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1

“명상, 현대문명의 위기 치유할 힘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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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현대문명의 위기 치유할 힘 갖고 있다”

박석 교수, 더불어숲학교서 ‘사회의 명상화’ 강의

박 석 상명대 교수  |  기사입력 2004.05.24


봄이 절정에 오른 강원도 내린천 미산계곡 개인산방(開仁山房). 지난 주말(22-23일) 여기서 열린 더불어숲학교에선 상명대 박석 교수가 ‘사회의 명상화, 명상의 사회화’를 강의했다. 이날 박 교수는 명상계의 대가답게 명상을 위기를 맞고 있는 현대문명의 치유책으로 내놓아 관심을 끌었다.

박 교수는 현대문명의 위기가 “물질적 능력과 정신적 능력의 괴리현상”에서 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인류의 과학 기술력은 급성장했지만 정신적 능력은 더디게 성장해 마치 어린 아이에게 기관총을 맡긴 것과 같은 위험한 형국이라는 것. 박 교수는 역사적으로 정신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는 종교가 기여해왔지만 현재 그런 희망을 접고 있다.
 
박 교수는 여기서 명상을 주목하고 있는데 “명상은 종교와 같이 정신적 능력을 제고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이면서 현재의 종교가 지니고 있는 기복적인 신앙이나 도그마화된 교리체계를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석 교수의 이날 강의 요지를 소개한다. 편집자 
 
***사회의 명상화** 
 
근대 이후 서구문명은 인류사를 주도하였다. 그들의 과학기술은 인류의 생산력을 크게 증대시켜주었으며 이것은 인류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와 아울러 그들이 피를 흘려 이룩한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는 인류의 오랜 숙제였던 자유와 평등에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근대 서구문명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 서구문명은 이처럼 화려한 면이 있지만 아울러 부정적인 문제도 많이 남겨놓았다.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엄청난 빈부의 격차, 제국주의의 확장 과정에서 벌어졌던 두 차례의 세계 전쟁, 그리고 그 여파로 인해 생긴 제3세계의 종족 내지는 민족 갈등, 산업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극도의 물신주의, 도덕성 상실, 인간 소외 등의 문제들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에는 이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데 환경파괴, 자원고갈, 핵전쟁의 위협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들은 인류의 사활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심각한 숙제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 끔찍한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겪으면서 유럽의 일부 선구적 지식인들은 그들이 철저하게 신뢰하였던 근대적 합리성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정치운동으로 시작하였다가 점차 기성세대에 기성문화에 대한 반항과 비판으로 나아갔던 68혁명은 20년대에 이미 싹트기 시작한 근대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의 움직임을 대중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를 하였다. 그리하여 탈근대론, 포스트모더니즘 등에 대한 담론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고 나아가 새로운 문명에 대한 모색도 가속화되기 시작하였다. 신과학운동, 환경운동, 영성운동, 공동체운동 등의 새로운 양상의 운동도 모두 여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온 지금도 근대 서구문명이 가져온 폐단들은 대부분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으며 특히 환경문제와 자원문제는 그 심각성이 날로 더해가고 있다. 지금은 인류문명의 커다란 위기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위기에 대한 진단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강연자는 물질적 능력과 정신적 능력의 괴리현상을 가장 주된 원인으로 보고 싶다. 여기서 물질적 능력이란 자연을 보다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조작하여 물질적 생산력을 높이는 능력을 말한다. 과학 기술력이 바로 이에 해당하며 나아가 생산 시스템이나 사회 구조를 효율적으로 관리 유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부차적인 지식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는 물질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적인 능력이란 정신적 가치, 예컨대 삶의 의미, 생명의 존엄성, 존재의 의미 등을 자각할 수 있고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인류의 과학 기술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급성장하였지만 우리의 정신적 능력은 너무나 더디게 성장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물질적인 능력과 정신적인 능력의 괴리가 심각하고 위험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에게 기관총을 맡긴 것과 같은 형국이다. 지금의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인류의 정신적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현재까지 가장 대중적인 차원에서 인류의 정신적인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많은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은 종교이다. 그러나 현재의 종교는 두 가지의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하나는 아직도 기복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종교 간의 갈등 문제이다.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할 때 종교는 인류의 정신적 능력을 제고시켜주는 견인차 역할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심각한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전자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인들의 의식수준이 향상되어야 하고 후자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 종교가 지니고 있는 집단주관적 착각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집단주관이란 집단이 공유하는 주관으로서 그 집단의 범위가 클 때는 절대객관으로 오해되기 쉬운 경향이 있다. 집단주관적 진리를 절대객관적 진리로 착각을 할 때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강연자는 명상을 들고 싶다. 왜냐하면 명상은 종교와 같이 정신적 능력을 제고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이면서 현재의 종교가 지니고 있는 기복적인 신앙이나 도그마화된 교리체계를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흔히 명상이라고 하면 힌두교의 요가나 불교의 참선 등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명상이라는 용어는 인도 요가의 8단계 가운데 7단계로서 의식이 어느 한 대상에 전념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Dhyana’를 번역한 영어의 ‘Meditation’을 일본 사람들이 다시 번역한 말이다. 선종(禪宗)의 참선(參禪)의 ‘禪’ 또한 요가의 ‘Dhyana’를 번역한 말임을 생각할 때 명상은 인도의 종교문화와 직접적인 상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은 힌두교나 불교의 전유물은 아니다. 세계의 대부분의 고등 종교에는 모두 인간의 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수행법이 있는데 이들 또한 명상이라고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에는 고대의 선지자들과 랍비들이 자신들의 의식세계를 깊게 하여 야훼와 교통하기 위하여 까발라라고 하는 명상을 하였으며, 기독교의 수사들 또한 묵상기도와 아울러 보다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현전을 체험하기 위한 관상 기도법이라는 명상법을 수행하였으며, 이슬람교에도 많은 수피들이 알라를 직접적으로 체험하기 위한 명상법들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도교에서도 단순한 건강의 차원을 넘어 불로장생을 얻기 위하여 호흡과 아울러 고도의 정신집중법을 이용한 명상법이 있으며, 사회적인 윤리를 중시하는 유교에서도 외물의 유혹에서 벗어나 본래적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한 명상법이 있었다. 
 
