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도나 해러웨이는 위기에 처한 생명/비생명들과 친척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자식 대신 친척을 만들자고, 포유류 친척으로서 우리의 할 일을 하자고 호소한다.
아침 여섯 시에 모락산 산책에 나서는데 어둑어둑해져서 폰 전등을 켜고 산길을 오른다. 등산용 전등을 간혹 이마에 부착하고 마주 오는 분도 있다. 눈부셔 그분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오늘은 좀 환해진 일곱 시에 나섰다. 산 초입에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나무 위에 보기에 위험하게, 균형 잡고 앉아 있다. 나와 고양이 사이에 작은 골이 있어 다가갈 수는 없었지만 가까이 갔는데도 미동도 없다. 저기 저 통나무 위에서 밤을 세웠을까. 보통 고양이보다 몸집이 커 보인다. 몸털이 풍선처럼 밖으로 부풀려진 모습이다. 눈을 마주친 것 같은데도 움직임이 없다. 고양이도 두 눈을 바로 뜨고 나를 보는 것만 같다. 한 10분 정도 가만히 지켜보는데 전혀 움직임이 없고 살짝 귀의 움직임만을 느낄 수 있었다.
데리다는 욕실에서 작은 암고양이가 벌거벗은 자신뿐 아니라 벌거벗은 철학을 보았다고 말하는데, 헤러웨이가 보기에 데리다는 동물이 보았을 때 데리다는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동물이 보았을 때, 철학자는 응답했는가?”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보니 고양이는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초등 6년까지 산 농촌 우리 집 풍경은 아직도 생생하다. 싸리문을 들어서면 마당이 있고 정면에 부엌과 세 칸짜리 방이 있는 집이 있고 오른편에 광, 그리고 안채를 마주하여 왼쪽으로 사랑채(사랑방 겸 허드레 집)가 있다. 그 옆으로 외양간이 있고 그 옆으로 닭장이 있었다. 그리고 광을 돌아가면 돼지우리가 있었고 그 옆에 뒷간이 있고 그 뒤로 잿간이 있다. 토끼장도 어디 쯤에 있었으나 개나 고양이는 키우지 않았다. 그러니까 소, 돼지, 닭, 토끼는 늘 우리 집 안에 살았던 가족이었다. 우리와 그들의 관계는 친족관계가 아니라 집 울타리 안에 같이 생활하는 가축(家畜)인 것이다.
닭과 노는 것은 재미 있다. 새벽에 울고, 모이를 주면 다들 모이고, 저녁이 되면 닭들을 불러 닭장에 들어가게 하고, 산란을 하고 나면 달걀을 꺼내기도 하고, 둥지에 알을 품어 병아리를 까기도 한다. 어미 닭을 졸졸졸 따라다니며 먹이를 쪼고 보호를 받는데, 어느 정도 커서 안타깝게도 밤새 쥐의 사냥감이 되기도 했다.
소는 가장 큰 대접을 받는다. 낮에는 풀이 많은 재너머 공동묘지에서 풀을 뜨ㄷ다가 저녁에 소를 몰아 집으로 데려오는 것은 내 임무이다. 겨울이 되면 큰 가마솥에 쇠죽을 쑤어 모락모락 김이 나는 쇠죽을 소에게 준다. 엄니는 이른 아침에 제일 먼저 소에게 쇠죽을 주고 그 다음 식구들을 위한 아침 밥상을 차렸다.
아버지는 돼지가 새끼를 낳게 되면 밤새 새끼를 받는다. 10마리까지 낳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면 우리 집이 큰 부자가 된 느낌이다. 자라면서 쓰레기통이 따로 없었던 것 같다. 음식 쓰레기도 있을 수가 없다. 남는 것은 모두 가축에게 간다. 뒷간의 똥오줌도 잿간의 재와 섞여 거름으로 밭에 뿌려진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돌고 돌았던 순환 생활이었다.
초등 시절 아들 녀석이 새끼 토끼를 데려왔다. 처음에는 거실에 풀어놨다가 똥오줌, 특히 오줌 냄새 때문에, 무엇보다 책장 아래층에 있는 책들을 갉아먹고 심지어 전기 선도 갉아먹는 바람에 발코니에서 키울 수밖에 없었다. 하교 후 아들이 발코니 문을 열면 토끼가 몸을 한 바퀴 휙 돌아 춤을 추며 아들을 반긴다. 내가 문을 열면 그러지 않는다. 7년 6개월을 살았다. 아내가 어느 날 유기견을 데려왔다. 17년을 거실에서 키웠다. 치매, 백내장, 사지 불편,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옆에 있었다. 슬픔에 아내는 더 이상 강아지를 키우지 않겠다 한다.
가축을 키우는 농촌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농사의 방식도 모두 기계화되고 산업화 되었고, 가축과 함께 놀고 생활했던 생활 풍경도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해러웨이를 통해 동물의 친족 만들기를 대단한 이론인 것처럼 읽고 있다. 어린 시절 생각이 나면서 참 낯설다, 어색하고 인위적이다. 그리고 솔직히 책을 통해 읽는 이론들이 이해는 되는데 와닿지 않는다. 친족을 만든다고 그때 가축들을 정성 다해 돌본 것만큼 가까워질 수 있을까?
그러나 위기의 시대에 과거의 생활 습관, 비인간에 대한 관계적이고 돌보는 태도 등도 사라졌다. 인류세 철학, 신유물론의 철학이 과연 인간, 생물, 지구의 위기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근대의 빛과 어둠이라는 ‘이중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문명의 전환을 학습, 연습하고 있다.
