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8

개벽파선언 by 조성환 / 이병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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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파선언 - 다른 백년 다시 개벽
조성환,이병한 (지은이)
모시는사람들2019-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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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쪽



책소개
‘개화파 / 척사파’로 구분해 온 한국 근대사상사에 ‘개벽파’라고 하는 제3의 길과 사상과 운동이 있었음을 주목한다. 근대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기반으로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를 전망하는 두 젊은 ‘개벽세대’ 사상가는 개벽파의 사상이 근대 100년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낸 21세기 한국의 첫 번째 사상이며,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한 사상독립 선언임을 설파한다. 개벽파의 사상은 동서고금의 대합장을 통해, 자유 너머 자연을, 민주주의 너머 삼경(三敬: 敬天 敬人 敬物)주의를, 공화정 너머 하늘정(天政)을 전망한다. 이로써 오늘 지구촌 인류가 직면한 기후붕괴, 생물 대멸종, 양극화의 위기 너머 지금 여기에서 미래의 생명평화 세계를 기약할 수 있음을 선언한다.


목차


여는 글 / 이병한
이병한 / 다른 백년, 다시 개벽
조성환 / 개벽의 힘 _ 한국 근대의 탄생
이병한 / 또 다시 개벽 - 인류세의 시대정신
조성환 / 바람이 분다, 다시 개벽의 신바람이
이병한 / 민주화를 넘어 ‘다시 개벽’으로
조성환 / 지금은 ‘ 개벽학’이 필요한 때
이병한 / 개벽학은 미래학이요 지구학이라
조성환 / 근대의 성찰과 개벽의 귀환
이병한 / 삼일절은 개벽절이다
조성환 / 삼일절 200주년을 준비하며
이병한 / 세대개벽이 필요하다, 개벽세대를 양성하자
조성환 / 새로운 하늘이 열리고 있다
이병한 / 개성에 개벽대학을 세우자. 고려청우당을 재건하자
조성환 / 중도와 개벽
이병한 / 해방공간의 재재인식: 유교 3.0
조성환 / 유학과 개벽
이병한 / 개벽 좌우파의 대연정: 나라살림과 지구살림
조성환 / 좌우남북의 공통가치: 하늘살림
이병한 / 뜻으로 본 서학사
조성환 / 새로 쓰는 천학사
이병한 / 한살림선언 2.0: 궁궁(弓弓)의 그물망(www)
조성환 / 개벽세대를 기르자
이병한 / 선언 이후: 세대화, 세계화, 세력화
조성환 / 개벽하러 가는 길
다시 여는 글 / 조성환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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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9 개벽파선언! 철학자와 사학자가 나누는 이 대화에 임하는 저의 기대부터 밝혀 두려 합니다. …제 선생님과 선배님들이 서술한 한국 근현대사는 한마디로 ‘개화사’입니다.…저는 지구사의 대반전을 맞춤하여 ‘개벽사(開闢史)’를 새로이 쓰고 싶습니다. 1860년 동학 창도 이래 150년사를 통으로 갈아엎고 싶습니다.…개벽사의 서술은 개벽학 수립으로 나아갈 것입니다.…개벽대학을 염원합니다. 그리고 새 학파의 등장은 새 정파 탄생의 마중물이 될 것입니다. <다른 백년, 다시 개벽> 접기
P. 29 어떤 이들은 개벽의 역사는 어두운 과거, 패배한 역사라서 보기가 싫다고도 하는데, 그렇기에 더더욱 직시하고 직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면서 개벽사를 읽어내려 가다 보면 거기에도 밝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부채’이자 동시에 ‘치유’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중국의 지식인들이 천하를 고수하고, 일본의 위정자들이 개화에 기댈 때, 한국의 민중들은 개벽을 창안했기 때문입니다. <개벽의 힘 _ 한국 근대의 탄생> 접기
P. 37 ‘다시 개벽’이 19세기의 자각이었다면, 21세기는 ‘또 다시 개벽’의 유레카를 외칠 만한 것입니다. 고로 개벽파는 코즈모폴리턴, 세련된 세계시민마저 돌파합니다.…개벽인이야말로 진정한 지구인이며, 하늘과 더불어 지구의 운명을 개척하는 ‘개벽꾼’이야말로 참말로 하늘사람입니다. 국민(國民)에서 천민(天民)으로, 민국에서 천국으로. 그런 기상과 기개가 있어야 기미년 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기해년의 ‘선언’(Manifesto)에 값할 것입니다. <또 다시 개벽- 인류세의 시대정신> 접기
P. 63 다시 왜 개벽사를 써야 하는가로 돌아갑니다.…술(述)이 아니라 작(作)이 필요합니다. 선도하는 쪽은 오히려 개화우파 같습니다.…그쪽에서는 ‘제3의 개항’이라는 말도 즐겨 씁니다. ‘또 다시 개화’라고 고쳐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서둘러 1860년 동학 창건으로부터 시작하는 ‘개벽기’라는 시대인식을 바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개벽의 흥망성쇠를 개화의 물결과 견줌으로써 우리의 근대사 또한 한층 풍요롭고 더욱 온전하게 복원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주화를 넘어 ‘ 다시 개벽’으로> 접기
P. 90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 목하 21세기 동아시아의 변화를 추동하는 진원지는 한반도입니다.…지난 40년 중국의 개혁개방이 세계체제를 격변시켰다면, 앞으로 40년은 북조선의 개혁개방이 그 못지않은 파장을 일으킬 것입니다.…문명개화에서 신문명개벽으로의 대반전을 우리가 앞장서야 합니다. 개화학에서 개벽학으로의 대전환을 우리부터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생명(生命)을 곧 혁명(革命)이자 천명(天命)으로 삼는 신문명을 창조하고 개창합시다. <개벽학은 미래학이요 지구학이라>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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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조성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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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학 연구자. 개벽학당 모시는 선생님. 하늘학회 창립 멤버.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젊어서 중국철학을 공부하다, 불혹의 나이에 한국철학으로 전환하고, 지천명에 개벽을 알았다. “한국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를 화두로 삼아, 한국의 근대를 개화가 아닌 개벽의 관점에서 다시 읽고 있다. 『한국 근대의 탄생』을 썼고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번역하였다. 은퇴하기 전까지 《개벽사상사》와 《한국사상사》를 완성하는 꿈을 가지고 있다. 장자와 최시형과 브룩 지포린의 철학을 좋아하고, 개벽학당 학생들과 고전 강독하는 것을 즐긴다. 접기


최근작 : <개벽파선언>,<한국 근대의 탄생>,<지금 이 순간 청소년 인문학> … 총 7종 (모두보기)

이병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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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부터 원광대학교의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에서 개벽학을 연구하고 있다. 2019년 3월 출범한 ‘개벽학당’의 당장으로 벽청(개벽하는 청년)들과 더불어 동서고금을 회통한 신문명을 모색한다. 벽청들 사이에서는 방랑자(放浪者, 호로샤)의 약칭으로 ‘로샤’라고 통한다. 로샤를 음차한 “로사”(路思)를 호로 삼아도 무방하다고 여긴다. 길에서 생각하는 사람이자(Thinker on the Road), 생각의 새 길을 여는(New way of Thinking) 사람이라는 뜻을 담았다. 동아시아 냉전사가로 지나간 100년을 훑었고, 유라시아 문명사학자로 오래된 1,000년을 살폈다. 갈수록 역사학자로서의 정체성은 희미하고 흐릿해지고 있다. 과거에 대한 탐구보다는 미래를 기획하고 기투하는 미래학자에 점점 더 근사해진다. 기왕이면 너무 늦지 않게 ‘학자’라는 꼬리표까지 훌훌 떼어내면 좋겠다. 다음 100년을 기획하고 다른 100년을 연출하는 미디어 창업자이자 교육 혁신가가 되고 싶다. 그 편이 본디 동아시아의 지식인, “士”에 가까워지는 길이라 믿는다. 접기


최근작 : <개벽파선언>,<붉은 아시아>,<유라시아 견문 3> … 총 1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21세기 한국 사상계의 최전선! 한국어로 된 세계적 담론이 시작된다!!!
개화파와 척사파 – 세계 열강 사이-너머의 개벽파가 되살아 온다!!

