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 | 아지즈 네신 | 알라딘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아지즈 네신 (지은이),이난아 (옮긴이)
푸른숲2009-01-16
원제 : Bir Surgunun Anilari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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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100자평(2)리뷰(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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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터키 국민작가 아지즈 네신이 자신의 유배 생활을 바탕으로 쓴 소설. 웃음 속에 날카로운 풍자와 존재의 깊은 슬픔을 만나게 되는 작품으로 영어, 독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비롯해 34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또한 이탈리아, 러시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에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풍자 문학상을 휩쓸었다.
60여 년 전 터키의 소도시에 유배된 한 지식인의 기록을 담았다. 작가 아지즈 네신이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소도시 부르사로 유배 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유배지 부르사의 생활은 만만치 않다. 네신을 넘겨받은 파출소의 소장들은 하나같이 그를 탁구공을 쳐내듯 다른 파출소로 보낸다.
작가가 유배지 부르사에서 맞닥뜨린 인간 군상은 하나같이 우스꽝스럽고 비굴하며, 시대의 폭력 앞에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에 급급한 소시민들이다. 그러나 이들을 보는 작가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으며,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고 같이 껴안고 가려 하는 의지가 배어 있다.
네신은 유배지하면 흔히 떠올리는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고독하고 무거운 공간이 아닌 사람들과 부대끼고 울고 웃고 다소 떠들썩한 공간으로 바꾸어놓고 있다. 비굴한 인간 군상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시선, 유쾌하고 위트 있는 풍자를 통해 슬프고 고단한 인생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목차
서문
그러는 당신은 어디 있었습니까?
날아오는 불덩이를 피하는 법
눈물의 달리기
원칙주의 화가와 신중한 기자
인연이 아닌가 보다
담요의 의미
차렷해야지!
하프즈 아지즈 씨
만약에 내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사회주의자들에겐 보드카가 제격이지
아버지께서 갔던 길을 따라가시오
시로 배를 채우다
희망이 거세된 시간들
관음증 환자가 준 케이크
한밤의 배신
아지즈 네신, 비밀 조직을 결성하다
눈처럼 새하얀 손수건
저자 후기
옮긴이의 말
접기
책속에서
나는 창구에서 소포를 찾았다. 안에는 책이 세 권 들어 있었다. 고맙게도 친구가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살면서 그날처럼 책이 저주스러운 순간도 없었다. 책을 한 장 한 장 찢어 삼켜버리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내게 쓸모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 본문 44-45쪽 중에서
지금 이 글이 나의 회고록이 아니라 소설이었... 더보기
뉴욕이라는 곳에서는 그냥 돌아다니기만 해도, 예술품이나 건물만 보고 돌아다녀도 사람의 눈과 귀가 문화로 가득 찬다네. 이 부르사에서 순찰대처럼 돌아다닌다고 뭐 달라질 게 있겠나?-156쪽 - 레오
저자 및 역자소개
아지즈 네신 (Aziz Nesin) (지은이)
1915년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터키 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풍자 문학의 거장 아지즈 네신은 터키의 대표 지성知性이자, 터키인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작가이다. 서슬 퍼런 계엄령 하에서도 권력의 압제에 굴하지 않고 글로써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간 네신은 터키 국민들의 신산한 삶을 어루만지는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영어, 독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비롯해서 34개국 언어로 번역되었고, 이탈리아, 러시아, 루미나아, 불가리아 등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풍자 문학상을 휩쓸기도... 더보기
최근작 : <일단, 웃고나서 혁명>,<더 이상 견딜 수 없어!>,<왜들 그렇게 눈치가 없으세요?> … 총 18종 (모두보기)
이난아 (옮긴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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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 터키어과를 졸업하고, 튀르키예 국립 이스탄불 대학에서 튀르키예 문학으로 석사 학위, 튀르키예 국립 앙카라 대학에서 튀르키예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 튀르키예·아제르바이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소설 『내 이름은 빨강』 등 60여 권에 달하는 튀르키예 문학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했으며,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등 여섯 편의 한국 문학 작품을 튀르키예어로 번역했다. 2024년 동원번역상을 수상했다.
