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0

동양칼럼 /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 동양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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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칼럼 /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21.07.18 19:05

김양식 청주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김양식 청주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동양일보]최근 우리 사회의 큰 이슈 가운데 하나는 1894년 9월 이후 전개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할 것을 요구하는 관련 단체와 개인들의 움직임이다. 현재 일부 인사들이 국회와 보훈처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는가 하면, 전국의 여러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단체에서도 해당 보훈지청 앞에서 시위를 하거나 현수막을 게시하여 정부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과연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국가에서 정한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가? 한 마디로 충분한 법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 현행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독립유공자는 일제의 국권 침탈 전후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독립운동 공적이 있는 분들이다. 일제의 국권 침탈은 실제 1894년 6월 경복궁 무력점령부터 시작되므로, 그에 맞서 9월에 총봉기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국가에서 정한 독립유공자로서 예우를 받을 법적인 정당성과 자격이 있고도 남음이 있다.

실제 1894년 9월 이후 충북 옥천에 머물던 최시형 등이 총지휘한 동학농민혁명은 전적으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일어난 ‘항일의병전쟁’이었다. 동학농민군 스스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무기를 든 의병이라 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은 1개 대대 병력을 동원하여 동학농민군과 피비린내는 전투를 벌여 수십만명에 이르는 무고한 동학농민군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의로운 죽음으로 시작된 일본제국의 조선 침략이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동학농민군은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것은 역사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근대 역사상과 법적인 해석의 문제이다.

현행 국사 교과서에 기술된 근대 역사상은 개화파와 의병 중심의 낡은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화운동은 무조건 높이 평가하는 반면, 사회 혁신을 통한 자주적 근대국가를 지향한 동학농민혁명은 평가절하되고 있다. 일제의 침략에 맞선 독립운동의 시작도 1895년 을미의병으로 보기에, 동학농민군의 항일의병전쟁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전근대적 사고로 일제와 싸운 의병은 독립유공자로 예우를 받는 반면, 동학농민군은 자주적 근대국가를 세워나가는 역사의 여정에서 외면받은 채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사상과 법적 적용은 20세기 식민지 트라우마와 컴프렉스에 빠진 역사상이자 시대 착오적인 고정관념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진정한 독립은 무엇인가? 외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부자유와 불평등으로부터의 인권 독립이 아닐 수 없다. 3·1운동 당시 그들이 외친 ‘대한 독립 만세’는 일제 지배로부터의 독립 외에 비인간적인 삶으로부터의 독립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것이 진정한 독립운동이며, 그래서 3·1운동의 역사적인 가치는 소중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안으로는 신분제와 왕조의 틀 안에 인간을 가둔 봉건악습으로부터의 독립과,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과 지배로부터의 자주적 독립을 지향한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운동이 아닐 수 없다.

21세기도 1/4이나 흐른 지금, 20세기 후반에 고착된 고정관념과 법률 적용에서 벗어나야 한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운동가로 서훈하는 문제는 단지 그들을 독립유공자로 예우하는 차원을 넘어서 근현대 역사상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인간의 존재가치를 역사속에서 다시 자리매김하는 의미도 있는 만큼 열린 시각에서 새롭게 접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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