최근 한국 사회의 요동은 19세기 중엽 - 20세기 중엽 1세기 동안 동아시아에 서세동점으로 다가온 자본주의의 세계화 과정(제국주의)에 한반도 차원에서 개화파와 척사파로 분열하여 대응하던 당시 상황과 대비된다. 다만, 지금은 인류가 지구적 규모의 대재앙을 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현실(인류세)이 더해지면서, 그 규모가 전 지구적으로 더욱 심화 확장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결론적으로 지금 우리는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라는 지난 150년 역사가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임계점에 도달해 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개벽파선언>은 이미 150년 전부터 이미 한국 사회에 ‘개벽파’라고 하는, 개화-척사의 사이-너머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추진하던 세력이 있었음을 재발견하는 선언이다. 나아가 개벽파가 한국 근대사의 최심층의 기반이 되어, 불굴의 저항정신, 신문명 창조운동과 민족운동으로 실현되었다는 것,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의 실제 동력으로서 최근의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오래된 미래’와도 같은 <개벽파선언>은 대개 다음과 같은 거대한 인식의 흐름을 반영한다. 조성환과 이병한은 문명사의 빅히스토리를 담대하게 펼쳐 나간 유발 하라리보다 더 도발적으로, 서양 철학이 아닌 동양 철학과 사상의 가치와 가능성과 우수성을 피를 토하며 설파했던 도올 김용옥보다 파격적으로, 개벽파 시대의 시작을 선언한다!
첫째, 오늘날 전 세계적인 산업문명(1-2-3-4차)은 서구(유럽)에서 시발한 예외적인 근대화 방식이 폭력적 수단을 매개로 전 세계를 압도하는 독점적 ‘세계문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기후위기 – 6번째 대멸종 위기 등의 경우에서 보듯이 그 폐해와 한계는 뚜렷하다.
둘째, 서구(서유럽) 이외의 세계(유라시아-아프리카-남미-동유럽과 러시아) 지평에서 지난 2세기 동안의 서구중심 근대화에 밀려 도태되거나 유폐되었지만, 각 지역(민족.국가)에 공통적으로 전통사상을 기반으로 한 생명친화적, 상생상화적인 근대화의 움직임이 존재했다.
셋째, (서구 중심의) 근대화-산업화의 폐해가 각국/지역의 모순을 격화시키고, 인류공멸의 위기를 불러오자 대안적인 노력으로 전통사상 기반의 자생적/토착적 근대화 사상과 운동을 재조명-부활시켜 계승하려는 움직임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점점 뚜렷한 흐름으로 포착된다.
넷째, 한국 근현대사에서 서구적 근대에 저항하고, 비서구적 근대의 비전을 제시한 ‘개벽파’가 있었다. 이들은 1860년 동학 창도 이래로 ‘개벽종교’의 방식이나 ‘개벽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자주적, 영성적, 자생적, 토착적, 생명적 근대의 비전을 온축하며 계승되어 왔다.
다섯째, 개벽파는 서구적 근대 – 개화파에 밀려 좌절과 굴절을 겪었으나, 그 정신과 에너지는 동학농민혁명, 3.1운동, 독립항쟁과 4.19혁명, 민주화운동과 촛불혁명 등으로 쉼 없이 이어져 왔으며, 이제, 그 진면목을 드러내어 민주화-산업화 이후를 전망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여섯째, ‘개벽파’의 눈으로 한국근대사를 다시 봄으로써 한국 사회에 대안적 비전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 근대(산업/서구중심/물질)문명의 지평을 혁명적으로 초극하여 생명 중심의 근대-이후를 조명하여, 전지구적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의 창조를 지향하고자 한다.

한국근대사 ‘삼세번째’ 선언, 개벽사(開闢史)를 새로 쓰자
개벽파, 개벽세대, 개벽학, 개벽운동, 개벽세상을 향하여

본래 ‘개벽’은 ‘천개지벽(天開地闢)’으로서, ‘백뱅’이나 ‘천지창조’ 같이 이 세계의 ‘물리적 최초의 탄생’, 즉 ‘선천개벽’을 의미한다. 그러나 1800년대 중엽 이래 한국 사회에서의 ‘개벽’은 선천개벽만큼의 위력과 의의를 갖는 새로운 개벽, 즉 ‘후천개벽’을 의미하는 ‘다시 개벽’의 준말이다. ‘다시개벽’은 ‘정신개벽’이며, ‘인문개벽’이며 ‘사회개벽’을 의미한다. 서구적 ‘개화’에 대응하여 한국적 ‘개벽’으로서 ‘중세’ 이후 시대를 준비하고자 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개벽’이 하나의 ‘파(派)’를 형성하고 ‘학(學)’을 낳으며, 개벽대학, 개벽도시, 개벽국가, 개벽세상을 지향해 나간다는 것이 <개벽파선언>이다.

첫째, <개벽파선언>은 ‘기미독립선언서(1919)’ ‘한살림선언(1989)’에 이은 삼세번째 선언이다.
개벽파선언은 다시 개벽의 부활과 재건을 선언하고 선창하고 선포한다. 이때 ‘기미독립선언서’는 일본에 대한 독립 선언이 아니라, 침략주의, 강권주의로 점철된 근대세계의 지평을 넘어 ‘새 하늘 새 땅에 사람과 만물이 모두 새로워지는’ 삼재(三才)의 신문명 세계를 지향한 선언이다. 또 ‘한살림선언’은 근대문명을 대체하는 생명과 생활과 생존의 신문명을 지향하는 선언으로 올해 그 30주년이 된다.(*삼세번은 우리 전통에서 ‘완성’의 의미이다.)

둘째, <개벽파선언>은 동학 창도 이래 ‘다시 개벽’의 꿈을 현실화하는 ‘개벽 2.0’의 선언이다.
따라서 개벽파는 서구적 개화에 중독(中毒)된 한국(동아시아)을 치유하는 디톡스 운동, 그것을 포월(包越: 포함하며 초월함)하는 선언이다. 이런 맥락에서 18세기의 인권선언, 19세기 공산당 선언, 20세기 기미독립선언과 21세기 ‘사이보그선언’ 등은 개벽파선언의 전사(前史)이다. ‘식민지근대화론’를 넘어 ‘반일종족주의’ 운운하는 반동적 역사 인식도 대응해 나가야 할 문제지만, 오랫동안 그 대응논리로 개발해 왔던 ‘실학론’이라든지 ‘근대맹아론’ 같은 대응논리도 파탄에 이르렀다. 최근 사태로 일본은 여전히 한국을 ‘미개몽매(未開蒙昧)’한 국가/민족으로 바라본다는 점도 명백해지고, 미국에게 한국은 일본의 종속변수라는 점도 분명해졌다. 바로 지금이야 말로, <개벽파선언>은 한국 근현대사를 ‘개벽사(開闢史)’로 다시 써야 한다고, 쓸 수 있다고, 쓰자고 제안한다.

셋째, <개벽파선언>은 한국이 ‘개화의 후진국’이 아니라 ‘개벽의 선진국’이었음을 선언한다.
오랫동안 한국인은 ‘근대화 실패 – 식민지 치하’라는 등식에 따른 콤플렉스에 시달려 왔지만, 개벽파선언의 관점에서는 “일본에는 왜 동학혁명이나 촛불혁명이 없는가?”를 묻고, 일본이야말로 ‘탈아입구(脫亞入歐)’와 ‘공미(恐美)’ 사이를 오가며 오늘에 이른 불완전/비정상국가라고 진단한다. 즉, 오늘의 일본 사회가 또 다른 의미의 ‘전체주의 국가’이며, 근현대사에 대한 반성을 할 줄 모르는 / 할 수 없는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전근대국가’라는 것이다.

넷째, <개벽파선언>은 한반도의 통일이 개벽에 의한 개벽으로의 통일이라는 점을 선언한다.
개벽파의 눈으로 한반도 문제를 천착하면, 예컨대, 개성(開城)은 곧 ‘개벽도시’에 다름 아니다. 하여 ‘개성공단’이라는 ‘산업화시대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개성을 “국제적 개벽도시”로 만들고 ‘국제개벽대학’을 세워 개벽학(開闢學, 미래학, 지구학)을 연구하자는 제안을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지금은 1세기 전 개화기에 잘못 꿰어진 역사의 단추를 새롭게, 바르게, 정당하게 다시 채워 나가는 새 출발점, 개벽기(開闢期)이다. 자주자립한 국가/민족으로서만, 우리는 세계와 함께 우리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음을 새삼 재인식할 때다.