원래 명상은 해당 종교의 핵심적인 세계관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고급스러운 심신수련법이기 때문에 일반 신도보다는 사제계급이나 전문적인 수도자들 사이에서만 비밀리에 전수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명상법들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다. 간혹 책으로 남겨지는 경우에도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적인 표현으로 기록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일반인들의 접근이 금지되었던 것은 명상법 속에 금욕이나 특이한 호흡법 내지는 정신 집중법들이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함부로 따라하는 경우 여러 가지 부작용을 발생할 수도 있어 그것을 방지하기 위함도 있지만 종교권력의 독점을 위하여 혹은 명상의 권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일부러 정보를 제한하였던 측면도 있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서서 이런 여러 가지 비의적 명상법들이 점차 과학화되고 대중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동서 문화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서양 사람들이 동양의 명상의 세계에 대한 관심도과 이해도가 점차 증가하게 되면서 명상의 대중화와 과학화가 더욱 가속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명상이 대중화되고 과학화되는 것은 인류의 의식 혁명을 위해서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제대로 된 명상은 올바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게 해 주며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명상은 인류의 정신적 능력을 빠른 시간에 향상시킬 수 있는 좋은 방편이기 때문이다. 
 
명상은 비종교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지만 종교인들에게는 더욱 필요한 것이 될 수 있다. 명상을 통하여 종교인들은 기복적 차원의 종교행위를 한 차원 끌어올릴 수 있고 아울러 종교적 집단주관을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명상은 경전이나 교리에 대한 신념적 차원을 강화하기보다는 종교적 성스러움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고 따라서 도그마적인 요소가 훨씬 적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명상을 통하여 우리의 사회를 좀 더 명상적으로 만들 필요성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명상적이란 물질적 이익에만 급급하여 정신적 가치를 고려할 틈이 없는 상태에서 물질적 이익과 정신적 가치를 조화시킬 줄 아는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며 자연을 정복과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차원에서 자연을 삶의 터전으로 생각하고 자연과 서로 교감할 수 있는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요컨대 부분과 전체가 서로 대립하는 차원에서 부분과 전체를 유기적으로 조화시킬 수 있는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인류사회는 점차 경제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풍조가 팽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풍조는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있다. 20세기 말부터는 신자유주의의 구호 아래 인류사회 전체가 무한경쟁의 전쟁터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개인이나 기업이나 국가 할 것 없이 오로지 경제적 이익에 혈안이 되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그야말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고속질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전차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오로지 속도 경쟁 외에는 여념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린 결과 물질적으로 이전에 비해 풍요로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반대급부로 우리의 정신은 점차 황폐화되고 세상은 더욱 각박해지고 있다. 그뿐인가. 소중한 우리의 삶의 터전인 생태계는 급속도로 파괴되어 가고 있고 자원도 빠른 속도로 고갈되고 있다. 