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와 예수, 한반도의 해법을 고민하다 _ 도법스님 미국 방문기
작성자 실상사 13-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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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와 '예수', 한반도의 해법을 고민하다
[대담] 도법 스님과 울리히 두크로 하이델베르크 석좌 교수
13.05.08
▲ 도법 스님
ⓒ 안희경
지난 4월 19일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 제임스 채플에서 도법 스님은 세계에서 모인 신학도와 불교도에게 질문을 던졌다.
"붓다가 도둑질을 했다면, 그를 무엇이라고 부르겠습니까?"
도법 스님의 답이다. "그렇다면 그는 도둑입니다." 이어서 "불교인은 오랜 시간 깨달음의 관념에 구속돼 고통 받아 오고, 기독교인은 신의 관념 속에 구속돼 고통 받아 왔다"고 꼬집었다. 도법 스님은 "붓다의 뜻, 예수의 뜻은 관념이 아니라 행위로써, 실천으로써 좇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순간의 침묵 뒤에 청중의 뜨거운 박수가 이어졌다.
도법 스님은 "지금 당장 붓다처럼 행동하고, 예수처럼 실천하자"라고 강하게 당부했고, 이는 환경 파괴, 여성·인종 차별, 전쟁과 폭력, 경제적 불평등, 내면의 성찰 등 세계의 석학과 활동가들이 발표하고 토론해 온 '세계 불교 기독교 콘퍼런스'의 여러 의제를 압축적으로 모아낸 본질적 메시지가 됐다.
바로 그 붓다의 행동, 예수의 실천이 현재 고통 받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해 봤다. 도법 스님과 독일의 행동하는 석학이자 신학자인 울리히 두크로 교수와의 대담이다.
"평화 운동의 진짜 열쇠는 긴장 해소에 있어"
울리히 두크로는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조직신학과 석좌교수로서, 사회·경제적 문제를 연구해온 석학이며, 금융 세계화에 따른 폐해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국제조직인 국제금융관세연대(ATTAC)의 독일 지부를 만든 활동가이기도 하다. 이번 콘퍼런스에서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고통'이라는 주제 발표를 했으며, 국내에도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대안>, <성서의 정치경제학> 등 그의 저서가 소개돼 있다.
도법 스님과 울리히 두크로 교수의 대담은 지난 4월 19일 오후 9시 유니언 신학대학 소셜홀에서 필자의 사회로 진행됐다.
▲ 울리히 두크로 교수.
ⓒ 안희경
- 두 가지 큰 줄기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한국인들이 당면한 안보 문제로, 위협적인 갈등에서 벗어나 평화를 키워가는 해법이고요. 두 번째는 평화 문제를 포함해 모든 갈등의 바탕을 이루는, 점점 더 치열해지는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환경적인 재앙까지 빈번하게 이어지면서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이기에 공포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울리히 두크로 "두 가지는 하나로 연결돼 있지요. 평화 역시 자본주의와 관계되니까, 하나를 짚어도 전체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우선, 50년 넘도록 초강대국들의 게임장이 돼버린 한반도와 그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한국인에게 안타까운 제 마음을 전합니다.
미국은 한국을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오래된 전진기지에서, 중국을 에워싸는 기지로 바꿔가고 있습니다. 지난해 1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태평양에 군사력을 새롭게 배치했죠. 800여 개의 미군부대가 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미국이 서방에 자신들의 이런 군사 계획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카운터 파트너로 북한이 필요하겠구나 싶습니다.
한반도는 미국의 관심이 가장 고조된 지역입니다. 여기 얽혀 있는 중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인 관점까지 포괄적으로 비판하지 않고는 한반도 긴장을 풀기 어렵죠. 바로 이런 국제적인 관점에서 미국과 강대국들의 전략과 선전을 해체해내야 합니다. 서구 사람들도 한국인들과 연대하며 일할 수 있습니다."
도법 스님 "한반도 문제는 당사자가 남과 북이잖아요. 현재 상황에서 보면 북한에 비해 남한이 경제력을 위시해 국력이 월등하니까, 대한민국이 주체적으로 어떻게 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이 서로 갈등하고 있습니다. 진영을 넘어서서 민족의 문제를 함께 풀려는 입장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는 (이런 상황에서) 종교인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식민지 아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경험이 있어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기독교 입장, 천도교 입장, 불교 입장을 내려놓고 하나로 행동했죠.
왜냐하면, 그때 민족의 최우선 과제는 기독교도, 천도교도, 불교도 아니었기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정당성을 가지려면 종교계가 한반도의 평화,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나서야 합니다. 각 구성원들에게 교육하고, 한국 사회에 공론화시켜야 합니다. 우리 국민이 사안을 절실하게 바라보도록 바탕을 만들어놓게 된다면, 정부와 대통령도 그런 방향에서 바라보게 된다고 봅니다.