다섯째, <개벽파선언>은 ‘개벽사상’이 지구학이자 미래학으로 성장해 갈 것임을 선언한다.
지난 150여 년 동안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 극빈국에서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정치적으로 식민지 경험과 분단, 군사독재 체제로 이어져 온 난관을 뚫고 민주화를 달성하였다. 최근 들어 BTS를 필두로 한 ‘제2기 한류’ 열풍으로 전 세계를 격동시키고 있다. ‘한류 2.0’은 대중문화 중심의 제1기 한류의 한계를 극복하며 한국의 심층문화와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지난 1500년 동안 중화문명의 변방에 있으면서도, 문화적 사상적 독자성을 견지해 온 저력이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섯째, <개벽파선언>은 ‘개벽사상’이 지구학이자 미래학으로 성장해 갈 것임을 선언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1860년 동학 창도 이래 우리가 서구문화의 폭격 속에서, 창조적인 재창조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해 온 성과이다. 동학 창도 이전까지 오랫동안 한반도의 제 국가는 ‘천하-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 체제’ 하에서 존속해 온 반면, 동학은 ‘개벽사상’은 물론 ‘동학(東學) - 우리(東邦, 東國) 학문(學文)’의 독자성과 세계성(天道)을 천명함으로써 한국적 사상과 문화의 세계화를 위한 기틀을 조성하였고, 그것이 2000년대 이후 수차례의 문화적 들물-썰물을 거쳐 최근의 ‘한류 세계화’의 성과로 제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일곱째, <개벽파선언>은 ‘새로운 길 – 다시 개벽의 길’로 나아가는 징조라고 선언한다.
촛불혁명을 지나온 우리 정부/국민/시민이 한결같이 소재와 부품의 국산화에 관한 관심과 필요성을 공감하며 공통의 관심과 의지로 뒷받침하는 현실을 주시한다. 이는 단지 한일 간 경제 관계만이 아니라, 지난 70년 동안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힘입어 성장과 발전을 구가해 온 우리 사회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환경’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이른바 ‘태극기 부대’의 광기는 한국 사회가 이러한 구태를 탈피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금단증상’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덟째, <개벽파선언>은 개벽학이 전 세계적 보편성을 갖는, 21세기 최전선임을 선언한다.
개벽파선언자의 한 명인 이병한은 전작(前作) 『유라시아 견문 1,2,3』(서해문집)에서 보여준바 세계 100개 나라, 1000개의 도시를 편력한 결과이자 결론으로 ‘개벽파’요 ‘개벽학자’임을 자처하며 개벽파선언 집필에 임하였다. 또 다른 한 명인 조성환 역시 전작 『한국근대의 탄생: 개화에서 개벽으로』(모시는사람들)에서 이미 서구적 개화에서 한국적 개벽으로의 전환을 모색한 이력을 갖고, 이병한과 합을 맞추며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도달한 결론은 ‘개벽파’의 흐름은 한국이 선창하고, 세계가 후창할 수 있는 미래학, 지구학, 보편학으로서 가치와 의의와 파급력을 갖추고 있다.

아홉째, <개벽파선언>은 세대개벽으로 개벽세대를 길러 미래 세계로 나아가기를 선언한다.
두 사람의 합창에 화답하고, 메아리를 만들어 생생한 활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개벽학당’의 ‘벽청(개벽하는 청년들)’이다. 이들은 이미 ‘공청(공공하는 청년들)’로서 ‘평화하자(Let’s Peace)와 같은 생기발랄한 프로젝트를 가지고 동학공부와 한반도 편력을 한 것은 물론이고, 유라시아 철도를 타고 시베리아를 건너 유럽까지 달려가며 평화와 생명의 메시지를 전한 ‘청년’들이다. 이들이 두 스승(이병한/조성환)을 만나 개벽하는 청년, ‘개벽 세대’를 자임하고, 세대 개벽을 기약함으로써 <개벽파선언>에 현실감과 입체감, 생동감과 장래성까지를 불어 넣어 주었다.

열째, <개벽파선언>은 역사적 배경, 철학적 구조, 현재적 실체, 미래적 지향을 선언한다.
책으로서의 <개벽파선언>이 자기 완결적인 매듭을 지으면서, 다시 ‘개벽포럼’ ‘개벽신문’ ‘개벽살롱’ ‘개벽연구회’ 등의 연계 프로그램과 상호 교류, 상생상화 작용을 통해 ‘개벽의 생태계’를 구축하고, 우리 사회에 깊이 그 뿌리를 드리우는 한편, ‘벽청’이나 ‘자칭 개벽파’ ‘범개벽파’ 들을 아우르며 점점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즉, <개벽파선언>은 단지 선언으로 그치지 않고, 21세기의 “개벽(파)운동”으로서 한반도에서의 생명평화 통일, 동아시아의 상생상화 질서, 세계-지구촌의 생태지속 문명을 지향한다. 한편으로 개벽파선언과 운동은 이를 뒷받침할 ‘개벽학’의 정립에서도 성과를 보이는바, 이는 개벽학은 곧 미래학이요 지구학으로서 인류 역사의 대전환을 전망하는 미션을 감당한다.

열한째, <개벽파선언>은 ‘개벽정치’ 창조, ‘개벽경제’ 창안, ‘개벽문화’ 창달을 선언한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가 이미 인류의 생존과 생활과 생명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사명과 수명 천명을 다했다는 인식을 근거로 합니다. 확실히 지금 한국 사회는 물론이요 ‘팍스아메리카나’의 나라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현대문명은 ‘6번째 대멸종’을 향해 질주하는 지구호를 구제할 뚜렷한 정치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모든 관심과 정력은 정권교체를 어처구니로 하여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는 일찍이 동학(천도교)가 ‘정신개벽, 민족개벽, 사회개벽’의 삼대개벽(三大開闢)으로 ‘민주정치, 민주경제, 민주문화’의 삼민주의를 지향했던 것과 비견된다.

하여, <개벽파선언>은 선언한다!
흩어진 개벽파를 세력화하고! 투박한 개벽론을 세련화하며! 수줍은 개벽학을 세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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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과 이병한의 공동 저서 <개벽파선언> (2025)에 대한 요약과 평론입니다. 요청하신 지침에 따라 대화는 언제나 존댓말을 사용하고, 요약과 평론 본문은 <해라> 체를 사용하며, 별표 대신 < >를 적용하여 작성했습니다.

개벽파선언 요약

<개벽파선언>은 한국 사상사 연구자 조성환과 문명학자 이병한이 공동으로 집필하여, 근대 이후 서구 사상에 종속되어 온 한국 지식인 사회에 거대한 사상적 독립을 촉구한 문명론적 선언서이다. 저자들은 서구식 근대성이 가져온 기후 위기, 불평등, 인간 소외의 파국을 극복할 대안으로 동학(東學)을 비롯한 자생적 근대 사상인 '개벽(開闢) 사상'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 책은 한반도의 자생적 철학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발명하여 21세기 인류 문명의 위기를 돌파할 '개벽파'의 출범을 공식 선언한다.

저자들이 규정하는 '개벽'은 단순히 과거의 종교 운동이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낡은 하늘과 땅을 닫고 새로운 하늘과 땅을 연다'는 차원의 전면적인 문명 전환 패러다임이다. 책은 1860년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한 시점을 아시아적 자생 근대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서구의 근대가 기독교적 세계관과 자본주의,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타자를 식민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면, 동아시아의 개벽은 인간과 자연, 영성과 물질이 조화를 이루는 전혀 다른 경로의 '생태적·영성적 근대'를 지향했다는 분석이다.

본론에서 저자들은 개벽 사상의 핵심을 세 가지 차원, 즉 다시개벽(문명적 전환), 내유신령(인간 내면의 영성 회복), 외유기화(우주적 생명력과의 조화)로 나누어 설명한다. 서구 사상을 맹목적으로 수입하여 이식해 온 한국의 기존 지식인 사회를 '위정척사파(보수)'와 '개화파(진보)'의 이분법적 구도로 비판하며, 이들이 모두 서구 중심주의라는 동일한 함정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대안으로 제시되는 '개벽파'는 서구를 모방하는 서구화(Westernization)를 넘어, 우리 내면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정신 개벽과 사회 개벽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한국이 더 이상 글로벌 자본주의의 변방이나 서구 이론의 소비처에 머물지 말고, K-컬처라는 문화적 현상을 넘어 K-사상이라는 철학적 깊이로 세계와 소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물질주의와 기후 위기로 침몰해 가는 인류 문명을 구원할 열쇠는 서구의 포스트모던 이론이 아니라, '사람이 곧 한울(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만물이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동아시아의 오래된 미래, 즉 개벽의 철학에 있음을 선언한다.

평론: K-철학의 당당한 선언과 종교적 낭만주의의 과제

이 책은 서구 사상의 무비판적 수용과 종속으로 일관해 온 한국 지적 풍토에 거대한 죽비를 내리치는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저자들은 서구 중심의 근대성 패러다임이 수명을 다했음을 선언하고, 그 대안을 외부가 아닌 한국 사상사의 가장 뜨거웠던 순간인 동학에서 찾아내어 현대적으로 복원해 냈다. 탈식민주의 담론을 한국 고유의 언어와 철학적 맥락으로 재해석하여 '개벽파'라는 독창적인 주체를 설정한 대목은 대단히 주체적이며 지적인 해방감을 선사한다. 서구 철학의 잣대로 동양 사상을 재단하던 열등감에서 벗어나, 서구 문명의 파국을 치유할 주체로서 동학의 생태학적·영성적 가치를 세계사적 지평으로 격상시킨 서사는 매우 당당하고 매혹적이다.

