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信연구소 오늘, 23.07.17(월)>
-우리시대와 페스탈로치-
#입법과 신생아 살해(1)
오늘은 제헌절입니다. 서울 제가 사는 동네 가까이에 해방후 새로 시작하는 나라의 헌법을 마련하기 위해서 제헌위헌들이 모여서 토의하고 고심하던 제헌회관 터가 있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이 검찰 국가로 전락한 상황에서 제헌, 법이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어이없이 땅에 던져질 수 있는지를 보지만 그래도 우리 공동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다시 진정 입법이 관건이고 기초인 것을 봅니다.
오늘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영아살해 문제가 심각한 이슈가 된 상황에서 이미 그것은 박근혜 정부에서도 심각했던 상황이라 더 멀리 18세기 유럽에서 유사하게 이 문제로 포효했던 페스탈로치의 외침을 가져왔었습니다.
지금부터 250여년전 유럽의 상황이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과 유사하니 아직 우리는 그렇게 뒤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주 이 문제에 오래 천착해온 지인과 만나면서 다시 제가 2017년에 에큐메니언에 연재하고 있던 <우리시대와 페스탈로치>의 글 중 이 주제가 생각났고, 그것을 가져왔습니다. <입법과 신생아 살해>를 총 3회에 걸쳐 실었는데 지금 윤정부가 얼마나 촛불정국 전의 박정부와 닮았고, 그 이상임을 보게 합니다. 앞으로 세번 공유하겠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에큐메니안 모바일 사이트, ‘우리 시대와 페스탈로치’의 성찰을 시작하며 [1]
‘우리 시대와 페스탈로치’의 성찰을 시작하며
기사승인 2016.12.01
- <이은선의 집언봉사執言奉辭 22>
지난 11월14일부터 16일까지 홍콩에서 ‘한반도 평화조약에 관한 국제 에큐메니칼 컨퍼런스’가 열렸었다. 개회예배에서 성서연구를 담당했던 나는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는 두 가지 핵심 힘(Two key forces for bringing peace to the world)”이라는 제목으로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 가족의 이야기를 택했다. 거기서 나는 인생 파국의 마지막에도 삶에 남아있게 해주는 인간 내적 힘으로서 먼저 가족에 대한 사랑과 염려를 들었다. 그리고 요셉 당시 이방인 요셉 가족에게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땅을 내어주겠다고 하는 당시 최강국 이집트 파라오 왕의 선언처럼 시대의 강국들이 보여주는 넓은 마음, 관대함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는 두 번째 요소라고 밝혔다.
여기에 반해서 오늘 우리 시대는 모든 정황이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혹독하게 성과위주의 교육으로 시달림을 받는 아이들은 가족과 부모에 대한 사랑은커녕 자신의 부모조차도 적으로 돌리는 일에 익숙하다. 결혼, 자식 등의 3포를 넘어서 n포 시대라는 이 시대의 젋은이들에게 이런 인간 보편의 힘을 기대하기란 더 이상 어려울 것 같다. 여기에 더해서 영국의 EU탈퇴, 미국의 트럼프대통령 당선, 이웃 일본 아베정부의 평화헌법 포기 등은 오늘 세계 정치상황이 강대국들의 관대함과는 정확히 반대로 가는 것임을 확실히 한다. 그리고 국내적으로 지금 속속들이 드러나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한국 상황은 우리의 미래가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위기인 것을 드러내준다.
페스탈로치(H.J. Pestalozzi, 1746-1827)
그래서 나는 더 이상 18세기 유럽 계몽주의와 인문주의의 기수, 스위스의 페스탈로치를 찾는 일을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페스탈로치(J.H.1746-1827)는 우리에게도 그 이름으로는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사실 그의 삶과 행적, 사고 면에서는 그렇게 많이 밝혀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는데, 우선 나도 포함해서 한국에 본격적인 페스탈로치 연구가가 그리 많지 않지만 그들도 또한 이 연구에 그렇게 몰두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페스탈로치 자신이 워낙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으로 생을 살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연구가 어느 한 분야의 일로 한정될 수 없어서 오히려 소홀해 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그 시대의 뛰어난 정치 철학자였고, 사회운동가였으며, 문학가였고, 학교교사와 행정가, 신학자, 저술가, 민중교육운동가로서 유럽 교육의 코페르니쿠스적 전기를 마련한 사람 등으로 평가된다.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의 시기에 페스탈로치는 당시 유럽 계몽주의 운동의 한 중심지였던 취리히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의 조국 스위스와 유럽을 살리는 길로서 법률가와 목사의 길을 마다하고 농촌을 선택한 농민 운동가였다. 대학시절 금서였던 루소의 책 등을 읽으며 ‘애국단(Patrioten)’ 활동을 열심히 한 그는 거기서 함께 했던 부인과 결혼해서 첫 보금자리를 취리히 근처의 시골에 마련하였다.
거기서 그는 10여년의 시간을 당시 정치경제적으로, 문화교육적으로 철저히 소외되어 있던 인구 99%의 농촌 민중의 삶을 개선하고자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자신도 살리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과 농촌을 살리려 한다는 조롱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모든 일을 통해서 다듬어진 정치사회적 혜안으로 유럽과 자신의 조국 스위스가 나아갈 길을 밝히는데 주력했으며, 그 결과 프랑스의 혁명정부로부터 미국의 조지 워싱턴, 영국의 벤담, 독일의 실러 등과 함께 프랑스 혁명국가의 명예시민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이 혁명 시대의 와중에서 그는 인간에 대한 다시 한번의 깊은 이해를 위해 『인류의 발전에 있어서의 자연의 과정에 대한 탐구(Meine Nachforschungen ueber den Gang der Natur in der Entwicklung des Menschengeschlechts), 1797』라는 작품도 저술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유럽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인 칸트나 헤겔, 피히테, 헤르더 등의 작품들과 견주어지는 역작이 되기도 했다. 우리가 보통 좁은 의미의 교육가로 알고 있는 페스탈로찌의 교육주저들은 모두 이러한 오랜 기간의 정치철학적, 신학적 투쟁과 고통에 찬 성찰 뒤에 다듬어진 것 들이다.