이 바탕 위에서 중국을 설득하고, 미국을 설득하고, 일본과 러시아를 설득해 우리 입장을 관철할 힘을 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런 주체의 자각 없이는 결국 우리 의지와 관계없이 또다시 분단 초기처럼 흘러가리라 봅니다."
- 국제적인 관계 속에서 보려는 두크로 선생과 달리 도법 스님은 한국인 내부의 인식과 노력을 강조하며 그 속에 분산돼 있는 역량의 대립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미 통일을 경험한 독일의 경우 역시 강대국들 속에서 주체의 역량을 키우기 어려웠던 환경이었다고 보는데요. 어떻습니까?
울리히 두크로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 냉전시대 동독과 서독은 강력한 평화운동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평화운동에서 '보편적인 안보 개념'을 키워야 한다는 겁니다. 세계의 열강들은 한국과 북한이 서로를 적대시하며 긴장 속에서 지켜가는 안보를 원합니다.
독일에서도 그랬죠. 그러나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세력들은 안보란 '동독과 서독이 협력해서 이뤄내는 평화'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어요. 적대시하는 대립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는 상태가 진정한 안보라는 입장을 키워갔습니다. 평화운동의 진짜 열쇠는 긴장을 해소하고 사람들이 함께 하는데 있습니다."
GNP 200배 성장한 지금의 한국, 왜 길을 잃었을까
▲ 참여불교 심포지엄에서 발표하는 도법 스님과 이를 통역하는 혜민 스님.
ⓒ 안희경
- 한국인들의 입장 가운데 대등한 군사력으로, 힘의 균형을 통해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자는 입장도 있고, 또 통일 자체에 대해 혼돈과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며 부담스러워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어쩌면 '전쟁으로도 내 삶을 흔들지 말고, 통일로도 부담을 주지 말라'는 피로감일 수도 있겠습니다. 현재 그만큼 살기 힘들다는 호소입니다.
도법 스님 "그건 이분법적인 접근입니다. 지난 100년 동안 우리의 생활 깊숙히 파고 들어온 '너를 이겨야 내가 산다'는 문화입니다. 이분법적 세계관과 적대적 방법론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반응하는 한 끊임없이 죽임과 죽임을 당하는 불안과 공포가 생산될 수밖에 없어요. 이미 우린 역사 속에서 그걸 확인했습니다.
미국의 국익 논리, 대한민국의 국익 논리, 한반도 우리 민족의 이익 논리에서 진짜로 바라본다면, '지금의 분단 상황이 돈 벌기에 더 좋고, 내 기득권을 지키기 더 좋다'는 입장은 몇몇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국익이라고 할 때는 국가 구성원 전체를 염두에 둬야 하고, 한반도의 이익도 민족 구성원 전체의 이익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큰 방향과 기본 원칙을 확고하게 해서 단계별로 접근해 나가야 합니다. 평화를 일궈내는 일을 종교계가 풀어내면, 지역적인 사안과 개별적인 사안들도 많이 풀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 여기서 현재 경제시스템의 조건을 바라볼 때라고 봅니다. 울리히 두크로 교수께서는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교회가 나서서 성경의 근본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보면 한국의 최대 교파인 장로교의 근간인 칼빈을 비롯해 후기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개발 경쟁을 지원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신이 주신 선물이다'라는 말도 자주 듣곤하는데, 기독교 정신이 자본주의의 대안이라는 주장에 의문이 생깁니다.
울리히 두크로 "칼빈주의 기독교가 자본주의와 관계가 깊다는 선입견이 있지만, 실상은 아닙니다. 부는 '모든 사람이 충분히 소유하고 풍성하게 갖도록 공유돼야 한다'는 것이 칼빈의 가르침입니다. 자본주의는 루터가 나온 15, 16세기보다 훨씬 전인 13, 14세기에 출현했어요. 루터 이전에도 와잇 클릭비라는 기독교인은 자본주의 때문에 고통받는 농민들과 함께 운동을 해왔고, 나중에 나온 루터도 자본주의에 반대했습니다.
