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사회주의 산책 - 새로운 역사를 향한 우리의 성서 읽기
이덕주 (지은이)홍성사2011-08-31
240쪽
책소개
<한국 교회 처음 이야기>, <한국 교회 처음 여성들>로 순수했던 초기 교회의 ‘처음 사랑’을 말했던 이덕주 교수가 이번에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을 펴냈다. 한국 교회사를 가르치는 저자가, 더구나 사회주의자도 아닌 그가 어떠한 연유로 이런 제목의 책을 펴내게 되었을까.
저자는 세 번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면서 통일과 통일 이후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우리의 현실을 절감하고, 교계와 신학계에서 무언가 해야겠다는 의무감으로 ‘통일 이후 한반도 신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무조건 사회주의를 거부하고 배척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서로를 인정하고 대화하기 위해 먼저 성서를 사회주의적인 관점에서 읽어 보려는 시도를 한다.
이런 작업을 통해 출애굽기의 만나 이야기, 레위기의 안식년·희년 사상, 예수님의 천국 비유 등에 균등 분배를 실현하려는 사회주의적 이상이 담겨 있음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통일 이후 새로운 시대 우리의 성서 읽기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하게 한다.
오늘날 안팎으로 비판에 처해 있는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경쟁과 지배’의 자본주의 논리가 아니라 ‘나눔과 섬김’의 기독교 사회주의의 원리임을, 이전과는 ‘다른’ 관점의 성서 해석과 우리 옛 선조들의 문화를 통해 역설한다.
목차
여는 글: 낯설고 다른 것과 함께
1. 이제기독교 사회주의를 말하렵니다
2. 기독교 자본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3. 기독교 사회주의는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가?
4. 만나 공동체, 나눔의 신비
5. 까치밥과 안식년 평화 공동체
6. 땅따먹기와 희년 공동체
7. 시?한 역사, 그러나 버릴 수 없는 꿈
8. 땅에 쌍을 것인가, 하늘에 쌓을 것인가?
9. 낙타도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다
10. 나눔과 섬김의 성만찬 공동체
11. 오순절 성령 공동체
12.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리며
닫는 글: 선한 사마리안인의 사랑으로
저자 및 역자소개
이덕주 (지은이)
감리교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로 한국교회사와 아시아교회사를 강의하다가 2018년 정년 은퇴한 후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며 성경 읽기와 묵상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국 교회 처음 이야기》, 《한국 교회 처음 여성들》,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 《팔복: 이덕주의 산상팔복 이야기》(이상 홍성사), 《이덕주 교수가 쉽게 쓴 한국 교회 이야기》, 《한국 영성 새로 보기》(이상 신앙과지성사) 외에 다수의 책과 논문을 썼다.
최근작 : <깨달음은 더디 온다>,<영의 사람 로버트 하디>,<이덕주의 산상팔복 이야기> … 총 53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저자 인터뷰
1. 감신대 한반도평화통일신학연구소 소장으로 계십니다. 어떻게 연구소 일을 시작하게 되셨는지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세 번 북한을 방문하면서 보고 느낀 것이 너무 긴박하고 강렬해서 만든 연구소입니다. 한마디로 “통일은 낭만이 아니고 현실이다”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통일은 거역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는 막상 통일과 그 이후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통일의 마지막 단계가 될 정신적?종교적 화해와 일치를 위해 교계와 신학계에서 뭔가 해야 할 것인데 그런 부분에서 전혀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확인하고 나부터라도 뭔가 해야겠다는 뜻으로 동료 교수들과 ‘통일 이후(post-unification) 한반도 신학’을 모색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한반도평화통일신학연구소는 그런 배경에서 설립한 것이고 매년 무크지 <통일 이후 신학 연구>를 내고 있습니다.
2. 한국 교회사를 가르치시는 교수님께서 이번에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을 발간하셨습니다. 어떤 계기로 이 글을 쓰시게 되었나요?