그는 당시까지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했던 유아교육과 사회교육에 눈을 떴고, 인간의 지적, 도덕적 그리고 직업적 능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들을 탐구해내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유럽의 민중들을 어떻게 인간적인 힘의 주체적 인간으로 키워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우리가 보통 좁은 의미의 교육자로 알고 있는 그의 교육 사상들 속에는 이렇게 그가 어떻게 인간 사회의 발전을 생각하는지, 그가 생각하는 참된 종교란 어떤 것인지, 당시 유럽의 정치․경제 상황에서 어떠한 공동체 생활의 모습이 인간성의 참된 계발과 고양을 위해서 요청된다고 보는지 등의 전일적 사고가 녹아있다. 그는 그러한 자신의 생각들을 열정적인 언어로 200편 이상의 저서들로 표현해 내었고, 그 중에는 수많은 우화들과 시들도 있으며, 유럽 최초의 농민소설과 수 백 통의 편지들도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당시의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보면서 나아갈 길을 모색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나는 2000년대 초에 페스탈로치에 대한 전체적인 소개를 시도한 적이 있다. 당시 출판사 ‘내일을 여는 책(대표 황덕명)’에서 내는 <처음처럼>이라는 잡지에 연재를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출판사가 재정난 등으로 그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되면서 나도 여러 가지 다른 일들로 계속해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박근혜-최순실 사태가 일어나고, 앞으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상황뿐 아니라 21세기 세계의 상황이 전개되면서 나는 다시 한 번 페스탈로치를 떠올렸다.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그가 오늘 인류 근대 산업문명 시대를 열어젖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프랑스 대혁명 전후의 시기에 어떻게 유럽 보편사의 진행을 파악했는지, 여러 강대국들에 둘러싸여서 그 강대국들 사이의 전쟁에 용병을 보내서 겨우 먹고살아온 자신의 조국 스위스가 어떻게 개혁되고 변화되어야 새로운 나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등, 그는 큰 정치와 역사의 틀 가운데서 인간 본성의 문제, 아이를 키우는 일, 가족적 삶의 의미, 지방자치의 문제, 농촌과 도시의 관계, 당시의 구제도와 정치혁명의 과정, 교육과 종교의 관계, 지도자의 부패와 사치와 민중의 도덕적 타락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참으로 다양하고 심도 깊은 물음들을 던지면서 그 답을 온 몸으로 얻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진실하고 성실한 투쟁과 고투가 나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도움이 되고 하나의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 시대도 이제 그 산업문명의 시대를 마감하고 또 다시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문명전환의 시기이고, 그래서 모든 기존의 가치체계와 제도들이 뿌리부터 흔들리면서 우리는 또 다른 토대를 세워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이번의 박근혜 사태로 페스탈로치가 프랑스대혁명 시대에 베르사이유 궁전과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한 것과 같은 일을 우리도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페스탈로치는 그 혁명 과정의 전후를 그의 유명한 『Ja oder Nein(Yes or NO, 1791)』이라는 글 등으로 잘 추적했고, 여기서 'Ja oder Nein'이란 혁명정신에 대한 긍정이냐 부정이냐의 의미이다. 처음에 이 변화와 개혁에 찬성하던 사람들도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많은 혼란과 고통, 폭력과 어려움들을 보고서 다시 그 전의 구제도 시대로 돌아가려는 유혹에 빠지자 페스탈로치는 그 과정을 참고 견디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하게 역설한다. 과정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다시 안일한 과거로 돌아가려는 유혹이 얼마나 위험한지, 어떻게 그 시기를 넘길 수 있는지 등을 그는 우리 각자의 역할, 정치와 종교, 법과 경제 등이 어떠해야 하는가 등과 연결해서 잘 밝혀낸다. 참된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서 설왕설래 했던 모든 과정들을 그는 그려내고, 예측하고, 독려하는데, 나는 그런 모든 일들을 겪고서 오늘의 유럽이 있고, 스위스가 있으며, 자유과 독립과 하나됨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사실 지난 번 8월까지 <논어>에 대한 집언봉사의 글을 마치고 이어서 그 다음 경전으로 <大學>을 잡아서 그 성찰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일이 여러 가지 다른 일로 차일피일 미루어지다가 오늘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래서 페스탈로치의 생생한 언어가 더욱 긴요하다는 판단으로 계획을 바꾸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페스탈로치와 15세기 중국 명나라 왕양명을 비교 논문을 쓰면서 그 때 전두환 정권으로 인해서 서울의 봄이 날라 가고, 다시 암흑 같은 80년대를 지나면서 나는 바젤에서 두 사상가를 읽으면서 우리의 상황을 너무도 잘 지적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또한 페스탈로치의 해법이 15세기 명나라 말기의 혹독했던 환관정치 시대의 왕양명의 그것과 어떻게 그렇게 잘 연결되는지 나는 감탄하고 또 감탄했었다.
하지만 한국에 들어와서 페스탈로치에 대한 연구는 큰 진척을 보지 못했다. 여성신학, 조선 유교 공부, 다시 오늘의 상황에서의 여성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 등이 나의 관심을 더 끌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어쩌면 왕양명이나 페스탈로치에게는 항상 더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묻게 하고, 그래서 더 자신으로 돌아가서 생각하게 만드는 인자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이들에 대한 박사학위 후 한국학과 조선유학에 더 관심하게 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페스탈로치 연구가 최현배 선생님이 일본에서 페스탈로치를 공부하고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는 우리말을 연구하는 것이 더 급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한글학자가 된 것, 고려대학교의 페스탈로치 연구가 김정환 선생님이 한국의 주체적인 무교회주의자 김교신 연구를 깊이 하신 것 등도 모두 같은 연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양명이나 페스탈로치 안에는 우리 삶의 근거와 기초, 토대를 묻게 하지만 그것들을 항상 다시 던지고 더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고 더 핵심적인 고유성이 무엇인가를 묻게 하는 특성이 있다.
틈틈이 시간을 쪼개서 글을 쓰려니 이 서문을 시작해서 마무리하는데도 일주일 이상이 걸렸다. 어제 광화문 광장 등에서의 박근혜 퇴진을 위한 제5차 촛불집회에는 사상 최대 인파가 모여 150만 이상이었다고 한다. 외신들도 앞 다투어 이 소식을 전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정치적 저항의 집회를 하면서 마치 축제처럼, 평화의 놀이처럼 할 수 있는지 놀라고 또 놀랐다고 한다.
어제 집회현장에서 8시에 모두가 불을 꺼서 지금의 암흑과 같은 현실에 저항하는 일에 함께하면서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우리가 이 혁명과 개혁의 시대를 잘 넘어서 새로운 공화국을 이 땅에 구성하고, 그것으로 이제 서구를 넘어서 한반도에서 세계 인류 문명이 나아갈 길을 밝히는 모범을 세울 수 있기를. 이 일을 위해서 이미 3백여 년 전의 일이었지만 페스탈로치라는 한 인물의 삶과 사상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소개를 시작한다. 다음번부터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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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 시대와 페스탈로치 (2)
기사승인 2016.12.16 11: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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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 청년'과 청년 페스탈로치
촛불집회에 참석한 청년들 (사진출처 : KBS)
지금 대한민국은 큰 전환과 변혁의 시기에 놓여있다. 결국 민중의 촛불로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심판을 받았고, 특검이 시작되었으며, 이제 헌재의 판결과 대선이 코앞에 닥치는 등 나라 전체가 큰 변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전열을 가다듬은 일군의 보수진영들은 이 변화와 개혁의 목소리를 무마시키고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각종 정치적 합종연횡(合縱連衡)이 일어나고 있다. 최고 250여만 명까지 모인 이번 촛불시위에서 세계가 놀란 것은 우선 그렇게 많은 숫자가 모이는데도 그것이 평화 시위로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하지만 이에 더해서 더욱 놀랍고 특별한 것은 이번 시위에 그렇게 많은 청년과 심지어는 초등학생, 중학교, 고등학생들까지 함께 했다는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미국 CNN의 서울 특파원은 이번의 서울 촛불집회에서 만난 16세의 한 한국 청소년이 왜 자신이 이렇게 거리로 나오게 되었는지를 아주 조리 있고 논리적으로 답하는 것을 듣고 매우 놀랐고 흥미로웠다고 한다. 오늘날 세계의 수많은 16세 청소년들은 그 나라의 정치나 정치 지도자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데, 한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그렇게 다른가에 대한 놀라움의 표현이었다. 이번에 한국 사람들 자신들도 매우 놀랐다. 그런 청소년들을 보면서 지금까지 헬조선이라는 말과 함께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비관이 주를 이루었으나 조금씩 희망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본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진행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한국 청년들의 애국심과 그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구와 열망이 결국 이 나라를 바꿀 것이지만, 과거 유럽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애국 청년 페스탈로치 이야기가 그 과정의 지난함을 가늠해 보게 한다.
아기스(Agis), 1765년
이번에 첫 번째로 소개할 작품은 『비판판』 제 1권에 수록되어 있는 「아기스(Agis), 1765」와 「나의 조국의 자유에 대하여(Von der Freiheit meiner Vaterstadt), 1779」이다.1) 『비판판』 1권은 그가 20세에 들어서는 1766년부터 1780년까지의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페스탈로찌는 취리히의 대학을 다니면서 당시 몽테스키외와 루소 등을 읽으며 급진적으로 정치적 개혁을 꿈꾸는 보드머 (Bodmer) 교수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애국단(Patrioten)'이라고 하는 개혁적 단체에 가입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당시 스위스는 13개의 자치주가 연방을 이루고 있는 중세적 체제였는데, 지역 간의 편차가 심했고, 특히 도시와 농촌간의 차이가 심하여 거의 도시민들에 의한 귀족 과두정치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1789) 전의 베르사이유의 사치가 잘 말하여주듯이 도시는 전통적인 근검과 단순 대신에 사치와 과두 독재에 물들어 있었고, 그 과정에서의 민중과 농민들의 고통은 심했다.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 (출처 : 위키백과)
페스탈로치의 전 삶과 사상을 지탱하는 한 축은 그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다. 그가 의식 있는 청년이 되면서 가장 먼저 자각한 것은 조국애였고, 그 조국에 대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려는 탐색이 신학과 법률 공부를 거쳐 가난한 농촌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페스탈로치에게 있어서 조국은 가정과 신앙과 더불어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고 삶에서 근간이 되는 기초 덕목들을 키울 수 있는 필수 불가결한 매체가 된다. 한 인간이 과연 어떤 대상에 대한 헌신을 통해서 자신을 넘어서 타자에 대한 배려를 배울 수 있고, 헌신이라는 것을 익히며, 희생이라는 인간적인 덕목을 배울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볼 때 ‘조국’과 ‘가정’, ‘신’에 대한 사랑 등은 가장 기초적이고도 인간적인 삶의 매개들이라는 것이다.