자본주의의 뿌리는 기원전 8세기 화폐가 거래되기 시작한 그 시점에 있는데, 나중에 후기 자본주의시대만 확대해서 자본주의라고 강조되고 있죠. 옛날 종교인들, 노자, 공자, 예수, 부처,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이들 모두는 이 탐욕적인 돈에 대해 거리를 두도록 가르쳤습니다. 루터도 성경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정신을 당시 교회에 불어넣었습니다. 개혁가들은 이후 출현하는 발전된 자본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죠. 다만 그 이후에 등장한 미국 청교도주의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기독교를 제압하고, 자본주의와 하나로 연결돼 나갔던 겁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요구하는 건 우리가 피부로 경험하는 지구의 파괴를 막기 위해 모든 공동체가 다같이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경제와 개발의 탐욕에서 개인들도 벗어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일을 최후의 심판 때 핵심 기준으로 삼아 가난한 자들과 예수님을 완전하게 동일시했습니다.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무엇보다 자발적인 분배 현상이 일어나야 하고, 그럼으로써 평등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칼빈을 비롯해 칼빈을 따르는 이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제도화된 탐욕이 개인적인 욕망과 하나로 엮어져 축적돼 왔습니다. 자본주의는 사람의 욕심과 탐심을 필요로 하고, 그 탐심으로 계속 강화되고, 그것이 더 거세지는 제도입니다. 그리스도 정신과는 반대입니다."
도법 스님 "20세기 100년을 보면, '더 많이 갖자, 더 편해지자, 그러면 세상은 더 좋아질 것이다'라며 달려왔습니다. 특히 한국 사회는 그렇게 해서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이뤘죠.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국민총생산(GNP) 100달러 수준에서 지금은 2만달러이니 200배 더 커졌지만, 사람 관계는 극단적으로 불신하고 미워하면서 결국은 젊은이들의 자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연 생태까지 심각하게 파괴하고 오염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농촌 사회는 해체되고, 농업은 무너지고, 그것이 국민들의 생명과 건강을 병들고 위험하게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어디에서 우리가 길을 잃은 것인가?' 저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그 심층적인 원인이 잘못된 세계관에서부터 나옵니다. 이 세상은 한 사람, 한 사람 존재들이 다 연결돼 있고, 의지해 있고, 영향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 전통 속에는 이런 세계관과 정신으로 살았던 마을 공동체가 있었죠. 그 마을 공동체의 내용을 단순화시키면 이웃과 이웃이 서로 믿고 협력하고 나누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문화가 됐고, 마을의 운영 체계로 제도화돼 살아왔습니다."
▲ '불교인은 오랜 시간 깨달음의 관념에 구속되어 고통 받아 오고, 기독교인은 신의 관념 속에 구속되어 고통 받아 왔다'고 관념을 벗어나야 한다고 발언하는 도법스님.
ⓒ 안희경
- 공동체적인 삶이 지속가능한 대안이 되려면, 그 안에는 안정된 일자리가 마련돼야 한다고 봅니다. 과당 경쟁은 모두가 소유하기 어려운 제한된 조건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 아닐까요?
도법 스님 "우리에겐 소유도 필요하고, 생활의 편리를 위한 기술도 필요합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심각한 모순과 위험에 직면했어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중심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 관계에서 서로 신뢰를 회복했을 때, 자본주의의 이기주의, 경쟁주의, 정복주의를 넘어서거나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나온다고 봅니다."
울리히 두크로 "행복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어느 정도까지만 충족되면 행복하다고 느낀다고 합니다. 그 상태에서 더 많이 가질수록 행복이 증가하지는 않다고 나옵니다. 그럼 무엇이 진정으로 행복하게 우리를 만들어 주느냐 하면, 그것은 좋은 관계에서 나와요. 단 둘의 사이뿐만 아니라, 자연이나 사회와의 관계도 원만해야 행복합니다.
이는 종교적인 신념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본은 증식한다'라고 정의되는 그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자본은 환금 자산을 말하는데, 이는 더 많이 가지면 늘어날 것이라는 정의죠. 자본은 반드시 증식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산업화 사회는 우리에게 에너지와 자원도 투자의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제한적인 지구에서 제한없이 증식될 거라는 아이디어입니다. 그런데, 만약 모든 지구 사람들이 미국인처럼 생활하려고 한다면 지구가 6개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합니다. 유럽 사람처럼 살려면 지구가 3개 더 필요하죠. 이 의미는 자본주의가 수학적으로 가능성이 없는 제도라는 걸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모든 사람을 충족시켜줄 경제가 필요합니다. 이는 불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이며, 성경에도 나와있는 내용입니다. 나누는 겁니다.
지구에서 생산되는 것을 모든 사람이 똑같이 나눈다면, 모두 충분하게 소유할 수 있습니다. 지구의 생산량은 120억 사람에게 충분하다는 UN 연구자료에 따르면, 현재 70억 지구 인구가 충분히 나눌 수 있는 양이 되고, 우리 손자들도 이 지구를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지게 됩니다."