최근작 : <노벨문학상과 번역 이야기>,<노벨문학상 수상작 산책>,<터키어 표준 교재 A1> … 총 103종 (모두보기)
아지즈 네신(지은이)의 말
독자 여러분께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이 책에 실린 글은 제가 상상하여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싶습니다(물론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이 이 글 속에도 어느 정도는 제 개성과 어투가 배어 있기는 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는 제 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유배 생활에 대한 회고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시절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럽던 시절도 세월이 흘러 추억으로 회고될 때는 조금은 달콤하게 떠오르는 법이지요. 마치 오랫동안 가지 끝에 매달려 인고의 시간을 보낸 열매들이 달콤한 과일로 익는 것처럼 말이죠. 지금 다시 유배 시절을 떠올리면 슬며시 웃음이 배어 나옵니다. 때때로 주변 사람들에게 그 당시의 이야기를 해주곤 하는데 그들도 모두 제 이야기를 들으면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린답니다. 이 책을 읽는 여러분도 분명 함께 즐거워하리라 생각하며 저는 이 글을 씁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터키 국민작가 아지즈 네신(Aziz Nesin. 1915-1995)이 자신의 유배 생활을 바탕삼은 소설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가 푸른숲에서 출간되었다. 포복절도할 웃음 속에 날카로운 풍자와 존재의 깊은 슬픔을 만나게 되는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영어, 독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비롯해 34개국 언어로 번역되었고, 이탈리아, 러시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에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풍자 문학상을 휩쓸었다. 특별히 자신의 체험이 절절히 녹아 있는 이 작품은 부끄럽지 않은 실천적 지식인으로 살아온 아지즈 네신의 진면목을 생생히 느끼게 한다.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팸플릿을 제작했다가 인쇄소를 급습한 경찰에 체포되어 유배 생활을 시작한 네신은 소도시 부르사에서 소심하고 비굴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온갖 인간 군상들을 만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격동의 시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소설이 주는 울림은 더욱 깊고 절절하다.
풍자 문학의 거장, 대중성과 문학성을 겸비한 터키 최고의 작가
터키 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풍자 문학의 거장, 아지즈 네신(1915-1995)은 터키의 대표 지성知性이자, 터키인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작가이다. 시, 소설, 희곡, 평론, 칼럼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백여 편에 이르는 작품은 탄탄한 서사와 날카로운 풍자로 대중에게 널리 읽히며 사랑받고 있다. 터키인 중에서 그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고, “완전히 아지즈 네신의 소설이군”이라는 관용어가 있을 정도다.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은 에세이집 <다른 색들>에서 아지즈 네신에 대해 “이처럼 대중적인 필치로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와 사람들의 삶을 세밀하게 꿰뚫어본 작가는 전 세계 문학계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들다. 아지즈 네신 문학의 성공은 바로 이것이다”라고 극찬했다. 뛰어난 입담과 흡입력 강한 서사로 구비문학적 성격이 강한 터키 문학의 정점에 있는 그의 작품은 세계적으로도 문학성을 인정받아 이탈리아와 러시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지에서 수여하는 황금종려상, 황금고슴도치상과 같은 풍자 문학상을 두루 수상하였다.
이야기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는 작가
국내에 출간된 아지즈 네신의 작품으로는 <생사불명 야샤르>, <제이넵의 비밀 편지>, <당나귀는 당나귀답게>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 <개가 남긴 한 마디>가 있다. 이 작품들의 공통적 특징은, 문학의 본령인 이야기성이 뛰어나며 동시에 현대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풍자가 날카롭다는 점이다. 정치 상황이나 사회 시스템이 우리와 비슷한 터키가 무대여서 그 비판과 풍자는 우리에게 한층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아지즈 네신은 “풍자는 세계를 웃음거리가 되는 것으로부터 구제해줍니다.”라는 명쾌한 말로 자신의 풍자관을 밝혔다. 그는 풍자를 통해 불의와 손잡은 권위의 알량한 알몸을 보여줌으로써, 세상을 보다 인간적인 곳으로 만들자고, 우리 삶의 기반이 더 이상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자고 말하고 있다. 아지즈 네신은 작품 속에서 광범위한 사회 계층의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다루면서 각 계층의 언어, 행동양식, 세계관, 감정, 사고를 날카롭게 포착해낸다. 그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부조리와 모순, 현학적인 자기만족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특히 성숙한 자기비판적인 시선으로 사회 시스템-정치구조, 생계수단, 남녀의 권력 구조, 도시 이주민 문제 등-에서부터 일반 대중들의 무기력하고 위선적인 삶까지 전방위적으로 문제 삼는다.
