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09

[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禪까지] 선종의 수행론-능가경의 수행론⑪집일체법품(集一切法品)2 - 불교신문

[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禪까지] 선종의 수행론-능가경의 수행론⑪집일체법품(集一切法品)2 - 불교신문

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禪까지] <125> 
선종의 수행론-능가경의 수행론
⑪집일체법품(集一切法品)2
등현스님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장
승인 2021.09.20 

“보이는 모든 경계가 환상”

모든 경계 ‘자기마음’임을 알면
분별, 욕계 색계 무색계 괴로움
무명 갈애 업의 인연 모두 소멸
등현스님


“또한 대혜여! 보이는 모든 경계가 환상이며,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임을 알면, 허망한 분별과,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괴로움, 그리고 무명ㆍ갈애ㆍ업의 인연이 모두 소멸하리라.”

이것이 능가선의 핵심 키워드이다. 보이는 경계가 있으므로 ‘대상에 대한 분별식(vastu prativikalpa vijñānaṃ)’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보이는 경계는 알라야식 또는 요별식(khyātivijñānaṃ)이 투사하여 만들어진 경계 즉 가상의 세계라는 것이다. 요컨대 이 세상에 살면서 경험하는 괴로움과 즐거움, 사랑과 미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만남이 모두 마음에 형성된 프로그램의 투사물이며, 가상의 세계라는 것을 깨달으면, 일체의 분별을 쉴 수가 있고, 더 나아가서 삼계의 모든 괴로움과 연기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이 형성된 프로그램을 알라야식 또는 요별식이라고 하며, 상분을 보는 견분이기도 하다. 이것은 또 다른 말로 아바타르(avatāra)라고 한다. 아바타르는 분신 또는 화신을 말한다. 경험되는 모든 세계나 자아는 알라야식의 분신 또는 화신이기에 세계와 나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즉, 내가 괴롭거나 즐거운 것이 아니고 아바타가 괴롭거나 즐거운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그것들을 자각하는 상태, 즉 관찰자(견분)만이 실재하는 것이다.


비록 경계가 가상의 세계라 할지라도 그로 인하여 전오식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전오식이 마음에 의해 인식되고 분별되면 제6식이고, 분별한 내용물을 나의 것으로 집착하면 제7 아애식이 된다. 이 모두를 ‘대상을 분별하는 식’이라 한다. ‘대상을 분별하는 식’은 경계를 분별함과 무시 이래로 망상이 훈습된 습기가 원인이 된다. 이 ‘대상을 분별하는 식’들은 분별이 끝난 후에 모두 잠재의식에 낙사하고, 그 모여진 식들이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형성시켜 대상들을 투사시키고, 대상을 요별하는 관찰자(견분)가 되는데, 이를 요별식(khyātivijñānaṃ) 또는 제8 알라야식이라 한다. 마치 깨끗한 거울 속에 모든 사물이 비치듯이 요별식 또한 모든 상을 보는 능력이 있다.

‘대상을 분별하는 식’과 ‘요별식’은 다르다. 그것은 수상행과 식의 차이이다. 전자는 느낌, 판단, 욕망과 같이하는 것이고, 후자는 단지 아는 작용을 하는 것이기에 요별식 또는 견분이라 한다. 전오식은 표상을 받고 제6식은 판단 작용을 하므로 모두 상에 포함된다. 견분을 나라고 집착하는 것이 아애식이므로, 제7식은 행의 분류에 들어간다. 그 요별식은 시작을 알 수 없는 오래전부터의 대상에 대한 분별식인 전오식과 6, 7식들이 낙사하여 변하고 훈습한 것들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것이다. 이 시리얼이 계속 반복되는 것을 윤회라 한다.

이처럼 식은 크게 ‘대상을 분별하는 식’요별식의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인식이 발생할 때 전자는 상분으로 후자는 견분으로 나뉘게 되는데 이를 전상(轉相)이라 한다. 전상이란 업상(業相)에 의지하여 전변하며 관찰자(見分)와 대상(相分)을 이루어 칠전식(七轉識, 전상의 見分을 我로 인지함)을 생하는 것을 말한다. 업상이란 알라야식의 프로그램이 작동하기 시작할 때를 말한다. 경(經)은 이렇게 말한다. “업상이란 근본 무명의 바람이 고요함에서 움직임을 일으키는데, 이 움직임이 곧 업상으로서 아뢰야식의 극미세상(極微細相)이다.”

이 세 가지 즉 업상, 전상, 진상을 합하여 알라야식의 삼세(三細)작용이라고 하고, 제8 알라야식의 프로그램이 깨끗하게 제거된 바탕을 여래장이라고 한다. 그 여래장이 따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허무주의에 빠질 것을 우려하여 여래장이라 이름한다. 그리고 그것을 진상(眞相)이라 하는 것이다. 참된 모양이라 하는 이유는 그 상태가 부증불감이어서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 “진상이란 여래장심이 일체처에 있으면서 물들지 않고 그 성(性)이 스스로 자재신해(自在神解)함이며…”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신문3684호/2021년9월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