「아기스」는 페스탈로치가 19살의 청년으로서 쓴 글이다. 서구 민주주의의 고향으로 일컬어지는 그리스에서 B.C. 3세기 스파르타의 왕이었던 아기스의 이야기를 들어서 자신의 조국 스위스와 특히 취리히의 정치사회적, 도덕적 부패를 경고하고 그 개혁을 촉구한 글이다. 아기스는 스파르타가 전통적인 리크르고스(Lykurgs) 헌법을 버리고 소수의 사람들이 토지와 부를 독점하며 부패와 사치, 나태와 이기주의에 빠지고, 시민들은 몰락해 가는 것을 보면서 개혁을 시도하다가 처형된 비극적인 왕이었다.
페스탈로치는 강국 스파르타의 토대가 되었던 리쿠르고스 헌법의 정신을 검소와 검약, 그리고 근면으로 본다. 그러면서 그러한 기본정신들이 전쟁의 승리로 인한 부가 나라 안으로 들어오면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드디어는 “부자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범죄도 아니게 된” 때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렇게 하여서 시민들 사이의 불평등은 커지고, 예전의 스파르타의 미덕들은 사라지게 되었으며, 특히 그들의 검약과 절제, 시민이 주인이었으며 검소했지만 고상했던 그들의 독립심은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그리하여 더 이상 그들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위해서 싸우고, 귀족들의 사치와 독점은 더욱 커지는 가운데 나라 안은 온통 부패와 분쟁, 억압이 만연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아기스는 이러한 조국의 몰락을 보고서 일어서서 건국법의 처음 정신을 다시 살려내고, 그것을 통해서 나라 안에서 사치와 부패를 몰아내고 예전의 스파르타의 정신을 회복하려는 개혁정신의 왕이었다. 그는 시민들 사이의 불평등이 자신의 조국의 몰락을 가져오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보면서 시민들이 주인과 노예로 양분되고, 고상함과 자유를 향한 사랑이 사라져 버린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특히 젊은이들의 마음 속에 바로 이 삶의 고상함에 대한 이상을 다시 일깨워 주기를 바랬다. 이러한 글을 쓴 페스탈로치 자신도 당시 젊은 대학생으로서 여러 가지 삶의 실험들을 시도했다. 그는 한 벌의 옷만 걸치고 판자방에서 1주일 동안이나 기거도 해보았고, 야채와 물만으로 1주일을 넘겨보기도 하면서 사치와 부의 독점으로 변질되어가는 취리히 시의 부패와 독재에 대해서 저항했다.
아기스의 입을 빌린 페스탈로치에 따르면 오랜 동안 사치와 쾌락을 누려온 사람들의 의식은 변질되어서 옳은 것을 옳게 볼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자유가 노예상태처럼 보이며, 노예상태가 자유처럼 보인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그러한 사치와 돈에 물들지 않았으므로 그들에게서 한 희망을 보는 것이다. 아기스의 개혁은 먼저 토지를 평등하게 재분배하고, 시민들의 부채를 탕감하며, 점점 더 동질의 소수의 그룹으로 폐쇄화되어가던 스파르타 사회를 개방하여 이방인과 외국인들을 받아들이면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법정신과 근검과 절제의 덕목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개혁의 시도는 강한 보수 세력의 반발로 성공하지 못했고, 그는 처형되었으며, 그 후 스파르타와 전 그리스의 몰락이 이어졌다고 페스탈로치는 밝힌다.
이러한 글을 읽고 있으면 한 나라의 부패와 그 몰락의 과정이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본다. 오늘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일당의 사리사욕과 부패, 특권의식과 사치가 어느 정도인가가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는데도, 우리 사회의 왜곡된 보수층은 다시 그 그룹을 감싸고, 세계가 놀랄 정도로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는 젊은이와 청년들과 온 국민이 성토하는데도 그 갈 길을 막고 있다. 페스탈로치는 이 글을 통해서 사치와 부의 편중, 그러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점점 더 폐쇄화 되어가는 보수 특권세력들을 국가와 사회의 제일의 쇠퇴원인으로 보고서, 다시 검약하고, 검소하며, 선한 법외에는 어떠한 다른 상전도 갖지 않는 자유정신의 소유자들에게 그 전환을 호소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정신은 그가 거의 15년 후인 1779년에 쓴 「나의 조국의 자유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더욱 더 풍성해진 형태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조국애, 법과 자유정신, 가정, 신에 대한 신앙이라는 네 가지의 삶에 대한 처방책이 잘 연결되어서 제시된다. 그 글은 페스탈로치가 농촌으로 들어가서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시도했던 사업들이 모두 실패하고 난 후의 글이다. 「아기스」를 쓸 때와는 달리 많은 현실의 경험을 한 후였고, 그가 자신의 삶과 사상의 배아라고 이야기한 「은자의 황혼, 1780」과 유사한 정신세계가 들어있다.
나의 조국의 자유에 대하여(Von der Freiheit meiner Vaterstadt), 1779년
페스탈로찌는 나라 안의 고결한 사람들에 대한 호소의 형식으로 이 글을 연다. 과거 조상들이 조국의 안녕과 잘됨을 위해서 그렇게 애써서 자유와 독립을 획득했건만, 그 자유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독점되어버리고 그들의 욕심을 위해서 잘못 쓰이면서 나라의 안녕은 사라져 버리고 위태해졌다는 것이다. 그는 자유와 모두의 안녕이야말로 모든 축복의 근원이고 지주이며, 여기서부터 조국의 지혜와 덕목이 가능해지므로, 이것이야말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심이며 궁극적인 목표라고 선언한다.
당시 유럽 전제 왕권의 횡포와 자신의 조국이 소수 귀족적 도시인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서 페스탈로치는 원래 국가와 정부, 사회가 생겨난 이유와 목적들을 다시 짚고 넘어간다. 그것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결코 인간이 정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모든 정부가 이러한 법정신과 의무정신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나라 안녕의 기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는 특히 당시 정치체제에서 군주들이 이 법과 자유(평등)정신을 갖는 것을 강조했는데, 만약 이것이 없다면 국가에 매우 위험한 존재들이 되며, 국민들이 열심히 일하고 가정적인 행복과 덕목을 실천할 수 있고 안정될 수 있는 기초가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구제도 시기였는데, 페스탈로치도 그때는 그러한 급격한 전복을 가늠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군주와 귀족과 특권그룹의 전행을 막을 수 있는 헌법 정신과 그것의 올바른 준수를 강조했다.
페스탈로치에 따르면 애국심이란 바로 나라의 자유(평등)정신에서 길러진다. 나라에 자유가 있을 때 국민들은 나라를 사랑하게 되고, 그 자유가 위기에 처하게 될 때 기꺼이 자신들을 희생하고자 하며, 이것이야말로 시민들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시민들의 조국애야말로 자연과 혈연의 연이 되며, 여기에 근거해서 조용한 가정 삶에서 덕과 풍속들이 길러진다. 그러므로 나라에 살아있는 자유정신이야말로 국민들의 도덕심의 기반이 되며, 만약에 그 정신이 죽는다면 아무리 문자로 잘 쓰인 법률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소용없다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자유정신과 자유의식이 없이는 나라가 자유로울 수 없다.