미래를 위해 어린이에게 희망을 심어준 실천적 지식인
아지즈 네신이 국민작가로 추앙받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작가 이전에 실천적인 지식인으로서 평생을 기득권 세력과 투쟁하는 데 바쳤기 때문이다. 그는 터키의 폭력적인 정권, 특히 언론인에 대한 정부의 검열과 탄압을 정면으로 비판한 작품들로, 내란선동이나 좌익활동 죄목으로 250번 이상 재판을 받았으며 유배와 수감생활을 반복하였다. 1980년 육군참모총장 케난 에브렌 주도하에 전격적인 무혈 쿠데타가 성공하자 앞장서서 군사정권에 대항한 사건이나, 1990년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를 터키어로 출간하려다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의 표적이 된 사건, 1993년 마드막 호텔 사건(터키의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 좌파적 성향을 지닌 아지즈 네신을 공격하기 위해 그가 참가한 축제 장소를 공격한 사건. 이로 인해 36명의 예술가가 죽고 24명이 중상을 입었다) 등은 그가 인간 존엄성의 회복과 보호에 얼마나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아지즈 네신은 어린이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끝없는 관심을 쏟으며 불우아동돕기에 발 벗고 나섰다. 1972년에는 고아들에게 교육 기회를 마련해주기 위해 ‘네신 재단’을 설립했으며, 1995년 사망 후 유언에 따라 작품에서 발생되는 모든 인세가 이 재단에 기부되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던 60여 전 터키의 자화상
이 책은 작가 아지즈 네신이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소도시 부르사로 유배 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네신이 유배형을 선고받은 상황은 다음과 같다.〈마르코파샤〉라는 풍자잡지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해오던 네신은 원조라는 미명하에 미국이 터키를 잠식하던 상황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팸플릿으로 제작하게 된다. 그가 쓴 글이 인쇄를 채 마치기도 전에 경찰이 인쇄소를 급습해 그를 체포한다. 그리고 네신이 유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경찰은 형법조문을 모조리 뒤져 죄목을 붙인다. 그리하여 찾아낸 것이 ‘출판을 통해 국가 이익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터키 형법 제161조항. 이제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이어진다. 출판 활동이 성립되려면 최소한 두 명 이상이 글을 읽어야 하는데 인쇄 중인 상태로 수거된 팸플릿을 읽은 사람이 없었던 것. 인쇄소 주인 및 글을 조판한 식자공, 그리고 인쇄 기술자가 소환된다. “당신 읽었지? 분명 읽었을 거야.”라는 말이 반복되는 심문, “증인이 읽지 않았다고 극구 부인하나……”로 시작되는 판결문, 비밀리에 진행된 재판, 그리고 기자들에 대한 협박(“이 재판에 대해 한 줄이라도 쓰면 당신들은 끝장이야!”) 과정을 거쳐 아지즈 네신은 10개월 징역형과 부르사 유배형을 선고받는다. 그가 쓴 팸플릿의 제목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였다.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았던 터키의 상황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당시 일당제인 공화인민당(CHP) 정권하에서 터키 이스탄불은 계엄령이 선포된 상태였고, 정부의 심기를 거스른 사람은 누구라도 유배지로 보내지던 상황이었다. 네신은 이를 ‘불행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절묘하게 비유하기도 하고, 한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터키 사회에 장티푸스나 흑사병처럼 일종의 ‘정치 병’이 널리 퍼져 있다고 꼬집기도 한다.
계엄을 선포한 정부는 그동안 별다른 재판도 없이, 죄목이 무엇인지 알려주지도 않은 채, 무고한 사람들을 좌익 ‘사회주의자’로 몰아 아나톨리아 고원 곳곳으로 유배를 보냈다.(...) 왜 유배당하는지 명확한 이유나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한번 목덜미를 잡힌 사람은 다시 벗어나지 못했다. 이름이 당첨되면 무조건 어이 없이 당해야 하는 불행 복권과 비슷했다. (본문 119-120쪽)
터키의 모든 사람이 자기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 나라를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이상한 착각 속에 빠져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불완전한 모든 것을 개선시킬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는 양의 품종을 개량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빈 들판에 소나무 씨앗을 심어 숲을 조성하는 것으로, 누군가는 거짓말쟁이의 혀와 도둑의 팔을 자르는 것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본문 140쪽)
유배지 부르사에서 만난 소심하고 비굴한 인간 군상
그렇게 해서 도착한 유배지 부르사의 생활은 첫날부터 만만치 않다. 네신을 넘겨받은 파출소의 소장들은 하나같이 그를 탁구공을 쳐내듯 다른 파출소로 보낸다. ‘책임’이란 불덩이를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관료주의 세계에 대한 묘사는 흡사 시트콤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부르사로 유배된 상황에는 무엇 때문이라고 딱히 갖다 붙일 이유가 없다. 물론 세상의 모든 일에는 때때로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불가사의한 경우가 있다. 비록 말이 안 되긴 하지만 그래도 꼭 설명을 해야 한다면 억지 춘향으로라도 우리는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관공서는 단지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던 거다. ‘저 골치 아픈 놈을 멀리 보낼 수만 있다면 지옥에 가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고나 할까? 일단 나에게 수갑을 채워 멀리 보내기만 하면 ‘골치 아픈 일’에서 벗어나는 셈이고, 그다음은 내가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상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본문 24쪽)
저자가 유배지 부르사에서 맞닥뜨린 인간 군상은 하나같이 우스꽝스럽고 비굴하며, 시대의 폭력 앞에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에 급급한 소시민들이다. ‘원칙’ 운운하면서 주인공의 돈을 가로채는 교활한 화가, 저자가 유배되어 왔다는 소식에 안면 몰수하고 사라지는 지인들, 유배된 이들을 사회주의자 취급하며 보드카를 먹이고 낄낄대는 여자, 유배된 친구를 돕는 남편과 이혼도 불사하겠다는 아내 등……. 그러나 이들을 보는 작가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으며,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고 같이 껴안고 가려 하는 의지가 배어 있다.
