가 누가 좋아 하는 분들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나를 가족을 마을을 대한민국을 지구를 담는 것도 결국은 나입니다. 내가 지구이고 내 마을이 지구입니다.





생태계니 핵이니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오로지 사람만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바로잡히면 지구도 건강해집니다.





이것이 동학하는 마음입니다.









11. 자치自治•자급自給•자연自然 - 동학의 생성론





기계의 타율성이야말로 인간 자율성과 자기생성을 억압합니다. 즉 트랙터를 운전하는 사람은 자신이 트렉터를 지배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트렉터 주인은 철저하게 기계적 법칙에 자신의 의지를 맞추게 됩니다. 하늘의 주파수가 기계의 주파수로 동기화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동귀일체 방향은 불행히도 천지인의 한살림 연결이 아니라 인공생명=인공지능로봇=AI입니다.





이렇게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됨으로서 기계는 인간을 대리자로 하여 자기증식하게 되고 인간은 더더욱 기계에 종속된 타율적 존재가 됩니다. 기계는 이제 사물연결망 사물인터넷을 통하여 지구적 연결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낙관과 비관이 엇갈립니다. 인류 오만 년의 지식을 단 몇시간에 저장하고 사용할 수 있는 양자컴퓨터에 이르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구글 ,아마존, 알리바바(년간1400조 매출, 한국 2020년 GDP 실질 1,836조 8,811억 원 ) 같은 소수의 과두 지배자를 만들기도 하지만, 지구마을 전체로 영성있는 사람들의 연대망을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 한 명은 5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생활공동체입니다. 이 50조 개의 세포는 그 각각이 신경계, 소화계, 호흡계, 근골격계, 생식계, 면역계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50조 개 인간의 주인인 셈입니다. 이 몸의 원리를 가족, 마을, 나라, 지구로 확장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일부러 살을 빼려고 합니다. 내 몸의 비만은 몸이라는 50조 개의 세포공동체가 만든 잉여의 축적물입니다. 비만이라는 잉여를 내 몸에서는 다이어트라며 돈을 써가면서까지 없애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회의 잉여는 그 잉여를 독차지하기 위해 소수지배의 폭력을 낳습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생존의 기본 바탕도 없어서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이 폭력입니다.





자치•자급•자연은 소농 삶이나 윌든의 오두막 같은 낭만적 말이 아닙니다. 자치는 폭력과 수탈이 없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 자급은 자치할 수 있는 삶의 바탕이 물질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 자연은 지구를 말하기도 하지만 지구와 사람의 삶이 서로 어우러지며, 스스로 그러한 생명의 발현을 자연이라고 합니다.









12. 하늘의 마음 임자의 마음





하늘은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이라며 자기 마음을 수운에게 줍니다. 많은 분들이 하늘마음=사람마음이라는 수평적 관계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저는 하늘이 수운에게 주었던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도대체 하늘은 무엇 때문에 자기 마음을 사람과 만물에 주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개벽 이래 5만 년 동안 뼈빠지게 하늘이 일하였으나 이룬 게 없다고, 노이무공勞而無功하였다고 하늘은 탄식합니다. 하늘이 탄식하는 그 마음은 곧 수운의 마음일 터인데 그 마음은 온갖 억압과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과 만물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일까 합니다.





이제 하늘은 수운에게 말합니다. 수운 너와 더불어 이제 다시 이루려 하니(다시개벽) 기분 좋다고 합니다. 이루지 못해 고통 받는 사람, 버려진 사람들, 이루지 못한 만물에 대한 안타까움의 절절한 무궁하고도 무극한 하늘의 마음 앞에서 고맙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경천敬天입니다.





오심즉여심은 이제 나(하늘)와 더불어 이루자 하는 주체실현, 자기생성, 자기창발의 선언입니다. 폭력과 억압에 시달리는 것은 생명의 자기발현 자기통치가 아닙니다. 오심즉여심은 뭔가 잘못 가고 있는 문명에 대한 통렬한 전복의 선언입니다. 여기서 동학의 놀라운 실천성, 현실성을 봅니다.





무엇을 이룰 것인가? 수운은 아주 뚜렷하게 아주 간단히 말합니다. 동학의 주문에 있는 "조화정"을 이루라고 합니다. 사람과 하늘, 사람과 사람, 사람과 만물의 하늘로의 조화(생성)를 이루라고 합니다. 여기서 조화정은 造化定이지, 잘 어울린다는 조화調和가 아닙니다. 동학의 선배님들은 하늘모심을, 하늘생성을 한 이를 '신인간'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조화정을 무위이화라고 수운은 말합니다. 한자를 글자 그대로 풀면 함이 없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저절로, 그냥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는 함이 없으나 혼원지기(우주생성의 기운)가 하늘의 함으로서 내게 있으며, 성경신誠敬信의 지극한 마음으로 나의 함을 다하면 이루게 된다는 말입니다.