아울러 산업혁명 이후에 점차 쌓아온 환경공해는 이제 인류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얼마 전 미국 국방부에서는 머지않은 장래에 환경문제가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큰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환경문제는 이제 일부 환경론자들의 외로운 구호가 아니라 국가안보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국방성의 관료들조차 우려의 눈초리로 바라보아야 하는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이제는 정신없이 무한경쟁에 좇아가기만 할 게 아니라 지금의 삶의 양식이 과연 바람직한 삶인지를 반성하고 이 사회가, 인류문명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심사숙고해야 할 때이다. 이제는 걸음의 속도를 조금씩 줄이면서 차분한 마음으로 지금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바라보아야 할 때이다. 즉, 이 사회 전체가 명상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은 문명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이다. 하루빨리 낭떠러지로 향해 달려가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절망적이다. 외향적 물질적 욕구를 극도로 부추기는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강연자는 물질적 욕구보다는 정신적 가치를 더 중시하고 외향적 가치보다는 내면적 가치를 더 중시하는 명상 속에서 끄집어 낼 것을 제안한다. 
 
물론 현 자본주의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안목으로는 사회의 명상화야말로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명상은 인류의 의식을 빠른 시간 내에 성숙시킬 수 있는 좋은 도구이기 때문이다. 특히 명상은 인간의 욕구를 한 단계 승화시킬 수 있는 효율적인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욕구는 현실사회를 움직이는 구체적인 힘이다. 진화의 최고 단계에 이른 인간에게는 다양한 욕구가 있지만 이 현실을 움직이는 기본적 욕구는 식욕, 성욕 등의 생리적 욕구와, 재물욕, 권력욕 명예욕 등의 사회적 욕구이다. 이러한 욕구들은 한 개인의 삶을 유지시키는 동력인 동시에 사회전체를 이끌어가는 동력이다. 이러한 욕구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 한 개인이나 그 사회전체는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화와 균형이 무너질 때 개인이나 사회는 파멸로 치닫는다. 그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어느 사회나 그 사회 구성원에게 욕구를 조정을 요구한다. 비교적 타율적이고 강제적인 수단인 법률, 규범으로부터 내면적 자율성을 더 강조하는 윤리, 도덕, 종교에 이르기까지 욕구의 조정을 위한 다양한 수단들이 있다. 
 
명상은 이들 가운데서 가장 고차원적이고 자율적인 조정수단이다. 명상은 타율적 제재인 법률이나 관습과는 달리 자율적으로 욕구를 조절할 수 있게 해주며, 추구하는 이상은 좋지만 현실적으로 지키기 어렵고 그래서 위선이나 타락으로 빠지기 쉬운 윤리, 도덕, 종교보다도 훨씬 효율적으로 욕구의 조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한다. 그 이유는 명상 속에는 욕구를 조절하는 구체적인 테크닉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욕구의 문제는 결코 고원한 성자의 경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때로 명상가 가운데서는 범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초인적인 금욕이나 무욕의 경지를 보여주곤 한다. 그런 극단적인 금욕이나 무욕은 개인적으로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욕구조절 능력을 말한다. 
 
명상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 보통 사람들도 일정 정도 수준의 욕구조절은 쉽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명상을 통해 감각기관이 조금만 정화되기만 해도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음식들을 탐욕스럽게 먹는 행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고도 더 깊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아울러 여러 가지 물질적 욕구로부터 훨씬 자유로워지게 된다. 적게 먹고 적게 소비하면서도 많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재화에 대한 욕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문명이다. 자본주의가 진행되면서 인류는 자연을 이용하여 재화를 창출할 수 있는 수단을 기하급수적으로 발전시켜왔다. 그것은 인류의 물질적 복지의 증진에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환경오염과 자원고갈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생이 탐욕적인 자본주의체제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하도록 부추기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것을 쫒고 있다. 
 