유배 생활을 하면서 네신은 자신을 유배지로 보낸 당시 정권이나 세태를 비난하거나 저주하기보다는,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며 용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글로써 타인과 소통하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_옮긴이의 말
절망스런 현실을 웃음으로 승화시킨 ‘터키의 로베르토 베니니’
유배지의 팍팍하고 고단한 일상을 들려주면서도 네신은 상황을 과장하거나 드라마틱한 장치를 만들지 않는다. 이것이 읽는 이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인물들이 겪은 현실의 아픔들에 더 진하게 공감하는 이유다. 배고픔에 허덕이던 저자가 어느 날 지급 보증서(우리나라의 송금환에 해당)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우체국으로 달려갔다가 맞닥뜨린 상황이라든지, 자신에게 온갖 비방을 퍼부은 신문기자가 자신을 찾아와 돈을 두고 간 뒤에 했던 행동들은 우리로 하여금 저자의 처연한 상황에 깊이 공감하게 만든다.
나는 창구에서 소포를 찾았다. 안에는 책이 세 권 들어 있었다. 고맙게도 친구가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살면서 그날처럼 책이 저주스러운 순간도 없었다. 책을 한 장 한 장 찢어 삼켜버리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내게 쓸모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본문 44-45쪽)
지금 이 글이 나의 회고록이 아니라 소설이었다면, 주인공은 청년이 두고 간 돈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바로 일어나서 청년이 두고 간 돈이 얼마인지 세어보았다. 십 리라. 그 돈으로 내가 맨 먼저 뭘 했냐고? 냉기 어린 방에 불을 피웠다. (본문 52쪽)
그러면서도 네신은 유배지 하면 흔히 떠올리는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고독하고 무거운 공간이 아닌 사람들과 부대끼며 울고 웃는 다소 떠들썩한 공간으로 바꾸어놓고 있다. 비굴한 인간 군상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시선, 그리고 유쾌하고 위트 있는 풍자로 화자의 입담에 함께 울고 웃게 만드는 재능은 이탈리아 감독 로베르토 베니니를 연상시킨다. 베니니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사랑하는 아들의 동심을 지켜주려고 코믹한 상황을 연출했고, 그런 그의 시도는 현실과 대비되어 더욱 슬프게 느껴졌다. 아지즈 네신 역시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에서 비굴하고 어리석은 인간 군상을 따뜻한 페이소스로 감싼다. 네신이 때로는 자신을 희화화하면서까지 밀고 간 진솔한 자기 성찰로 다다르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위악적으로만 보이는 인간의 조건과 현실 속에서도 존재에 대한 연민과 진심을 놓지 않는다면 그 상황 너머에 있는 인간의 진심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아니었을까.
어느 날 친구가 데려가준 온천에서 물 한번 끼얹어보지 못한 채 빨래만 하다 쓰러지는 저자의 우스꽝스런 모습, 허기에 지쳐 유배 생활 내내 자신과 함께하던 담요를 팔러 돌아다니다가 그냥 돌아오는 모습 등을 읽다 보면, “네신이 들려주는 경험담을 읽으며 연거푸 폭소를 터트리다가도, 이내 입 안에서 서걱거리는 껄끄러운 모래알들처럼 양심의 체에 걸러지는 서글픈 슬픔의 사금들을 발견”하게 된다. 슬프고 고단한 인생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라는 간결한 메시지야말로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사람들이 젖은 빨래를 가지고 왔다. 부르사에서 딱 한 번 온천에 가보았다. 하지만 탕에 발도 못 담그고, 사자 입에서 나오는 물 한번 끼얹어보지 못했다. 목욕은커녕 빨래도 다 빨지 못해 젖은 채로 집으로 가지고 왔다. 뢴트겐선, 유황, 비타민 등을 중얼거리다가 거의 죽을 뻔했던 것이다. 그래도 손수건 다섯 장은 새하얗게 빨았으니 다행이다.