도법 스님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감각적으로 물질적 풍요를 갈망합니다. '왜 계속 인간이 탐욕을 부리는가?'에 대한 해답이 없다는 것이 현재의 문제입니다."
울리히 두크로 "자본주의는 탐욕을 반겼고, 탐욕이야말로 경제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자본주의가 근본적 문제입니다. 환경 문제, 사회 문제에 대한 해답을 자본주의에서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변화를 가져갈 수 있을까요? 시스템과 개인의 욕망을 다스리는 새로운 협동경제가 필요합니다. 오스트리아에서 2년 전에 15개 중소기업들이 '공동의 선'을 향한 착한 경제를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재투자하도록 이윤을 내지만, 기업 정신은 이윤을 내는 것이 주요 목표가 아니라 좋은 기업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년 뒤에 800개 이상의 중소기업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겠다고 모여들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우리 시대의 경제를 치유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여기서 스님에게 익숙한 인도의 예를 들어 봅시다. 농사가 기업형 농업으로 바뀌었습니다. 기업으로 바뀌고 나서 매일 평균적으로 54명의 농부가 자살했습니다. 자본화된 농업으로 인해 빚 때문에 죽은 겁니다. 그리고 작은 기업들이 새로운 협동의 양식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착한 경제를 위해서죠. 건강한 먹거리 이런 경제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경제입니다. 동시에 사회 운동도 신자유주의가 증진하려고 했던 수자원, 에너지, 교통의 사유화를 막고자 나서고 있습니다."
도법 스님 "네, 이 욕망이 제도화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죠. 왜 이기적 욕망에 매몰될까? 불교의 세계관으로 보면,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따로 홀로는 살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동시에 어떤 누구도 온전히 함께만 살 수도 없게 되어 있죠. 어떤 측면은 함께 살아야 할 부분이 있고, 어떤 측면은 또 따로 살아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함께 하는 부분은 거의 사라지고, 온통 개인으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따로'와 '함께'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생명의 법칙, 존재의 법칙에 대한 집중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도 더불어 함께 사는 개인의 주체적 역할도 중요하고, 이런 세계관이 사회의 시스템과 문화로도 반영돼야 합니다. 협동과 나눔의 삶을 문화와 철학으로 그리고 사회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 울리히 두크로 교수의 대안은 경쟁의 틀을 협동 틀로 바꿔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착한 경제를 지향하자는데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도법 스님께서 무게를 더 두는 부분은 '주체의 자립이 결국은 타인의 협조 속에서 가능할 수 밖에 없다'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명 본질에 대한 이해를 높여 인식 전환으로 현실적 방법을 모색해 나가자는 데 있다고 볼 수 있구요.
하나의 지향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에서 집중하는 부분이 교차하지만, 이 둘이 하나가 될 때 보다 지속가능한 변화를 이루는 동력이 될 수 있다 여겨집니다. 이 시간이 계기가 되어 더욱 활발한 동서 교류, 종교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연대가 이뤄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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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두크로(Ulrich Duchrow) 하이델베르크 석좌 교수
울리히 두크로는 조직신학과 에큐메니칼 신학 교수로서 사회·경제적 문제를 집중 연구해온 석학이다. 경제와 생태적 정의를 키워가고자 조직된 세계 교회주의 풀뿌리 네트워크인 카이포스 유로파 공동 창업자고,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 따른 폐해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창립된 국제금융관세연대(ATTAC)을 독일에 창설하였다.
울리히 두크로는 금융자본을 통한 종속적 세계화 반대 및 대안 세계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여러나라 언어로 번역된 여러 책을 펴냈다. 국내에 출간된 저서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대안>, <성서의 정치경제학> 등이 있으며, 2012년에는 독일어와 영어로 <탐욕의 돈 초월하기>를 써서 화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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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 스님(조계종 '자성과 쇄신 결사추진본부' 화쟁위원회 위원장)
18살이 되던 해 출가했고, 1990년 불교 결사체인 선우도량을 만들어 청정불교 운동을 이끌었다. 1995년 지리산 실상사 주지로 부임해 귀농학교, 대안학교, 환경운동 등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운동을 펼쳤다. 2004년 실상사 주지 소임을 내려놓은 후, 생명평화 탁발순례의 길을 떠났다.