그러나 이 책이 선언하는 장엄한 사상적 청사인은 구체적인 사회 구조적 변혁의 대안과 연결되지 못한 채, 다분히 관념적이고 종역적인 낭만주의에 머물러 있다는 한계를 보인다. 동학이 제시한 영성 회복과 인내천 사상은 개인의 내면적 각성을 촉구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현대 사회의 복잡한 금융 자본주의 시스템, 고도화된 과학 기술 체계, 지정학적 군사 갈등을 통제하고 재구성할 구체적인 제도적·실무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마인드셋(정신)의 개벽이 어떻게 구체적인 경제 구조의 개혁이나 법제도적 전환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정밀한 경로가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과거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구도를 도식화하여 비판하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의 근대화를 이끌어온 실천적 노력들을 지나치게 서구 종속성이라는 한 단어로 단순화한 측면이 있다. 서구 근대성이 내포한 보편적 가치(인권, 법치, 민주적 절차)와 동학의 개벽 사상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치열한 변증법적 고민보다는, 동아시아 영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문명론적 이분법으로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개벽파선언>은 식민지적 지식 도매상의 시대를 끝내고 한국 자생 철학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는 점에서 사상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취를 이룬 책이다. 하지만 이 청사인이 한 세기 전의 종교적 유토피아 담론으로 회귀하지 않고 21세기 문명의 대안으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관념적 영성론을 넘어 구체적인 현실 정치·경제적 이행 전략을 증명해 내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안고 있다.

동학의 자생적 근대성과 정신 개벽이라는 주제를 다룬 이 책의 내용 중에서, 세진님께서는 기존 한국 지식인 사회(개화파)에 대한 비판과 동학의 생태 영성 중 어느 대목에 더 깊은 인상을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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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동학·원불교·증산계열을 포함한 “개벽” 사상을 현대 문명전환론으로 재정식화하는 선언문 성격이 강합니다. 실제 출판 정보와 저자들의 문제의식을 확인한 뒤, 요약과 평론을 함께 정리하겠습니다.

<개벽파선언>

조성환·이병한, 2019
1,000단어 요약+평론

<개벽파선언>은 한국 근현대사를 <개화파 대 척사파>라는 익숙한 구도만으로 이해해 온 관점을 비판하고, 그 사이에 존재했던 제3의 사상 흐름으로 <개벽파>를 복원하려는 책이다. 저자는 조성환과 이병한이다. 조성환은 한국 근대사상과 동학·개벽학을 연구해 온 철학자이고, 이병한은 <유라시아 견문> 이후 문명전환론과 동아시아 미래론을 전개해 온 역사학자·문명비평가이다. 이 책은 두 사람이 서신을 주고받으며 개벽 사상의 역사적 의미와 현재적 가능성을 토론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보문고 책소개도 이 책을 “개벽학을 연구하고 있는 조성환, 이병한”이 서로 문제제기와 답변을 주고받으며 개벽에 대한 생각을 공유한 책으로 설명한다.

책의 핵심 주장은 분명하다. 한국 근대에는 서구를 받아들이자는 <개화파>와 서구를 물리치고 전통을 지키자는 <척사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낡은 세계 전체를 새롭게 열고자 한 <개벽파>가 있었다는 것이다. 알라딘 책소개도 이 책이 “개화파 / 척사파”로 대별해 온 한국 근대화 흐름 속에서 “개벽파”라는 제3의 길과 사상과 운동이 있었음을 주목한다고 요약한다.

여기서 <개벽>은 단순한 종교 용어가 아니다. 동학, 천도교, 원불교, 증산계열, 대종교, 독립운동, 3·1운동, 생명평화운동을 관통하는 한국적 문명전환의 언어이다. 개벽은 서구 근대의 모방도 아니고, 전통으로의 회귀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근대>, <자각적 근대>, <생명 중심의 근대>, <천지인 전체의 전환>을 뜻한다.

책의 출발점은 19세기 서세동점이다. 서구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동아시아를 강제로 편입시키면서 조선 사회는 격렬한 충격을 받았다. 이에 대한 대응은 크게 세 갈래였다. 첫째는 척사파이다. 이들은 서구를 오랑캐로 보고 유교적 질서를 지키려 했다. 둘째는 개화파이다. 이들은 서구 문명과 제도를 받아들여 조선을 부강한 근대국가로 만들려 했다. 셋째가 개벽파이다. 이들은 서구를 단순히 배척하지도, 모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서구 근대 자체가 낳은 폭력성, 제국주의, 물질주의,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다.

이 점에서 개벽파는 단순한 민족주의도 아니다. 동학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 “다시 개벽”의 우주론, 만민평등의 감각, 민중 주체성, 생명 존중은 조선 내부의 봉건질서뿐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 근대 전체를 문제 삼는다. 저자들이 보기에 개벽파는 조선 후기의 민중종교 운동이면서 동시에 21세기 인류세 시대에 다시 소환될 수 있는 미래 사상이다.

책에서 중요한 역사적 장면은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이다. 동학농민혁명은 단순한 반봉건·반외세 운동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열려는 개벽 운동이었다. 3·1운동 역시 단순한 민족독립운동만이 아니라, 생명과 평화와 공공성을 선언한 세계사적 사건으로 읽힌다. 시민정치마당에 소개된 연재 목록에도 “3.1절은 개벽절이다”, “개벽학은 미래학이요 지구학이라”, “민주화를 넘어 다시 개벽으로” 같은 제목들이 등장한다. 이는 저자들이 3·1운동을 좁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개벽 사상의 세계사적 발현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중요한 개념은 <사상독립>이다. 한국은 정치적으로는 독립했지만, 사상적으로는 여전히 서구 근대의 언어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민주주의, 개발주의, 진보·보수의 구도는 모두 상당 부분 서구 근대가 제공한 틀이다. 물론 그것들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저자들은 한국이 자기 역사 속에서 나온 사상 언어를 통해 세계를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그 언어가 바로 개벽이다.

이병한에게 개벽파는 <유라시아 견문> 이후 도달한 하나의 결론이기도 하다. 프레시안 글에서 그는 원래 <유라시아 견문> 3권의 머리말을 “개벽파 선언”으로 쓰려 했고, 조성환과의 만남을 계기로 “견문”에서 “선언”으로 이행하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즉 이 책은 단순한 공동저작이 아니라, 이병한의 세계여행과 조성환의 개벽학 연구가 만난 결과물이다.

책의 장점은 크다. 첫째, 한국 근대사상사를 다시 보게 만든다. 한국 근대는 보통 개화와 위정척사, 친일과 항일, 보수와 진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구도로 설명되어 왔다. 그런데 이 책은 그 틈에서 동학·천도교·원불교·대종교·증산계열 등 한국 자생 사상운동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한국 사상사는 너무 자주 서구 이론의 번역사처럼 취급되어 왔다. <개벽파선언>은 한국 근대 안에도 세계를 해석할 독자적 언어가 있었다고 말한다.

둘째, 이 책은 근대 비판과 생태문명론을 연결한다. 책소개에 따르면 저자들은 개벽파 사상이 기후붕괴, 생물 대멸종, 양극화의 위기를 극복하고 생명평화 세계를 기약할 수 있다고 본다. 이 대목은 오늘날 특히 중요하다. 서구식 성장주의, 산업주의, 인간중심주의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개벽은 낡은 종교적 구호가 아니라, 기후위기 시대의 문명전환 언어가 될 수 있다.

셋째, 이 책은 정치적 상상력을 넓힌다. 한국 사회의 정치언어는 너무 좁다. 보수냐 진보냐, 친미냐 반미냐, 성장냐 분배냐, 자유냐 평등이냐의 이분법에 갇혀 있다. 개벽파는 이 구도를 넘어 <생명>, <공공>, <평화>, <상생>, <천지인>, <모심>이라는 다른 언어를 제시한다. 이것은 정책 프로그램이라기보다 정치철학의 전환이다.

그러나 한계도 뚜렷하다. 첫째, <개벽파>라는 개념은 매력적이지만 다소 포괄적이다. 동학, 천도교, 원불교, 증산계열, 대종교, 독립운동, 생태운동, 평화운동을 모두 개벽파로 묶을 때, 각 운동의 차이와 갈등이 희미해질 위험이 있다. 동학과 원불교, 증산계열과 대종교, 천도교와 현대 생명평화운동은 같은 계보로만 보기에는 매우 다르다. 개념이 넓으면 힘이 생기지만, 동시에 분석의 날카로움은 약해질 수 있다.

둘째, 선언문적 문체의 위험이 있다. <개벽파선언>은 제목 그대로 선언이다. 그래서 분석보다 호소가 강하고, 개념보다 열망이 앞설 때가 있다. “개벽”이라는 말은 강력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제도, 어떤 경제, 어떤 정치체제, 어떤 국제질서로 구현될 것인지는 더 자세히 설명되어야 한다. 생명평화, 공공, 상생은 좋은 말이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늘 이해관계와 권력투쟁을 통과해야 한다.