이것 역시, 세 차례 방북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실제로 북쪽에 가보니 말로만 들었던 사회주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고, 그것은 엄청난 충격과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남쪽 자본주의 체제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자란 나로서는 북쪽 사회주의 체제와 문화가 아주 낯설게, 그리고 거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현실이었습니다. 그걸 현실로 받아들일 때 대하는 방법은, 배척하고 타파하거나 대화하고 협력을 모색하는 것이겠지요. 저는 후자를 택한 것입니다.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서로 배치되고 이질적인 것이 많지만 상대방의 실재를 인정하고 대화하면서 공동선과 공유가치를 모색해보자는 것입니다. 다행히 이런 작업은 제가 처음 하는 것은 아니고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에서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이 있어왔고 지금도 많은 유럽의 사회복지 국가들이 이런 철학적, 신학적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정치 체제를 운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3. 기독교 사회주의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지금 한국 교회에 기독교 사회주의가 어떠한 의미를 줄 수 있을지요. 여전히 통일은 요원해 보이는데 ‘통일 이후 신학’이 분단된 한반도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요.
제가 말하는 기독교 사회주의는 마르크스나 레닌의 과학적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와 출발을 달리합니다. 공산주의가 물질과 인간에서 출발한다면 기독교 사회주의는 하나님과 성서에서 출발합니다. 성서와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많은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실현한 인류 사회’의 이론적 바탕을 기독교 사회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독교 사회주의를 ‘통일 이후’ 한반도 신학의 하나로서 그 가능성을 본 것은 첫째, 통일 과정이나 그 이후 (자본주의만 경험한 남쪽과 달리) 사회주의만 경험하고 사회주의 이론에 익숙한 북쪽 사람들과 대화를 해나갈 때 사회주의 개념을 갖고 대화를 시작하면 대화가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사회주의를 공동 관심사로 하고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지요.
둘째, 통일 이후 진정한 의미의 한반도 평화가 이루어지려면 북쪽 사람만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쪽 사람들도 변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자본주의 얼굴과 마음을 가지고 북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혼돈과 갈등을 일으킬 것입니다. 통일을 위해, 그리고 통일 이후를 위해 남쪽 사회, 특히 남쪽 기독교인들의 정신과 자세가 바뀌어야 합니다. ‘경쟁과 지배’의 자본주의 논리가 아닌 ‘나눔과 섬김’의 기독교 사회주의 논리로 나아갈 때 평화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4. 책에서 오순절 성령 공동체나 만나 공동체 등을 사회주의적인 관점으로 읽습니다. 또 땅따먹기며, 까치밥이며, 옛 초대 교인들의 문자적 성서 적용에서도 평등과 자발적 나눔에 대한 사회주의적 이상이 그려져 있는 것이 놀랍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경쟁과 협력’이라는 상반된 본능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속, 그리고 성서의 기록과 기독교 역사 속에는 자본주의적 요소와 사회주의적 요소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에는 자본주의에 유리한 대목도 있지만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자본주의 체제와 문화 속에 살아왔기 때문에 자본주의 논리로 성서를 읽고 기독교 역사를 서술하는 데 익숙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성서와 역사를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읽고 해석해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만 살던 사람들과 통일을 이야기하고 함께 살아가야 할 시대적 환경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과는 ‘다른’ 관점에서 성서를 읽어보자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동안 자본주의 쪽에서 읽었을 때 발견하지 못했던 말씀의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지금까지는 성서를 한쪽 눈은 감고 한쪽 눈으로만 본 것입니다. 이제 두 눈 모두 뜨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서에 담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깨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조상들의 옛 문화, 땅따먹기, 까치밥 같은 것도 그런 관점에서 해석한 것입니다. 우리 민족 역사와 문화 전통에도 사회주의적 나눔의 전통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지요.
5. 어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겠는지요?