손수건이라고 우습게 볼 게 아니다. 유배지에서는 손수건이 필수품이기 때문이다. 눈물도 닦고, 콧물도 닦을 수 있으니까. (본문 201쪽)
나는 서둘러 내 방으로 올라가 젖은 담요를 침대 위에 펼쳐놓았다. 너무나 기뻤다. 벼룩시장을 찾지 못해 담요를 팔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팔았다면, 내게 있던 무엇인가가 떨어져나갔을 것이었다. 그것은 담요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숨겨진 신념이나 의지, 혹은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었다. 나는 하염없이 기뻤다. (본문 80쪽)
그러나 60여 년 전 터키의 소도시에 유배된 한 지식인의 기록은 따뜻한 위로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바꾸거나 달라지게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것, 그리하여 희망이 거세된 것만 같은 절망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현실을 살아내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아지즈 네신이 유배 생활에서 길어 올린 가장 큰 교훈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질문을 마음에 담고 계속 답을 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정자들의 실정(失政)이나 부조리로 가득 찬 현실은 왜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걸까요? 희망을 꿈꿀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도 자신의 자리에서 행동하고 실천할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너무 이상적인 감상일까요? 저는 이 책을 통해 독자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답을 구해나가는 계기를 갖게 되길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_옮긴이의 말 접기
평점
분포

9.0
작가의 유배 생활을 바탕으로 쓰인 자전적 소설. 배고프고 외로운 생활을 읽을 수 있도록 풀어낸다는 것이 존경스러웠다. 작가의 다른 소설도 곧 읽어야겠다. 웃자, 즐거워지도록.

정신 2014-06-13 공감 (0) 댓글 (0)
웃음과 슬픔.. 그리고 지속되는 삶을 견뎌내는 인생에 대해 우습고 쓸쓸하게 그렸다..

풀다리 2009-09-17 공감 (0) 댓글 (0)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책장을 덮으며 오랜만에 리뷰를 쓰고 싶어 컴 앞에 앉았더니,
이런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띈다.
<승객 용변 손수 치워준 '천사표 버스 기사'>
그리고 그 버스 기사님을 찬양하는 댓글들이 주르륵 달렸다.
심신 미약 상태로 승객이 실수를 한 상황이라면 운행중인 버스에서 그 용변을 치우는 건
버스 기사의 몫 아닌가?
그 당연한 일이 포털 뉴스 기사 중 '시사' 부문 메인 으로 뜰 정도면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지즈 네신의 유배지 회고록(거창하게 표현해서)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에는
오랜만의 외출에서 실수를 한 그 노인이나, 용변을 치운 기사님, 그 광경을 지켜본 승객들,
불친절한 자기 동네 버스 기사와 비교하며 그 기사님을 칭송하는 댓글을 다는 네티즌들,
버스를 모는 기사라면 당연한 일이지 그게 뭐 그렇게 대수로운 일입니까? 하며
실력 이상의 딴지를 거는 나 같은 사람들이 나온다.
'용산참사 농성자들 징역 5~8년 구형'이라는 기사도 눈에 띄었다.
"폭력으로 무언가를 쟁취할 수 있고 폭력에 상응하는 처벌이 없다면 철거민 등 사회적 약자들이
모두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나서게 될 것"이라며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서라도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것이 검사들의 논지.
분기탱천하여, '적반하장도 유분수가 아닙니까?'라고 댓글을 달려고 했는데
독수리 타법 때문인지 이상하게 손이 떨려 실패했다.
- 우리 역사에는 유배지나 감옥에서 말로 다하지 못할 고초를 겪은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들과 비교하면 제가 유배지에서 겪은 일들은
관광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서문)
50여 년 전, 터키의 서슬 퍼런 계엄령 하에서 권력의 압제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유일한 무기인 글로써 신념을 지켜 나가다가 감옥에 갇히고
혹독한 유배생활을 경험한 아지즈 네신의 유배 일기 중
이 유머러스하고 파라독스한 서문이 나의 발목을 잡는다.
'관광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가볍디가볍게 표현한
그의 유배지에서의 기록은 요 며칠 나를 사정없이 웃기고 울렸는데,
"1년 전에만 만났더라도 부모에게 물려받아 탕진한 거액의 유산 중 몇 분의 1을
당신에게 주었을 텐데..."라는 말로 춥고 배고픈 유배지의 작가를 현혹한 사기꾼들에게
마지막 빵 한 조각을 기꺼이 내민 아지즈 네신의 흉내라도 내봐야 하나 어째야 하나......