그렇게 해서 생산된 부는 일부계층에게만 편중되고 그것은 비만과 기아의 불협화음을 만들고 있다. 그것은 한나라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 전체의 문제다.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미국사회에서는 비만환자가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사람마다 다이어트에 대한 한심한 고민을 하고 있는 반면 선진자본주의제국들에 의해 수탈당한 제3세계에서는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기아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이러한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욕구들은 인류문명의 미래를 위해 하루 빨리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적게 소유하고 적게 소비하는 것을 추구하는 명상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분명 도움을 줄 수가 있다. 물론 개인의 욕구의 조절이 바로 사회변혁으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러한 운동이 확산되어 적은 소유와 소비가 더 아름다운 삶의 양식이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만 하면 그것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사회제도와 체제를 변혁하는 작업을 보다 용이하게 진행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명상의 사회화** 
 
명상은 오랫동안 소수의 구도자들이나 종교인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깊은 산중과 수도원에 있던 명상은 서서히 속세로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구인들이 동양의 정신세계인 힌두교와 불교의 명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명상은 빠른 속도로 대중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초반부터 인도의 선구적인 요가 스승들이 미국과 유럽을 방문하면서 힌두교의 명상의 세계를 서구인들에게 널리 전하기 시작하였고 일본의 선승들도 선불교의 참선 명상법들을 서양인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단순히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동양사상과 명상에 심취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점차 근대 서구문명의 폐단을 치유하는 대안운동의 하나로 동양사상과 명상에 관심을 지니는 사람도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68혁명 이후 근대 서구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일어나자 새로운 문명에 대한 모색의 일환으로 명상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제는 환경운동이나 공동체운동 영성운동에 관심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는 명상을 수련하는 것이 그리 낯설게 다가오지 않고 명상과 자신들의 운동과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한 일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70년대 이후에는 명상의 심리적 생리적 효과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학자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명상은 심리치료나 일반 환자치료에서도 조금씩 응용되고 있다. 70년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게슈탈트 심리치료는 원래 탄생과정에서 동양사상과 명상의 요소를 유입하였기 때문에 명상적인 기법이 상당 부분 있으며 최근에는 미국의 심리치료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가장 실증적인 태도를 고집하는 인지행동심리치료에서도 명상이 심리치료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일반 병원에서도 명상을 응용하는 사례가 많이 있다. 그중 보스톤에 있는 메사추세스주립대학 병원의 예방행동의학과 교수이자 병원 부설 스트레스감소센터(Stress Reduction Center)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센터의 원장인 존 카밧진 교수는 남방불교의 위빠사나를 서양인들의 체질에 맞게끔 개선한 MBSR 프로그램(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 Program)을 운용하여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여 명성을 떨치고 있다. 현재 그의 MBSR 프로그램은 미국 전역의 수백 개의 대학병원과 개인클리닉에서 환자치료에 사용되고 있다. 
 
명상이 정신적 스트레스를 완화시켜주고 육체의 이완을 가져온다는 연구결과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명상을 실용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람들도 대폭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건강과 미용 차원에서는 하타요가가 일찍부터 널리 유행하였고 최근에는 중국의 태극권 또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본격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 또한 지속적으로 서양인들의 삶 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도심 속에서도 명상센터가 늘고 있는 추세이며 교외나 산중의 명상 센터에는 여름 휴가철이면 일상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조용히 휴식을 취하면서 명상을 하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근래에는 웰빙의 유행으로 명상에 대한 수요가 더욱 늘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서구의 영향으로 인해 80년대 초부터 서서히 명상붐이 일기 시작하였다. 80년대 초 라즈니쉬나 크리슈나무르띠 등의 인도 성자들이 쓴 명상서적의 번역서들이 대중의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인도명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다가 80년대 중반에 우학도인의 민족비전의 전통수련법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식으로 기술한 <단>이 유행하면서 단학계열의 수련법들이 급부상하기 시작하였다. 90년대 중후반에는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억을 지우고 에고를 죽이는 테크닉을 사용하는 마음수련법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명상은 대중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하였다. 최근에는 웰빙의 유행으로 명상산업이라는 용어가 등장할 정도로 명상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중이다. 
 