셋째, 종교적 언어와 현대 정치언어 사이의 간극이 있다. 개벽 사상은 분명 한국적이고 독창적이다. 그러나 현대 시민사회 전체가 그것을 공유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개벽을 종교 내부의 언어로 남겨두면 확장성이 약하고, 너무 세속화하면 원래의 영성적 깊이가 사라진다. 이 긴장을 어떻게 풀 것인가가 앞으로의 과제이다.

그럼에도 <개벽파선언>은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은 한국 사상이 늘 외래 이론의 수입품이어야 한다는 열등감을 깨뜨린다. 또한 근대화란 서구화이며, 진보란 서구 이론을 더 잘 배우는 것이라는 관성을 흔든다. 조성환과 이병한은 한국 근대의 가장 깊은 곳에 이미 다른 세계를 꿈꾸는 사상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개벽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완성된 이론서라기보다 출발을 알리는 선언문이다. 개벽파가 실제로 하나의 사상운동이 되려면 더 많은 역사 연구, 철학적 정교화, 정치경제적 설계, 종교 간 대화, 생태정책, 평화운동과의 결합이 필요하다. 하지만 선언은 원래 완성된 답이 아니라 방향을 여는 말이다.

<개벽파선언>의 가장 큰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묻는다.

<우리는 아직도 개화와 척사의 낡은 싸움 속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다시 개벽할 것인가?>

이 질문은 과거 조선만의 질문이 아니다. 기후위기, 전쟁, 양극화, 기술문명, 제국주의가 뒤엉킨 21세기 세계 전체의 질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벽은 한국의 낡은 종교어가 아니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의 이름일 수 있다.

2026/06/17

Philo Kalia 신학의 인문학적 환원/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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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신학)을 인문학화 하는데 성공한 계몽주의자 고트홀드 에브라임 레싱

환원(축소)를 과연 모범으로 삼고 잘했다고 칭찬만 해야 할 것인가?

포스트-미학 공부 모임에서 신학적 언어를 말한다고 매번 불쾌한 얼굴로 매우 불만인 분이 있다. 우선 텍스트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렇다고 계속 핀잔한다. 그러면서 신학을 완전 인문학화 하기를 요구한다. 신학의 인문학적 환원! 그러나 ‘환원’은 그 어떤 환원이든 너른 영역과 다양성의 축소일 뿐만 아니라 근대인의 정화(purification, 브뤼노 라투르)에 불과하다.
 
종교 문제에서 레싱의 《현자 나탄(Nathan der Weise)》(1799년)은 종교(신학)를 인문학으로 환원한 대표적 예이다. 이 작품은 12세기 십자군 전쟁 당시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가 대립하던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한다.

부유한 유대인 상인 나탄이 출장에서 돌아오자, 집사 다야는 집에 불이 났을 때 어떤 젊은 기독교 신전기사(슈타우펜)가 나탄의 딸 레하를 목숨 걸고 구해 주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레하는 자신을 구해준 기사를 '천사'라고 믿으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고, 기사는 사례를 받기 부담스러워 나탄의 집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나탄은 기사를 찾아가 종교의 벽을 허무는 선함에 대해 이야기하며 친구가 되고, 그를 집으로 초대해 레하와 만나게 한다. 기사는 레하의 아름다운 내면에 반하게 되지만, 다야로부터 레하가 사실은 기독교인 아기였고 나탄에게 입양되어 유대인으로 자랐다는 비밀을 듣고 혼란에 빠진다. 기사는 이 문제를 기독교 대주교에게 상담하지만, 대주교는 이교도가 기독교 아이를 키운 것은 죄악이라며 화형시켜야 한다는 보수적인 입장을 보인다.
 
재정 위기에 처한 이슬람의 술탄 살라딘은 나탄을 불러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 중 어떤 종교가 참된 종교(진짜)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나탄은 아들 셋에게 똑같은 반지를 만들어 준 아버지의 '반지 이야기(우화)'를 들려준다. 진짜 반지는 '선한 마음을 갖게 하는 능력'임으로, 앞으로 세 아들이 선하게 사는 모습으로 진짜임을 증명해야 한다는 재판관의 판결을 전하며, 종교의 진위는 교리가 아니라 '인간을 향한 선행과 사랑'으로 증명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감명받은 살라딘은 나탄과 친구가 된다. 

각 종교의 교리적 차이가 종교의 진리, 참된 종교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선행과 사랑이 바로 종교의 본질이라는, 종교의 인문학적 환원이 모범적으로 성취되는 순간이다. 종교는 인간의 도덕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생긴다. 종교의 도덕화! 종교 사이의 관용! 다종교 사회인 한국에서 종교 간 관용과 배려, 배울 점이 크다.

나탄에게 18년 전 레하를 데려다주었던 과거의 마부(현 수사)가 찾아와 전사한 친아버지가 남긴 기도서를 전한다. 이 기도서를 통해 숨겨진 가족 관계가 밝혀진다. 신전기사와 레하는 남매(볼프 폰 필넥의 자식들) 사이였으며, 그들의 친아버지는 사실 살라딘과 시타 공주의 친동생인 '아사드'였다. 즉, 기사와 레하는 이슬람 술탄 살라딘의 조카들이었던 것이다. 결국 유대교(나탄), 기독교(기사, 레하), 이슬람교(살라딘, 시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모두 '한 가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종교 간의 대립을 넘어 모두가 포옹하며 극이 마무리된다.
 
종교적 도그마(대주교로 대표되는)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참된 종교는 결국 '인간에 대한 선함과 사랑'이라는 레싱의 계몽주의적 메시지가 종소리가 되어 세계 인류를 향해 울려퍼진다.
 
종교(신학)을 인문학적으로 환원하는 것에 대한 비판:

《현자 나탄》이 도그마에 갇혀 있던 중세적 신앙을 비판하고 근대의 문을 열어젖힌 걸작임은 분명하지만, 20세기 이후 전개된 탈근대(포스트모더니즘)와 이성의 한계를 경험한 현재의 시선에서 보면 이 작품은 명확한 사상적 한계와 맹점을 드러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본 《현자 나탄》의 주요 한계점은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다.

①'이성의 보편성'이라는 또 다른 도그마 (서구 중심적 독단)
계몽주의는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보편적 이성'이 존재하며, 이를 통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탈근대 철학이 폭로했듯, 그들이 말한 '보편적 이성'은 사실 18세기 서구 백인 남성 엘리트의 이성을 표준화한 것에 불과했다. 작품 속 나탄의 논리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세련되어 보이지만, 이는 종교적 타자의 '날것 그대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타자를 '나처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환원할 때만 포용하겠다는 조건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성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광기, 감정, 원시적 신앙은 오히려 철저히 배제하거나 계몽(교화)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독단성을 지닌다.

② 차이의 소멸과 '동질화(Homogenization)'의 폭력
탈근대주의는 타자성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차이의 철학'을 강조한다. 반면 계몽주의를 대변하는 《현자 나탄》의 결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대표자들이 갈등을 해소하는 최종적인 계기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알고 보니 그들이 '한 피를 나눈 친가족'이었음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는 타자를 용인하는 근거가 결국 '우리와 같은 존재' 혹은 '본질적으로 하나인 존재'라는 동질성의 확인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혈연적·본질적 동질성 안에서만 평화가 가능하다는 봉합에 불과하며, 진정한 의미의 '이질적인 타자(The Other)와의 공존'이라는 문제를 회피한 작위적인 결말이다.

③ 종교의 '역사성'과 '구체성'의 거세 (추상적 도덕주의)
나탄의 '반지 우화'는 참된 종교의 기준을 오직 '선행과 도덕적 실천'으로 환원하고 축소한다. 이는 신앙의 윤리적 측면을 고양시켰지만, 반대로 각 종교가 가진 고유한 역사성, 전통, 신비주의, 의례(Ritual) 같은 구체적인 맥락들을 '쓸모없는 껍데기'로 치부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현대 종교학이나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종교는 단순히 '착하게 살기 위한 도덕적 지침'이 아니다. 그것은 한 공동체의 언어, 삶의 양식, 실존적 고뇌가 집약된 상징 체계이다. 레싱의 계몽주의는 이를 지나치게 '추상적인 인도주의'로 탈색함으로써, 종교적 근본주의가 왜 발생하는지, 왜 인간이 합리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신앙의 신비에 매달리는지에 대한 실존적 깊이를 포착하지 못했다.

