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4

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 _ 국제컨퍼런스 강연소식과 강연문전문 [2013 ] 실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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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 _ 국제컨퍼런스 강연소식과 강연문전문
작성자 실상사 13-04-25


도법스님, "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
美유니온신학대학원 강연서 세계 종교인들에 역설

2013년 04월 22일 (월) 박봉영 기자 budgate@hanmail.net

▲ 도법스님의 강연모습.

조계종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장 도법스님은 19일 세계적 참여불교인과 해방신학자들 앞에서 화엄경의 본래부처론과 동체대비행에 바탕을 둔 생명평화 사상을 역설했다.
강연은 미국 유니온신학대학원 국제 컨퍼런스에서 이뤄졌다. 도법스님은 '나의 불교수행, 화엄세계관과 생명평화운동-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 붓다로 행동하자'는 제목으로 강연에 나섰다. 결사추진본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날 강연 소식을 전했다.
도법스님은 "붓다란 먼 훗날 도달해야 할 저 멀리 있는 신비하고 특별한 어떤 목적지나 경지가 아니다. 지금 당장 그대와 내가 본래 거룩한 붓다임을 알고 서로를 지극 정성으로 잘 모시고 섬기면 그 자체가 붓다로 살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 밖에 또 다른 무엇이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생명평화무늬를 소개하는 것으로 강연은 시작됐다.
도법스님은 "온 우주의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며 살도록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생명평화무늬가 인류 역사의 많은 지성들에 의해 파악되고 제시된 보편적 세계관의 총화”라며 “모든 존재들이 나의 생명을 낳고 길러내는 거룩하고 신비한 모체이므로 당연히 지극 정성을 다하여 서로 잘 모시고 섬겨야 한다"고 역설했다.
도법스님은 자신의 삶과 수행의 역정 속에서 어떻게 생명평화사상에 도달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을 벌여왔는가에 대해서도 말했다. 실상사를 중심으로 한 대안적 운동, 생명평화결사, 생명평화탁발순례, 천성산, 새만금, 봉은사,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등 갈등해결 노력, 종교평화선언 발표와 자성과쇄신결사운동등을 세계의 참여 종교인들에게 소개했다.


▲ 강연에 앞서 열린 세계 참여불교인들과의 대화 모습.

도법스님은 결론적으로 모든 종교가 갈 길은 생명평화의 길이라고 역설하며 지구촌생명평화공동체를 만드는데 모든 종교인들이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다.
"인류문명사를 성찰적으로 살펴볼 때 존재법칙에 어긋나고 생명가치를 망각한 채 상대에 대한 불신과 분노, 증오와 공포의 마음으로 온갖 그럴듯한 명분으로 편 가르고 싸우고 이기고 지배하는 방식의 그 어떤 길도 우리가 갈 길이 아닙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인내와 관용과 비폭력 평화의 마음으로 온 우주의 모든 것들이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한 몸 한 생명임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생명평화무늬의 길입니다. 생명평화의 삶, 생명평화의 세상은 모든 인류의 영원한 염원이며 21세기 시대정신입니다. 우리 종교가 나서서 실현해야 할 21세기 절체절명의 화두는 바로 ‘지구촌 생명평화 공동체’입니다. 그 역할을 제대로 할 때 비로소 종교가 종교다워집니다."
한편, 도법스님은 17일, 18일 진행된 각종 토론회에 참여했으며 19일에도 참여불교 동서양의 대화에 법륜스님(정토회 지도법사), 슐락시바락사 등 세계적인 참여불교인들과 함께 토론 패널로 참여했다. 울리히 두흐로브(독일 하이델베르그대 교수), 폴 니터(미국 유니온신학대학원 교수) 등의 종교인들과도 단독 대담을 가지기도 했다.
도법스님은 21일에는 뉴저지 소재 원각사(주지 지광스님)에서 현지 불자들을 대상으로 법문을 진행했으며, 22일부터 24일까지 미국 동부의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 시크교 등 다양한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 종교간 대화를 나누고 종교간에 사회적 실천을 공동으로 벌여나가는 방안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눌 예정이다.


▲ 도법스님과 법륜스님.

다음은 강연문 전문이다.