오랜 세월 개인적인 구도의 방편으로 혹은 종교적 수양의 방편으로 쓰였던 명상은 근 백년이 채 못 되는 기간에 급속도로 대중화되고 사회화되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삶의 양식이 되기에는 아직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많이 있다. 
 
우선 명상의 세계는 아직도 필요 이상의 신비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고 서로 상충되는 부분도 많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명상의 과학화 체계화가 시급하다. 근래에 들어 구미에서는 명상의 생리적 심리적 효과를 밝히는 논문과 저서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명상의 과학화에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개별 명상에 대한 효과를 부분적으로 밝히는 데 그치고 있을 뿐 다양한 명상을 체계적으로 비교 연구하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보편적인 원리를 밝히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나온 많은 논문들 중에는 과학적 연구라는 핑계 아래 실제로는 자신이 속한 명상단체 내지는 자신이 관심이 있는 명상법을 선전하는 도구로 쓰이는 예가 비일비재하다.
 
사실 명상에서 나타나는 효과의 상당 부분은 명상 자체의 효과라기보다는 심리적 기대치에 의한 플라세보 효과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보았을 때 분명 일정 부분의 긍정적 효과가 있지만 때로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오히려 부정적 효과가 더 많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명상단체에서는 과장광고로 일관하고 있어 때로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아울러 여러 가지 명상법들이 서로 상충되거나 모순되는 것도 있어 사람들을 혼돈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명상법들을 종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우는 것이 시급하다. 
 
명상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데 크게 방해가 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주관성과 객관성의 혼동이다. 명상 속에는 주관적 현상과 객관적 현상이 혼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명상을 할 때 깊은 이완을 체험하면서 몸과 마음의 휴식과 재충전을 체험하거나 집중력이 향상되는 것 등은 객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을 하다보면 그 속에 담긴 특정한 세계관이나 인생관에 대해 강력한 확신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것들은 집단주관적인 착각의 소지가 있다. 물론 명상은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맹목적인 신앙에 비해서는 집단주관적 착각의 요소가 훨씬 적다. 그러나 명상 또한 분명 그러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명상의 초기 단계에서는 별로 못 느끼지만 명상에 본격적으로 심취하게 되면 대체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이렇게 집단주관적인 착각에 빠지는 경우 가장 크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소통기능의 저하이다. 물론 집단구성원들 사이의 소통은 더욱 원활해진다. 문제는 타집단과의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진리에 대해서도 잘 소통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일방적인 주장을 하거나 아예 대화의 문을 닫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소통기능의 저하는 명상의 사회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이런 부분을 해결하지 않고 단순히 명상인구의 확대를 지향할 경우 어떤 면에서는 사회는 소통부재로 인해 도리어 부정적인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주관성의 극복은 명상의 사회화를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다.
 
마지막 문제는 앞의 문제와 상관관계가 있는데, 명상은 대체로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자칫 외면의 현실세계와 괴리가 생기기 쉽다는 것이다. 주변에 명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처음에는 현실과 그다지 큰 간극이 없는데 점차 시간이 흘러서 명상에 더욱 심취할수록 내면세계에 도취되어 현실을 도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처음부터 현실도피적 경향이 있는 사람이 명상에 심취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명상에 심취하면서 점차 현실도피적 성향이 강화되는 경우도 있는데 하여튼 사람마다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명상에 빠지게 되면 현실감각이 다소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명상을 단순히 개인적 종교적 구도의 도구로서 받아들일 경우 이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도 수도원에서 깊은 산중의 선원에서 오로지 종교적 구도의 일념으로 살아가는 수도자들은 많이 있다. 그리고 깊은 명상을 통해 심오한 깨달음을 얻는 경우 그 집단 내에서는 추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것도 나름대로는 의미가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명상이 사회적 의미를 가지려면 이제는 좀 더 현실세계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물론 일부 명상가들 가운데서는 현실과 잘 조화를 이루면서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이고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상 전체의 방향성과 메커니즘의 문제이다. 이제는 명상 전체의 방향성에 대해 조정이 필요한 때이고 테크닉 자체에 대해서도 검증이 필요한 때이다. 그렇게 될 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안심하고 명상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상에서 언급한 문제들, 그 중에서 집단주관의 문제와 일상의 조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명상이나 깨달음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가질 필요성이 있다. 과연 집단주관적인 깨달음이 진정한 깨달음인가 하는 문제와 내면의 초월적 세계에만 초점을 맞추어 삶의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깨달음이 완전한 깨달음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강연자는 오래 전부터 이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탐구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중이다. 
 