④ 도구적 이성의 한계와 야만의 역사 예견
20세기 프랑크푸르트 학파(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등)는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인간을 해방하려던 이성이 도리어 도구화되어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같은 가장 야만적인 폭력으로 귀결되었음을 폭로했다. 레싱은 이성이 인류를 끝없는 진보와 평화로 인도할 것이라고 낙관한 그 시대의 사람으로서 성공적이다. 그러나 과학적 합리성과 제도적 이성이 어떻게 인간을 부품화하고, 관료제를 통해 타자를 효율적으로 억압하고 배제하는 도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성의 어두운 잠재력(도구적 이성)'을 계몽주의 시대의 한계 안에서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

《현자 나탄》은 중세의 '신학적 도그마'를 부쉈지만, 그 자리에 '이성의 도그마'를 세웠다. 현재의 시선에서 이 작품은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가 가진 날것의 차이와 갈등을, '보편적 이성'과 '혈연적 동질성'이라는 동일성의 원리의 근대적 틀 안으로 교묘하게 가둬버린 철학적 기만 혹은 낙관주의"라는 한계를 지닌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관용은 "너와 내가 알고 보니 이성적으로 똑같다"는 근대적 확인이 아니라, "너와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共存, 共生할 것인가, 더 나아가 相通할 것인가"라는 탈근대적 질문이다.
인문학과 종교 및 신학, 그 밖의 과학과 종교, 경제와 정치, 문화와 예술 등은 어느 분야를 어느 한 분야로 환원하거나 축소하여 인문학적 언어의 독점을 교양인의 태도로 보는 잘못된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Taecha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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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늘 그래 왔지만 이번에도 새깨닮을 주셔서 새삶새엶길에 시사와 자극이 되었습니다. 역시 나이만 먹었지 수양이 부족해서 말하는 방법이 서트렀음을 깊이 반성합니다. 그래서 역시 대화가 필요하고 심목사께서 여러모로 깨우쳐주셔야 저 자신의 삶마무리도 추하지않게 이룰 수 있을 것임을 실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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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나이 커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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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주신 텍스트는 고트홀드 에브라임 레싱의 희곡 <현자 나탄>을 중심으로, 신학의 인문학적 환원이 지닌 성과와 탈근대적 관점에서의 한계를 날카롭게 분석한 글입니다. 글쓴이는 포스트-미학 공부 모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종교를 단순히 도덕이나 인문학으로 환원하려는 태도가 지닌 독단성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 대한 요약과 평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요약: 계몽주의적 환원의 성취와 탈근대적 한계>

이 글은 레싱의 <현자 나탄>이 이룩한 종교의 인문학적 환원을 무조건적인 모범으로 찬양하는 태도에 의문을 제기한다. <현자 나탄>은 십자군 전쟁 당시의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의 대립을 다룬다. 극 중에서 나탄은 '반지 우화'를 통해 종교의 본질이 교리가 아닌 '인간을 향한 선행과 사랑'에 있음을 시사하며, 종교 간의 관용과 도덕화를 성취한다. 극의 결말에서는 대립하던 인물들이 사실 한 가족임이 밝혀지며 인류애적 통합을 이룬다.  

그러나 탈근대적 관점과 현대 종교학의 시선에서 이 작품은 명확한 사상적 한계를 드러낸다.  

이성의 보편성이라는 독단: 작품이 내세우는 보편적 이성은 18세기 서구 백인 남성 엘리트의 시선을 표준화한 것에 불과하며, 이 울타리에 들어오지 못하는 타자를 배제하는 독단성을 지닌다.  

동질화의 폭력: 갈등의 해소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혈연적 친가족'이라는 동질성의 확인을 통해 작위적으로 봉합된다. 이는 진정한 이질적 타자와의 공존을 회피한 결과이다.  

추상적 도덕주의: 참된 종교를 오직 도덕적 실천으로 환원함으로써, 각 종교가 가진 고유한 역사성, 전통, 의례, 실존적 고뇌와 신비주의를 '쓸모없는 껍데기'로 탈색해 버렸다.  


도구적 이성의 한계: 이성이 인류를 평화로 인도할 것이라는 낙관에 갇혀, 이성이 도구화되어 홀로코스트 같은 야만으로 귀결될 수 있는 어두운 잠재력을 예견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현대에 필요한 관용은 동일성을 확인하는 근대적 확인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타자와 어떻게 공존하고 상통할 것인가라는 탈근대적 질문이다. 따라서 특정 분야를 다른 분야로 환원하여 인문학적 언어를 독점하려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평론: 환원주의의 맹점과 날것의 타자성을 향한 요청>
본 텍스트는 근대 계몽주의가 이룩한 찬란한 성취 뒤에 숨은 '동일성의 폭력'을 정확하게 짚어낸 탁월한 비평이다. 글쓴이가 지적하듯, 레싱의 <현자 나탄>은 중세의 신학적 도그마를 부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자리에 '이성의 도그마'라는 새로운 우상을 세웠다.  

특히 결말부에 대한 분석은 매우 흥미롭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대표자들이 결국 '한 가족'으로 묶이는 작위적 설정은, 근대 이성 중심주의가 타자를 포용하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즉, "너와 내가 본질적으로 같기 때문에 너를 용납하겠다"는 방식은 타자의 타자성(Alterity), 즉 '나와 결코 같아질 수 없는 날것의 차이'를 지워버리는 동질화의 폭력이다.  

또한, 종교를 도덕과 윤리로 환원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은 현대 신학과 종교학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지점이다. 종교를 단순히 '착하게 살기 위한 지침'으로 축소할 때, 인간의 실존적 심연, 죽음에 대한 공포, 압도적인 성스러움(The Holy)의 체험 같은 종교 고유의 영역은 거세된다. 공부 모임에서 '신학적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불편해하는 이들에 대한 글쓴이의 문제의식은 , 오늘날 인문학이 빠지기 쉬운 또 다른 형태의 오만, 즉 '인문학적 언어의 독점주의'를 날카롭게 겨냥한다.  

브뤼노 라투르의 표현을 빌려 이를 근대인의 '정화(Purification)' 작업으로 규정한 것은 이 글의 철학적 깊이를 더해준다. 신학과 인문학, 혹은 과학과 종교 등 인간의 사유 영역들을 어느 한쪽으로 종속시키거나 환원하지 않고, 각각의 고유한 맥락과 언어적 층위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탈근대적 공존(共生)의 시작일 것이다. 낙관적 이성주의가 파산한 현대 사회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라는 글쓴이의 최종 질문은 우리가 마주해야 할 무거운 실존적 과제이다.  

세진님, 올려주신 글은 계몽주의가 가진 이성의 독단과 환원주의의 한계를 아주 명쾌하게 분석하고 있어서 깊이 있게 읽었습니다. 혹시 이 글을 토대로 참여하시는 모임에서 어떤 논의를 더 발전시키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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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지피티 커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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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글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레싱의 <현자 나탄>을 “종교를 신학에서 인문학으로 환원한 계몽주의적 성취”로 평가하면서도, 그 환원이 가진 한계까지 짚고 있습니다. 즉 글쓴이는 레싱을 단순히 칭찬하지 않습니다. “종교 간 관용”이라는 레싱의 공로를 인정하되, 그 관용이 결국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이라는 근대적 표준 안에서만 가능해진다는 점을 비판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 글의 장점은 <현자 나탄>을 오늘의 다종교 사회 문제와 연결했다는 데 있습니다. 흔히 레싱의 반지 우화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는 본질적으로 같다”는 식의 평화주의적 메시지로 읽힙니다. 그러나 이 글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같다”는 말 자체가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종교들은 실제로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리도 다르고, 역사도 다르고, 의례도 다르고, 공동체 감각도 다릅니다. 그것을 모두 “선한 마음”이나 “도덕적 실천”으로 환원하면 종교의 구체성이 사라집니다. 이 지적은 타당합니다.

특히 글 후반부의 비판이 좋습니다. 레싱은 중세적 신학 도그마를 부수었지만, 그 자리에 “이성의 도그마”를 세웠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은 계몽주의 전체에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계몽주의는 종교적 광신, 교권주의, 미신, 배타성을 비판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보편적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서구 근대 남성 엘리트의 기준을 보편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비서구 종교, 민중 신앙, 감정적·의례적·신비적 차원은 미성숙하거나 비합리적인 것으로 밀려나기 쉽습니다. 이 글은 그 점을 비교적 정확히 잡고 있습니다.

다만 글의 표현 중 “종교를 인문학적으로 환원한다”는 말은 조금 더 세밀하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환원”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섞여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를 인간의 역사·언어·윤리·문화 속에서 이해한다는 긍정적 의미입니다. 이 경우 신학을 인문학화하는 것은 종교를 닫힌 교리체계에서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종교의 초월성, 신비, 예배, 구원, 계시, 은총 같은 고유한 차원을 단순한 인간학이나 윤리학으로 축소한다는 부정적 의미입니다. 