나의 불교수행, 화엄세계관과 생명평화운동
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 붓다로 행동하자
(Live as a buddha, Act as a buddha, Right now!)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도법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외떨어진 곳이기도 한 지리산 산골짝에 사는 제가 이곳 뉴욕의 한복판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강연을 하게 돼 참으로 반갑고 기쁩니다. 불러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께 한 장의 부적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2009년 미국 그래픽디자인 연감’ (Graphis Design Annual 2009)의 맨 앞장 6쪽에 걸쳐 실려 있었는데, 혹시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마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이라고 해도 심심산골 지리산에서 만든 이 부적은 처음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부적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어 원하는 것을 다 이뤄준다고 믿습니다. 지금 제가 보여드리는 부적 역시 인류가 희망하는 삶을 실현해주는 신비한 힘으로 발휘되길 기대하며 설명 드릴까 합니다.
‘생명평화(Life-peace) 무늬’, ‘인드라망(Indra`s Net) 무늬’, ‘어울림 삶’이라고 불리는 이 부적은 한국의 대표적인 시각디자이너이자 타이포그래퍼인 안상수 전 홍익대 교수의 재능기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안 교수가 생명평화 세계관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시각화한 것입니다.
이 부적 한 장 속에 제가 45년 동안 승려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회의와 갈등, 방황과 모색을 통해서 정리한 세계관과 실천론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말하자면 ‘세계는,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평화롭고 행복한가.’ 라는 단순하되 근본적이고, 오래됐으나 여전히 새로운 질문에 대한 제 나름의 결론이 담겨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일 밑에 있는 게 지금 여기 각자 자신을 포함한 사람, 오른쪽이 네 발 달린 짐승, 왼쪽은 새와 물고기, 사람의 머리 위쪽이 숲 그리고 해와 달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생명과 사물들이 그물의 그물코처럼 서로 의지하는 관계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태양과 달이 곡식과 나무를 키웁니다. 그것을 사람과 짐승들이 먹고 살아갑니다. 마치 연못과 연꽃처럼 서로의 생명을 낳고 살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밥 한 그릇, 굼벵이 한 마리도 모두 생명을 낳고 길러내는 거룩한 어머니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내 생명은 내 안에, 네 생명은 네 안에 분리 독립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관념일 뿐입니다. 생각, 말, 글로는 분리 독립된 존재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구체적 사실과 진실로는 있지 않습니다. 저는 온 우주의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며 살도록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생명평화무늬가 인류 역사의 많은 지성들에 의해 파악되고 제시된 보편적 세계관의 총화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결론입니다.
다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모든 존재들이 나의 생명을 낳고 길러내는 거룩하고 신비한 모체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서로를 낳고 길러내는 신비와 기적의 존재, 아주 귀하고 고마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지극 정성을 다하여 서로 잘 모시고 섬겨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생명의 법칙과 질서가 그러하기 때문이며 그렇게 해야 우리의 생명이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갈 길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 만일 이 길을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고받게 됩니다. 모심과 섬김이 곧 불교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비와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 삶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을 때 저절로 평화로워진다고 봅니다.
이 길은 유신론‧무신론, 관념론‧유물론, 진보론‧보수론, 보존론‧개발론 등 모든 벽을 넘어서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길입니다.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천도교, 원불교, 동양철학, 현대과학 등의 벽을 넘어 우리 모두 함께 해야 할, 오래된 미래의 길입니다.