강연자의 관점으로는 이제는 명상과 깨달음에 있어서도 집단주관적 틀을 벗어나 좀 더 보편적인 틀을 찾아야 하고 현실의 삶과 조화를 이루는 보다 성숙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본다. 강연자는 집단주관적인 성향을 극복할 수 있고 일상의 삶과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새로운 명상법인 바라보기 명상법을 만들어 주변사람들과 나누는 중이다. 
 
명상이 사회 변혁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명상 자체를 변혁하고 개량하려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현실적 차원에서 명상을 사회적 차원에 접근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강연자는 이를 위해 그 사이 다음과 같은 실천과 구상을 하고 있다.
 
명상이 사회화되기 위해서는 명상의 사회화 자체를 주제로 하는 토론의 장을 많이 열어야 한다. 대부분 명상하는 사람들은 주로 개인적 차원에서 명상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명상의 사회화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고 설령 있다 해도 명상의 사회화에 대한 기본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사회란 결국 개인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개인의 의식이 변혁되면 그것이 바로 사회변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오로지 명상을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심지어는 한 사람의 의식이 깊이 각성되면 그가 설령 사회에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거나 혹은 깊은 산속에서만 살아도 사회의 정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가 있어서 한 개인의 의식발전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때로는 인류라는 종 전체의 발전에도 공헌을 한다고 생각한다. 
 
명상하는 사람으로서 일리가 있는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강연자 역시 옛날에는 그렇게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과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하게 되면서 위와 같은 논리가 얼마나 허술한 것이고 일면적인 접근인가를 알게 되면서 이제는 위와 같은 주장에는 공감하지 않게 되었다. 개인의 의식의 변혁이 사회의 변혁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에 대해서는 인정을 한다. 그러나 현실적 유효성을 생각한다면 그 사이에는 너무나 넓은 강이 있다. 현실세계를 움직이는 힘의 논리는 너무나 강고한 것이기 때문에 단순하게 의식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라 여겨진다. 속세를 떠난 산중도인의 고매한 깨달음 또한 현실의 변혁에 도움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한강투석과 같은 것이다. 현실의 문제는 현실 속에서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푸는 것이 가장 빠른 것이다.
 