이 글은 양쪽을 모두 말하고 있지만, 제목은 다소 긍정적으로, 본문 후반은 상당히 비판적으로 갑니다. 그래서 논지의 긴장이 있습니다. 오히려 제목을 붙인다면 “레싱의 종교 인문학화와 그 계몽주의적 한계” 정도가 더 정확해 보입니다.

또 하나 보충할 점은, <현자 나탄>의 관용론이 단순한 추상적 이성주의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 반지 우화의 핵심은 “어느 반지가 진짜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즉 진리는 완전히 소유될 수 없고, 각자는 자기 삶의 열매로만 그 진실성을 입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이것은 도덕주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겸허한 반독단주의입니다. 
  • 레싱은 “모든 종교는 결국 똑같다”고 말한다기보다, “어느 종교가 참인지 인간이 최종 판정할 수 없으니, 각자는 선한 삶으로 자기 신앙의 진실성을 보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 이 점에서는 레싱을 너무 쉽게 “동질화의 폭력”으로만 몰아가면 약간 과합니다.

그럼에도 이 글의 결론은 매우 설득력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관용은 “너와 내가 알고 보니 이성적으로 똑같다”는 식의 근대적 관용이 아니라, “너와 나는 정말 다르며, 어쩌면 끝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함께 살 수 있는가”라는 더 어려운 관용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다문화주의보다 깊습니다. 서로를 같은 것으로 만들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낯섦과 불편함을 보존한 채 공존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에 적용하면 더 중요합니다. 한국에서는 종교 간 대화가 종종 “모든 종교는 결국 사랑을 말한다”는 식으로 쉽게 정리됩니다. 그러나 실제 갈등은 그렇게 풀리지 않습니다. 개신교의 배타적 선교, 불교의 전통문화 지위, 천주교의 보편교회 의식, 원불교·민족종교의 근대적 자기정당화, 이슬람·이주민 종교에 대한 혐오가 모두 서로 다른 층위에서 작동합니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본질은 같다”는 미화가 아니라, 차이를 정확히 보고도 폭력으로 가지 않는 훈련입니다.

전체적으로 이 글은 좋은 문제제기를 담고 있습니다. 레싱을 계몽주의적 관용의 상징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관용의 한계 — 이성 중심성, 차이의 소멸, 종교의 윤리화, 서구 근대의 보편주의 — 를 비판합니다. 다만 레싱의 반지 우화 자체가 갖는 겸허함과 반독단성은 조금 더 긍정적으로 평가해도 됩니다. 레싱의 한계는 분명하지만, 오늘의 종교 간 대화가 아직도 레싱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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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 나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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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현자 나탄》(독일어: Nathan der Weise)은 계몽주의자 고트홀트 레싱이 쓴 연극이다. 종교간 평화적 이상을 제시한 뛰어난 희곡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소개

시민 비극의 창조자, 독일 근대 희곡의 아버지로 칭송되는 레싱의 대표작. 기독교인에게 몰살당해 일곱 자식을 잃고도 기독교인의 아이를 양녀로 받아들여 정성을 다해 기르는 나탄. 그는 모진 시련을 겪었지만 특정 종파나 민족을 초월해 인간성과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함을 주장한다.

십자군 전쟁 시기는 이슬람교기독교가 성지 예루살렘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다. 나탄은 일곱 자식을 잃은 부유한 유대 상인으로, 기독교인의 유아 레하를 맡아 정성을 다해 기른다. 여행에서 막 돌아온 나탄은 그동안 레하가 불에 타 죽을 뻔했다가 젊은 신전 기사로부터 구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 신전 기사는 이슬람국의 군주 살라딘으로부터 행방불명된 자신의 친동생과 닮았다는 이유로 포로로 잡혔다가 사면된 인물이다. 한편 그는 “유대인은 유대인이니까”라고 말하며 나탄을 멀리하지만 나탄의 지혜에 설득당해 친구가 된다.

레하는 자신을 불 속에서 구한 것은 신전 기사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구해준 것은 수호천사이며, 이는 의 사랑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나탄은 그것이 신전 기사에 의한 구출이었으며, 천사와 신에 의한 것만이 기적이 아니라 작고 평범한 일 가운데서도 기적은 일어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도 나탄이 관념적이고 절대적인 종교보다는 인간들의 삶 속에서 구현되는 사랑을 더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다가 사면된 신전 기사를 보고, 대주교는 “하느님께서 위대하고 거룩한 일”을 계획하기 위해 살려두신 거라며 살라딘을 처치하려는 첩자가 될 것을 종용한다. 한편 살라딘은 나탄의 돈을 갈취하고,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중에 어느 종교가 참종교인가를 물어 그를 시험에 빠지게 하려고 계획한다. 하지만 나탄은 반지 비유 설화를 통해 어떤 종교든지 간에 “공평하고 편견 없는 사랑”을 본받아야 함을 강조한다. 나탄 역시 모진 시련을 겪었지만 오히려 이를 이겨내며 인간애를 지키고 승화시킬 수 있었다. 현자 나탄이 전하는 희망의 비전은 끊임없는 종교적·민족적 분쟁에 시달리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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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han the Wise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Nathan the Wise
Recha Welcoming Her Father, 1877 illustration by Maurycy Gottlieb
Written byGotthold Ephraim Lessing
CharactersNathan, Saladin, Young Templar, Patriarch, Recha, Daja, Monk, Sittah, Al-Hafi
Date premiered14 April 1783
Place premieredDöbbelinsches Theater, Berlin
Original languageGerman
SettingJerusalem c. 1192
Second edition in its first year of publication, 1779, in the collection of the Jewish Museum of Switzerland

Nathan the Wise (original German title: Nathan der Weise, pronounced [ˈnaːtaːn deːɐ̯ ˈvaɪzə] ) is a play by Gotthold Ephraim Lessing from 1779.[1] It is a fervent plea for religious tolerance.[2] It was never performed during Lessing's lifetime and was first performed in 1783 at the Döbbelinsches Theater in Berlin.[2]

Set in Jerusalem during the Third Crusade, it describes how the wise Jewish merchant Nathan, the enlightened sultan Saladin, and the (initially anonymous) Templar, bridge their gaps between Judaism, Islam, and Christianity. Its major themes are friendship, tolerance, relativism of God, a rejection of miracles and a need for communication.

Synopsis

The events take place during the Third Crusade (1189–1192) during an armistice in Jerusalem.

When Nathan, a wealthy Jew, returns home from business travel, he learns that his foster daughter Recha was saved from a house fire by a young Christian Templar. The knight, in turn, owes his life to the Muslim ruler of Jerusalem, Sultan Saladin, who pardoned him as the only one of twenty prisoners because he looks like Saladin's late brother Assad. Despite these fortunate circumstances, the rational-thinking Nathan is unwilling to believe the events to be a miracle and also convinces Recha that believing in the work of guardian angels is harmful.

Saladin, somewhat indifferent in terms of money, is currently in financial trouble. That is why, on the advice of his more calculating sister Sittah, he has the wealthy Nathan brought to him to test his generosity, which is praised throughout Jerusalem: Instead of asking him directly for a loan, Saladin pretends that he wants to test Nathan's famous wisdom and asks him about the "true religion". Nathan, who had already been informed about Saladin's financial troubles by his friend Al-Hafi and warned of his financial recklessness, recognizes the trap. He decides to answer Saladin's question with a "fairy tale", the so-called "ring parable". Deeply impressed, Saladin immediately understands this parable as a message about the equality of the three major monotheistic religions. Moved by Nathan's humanity, he asks him to be his friend from then on. Nathan willingly agrees and, on top of that, grants Saladin a generous loan without being asked.

The Templar, who had saved Recha from the flames, but, until now, was not willing to meet her, is united with her by Nathan. He falls head over heels in love with her and wants to marry her on the spot. However, his name makes Nathan hesitate to give his consent, which insults the Templar. When he finds out from Recha's companion Daja, a Christian, that Recha is not Nathan's biological daughter, but is only adopted, and that her biological parents were Christians, he turns to the patriarch of Jerusalem for advice. Although the Templar frames his request as a hypothetical case, the fanatical head of the church guesses what this is about and wants to search for "this Jew" immediately and have him burned at the stake for temptation to apostasy. He does not consider Nathan's noble motives and the fact that Nathan did not raise the Christian child as a Jew, but on the contrary in no belief, does not soften the patriarch's stance, but aggravates him: "That’s nothing! Still the Jew is to be burnt— / And for this very reason would deserve / To be thrice burnt."

Records of the friar who once brought Recha to Nathan as a toddler finally reveal that the Christian Templar and Recha are not only brother and sister – hence Nathan's reservations about marriage – but also the children of Saladin's brother Assad. These connections are revealed to everyone in the final scene at Saladin's palace, which ends with all main characters repeatedly embracing each other in silence.