페스탈로치는 이러한 헌법정신과 자유정신이야말로 또한 나라 산업과 경제의 밑받침이 된다고 밝힌다. 그에 따르면 자유의 첫 열매는 바로 안정된 빵이며 경제를 보장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페스탈로치는 바로 이렇게 모두가 안정되게 빵을 즐길 수 있고, 가정의 안녕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인간 삶의 최대 축복이라고 하면서 이것을 위해서 나라에 자유가 없을 때 자유를 위해서 싸우며 희생할 각오를 가지는 것이라고 밝힌다. 다시 말하면 자유가 우리의 가정적 평안을 가능케 해주지만, 그 가정적 평안이야말로 바로 자유의 최종목표이며, 참된 자유는 그래서 국가의 축복이며, 그러한 자유란 그러나 배고픔에 시달리고, 비참에 빠져있는 가정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한 그 자유란 시민들의 평범한 직업을 무시하고 깔보는 도시 귀족들의 집에서도 결코 발견할 수 없다고 언급한다.
오늘의 우리와 페스탈로치
페스탈로치는 이렇게 자유(평등)정신이 당시 자신의 조국과 도시들에서 사라지고, 부자와 귀족들은 점점 더 사치와 자신들만의 특권의식으로 구별해가며, 평범한 시민들은 자신들의 건전한 직업생활 속에서 가정적 안정과 인간적 긍지를 지킬 수 없게 되는 것을 보면서 조국의 깊은 타락을 본다. 그에 의하면 국가 헌법의 최종목표와 정신은 바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인간적인 건전한 자긍심 속에서 가능케 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통해서 국가공동체내에 검소와 겸손, 근면과 친절과 공동체 의식을 가능케 하는 일이다.
이와 반대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갈등하고 모두가 서로에게 교만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서로 점점 더 높아지려고만 한다면 이것은 모든 타락과 비참의 시작이며, 여기서 아이들과 같은 약자가 제일 고통을 당한다고 경고한다. 오늘 우리 사회를 그대로 보는 것 같고, 또한 우리 정부가 그렇게 강조하는 경제도 바로 평범한 사람들의 인간적인 자긍심과 가정적 안정에서 온다는 것을 당시 20대의 젊은이도 잘 파악했는데, 왜 오늘의 위정자들,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한 경제 전문가들은 무시하고 그것을 그들 정책의 기초로 삼지 않는지 한탄이 저절로 나온다.
페스탈로치는 이렇게 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조국의 구원의 길을 밝혔다. 그것은 나라의 법정신의 회복과 모두의 자유를 존중하는 자유의식과 그러한 의식이 키워질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가정적 평안과 안정의 구축이었다. 이러한 인간의 기초적인 의식이 또한 신에 대한 믿음과도 연결되어,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지수와 자긍심, 도덕의식과 신앙이야말로 한 국가 안녕의 바로미터가 됨을 밝혀준다.
이러한 18세기의 젊은 애국자 페스탈로치의 글에는 비록 혁명 후라도 어떤 국가 체제 아래서도 퇴색되지 않는 치국의 보편적인 지혜가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헬조선이라는 말로 지적되는 한국적 상황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지혜이고, 또한 박근혜 정부가 물러가고 전혀 새로운 체제가 들어선다고 해도 결코 저버려서는 안되는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가 한국 사회에서 이제는 젊은이들과 대학생들에게까지도 사치와 음주, 퇴폐가 확산되었다고 한탄하지만 페스탈로치는 그러나 젊은이들이야말로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고, 아직 그러한 교만과 사치, 이기주의에 철저히 물들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실험적 생활을 통해서 국민정신이 다시 살아나기를 기대해 볼 수 있다고 설득한다. 그 젊은이들마저 돈을 제일로 보고,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책임보다는 관심이 자신에게로만 향할 때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잘 예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한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타자에 대해 헌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울 수 있는 자연스러운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 페스탈로치가 그렇게 강조한 가정에서의 부모와 자식, 형제간의 관계가 그런 것이며, 또한 언어와 전통과 삶의 공간을 같이하며 형성된 조국이라는 개념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관계가 잘 형성되지 않는 나라의 미래는 그렇게 밝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촛불시위에서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그렇게 많이 함께 한 것이 온갖 좋지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희망의 근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을 보더라도 기성세대가 결코 딴 길로 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민족과 국가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많이들 말하지만,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기 위한 최소한의 구별 근거는 필요로 하는 법이라고 페스탈로치의 글은 지시하고 있다. 그 최소한의 근거는 ‘자연의 끈’이라고도 하고, 삶에서의 ‘베이스캠프’와 같은 것이 되어서 견실한 베이스캠프에 근거해서만 더 멀리 더 높게 갈 수 있게 하는 것인데, 이러한 사고는 페스탈로치의 전 생애와 전 작품을 통해서 관통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기본적인 사랑과 정의감과 헌신의 능력이 가까운 삶의 반경에서의 경험이 아니고서는 어디에서 키워질 수 있겠는가고 계속 반문한다.
그런 의식에서 그는 프랑스 대혁명 전의 전제와 귀족적 도시민들의 횡포와 사치에 맞서서 원래 자신의 조국 스위스가 간직해온 자유정신을 다시 회복함으로써 인간의 만복의 출처가 되는 가정을 안정시키고, 중산층을 안정시키며, 그래서 다시 조국애를 싹트게 하고, 그 조국애야말로 인간 끈의 한 귀중한 축이 됨을 밝혀주려고 했다. 나는 오늘 추운 겨울날 아직 헬조선의 상황 속에서 당장 해야 하는 온갖 일들을 뒤로하고 거리로 나온 한국의 젊은이들의 마음도 그 때의 젊은 청년 페스탈로치의 그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고 감사한 마음과 함께 두려운 마음도 크다.
*각주설명 1)이번 성찰을 위해서 우리가 주로 이용할 페스탈로치 텍스트는 1927년부터 독일어권에서 발간되기 시작하여 계속되고 있는-본인이 1988년 박사학위를 받을 때는 저작 29권, 서간 13권의 총 42권이 나와 있었다-『비판판(Pestalozzi Saemtliche Werke, Kritische Ausgabe)』에 나오는 것이다. 다른 판본들에 나와 있는 작품의 해설들은 참고하겠지만 일일이 밝히지는 않겠고, 당시 스위스나 유럽의 시대사적 흐름과 관련한 그의 삶과 저술의 전기적 진행은 1988년에 출간된 취리히대학 페터 스테들러(Peter Stadler) 교수의 책 Pestalozzi Geschichtliche Biographie von der altern Ordnung zur Revolution(Verlag NZZ)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것이다.
이은선(세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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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와 페스탈로치 (3) : 우리 시대의 빈민아동은 누구인가?
기사승인 2017.01.02 11:2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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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대와 페스탈로치>
이번에 살펴볼 페스탈로치 이야기는 『가난한 농촌 아이들의 교육에 관하여 N. E. T에게 보낸 편지들(Herrn Pestalozzi Briefe an Herrn N.E.T. ueber die Erziehung der armen Landjugend), 1777』을 중심으로 한 그의 젊은 시절의 농촌운동에 관한 것이다. 앞 편에서 보았듯이 페스탈로치는 청년시절에 키웠던 애국심과 인류애를 가지고 당시 의식 있는 지식인들이 여러 가지로 시도하던 농촌운동에 큰 영향을 받아 1768년 브룩 근처의 비르펠트(Birrfeld)에 땅(약 18에이커)을 구입하여 본격적인 농촌경영에 들어갔다. 이와 더불어 취리히 대학 애국단 시절에 만나 같은 꿈을 키워왔던 안나 슐트헤스(Anna Schulthess, 1738-1815)와 그녀 집안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1769년 결혼하여 농장에서 멀지않은 뮬리겐(Muelligen)에 ‘노이호프’(Neuhof, 새집)라는 새로운 보금자리도 마련하였다.
그러나 도시사람 페스탈로치의 농촌경영은 결코 순조롭지 못했다. 그의 목초재배와 빨간 무 재배 등 새로운 농작물 재배의 실험은 뜻밖의 심한 악천후로 타격을 입었고, 이러한 가운데서 특히 그가 농촌 상황과 자신의 경제상황을 개선해 줄 수 있다고 믿었던 면직물 산업도 열매를 거두지 못하자 그의 상황은 극도로 나빠졌다. 그의 꿈과 새로운 농촌개혁의 시도에 공감하면서 투자했던 투자자들이 물러가자 그는 많은 빚을 지고 곤경과 가난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가운데서도 이들 부부는 태어난 아들 야콥을 위해서 『육아일기(Tagebuch ueber die Erziehung seines Sohnes, 1774)』를 써나갔고, 여기서 페스탈로치는 아들의 교육을 루소 『에밀』의 이상에 따라 이루어가려는 노력을 감동적으로 적고 있다.