세 부류의 독자가 있을 것 같습니다. 독자에 따라 이 책은 도발도 되고, 도전도 되고, 도움도 될 것입니다. 첫째, 과거의 전쟁 경험이나 주입식 반공교육에 의해 사회주의를 용서할 수 없는 적으로 여기고 불신과 증오감을 갖고 극보수 우익에 서 있는 분들에게 이 책은 도발이 될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제 이론이나 서술이 역겹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이런 분들과는 논쟁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서로 다른 생각과 삶을 상호 존중해 주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둘째, 자기 경험이나 이념의 포로가 되기보다 신앙이나 성서 전통에 보다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시는 분들, 성서와 기독교 역사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찾아 새로운 실험을 해보려는 분들, 이런 분들에게 이 책은 도전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 성서 읽기와 역사 해석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오늘 위기에 처한 한국 교회 현실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서 창조적 대안을 모색하는 분들,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한국 교회의 자본주의 논리와 문화를 극복하고 ‘모두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새로운 신앙공동체 문화를 추구하는 분들, 그리고 한반도에서 진정한 의미의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기도하며 현실에서 노력하시는 분들에게 이 책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도발이 되든, 도전이 되든, 도움이 되든, 이 책이 한국 교회의 본질 회복과 한반도 평화통일에 조금이라도 기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책 소개
1. 왜 기독교 사회주의를 말해야 하는가? - 하나 될 한반도를 위해 낯설지만 꺼내야 하는 이야기
70년 가까이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한반도,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분단된 이 나라에 교회는 책임이 없을까? 화평케 해야 할 교회가 분단의 현실 앞에, 그리고 분열된 한반도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저자의 물음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한반도가 이렇게 분단 상황이 된 것에는 교회의 책임도 있다. 화해와 평화를 추구해야 할 한국 교회 지도자들 중 많은 수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좌우 이데올로기 갈등 상황에서 편향적인 ‘보수 우익’ 입장을 취하면서 분단을 고착화하는 데 일조한 것이다. 이 뼈아픈 반성을 통해 앞으로 교회는 통일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저자는 그 해답을 찾는 중 기독교 사회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사실 ‘기독교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차치하고 그 용어부터가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다. 그것은 한국 교회사에서 그동안 기독교 사회주의가 어떤 위치였는지를 짐작게 한다. 1920-30년대에 등장한 사회주의에 대해 기독교계는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삼거나, 적그리스도 세력으로 인식하고 비판하거나,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 협력을 모색하거나, 이 세 가지 방법으로 대응했다. 이 중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 협력을 모색했던 부류는 소수이기에 한국 교회사에서 기독교 사회주의의 역사는 단편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또 미국식 자본주의 신학 교육과 사회주의를 적대시하는 분단 상황에서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기독교 사회주의는 개인의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보수 신학에 맞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진보적’ 신학으로서 역사적 맥을 이어왔다.
세 차례 평양을 다녀온 저자는 분단된 한반도에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 제3의 이념으로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쪽 모두 ‘연결되면서도 구분되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연구하게 되었고, 바로 그 기독교 사회주의에서 남과 북이 진정한 ‘하나 됨’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2. 성서, 사회주의 관점에서 읽다 - 새로운 역사를 향한 우리의 성서 읽기
기독교 사회주의를 연구하기 위해 저자는 우선 성서를 기독교 사회주의 관점에서 읽어 본다. 먼저 출애굽기 16장 17-18절의 만나 이야기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일 하루치의 만나를 내려 주셨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올 때 많이 거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둔 사람도 있었을 텐데,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많은 거둔 사람과 적게 거둔 사람의 소득 격차가 분명히 존재할 텐데 어떻게 부족함이 없이 모두 균등하게 배분되었을까? 이것은 ‘한 사람이 하루에 한 오멜’이라는 만나 규칙 때문이었다. 즉 더 많이 거둔 사람도 내일 또 하루치의 만나를 내려 주심을 믿고 얻은 물질을 즐거운 마음으로 ‘나누는’ 과정에서 균등한 분배가 이루어진 것이다. “한 사람이 한 오멜”이라는 균등과 평등이 만나 공동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또 레위기 25장 8-12절 희년 규례도 사회주의적인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안식년(제7년)을 일곱 번 지내고 난 다음 해, 즉 50년째 되는 해를 희년이라고 한다. 