이후 5년 동안 3만 리를 걸으며 8만 명의 사람을 만나 생명 평화의 가치를 전했다. 현재 지리산 실상사 회주이자, 대한불교 조계종 '자성과 쇄신 결사추친본부' 화쟁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며, 다툼 없고 평화로운 사회로 가는 길을 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지금 당장>, <내가 본 부처>, <망설일 것 없네 당장 부처로 살게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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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와 '예수', 한반도의 해법을 고민하다
[대담] 도법 스님과 울리히 두크로 하이델베르크 석좌 교수
13.05.08
▲ 도법 스님
ⓒ 안희경
지난 4월 19일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 제임스 채플에서 도법 스님은 세계에서 모인 신학도와 불교도에게 질문을 던졌다.
"붓다가 도둑질을 했다면, 그를 무엇이라고 부르겠습니까?"
도법 스님의 답이다. "그렇다면 그는 도둑입니다." 이어서 "불교인은 오랜 시간 깨달음의 관념에 구속돼 고통 받아 오고, 기독교인은 신의 관념 속에 구속돼 고통 받아 왔다"고 꼬집었다. 도법 스님은 "붓다의 뜻, 예수의 뜻은 관념이 아니라 행위로써, 실천으로써 좇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순간의 침묵 뒤에 청중의 뜨거운 박수가 이어졌다.
도법 스님은 "지금 당장 붓다처럼 행동하고, 예수처럼 실천하자"라고 강하게 당부했고, 이는 환경 파괴, 여성·인종 차별, 전쟁과 폭력, 경제적 불평등, 내면의 성찰 등 세계의 석학과 활동가들이 발표하고 토론해 온 '세계 불교 기독교 콘퍼런스'의 여러 의제를 압축적으로 모아낸 본질적 메시지가 됐다.
바로 그 붓다의 행동, 예수의 실천이 현재 고통 받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해 봤다. 도법 스님과 독일의 행동하는 석학이자 신학자인 울리히 두크로 교수와의 대담이다.
"평화 운동의 진짜 열쇠는 긴장 해소에 있어"
울리히 두크로는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조직신학과 석좌교수로서, 사회·경제적 문제를 연구해온 석학이며, 금융 세계화에 따른 폐해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국제조직인 국제금융관세연대(ATTAC)의 독일 지부를 만든 활동가이기도 하다. 이번 콘퍼런스에서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고통'이라는 주제 발표를 했으며, 국내에도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대안>, <성서의 정치경제학> 등 그의 저서가 소개돼 있다.
도법 스님과 울리히 두크로 교수의 대담은 지난 4월 19일 오후 9시 유니언 신학대학 소셜홀에서 필자의 사회로 진행됐다.
▲ 울리히 두크로 교수.
ⓒ 안희경
- 두 가지 큰 줄기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한국인들이 당면한 안보 문제로, 위협적인 갈등에서 벗어나 평화를 키워가는 해법이고요. 두 번째는 평화 문제를 포함해 모든 갈등의 바탕을 이루는, 점점 더 치열해지는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환경적인 재앙까지 빈번하게 이어지면서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이기에 공포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울리히 두크로 "두 가지는 하나로 연결돼 있지요. 평화 역시 자본주의와 관계되니까, 하나를 짚어도 전체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우선, 50년 넘도록 초강대국들의 게임장이 돼버린 한반도와 그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한국인에게 안타까운 제 마음을 전합니다.
미국은 한국을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오래된 전진기지에서, 중국을 에워싸는 기지로 바꿔가고 있습니다. 지난해 1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태평양에 군사력을 새롭게 배치했죠. 800여 개의 미군부대가 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미국이 서방에 자신들의 이런 군사 계획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카운터 파트너로 북한이 필요하겠구나 싶습니다.
한반도는 미국의 관심이 가장 고조된 지역입니다. 여기 얽혀 있는 중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인 관점까지 포괄적으로 비판하지 않고는 한반도 긴장을 풀기 어렵죠. 바로 이런 국제적인 관점에서 미국과 강대국들의 전략과 선전을 해체해내야 합니다. 서구 사람들도 한국인들과 연대하며 일할 수 있습니다."
도법 스님 "한반도 문제는 당사자가 남과 북이잖아요. 현재 상황에서 보면 북한에 비해 남한이 경제력을 위시해 국력이 월등하니까, 대한민국이 주체적으로 어떻게 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이 서로 갈등하고 있습니다. 진영을 넘어서서 민족의 문제를 함께 풀려는 입장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는 (이런 상황에서) 종교인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식민지 아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경험이 있어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기독교 입장, 천도교 입장, 불교 입장을 내려놓고 하나로 행동했죠.
왜냐하면, 그때 민족의 최우선 과제는 기독교도, 천도교도, 불교도 아니었기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정당성을 가지려면 종교계가 한반도의 평화,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나서야 합니다. 각 구성원들에게 교육하고, 한국 사회에 공론화시켜야 합니다. 우리 국민이 사안을 절실하게 바라보도록 바탕을 만들어놓게 된다면, 정부와 대통령도 그런 방향에서 바라보게 된다고 봅니다.