이번에 살펴보려고 하는 페스탈로치의 가난한 농촌아이들의 교육에 관한 편지들은 이상과 같은 농장경영의 어려움과, 또한 그가 노이호프에서 시도했던 또 다른 사업인 농촌빈민학교의 운영경험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그는 당시의 시대적인 변화와 더불어 농민들이 결코 농민으로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가내 면직수공업과 더불어 확산되는 산업혁명의 물결에 따라 그는 농촌의 아이들에게 이러한 새로운 환경의 도래를 준비시켜주기를 원했다.
이에 페스탈로치는 1773년 말부터 노이호프에 가난한 농민아이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1774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빈민노동학교를 운영했다. 약 50여명의 아이들과 더불어 삼 년여를 씨름하면서 그는 어떻게 가난한 농촌아이들이 배려되어야 하며,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새롭게 교육되어져야하는지에 대해서 나름의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것을 베른 지역의 귀족으로 가난한 농민계층 교육사업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챠르너(Nikolaus Emanuel Tscharner)에게 편지로 쓴 것이고, 이 편지들을 챠르너는 바젤의 인문학자 이젤린(Issak Iselin)의 「에페메리덴(Ephemeriden)」잡지에 싣게 했다.
빈민아동교육의 출발점과 근거
페스탈로치가 스탠스에서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모습을 그린 유화. 1879년 콘라트 그로브가 그림.
페스탈로치가 보기에 당시 챠르너 등이 운영하던 공공 농촌아동시설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도시귀족 계층의 입장에서 낭만적으로 농업만을 강조하면서 아이들을 그 계층에 묶어두는 자선사업의 일종이지 진정한 의미의 빈민교육이 아니라는 것이다. 페스탈로치는 자신도 철저히 가난한 사람으로서 3년 이상을 농촌빈민아동들과 씨름해 오면서 그들이 결코 농사만을 위해서 길러져서는 안되고, 새로운 시대의 변화와 함께 스스로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생산할 수 있는 능력”(Gewerbsamkeit)에로 키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란 바로 자라나는 빈민아동들의 능력 안에 그들의 필요와 환경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놓여 있는 기초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것이 그들 교육의 출발점과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페스탈로치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필요물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에로 키워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교육은 이 가난의 근원을 막는데 있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당시 계몽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은혜의 차원에서, 구제사업의 방식으로” 행하는 공공사업이란 진정한 의미에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여기서 페스탈로치는 유명한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에로 키워져야 한다”(Der Arme muss zur Armut auferzogen werden)는 말을 한다. 이 말은 후에 그에 대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그가 이 말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가난에로 묶어두려 했으며, 그래서 당시 유럽의 앙시엥 레짐적 사회계층을 고착시키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이어지는 활동에서 뚜렷이 보듯이 그는 누구보다도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혁명정부로부터 명예시민으로 추대되기도 하였으므로 이러한 언술들이 단순한 수구 보수주의자들의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이러한 빈민교육에서의 입장은 누구보다도 그 스스로가 가난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처지를 잘 알았기 때문인데, 그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의 교육은 진정으로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그 가난의 상황과 거기서의 걸림돌이 무엇이며, 앞으로도 그들이 아마도 계속해서 살아갈 가능한 상황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정확하며 깊이 있는 인지가 요구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각각의 사회 계층은 자신들의 젊은이들을 먼저 그들이 계속해서 처하게 될 상황의 어려움들과 제약들, 한계들에 익숙하도록 키우는 것이 중요하며, 모든 직업의 훈련이란 바로 그러한 어려움들을 익히고 인내 속에서 극복해나가는 것을 배우는 일이라고 역설한다.
빈민아동교육의 방법 및 목적
페스탈로치가 이러한 말을 할 당시는 아직 프랑스 대혁명이 있기 전이었다. 그래서 사회 계층과 계급에 대한 이해가 그 이후에 보면 한계를 드러내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가 가난한 계층의 삶을 고착시키려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평생 동안 그 가난과 더불어 싸웠으며, 그가 “비참”(Elend)이라고 표현한 민중의 가난이란 “그들이 그 구렁텅이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인간이 될 수 없는” 그런 비참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난이란 단순히 누군가에 의해서 밖으로부터 치워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스스로가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 가난이 오히려 그들 교육의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그는 가졌던 것이다.
페스탈로치는 이러한 뜻에서 가난한 아이들의 교육이란 바로 그들의 자연스러운 필요에서 나온 “벌어들일 수 있는 능력”(Verdienstfaehigkeit)에 접목해서 행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에게 있어서 교육의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피교육자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행하면서 익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당시 공공 구제 사업이 섣부른 안락과 호의로 빈민의 아동들에게 단순히 베풀기만 하며 어떠한 생산력의 완결도 키워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나쁜 교육이 된다고 역설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노이호프의 빈민학교는 “생산의 정신”(der Geist der Industrie)과 아동들의 “수입능력”에 접목하여 면방적과 직조일을 한 과제로 삼았다. 챠르너에게 보내는 편지에 페스탈로치는 어떻게 6살 나이부터 시작하여 18살까지의 빈민아동들이 나름대로의 노동능력에 따라서 가내 면방직 노동에 참여하면서 수입을 올리고, 그것들이 그 빈민노동학교를 유지시키는 근원이 되며, 거기서 아이들은 노동과 더불어 가정을 얻고 교육경험을 갖게 되는지를 밝히고 있다.
아이들은 실이나 옷감을 짜는 일 등을 통해서 “완전성”(Vollkommenheit)이라는 개념을 배우게 되고, 어떤 일을 끝내는데 있어서의 “정확성”(Genauheit), “정리능력”, “민첩성”, “부지런함”, “정확한 절약성” 등을 배울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빈민아동들의 교육을 “생산노동의 정신”에 맞추어 하자고 하는 것이 결코 그들을 단순히 공장으로 보내자는 것이 아니며, 그들은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기계바퀴를 돌리기 위해 태어난 가련한 존재들이 아니라고 그는 확언한다. 당시의 많은 아이들이 그냥 고아로 방치되어 있고, 노예로 살고, 농토나 어떤 재산도 없는 집안에서 불량아로밖에 될 수 없이 떠도는 아이들에게 그는 그들의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기초로 해서 인간적인 덕목을 심어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챠르너와 더불어 페스탈로치는 빈민아동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 “도덕교육”(sittliche Endzweck)이라는 데에는 일치한다. 그러나 챠르너가 그 인간적인 덕목의 교육이 학교와 같은 시설에서만 가능하다고 본 데 반해서, 페스탈로치는 공장과 같은 노동현장 속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빈민아동들에게는 그들의 수입능력을 근거로 해서 세워진 노동학교 방법이 훨씬 더 적절한데, 왜냐하면 아이들은 여기서 ‘질서’를 배우고, 정확한 ‘절약성’을 배우며, ‘근면성’, ‘의무감’, ‘책임성’을 습득하며, 후에 자신들이 어떠한 처지에 놓이게 되더라도 스스로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기 때문이다. 페스탈로치는 자신의 노이호프에서 수용한 아이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들의 신체적 건강도 훨씬 좋아졌고, 그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여러 가지 인간적인 덕목들도 길러졌으며, 그들 노동력을 통해서 학원도 운영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으므로 커다란 확신을 가졌다.