또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대부분의 명상은 내면의 각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현실 문제를 접할 때 대부분 내면적 주관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한다. 일체유심조니 모든 현실은 내 마음이 만든 것이라는 등등의 입장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명상하는 이들은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접할 때 항상 현실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내면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강연자 또한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갈등의 원인은 내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 외면적 조건에도 있는 것이다. 내와 외를 같이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문제는 모든 것은 내면의 문제로만 돌리는 것이다. 이런 명상의 틀 자체를 바꾸지 않고 명상 인구의 확장만 시도하는 것은 사회의 변혁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세계적으로 많은 명상가를 배출하고 있고 명상가에 대한 사회적인 명망이 높은 인도라든지 미얀마 등의 국가의 현실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현실의 낙후는 여러 가지 많은 역사적 사회적 요인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명상 또한 어느 정도 역할은 담당하였다고 본다. 즉 마르크스가 말한 민중의 아편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상이 진정으로 사회변혁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명상계 내부에서 먼저 이 문제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연자의 관점으로는 현실의 여러 갈등과 문제들은 내면의 마음의 상태와 외면의 현실적 조건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방적인 접근보다는 양방향의 접근이 문제 해결에 더욱 효과적이다. 이런 면에서 운동권과 명상권은 서로 협력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영성적인 관심도 풍부하고 아울러 현실개혁에 대한 의지도 많은 지역에서는 명상권과 운동권이 제대로 통합될 수 있을 때 우리의 현실의 장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명상권과 운동권이 서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상대를 배우려고 하고 아울러 새로운 모색을 위한 토론의 장을 많이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토론을 하며 모색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명상과 사회운동의 연결 고리를 보다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상을 사회화하기 위해서는 명상의 사회적 활용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그 영역을 확장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강연자는 오랜 명상을 통해 명상 속에는 참으로 많은 가능성들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되었고 지금은 그것을 어떻게 그 가능성들을 현실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명상은 과거에는 종교적 수도의 방편으로 널리 쓰였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주로 복잡한 사회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의 심신을 치유하는 도구로 많이 쓰이고 있는 편이다. 강연자 또한 오랫동안 명상을 하면서 본인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체험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명상이 몸과 마음의 불필요한 긴장을 제거시켜주며 유연성을 높이는 데 많은 도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명상의 이러한 효용성은 예방의학이나 대체의학 방면에서 보다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문제이고 최근에 이러한 쪽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강연자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심리치료 분야인데 몇 년 전부터 게슈탈트 심리치료 연구회에 참가하여 그쪽 분야의 사람들과 많은 교류를 가지고 있다. 몇 년 전 미국의 UCLA에서 방문학자로 공부하고 있을 때에도 그 쪽 심리학과 교수와 정신과 교수와 토론을 나누면서 좋은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다. 강연자의 관점으로는 심리치료는 명상과 가장 가까운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미국의 심리학계에서는 명상을 심리치료에 활용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연구와 토의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은 미미한 편이다. 강연자는 게슈탈트학회와의 만남을 통하여 심리학자들에게 명상을 적극적으로 소개하였고 그 결과 요즈음은 명상에 대한 관심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앞으로 좀 더 본격적인 교류가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또한 명상은 자기 내면세계와의 교감 자연과의 교감 등을 통하여 예술가들의 창조력 향상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데 특히 공연예술 쪽으로는 신체 훈련이나 발성훈련 등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강연자는 몇 년 전 한국공연예술원이라는 단체에서 활동을 하면서 현역 연극배우와 배우지망생들을 대상으로 연기력 향상을 위한 명상 강좌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대학의 연극영상학과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공과목으로 명상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명상이 연기수업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하던 학생들도 한 한기 수업을 마친 뒤에는 명상이 연기력 향상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것은 명상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 일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은 또한 교육 분야에 직접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최근 입시위주의 주입식 교육 나아가 근대서구의 지식위주의 교육풍토에 회의를 느끼고 전인교육, 참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명상을 교육에 접목시키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 강연자는 몇 년 전 대안교육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명상을 어떻게 교육 분야에 활용할 수 있을까에 대해 강연과 토론을 나눈 적이 있다.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해서도 더 많은 관심을 쏟을 생각이다.
 
이렇듯 명상은 잘만 활용하면 사회 여러 분야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명상의 영역을 확대하고 주변 분야와 교류를 촉진시키는 것은 명상의 사회화에 훌륭한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의 사회화를 위해 또 하나 반드시 필요한 것은 명상을 제도권 학문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근래 명상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증대하고 있고 이에 따라 여러 명상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설립되고 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명상법 가운데도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불량한 것도 많다. 불량한 것이란 부분적으로는 일시적으로는 몸과 마음을 각성시켜주는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몸과 마음에 도리어 부정적 효과를 남기는 것을 말한다. 잘못된 명상법을 집중적으로 수련하였을 때 몸과 마음에 이상현상을 가지고 오거나 혹은 눈에 보이는 뚜렷한 현상은 없지만 집단주관적 도취에 빠져 정상적인 소통기능이 저하되거나 내면의 세계에만 심취하여 현실을 도피하게 만들어 결국 삶을 그르치게 하는 경우는 참으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것들은 개인적으로 불행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명상의 효과라고 하는 것들은 단기간 내에 객관적으로 측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함정들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명상이 제도권 학문으로 진입해야 할 것이다. 강연자는 6,7년 전부터 대학에서 ‘동양사상과 명상’이라는 교양과목을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동양사상과 그 속에서 발달한 여러 명상체계들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최근 일부 대학에서 명상에 대한 강좌가 조금씩 생기고 있으며 대학원에서 기공학과, 명상학과, 요가학과 등을 개설한 대학도 생겼다. 앞으로는 명상도 학문적으로 체계를 갖추고 전문적인 학회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명상이 제도권 속으로 들어올 수 있을 때 명상교사에 대한 자격요건도 강화할 수 있고 명상이 오용되거나 남용되는 것을 방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