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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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에서 가르치는 마음=의식 상태와 운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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慈 (성냄 없음), 悲 (연민, 공감), 喜 (함께 기뻐함) 등에 의해서조차 마음=의식이 동요하지 않는 捨 (평정, 중립)을 항상 지키고,
고통 속에 있는 이를 바라볼 때는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마음으로 대하여 그 슬픔/고통에 함께 매몰되지 않으며,
타인과 함께 기뻐하더라도 시끌벅적 소란 떨거나 들뜨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산만하거나 경박하지 않고 농담 등의 쓸 데 없는 언행도 않지만 그러면서도 경직되거나 무겁지 않으며,
늘 부드럽고 유연하면서도, 마음이 게으르고 흐리멍텅하여 "좋은 게 좋은 거, 편하고 즐거운 게 최고" 식으로 판단이 무뎌지지도 않고,
우유부단하여 바른 결단을 못 내리고 이리저리 휘둘리지도 않으며, 타인과 자신을 공히 소중히 여기되 '소중히 여김'이나 '사랑'이라는 명분하에 자신/타인에게 집착하는 어리석은 고집도 부리지 않고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란 대개 상대방 자체를 위한다기보다 '이렇게 하는 게 저 사람을 위해 좋아'라는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거나 아니면 상대방을 위하는 자.신.의 감정을 위하는 것이기에,
그래서 그 생각/감정의 충족과 상대를 소유/조종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온갖 '不敬 = 존중 부족'을 저지르고 상대를 피곤하게 하며 이것 저것 간섭/요구.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란, 개인적 親疏 무관 모든 생명체를 평등하게 대하는 것.
사적 관계/감정 때문에 더 잘 해 주는 것은 바르지 않다고, 노자 순자 묵자 모두 말했음), 자신을 누군가의 '위'에 놓지도 않고 '아래'에 놓지도 않으며,
타인에게 인색하거나 냉정하지도 않고,
누군가/무언가를 위해 어떤 이가 그의 시간/노력/재능을 바칠 것을 내 입장에서 감히 기대/요구하는 이기심을 부리지도 않으며,
과거의 잘못에 대한 후회 때문에 현재의 자신을 비하/학대하느라 현재에서 할 일=수행으로부터 distract 되지도 않고,
자신이 갖고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고 있는 여건이나 한계들로 인한 '조건 반사'로서의 생각, 말, 행동, 선택이 아닌, 매순간 자신이 진정 무엇을 생각, 말, 행동, 선택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완벽한 인지 (mindfulness)에 뿌리 박은 생각, 말, 행동, 결정만 하며,
지금 나의 생각/견해가 내 자신의 상황이나 탐진치 혹은 다른 감정들에 의해 얼마나 어떻게 영향 받고 있는가?를 늘 면밀히 살피기에 매사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꿰뚫어볼 수 있는, 그런 '지혜' = '徹見'의 상태..
. seeing clearly; seeing without obstruction; looking into every nook and corner
이걸 해야만, 그래야만 이승에서도 행복할 수 있고 다음 생에 잘 태어날 수도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윤회의 사슬에서도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 명상도 저런 의식을 갖기 위해 하는 것이고.. 세상에~ 저런 의식 상태를 항상 유지한다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능이나 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일단 기억이라도 해 두면 저 상태로부터의 거리가 지금보다도 더 커지는 일은 최소한 방지할 수 있으려나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 봄.. (설사 윤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자기 정신을 파악하고 다스리는 훈련의 도구는 건지게 되는 것이 바로 불교 공부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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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각자 본인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살고 있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실은 나 자신 포함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갖고 태어나고 자라고 살고 있는 여건/한계들로 인한 '조건 반사'로서의 생각, 말, 행동,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고, 그렇기에 '운명' ( =태어나고 자라고 살고 있는 여건/한계)의 주인 아닌 노예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으며 (그 누구도 이것을 비난/비판할 수는 물론 없음), 나아가, 우리가 그렇게 수동적으로 끌려다니기만 할 경우, 특정 속도 특정 방향으로 이미 달리고 있는 중인 야생마와도 같은 그 운명에 점점 더 가속도가 붙어 스스로 '확대 재생산'을 해 나가는 경향이 있다고 (자신의 상황/탐진치 때문에 눈이 어두울수록 점점 더 어리석은 생각, 말, 행동, 결정을 하게 되고 그 하나 하나가 나비 효과를 일으켜 태풍이 된다는 점에서), 그래서 운명이 무서운 것이라고 나는 생각. 그렇기 때문에, 당사자가 '자기 운명 극복하기 위한 노력' ( =결국 mindfulness 수행이라고 나는 생각)에 전력을 다 하고 있지 않는 한, 타인의 삶에 개입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인들 근본적인 도움은 되지 못 한다고 나는 생각.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인 차원에서 서로 돕는 일도 중요하지만 거기엔 한계가 있고 (자기 운명도 어쩌지 못 하는 인간이 어떻게 남의 운명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지), 사회 차원에서의 안전망 건설이 더욱 중요해진다고 나는 생각..
. seeing clearly; seeing without obstruction; looking into every nook and corner
이걸 해야만, 그래야만 이승에서도 행복할 수 있고 다음 생에 잘 태어날 수도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윤회의 사슬에서도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 명상도 저런 의식을 갖기 위해 하는 것이고.. 세상에~ 저런 의식 상태를 항상 유지한다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능이나 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일단 기억이라도 해 두면 저 상태로부터의 거리가 지금보다도 더 커지는 일은 최소한 방지할 수 있으려나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 봄.. (설사 윤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자기 정신을 파악하고 다스리는 훈련의 도구는 건지게 되는 것이 바로 불교 공부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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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각자 본인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살고 있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실은 나 자신 포함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갖고 태어나고 자라고 살고 있는 여건/한계들로 인한 '조건 반사'로서의 생각, 말, 행동,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고, 그렇기에 '운명' ( =태어나고 자라고 살고 있는 여건/한계)의 주인 아닌 노예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으며 (그 누구도 이것을 비난/비판할 수는 물론 없음), 나아가, 우리가 그렇게 수동적으로 끌려다니기만 할 경우, 특정 속도 특정 방향으로 이미 달리고 있는 중인 야생마와도 같은 그 운명에 점점 더 가속도가 붙어 스스로 '확대 재생산'을 해 나가는 경향이 있다고 (자신의 상황/탐진치 때문에 눈이 어두울수록 점점 더 어리석은 생각, 말, 행동, 결정을 하게 되고 그 하나 하나가 나비 효과를 일으켜 태풍이 된다는 점에서), 그래서 운명이 무서운 것이라고 나는 생각. 그렇기 때문에, 당사자가 '자기 운명 극복하기 위한 노력' ( =결국 mindfulness 수행이라고 나는 생각)에 전력을 다 하고 있지 않는 한, 타인의 삶에 개입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인들 근본적인 도움은 되지 못 한다고 나는 생각.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인 차원에서 서로 돕는 일도 중요하지만 거기엔 한계가 있고 (자기 운명도 어쩌지 못 하는 인간이 어떻게 남의 운명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지), 사회 차원에서의 안전망 건설이 더욱 중요해진다고 나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