페스탈로치는 이 농촌지역의 빈민노동학교는 농사일과 수공업의 일을 함께 할 것을 강조한다. 아이들이 도와서 농사일을 담당하면서 자신들의 먹을 것을 스스로 경작하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자연식물과 동물에 대한 지식들도 얻게 되고, 그렇게 되면서 아이들의 건강은 크게 증진되었으며, 아이들은 안정된 가정과 같은 노동학교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페스탈로치가 이렇게 자라나는 빈민아동들의 노동능력을 그들 교육과 빈곤퇴치의 훌륭한 자원으로 생각한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결코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려 했다거나 그들에게 어떠한 부드러움과 사랑도 없이 냉정하게 현실만을 각인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강조해서 밝히기를 이러한 모든 구상은 결코 그 일을 주관하는 교육자의 어버이 마음이 아니고서는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노동학교에서의 아이들은 자신의 친 아이들이고, 그는 어버이로서 아이들의 모든 노동과 교육이 그 최종목표인 참된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의 믿음에 따르면, 아무리 가난한 아이들이라도 그들 속에 이미 자연으로부터 이러한 노동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란 이미 그들 속에 놓인 힘이고, 그래서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그 힘에 접목한 교육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하고 확실한 교육이다. 그는 그래서 다시 한 번 강조하기를 빈민교육은 바로 그들의 본래적 노동정신에 근거되어야 한다. 그는 “공장과 농사, 그리고 덕성을 종합하는 위대한 정신”(der grosse Ideal der Verbindung von Fabrik, Landbau und Sitten)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 시대에 빈민아동은 누구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200여 년 전 유럽에서 산업혁명의 정신이 막 동틀 무렵 어떻게 하면 가난한 농촌 아이들이 보호받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능력에로 교육되어질 수 있을까를 살펴보았다. 페스탈로치는 당시의 사회가 더 이상 농업의 경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가난한 아이들일수록 새롭게 대두되는 환경 속에서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중요함을 알았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는 6살 나이의 아동을 벌써 노동 활동에 참여시키고 그 아이들의 상황이 가난하므로 가난의 어려움을 같이 겪게 하면서 그 가운데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자칫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또한 한국사회는 지난 20세기에 형제복지원과 같은 끔찍한 경험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페스탈로치의 제안이 현실에서 왜곡될 소지도 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오늘 제4차 산업혁명의 도래를 말하고 있고, 지금 한국 사회에서 거세게 일고 있는 촛불 혁명의 기운이 특히 젊은 세대의 가난하고 암울한 미래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을 볼 때 페스탈로치의 이러한 제안은 깊이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페스탈로치 자신도 이 실험 이후에 쓴 농민소설 『리엔하르트와 게르투르드(Lienhard und Gertrud), 1780-』를 계속 고쳐나가면서 과연 아이들의 삶과 교육에 경제의 비중이 얼마나 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고심을 하였다.
분명 시대적 한계와 그 자체의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인류의 대 스승의 사고를 만난다. 즉, 그는 끊임없이 아이들의 교육이 지금, 여기에서 그들의 필요와 스스로가 이미 가능성으로 가지고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가난한 빈민고아의 아이들이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경제적인 안정일 것이며, 그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며, 그 일 가운데서 가장 잘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절실한 것을 얻기 위해서 집중할 수 있으므로 오히려 여기에서 그 절실한 필요성이 그들 교육의 훌륭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루소도 말했듯이 진짜 가난한 사람이란 그의 욕망이 그것을 스스로 채울 수 있는 힘과 능력보다 항상 더 큰 사람이라고 한 것처럼 오늘 우리 시대의 청소년들도 많은 수의 아이들이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감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게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소비적이 되어가고, 세계는 온통 경제 시장이 되어서 사람들의 욕망을 한껏 부추기는 상황에서 우리 시대의 아이들도 소비의 욕망을 조절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있지만 그들에게는 학교 공부와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그 욕망을 스스로의 힘으로 채울 수 있는 길이 허용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마침내는 자기 파괴적인 방법으로, 또한 나쁜 어른들의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는 상황이다. 오늘날 어른들의 번창한 섹스산업과 소비산업에 건강한 경제활동에의 통로가 막힌 가난한 청소년들이 착취당하고 있는 모습이다.
오늘날 청소년들도 제일 관심하는 것은 ‘돈 버는 일’이다. 오늘의 아이들은 신체적으로도 일찍 성장해서 많은 노동을 감당할 정도로 충분히 건강하지만, 그 남아도는 에너지를 쓸 만한 관심 있는 대상을 찾지 못하여 방황한다. 그들이 온몸과 마음과 정신을 써서 바로 하고 싶은 일이 책에만 매달리는 입시공부가 아니므로 그들은 거기에 흥미를 갖지 못하고, 아니면 그 경쟁에서 일찌감치 밀려서 집중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다른 일은 허락하지 않는 사회는 그리하여 그들을 게으르고, 몸은 비대하지만 한 가지 일도 제대로 끝까지 완성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무능자로, 페스탈로치가 말한 대로, 정확성도 없고, 어떤 일을 끝까지 마무리한 참을성과 인내심도 없으며, 어려운 일을 처리해내는 영리함이나 민첩성과도 거리가 먼 무능력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 아이들의 절실한 관심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교육은 그 최종목표인 도덕성도 키워줄 수가 없는 것이다. 도덕교육은 그저 책을 통해서, 머리로 실행과는 동떨어져서 시험이나 치는 것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요사이 한국 교육에서는 ‘인성교육진흥법’까지 만들면서 다시 인성교육을 강조하지만, 인성교육은 페스탈로치가 말한 대로 그 아이들의 가장 절실한 필요물과 관심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관심들을 이용해서 몸과 마음과 정신이 함께 사용되어질 때 자연스럽게 가능해지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오늘의 청소년들은 너무나 오랜 시간을 그들의 관심사로부터 격리 당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들의 소망과 관심을 스스로 건강한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악한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원함을 채울 수 있는 길을 찾거나, 아니면 몸도 훨씬 약한 부모가 모든 책임을 감당하느라고 등골이 휘고, 아이들은 모든 의무와 노동으로부터 제외되면서, 그러나 그 대가로 그들의 머리와 마음과 몸은 녹슬어간다.
페스탈로치는 당시 부모를 잃고 버려지거나 하는 일이 없이 떠돌면서 그들이 원래적으로 가졌던 노동력과 정신과 마음의 힘을 모두 묻어 두고 망가뜨리면서 사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들을 수용해서 단순히 먹여주고 은혜를 베푸는 차원에서만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정확하고 근면하며, 검소하고 청결하며, 계획성이 있으며, 서로 협동하는 노동과 가정의 삶을 경험하게 됨으로써 그들 각자를 그러한 독립적이며 도덕적인 인간으로 키우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 시대 우리 부모들도 공부와 학교라는 명목으로 아이들에게 단지 은혜만 베푸는 독지가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그것이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목이지만 그러면서 오히려 아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삶의 근본적인 힘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편에서는 아이들이 이제 오늘날 우리 시대에 더 이상 억누르거나 부인만 할 수 없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밤거리를 헤매고 다니고, ‘카드빚’과 ‘다단계판매’ 등의 수렁에 빠져서 절망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예전의 방식으로만 묶어두려고 한다. 그들에게 어떤 것이 진정한 도움인지를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늘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한국 교육이 지금의 배우는 방식을 전면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예전 페스탈로치가 당시 가난한 아이들이 미래에는 그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롭게 도래하는 산업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농업과 산업을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교육방식을 바꾸려고 한 정신을 오늘 우리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의 그는 아직 프랑스 대혁명을 겪기 전이었다. 그래서 사회 구조와 정치적 개혁의 의미를 아직 충실히 반영할 수 없는 시점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젊은 세대의 교육개혁은 어떤 정치적 혁명도 무시할 수 없는 우리 삶의 진정한 변화를 위한 기초가 됨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 촛불집회를 나오는 청소년들도 탄핵 이후 자신들의 삶과 자신들의 교실과 자신들의 직업세계도 진정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오늘 우리 시대 욕망은 크게 부추겨져 있지만,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건전한 노동의 길이 모두 차단된 우리의 아이들과 청소년이 나는 오늘 우리 시대의 빈민아동들이고 고아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은선 (세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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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법적 정의와 시적 정의의 통섭에 대하여
기사승인 2017.01.19 10:5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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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대와 페스탈로치(4) - 페스탈로치의 <입법과 신생아 살해>
시작하는 말
오늘 2016년 10월부터 본격화된 대한민국 촛불정국의 현실은 여전히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미궁과 혼동 속에 놓여있다. 특검의 수사가 진행될수록 최순실을 비롯한 비선실세들과 그와 함께한 부역자들의 국정농간이 어느 정도였는지가 속속 드러나면서 심지어는 사드배치나 일본군위안부 협상에까지 그들이 개입했다고 하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취임초기부터 그전의 이명박 정부가 무색할 정도로 법과 정의, 공정을 내세우며 그를 통한 민생회복을 거론하더니 그 속의 실상은 거의 반대수준이다. 우리 시대의 많은 비참과 비인간적 현실이 바로 이러한 정치와 법질서의 훼손과 깊이 관련이 있고, 거기서 기득권자와 지도자층의 부패와 탐욕이 끝모르게 진행되어 왔으니 우리 시대는 그래서 다시 올바른 입법을 요청한다.