희년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자기 땅을 팔고 남의 집에 가서 종살이하던 사람들이 자기 땅을 되찾고 가족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희년 제도는 땅값의 산정 기준이 되어 희년과 가까워질수록 땅값은 싸진다. 땅을 파는 사람도 능력만 있으면 언제든 무를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하더라도 희년만 되면 땅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땅을 산 사람도 어차피 희년이 되면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기에 정도 이상의 땅을 얻고자 욕심 부리지 않는다. 결국 희년의 의미는 “가난한 자에겐 희망을, 부요한 자에겐 나눔을”인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며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잘 보여 주는 비유는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다. 이른 아침부터 온 사람이든 해 질 무렵 온 사람이든 포도원 주인은 똑같은 일당을 주었다. ‘일한 만큼 받는다’는 성과급을 원칙으로 삼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저자는 이것을 만나 공동체의 신약적 표현으로 간주한다. 만나 공동체에서 율법으로 이루어진 균등 분배가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한 사람이 한 오멜”과 같이 “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인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사회주의 관점으로 성서를 읽어 보려 한다. 이런 시도는 그동안 우리가 자본주의적으로만 성서를 대했던 것을 반성하고, 남과 북이 함께 성서를 읽을 통일의 날에 우리의 성서 읽기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하게 한다.
3. 부자와 가난한 자가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 - 포기할 수 없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비전
이렇듯 성서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비전이 제시된 구절들이 있다. 한 사람이 한 오멜을 갖는 만나 이야기, 가난한 자를 구제할 수 있는 희년 이야기, 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천국 이야기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에서 안식년이라든지 희년 규례가 그대로 구현된 적은 없다.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그런 이스라엘 공동체를 책망했다.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이유를 삶 속에서 빈민 구제와 빈곤 문제 해결을 외면했던 종교인들의 위선에서 찾았다. 그렇다면 멸망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예언자들은 이런 암울한 현실에서 메시아를 기다렸다. 사회를 공평하고 정의롭게 다스릴 통치자를 염원한 것이다. 이사야는 그 비전을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장면으로 묘사했다(사 11:6-9). 이것은 과연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일 뿐인가? 권력층과 부유층, 소외계층과 빈곤층의 공존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것을 실현할 법과 종교가 있었음에도 실패한 이스라엘을 보고도 가능하다 말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기독교 사회주의는 이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상극이지만, 이 둘이 공존과 협력을 이루어 나눔과 평화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꿈, 그 꿈은 사회주의 실험이 많은 실패를 거듭했음에도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 포기할 수 없는 바로 그 꿈인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포기할 수 없는 꿈과 일맥상통하다.
4. 사람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가능한 공동체 - 내 것을 나누고 먼저 희생하는 기독교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기독교가 언제부턴가 세상으로부터 비판을 듣고 있다. 저자는 그 원인이 세속적 자본주의 원리를 교회가 그대로 따라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개인의 자유와 물량적 성장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원리를 교회에 적용한 결과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했지만 그에 걸맞은 성숙이 뒤따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개인적 종교 자유’만 말하고 ‘사회적 책임’은 도외시하는 이기적 집단으로 비쳐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변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모습으로? 한국에 처음 들어온 복음, 초대교회 신앙인들의 삶의 모습이 그 답이 될 수 있겠다. 순수한 복음에 철저했던 초대교회 신앙으로 돌아가는 기독교, 그런 신학과 신앙을 저자는 기독교 사회주의라 부른다.
기독교 사회주의는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 공동체에서 그 근거와 가능성을 찾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신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니(눅 18:27)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에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함께 모여 기도를 드렸고, 마침내 약속했던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일어난 것이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으로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 4:32-35).