생물학에서 단백질이 생명현상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단백질과 생명현상은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새로 생성된 것은 이전의 어떤 요소로 환원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생성물은 어떤 요소들의 단순합이 아닙니다.





단백질에서 생명으로의 질적인 전환, 생성의 차원 이동은 하늘이 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지극한 모심의 함으로 하늘이 감응하여 하늘의 함이 있어 새롭게 이루니 하늘이 하는 일은 내게는 무위이화입니다. 수운의 무위이화의 주체는 생명과 기운으로 가득찬 영성적 실재로서 노자의 자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무위이화는 결국 주체의 자기실현입니다. 하늘인 나로서의 자기실현에 헛되이 함(돈, 명예, 권력, 지배욕, 소유욕, 폭력 같은 하늘마음 아닌 것을)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나의 생성체의 본질로서 스스로 그러함을 하라는 말입니다. 동학은 사람과 만물은 스스를 구원함으로서 일체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요, 하늘님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함이 없이 되는 것이 어찌 있겠습니까? 지극한 농부들은 나락이 익을려고 발싸심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나락도 지극한 함이 있습니다. ( 이 지극한 농부들이야말로 진정한 능력자들입니다. 요새 능력주의 논쟁은 참 웃기는 논쟁입니다.) 무위이화란 결국 하늘이 함이요, 나 또한 성경신誠敬信으로 지극한 함을 하면 이룬다는 주체의 자기생성입니다.







13. 동학 자기생성론 - 오심즉여심





동학은 "자기생성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성을 우리말로 하면 '새끼를 낳다'의 '나다'란 말입니다. 이 '나다'는 나가 나지 뉘여 할 때의 '나다' 즉 '생성물'입니다.





'낳다', '나다'를 줄이면 '남'인디 이 말이 참 그렇습니다. '공부해서 남 주냐'할 때의 '남'이잖아요. 이때의 '남'도 결국에는 '낳은 것'입니다.





동학은 '남사상', '나다사상', '낳다사상'입니다. '남', '나다', '낳다' 한자를 써서 '자기생성론'이라고 이름해 봅니다.





그럼 동학이 어찌서 생성론이냐? 수운이 그랬습니다. '오심즉여심"이라고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 하늘 마음이 네 마음이다. 그런데 하늘마음이 어떻게 내 마음이 되는가?





그것이 '무위이화'로 되고 그 일을 하는 것이 '기화'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심즉여심이란 말입니다. 그 마음과 몸을 기루는 것이 곧 자기생성입니다. 나를 기를려면 끝도 없이 하늘과 내가 기화를 해야합니다. 무궁무극한 하늘 마음과 내가 끝도 없이 서로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동귀일체' 란 말이니 그것이 곧 오심즉여심이란 것입니다. 오심즉여심은 한 번 그런게 아니고 무궁하고 무극한 일입니다. 오심즉여심은 늘 '다시개벽'의 과정이란 말이지라.





원광대 조성환 선생은 이것을 움직말(동사) '하늘하다'라고 찾아냈지요.





"나에게는 이기적인 나와 공공적인 내가 있으니, 이기적인 나를 끊은 연후에 내 마음을 천하고 내 기운을 천한다.

我有私我公有私我니 絶其私我然後에 天我心天我氣야 守正之積이 始著니라"

<천도교회월보 제2호> 1910, 09, 15





조성환은 위 문장을 발굴하고 천아심천아기天我心天我氣에서 천을 "하늘한다"는 움직말로 하자고 했습니다.

하늘한다는 것은 즉 동학한다는 것은 곧 하늘을 낳고 기루(양천)는 것, 늘 다시개벽의 오심즉여심입니다.





마음이 사람에게만 있겠습니까? 것들(물건)에도 있습니다. 돌에도 물에도 나무에도 있습니다. 하늘이 사람에게만 오심즉여심하겠습니까?





"모든 것들에 하늘이 있고 (물물천物物天) 모든 일마다 하늘이 있다(사사천事事天)"는 해월 - 이천식천 편의 말씀은 만물생성과 기룸(변화)의 말씀입니다.





수운이 논학문에서 말하기를 "일마다 하늘이 있으며, 일마다 하늘이 이뤄준다 (무사불섭無事不涉 무사불명 無事不命)"는 말은 돌덩이에도 지구에도 하늘 마음이 있다는 오심즉여심인 것이지요.





너는 나이고 나는 너이며(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즉 나는 너를 낳고 기루고 너는 나를 낳고 기른다는 말입니다. 이는 태어날 때 한 번이 아니고 자라는 것이 곧 '낳음-생성"의 연속 과정 늘 다시개벽입니다. 해월이 "나는 나로서 내 마음을 고마워해야 하늘이 기뻐한다. (아심아경 천역열락 我心我敬 天亦悅樂 -해월 수심정기 편)" 이야말로 생성의 기쁨입니다.