불교 역사의 주인공인 싯다르타는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 끝에 우주의 존재법칙인 보편적 진리를 발견하고 그 길을 걸어감으로써 붓다가 되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으로 보면 지금 여기 생명평화 무늬로 표현되는 세계와 존재 외에 비로자나 부처님과 하느님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가장 주체적이고 창조적이고 고맙고 신비한 존재인 모든 생명이야말로 진정 하느님이고 부처님입니다. 당연히 본래부터 붓다이기 때문에 특별한 수행을 통해 다시 붓다가 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굳이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마치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 것처럼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좀 더 실제적인 이해를 위해 몇 가지 물음을 던져보겠습니다. 지금 제가 도둑질을 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당연히 도둑놈이 됩니다. 특별한 존재인 붓다는, 예수는 어떨까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행위입니다. 누구이든 지금 당장 예수 행위, 붓다 행위를 하면 그가 바로 예수요, 붓다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깨달음, 해탈, 열반, 그리고 붓다란 먼 훗날 도달해야 할 저 멀리 있는 신비하고 특별한 어떤 목적지나 경지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그대와 내가 본래 거룩한 붓다임을 알고 서로를 지극 정성으로 잘 모시고 섬기면 그 자체가 붓다로 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밖에 또 다른 무엇이 있지 않습니다.
잠시 제가 생명평화 운동을 하게 된 과정과 동기를 설명 드리는 것이 생명평화 사상의 실체를 실감하는데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1949년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이념 대립의 비극적 사건인 제주도 4.3 때 돌아가셨습니다. 열여덟 살 때 출가해 승려가 됐으며, 스무 살 무렵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라는 사실에 직면해 크나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허무한 인생이라면 그 인생은 무엇이며 왜 태어나고 살고 죽는 것인가 하는 존재 이유와 가치에 대한 원초적인 회의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후 우리나라의 고승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기도, 참선, 경전공부 등 수행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도 죽음과 허무의 문제, 또는 존재 이유와 가치에 대한 원초적 문제를 풀 수 없었습니다. 한국 불교 주류의 길인 개인적이고 내적이고 은둔적이고 정적인 수행을 20 여 년 동안 했지만 깊은 회의와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번민의 나날 속에서 우연히 간디를 만났습니다. 언제나 혼탁한 역사의 현장에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정직하고 유쾌하고 헌신적인 그의 삶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간디에게서 붓다의 삶, 보살의 삶을 보았습니다. 간디라는 한 인간의 거울에 비추어 본 저의 삶은 한 마디로 가짜였습니다. 참선, 삼매, 수행, 깨달음, 해탈, 열반, 붓다라는 거룩한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의 이기적 사고에 빠져 헛꿈을 꾸고 으스대는 위선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화엄경을 만났습니다. 온 우주가 참여해 한 송이 꽃을 피우고 있는 생명의 존재법칙, 한 송이 꽃이 그대로 우주요 우주가 그대로 한 송이 꽃이 되는 그물과 그물코에 대해 눈 뜨게 됐습니다. 그 내용을 단순화시켜 보면 이렇습니다. 연기무아와 동체대비의 본래 부처행을 적재적소에 맞게 실천하는 것을 깨달음, 중도, 완성의 실천인 바라밀행이라고 합니다. 일상에서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살이라 하고 그 삶은 지금 여기에서 누구나 가능하며, 그렇게 살 때 우리가 찾는 해답과 희망의 꽃이 피어납니다. 저는 화엄경을 통해 불교에 대한 이해와 믿음, 만인이 함께 가야 할 삶의 방향과 길을 발견하고 비로소 길고 긴 방황을 어느 정도 정리하게 됐습니다.
제가 많은 시행착오를 무릅쓰고 집요하게 생명평화 무늬의 정신에 천착하는 까닭을 간단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인류문명사는 어처구니없게도 야만적인 살상과 파괴로 얼룩졌습니다. 이를 웅변하듯이 20세기 100년 동안 퓰리처 상을 수상한 사진을 모아놓은 사진집의 한국판 제목이 <죽음으로 남긴 20세기 증언>입니다. 백 년 동안 이루어진 발전 과정과 결과를 한마디로 특징짓는다면 ‘죽임의 역사’인 것입니다.