즉 물질의 공동 소유와 공동 사용, 공동 분배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 결과 공동체 안에는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없이 모두 균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성령이 임함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꿈꾼 메시아 공동체, 율법에 예시된 희년 공동체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수없이 시도하다 실패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이곳에서도 성령의 능력으로 같은 일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내 것을 즐거이 나누며 희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성령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기에 기독교 사회주의는 겸손히 성령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껏 법으로 제도로 균등 분배를 실현하려는 공산주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기독교 사회주의는 인간의 힘으로 이상 사회를 만들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철저히 낮아짐으로 희생의 본을 보이신 예수의 섬김의 정신으로, 그리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불가능한 명령을 가능으로 바꾸는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그러기에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성령을 구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겸손히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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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곧 공산주의의 길입니다.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병폐가 있지만 자본주의는 청교도 정신에서 나온 기독교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물건을 만들어 팔 때 손님에게 유익이 되고 돈을 벌어 하나님의 청지기가 될 수 있습니다.
센스킴 2020-06-08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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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 이덕주/ 홍성사
이 책을 집어든 된 이유
'기독교 사회주의'.
왠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만났다. 이 책의 제목을 보고 꺼내서는 안될 말을 꺼내기라도 한 듯,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왜일까. 한국에서, 특히 기독교권 내에서 '사회주의'라는 말이 갖는 정서나 의미가 단순하지 않은 것 같다. '사회주의=공산주의'로 인식되는 한국 상황에서,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 보는 사회주의와 기독교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기독교인이라면 대부분 혼란스럽고 의문스러울 것이다. 더군나나 이 책의 저자는, 사회운동이나 소위 좌파적 운동에 몸담았던 운동권 출신의 지식인이 아닌, 한국 교회의 초기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신학자가, 이런 책을? 여러가지 혼란과 의문, 호기심이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사실, 사회주의에 관해선 오랫동안 관심이 있었던 터였다. 내가 사회주의를 처음 접한 것은 학부시절 서양사학입문 수업에서였는데, 당시 사회주의의 전체 지형도를 개괄적으로 다뤘었다. 그 때 '사회주의=공산주의'의 공식을 처음으로 깰 수 있었다.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여러 사회주의 사상의 일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사회주의가 그리는 이상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이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 기독교 신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뤄야 할 지 혼란을 느끼기도 했다. 당시 학생선교단체에서 활동했는데, 소수였지만 이런 지적 이슈와 신앙의 문제를 고민하는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다. 기초적이나마 사회주의에 관한 서적을 읽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주의에 관해선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복잡한 마음이 있었다. 기독교 내의 사회참여 신학의 부재에 대한 갈증과 80년대 좌파운동에 대한 막연한 빚진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왜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나
그는 글의 서두에서 자신의 첫 신학적 과제로 '한국교회가 당면한 영적 위기와 권위 상실의 문제'의 이유로 '처음 사랑'을 버린 것에서 찾고, 한국 초대교회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위와 같은 저작을 펴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자신의 두번째 신학적 과제로 '민족 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들며, '반공주의'로 일관한 한국 교회가 현대사의 역사적 책임에 있어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지적한다. 역사 속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대화와 공존을 모색한 사례들을 연구하고 그 첫 결과물로서 자신의 저작을 소개한다.
그가 말하는 기독교 사회주의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대화를 종교적 차원에서 모색하려는 것이 기독교 사회주의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창조적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함으로 인권과 생산성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자점, 그리고 인간 사회에 피할 수 없는 소득 격차와 경제적 불균형을 제도적 분배구조를 통해 평등을 추구하려는 사회주의의 장점을 서로 조화시켜 모든 사람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제3의 이념과 체제를 모색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과 방법을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서 찾아보는 것이 역사적으로 기독교 사회주의를 모색했던 신학자들의 역할이었습니다." (p.29)
"기독교 사회주의는 '남을 배려하는' 기독교, 개인의 자유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독교, 모으는 것보다 '나누는 것'에 우선 가치를 두는 기독교를 지향합니다."(p.31)
사실 이것은 '기독교 사회주의'라기 보다는 원래 기독교의 모습이었는데, 자본주의적 질서 속에서 외면되고 잃어버린 기독교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편의상 그런 것들을 기독교 사회주의, 혹은 사회주의적 기독교로 표현한 것 같다. 이 책에서 이덕주 교수는 한국교회의 문제의 원인을 자본주의 질서에 무비판적으로 길들여진 기독교에 두고 있다.