도나 해러웨이는 위기에 처한 생명/비생명들과 친척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자식 대신 친척을 만들자고, 포유류 친척으로서 우리의 할 일을 하자고 호소한다.
아침 여섯 시에 모락산 산책에 나서는데 어둑어둑해져서 폰 전등을 켜고 산길을 오른다. 등산용 전등을 간혹 이마에 부착하고 마주 오는 분도 있다. 눈부셔 그분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오늘은 좀 환해진 일곱 시에 나섰다. 산 초입에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나무 위에 보기에 위험하게, 균형 잡고 앉아 있다. 나와 고양이 사이에 작은 골이 있어 다가갈 수는 없었지만 가까이 갔는데도 미동도 없다. 저기 저 통나무 위에서 밤을 세웠을까. 보통 고양이보다 몸집이 커 보인다. 몸털이 풍선처럼 밖으로 부풀려진 모습이다. 눈을 마주친 것 같은데도 움직임이 없다. 고양이도 두 눈을 바로 뜨고 나를 보는 것만 같다. 한 10분 정도 가만히 지켜보는데 전혀 움직임이 없고 살짝 귀의 움직임만을 느낄 수 있었다.
데리다는 욕실에서 작은 암고양이가 벌거벗은 자신뿐 아니라 벌거벗은 철학을 보았다고 말하는데, 헤러웨이가 보기에 데리다는 동물이 보았을 때 데리다는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동물이 보았을 때, 철학자는 응답했는가?”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보니 고양이는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초등 6년까지 산 농촌 우리 집 풍경은 아직도 생생하다. 싸리문을 들어서면 마당이 있고 정면에 부엌과 세 칸짜리 방이 있는 집이 있고 오른편에 광, 그리고 안채를 마주하여 왼쪽으로 사랑채(사랑방 겸 허드레 집)가 있다. 그 옆으로 외양간이 있고 그 옆으로 닭장이 있었다. 그리고 광을 돌아가면 돼지우리가 있었고 그 옆에 뒷간이 있고 그 뒤로 잿간이 있다. 토끼장도 어디 쯤에 있었으나 개나 고양이는 키우지 않았다. 그러니까 소, 돼지, 닭, 토끼는 늘 우리 집 안에 살았던 가족이었다. 우리와 그들의 관계는 친족관계가 아니라 집 울타리 안에 같이 생활하는 가축(家畜)인 것이다.
닭과 노는 것은 재미 있다. 새벽에 울고, 모이를 주면 다들 모이고, 저녁이 되면 닭들을 불러 닭장에 들어가게 하고, 산란을 하고 나면 달걀을 꺼내기도 하고, 둥지에 알을 품어 병아리를 까기도 한다. 어미 닭을 졸졸졸 따라다니며 먹이를 쪼고 보호를 받는데, 어느 정도 커서 안타깝게도 밤새 쥐의 사냥감이 되기도 했다.
소는 가장 큰 대접을 받는다. 낮에는 풀이 많은 재너머 공동묘지에서 풀을 뜨ㄷ다가 저녁에 소를 몰아 집으로 데려오는 것은 내 임무이다. 겨울이 되면 큰 가마솥에 쇠죽을 쑤어 모락모락 김이 나는 쇠죽을 소에게 준다. 엄니는 이른 아침에 제일 먼저 소에게 쇠죽을 주고 그 다음 식구들을 위한 아침 밥상을 차렸다.
아버지는 돼지가 새끼를 낳게 되면 밤새 새끼를 받는다. 10마리까지 낳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면 우리 집이 큰 부자가 된 느낌이다. 자라면서 쓰레기통이 따로 없었던 것 같다. 음식 쓰레기도 있을 수가 없다. 남는 것은 모두 가축에게 간다. 뒷간의 똥오줌도 잿간의 재와 섞여 거름으로 밭에 뿌려진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돌고 돌았던 순환 생활이었다.
초등 시절 아들 녀석이 새끼 토끼를 데려왔다. 처음에는 거실에 풀어놨다가 똥오줌, 특히 오줌 냄새 때문에, 무엇보다 책장 아래층에 있는 책들을 갉아먹고 심지어 전기 선도 갉아먹는 바람에 발코니에서 키울 수밖에 없었다. 하교 후 아들이 발코니 문을 열면 토끼가 몸을 한 바퀴 휙 돌아 춤을 추며 아들을 반긴다. 내가 문을 열면 그러지 않는다. 7년 6개월을 살았다. 아내가 어느 날 유기견을 데려왔다. 17년을 거실에서 키웠다. 치매, 백내장, 사지 불편,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옆에 있었다. 슬픔에 아내는 더 이상 강아지를 키우지 않겠다 한다.
가축을 키우는 농촌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농사의 방식도 모두 기계화되고 산업화 되었고, 가축과 함께 놀고 생활했던 생활 풍경도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해러웨이를 통해 동물의 친족 만들기를 대단한 이론인 것처럼 읽고 있다. 어린 시절 생각이 나면서 참 낯설다, 어색하고 인위적이다. 그리고 솔직히 책을 통해 읽는 이론들이 이해는 되는데 와닿지 않는다. 친족을 만든다고 그때 가축들을 정성 다해 돌본 것만큼 가까워질 수 있을까?
그러나 위기의 시대에 과거의 생활 습관, 비인간에 대한 관계적이고 돌보는 태도 등도 사라졌다. 인류세 철학, 신유물론의 철학이 과연 인간, 생물, 지구의 위기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근대의 빛과 어둠이라는 ‘이중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문명의 전환을 학습, 연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