동학인들은 '믿는다'하지 않고, '동학한다'로 말합니다. 이는 '사인여천'이나 '인내천'에서 보는 것처럼 내가 하늘이고 하늘이 나이기에 나와 동떨어진 절대자를 섬기는 것이 아닌 하늘과 나의 역동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동학한다'는 '하늘한다'와 같은 말입니다. '하늘한다'는 곧 날마다 새로운 하늘을 여는 다시개벽이자 나아가 자기 개벽성이 발현하는 즉 동학의 표현으로 말하면 '외유기화'이고 만인만물의 이천식천으로서 날마다 우주를 '다시개벽' - 생성하는 일입니다.









14. 나는 국민이 아니고 나의 임자(주체)





수운의 하늘은 나를 따라댕겨라 안 그럽니다. 내가 너희들을 부려먹지(지배) 않을 테니 너희들도 당하고 살지 말아라 이럽니다. 사람도 이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 학교에 가도, 직장에 가도, 심지어는 가족들끼리도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그것이 갑질이잖아요. 수운의 하늘은 갑질이 없습니다. 그 하늘은 참 순하고, 정 많고, 겸손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다고 수운의 하늘은 사람과 만물을 가만두지는 않습니다. 너희들 안으로 나를 모셔라 그래요.(내유신령) 그런데 사실 모실 것도 없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무위이화의 기화로서 이미 내 안에 깃들어있습니다.





동학의 전부라 할 모실 시侍는 내 안에 이미 깃든 하늘을 나의 '함'으로서 자각하고 자기생성하라는 임자(주체)의 말입니다.





수운의 하늘은 개벽하고 오만년 동안 힘써 일했으나 공이 없다고(노이무공勞而無功) 폭폭하다고 투덜댑니다. 아니 아주 겸손하다고 해야 맞겄네요. 그러면서 너를(수운) 만나 성공하니 너도 좋고 나도 좋다고 합니다. (동경대전 용담유사 용담가) 참 순박합니다.





노이무공은 사람과 만물은 신의 지배물도, 신의 창조물도 아니요, 신과 평등한 것도 아니요, 도리어 사람과 만물을 하늘보다도 먼저 내세우는 말입니다. 사람과 만물은 신의 앞잡이가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임자(주체)와 자기생성의 기화지신(氣化之神)입니다. 자기생성의 기화지신이 곧 내유신령이란 것입니다.





노이무공은 확 뒤집는 전복의 선언입니다. 임자(주체)가 되어 스스로 자기생성, 자기통치하라고 신과 만물의 관계를 아주 쎄게 전복합니다. 수운의 하늘은 나타나면서부터 만물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개벽"해냅니다. 그러고는 수운의 하늘은 당신을 몽땅 사람에게 줍니다. 그 선언은 이렇습니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 (오심즉여심 吾心卽汝心 동경대전 논학문 6절)





수운의 하늘은 자신의 일을 함이 없는 무위이화로 하기에 사람과 만물이 임자(주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위이화의 일은 형상은 없으나 자취는 있습니다. (천도자 여무형이유이유적 天道者 如無形而有迹, 동경대전 논학문 1절)





그러니 만물은 자기의 임자(주체가)가 되고 자기의 생성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과 만물이 자기생성자, 자기통치자, 자기임자(주체자)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사람은 국가라는 신을 모시는 국가의 머슴인 국민이 아닙니다. 사람은 민족으로서 민족에 갇힌 경계인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이지 한국사람이 아닙니다. 더 더구나 인종의 흑인,백인, 황인도 아닙니다. 노동에 지배 당하는 노동자도 아니요, 무산자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며. 교회의 신자도 아닙니다.





여기서 요새 유행하는 '공동체' 말씀 좀 드립니다.





서로 무위이화의 조화로서 이천식천 외유기화하는 협동과 상호부조망은 공동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공동체의 국민이데올로기, 민족공동체, 노동공동체, 학교공동체, 교회공동체, 직접민주공동체, 대안공동체는 모두 어떤 생각과 가치를 내려 꽂습니다. 자신이 원해서 어떤 공동체에 드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국민처럼 내가 원하지는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이니 받아들인다는 머슴 같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나는 나일 뿐입니다. 나는 개인주의할 때의 개인과 같은 말은 아닙니다. 우리말 '나'는 태어나다 할 때의 '나다'. 새끼를 낳다의 '나다'에서 온 말입니다. '나'는 곧 나를 낳는 임자이지 국가의 자배를 받는 국민은 아닙니다.





나는 곧 내유신령해서 만물이 화해 낳는 (만물화생 萬物化生, 해월신사법설, 천지부모 편) 생성의 기화지신을 가진 생성자입니다.







- 끝 -



사진 박홍규 작 <새날을 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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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영

건축기술사, 기후난민, 노동난민, 신동학, 한옥, 목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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