"한국 교회의 부조리와 부정적인 현상의 원인을 물량적 성장주의 신학에서 찾는 학자들이 많습니다만 세속적 자본주의 원리를 교회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에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하겠습니다....교회의 양적 부흥과 성장은 이룩하였지만 그에 걸맞은 성숙이 뒤따르지 않아 정신적 연령이 낮은 거인이 된 형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개인적 종교의 자유만 말하고 사회적 책임은 도외시하는 이기적 집단으로 비치게 되었습니다."(p.30)
과학적 사회주의에 관해
그는 마르크스가 '공상적 사회주의'라 비판했던 것들에 다시 주목한다고 밝히면서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의 한계를 비판한다. 공산주의의 실패 앞에서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이지만, 과학적 사회주의의 역사적 의의를 쉽게 간과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사실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실험이 있었기에 자본주의 진형 안에서 복지국가로의 이행이 앞당겨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진영이 공산주의로 넘어갈 것을 염려하여, 자본주의를 수정하고 복지 정책 강화에 앞장선 것은, 이러한 이념적 대결 속에서 가능했다고 본다. 마치 종교개혁으로 인해 카톨릭에서 반동종교개혁이라하여 스스로 내부를 정화하는 운동이 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결국 기독교 내, 개인의 몫인가
기독교에서 출발하지만 대사회적으로 보편성을 갖는 '토지공개념' 같은 정책들의 예가 적어 아쉽다. 비록 '기독교 사회주의'지만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에게도 유효하고 사회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정책 제시가 필요한 것 같다. 또한 구약과 신약의 공동체들을 언급면서도 여전히 그 해결에 있어서는 개인의 신앙과 양심에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 '진보'라는 정신적 액세서리까지 향유하려는 강남 좌파에게, 자발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안일한 시각이 아닐까 싶다. 마르크스가 공상적 사회주의를 비판할 때와 동일한 비판을 피해가긴 어렵지 않을까? 사회주의적 실천의 동력을 기독교 내에만, 개인적 신앙에만 둘 것인가. 이 부분은 여전히 내게도 숙제요 의문이다.
이책의 미덕
어찌보면 이 책은 기독교 진보진영에서 볼 땐 충분히 '좌파적'이지 못하며, 보수기독교에서 볼 땐 덮어놓고 지나치게 '좌파적'이라고 몰아세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원래부터 사회적 책임의 전통이 있었던 성경'에 대한 교정적 시각을 제시한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본다. 한국 기독교가 자본주의에 무비판적이고 우파적인 상황에서, 구약의의 만나공동체, 희년공동체, 신약의 성만찬 공동체, 오순절 성령공동체의 맥락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조목조목 잘 드러내 주었다. 교회들이 잘 보지 않는 예언서들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들에 대해 제대로 짚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학샏하거나 강탈하거나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주지 아니하거나 우상에게 눈을 들거나 가증한 일을 행하거나 변리를 위하여 꾸어 주거나 이자를 받거나 할진대 그가 살겠느냐 결코 살지 못하리니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은즉 반드시 죽을지라. 에스겔 18장12-13절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면서 처음에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인데 어찌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교도에게 망하였는가?"이해할 수 없었던 백성들은 예언자들의 설명을 듣고 그 원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나' 산당을 세우고 우상을 숭배한 것도 큰 죄지만 그에 못지않게 '가난한 이웃으로부터 마음이 떠나' 빈곤 문제를 방치한 것도 큰 실수였습니다."(p.124)
모쪼록 이 책이 한국의 진지한 신앙인들에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화해시키는 시각을 제시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진정한 화해는 무엇보다 행동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좋은 게 좋은, 덥거나 차지도 않은, 적당한 물타기, 미지근한 양시론, 양비론은 화해일 수 없고 건설적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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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쟁이 2011-09-23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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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신앙... 새창으로 보기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반공교육'을 받았던 세대들에 있어서는 약간의 선입견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근간의 물질지상주의로 인한 도덕성의 결여와 빈부격차의 심화는 ‘자본주의’에 대한 맹신의 결과가 인간에게 그리 유익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이덕주 교수’에 대해서는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 알지 못하였다. 단지 ‘감리교신학’ 특성상 약간의 ‘진보주의적’이 경향이 있다는 정도와 이전에 ‘홍성사’에서 출간된 몇 가지 책이 있다는 정도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단점과 그 절충점에 대한 나의 시각을 정리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나의 삶에 대한 가치관 역시 다시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와 과학은 날로 발전되지만, 인간의 정신 수준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책은 사회에 만연된 ‘물질지상주의’로 향한 ‘양심지상주의’의 도전이라고 정의 내리고 싶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물질주의’와 ‘양심주의’의 ‘조화’harmony일 것이다.