국가, 민족, 종교, 이념, 자유, 정의, 평화 등 아무리 멋진 명분이라 하더라도 편 갈라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고, 뺏고 빼앗기고,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삶과 역사라면 그것은 야만이고 비극입니다. 지금도 테러와의 전쟁에서 본 것처럼 반생명 비인간적인 비극의 악순환이 줄어들지 않고 확대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미래의 전망도 우울합니다. 부끄럽고 죄송스럽게도 지구촌의 평화를 위협하는 마지막 분단 국가인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21세기 백 년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가 그렇다면 인류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변화와 발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도대체 어디에서 길을 잃은 것일까요? 왜 이렇게 됐으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인류가 직면한 물음의 해답을 찾는 일이야말로 불교를 비롯한 종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여러 형태의 방황과 모색을 통해 나름대로 찾아내고 정리한 것이 바로 지금까지 설명 드린 생명평화 무늬 부적입니다. 붓다, 예수, 간디가 걸어가신 이 부적의 정신으로 20세기의 병을 치유하고 21세기 새로운 문명으로 생명평화 살림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취지를 실천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작은 몸짓으로 대한민국 전라북도의 깊은 산골에 있는 실상사에서 생태자립 마을공동체 운동을 벌였습니다. 범종교시민들이 이념, 계층, 종교, 지역 등 진영의 벽을 넘어 ‘좌우 대립 지리산 희생자를 위한 각 종교계의 백일기도와 합동 위령제’를 지냈습니다. 자연생태의 재앙을 몰고 온 현대문명의 위기와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위기에 대한 대안을 찾고자 하는 뜻으로 ‘생명평화 민족화해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지리산 1000일 기도’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전쟁을 비폭력평화 행동으로 막아내고 21세기 새로운 대안문명인 생명평화의 길을 열어가자는 취지로 <생명평화결사>를 만들었습니다. 결사의 취지에 따라 온 몸을 던져 비폭력 평화행동을 할 사람 10만인 조직을 위해 2004년 3월 1일부터 2008년 12월 14일까지 5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걷고 얻어 먹고 얻어 자고 만나고 대화하는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했습니다. 5년간 대략 1만 여 km를 걸었고 8만 여 명을 만났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첨예한 갈등과 대립으로 서로의 가슴에 극단적인 불신과 분노, 불안과 공포를 생산하는 현장인 천성산 터널, 새만금 개발, 봉은사 분규, 4대강 개발, 쌍용자동차 및 한진중공업 대량 해고, 제주해군기지 건설 문제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관련 당사자들의 대화 테이블을 만들어 갈등을 풀어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 종교갈등을 넘어 종교평화의 길을 열어가고자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을 발표했는데 사회적으로는 큰 공감과 호응을 받았지만 불교계 자체적으로는 격렬한 논쟁에 휩싸여 아직도 완성시키지 못한 채 진행 중에 있습니다.
생명평화 무늬의 정신에 의한 수행인 본래 부처와 동체대비의 정신으로 한국 사회와 민족사회와 인류사회의 문제를 대안적으로 평화롭게 해결하는데 불교가 앞장서야 마땅하다는 믿음으로 한반도 생명평화공동체 실현을 위한 ‘생명평화 1000일 정진’ ‘노동자 초청 무차대회’ ‘사부대중 야단법석’ 등 불교 본연의 역할을 하기 위한 몇 가지 모색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와 국가, 불교와 기독교, 진보와 보수, 개발과 보존 등을 명분으로 편갈라 극단적으로 싸우고 있는데, 실제적으로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생명이 안전하고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관성적으로 편갈라 싸우고 있지만 내용적으로 우리의 바람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의 공통적인 염원은 현실화되지 않는 것일까요? 그 원인을 잘 짚어보면 심층의 자리에 인류 문명을 지배해온 존재법칙에 어긋나는 실체론적, 이원론적 세계관의 함정이 있습니다. 또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절실하고 중요한 가치인 생명의 실상에 대한 무지와 착각의 관념에 사로잡힌 병이 있습니다.
인류문명사를 성찰적으로 살펴볼 때 존재법칙에 어긋나고 생명가치를 망각한 채 상대에 대한 불신과 분노, 증오와 공포의 마음으로 온갖 그럴듯한 명분으로 편가르고 싸우고 이기고 지배하는 방식의 그 어떤 길도 우리가 갈 길이 아닙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인내와 관용과 비폭력 평화의 마음으로 온 우주의 모든 것들이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한 몸 한 생명임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생명평화무늬의 길입니다. 생명평화의 삶, 생명평화의 세상은 모든 인류의 영원한 염원이며 21세기 시대정신입니다. 우리 종교가 나서서 실현해야 할 21세기 절체절명의 화두는 바로 ‘지구촌 생명평화 공동체’입니다. 그 역할을 제대로 할 때 비로소 종교가 종교다워집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인류의 지성들이 제시한 옛길이요 오늘의 길이요 미래의 길이며 너와 나와 우리의 길인 ‘생명평화 무늬’ 부적에 담긴 보편적 세계관과 정신과 실천의 교훈을 주목해주십시오. 끝으로 생명평화 무늬의 이론적 토대인 <생명평화경>과 그 세계관의 정신을 일상의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백 가지 문장으로 나누어 만든 <생명평화백대서원 절명상>을 소개하면서 제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