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08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나를 알고 또 남을 안다면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나를 알고 또 남을 안다면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나를 알고 또 남을 안다면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2.04.05 13:48  수정 2022.04.05 13:5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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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대 명예교수

[금강일보] 우리 누구나 다 아는 말, ‘나를 알고 적을 안다면 백번 싸워서 백번 이긴다’는 말을 나오게 한 더 깊은 말이 있다. 백번 싸워서 백번 이긴들 뭐하겠는가? 이제까지 그런 싸움은 어디에도 없었다. 밀물과 썰물이 일고 쓸 듯이 싸움이라는 것도 이리 밀리고 저리 쓸리면서 역사를 지어왔다. 항상 이기는 싸움도 없었고, 항상 지기만 하는 싸움도 없었다. 무기를 들고 서로 죽이고 부수는 전쟁도 그러했고, 소위 선거전이란 것도 그랬다. 그렇게 지루하게 밀리고 미는 전쟁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냥 민초들이었다. 풀들이요, 나무들이요, 짐승들이요, 땅이요, 물이요, ‘혹시나’ 하는 맘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사는 그냥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온 더 깊은 말을 생각해본다. ‘남을 아는 것을 지혜[智]라 하고, 자기를 아는 것을 현명[明]하다’고 하고, ‘남을 이기는 것을 힘이 있다[力]고 하고,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건하다[强]’고 한다는 말을 깊이 생각해 본다. 전쟁에서 이긴 사람들 중에서 자기를 이기지 못하여 낭패를 본 사례들은 우리 역사에서, 일상생활에서 무수히 많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남은 누구이고, 나는 누구일까? 남을 어떻게 알고 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남이나 나는 다 같은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지만,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잠자리를 가지고, 같은 시대를 호흡하지만, 굉장히 다른 것과 같은 것을 동시에 가진다. 그런 남을 어떻게 알고, 그런 나를 나는 또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는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경험했지만, 나는 그들을 참으로 모르겠다. 같이 일을 했던 동료들을 모르겠고, 오래도록 학교를 같이 다니고 동무로 살았지만 모르겠고, 한 식구로 오래도록 살았지만 모르겠고, 뜻을 같이 한다고 많은 일들을 함께 했지만 어느 순간 ‘아, 나는 저 사람을 모르겠구나’ 하는 탄식이 나올 때가 있다. 물론 그에게 남이었던 나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에게도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구나 탄식할 때가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남을 알기를 힘쓰지 않기로 했다. 그냥 깊이 알지 말자는 맘이 많이 들었다. 약은 생각이지. 사람을 알고 믿어서 손해 보아 맘고생, 몸고생을 하지 않겠다는 약은 맘이지. 그러나 그것보다 더 깊은 데서 솟아나는 한 맘이 있다. 그 사람을 이해하고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보자는 맘이다. 내 맘 같아서는 참말을 하는 이라면 그것을 참으로 받고, 거짓말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는 그를 참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러니까 보고 듣고 만나는 그 순간 그를 온통 그 모습으로 받아들이자는 그 맘으로 살고 싶단 말이다. 모든 사람은 다 그 자체로 그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꾸밈은 꾸밈으로 그의 참모습을 나타내고, 솔직은 솔직으로 그의 참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것이 참이라거나 거짓이라고 밝혀지더라도, 그 때 그것이 참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알면 상심할 것도 없고, 기뻐할 것도 없이 그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나는 나를 어떻게 알까 하는 점이다. 나는 어디에서 나왔으며, 어떤 음식, 물, 공기를 마시고 살았으며, 어떤 사람들 틈새에서 살았고, 어떤 생각과 사상과 도덕과 윤리와 정치상황을 맛보며 살았고, 어떤 것들을 읽고 듣고 보고 기대하면서 살았을까? 그리고 지금은 어떤 사람들과 동무가 되어 살고, 어떤 생각과 사상을 좋고 나쁘다고 평가하면서 살며, 어떤 사람으로 어떤 사회에서 살기를 희망하는 것일까? 누구들과 어떤 놀이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지낼까? 그렇게 사는 나는 정말로 나일까? 겉으로 나타나는 그런 것들을 알면 곧 나 자신을 아는 것이 되는 것일까?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 어디를 가나 감시카메라가 있어서 나의 움직임을 다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을 분석하면 나라는 것이 밝혀질까? 그렇게 밝혀진 나는 정말로 나일까? 내가 지금 사는 것은 나를 사는 것인데, 그런 나를 왜 알고 싶어 할까? 그런 나를 관찰하고 탐구할만큼 나는 귀한 존재인가? 그렇게 하여 내가 귀한 존재라고 판명이 되면 기분이 좋고, 그렇지 않다고 밝혀지면 우울한 기분으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 거기에서 내가 존귀하다는 것은 또 무엇이며, 하잘 것 없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나를 귀하게 보는 것과 하찮은 것으로 보는 그 실체는 무엇일까?

여기서 실체라는 것, 실재라는 것은 내가 영원히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닐까? 내 속에 있는 변하는 것 속에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고, 불타는 것 속에서도 타지 않고, 사라지는 것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것, 그것을 나는 잡고 살고 싶다. 나를 안다는 것, 그것은 바로 이런 겉의 사람인 내 속에 그런 영원을 지향하는, 영원 자체인 보석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렇게 알아서 그것을 따라 귀하게 사는가 아닌가를 아는 것이 나를 아는 것일까? 나를 그렇게 안다면, 남도 그렇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고요히 고요히, 이 조금도 가만 두지 않는 소음 속에서 고요히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좋겠다. 그렇게 되면 검찰개혁을 마무리한다느니, 집무실을 옮긴다느니 하는 것들의 껍데기를 통과하여 보이는 참의 자리에서 나오는 속소리가 말하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소리를 듣고 움직일 때, 속사람 나와 겉사람 나는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하나 된 나를 아는 것, 아니 하나 된 나로 살아가도록 나를 추동하는 것을 따라 살겠다고 꿈틀거리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나를 아는 것일까? 살짝, 나는 정치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살아보자고 제안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