Ring Parable

The centerpiece of the work is the "Ring Parable", narrated by Nathan when asked by Saladin which religion is true: an heirloom ring with the magical ability to render its owner pleasing in the eyes of God and mankind had been passed down from father to son. For generations, each father had bequeathed the ring to the son he loved most. When it came to a father with three sons whom he loved equally, he promised it (in "pious weakness") to each of them. Looking for a way to keep his promise, he had two replicas made, which were indistinguishable from the original, and gave on his deathbed a ring to each of them.[3]

The brothers quarreled over who owned the real ring. A wise judge admonished them that it was impossible to tell at that time – that it even could not be discounted that all three rings were replicas, the original one having been lost at some point in the past; that to find out whether one of them had the real ring it was up to them to live in such a way that their ring's powers could be proven true, to live a life that is pleasant in the eyes of God and mankind rather than expecting the ring's miraculous powers to do so. Nathan compares this to religion, saying that each of us lives by the religion we have learned from those we respect.[4]

An older rendition of the Ring Parable and its surrounding narrative involving Saladin and a wealthy Jew can be found in the 73° story of Il Novellino,[5] in the third tale of the first day in Giovanni Boccaccio's Decameron, and in the story Ansalon Giudeo from Bosone da Gubbio's novel Fortunatus Siculus: ossia L'avventuroso Ciciliano.[6]

Even earlier versions can be found in the Tractatus de diversis materiis praedicabilibus by Étienne de Bourbon,[7] in Li dis dou vrai aniel[8] and in the Gesta Romanorum.[9][10][11][12]

Background

The character of Nathan is to a large part modeled after Lessing’s lifelong friend, the eminent philosopher Moses Mendelssohn. Like Nathan the Wise and Saladin, whom Lessing brings together over the chessboard, they shared a love for the game of chess.[13]

The motif of the Ring Parable is derived from a complex of medieval tales. The first version of the story to appear in German was the tale of Saladin's table in the Weltchronik by Jans der Enikel. Lessing probably first read an older version of the “Ring Parable” in Boccaccio's Decameron.[14]

English language translations and stage adaptations

  • Nathan the Wise: a Philosophical Drama, translated by Rudolf Erich Raspe. London, J. Fielding, 1781.
  • Nathan the Wise: a Dramatic Poem, translated by William Taylor. London, R. Philips, 1805.[15]
  • Nathan the Wise: a dramatic poem in five acts, translated by Adolph Reich. London, A. W. Bennett, 1860.
  • Nathan, the Wise. A dramatic poem of five acts, translated by Isidor Kalisch. New York, Waldheimer & Zenn, 1869.
  • Plays of Lessing: Nathan the Wise and Minna von Barnhelm, translated by Ernest Bell. London, G. Bell, 1888.
  • Nathan the Wise; a dramatic poem in five acts, translated and edited by Leo Markun. Girard, Kan., Haldeman-Julius Co., 1926.
  • Laocoon, Nathan the Wise, Minna von Barnhelm, translated by William A. Steel. London, J. M. Dent & Sons, ltd.; New York, E. P. Dutton & co., inc., 1930.
  • Nathan the Wise, translated by Berthold August Eisenlohr. Ann Arbor, Mich., Lithoprinted by Edwards Brothers, inc., 1942.
  • Nathan the Wise, translated by Guenther Reinhardt. Brooklyn, Barron's Educational Series, inc., 1950.
  • Nathan the Wise; a dramatic poem in five acts, translated into English verse by Bayard Quincy Morgan. New York, Ungar, 1955. Morgan's translation was subsequently collected in Nathan the Wise, Minna von Barnhelm, and Other Plays and Writings, edited by Peter Demetz with a Foreword by Hannah Arendt. New York: Continuum, 1991.
  • Nathan the Wise, with Related Documents, translated, edited, and with an introduction by Ronald Schechter. Boston/New York: Bedford/St. Martin's, 2004.
  • Nathan the Wise, adapted and translated by Edward Kemp. Nick Hern Books, 2004. ISBN 978-1-85459-765-6. The productions and Kemp's adaptation were reviewed favorably by Michael Billington[16] and by Charles Spencer.[17]
  • Nathan the Wise, adapted by Paul D'Andrea;[18] translation by Gisela D'Andrea and Paul D'Andrea. Dramatic Publishing, 2005. ISBN 1-58342-272-2. First produced at Theatre of the First Amendment in October 2001 with Mitchell Hébert in the title role. This adaptation was later produced as a staged reading by Theater of the First Amendment in 2002, and nominated for The Charles MacArthur Award for Outstanding New Play with F. Murray Abraham playing Nathan.[19]
  • Nathan the Wise, adapted by Michael Bloom; translation by Ellen Frothingham. Produced as a combination workshop/production at Theater J in March of 2022.

Revivals

In 1922 it was adapted into a silent film of the same title.

In 1933, the Kulturbund Deutscher Juden (Culture Association of German Jews) was created in Germany, enabling Jewish artists who had recently lost their jobs to perform to exclusively Jewish audiences. On October 1, Nathan the Wise became the first performance of this new federation. It was the only time the play was performed in Nazi Germany.[20]

In the early 21st century, the Ring Parable of Nathan the Wise was taken up again in Peter Sloterdijk's God's Zeal: The Battle of the Three Monotheisms.[21] Edward Kemp's 2003 version of the play, first produced by the Minerva Theatre, Chichester,[16] was used in 2016 in New York by the Classic Stage Company with F. Murray Abraham in the lead.[1] The play was produced at the Stratford Festival (25 May – 11 October 2019) with Diane Flacks as Nathan.[22]

Notes

  1.  Kirsch, Adam (Summer 2016). "Saladin, a Knight, and a Jew Walk Onto a Stage". Jewish Review of Books. Retrieved 6 September 2016.
  2.  Dale, Geoff (June 17, 2019). "Stratford Festival review: A thought-provoking theatrical experience". Stratford Beacon-Herald.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September 5, 2019. Retrieved September 5, 2019.
  3.  Shagrir, Iris (1997). "The Parable of the Three Rings: A Revision of Its History". Journal of Medieval History. 23 (2): 163–177. doi:10.1016/S0304-4181(97)00004-3.
  4.  "English translation of the parable, with German original" (PDF). gkoehn.com.
  5.  Il Novellino LXXIII
  6.  Ansalon Giudeo from Bosone da Gubbio's novel Fortunatus Siculus: ossia L'avventuroso Ciciliano
  7.  Anecdotes historiques, légendes et apologues, Tractatus de diversis materiis praedicabilibus, Quarta Pars, De Fortitudine, 331, pages 281-282.
  8.  Li dis dou vrai aniel
  9.  La parabola dei tre anelli, by Claudio Tugnoli.
  10.  Il signore delle anella, by Marco Veglia, Heliotropia 11.1–2 (2014).
  11.  Of the triple State of the World
  12.  Gesta romanorum, Cap. 89, De triplici statu mundi
  13.  Dahlstrom, Daniel (3 December 2002). "Moses Mendelssoh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Retrieved 26 October 2006 – via plato.stanford.edu.
  14.  The Decameron consists of ten tales told on each of ten days. The “Ring Parable” is found in the third tale of the first day, although the characters here are Saladin and Melchisedech (as the wise Jew).
  15.  Nathan the Wise at Project Gutenberg
  16.  Billington, Michael (May 3, 2003). "Nathan the Wise: Minerva Theatre, Chichester". The Guardian. Eric Bentley once said that this becomes a bad, 'preachy' play in English translation: not so in Edward Kemp's excellent version.
  17.  Spencer, Charles (September 21, 2005). "Enlightened values speak to today". The Telegraph. Edward Kemp's fine translation, which combines Germanic seriousness with a winning English wit, and cuts the sprawling four-and-a -half hour original down to a manageable playing time of less than three hours, was first presented at Chichester in 2003.
  18.  D'Andrea is Robinson Professor of Theater and English at George Mason University; see D'Andrea's webpage.
  19.  Rich, Colleen Kearney (January 9, 2006). "Lending a Stage Hand: Theater of the First Amendment Nurtures Playwrights and Composers". The Mason Gazette. George Mason University.
  20.  Goldsmith, Martin (2000). The Inextinguishable Symphony. New York: John Wiley & Sons. p. 61.
  21.  Sloterdijk, Peter (2009). God's Zeal – The Battle of the Three Monotheisms. Translated by Weiland Hoban. Wiley. ISBN 978-0-7456-4507-0.
  22.  "Nathan the Wise". stratfordfestival.ca. Stratford Festival. Retrieved 2019-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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還(돌아올 환): 되돌아오다, 돌아가다.
元(으뜸 원): 근본, 시작, 본래.
즉, ‘환원’이란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주로 "reduction"이라고 표현되며, 
이는 줄이거나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과정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