나 또한, "내일모레 홍콩에서 배만 들어오면..." 이 비슷한 말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현혹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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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9-10-21 공감(14)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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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

터키(이젠 튀르키예라고 불러야 하나?) 풍자 문학의 거장 아지즈 네신이 터키 북서부의 도시 부르사에 유배당했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수필. 그가 유배된 까닭은 잡지를 창간하여 반정부적인 날카로운 비평을 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대로 된 증거나 증인도 없이 서슬퍼런 군부의 폭압적인 재판을 거쳐 징역을 살고, 출소 후엔 연고지도 아닌 부르사로 유배되어 버린다. 유배라고 하면 살 집과 최소한의 음식, 생활비 정도는 지급되지 않을까 생각하겠지만 터키는 달랐다. 부르사에 도착한 아지즈 네신은 매일 방값을 내는 호텔을 잡아야 했고, 돈... + 더보기
지하철 독서가 2022-10-26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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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즈 네신의 '유배 일기'
터키의 정치 역시 어지럽기 짝이 없는 모양이었다.
필화 사건에 얽혀 '유배형'을 받은 아지즈 네신.
그는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을 겪으면서 느낀 것들을 이 작은 책에 적고 있는데,
그가 뛰어난 작가인 이유는 그 고난의 시절에서 결코 비통한 슬픔이 우러나지 않고,
가벼운 우스개처럼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고 있는 점에 있다.
H2O도 모르고 HOH도 몰라서 호흐란 별명의 사관생도 시절의 친구를 어려운 시절에 만났으나, 그는 아는 체도 않는다.
나중에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다시 만난 그가 부정부패에 불평을 털어놓을 때,
아지즈 네신은 묻는다. "댁은 뉘시오?"
유배온 그에게 "내가 책을 많이 안 읽은 게 다행이야. 안 그랬다면 나도 화를 입었을 거야."하고 자위하는 경찰도 한심한 시절을 잘 보여준다.
모든 사람에게 바위처럼 단단한 저항 정신을 기대한다는 것은 크나큰 욕심이며
어쩌면 부당한 처분일지도 모른다.(53)
어려운 시대를 겪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인간에 대하 욕심을 줄이게 되는 모양이다.
정해진 시각이면 국가가 연주되는 웃지 못할 상황도 한국 상황과 비슷해서 어쩌면 독재자들이 하는 짓은 모두 비슷한지...
"당시 터키 국민들은 모두 극심한 두려움에 빠져있었다. 남에게 비난받는 것을 두려워했고, 불리한 상황이 닥치면 다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자신만 빠져나가려고 했다."(96)
너무도 춥고 배고픈 시절이 이어지는 가운데,
주변에서는 유배자의 몇 푼을 울궈먹으려는 이들로 가득하다.
치킨을 나눠먹지 않으려고 이웃 청년을 심부름 시키는 대목처럼 웃기는 이야기들 속에 담긴 시대는 참으로 쓰라리다.
어떤 생각이 국가 이익에 어긋나거나
국가 이익에 들어맞는다는 것은,
그 생각이 발표된 당시에는 모든 사람이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떤 생각이 사회에 이익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모든 사람들이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 한다.
당신들은 미국의 원조가 터키에 이익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원조라는 핑계로 우리 나라를 착취할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생각이 맞는지는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다.
아직 그 생각의 옳고 그름이 확연히 밝혀질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형을 선고받는 것은 부당하다.(218)
이렇게 독재정권과 말도 안되는 투쟁을 벌였으나, 결과는 당연히 독재자의 승리다.
당시에 그가 쓴 팸플릿의 제목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였단다.
지금의 한국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당시 그는 교도소와 유배지로 갔다.