이 바탕 위에서 중국을 설득하고, 미국을 설득하고, 일본과 러시아를 설득해 우리 입장을 관철할 힘을 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런 주체의 자각 없이는 결국 우리 의지와 관계없이 또다시 분단 초기처럼 흘러가리라 봅니다."
- 국제적인 관계 속에서 보려는 두크로 선생과 달리 도법 스님은 한국인 내부의 인식과 노력을 강조하며 그 속에 분산돼 있는 역량의 대립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미 통일을 경험한 독일의 경우 역시 강대국들 속에서 주체의 역량을 키우기 어려웠던 환경이었다고 보는데요. 어떻습니까?
울리히 두크로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 냉전시대 동독과 서독은 강력한 평화운동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평화운동에서 '보편적인 안보 개념'을 키워야 한다는 겁니다. 세계의 열강들은 한국과 북한이 서로를 적대시하며 긴장 속에서 지켜가는 안보를 원합니다.
독일에서도 그랬죠. 그러나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세력들은 안보란 '동독과 서독이 협력해서 이뤄내는 평화'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어요. 적대시하는 대립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는 상태가 진정한 안보라는 입장을 키워갔습니다. 평화운동의 진짜 열쇠는 긴장을 해소하고 사람들이 함께 하는데 있습니다."
GNP 200배 성장한 지금의 한국, 왜 길을 잃었을까
▲ 참여불교 심포지엄에서 발표하는 도법 스님과 이를 통역하는 혜민 스님.
ⓒ 안희경
- 한국인들의 입장 가운데 대등한 군사력으로, 힘의 균형을 통해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자는 입장도 있고, 또 통일 자체에 대해 혼돈과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며 부담스러워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어쩌면 '전쟁으로도 내 삶을 흔들지 말고, 통일로도 부담을 주지 말라'는 피로감일 수도 있겠습니다. 현재 그만큼 살기 힘들다는 호소입니다.
도법 스님 "그건 이분법적인 접근입니다. 지난 100년 동안 우리의 생활 깊숙히 파고 들어온 '너를 이겨야 내가 산다'는 문화입니다. 이분법적 세계관과 적대적 방법론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반응하는 한 끊임없이 죽임과 죽임을 당하는 불안과 공포가 생산될 수밖에 없어요. 이미 우린 역사 속에서 그걸 확인했습니다.
미국의 국익 논리, 대한민국의 국익 논리, 한반도 우리 민족의 이익 논리에서 진짜로 바라본다면, '지금의 분단 상황이 돈 벌기에 더 좋고, 내 기득권을 지키기 더 좋다'는 입장은 몇몇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국익이라고 할 때는 국가 구성원 전체를 염두에 둬야 하고, 한반도의 이익도 민족 구성원 전체의 이익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큰 방향과 기본 원칙을 확고하게 해서 단계별로 접근해 나가야 합니다. 평화를 일궈내는 일을 종교계가 풀어내면, 지역적인 사안과 개별적인 사안들도 많이 풀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 여기서 현재 경제시스템의 조건을 바라볼 때라고 봅니다. 울리히 두크로 교수께서는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교회가 나서서 성경의 근본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보면 한국의 최대 교파인 장로교의 근간인 칼빈을 비롯해 후기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개발 경쟁을 지원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신이 주신 선물이다'라는 말도 자주 듣곤하는데, 기독교 정신이 자본주의의 대안이라는 주장에 의문이 생깁니다.
울리히 두크로 "칼빈주의 기독교가 자본주의와 관계가 깊다는 선입견이 있지만, 실상은 아닙니다. 부는 '모든 사람이 충분히 소유하고 풍성하게 갖도록 공유돼야 한다'는 것이 칼빈의 가르침입니다. 자본주의는 루터가 나온 15, 16세기보다 훨씬 전인 13, 14세기에 출현했어요. 루터 이전에도 와잇 클릭비라는 기독교인은 자본주의 때문에 고통받는 농민들과 함께 운동을 해왔고, 나중에 나온 루터도 자본주의에 반대했습니다.