자신들은 드러나지 않게 온갖 방식으로 법을 농락하지만 그런 정부와 특권층일수록 겉으로는 법의 수호를 강조하고, 그들의 법 정신은 점점 더 신화적으로 굳어진다. 온갖 편의주의와 기계적 제재와 규칙으로 굳어져버린 서구 근대 관료주의의 폐해는 그 이후의 일이지만 페스탈로치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 구제도 사회가 어느 정도로 내적으로 부패했고, 거기서 어떻게 법의 경직과 훼손으로 민중들의 삶이 비참과 파멸로 내몰렸는지를 밝힌다. 그의 「입법과 신생아살해, 1783」라는 작품이 그것이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도 온통 우리의 담론을 채우고 있는 것이 특검, 검찰조사, 헌법재판소 등, 온통 법과 관련된 것이므로 페스탈로치가 이 작품에서 진정한 법 정신과 법 정의가 무엇이고, 어떻게 새로운 입법을 통해서 당시 유럽사회의 구원을 찾았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의미 있다.
지난 연말의 한 일간지에 한 법학교수의 『법정에 선 문학』이라는 책이 소개되면서 거기서 등장하는 ‘시적 정의’와 ‘법적 정의’란 말이 다시 회자되었다. 시적 정의란 말은 원래 미국의 여성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 Nussbaum)의 『시적 정의-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이라는 책에서 깊이 있게 성찰된 언어인데, 그녀는 문학적 상상력과 시적 정의 감각이 결코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법관들이 더욱 더 진정성 있고, 깊이 있게 법 규정들을 해석하고 판정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문학적 상상력과 시적 정의, 그리고 법적 정의의 긴요한 관계를 밝히는 것인데, 이 관계에 대한 한 선배 여성신학자의 주목을 들으면서 나는 바로 페스탈로치의 이 작품을 떠올렸다.
중세의 처벌 도구
이번부터 삼 회에 걸쳐서 살펴보려고 하는 페스탈로치의 작품 「입법과 신생아 살해」는 1783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그 첫 출판의 표지에 『리엔하르트와 게르투르드(Lienhard und Gertrud, 1780)』 와 같은 저자에 의해서 쓰여진 글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페스탈로치는 이미 이 유럽 최초의 농민소설을 통해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신생아 살해’란 아기를 낳은 여성들이 자신의 손으로 아기를 죽이는 사건을 말하는데, 당시 이 비참한 범죄는 유럽 전역에서 빈번하게 발생하여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것으로써 계몽주의 유럽의 자존심은 심한 타격을 입었고, 그래서 괴테를 비롯한 지성인들이 이 문제를 다루면서 해결을 모색하려고 했다. 독일의 한 휴머니스트는 ‘어떻게 풍기를 문란하게 하지 않으면서 신생아살해를 방지하는 최선책을 구할 수 있겠는가?’ 라는 현상 논문공모를 시행하였다. 당시 급진적인 사회 변동의 와중에서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신세대들의 고통에 함께 하려는 것이 자신 삶의 탐색이었던 페스탈로치에게 있어서 이 주제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글은 원래 그 논문공모를 염두에 두고 시작된 것이라고 하나 글이 진행되면서 그 범위를 훨씬 넘었다.
이 글의 제목대로 페스탈로치는 국가 입법과 법철학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서 혁명적인 법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고통과 비참에 빠진 가난한 여성들의 편에 서서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한국 페스탈로치 연구가 김정환 교수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법학 분야에서 이 논문이 깊게 다루어져서 근대 법정신의 발달에 있어서도 페스탈로치가 어떻게 기여했는지가 연구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과거 응징적인 차원이나 격리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법집행이 아니라 교육적이고 선도적인 차원의 법집행을 주창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법집행이야말로 인간법이 지향해야하는 참된 목표라는 것을 밝혀주었다는 점이다.
당시 유럽은 계몽주의가 활짝 꽃을 피우던 시기였고, 그래서 자신들의 시대를 ‘새시대(Neuzeit)'라고 하면서 인류 진화의 역사상 가장 최선봉에 있는 시기로 자신하던 때였다. 그런데 그 시기에 여성들이 아기를 낳자마나 자신들의 손으로 죽이고, 또 그 일이 발각되면 예외 없이 그 여성들을 교수형에 처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이래도 계몽된 사회인가를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비참한 일들이 왜 일어나고 있으며, 거기서 진정한 범인은 누구이며,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들을 막을 수 있는가를 탐색한 것이 페스탈로치의 『입법과 신생아 살해』이다. 그는 당시의 여러 법정의 사례들을 수집했고, 여성들의 육성을 직접 들려주려고 노력했으며, 그 가운데서 독자들의 인간애에 호소했다.
‘신생아 살해’-어떻게 이해하면 좋은가?
“신생아 살해! 내가 꿈을 꾸고 있는가? 그것이 가능한가? 진짜 일어났는가? ... 이 시대여, 당신의 얼굴을 가리시오! 유럽이여 고개를 숙이시오! 당신의 법정으로부터 들립니다. 수천의 나의 아이들이 그들을 낳아준 어머니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있다고. ... ”(KA9:7)1)
이러한 절규와 더불어 시작하는 페스탈로치는 유럽으로 하여금 무엇이 그녀의 산모들을 자신 아이들의 살인자로 만드는지를 묻는다. 출산의 그 순간에 손을 뻗어서 아이들을 죽이다니! 그러한 일은 결코 제정신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 가슴속의 깊은 절망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그 절망이 오는가? 페스탈로치는 외치기를,
“너의 칼을 다시 꼽아 넣어라, 유럽이여. 네가 그녀들을 사형시킨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깊은 절망의 분노 없이 어느 소녀가 자신의 아이를 죽일 것이며, 그렇게 되었을 때는 이미 너의 칼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KA 9:8)
페스탈로치는 유럽이 이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여성들을 잡아서 교수형 시키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선포한다. 오히려 그녀들의 절망의 근원을 찾아서 그것을 치유하지 않으면 결코 아이들을 구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해서 그녀들이 이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게 되었는지, 결코 그녀들이 악해서, 계획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거의 제정신을 잃은 상황에서 행한 일임을 그려낸다. 당시 유럽은 근대 산업문명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고, 전통의 농촌문화가 해체되면서 가난한 농촌의 젊은이들이 도시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특히 여성들은 도시귀족의 가정에서 식모살이 등을 하면서 그 집주인이나 군인들, 대학생 등 남성들의 욕망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당시는 결혼하지 않고 임신한 여성들의 출산이 가정적으로, 국가 사회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극히 터부시되던 때이므로 이들의 비참은 극심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 한 남성을 믿고서 잠자리를 같이 하여 임신을 했지만 그 남성은 도망가 버리고 여성은 절망 가운데 홀로 남겨졌을 때, 그녀는 당시의 상황에서 임신한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하고 극심한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지낸다. 그러다가 시간은 점점 가서 어느 순간 해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면서 거의 제정신을 잃고 살인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임신의 열 달을 고통 속에서 홀로 보냈으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하는 끝없는 방황 속에서 완전히 지쳐버렸고, 그렇게 철저히 무기력하게 만드는 절망은 바로 갓 태어난 아기를 죽이는 발작으로 표현된다고 페스탈로치는 그리고 있다.