아지즈 네신의 풍자 문학을 읽는 일은 유쾌한 경험이지만,
정말 형제처럼 꼭 닮은 정치 지형도를 가진 나라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참 씁쓸한 경험임을 부정할 수 없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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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1-05-0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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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즈 네신의 유배
아지즈 네신이라는 인물을 알게 된 인연은 [당나귀는 당나귀답게]라는 책을 통해서이다. 머리가 무지 큰 당나귀 두 마리가 우스꽝스러우나 귀여운 모습으로 한 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심상찮은 제목이, 그리고 얇은 두께가 내 마음을 끌었다. 읽어보니까 단순한 우화 속에서 진리를 전달해주는 게 참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풍자하거나 제 일만 잘하면 세상이 훨씬 살기 좋겠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나 정말 새로우면서도 감격적인 기쁨을 알게 해주었다. 그리고 곰곰히 훑어본 작가 소개란을 보니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던, 에이~ 일본만 이렇게 좋은 글을 쓰나 하는 질투심과 함께, 작가가 사실은 터키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터키, 그 나라는 내게 막연히 2002 한일 월드컵 때 알게 된 우리에게 우호적인 나라라고만 알고 있었다. 우리랑 많이 비슷하다는 터키의 이야기를 듣고 응, 그으~래? 했었던 게 다다. 그런데 이렇게 터키 작가를 처음 알게 되니 무지 생소하고 행복했다. 터키인들의 감성과 우리의 감성이 비슷하다고 하더니만 정말 그의 글은 내 심금을 울렸다. 심봤다아~~
그의 본명은 메흐멧 누스렛으로, 1915년 터기의 이스탄불에서 태어났고 터키 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풍자 문학의 거장이자 터키인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작가라고 한다. 계엄령 하에서도 권력의 압제에 굴하지 않고 글로써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간 그는, 그처럼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감옥에 갇히게 된 우리나라의 신영복 선생을 떠올리게 했다. 그의 책에 열광하다가 잔뜩 사두고는 꼬꼼 시들해진 터라 자세히는 언급하지 못하지만, 신영복 선생의 글에서 느낄 수 있는 여유, 따스함, 의지, 사랑 등이 아지즈 네신의 글에서도 느껴진 듯 했다. 내가 확신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책을 읽어본 것이 겨우 두 번째이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글에서 언급한 [제이넵의 비밀편지], [생사불명 야샤르],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이란 책도 한 번씩 펴들어봐야겠다. 그럼 아마도 새로운 좋은 작가를 알게 된 것이 즐겁고 행복할 것이다. 책 뒷날개에 소개된 [개가 남긴 한 마디]는 풍자우화집이라 내 입맛에 딱 맞을 것 같아 가장 우선적으로 봐야지~~~ 요즘 도서관을 다니고 있는데, 요즘 내가 찾는 책은 하나도 없어서 너무 실망이다. 이 책도 없으면 바로 신청해버리겠어!!
우리의 신영복 선생처럼 아지즈 네신도 계엄령 하에서 2쪽짜리 팸플릿을 인쇄하다가 갑자기 잡혀가 수감되고 유배를 당하였다. 그 때가 제2차 세계대전 말, 트루먼 독트린으로 터키를 원조해준다는 미명 하에 착취를 하는 미국은 이 나라에 들어오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그 팸플릿이 문제가 되었던 게 아니라 그가 평소에 <마르코파샤>라는 신문에 싣는 글 때문에 윗사람들에겐 이미 오래 전부터 눈엣가시였던 거였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 어떤 예비역 장교가 와서 은밀히 정보를 주고 갔는데 미처 그 중요성을 알지 못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 때 다른 나라로 망명이라도 했다면 그런 일은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하긴 유배지에서 4개월 동안 지내는 여비도 없어 매일 굶다시피하고 살았는데, 그런 그에게 다른 나라로 망명할 돈은 또 어디 있었겠어~ 그리고 그가 그렇게 조국을 떠났다면 그의 글은 더 이상 살아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나 터키인들이 그를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래도 사람은 살고는 봐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평범한 나로서는 외부의 압력에도 꿋꿋이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 사람들의 정신구조가 신기하지만 아마 그래서 위인과 범인이 나뉘는 게 아닐까. 난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위인이 될 소질은 없으니... 불행하게도~
중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강원룡 목사의 [30년 전의 그 날]이란 수필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학생 운동과 농촌 운동을 하다가 감옥 생활을 체험한 그는, 이후에 어떠한 어려움을 겪더라도 지옥 같은 감옥 생활을 생각하며 이겨냈다고 했다. 감옥 안에서의 많은 회유와 협박 속에서 자기가 믿는 신을 버려서라도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추방당한 신의 모습이 보이면서 그는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다.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그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다짐하며 이렇게 기도했다.
그 기도문이 어찌나 가슴 절절한지 모른다.
"제가 이 감방에서 죽게 된다면 육체는 죽어도 영혼만은 더럽히지 않게 해 주시고,
만일 살아 남게 된다면 육체는 감방에서 죽어 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제 심신을 당신의 제단에 오롯이 바친 제물로서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지즈 네신이 어떠한 신에게 자신을 내어놓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도 이 목사처럼 자신의 육신을 도모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것은 같지 않을까. 이렇게 자신의 신념을 위해 고통을 참는 그런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독자로서 안타까우니까 그래도 좀 굽히지 하는 맘도 없진 않지만 말이다. 책의 내용은 유배 생활이 전부다. 유배를 왔다는 게 알려지면서 어디를 가도 그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고, 옛 친구조차 그를 반기지 않았다. 유배 생활을 하면서 지원금도 안 나와 굶기를 밥 먹듯 하고 혹독한 겨울 날씨에도 난로를 때우지 못했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를 이렇게 비참하게 했던 옛 친구, 자신을 모른 척했던 주민들, 자신을 조롱했던 학생들, 부당하게 유배를 보낸 정부까지도 어느 하나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그 때는 그런 상황이었을 뿐이라고, 다들 어쩔 수 없었던 것 뿐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자신을 끝까지 외면했던 옛친구도 아주 나중에는 서로 친구로 지내기까지 한다. 이 어찌,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서문에서 그가 말한 단 세 마디가 내 가슴을 울린다.