자본주의의 뿌리는 기원전 8세기 화폐가 거래되기 시작한 그 시점에 있는데, 나중에 후기 자본주의시대만 확대해서 자본주의라고 강조되고 있죠. 옛날 종교인들, 노자, 공자, 예수, 부처,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이들 모두는 이 탐욕적인 돈에 대해 거리를 두도록 가르쳤습니다. 루터도 성경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정신을 당시 교회에 불어넣었습니다. 개혁가들은 이후 출현하는 발전된 자본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죠. 다만 그 이후에 등장한 미국 청교도주의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기독교를 제압하고, 자본주의와 하나로 연결돼 나갔던 겁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요구하는 건 우리가 피부로 경험하는 지구의 파괴를 막기 위해 모든 공동체가 다같이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경제와 개발의 탐욕에서 개인들도 벗어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일을 최후의 심판 때 핵심 기준으로 삼아 가난한 자들과 예수님을 완전하게 동일시했습니다.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무엇보다 자발적인 분배 현상이 일어나야 하고, 그럼으로써 평등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칼빈을 비롯해 칼빈을 따르는 이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제도화된 탐욕이 개인적인 욕망과 하나로 엮어져 축적돼 왔습니다. 자본주의는 사람의 욕심과 탐심을 필요로 하고, 그 탐심으로 계속 강화되고, 그것이 더 거세지는 제도입니다. 그리스도 정신과는 반대입니다."
도법 스님 "20세기 100년을 보면, '더 많이 갖자, 더 편해지자, 그러면 세상은 더 좋아질 것이다'라며 달려왔습니다. 특히 한국 사회는 그렇게 해서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이뤘죠.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국민총생산(GNP) 100달러 수준에서 지금은 2만달러이니 200배 더 커졌지만, 사람 관계는 극단적으로 불신하고 미워하면서 결국은 젊은이들의 자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연 생태까지 심각하게 파괴하고 오염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농촌 사회는 해체되고, 농업은 무너지고, 그것이 국민들의 생명과 건강을 병들고 위험하게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어디에서 우리가 길을 잃은 것인가?' 저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그 심층적인 원인이 잘못된 세계관에서부터 나옵니다. 이 세상은 한 사람, 한 사람 존재들이 다 연결돼 있고, 의지해 있고, 영향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 전통 속에는 이런 세계관과 정신으로 살았던 마을 공동체가 있었죠. 그 마을 공동체의 내용을 단순화시키면 이웃과 이웃이 서로 믿고 협력하고 나누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문화가 됐고, 마을의 운영 체계로 제도화돼 살아왔습니다."
▲ '불교인은 오랜 시간 깨달음의 관념에 구속되어 고통 받아 오고, 기독교인은 신의 관념 속에 구속되어 고통 받아 왔다'고 관념을 벗어나야 한다고 발언하는 도법스님.
ⓒ 안희경
- 공동체적인 삶이 지속가능한 대안이 되려면, 그 안에는 안정된 일자리가 마련돼야 한다고 봅니다. 과당 경쟁은 모두가 소유하기 어려운 제한된 조건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 아닐까요?
도법 스님 "우리에겐 소유도 필요하고, 생활의 편리를 위한 기술도 필요합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심각한 모순과 위험에 직면했어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중심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 관계에서 서로 신뢰를 회복했을 때, 자본주의의 이기주의, 경쟁주의, 정복주의를 넘어서거나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나온다고 봅니다."
울리히 두크로 "행복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어느 정도까지만 충족되면 행복하다고 느낀다고 합니다. 그 상태에서 더 많이 가질수록 행복이 증가하지는 않다고 나옵니다. 그럼 무엇이 진정으로 행복하게 우리를 만들어 주느냐 하면, 그것은 좋은 관계에서 나와요. 단 둘의 사이뿐만 아니라, 자연이나 사회와의 관계도 원만해야 행복합니다.
이는 종교적인 신념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본은 증식한다'라고 정의되는 그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자본은 환금 자산을 말하는데, 이는 더 많이 가지면 늘어날 것이라는 정의죠. 자본은 반드시 증식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산업화 사회는 우리에게 에너지와 자원도 투자의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제한적인 지구에서 제한없이 증식될 거라는 아이디어입니다. 그런데, 만약 모든 지구 사람들이 미국인처럼 생활하려고 한다면 지구가 6개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합니다. 유럽 사람처럼 살려면 지구가 3개 더 필요하죠. 이 의미는 자본주의가 수학적으로 가능성이 없는 제도라는 걸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모든 사람을 충족시켜줄 경제가 필요합니다. 이는 불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이며, 성경에도 나와있는 내용입니다. 나누는 겁니다.
지구에서 생산되는 것을 모든 사람이 똑같이 나눈다면, 모두 충분하게 소유할 수 있습니다. 지구의 생산량은 120억 사람에게 충분하다는 UN 연구자료에 따르면, 현재 70억 지구 인구가 충분히 나눌 수 있는 양이 되고, 우리 손자들도 이 지구를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지게 됩니다."