지금 시대에 이러한 책을 펴낸 ‘홍성사’에게 감사드리며, 이와 같은 책이 더욱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 그래서 교회와 사회에 ‘그리스도의 정신’이 풍성하게 깃들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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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프라이 2011-09-30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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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회주의'통일시대를 준비하는 영적 에너지
사회적 성공, 부와 명예 성취 등 세상적인 가치들이 교회의 가치들이 된 시대다. 세상의 위계 피라미드에서 상층부에 있는 직업군의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도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높은 대접을 받는다.
교회에 들어온 세상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길'이 아닌 '황제의 길'을 걷도록 했다. 그래서 '신앙과 믿음 좋은 사람'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부와 명예를 쟁취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실패하신 것인가? 참수형을 당했다고 알려진 사도 바울은 실패자인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세상적 성공을 신앙의 수준과 등치시키는 행태는 '비성경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구별된 것'이라는 뜻이라고 볼 때, 오늘날의 교회에는 '거룩함'도 세상과의 '구별됨'도 찾아보기 힘들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양극화 현상이 지속되며 자본주의가 그 부작용을 심각하게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가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지, 성공을 말하며, 양극화를 부채질하는 것은 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많은 개선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 책의 제목은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이다. 사회주의가 '더불어 두루 함께 잘 사는 사회'를 건설하자고 하는 것이라고 할 때, 배려, 책임, 나눔, 섬김 등의 기독교 정신은 사회주의와 본질적으로 맥이 닿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공동소유 공동사용 공동분배'를 실천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은 이 같은 생각을 뒷받침해준다. 즉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담고 있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에 '기독교 사회주의'라는 개념과 이름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책에서 근대 유럽의 소위 혁명의 시대에 '기독교 사회주의'도 태동했다고 한다. 혁명의 시대에 혁명을 주도하기는커녕 혁명의 대상이 되어버린 교회에 대해 1848년 '이건 아니다!'라고 외치면서 대안 모색에 나섰던 일군의 신학자와 성직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자기보다 남을 배려하는 기독교, 개인의 자유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독교, 모으는 것보다 나누는 것에 우선 가치를 두는 기독교를 지향한다고 밝힌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 기독교 사회주의를 말하는 이유에 대해 통일 이후 한반도에서의 신학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와 통일을 지향하는 교회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같은 과정은 "새로운 역사를 창출할 영적 에너지가 오늘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밝힌 이 같은 이 책의 취지와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아울러 저자의 말대로 통일 이후 한반도를 준비하기 위해서도, '황제의 길'이 아닌 '그리스도의 길'을 가기 위해서도, 교회가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도, 길을 잃은 교회가 다시 복음 앞에 서기 위해서도,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은 매우 긍정적인 영적 자극을 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또한 후속 작업을 통해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해 한 걸음 더 진전된 책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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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life 2011-10-01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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