따라서 페스탈로치에 의하면 여기서 살인을 한 것은 그녀가 아니고 그녀의 절망이며, 그녀가 절망한 것은 도망간 남자를 믿었기 때문이고, 그러나 그녀가 얻은 배신과 모든 선한 것들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결국 살인을 저지르게 했다고 밝힌다. 페스탈로치는 당시 유럽에서 풍기범에 대한 국가의 처벌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그려주고 있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에서는 그 이전까지 교회가 담당하던 풍기에 대한 컨트롤을 국가가 맡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오늘날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의 개인에 대한 폭력과 간섭은 심했다. 당시 남녀들은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성관계를 가진 것이 발각되면 잡혀가게 된다. 거기서 상당한 액수의 벌금을 물어야 하는데, 식모살이를 하던 농촌출신의 가난한 여성들은 그것을 감당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들은 목에 종이 달린 채 거리에 끌려 다니며 자신의 몸으로 거리를 청소해야 하고, 그때 사람들은 그녀에게 오물을 던지고, 계란을 던지며 조롱하고 마침내 감옥에 갇히게 된다고 한다(KA 9:14).
페스탈로찌에 따르면 이러한 끔찍한 벌이야말로 영아살해를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장한다. 남성들보다 훨씬 더 불리한 처지에 있는 여성들에게 똑 같이 벌금을 매기고, 이런 잔인한 법으로 국가가 대응하기 때문에 오히려 여기서 여성들은 더욱 절망하고, 자신 속에 가지고 있던 모든 희망과 인간 선함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극단으로 가게 된다고 지적한다. 페스탈로치는 이 시대의 이러한 풍속을 기만적인 가식이라고 비판하고, 겉으로는 윤리와 도덕을 중시하는 것 같지만 속은 교만과 이기심에 가득 차서 국가가 오히려 공공법으로 범죄를 조장하고 착취하는 모양이라고 역설한다.
‘신생아 살해’의 원인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해 던지는 두 가지 전제적 질문
이상에서처럼 당시 풍기를 범했을 경우 가해지는 처벌의 가혹함을 설명한 페스탈로치는 이것을 피하기 위해 영아살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한 여성들을 매우 동정한다. 그러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이 범죄의 원인을 파헤쳐 들어가기 전에 다음의 두 가지 전제적 질문을 던진다. 첫째, 모든 임신한 소녀들의 궁극적인 목적인 그들의 치욕을 가리고, 아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그 자체로 악한 것이고 나쁜 것인가 라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 페스탈로치는 다시 두 가지 시각에서 대답을 시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즉, 결혼하지 않고 임신한 소녀들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향하는 것인가를 물을 때, 페스탈로치는 이 소녀들이 그들의 치욕을 가리고 아이로부터 벗어나고자 소망하는 것 자체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으로서 자신들의 행위가 밝혀지게 되면 앞으로의 모든 사회적인 삶과 행복, 결혼 생활 등이 물거품이 되는데 어떻게 그것을 거기서부터 벗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 속에, 특히 여성들의 마음 속에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성적 치욕에 대한 혐오와 아버지 없는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은 마음이란 바로 인간 자연의 현실적인 요청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들을 살인에로 이끈 것이다. 만약에 당시의 풍기법이 그렇게 혹독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녀들은 그렇게 절망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살인에 대한 공포, 피 앞에서 떠는 여인의 떨림, 이 비참 속에서도 완전히 꺼지지 않은 어머니 마음, 이런 것들이 만약에 조금만 상황이 좋았더라면 그녀들을 살인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페스탈로치는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급진적인 질문을 국가와 사회에 던진다. 즉, 이렇게 국가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아기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금지하는 것이 과연 옳은 행위인가 하는 것이다.
페스탈로치의 대답은 결단코 ‘아니오’이다. 국가가 좋은 법을 통해서 풍속을 정화하고 신장시키는 일은 해야 하지만 풍기죄를 여성들의 공개적인 참회를 통해서, 영아살해를 그 절망 가운데서 행한 소녀들을 처형함을 통해서 다스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국가가 결혼하기 전에는 아이들을 절대로 가져서는 안된다고 법으로 정했다면 아이들로부터 벗어나려고 살인을 행한 그녀들의 행위란 바로 법을 지키기 위한 준법 행위였고, 그런 의미에서 국가는 같이 살인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녀를 절망 가운데 빠뜨리고 도망간 남성이 바로 마찬가지로 살인자이듯이.
페스탈로치는 이 살인이 발생하게 된 처음 시작인 결혼하지 않은 사람의 동침이란 결코 국가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로서는 가지기 어려운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다. 그는 성장한 사람들의 같이 자고 싶다는 몸의 요구를 자연스럽게 인정하라고 요청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결혼하지 않고서는 같이 잘 수 없고, 아기를 가질 수 없다고 금하는 국가의 법이야말로 영아살해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법을 어겼을 때 소녀는 앞으로의 모든 삶의 안식과 존엄, 즐거움을 박탈당하는데, 어떻게 이 불행을 막으려고 발버둥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녀가 궁지에서 행한 일종의 “정당방위(Selbstverteidigung and Notwehr)"이고, 그녀의 행동은 그렇게 큰 위기와 절망 가운데서 행한 난센스이지 살인이 아니라고 대변한다(KA 9:32).
이어서 페스탈로치는 아주 생생하고 리얼하게 그녀의 해산의 진통이 시작되는 시각부터 갓 태어난 아기를 죽이기까지 겪었을 단말마의 고통을 그림처럼 그려주고 있다. 얼마나 그녀는 스스로가 분해되어버리기를 바랬으며, 자신이 태양을 본 날을 저주했고, 간절히 구원을 바랐던가! 그런 가운데서 그녀는 미쳐갔고, 절대로 아이를 가져서는 안되었기에, 그래서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버린 아기를 스스로의 손으로 제거했다는 것이다.
페스탈로찌가 전제 물음으로 묻는 두 번째 질문은 만약에 위의 결혼하지 않고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치욕을 덮고, 아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갖는다면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해가 되는가 라는 것이다. 이 목적을 이루도록 도와주지 않아서 영아살해가 줄을 이었다면 이것을 도와주는 것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라는 지적이다. 페스탈로치는 그러한 처지에 빠진 여성들에게 도움의 손길과 조언을 주지 않으면서 단지 창피만 주고 몰아칠 때 결국 그녀들의 절망은 영아살해를 부르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래서 당시 경직된 풍기 법원의 판사, 경직된 법률가, 영아 살해의 소식을 듣고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기만 하는 교회의 성직자들, 그리고 그런 그녀들에 대해서 더욱 나쁜 소문만을 퍼뜨리고 욕하는 모든 제삼자들이야말로 이 끔찍한 일에 같이 동조한 사람들이라고 비판한다.
그렇게 약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 절망으로 내모는 법이란 결코 인간의 필요에 부응하는 법이 아니며, 또한 인간의 자연에 부응하는 법도 아니라는 것이 페스탈로치의 법 정의이다. 반대로 모든 선한 입법이란 인간의 진정한 필요에 도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그래서 법이 진정으로 영아살해를 방지하기를 원한다면 이 불행한 여성들로 하여금 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고, 그들의 슬픈 일들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역설이다. 즉, 국가가 그 아버지 없는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주어야 하며, 보호해 주고 자랄 곳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화려한 고아원을 세운다거나 공공탁아소를 세우라는 것이 아니라 농촌의 건강한 보통 가정들을 찾아서 아이를 위탁하고 키울 수 있게 하고, 또한 임신한 소녀들이 드러나지 않고 해산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하여 처벌의 위험 없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KA 9:42). 페스탈로치 입법의 진정한 실용주의와 인간주의를 다시 한 번 잘 볼 수 있는 장면이고, 지금부터 거의 3백여 년 전의 그의 법의식이 어느 정도로 앞서 갔는지를 잘 알려주는 모습이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도 해외입양이 재고되고 있고, 미혼모가 자신의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권리가 더욱 강조되며, 또한 어떻게든 한 인간의 처음 성장을 관료주의적으로 운영되는 공공탁아소가 아니라 작고 친밀한 가족적인 분위기와 반경 속에서 이루어주려는 혜안을 여기서 본다. (다음 호에 계속)
*각주 설명 1) Pestalozzi Saemtliche Werke (Kritische Ausgabe) Band 9.
이은선 (세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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