도법 스님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감각적으로 물질적 풍요를 갈망합니다. '왜 계속 인간이 탐욕을 부리는가?'에 대한 해답이 없다는 것이 현재의 문제입니다."
울리히 두크로 "자본주의는 탐욕을 반겼고, 탐욕이야말로 경제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자본주의가 근본적 문제입니다. 환경 문제, 사회 문제에 대한 해답을 자본주의에서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변화를 가져갈 수 있을까요? 시스템과 개인의 욕망을 다스리는 새로운 협동경제가 필요합니다. 오스트리아에서 2년 전에 15개 중소기업들이 '공동의 선'을 향한 착한 경제를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재투자하도록 이윤을 내지만, 기업 정신은 이윤을 내는 것이 주요 목표가 아니라 좋은 기업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년 뒤에 800개 이상의 중소기업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겠다고 모여들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우리 시대의 경제를 치유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여기서 스님에게 익숙한 인도의 예를 들어 봅시다. 농사가 기업형 농업으로 바뀌었습니다. 기업으로 바뀌고 나서 매일 평균적으로 54명의 농부가 자살했습니다. 자본화된 농업으로 인해 빚 때문에 죽은 겁니다. 그리고 작은 기업들이 새로운 협동의 양식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착한 경제를 위해서죠. 건강한 먹거리 이런 경제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경제입니다. 동시에 사회 운동도 신자유주의가 증진하려고 했던 수자원, 에너지, 교통의 사유화를 막고자 나서고 있습니다."
도법 스님 "네, 이 욕망이 제도화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죠. 왜 이기적 욕망에 매몰될까? 불교의 세계관으로 보면,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따로 홀로는 살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동시에 어떤 누구도 온전히 함께만 살 수도 없게 되어 있죠. 어떤 측면은 함께 살아야 할 부분이 있고, 어떤 측면은 또 따로 살아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함께 하는 부분은 거의 사라지고, 온통 개인으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따로'와 '함께'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생명의 법칙, 존재의 법칙에 대한 집중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도 더불어 함께 사는 개인의 주체적 역할도 중요하고, 이런 세계관이 사회의 시스템과 문화로도 반영돼야 합니다. 협동과 나눔의 삶을 문화와 철학으로 그리고 사회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 울리히 두크로 교수의 대안은 경쟁의 틀을 협동 틀로 바꿔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착한 경제를 지향하자는데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도법 스님께서 무게를 더 두는 부분은 '주체의 자립이 결국은 타인의 협조 속에서 가능할 수 밖에 없다'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명 본질에 대한 이해를 높여 인식 전환으로 현실적 방법을 모색해 나가자는 데 있다고 볼 수 있구요.
하나의 지향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에서 집중하는 부분이 교차하지만, 이 둘이 하나가 될 때 보다 지속가능한 변화를 이루는 동력이 될 수 있다 여겨집니다. 이 시간이 계기가 되어 더욱 활발한 동서 교류, 종교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연대가 이뤄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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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두크로(Ulrich Duchrow) 하이델베르크 석좌 교수
울리히 두크로는 조직신학과 에큐메니칼 신학 교수로서 사회·경제적 문제를 집중 연구해온 석학이다. 경제와 생태적 정의를 키워가고자 조직된 세계 교회주의 풀뿌리 네트워크인 카이포스 유로파 공동 창업자고,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 따른 폐해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창립된 국제금융관세연대(ATTAC)을 독일에 창설하였다.
울리히 두크로는 금융자본을 통한 종속적 세계화 반대 및 대안 세계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여러나라 언어로 번역된 여러 책을 펴냈다. 국내에 출간된 저서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대안>, <성서의 정치경제학> 등이 있으며, 2012년에는 독일어와 영어로 <탐욕의 돈 초월하기>를 써서 화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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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 스님(조계종 '자성과 쇄신 결사추진본부' 화쟁위원회 위원장)
18살이 되던 해 출가했고, 1990년 불교 결사체인 선우도량을 만들어 청정불교 운동을 이끌었다. 1995년 지리산 실상사 주지로 부임해 귀농학교, 대안학교, 환경운동 등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운동을 펼쳤다. 2004년 실상사 주지 소임을 내려놓은 후, 생명평화 탁발순례의 길을 떠났다.
이후 5년 동안 3만 리를 걸으며 8만 명의 사람을 만나 생명 평화의 가치를 전했다. 현재 지리산 실상사 회주이자, 대한불교 조계종 '자성과 쇄신 결사추친본부' 화쟁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며, 다툼 없고 평화로운 사회로 가는 길을 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지금 당장>, <내가 본 부처>, <망설일 것 없네 당장 부처로 살게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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