생각하고, 사랑하고, 웃는 것. 삶의 진실이란 이것이 전부가 아닐까요?
인간에게 있어 이것 이외는 모두 거짓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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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매니아 2009-03-1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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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의 고난을 유머로 승화시키다
터키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아지즈 네신과 나의 첫 만남은 지난여름이었다. 같이 일하는 사무실 동료에게 책선물을 해주겠다고 했을 때, 그가 원한 책이 바로 아지즈 네신의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이란 책이었다. 물론 난 아직 읽어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에 아지즈 네신의 다른 작품인 <행방불명 야샤르>를 구입했다. 하지만 정작 첫 대면은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로 낙찰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어언 60년 전, 트루먼 독트린으로 미국의 우산 안으로 들어가려던 작가의 조국 터키의 상황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아지즈 네신은 10개월간의 실형과 4개월 10일간의 유배형을 선고받는다. 물론 요 부분은 책의 본문에서는 소개가 되지 않고 맨 끝의 작가 후기를 통해 소개가 된다. 궁금했던 점을 풀어줘서 아주 고마웠다.
이 책은 바로 아지즈 네신이 유배지 부르사에서 겨울을 나던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예전 오스만 터키 시절만 하더라도, 유배형을 사는 이들에게 허드렛일이라도 하게 해줘서 적어도 먹을거리와 잠자리 걱정은 하지 않았다는데 현대 터키에서 유배형을 선고 받은 이들은 그야말로 불가촉천민 같은 존재였다. 아지즈 네신의 친구들도, 동창들도 모두 그를 외면한다. 정치범인 그와 접촉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에게 돌아올 불이익 때문인 것이다. 아지즈 네신은 이미 자신을 유배형에 처한 이들을 용서했지만, 자신을 외면했던 이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날리고 있었다.
작가로서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인 화자이자 주인공인 아지즈 네신은 무엇보다 굶주림에 시달린다. 당장의 끼니를 해결할 수가 없어, 고민하는 그의 모습은 무장해제된 지식인의 무능력함으로 치환되고 있었다. 문학을 하는 것도 좋지만, 실질적인 기술을 익히는 것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작가의 지론이 가슴에 와 닿았다. 한 잔의 짜이와 빵조각을 위해 자신과 생사고락을 같이 한 담요를 팔아 끼니를 잇기 위해 부르사의 뒷골목을 전전하는 그의 뒷모습이 너무나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지식인으로써 지인이 보내준 책들을 팔아 역시 양식을 마련해 보려는 그의 망설임 역시 충분히 이해가 갔다.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작가의 우국충정만큼이나 실질적인 생존을 위한 자신과의 싸움을 나름대로의 해학으로 버무려내는 아지즈 네신의 내공이 놀라웠다. 어떻게 보면 타인에게 들어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비참했던 과거를 유머로 승화시켜 결국엔 작품으로까지 발표한 그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가족에 대한 사랑 역시 남 못지않다. 결국 적발되면 추가형량을 선고 받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서, 유배지 부르사를 남몰래 이탈해서 가족이 있는 이스탄불을 몰래 찾는다. 한편 부르사에서 알게 된 문학청년의 몹쓸 습관인 관음증에 대한 작가의 기술이 흥미롭다. 예의 관음증으로 대변되는 훔쳐보기는 그 개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당시 계엄 하의 서슬 퍼런 군부독재 하에서 많은 이들이 즐기던 국민스포츠였다. 지휘고하 노소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훔쳐보기에 몰입해 있었다. 작가가 슬쩍 언급했듯이 이 훔쳐보기가 다른 사람들의 일이 끼어들기 좋아하고, 충고하기 좋아하는 터키 사람들의 국민성에 대한 은근한 풍자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는 확실히 유쾌하고 재밌는 책이다. 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 놓고 보면, 희망마저 거세된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작가의 비참했던 과거를 직시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계기로 해서, 작가의 다른 책들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싶어졌다.
사족으로 터키어를 전공한 이난아 씨의 번역으로 아지즈 네신의 작품과 만나게 된 행운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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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09-03-06 공감(0) 댓글(0)
2025/12/01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 | 아지즈 네신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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